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본 기사
-
경매나온 강화 고대섭 가옥 ‘빚더미 속 가치’
2025-02-02
-
입학생 0명 초교 4곳 무더기… 강화군 ‘인구 소멸위기’ 경고등
2025-02-10
-
“강화는 내게 상징적인 곳” 체육대통령 당선된 유승민, 강화도는 축제 분위기
2025-01-30
-
[1016 재보궐선거] 강화군민의 선택은 국민의힘 박용철 ‘50.97% 득표’
2024-10-17
-
궁중 건축·일본풍 안채… 6년의 공사, 독특한 한옥 구조 [법원 경매 넘어간 강화 고대섭 가옥·(上)]
2025-02-24
최신기사
-
[독립운동과 인천·(29)]잊히고 묻힌 의사 출신 이민창 지면기사
1929년 인천 정착해 병원 운영하다 1941년 '합병 30년후 독립 약속 지켜라' 투쟁엘리트 인생 버리고 감옥서도 항거 해방전 출소 거부 1년6월 형기 받고 4년 살아이후 모습 드러내지 않고 '두문불출' 가난한 자들에 인술 펼치고 과학공부 매진'開國(개국) 495년 5월 11일'1941년, 인천에서 병원을 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이민창(李敏昌)은 신상 카드 나이를 기록하는 곳에 이렇게 적었다.일제에 강제로 병합된 지 30년이나 더 흐른 때임에도 이민창은 여전히 자신의 생일을 조선이 개국한 1392년부터 따졌다.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얘기다.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변절하던 시기에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그 이민창의 드라마 같은 항일운동 이야기를 접할 수 있는 자료는 1955년 고일 선생이 펴낸 '인천석금'이 유일하다시피 하다.'인술(仁術)에 여생 바치는 노투사 '이민창' 씨'란 제목의 글은"1941년 일제의 황혼시절이다. 융희(隆熙) 4년 경술한일합병(庚戌韓日合倂)의 국치(國恥)의 시간이 30주년이 지난 그해에 서슬이 시퍼런 독오른 일제 면전에서 단독육탄으로 항쟁하던 투사가 깊은 밤중에 총소리 같은 뉴~스를 던졌으니" 이렇게 시작한다. '인천석금' 속으로 좀 더 들어가 보자.1941년, 이민창은 '너희들이 합병 후 30년이 지나면 독립을 준다고 했으니 이제는 우리나라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전단을 뿌렸다. 조선 총독과 일본 내각 대신들에게도 서한을 발송했다. 이민창은 의사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일제강점기 의사 역시 누구나 부러워하는 존재였다. 그는 활짝 열려 있는 탄탄대로의 인생을 버리고 일제에 항거하고 나섰다. 그는 거리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자주독립의 필연성을 국제정세에 맞추어 연설했다. 청중들은 다들 "미쳤다" "큰일 나겠다"고 말하며 꽁무니를 뺐다. 이민창은 곧바로 체포되었다.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 권오연이 담당했다
-
중국에 부는 김정희 바람… 베이징 전시회를 가다 지면기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전시회'怪의 아름다움' 부제… 관람객 북적당대 '동아시아의 문화 아이콘' 명성작품 보기위해 1천㎞를 달려온 남성"직접보니 친절하다는 느낌 받았다"7월 하순, 베이징의 여름도 인천·경기만큼이나 펄펄 끓었다. 그 베이징에 강력한 추사(秋史)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을 쐬러 1천㎞를 달려온 이가 있었다. 지난 23일 오후 2시 베이징 중국미술관 5층 전시장.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淸朝文人)의 대화'란 타이틀로 추사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입구의 안내판과 전시회 소개글이 중국어와 한글로 되어 있었다. 이곳이 중국이라는 생각을 잠시 잊게 했다. 그랬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인이었으나 중국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에게서 배우기도 했다. 또한 중국인들을 가르쳤고 후대의 일본인을 추사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동아시아의 문화 아이콘이었다. 지금 말로 한국과 중국, 일본에 광팬을 거느린 진정한 의미의 '한류 스타'였다.전시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작품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는 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한 작품을 여러 장 카메라에 담았다. 가까이에서도 멀리서도, 높낮이를 달리해 가면서도 찍었다. 수많은 관람객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었다. 왜 그렇게 관심을 갖는지 궁금했다. 그 남성은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서 왔다고 했다. 베이징에서 무려 1천㎞ 가까이 떨어진 곳이다. 중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추사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일부러 왔다고 했다.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는데 우한의 화중과학기술대학에서 역사와 예술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김정희는 청나라 시기에 중국과도 교류했는데 여기에 와서 김정희의 작품을 보니 무척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이런 전시가 자주 많이 중국에서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추사의 작품이 '친절하다'는 얘기는 무슨 의미일까. 추사의 작품 세계가 파격적이면서도 어렵지 않다는 걸로 들렸다.'괴(怪)의 아름다움'이란 부제를 달고 열리는 이번 중국에서의 추사
-
[데스크 칼럼]백범의 키 지면기사
여중생들 '백범일지' 읽었다는 사실에 대견시시콜콜한 궁금증 못 풀어줘 자괴감 마저그동안 가장 기본적인 정보 빼놓고 있었다 70주기에 학생들 질문이 정신 바짝 들게해백범 김구 선생의 키가 얼마였느냐고 묻는 학생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인천에서 기자생활을 25년 가까이하면서 그래도 백범과 인천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는 파고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백범은 인천에서 감옥살이를 두 번이나 했다. 그와 어머님의 동상이 인천대공원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동안 '백범일지'에 나오는 인천 대목을 살피기가 여러 번이다. 그런데 그의 키가 몇이었는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질문은 며칠 전 2학년 여중생들과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나왔다. 인천 중구에 있는 그 학교에서는 국어시간에 '백범일지'를 읽었다고 했다. 3·1 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고, 백범 서거 70주기가 되는 올해 백범이 옥살이한 그 현장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백범이 누구인지 좀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차원이라고 했다. 학생들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써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잘 알지 못했지만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최대 문학적 성과라 할 '백범일지'를 읽었다는 것만으로도 대견스러웠다.백범을 향한 그 학생들의 사소하고도 세부적인 시선이 그동안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들을 생각하게 했다. 학생들에게서 오히려 많은 것을 배우게 된 그런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백범의 키가 컸는지 작았는지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안경을 썼는데 눈은 언제부터 나빠진 것인지, 여자친구는 얼마나 되었고, 자식들은 얼마나 되었는지 등 그야말로 신상과 관련한 시시콜콜한 것들을 알고 싶어 했다. 학생들의 그런 궁금증은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왜 우리는 백범을 공부하면서 그의 키가 얼마인지를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자괴감마저 들었다.학생들에게 인천대공원에 있는 백범 김구 동상과 그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동상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곽낙원 여사 동상 발밑 받침
-
[인천의 얼굴·(14)]오늘 백범 서거 70주기 어머니 곽낙원 여사 동상 '짚신 발' 지면기사
인천 거처 옮겨 옥바라지 애쓴 모습 담아월북 조각가 작품 '복식연구' 중요 자료오늘은 얼굴이 아니라 발입니다. 짚신을 신고 있네요. 백범 김구 선생의 모친 곽낙원(1859~1939) 여사의 동상입니다.발등 너머로는 아들의 형상도 보입니다. 인천대공원에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은 안두희의 흉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곽낙원 여사 동상은 그 두 달 뒤 완성되었습니다. 머리를 땋아 위로 얹은 것이며 치마저고리, 가냘프고 왜소한 얼굴과 몸매 그리고 짚신을 신은 발과 동냥 바가지를 오른손으로 들고 있는 모양까지. 어머니가 인천에서 고생하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들고자 애를 썼던 아들은 끝내 온전한 어머니 동상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어머니는 아들이 인천 감옥에 갇히자 황해도 해주의 집을 폐하고 남편과 함께 거처를 인천으로 옮겼습니다. 안 해 본 일 없이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인천 사람들이 서로 나서 백범의 방면을 위해 노력하고 파옥까지 시도한 데에는 곽낙원 여사의 애처로운 옥바라지가 어느 정도는 역할을 했을 게 틀림없습니다.인천의 이 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많은 점에서 특별합니다. 19세기 후반 우리 아낙네들이 입은 옷차림이며 머리 스타일, 신발 등 당시 복식 연구에 살아 있는 자료입니다.특히 동상을 만든 이도 남북이 공동으로 연구해야 할 인물입니다. 동상 발뒤꿈치 아랫부분에는 완성한 시기와 함께 작가의 성을 나타내는 사인이 있습니다. 한자로 '朴'이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작가는 경기중학교 미술교사 등을 지낸 박승구(1919~1995)입니다. 백범이 없는 세상에서 살기가 버거웠던지 그는 6·25 와중에 월북했습니다. 인천 출신의 월북 조각가 조규봉(1917~1997) 등과 합작해 '중국인민지원군 우의탑'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곽낙원 여사의 동상은 백범을 백범으로 만든 인천의 근현대사를 증언합니다. 그리고 백범이 그렇게도 꿈꾸었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남북이 하나 되는 길, 그 길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글/정진오기자 sch
-
[데스크 칼럼]낚시의 도시 인천 지면기사
일제강점기 낚시터로 '율도' 가장 유명세'어조상월' 월미도, 경인지역 별천지 불려1971년 서울사람들 인천앞바다 손맛 만끽'제1회 선상낚시대회' 새로운 자랑거리로인천은 낚시의 도시였다. 지금도 역시 그렇다. 월미도 문화의 거리에서는 언제든지 낚시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바닷물이 깨끗하지 않아 낚은 물고기를 먹을 수나 있겠나 싶지만 그들은 그런 걱정일랑 붙들어 매라는 투다. 송도신도시 건너 신항이나 LNG기지 쪽 방파제에도 낚시꾼들이 끊이질 않는다. 낚시 금지구역이라고 써 붙인 팻말도 낚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물때가 좋은 날, 연안부두나 남항에서는 낚시꾼들을 가득 태운 배들이 새벽 출항을 한다. 서해5도의 갯바위 역시 낚시꾼들의 차지다. 낚시와 관련한 거의 모든 장소를 품고 있는 인천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주민들의 낚시터로 기능한 지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낚시터로서의 인천의 영광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빛이 났다. 향토사학자 이훈익 선생의 '인천지명고'는 율도를 소개하면서 '일제 때부터 가장 좋은 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했다. 월미도 건너 작약도의 동북쪽에 있던 율도는 1980년대 매립되어 지도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인천 연안의 그 많은 섬들 중에 하필 율도가 낚시터로 제일 유명했는지는 별다른 설명이 없어 알기 어렵지만 물고기들이 많이 잡혔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한다. 아마도 갯바위 낚시였을 게다. 서울에서도 유명했던 행락지 월미도는 야간 낚시로 뭇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이다. 1950년대 후반 발간된 '경기사전'에는 월미도와 송도를 인천의 몇 안 되는 명승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월미도와 송도를 낚시 장소로 특별하다고 소개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월미도는 6·25 전까지 해수욕장, 바닷물 풀장, 여관, 식당, 유희장, 별장(용궁장) 등이 완비되어 있었고, 특히 바다 위에 떠 있는 누각에서의 '어조상월(魚釣常月)'은 경인지역 일대에서는 별천지였다고 쓰고 있다. 어조상월, 낚시하면서 달을 구경한다는 얘기다. 바로 야간 낚시를 말한다. 연수구 옥련동
-
도시 특성 잘살린 디아스포라… 인천 대표 문화예술 콘텐츠로 지면기사
아트플랫폼 일원에서 내일까지공항·항만 위치 적절한 영화제올해로 일곱 번째를 맞이한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인천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콘텐츠로 떠올랐다. 지난 24일 개막해 28일까지 인천아트플랫폼 일원에서 계속되는 제7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는 전 세계 30개국 64편의 영화가 선보인다. 이 중 8편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최초 상영작이다. 디아스포라영화제는 국내 다른 도시에는 없는 인천만의 독특한 국제규모의 문화행사다. 디아스포라는 고향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을 뜻한다.우리로 치면 한반도를 떠나 일본이나 중국, 러시아 쪽으로 이주해 사는 교포들을 의미한다. 탈북자나 실향민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번 행사를 관통하는 주제는 '난민'이다.26일 인천아트플랫폼 광장 일대는 영화제를 찾은 사람들로 하루 종일 붐볐다. 영화도 보고 그 영화 내용을 놓고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도 마련되었다. 디아스포라영화제를 바라보는 국제적인 시선도 좋다. 이번 디아스포라영화제 특강 차 인천을 방문한 일본 도쿄경제대학 현대법학부 서경식 교수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따서 영화제를 만든 아이디어가 좋았다"면서 "디아스포라영화제는 그동안 해를 거듭하면서 많이 발전해 왔는데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제가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공부한 서경식 교수는 2015년부터 매년 디아스포라영화제를 찾고 있다.디아스포라영화제는 인천의 도시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토박이보다도 외지인이 많은 것이 인천이고, 개항기 외세 문물이 다른 어느 도시보다 많이 몰려든 곳도 인천이다. 공항이나 항만이 있다는 점도 인천이 디아스포라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보수적인 일본 지식인 사회를 비판해 온 서경식 교수는 "디아스포라영화제와 같은 이런 영화제는 일본에서는 하기가 쉽지 않다"면서 "인천에서 하는 이 영화제가 더 크게 발전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
[인터뷰]'디아스포라영화제 단골'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지면기사
5년째 방문 변화모습 지켜봐분단된 도시에 의미있는 행사탈북자 차별 다룬 영화 인상적디아스포라영화제를 매년 찾고 있다는 일본 도쿄경제대학 서경식 교수는 디아스포라영화제가 갖는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을 당시 조국을 떠나 세계 각국으로 나가 살아야 했던 그 땅에서 열린다는 점과 남북분단의 현장이자 고난의 근대사를 겪은 나라에서 이주민을 뜻하는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열린다는 게 남다른 의미라는 얘기다.195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서경식 교수는 우리나라를 일컬을 때 '조선'이란 용어를 썼다. 북한 쪽을 의식한 게 아니라 남북분단 이전의 나라를 지칭하고자 하는 뜻이라고 했다. 서경식 교수는 "나는 할아버지가 1928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3세대 재일조선인"이라고 소개했다. 그의 가족사 자체가 디아스포라적이다.서경식 교수는 "인천은 중국하고도 가깝고 화교들도 많이 살고, 분단된 도시이기도 하다"면서 "인천은 다른 어느 도시보다 평화가 지켜져야 좋은 도시인데, 동아시아 전체의 안녕과 평화가 인천이 바라는 바와 숙명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했다.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인천에서 열리게 된 것이 예삿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었다.디아스포라영화제에 다섯 번이나 방문하면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이번에 인천시 표창을 받은 서경식 교수는 대학에서 예술학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접한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그 의미를 탐구한 책 '디아스포라 기행'을 쓰기도 했다. 그의 두 형은 우리 아픈 현대사의 희생양이기도 했다. 둘째 형 서승과 셋째 형 서준식은 한일 국교수립 이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공부한 1세대들이다. 그들은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오랫동안 옥고를 치렀다.5년이나 계속해서 디아스포라영화제를 찾은 서경식 교수는 이 영화제의 변화하는 모습도 함께 지켜봤다."이번에 본 영화 중에 탈북자를 차별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새터민 영화가 좋았습니다. 이런 얘기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남아메리카 이주자들이 많은 미국에도
-
[데스크 칼럼]그림 그리기의 미래가치 지면기사
전쟁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창의력 결정체어느덧 22회째 맞이한 '바다그리기대회'온갖 불편 감수 아이들 데리고 온 부모들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위한 '훌륭한 자산'1950~60년대를 살아낸 어른들은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서 걱정하는 말을 쏟아내고는 한다. 고생하지 않고 오냐오냐하는 분위기 속에서 크다 보니 사회생활의 각박함을 견디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 그런 젊은이들이 대다수인 우리 사회도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 어른들도 있다. 그런데 지난 주말 있었던 경인일보 주최 바다 그리기 대회의 풍경을 보고서는 그 어른들의 걱정이 기우일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 성의를 다한 그림 작품은 창의력의 결정체이다. 무엇을 그릴 것인지 구상을 하고, 어떠한 색깔을 칠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고도의 창의성을 요구한다. 보이거나 상상하는 대상을 사진처럼 보여줄 것인지, 특정한 어느 한 가지를 크게 부각해서 그릴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그 개인의 독창성을 드러내는 중심 요소이다. 그래서 그 많은 아이들이 그림 그리기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아닐까.어느덧 22회를 맞이한 이번 행사 역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많은 어린이들이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미세먼지 경보와 뙤약볕도 그들의 그리기 열정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같이 온 부모들 역시 대단했다. 캠핑족들이 늘어나면서 텐트 없는 집이 없을 정도인데, 바다 그리기 행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금요일 저녁에 미리 텐트를 쳐놓은 부모들도 여럿 있었다. 아이들이 좋은 자리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그 부모는 하루 앞서 준비를 했던 거였다. 수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완성한 작품을 들고 행사장에 세워진 무대 위에 오르게 한 뒤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인증샷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할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인증샷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렇기에 어른들은 주차 전쟁을 치르는 고생을 하면서도 아이들을 행사장에 데리고 오는 것일 게다.창의력의 결정체인 그림 그리기는
-
정치·지역정가
페논 프랑스 대사 "목숨건 한국 인질 구출, 우방국 위기지원 당연" 지면기사
파비앙 페논(Fabien PENONE) 주한 프랑스 대사는 며칠 전 한국인 여성이 포함된 아프리카 인질사건을 프랑스 특수부대원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해결한 것과 관련해 "우방국 간에 위기상황에서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면서도 더 이상의 말은 아꼈다.페논 대사는 지난 13일 저녁, 인천 송도에 진출한 프랑스 스포츠용품 유통 브랜드 데카트론에서 가진 경인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제3국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우방국 상대방을 지원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이날 하루 종일 인천에서 일정을 소화한 페논 대사는 대한민국의 남북 관계 회복을 위한 여러 대화 노력에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페논 대사는 또 인천과 노르망디 사이에 '평화포럼'이라는 주제로 서로 협력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의미가 큰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6·25 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프랑스 해군 함정이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고 강조하면서 인천과 프랑스가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점을 부각했다. 그러면서 상륙작전이라는 측면에서 인천과 노르망디는 분명히 비교할 만한 부분이 있다고 했다. 상륙작전을 배경에 놓고 양측이 서로 교류협력에 나설 수도 있다는 얘기다.페논 대사는 또 "한국은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영향력 발휘도 많이 한다"면서 "한국인의 역동성은 언제나 저에게 놀라움을 줬다"고 말했다.파비앙 페논 대사는 대한민국에 근무하는 동안 항상 따뜻하게 대해 준 한국민들이 고맙다면서 한국과 프랑스는 서로를 잘 이해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본다고 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
[인터뷰]파비앙 페논 주한 프랑스 대사 지면기사
도시·지방간 협력문제 '우선시'방한 자국민에 지역 관광 권유해외에 나가 있는 대한민국 대사들도 이렇게 바쁘게 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비앙 페논(Fabien PENONE) 주한 프랑스 대사는 정열적으로 프랑스를 세일즈했다. 그를 만나면서 우리나라 외교관들도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지난 13일 인천을 찾은 그는 한시도 쉬지 않았다. 오전에만 인천문화재단, 연수구청 등지를 오가며 여러 일정을 소화했다. 프랑스와 인천 사이의 문화 예술 교류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했고, 연수여고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도 했다. 점심 때도 인천의 인사들과 프랑스와 한국의 협력 강화 방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오후에는 인천대학교와 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를 찾았고, 저녁에는 송도에 진출한 프랑스 대형 스포츠 유통 브랜드인 데카트론 매장에 마련된 리셉션에 참석했다. 인터뷰는 이날 일정의 맨 뒤로 밀려 오후 8시가 넘어서야 겨우 잡혔다.페논 대사는 경인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인천에만 공식적으로 일곱 번째 방문이며 올해 들어서만 네 번째라면서 인천에 유난히 관심이 크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해 10월 프랑스 국빈 방문 당시에도 양국 사이의 도시·지방 간 협력 문제가 강조되었다면서 주한 프랑스 대사관에서도 이 점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했다. 페논 대사는 실제로 한 달에 두 차례 정도는 지방 일정을 잡는다고 했다.페논 대사는 인천과 프랑스가 오래 전부터 상호 교류 협력 관계를 맺어 왔다고 소개했다. 1977년에 이미 인천항과 프랑스 르아브르항이 자매결연을 맺었다고 밝혔다. 지난해 체결한 노르망디쪽과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측의 교류 협약도 바로 그 연장선에 있다는 얘기였다.페논 대사는 최근에 부임한 야닉 글레마렉 GCF 사무총장이 프랑스인이라는 점도 프랑스와 인천과의 교류 촉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송도국제도시에 사무국이 있는 GCF가 내세우고 있는 기후변화 정책에 대해서도 프랑스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고, 이 GCF에는 프랑스 문화권 사람들이 많이 근무하고 있다고 강조했다.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