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탄생문화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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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탄생문화 '태실'·(下)] 세계유산화를 위한 과제 지면기사
조금만 일찍 관심을 가졌다면 더 많은 유물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태실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가지고 있는 아쉬움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훼손돼 방치된 태실은 시간이 지나며 그 흔적을 더욱 찾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태실이 사라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태실·태봉 전수조사를 진행한 경기도의 경우 가봉태실의 복원이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포천 익종태실의 경우 석물이 26개만 남아 있는 상태지만 '익종대왕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에 석물의 구성과 모양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이를 토대로 사라진 석물을 찾고,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다. 석물은 남아 있지만 원형과 다른 모습을 한 중종태실도 정확한 고증을 통한 재정비가 이뤄져야 하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가치가 높은 성종태실은 태실지인 광주 태전리로 이전해 복원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야 한다.'성종' 태함·아기비 잔존 가능성'익종'도 석물 등 기록 남아있어 특히 성종태실은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을 계획하고 있다. 태항아리는 서삼릉으로 옮겼지만 돌로 만들어진 태함이 땅속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고, 가봉할 때 근처에 묻은 아기비도 발견될 수 있다. 석물이 세워졌던 자국을 온전하게 찾아 조사하고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겨야 이후 복원까지 이어질 수 있다. 김종헌 경기문화재단 선임은 "성종태실이 복원된다면 일제에 의해 훼손된 문화재가 제모습을 찾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며 "2028년이면 태실이 원형을 잃은 지 100년이 되는데 그전까지는 복원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이와 함께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남아있는 태실의 유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 지정문화재화와 세계유산화를 통해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태실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조선왕실의 탄생문화로 세계보편적 사상과 희귀성 등에 대한 공감은 이미 이뤄지고 있다. 다만 세계유산 등재까지 가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문화재청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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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탄생문화 '태실'·(中)] '전세계 유일' 가치 지면기사
태실은 한마디로 'K-탄생문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 길지에 태를 묻어 아기의 무병장수와 좋은 운명을 바란 장태문화를 실행하고 기록으로 남긴 것은 전 세계에서 조선이 유일하다. 조선왕실이 남긴 태실조성방법과 관리기록,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독창적인 유적과 유물은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다. 생명을 존중하는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산물이며, 태실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독보적인 전통이자 예술성을 지닌 문화인 것이다.이와 함께 태실의 중요한 가치는 태어나서 살아가고 죽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공통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지난해 열린 '경기도 태봉·태실 학술세미나' 기조강연에서 "조선시대 국왕의 생애를 관통하는 탄생과 죽음과 추숭(追崇)은 왕실의례의 핵심"이라며 "국왕의 생애과정에 대한 인식의 방식은 문화유산을 파악하는 인식체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생명존중 생애 관통 '생활사 유산'명종·인종 태실, 잇단 보물로 지정경기도·경북·충남 협의체 구성도 박 수석연구원은 "탄생(태실)→죽음(왕릉)→추모(종묘) 세 가지 의미를 관통하는 의례는 역사상 유일하게 조선의 왕실만이 지닌 문화적 상징성이다"라며 "태실은 국왕의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문화공간"이라고 했다. 앞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종묘, 창덕궁, 조선왕릉과 더불어 국왕의 생활사(生活史)를 총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유산으로 그 의미를 더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지난 2018년 충남 서산의 명종태실에 이어 올해 경북 영천의 인종태실이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된 부분은 태실의 이러한 문화재로서의 중요성을 인정받은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태실의 설치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관련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있고 전체적인 구조가 의궤의 내용과 맞으며, 세부 장식이나 조각 기법이 우수한 점 등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높다는 것이 문화재 지정의 이유였기 때문이다.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은 "보물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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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탄생문화 '태실'·(中)] 왜 주목받지 못했나 지면기사
"태실이 뭐죠?" 조선왕실이 중요하게 여긴 장태 문화인 태실은 사실 왕릉이나 종묘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태실에 대한 연구와 조사, 발굴 등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도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태실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오늘날 태실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관리를 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곳곳의 길지에 자리한 태실(주로 태항아리) 54위를 고양 서삼릉에 모은 것이 불씨가 되었다. 왕실의 안녕과 만세를 기원한 탄생의 문화가 죽음의 공간에 묻혀 그 상징성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 과정에서 태실의 원형은 크게 훼손됐고, 제사를 지내며 관리된 왕릉과는 달리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지며 방치됐다. '서삼릉'에 모아 상징성 상실최근에서야 발굴·연구 본격화원형 잃은 석물, 유휴지 방치 이러한 현실은 경기지역의 가봉태실에서도 확연하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헌종의 아버지, 익종의 태실이 남아있다는 포천시 성동리의 한 소공원. 인근 지역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등록하고 찾아갔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태실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도 눈에 띄지 않아 수차례 같은 곳을 맴돌고 나서야 위치를 파악했다. 호국로와 영평천 사이의 자투리 공간에는 원래 익종태실에 있어야 할 석물들이 순서 없이 나열돼 있었다. 제자리를 잃은 26개의 석물은 일제강점기에 해체돼 남아있던 것을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5군단에서 보관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1977년 소공원이 조성될 때 이곳으로 이전됐다.가평 중종태실 역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한 후 방치되다 산 주인이 흩어진 석물을 발견해 인근 초등학교에 보관했고, 198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하지만 정확한 고증이 이뤄지지 않아 원형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한 상태다. 그에 비해 성종태실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지만, 원래 있던 곳에서 강제 이전돼 태실이 가진 의미가 퇴색됐다. 이 외에도 수많은 태실이 도굴되거나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일제 거치며 전래 문화 단절"해방 이후 도굴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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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탄생문화 '태실'·(上)] 태실이란 무엇일까 지면기사
인류의 역사에서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태는 단순히 출산 과정에서 생기는 부산물로만 여겨지진 않았다. 이 때문에 태를 처리하는 행위는 땅에 묻거나, 태우거나, 물에 띄우는 등 여러 방식으로 이뤄져 왔다.우리나라에서는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명당과 길지에 해당하는 산을 찾아 정상에 태를 묻는 특유의 장태 풍습이 있었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시설이 바로 '태실'이다.우리나라에서 문헌을 통해 확인된 최초의 태실은 신라시대 김유신의 것이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안태등록과 의궤 등 기록을 남기고 체계를 갖추며 중요한 문화로 자리 잡게 된다.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은 "태도 사람의 일부라고 생각해 생명 존중 사상에 따라 신중히 처리했는데, 왕실에서는 이와 풍수지리 사상이 합쳐져 개인은 물론 국운과도 연관 지어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심 소장은 "태실은 산이 내려오다 다시 솟아오르는 산의 정상(돌혈)에 만들어졌다"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강한 기운을 받아 태주가 살아있는 동안 활동적인 생기를 받고 무병장수하며, 발전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최초 태실 신라때 김유신 문헌 기록산 정상에 설치 무병장수·발전 의미 태실은 관상감에서 미리 관리를 파견해 후보지를 선정하고, 입지 조건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눠 배분했다. 태는 깨끗하게 씻어 내항아리에 동전과 함께 넣고, 이 항아리를 다시 외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뒤 태주와 관련한 기록을 적은 홍패를 달았다. 태를 안치할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면 태항아리를 안태사에게 전달하고, 도성에서 태봉을 향해 떠나는 안태 행렬을 한다. 도착하면 돌로 만들어진 태함에 태항아리를 넣고 매장한 뒤 제를 지내면 마무리된다. 아기태실을 만드는 절차가 여기서 끝난다면, 그 아기가 왕위에 올랐을 경우 태실의 모습은 또 달라진다. 흙을 덮어 만든 봉분과 아기비를 없앤 뒤 바닥에 돌을 깔고 중앙태석을 올리며, 팔각난간석을 두르고 가봉비를 세운다. 이렇게 석물들이 추가된 태실의 외형은 왕릉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태실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왕릉의 경우 때마다 제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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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탄생문화 '태실'·(上)] 성종태실은 왜 창경궁에 있나 지면기사
'태장경'에 이르기를, '대체 하늘이 만물을 낳는데 사람으로서 귀하게 여기며, 사람이 날 때는 태(胎)로 인하여 성장하게 되는데, 하물며 그 현우와 성쇠가 모두 태에 매여 있으니 태란 것은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종실록- 비가 내려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은 창경궁. 안내판을 따라 약간의 경삿길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이내 나무와 풀숲으로 둘러싸인 편편하고 작은 공간이 드러난다. 그곳에는 마치 왕릉에서나 봄직한 위엄있어 보이는 석물이 자리하고 있다. 바로 '성종태실'이다.이곳을 관심 있게 보는 사람은 드문 듯했다. 잠시 발길을 멈춘 이들은 사진 몇 장을 찍곤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이 태실은 생명을 뜻하는 '태(태반, 탯줄 등)'를 통해 조선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꿰뚫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다.성종은 1457년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성종은 예종이 세상을 떠난 후 정희왕후 윤씨에 의해 차기 왕으로 지목됐으며, 당대 성군으로 평가받고 있다."왕의 태실중 보존 가장 양호"일제가 관리 명목 서삼릉으로본래는 광주시 태전동에 위치 성종태실은 이러한 성종이 태어났을 때 그의 태를 묻어둔 곳이다. 그리고 우리가 창경궁에서 보는 석물은 그가 왕이 된 후 추가로 조성된 것이다. 이를 '가봉태실'이라고 한다. 가봉비는 팔각난간석 면에서 90㎝ 앞에 세워져 있는데, 비석의 앞쪽에는 '성종대왕태실'이, 뒤쪽에는 태실의 가봉과 개수 시기가 언제였는지가 새겨져 있다. 김종헌 경기문화재단 선임은 "성종태실은 왕의 태실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다"며 "가봉태실의 표준으로, 남아있는 의궤와 비교해서 보면 명칭과 규모, 장식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놀랍게도 성종태실의 원래 위치는 창경궁이 아닌, 광주 태전동이다. 전문가들은 넓은 들판 가운데 볼록하게 솟아있는 봉우리(태봉)에 태실이 위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성종태실의 석물은 왜 창경궁으로 오게 됐을까? 이는 일제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