전쟁과 분단의 기억

  • 6·25 이후 현대사 족적… 동두천과 광명의 근대문화유산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0)]

    6·25 이후 현대사 족적… 동두천과 광명의 근대문화유산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0)] 지면기사

    주한미군 영향에 형성된 ‘문화유산 보고’ 경기도 파주, 임진각·캠프 그리브스 등 군사·위락시설 존재 동두천, 안흥교회·미군 7사단 기념관 사례 의미 깊어 가학광산서 관광지된 ‘광명동굴’… 美 아닌 일제 관련 화성 매향리 쿠니사격장·매향교회 미군 대표적 흔적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경기도 문화유산은 대부분 주한미군의 영향을 받았다. 미군이 머문 자리, 미군의 생활상이 담긴 거리, 미군과 관련한 상업활동 등으로 수십 년 동안 만들어진 흔적이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자연스럽게 경기 북부에 미군관련 문화유산이 다수 잔존한다.

  • 잊힌 문화유산 ‘열쇠’ 찾기… 잠겼던 역사의 문이 열리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1·끝)]

    잊힌 문화유산 ‘열쇠’ 찾기… 잠겼던 역사의 문이 열리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1·끝)] 지면기사

    독립운동가 얼 서린 항일유적, 도내 곳곳 산재 38도선은 대표적인 6·25 전쟁 분단 문화유산 일제 수탈 도구 터널·철도, 식민지 아픔 상기 고색창연한 문화유산이라고 하기엔 멋쩍지만 50·100년 지난 뒤 후손들은 과거 그려볼 수 있어 별것 아닌듯 보이는 근현대 문화유산 재조명 이유 근현대사로 한정하면 경기도 문화유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소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어진 분단 상황이다. 일제 강점기 지어진 교회 건물, 교회 터가 아직 경기도에 남아 있고 독립운동가들의 얼이 서린 항일유적도 도내 곳곳에 산재해 있다.

  • ‘큰별쌤’ 최태성 강사가 전해준 수원 3·1운동 의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9)]

    ‘큰별쌤’ 최태성 강사가 전해준 수원 3·1운동 의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9)] 지면기사

    “역사속 고독했던 패배자… 독립운동 숨은 영웅들 잊지 말자” 당시 조선서 손꼽히던 부자 남양주 이석영 독립운동에 3조 자산 소진 영양실조 숨져 안성·화성, 3·1운동 다른 지역보다 격렬 제암리 학살 비극… 스코필드 널리 알려 양평 출신 여운형, 총독부와 건준 협상 “조선 최고의 부호였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모두 팔고 결국 아사한 이석영 선생을 아십니까?”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은 남양주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을 만큼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남양주에서 시작해서 서울 동대문에 들어와야 이석영 선생의 땅이 끝난다고

  •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8)] 광복 - 한반도 가로지르는 포천·연천 38도선 표석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8)] 광복 - 한반도 가로지르는 포천·연천 38도선 표석 지면기사

    분단의 상처, 관광자원으로… ‘핫플 38도선’ 반전 스토리 포천 영중면 표석 뒤에 대공포 두 대 놓여 평화의 상징 비둘기·철모와 총 ‘38 조형물’ 헌화공간·산책로·휴게·레저 특화시설 추진 연천 마포리 ‘중부원점’ 빛의 기둥 힘찬 표현 합수머리 공원 인근에 한반도 통일미래센터 풋살대회 등 각종 청소년 위한 프로그램도 “해방이후 북위 38도선에 한반도 최초의 분단선이 그어졌다.” 38도선은 한반도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북위 38도 위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 무력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설치

  • 우리 근현대사 관통한 장벽없는 국경선 38도선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7)]

    우리 근현대사 관통한 장벽없는 국경선 38도선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7)] 지면기사

    호국 영웅들이 지킨 대한민국, 분단 아픔을 증언하다 현재 경기도 내부 존재 ‘상징적 유적’ 연천 초성리 ‘부서진 비석’ 모습 보존 인근 6·25전쟁 기념비 모여 공원형성 1977년 주한미군 철수 반대하다 전역한 싱글러브 장군 공적비도 설치돼 눈길 전쟁 그리고 분단.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두 가지 키워드를 설명하는 상징적인 유적이 경기도에 있다. 경기 북부 접경지역을 가로지르는 38도선이다. 지도 위 북위를 기준으로 남북을 가른 38도선은 북방 경계가 상승하며 경기도 안에 들어왔다. 38도선은 장벽이 없는 국경선이다. 넘어오지

  • 시민곁 70년, 의정부 미군기지… 함께 살아갈 '한 길' 열리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6)]

    시민곁 70년, 의정부 미군기지… 함께 살아갈 '한 길' 열리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6)] 지면기사

    '캠프레드클라우드' 관통 도로 개방 1953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전쟁·냉전 유산 전형적인 경기도 소재 '전쟁 문화 유산' 모습초기 건축물·용도 시설물 현재까지 다수 남아의정부 도시경관 한축… 유기적 기능도 의미근현대사적 중요성·활용도 고려 보존 방침60여개 건물 역사적 가치로 존치 의견 전달 지난해 7월 1일은 의정부 시민에게 뜻깊은 날이었다. 70년 동안 닫혔던 도심 속 미군기지 캠프레드클라우드(CRC)의 문이 열렸다. 경민대학교 방면에서 의정부 종합운동장까지 먼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운전자들은 캠프클라우드를 관통하는 2차선 도로로 고작 2분이면 반대편에 닿을 수 있다. 이 도로가 개방되기까지 70년이 걸렸다.캠프레드클라우드는 경기도 전쟁 문화 유산의 가치와 보존, 그리고 문화 유산 전승을 위한 지역의 역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도시 한가운데를 꿰찬 과거 유산이 현재를 사는 시민들에겐 무슨 의미일까란 물음에서 시작한다.의정부시 가능동, 녹양동 일대 83만6천㎢가 미군에 공여된 건 1953년 7월 3일의 일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당시 연합야전군사령부(CFA)가 이곳에 주둔했다. 이후 1953년부터 1972년까지는 미군 제1군단이 주둔했는데 1957년 5월 미 의회 대훈장을 받은 레드 클라우드 상병의 이름을 기려 캠프레드클라우드라는 명칭을 받았다.미 24사단 19연대 E중대 소속 레드 클라우드 상병은 한국전쟁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캠프레드클라우드는 1971년 변화를 맞는다. '미국은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은 피한다', '미국은 아시아 제국과의 조약상 약속은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대처해야 할 것이다'란 내용을 담은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의 영향이었다.미국의 막대한 군사적 비용 지출과 베트남전으로 인한 반전 여론으로 내려진 닉슨 독트린이 캠프레드클라우드에서 미군 제1군단과 제7사단 철수로 이어졌다. 캠프레드클라우드의 탄생과 변화 모두 한국전쟁과

  • 과거와 현재 100년… 역사 잇는 공간 '안양기독보육원'[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5)]

    과거와 현재 100년… 역사 잇는 공간 '안양기독보육원'[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5)] 지면기사

    '타자 할아버지' 오긍선 박사의 '좋은집' 정신 이어받다 유년시절 보낸 이영운씨, 학교 다닌 덕에 무사히 사회 정착아이들 영농기술 가르치려 힘써 '우장춘 박사' 초빙하기도재원 마련 위해 손수 편지 써… 항상 타이프 치던 모습 기억3천명 거쳐간 곳인데 정신 깃든 공간은 낡아 용도 잃기 직전 "안양기독보육원에서 다같이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우고… 사회 나가서도 살 수 있게끔 해주는 곳이었지."6살무렵 안양기독보육원에 들어가 유년시절을 보낸 이영운(74)씨에게 보육원의 의미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이었던 당시 보육원에서 같이 지내던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줬던 기억을 늘어놨다."나는 학교 다닐 때 줄곧 모범생이어서 더 어린 초등학생들을 앉혀놓고 공부를 가르쳐줬는데, 내가 가르쳐주니까 점수가 안나오던 애들이 시험에서 100점도 맞아오고 그래서 뿌듯했던 기억이 나. 그렇게 큰 방에서 책상 놓고 다같이 공부도 하고, 밥 시간 되면 식탁에 둘러앉아 밥도 먹고 그랬지. 당연히 춥고 배고픈 기억도 나지만 단체생활은 어딜가나 춥고 배고프고 졸린 건 똑같지 않겠어?"이영운씨는 보육원에서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운 덕분에 성인이 되고 군대에 다녀와서 무사히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고 했다.그는 보육원에서 받은 도움을 후배들에게 돌려주고자 기우회를 꾸려 아동복지시설 좋은집에 학용품이나 간식 등을 베풀고 있다고 한다. 좋은집은 안양기독보육원의 정신을 이어받아 해당 부지에서 운영 중인 아동복지시설이다.그가 기억하는 오긍선 박사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도 꼭 영농기술만큼은 가르쳐주려 노력했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우장춘 박사까지 보육원으로 초빙해 아이들이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다고 말했다. 단순히 보육원에서 아이들에게 숙식만 제공하는 것이 아닌, 언젠가 보육원을 나가서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는 삶의 기반을 꾸려주고 싶었던 오긍선 박사의 정신이 돋보이는 구절이다.■ '보육원 타자 치는 할아버지' 오긍선 박사오긍선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6·25 전쟁 당시 피난

  • 안양 양명고교 현대식 건물 사이 한 석축건물의 정체는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4)]

    안양 양명고교 현대식 건물 사이 한 석축건물의 정체는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4)] 지면기사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4)] 광복 - 안양 양명고교 현대식 건물 사이 '안양기독보육원' 일제강점기·한국전쟁 기간 고아 보살펴과거 교직원 사택 용도 사용… 현재 방치폭격 폐허 복구 미군 관계자 참여 가능성오긍선 박사 설립 역사적 가치 충분하지만학생들 의미 알지 못해 문화재 지위 위협안양시 양명고등학교 건물들 옆 한 귀퉁이에 낯선 석축 건물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비닐로 감싸진 지붕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기인 돌이 박혀있는 벽면, 벽면 사이 솟아있는 굴뚝까지. 요즘엔 흔히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의 건물이다.이 건물은 1953년께 지어진 '안양기독보육원 의무실'이다. 지난 4일 찾은 안양 양명고등학교에서 이 건물을 찾아내긴 어렵지 않았다. 테니스장과 음악실을 지나치자 나온 부지에 누가 봐도 역사성을 지닌 건물이라고 추정할 만큼 뜬금없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식 건물들 옆으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지만 의무실 건물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의무실 건물은 지난해까지는 학교 직원의 사택으로 쓰이다가 현재는 용도를 잃어버린 상태다. 건물 외관을 자세히 살펴보니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지붕을 받쳐주는 목자재 곳곳에 빈틈이 보였다. 이곳의 역사적 가치를 알려주는 유일한 흔적은 건물 입구 쪽 창문 밑에 박혀있는 정초석이다.정초석 또한 세월을 맞아 대부분의 글자가 지워진 상태다. 정초석에 있는 희미한 글자는 'IN HONOR OF MAJ HUGH T. TORRANCE OWO GUY T. HAWHEE'인 것으로 추정('MAJ'와 'OWO'는 명확하지 않은 글자)된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안양기독보육원의 설립자인 오긍선 박사가 미군과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미군관계자가 시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의무실 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복도로 연결되는 구조다. 각각 진료실, 입원실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중 입원실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의 내부엔 3개의 방과 화장실, 주방으로 쓰인 흔적이 남아있

  • 300만 조선인 희생 서린 근대화 '빛과 그림자'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3)]

    300만 조선인 희생 서린 근대화 '빛과 그림자'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3)] 지면기사

    광복 - 북한강의 첫 전력시설 가평 청평댐 수상관광 레저 핵심지에 담긴 아픈 역사일본 전범기업 주도했던 프로젝트 일환1945년 해방 이후 전기생산 주요 인프라연인원 300만명 동원 공식 사망자만 43명철도가 그렇듯 전력시설에도 빛과 그림자가 있다. 편리함과 환경오염 같은 현대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이 땅 위에 처음 철도가 놓였던 일, 처음 전기를 생산했던 일을 말한다.전범기업 하자마구미(間組)가 만든 고양 쌍굴. 서울로 운반할 석탄을 옮길 요량으로 만든 이 터널을 공사하며 지역민 500여명이 숨졌다. 지금도 고양 쌍굴 근처 화전동 공동묘지에서 이들을 기리는 위령비를 찾아볼 수 있다. 차량기지인 경성조차장에서 출발한 열차는 쌍굴을 통해 경성으로 이동했고 경의선을 따라 물자를 옮겼다.경성~개성~평양~신의주로 이어진 경의선은 한반도 주요 도시의 근대화를 이끈 열차였다. 이처럼 철도는 근대화에 공헌한 중요한 인프라지만 건설의 목표는 '수탈'이었고 건설 과정에서 조선인들이 숨져갔다. 전력시설도 마찬가지였다.하자마구미는 압록강에 수풍발전소를 만들었고, 또 다른 전범기업 카지마구미(鹿島組)는 가평에 청평댐을 지었다. 청평댐이 건설되기 전 북한강은 춘천과 인천까지 수상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고 한다. 유려한 풍광을 자랑하던 북한강 뱃길에 댐이 들어서게 된 건 전쟁의 영향 때문이었다. 중일전쟁(1937~1945) 초기 인천 군수공장에 댈 전력이 급해진 데다 경인 지역 공업화·도시화로 일제는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산세가 가파른 북한강에 댐을 짓기로 했다.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한강수력전기 주식회사가 설립됐고, 공사는 카지마구미가 맡았다. 1939년 8월 착공해 1943년 10월 준공(1·2호기)된 청평댐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의 주요 인프라가 된다. 전기생산시설인 수력발전댐 대부분이 수력자원이 풍부한 북한의 압록강, 두만강, 장진강 등에 설치된 탓에 한국에선 청평댐과 화천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48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전력 수급이 어려워진 게 대표적인 예시였다. 여기에 청평댐은

  • '잊힌 선로' 교외선, 80년 기다림 끝에 다시 경기북부 달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2)]

    '잊힌 선로' 교외선, 80년 기다림 끝에 다시 경기북부 달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2)] 지면기사

    2004년 여객운송 중단됐던 일영역 부활 고양~양주 연결… 일제 강점기 추진물자 수송 목적 계획·분단으로 단절1961년 개통된 이후 관광 목적 강화주요 승객 대학생 'MT 문화 메카로'현재 폐허처럼 변했지만 과거엔 붐벼연말 재개통 목표 '새로운 추억' 기대고양~양주를 잇는 교외선은 '고양 쌍굴'(4월 30일자 5면 보도=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과 같은 목적으로 계획됐다. 쌍굴이 경성수색조차장과 경의선을 연결하기 위한 터널로 만들어졌다면 교외선은 경의선으로 수송되는 물자를 서울 시내로 곧장 들이지 않고 서울 동북부로 우회하기 위한 목적으로 계획된 노선이다.철도가 근대화의 상징이자 수탈을 위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자 수송이라는 교외선의 주목적은 해방과 분단 국면에서 변화를 맞는다.노선은 일제 강점기인 1944년부터 추진됐지만, 분단으로 단절되며 활용이 어렵게 된 것이다. 교외선의 한쪽 끝인 고양은 신의주부터 내려오는 경의선과 연결되고 동쪽 끝인 의정부는 경원선과 연결돼 국토 중앙에서 이어지도록 계획한 것이었으나 신의주-원산 모두 분단으로 오갈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다.1944년 2월 착공, 1945년 8월 공사가 중지된 교외선의 운명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1961년 7월 10일 능곡~가릉역 구간이 열리며 교외선이 개통됐다. 미군부대 우회 목적으로 사용된 임시역 가릉역이 1963년 8월 20일 폐지되고 의정부역으로 연결되면서 교외선은 20년 만에 비로소 본 모습을 찾게 된다.다만 애초 물자 수송에서 관광으로 목적 자체가 크게 바뀌었다. 교외선이 단순하게 고양~의정부를 이었던 것이 아니라 서울역, 왕십리역과 연계되며 서울의 관광수요를 경기북부로 이전하는 효과를 낳아서였다. 교외선은 서쪽에서 출발해 시계 방향으로 도는 '서회선'과 동쪽에서 출발해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동회선'으로 움직였다. 서회선은 서울역~능곡역~의정부역~성북역~왕십리역~서울역순으로 운행했고 동회선은 서울역

  • 식민지 수탈의 오랜 상처… 안양 박달동, 다시 '호랑이가 살던 마을'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1)]

    식민지 수탈의 오랜 상처… 안양 박달동, 다시 '호랑이가 살던 마을'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1)] 지면기사

    광복 - 일제 안양~안산 병참기지 잇던 박달교 최적 요지 이유 '도로공사' 일부 건설 추정목조로 지어진후 미군 승계 콘크리트 재건 인근 기지 헬기장 사용… 전술핵 보관 기록도북측 난간 없어 큰 중화기 지나게 개축 흔적'박달2동' 호현동으로 변경 10월까지 투표안양시는 만안구 박달2동 이름을 '호현동'으로 바꾸려 한다. 오는 10월까지 조사에서 주민 다수가 찬성하면 박달2동 명칭은 호현동으로 바뀐다. 호랑이 호(虎)에 고개 현(峴)자를 쓰는 호현은 우리말로 하면 범고개다. 호랑이가 사는 고개에 있는 마을이라 호현동이라고 하는 것이다.박달동에는 모두 12개 마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개와 가장 가까운 마을은 웃말(上村)이었다. 말 그대로 가장 위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윗말 주민이 호랑이에게 잡혀 죽자 아래쪽으로 이주했고 그곳에 정착지가 형성됐다. 현재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에 있는 조선 태종의 아들 후령군 이간의 묘도 이 지역에 있었다고 하니 박달동에 사람이 모여 산지 얼마나 오래됐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박달동 주민들은 음력 10월 2일에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호랑이에게 잡혀가지 않고 공생하길 바라는 데서 시작한 전통이었을 것이다.웃말 외에도 가장 위쪽에 있는 박달리라고 해서 불린 웃박달리, 부자가 많아 부자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붓골, 안개가 자주 끼어 선녀가 산다해서 붙여진 선녀골(이상 안양시지) 등 박달동 12개 마을이 사라진 건 1930년의 일이다. 안양에서 수원으로 후령군 묘역이 이장된 것도 같은 시기다. 바로 일제 강점기, 일제가 이곳에 병참기지를 만들며 마을이 사라졌다.지금이야 시흥에서 안양, 안양에서 시흥으로 이동하려면 고개를 우회하는 자동차 도로를 이용하면 되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곤두레미 고개'가 유일한 교통로였다고 한다(시흥문화대전). 안양시 박달동과 시흥시 목감동을 잇는 곤두레미고개는 강도가 많아 빨리 곤두박질치듯 지나가야 한대서 곤두레미라고 불렀다는 설과 곤드레만드레 취한 사람이 고개에 많아 곤두레미라고 했다는 유래가 전해진다.

  • 건국훈장·돌베개… 애국지사들 '역사의 퍼즐' 찾아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0·광복)]

    건국훈장·돌베개… 애국지사들 '역사의 퍼즐' 찾아서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10·광복)] 지면기사

    집터·묘소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만세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 집터·묘소종손 심재만씨가 지켜… 방문한 이들 '가이드"찾는 발길 줄지만 광복절 다시 손님맞이 준비학도병 탈출 6천리 여정·'사상계' 발간 장준하파주시, 통일동산 4천㎡ 터에 기념 공원·조형물아직 개발로 사라지고 방치된 공간들 대다수■ 심상각 선생 집터 뒷산의 묘소'애국지사 심상각 선생의 묘'파주시 광탄면 심상각 선생의 집터 뒷산을 10분여 올라가니 건국훈장 애국장 비석과 팻말이 선생의 묘소를 친절히 알려준다. 수풀이 우거져 있지만 팻말과 비석 덕분에 단번에 심상각 선생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1919년 3월, 우산 심상각 선생은 파주 만세운동을 주동한 인물 중 하나다.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2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봉일천리 장터에 있던 1천여명과 합세해 봉일천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파주 만세운동은 경기 북부지역 최대 규모였다고 전해진다.격렬한 만세운동 이후 심상각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해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 내무부 장관인 박찬익 선생의 협조로 합류한 심상각 선생은 상해에서도 독립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심상각 선생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약 15년만이었다. 심상각 선생은 국내에 돌아와서 신간회에 가입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파주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역임하는 등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광탄보통학교에 관한 별도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설립 및 운영과정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그후 심상각 선생은 자신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동지들을 위한 위령제를 하는 등 애국지사 선양사업에 힘쓰다가 1954년 11월 9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심상각 선생의 집터와 묘소는 선생의 종손인 심재만(82)씨가 지키고 있다. 집터 바로 옆에 지은 집에서 살고 있는 심재만씨는 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찾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심재만씨는 심상각 선생이 독립운동가로 인정받게 된 문서와 사진자료 등 그동안 모아

  • 도시개발에 '허물어진 역사(歷史)'… '만세운동 주춧돌' 기억을 세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9)]

    도시개발에 '허물어진 역사(歷史)'… '만세운동 주춧돌' 기억을 세우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9)] 지면기사

    광복 - 집터로 보는 독립유공자 파주 3·1운동 주도 심상각 선생집터 소실… 안내판·표창장 남아수원 김세환·이선경 선생도 비슷道, 유적지 실태조사·보존 노력다른 방식이라도 기억할 곳 필요"3월 28일, 파주 군민은 봉일천 장으로!"1919년 3월 28일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 대규모 시위는 파주시의 대표적인 3·1운동으로 꼽힌다.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 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27일 청석면 만세 운동이 이어져 28일 봉일천 장날 만세운동이 촉발됐다.봉일천 장날 만세 시위대는 봉일천 시장으로 향하면서 3천여명으로 규모가 불어났다. 봉일천 만세운동은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 기관을 공격하면서 가장 격렬한 시위로 기억에 남았다. 만세 시위대는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봉일천 시장으로 행진해 군중과 합세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봉일천 장날 만세 운동의 중심엔 우산 심상각 선생이 있었다. 시위는 심상각 선생이 기획했으며 김웅권, 권중환, 심의봉 등 19명이 주축이 됐다. 그들의 회의 장소는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58-1번지. 심상각 선생이 살던 집이었다. 심상각 선생의 집에서 시위 주축 19명은 동지회를 조직하고 시위 시기, 작전 등을 수립하고 일본의 감시를 피하면서 파주 주민들에게 전달했다.지난 26일 파주에서 만난 심상각 선생의 손자 심재만(82)씨는 "경찰 때문에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만세 시위를 기획했다고 들었다"며 "조부님이 시위를 이끌면서 사람들이 집으로 모여 회의를 많이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심재만씨는 봉일천 만세시위가 파주 탄현면, 적성면, 법원읍 등 지역 곳곳의 대표들이 모여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주민들의 대다수인 농민들도 참여해 주축을 이룬 점을 강조했다.심상각 선생은 만세 시위를 벌이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고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귀국해 파주시 광탄면에 광탄보통학교를 설립,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박정희 정부는 심상각 선생에 지난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고 노태우 정부도 1991년 건국훈장 애국

  • 강제노역의 상처 잊혀도… 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기억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8)]

    강제노역의 상처 잊혀도… 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기억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8)] 지면기사

    일제 경원선 철도노선 일부… 현재 교각·터널만 남아 6·25 당시 탄약고… 폭격 균열로 특이 자연현상 발생유사사례 일본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관광지 변모역사적 의미 되새겨야… 착취 역사 재조명 노력 강조연천군 신서면 경원선 폐철교에서 남쪽 방향으로 200여m. 여기에 연천 폐터널이 있다. 조금만 더 이동하면 강원도 철원이다. 일제 강점기, 서울 용산에서 출발한 경원선은 연천~철원을 거쳐 원산까지 이어졌다.콘크리트 교각만 남은 철교 흔적과 인접한 폐터널은 일제가 기획한 추가 노선의 흔적으로 보인다. 폐터널 서쪽으로 경원선이 지나는데 1912년 경원선 개통 이후 새로 터널을 뚫어 신규 노선을 신설하려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철도도 사라져 교각과 터널만 남아 있을 뿐이다.연천 폐터널 역고드름은 6·25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으로 터널 상판에 균열(7월 2일자 11면)이 생기면서 나타났다. 위에서 아래로 맺히는 게 일반적인 고드름인데 균열 사이로 물이 흐르며 바닥에서 위로 솟는 모양의 역방향 고드름이 형성된 것이다. 길이 100m, 폭 10m의 폐터널이 전쟁 당시 북한군의 탄약고로 활용됐기 때문에 폭격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철도용 터널로 만들어졌으나 노선 신설을 앞두고 일제가 패망하며 활용되지 않았고 잠시 탄약고로 쓰였다 폭격 이후엔 관광지가 됐다. 안전사고를 우려해 펜스가 둘러쳐진 지금은 터널 안으로 접근할 수 없다. 터널→탄약고→관광지로 변모하게 된 폐터널의 과거는 기구한 한국 근현대사와 포개진다.비슷한 운명이면서 더 알려진 사례도 있다. 경원선이 개통한 해(1912년)에 일제는 시흥광산 개발을 시작했다. 시흥광산은 황금광산으로 개발됐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수백kg의 황금이 이곳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해진다. 1972년까지 쓰인 시흥광산은 이후 최근까지 40년 동안 새우젓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였다. 동굴의 저온이 저장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기도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탈바꿈한 이곳은 광명동굴이다. 황금광산과 새우젓 보관

  • 침략 도구에서 평화 상징으로… 경원선 연천역 철마는 분단 딛고 통일 향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7)]

    침략 도구에서 평화 상징으로… 경원선 연천역 철마는 분단 딛고 통일 향한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7)] 지면기사

    1912년 일제 대륙 침략 목적 이용 개통 수송 크게 기여… 6·25 후 일부만 운행남북정상회담 당시 복원 논의·현재 중단이제는 관광지… 주민들 철도연장 희망■ 수탈을 위해 탄생한 철도, 그리고 경원선경원선 연천역이 문을 연 건 1912년 7월 25일 일이다. 용산과 의정부를 거쳐 연천으로 이어진 경원선은 철원을 넘어 북한 원산까지 연결됐다. 경원선은 서해안과 동해안을 서북으로 횡단해 두만강에서 일본의 서북지방~한반도~만주 동북부 지역을 잇는 간선철도였다. 전구간 222.7㎞로 일본이 대한민국을 강제병합한 직후 착공된 경원선의 목적은 다름 아닌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었다. 경원선의 착공과 동시에 일본은 호남선의 착공도 추진했다. 이전에 개통된 경부선(용산~부산), 경의선(용산~신의주)까지 포함해 일본의 'X자' 철도망이 완성됐다. 19세기 말부터 이어오던 일본의 대륙침략 구상의 시작이었다.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철도를 통한 화물 수송량은 1910년 90만3천t에서 1940년 2천562만5천t으로 증가했다. 경원선은 경부선과 경의선의 뒤를 이어 3번째로 많은 화물량인 199만8천여t을 수송했다. 경원선을 이용해 다량의 화물이 서울에서 원산을 통해 일본과 대륙 방면으로 원거리 수송이 이어졌다.일제시기 철도가 운반했던 화물은 식민지 경제의 단면을 반영한다. 1910~1930년대까지 철도에 의한 물자 수송은 농산품이 압도적이었고 공산품도 2배 이상 증가했다. 대전을 중심으로 연결된 경부선과 호남선은 전라도의 농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주요 교통로였다. 또한 경부선과 경원선 등을 활용해 일본과 만주를 빠르게 연결해 병참노선화했다.수탈의 창구로 사용된 경부선과 호남선은 현재 주요 교통로가 됐고, 경의선과 경원선 일부는 전철로 시민의 발이 됐다.■ 분단의 아픔이 평화의 상징으로경원선 연천역은 위도 상 38도 위에 있어 6·25 전쟁 이전에 소련군정과 북한에 속해 있었다. 연천역이 있는 연천읍 차탄리는 일제강점기와 북한 점령기에 연천군 전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지만 전쟁 후 연천군 대부분이 수

  • 고(故) 유정수씨 일기 속 국민방위군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6)]

    고(故) 유정수씨 일기 속 국민방위군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6)] 지면기사

    눈물도 얼어붙은 행군… 70여년 묻혀있던 참혹한 비극 졸속·급조 동원 민간인들, 영하 기온서식량도 피복도 없이 '남쪽 이동' 강요"해골같은 꼴로 1만명 이상의 장정들 전염병에 학교강당, 사과창고서 숨져"정부 무능·관리부실에 대규모 피해시간 흘러 과거기록 찾기도 쉽지 않아스물 다섯 유정수는 1950년 12월 23일 오전 8시 수원공설운동장에 섰다. 미 공군 기록(USAF)에 따르면 당시 기온은 영하 1도, 한낮 최고기온이 영상 2.4도에 불과했다. 특히 그가 행군을 한 새벽시간은 영하 4도까지 기온이 떨어졌다. 변변치 못한 옷차림에 체감 기온은 훨씬 더 떨어졌을 것이다.유씨는 방위군이었다. 6·25 발발로 급하게 동원된 '국민방위군'이었다.다음 주면 6·25 발생 74년을 맞는다. 비교적 상세한 국군의 행적에 비해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국민방위군의 실상은 지난 2020년 경인일보가 발굴한 고 유정수씨의 일기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유씨 기록을 제외하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1929~2010) 교수와 고 정진석(1931~2021) 추기경의 증언이 그나마 알려진 편이다.정 추기경은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국민방위군 징집이 종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 계기라고 설명했다. 1950년 12월 말 서울 창경원에 모여 남양주 덕소에서 꽝꽝 언 남한강을 건넜던 일이다. 폭설에 눈 위에 지쳐 쓰러져 있다 겨우 강을 건넜는데 얼음이 깨지며 뒤쪽에 있던 무리가 빠져 죽은 것이다. 하루 10시간 이상 걸으며 주먹밥으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앞선 사람이 지뢰를 밟아 죽는 모습을 보는 고행이었다.리 교수의 증언도 일맥상통한다. 국민방위군이 진주로 남하했는데 해골같은 꼴을 한 만명 이상 장정이 학교강당, 사과창고에서 죽어간 것이다. 감자 한 알, 고구마 한 개로 겨우 남쪽에 다다랐지만 옷은 누더기에 신발은 해어져 맨발이었고 사람이 넘쳐 교실에 수용되지 않은 사람은 밖에서 얼어죽어야 했다.참상이었다. 이 비극의 원인이 된 국민방위군은 무엇인가. 정 추기경, 리 교수, 그리고 유씨는 왜 국민방

  • 용치의 미래, 철거냐 보존이냐… 도심 속 '분단 그림자' 평화 꿈꾼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5)]

    용치의 미래, 철거냐 보존이냐… 도심 속 '분단 그림자' 평화 꿈꾼다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5)] 지면기사

    전차 침입 막는 용치, 고양 덕은동·파주 법원읍에도 설치 지역발전 저해·수해 유발 단점 불구 근대문화유산 가치사진전 개최·공원 조성… 지역사회 일부로서 '공존' 모색태양열 발전기 등 제3의 새로운 활용방안 논의 필요 시점고양시 덕양구 덕은동에 위치한 고양쌍굴(4월 30일자 5면 보도=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중 하굴 입구에는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콘크리트 돌덩이들이 놓여 있다. 하굴은 폐쇄된 상황에 발목 높이만큼 물이 차 있었고, 사람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이 우거진 풀숲에 뒤덮인 채 벌레들이 날고 있었다.3일 고양시 덕은동에서 발견한 콘크리트 돌덩이는 마치 하굴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굳건했다. 돌덩이는 전쟁의 상흔 중 하나인 용치다.용의 이빨(dragon teeth)을 닮았다고 이름이 붙여진 용치(龍齒)는 적군의 전차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접경지 하천이나 개활지, 얕은 능선에 설치된 대전차 장애물(2023년 2월 7일자 11면 보도)이다. 1968년 김신조 침투사건을 계기로 1970년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알려졌다.50여년간 방호벽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치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도 부지기수다.덕은동에서 나고 자라 식당을 운영하는 정모(56)씨는 "어릴 적에 하굴의 기찻길과 용치에서 친구들과 놀고 데이트도 했기 때문에 추억의 장소"라면서도 "요즘은 용치 자체를 모르는 주민들도 많다"고 말했다.접경지 하천이나 얕은 능선에 설치돼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용치도 있었다. 지난달 31일 파주시 법원읍 직천리 용치를 찾았지만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다. 도로를 따라 대전차 장애물인 도로 낙석이 설치돼 있는데 용치는 도로 옆 비탈길 풀숲에 숨어 있었다.직천리 용치에 가까이 가기도 쉽지 않았다. 비탈길을 내려가도 목까지 올라오는 작은 나뭇가지들과 덩굴들로 접근할 수 없었다. 대부분 용치들은 접근성이 떨어지는 우거진 수풀에 설치돼 잊히기 십상이다.■ 갈등의 원인은 철거해야 vs 근대문화유산으로 재해석해야용치는 대전차 방

  • 캠프 험프리스 지근거리 '선말산·부용산'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4)]

    캠프 험프리스 지근거리 '선말산·부용산'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4)] 지면기사

    용산에서 평택까지 역사, 시민 품으로… 과거·현재를 톺아보자 1942년 일본군 보급용 비행장 건설하며 조성6·25땐 훈련장 활용… 1951년 미군 제공 협정市, 부지일대 공원·박물관 조성 방안 검토주변 유래·가치 알릴 팻말·안내판 등 없어휘황찬란 용산공원 청사진 비교하면 '초라'용산기지 반환이 결정된 건 2003년의 일이다. 한미 정상이 용산기지 평택 이전에 합의했고 2005년 부지를 공원으로 조성하기로 했다. 2020년 기지 이전이 상당 부분 진행되며 공원 부지 일부가 개방됐다. 예약제이긴 해도 자유롭게 방문이 가능하다. 버스 투어도 이루어지며 방문객이 이국적인 장교 숙소 앞에서 찍은 사진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의 단골손님이 됐다.용산기지에 조성될 공원 면적은 300만㎡에 이르고 공원을 둘러싼 역만도 9개에 달한다. 메가시티 중심지에 거대한 공원이 들어서는 건 기념비적인 일이다. 특히 고려말 몽골군 주둔지, 임진왜란 시기 왜군 병참기지, 일제 강점기 일본군에 이어 해방 후 미군이 기지로 쓴 지역이 시민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렇듯 미군은 용산을 떠나 평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의 새로운 주둔지 캠프 험프리스가 내다보이는 지근거리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쓰다 미군이 물려받아 사용한 방공호가 남아 있다. 선말산, 부용산 방공호다. 선말산 방공호는 평택시 팽성읍 함정1리에서 함정2리 방향으로 남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관통한다. 부용산 방공호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모양새다. 함정리 마을은 '서원말', '선말'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조선시대 화포 홍익한을 배향한 '포의서원'이 선말산 동남부 기슭에 있어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이곳의 방공호들은 1942년 일본해군시설대가 안정리와 함정1리 사이에 보급용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조성됐다. 두 곳 방공호의 규모는 비슷하나 공사기법이 거칠고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선말산 방공호가 부용산보다 앞서 건설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부용산 방공호는 일제 패망 직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1951년 한국 정부가 미국과 팽성

  • '은밀하게 숨 쉬는 역사' 수원 경기도청 옛 청사·파주 임진각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3)]

    '은밀하게 숨 쉬는 역사' 수원 경기도청 옛 청사·파주 임진각 방공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3)] 지면기사

    벚꽃길·관광지 아래 위치한 호국보훈의 상징들 산책길 바로 밑 지하 1969년 조성 2022년까지 사용작년 경기기회마켓 개최·올해 보물찾기 미션 장소지역명소 중심부 군사용품·DMZ 등 내부 전시공간반지하주택 양식 기원… 대피시설 아닌 활용 '고민'■ 내가 걷는 산책로 바로 밑 비밀공간? 경기도 옛 청사 충무시설경기도청 옛 청사는 수원에서 손꼽히는 벚꽃명소 중 하나다. 팔달산 자락에서 매년 흐드러지는 벚꽃놀이를 즐길 수 있는 이곳 지하엔 사실 은밀한 공간이 있다. 산책길 바로 밑 지하공간엔 방공호가 숨어 있다.지난 3일 찾은 구청사 방공호(충무시설) 출입구는 주차장 구석 한쪽 가벽 뒤에 숨겨져 있었다. 방공호를 목적으로 찾아갔음에도 못보고 지나칠 뻔했다. 입구 주변부터 가벽까지 치렁치렁하게 덮고 있던 위장용 그물 덕분인지 더욱 눈에 띄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듯 색이 바랬어도 얼추 나뭇잎같은 모양새를 갖춰 팔달산을 타고 내려오는 이파리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이 방공호는 1969년 조성된 것으로, 을지훈련 때마다 경기도청 공무원들의 비상대피시설로 쓰이다가 지난해 도청이 광교로 이전하면서부터는 사용하고 있지 않다.구청사 방공호는 총 2천231㎡ 규모로, 내부엔 9개의 방이 있다. 돔형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면 좌우로 연결된 통로를 따라가는 구조다. 내부에는 습기 제거를 위해 샤워커튼과 제습기를 가동한다.방공호, 지하시설이라고 해서 어두컴컴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한 공간을 생각했다면 구청사 방공호를 보고 놀랄 수도 있다. 일반 건물의 내부라고 해도 믿을만한 깔끔한 회색 복도가 펼쳐지기 때문이다.도청사가 자리를 옮긴 2022년 이전까지만 해도 사용하던 공간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구청사 방공호의 굳게 닫힌 출입문과 '제한구역. 공무 외 출입금지'라는 딱딱한 문구만 보고선 내부에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물론 이처럼 일반 도민에게 생소한 미지의 공간에 입장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평상시 구청사 방공호를 걸어 잠그고 있는 자물쇠가 풀리

  • 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시간 관통한 '고양 쌍굴'… '역사가 들려주는' 조용한 증언 [전쟁과 분단의 기억 시즌2·(2)] 지면기사

    경성수색조차장~경의선 연결한 터널 백석 시인, 일제 강제동원 건설 '고난·강압적 지배' 시로 써 남겨통영해저터널·여수 마래터널, 단순 건축물 아닌 삶·희생 결과물미래세대 교훈적 의미 커… '비등록문화재' 보존·인식 노력 필요'옛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던 낡은 항구의 /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 이름이 많다…' 시인 백석이 쓴 '통영 1'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 저항시인이자 가장 널리 알려진 서정시인인 백석은 통영을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였다.기자가 백석이 찾아간 통영을 방문한 건 2012년 일이다. '남행시초(南行時秒)'라 시인이 이름 붙인 동명의 시 통영엔 이런 구절도 있다.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 열이레 달이 올라서 / 나룻배 타고 판데목 지나간다 간다'일제가 가져다 놓은 거대한 배를 보러 선착장에 들렀다 만월이 된 바다에 나룻배가 지나가는 광경을 본 시인의 자취를 좇아 통영 밤길을 걸었다. 판데목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수장시킨 그곳이 맞다. 판데목 수면 아래엔 일제 때 뚫린 '통영해저터널'이 있다. 길이 483m의 해저터널은 양쪽 물을 방파제로 막고 바닥을 파서 만들었다. 일본 거주인이 늘어나며 일본인의 필요에 의해 지어진 기반시설인데 공사는 조선인들이 맡았다. 1931년 시작해 1932년 공사가 끝난 해저터널을 걷다보니 품바타령이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씨구씨구 들어간다."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공사과정에서 죽어갔는지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의 위용은 대단했다.통영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가면 여수가 나온다. 2019년 여수에선 신기한 터널을 만났다. 1차로 밖에 없어 반대쪽에서 차가 오면 터널에 진입할 수 없는 '마래터널'이었다. 일제가 군량미를 저장하기 위해 뚫은 자연암반 터널이다. 정확히는 조선인과 중국인이 뚫었다. 중장비 없이 곡괭이와 정으로 만든 굴은 거푸집의 흔적이 없어 마치 자연히 형성된 동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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