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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논 프랑스대사, 올들어 네번째 인천 방문… 예술인 교류-영화·음악 등 협력 논의 지면기사
문화재단 레지던시 프로그램 관심연수여고 강연… 학생 즉석 초청도프랑스 특수부대가 아프리카에서 납치된 한국인이 포함된 인질들을 목숨을 내던지면서 구출한 사건이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른 가운데 파비앙 페논(Fabian PENONE) 주한 프랑스대사가 13일 오전과 오후, 저녁까지 인천에 머물며 프랑스를 알리고 인천과 프랑스 간의 교류에 대해 관계자들과 논의했다.페논 대사는 이날 오전 인천문화재단을 찾아 최병국 대표 등 재단 관계자들과 환담했다. 이 자리에서는 문화예술 교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특히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과 인천의 문화 예술인들 사이의 교류에 대사관이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 예술가들의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영화제 교류 등에 대해서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인천문화재단에서도 예술인 상호교류와 영화, 음악 등의 협력을 모색하기로 했다.이날 오전 11시에는 연수구청에서 연수여고 학생 200여 명을 상대로 강연했다. 페논 대사는 연수구 송도에 있는 GCF 사무국 등을 예로 들면서 환경·기후변화 등 글로벌 이슈에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또 안보와 국방 분야, 경제 분야, 교육 분야에서도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여 프랑스 기업이 한국에 진출해 있는데 이들 기업이 26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프랑스에서 한국어 열기가 높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페논 대사는 오는 7월 14일 프랑스에서는 국경일 행사가 대대적으로 펼쳐진다면서 강연에 참석한 연수여고 학생들을 즉석에서 초청하기도 했다. 페논 대사는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답변하는 등 학생들과의 스킨십 강화에도 수완을 발휘했다.이날 오후에는 인천대학교를 방문, 조동성 총장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는 문화, 예술, 과학 연구 분야에서 서로 협력을 강화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페논 대사는 또 미추홀외국어고등학교도 방문해 프랑스어 교육 방안 등에 대해 논의했다.저녁에는 송도에 있는 프랑스 스포츠 유통 브랜드 데카트론을 방문해 스포츠, 경제 분야 활성화에 대해 관계자들과 의견을 교환했다. 페논 프랑스 대사의 이번 인천방문은 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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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백범 김구와 마약의 시대 지면기사
탈옥 결심한 계기인 기울던 조선·한국전쟁…목숨 부지해야만 했던 가난의 상황서 만연부러울것없는 재벌3세·연예인 '정신적 빈곤'121년전 아편빠진 간수처럼 '기가 찰 노릇'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손자가 21일 변종마약 투약 혐의로 인천공항에서 체포되면서 재벌가를 둘러싼 마약 사태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현대그룹, SK 그룹 등 대한민국 대표 기업 3세들의 마약 투약 혐의는 연예인들의 그것과 맞물려 온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프로포폴(수면마취제)을 투약하던 20대 여성이 바늘을 꽂은 채 숨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어선을 타던 선원이 필로폰을 투약한 상태에서 스스로 경찰에 신고하는 황당한 사건도 일어났다. 마약을 찾는 이 중에는 가정주부도 많다. 마약이 우리 사회 어디까지 침투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일반화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에서 보듯이 마약이 퍼진 사회나 국가는 존립할 수가 없다.조선이 망해가던 19세기 말엽, 백범 김구(1876~1949)가 인천의 감옥에서 옥살이하던 시기에도 마약은 넓게 퍼져 있었다. 김구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인들을 단죄하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뒤 체포돼 외국인 관련 사건을 전담하는 인천에서 감옥을 살았다. 당시 백범의 부모와 인천의 여러 인사들이 그를 풀어달라면서 백방으로 노력했다. 사형선고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뿐 석방되지는 못했다. 더 큰 일을 위해 백범은 감옥 탈출을 결심했다. 1898년 3월, 당시 23세이던 백범은 탈옥을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다. 같이 탈옥하기로 한 죄수에게 많은 돈을 들여오도록 했다. 그리고 고향 해주에서 옥바라지를 위해 인천에 와 있던 부친에게는 한 자 길이의 단단한 창을 만들어 옷 속에 감추어 넣어 달라고 했다. 창은 벽돌을 뜯고 땅굴을 파기 위한 거였다. 돈으로는 옥살이하던 80여명의 죄수들에게 음식과 술을 먹여 취하게 할 요량이었다. 또 하나가 있었으니, 마약이었다. 간수 중에 아편쟁이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가 근무하는 날을 거사 일로 택했다. 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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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인천·(1)프롤로그]일제에 맞선 이들의 유배지 '인천 섬마을' 지면기사
이동휘·계봉우, 무의·영종 생활 등기초데이터 부족… 고민해 볼 시점인천이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을까. 3·1운동의 물결이 한반도를 뒤덮은 뒤 100년, 그 힘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선 지도 100년이 되었다. 영종도와 무의도 같은 인천의 섬들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로 기능했다는 점이 왠지 낯설게 다가온다. 이게 바로 '3·1운동, 임시정부 100년'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100년이 지났건만 우리는 기초 데이터조차 모아놓지 못했다. 이미 많은 것들이 흩어지고 묻혀버렸다. 경인일보가 2019년 연중기획으로 '독립운동과 인천'을 진행하기로 한 것은 '100년'을 말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자는 차원이다.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악사건(105인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동휘·이승훈·박도병·최종호·정문원·김병옥 등 19인은 무의도·제주도·고금도·울릉도 등으로 1년 유배가 결정되었다'고 사건 결과를 썼다. 인천과 독립운동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동휘(1873~1935)가 무의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이동휘의 무의도 유배 사실은 무의도 주민들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만 아는 정도인데 어떤 향토지에서는 이동휘가 무의도에서 은거했다고 쓰고 있을 정도로 일반적이지 않다. 유배와 은거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독립운동과 유배 이야기를 할 때 중요한 인물이 또 있다. 계봉우(1880~1959)이다. 국사학자, 국어학자, 민속학자, 교육자, 언론인 등으로 활동한 애국지사이다. 그가 영종도 예단포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계봉우는 1911년 1월 이동휘와 함께 간도로 이주해 교편을 잡았다. 그 뒤 연해주로 옮겨 '권업신문' 기자와 대한광복군정부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6년 11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구인됐으며, 영종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917년 12월 석방된 뒤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서 거주제한 조치를 당했다. 계봉우는 특히 1919년 초 3·1운동을 준비하던 인물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도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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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중국 베이징에서 꿈꾼 인천시립미술관 지면기사
춘절 연휴 중국미술관 찾은 수많은 관람객놀이터·사랑방처럼 일상서 소비할 줄 알아인천, 자체적으로 지은 변변한 곳 하나 없어백범 강조한 '문화의 힘' 거저 얻을 수 없다중국을 이렇게나 부러워한 적은 없었다. 인구는 넘쳐나고, 공기는 탁하다. 음식도 느끼할 뿐만 아니라 특유의 향내도 도무지 감당하기가 어렵다. 문화적 수준도 우리가 부러워할 만하지는 않다고 느껴왔다. 그냥 나라가 커서 대국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미 우리의 사소한 생활용품까지 모두 장악한 지 오래지만 '메이드 인 차이나', 중국제라면 괜스레 수준 떨어지는 것으로 치부하면서 한국에 사는 것을 은근히 우쭐해하고는 했다. 중국인들의 대이동이 시작되는 춘절 연휴가 막 시작되던 지난 1월 30일 베이징 시간 낮 12시, '중국미술관'에 들르기 전까지는 여러 분야에서 정말로 중국을 얕봤던 게 사실이다. 중국미술관에서 그 알량한 문화적 자존심이 이렇게나 한순간에 땅에 떨어질 줄 몰랐다. 20여 개나 되는 전시장에 끝없이 펼쳐진 엄청난 수의 작품이나 그 규모가 큰 대작을 보아서가 아니다. 미술관을 놀이터 삼듯, 사랑방처럼 여기는 그 수많은 관람객 앞에서 고개를 떨구지 않을 수가 없었다.할아버지 할머니가 나이 어린 손녀를 데리고 온 가족도 있었고, 친구끼리, 연인끼리, 부모 자식 간에 온 경우도 있었다. 대개가 휴대폰 카메라로 흥미로운 작품들을 찍어댔다. 아예 돋보기를 가져온 할아버지도 있었다. 우리로 치면 시장에서 물건을 싸주는 비닐봉지를 들고 온 나이 든 어른도 있었다. 신발이며 아래 위로 입은 옷이며, 행색이 영락없는 노숙자 차림이었다. 어떤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 딸 이렇게 셋이서는 김밥을 싸 와서 계단에 걸터앉아 먹고 있었다. 가족 소풍을 미술관으로 온 거였다. 아무리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베이징 시민들이 그림에 관심이 있나 싶었다. 다들 작품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태도는 진지했다. 중국 건국 70년을 기념해 올 1월 22일부터 2월 24일까지 1개월간, 1949년부터 2018년까지 중국의 산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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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과 인천·(1)프롤로그]묻혀버린 '100년전의 외침', 다시 듣다 지면기사
가장 日스러운 도시 만들려던 일제… 인천 3·1운동 평가 '미미'독립운동가 유배지인 영종·무의도 '함성' 용동 '아이들의 만세'인천고 항일단체 고초사·전국 13도 대표자회의 연 만국공원등지역에 퍼져 있는 수많은 관련 인물·사건들 흔적 찾아 '재조명'2019년이 시작되자마자 다들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이라면서 야단이었다. 3·1절이 가까워지면서는 더욱 그렇다. 인천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는 3·1운동, 더 나아가 독립운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100년이나 되었건만 기초적인 연구성과조차 미미한 게 현실이다. 인천에서는 3·1 만세운동의 불길이 유난히 약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다. 일제가 가장 일본다운 도시로 만들고자 했던 인천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하다.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희미한 기억의 조각이라도 주워담아야 한다. 경인일보가 2019년 연중기획으로 '독립운동과 인천'을 진행하려는 이유이다.영종도나 무의도 같은 인천의 섬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은 인천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들 섬은 독립운동가들의 유배지였지만 3·1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도 했던 곳이다. 또한 열 살 미만의 어린아이들까지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동네를 몇 바퀴씩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도 묻혀버렸다. 인천 중구 용동을 중심으로 한 아이들의 만세운동도 제법 거창했던 모양이다. 그 중심에 우현 고유섭(1905~1944)이 있었다. 그 일단을 최원식 인하대 명예교수가 그의 책 '황해에 부는 바람'에서 밝히고 있다. 최원식 교수는 '월간공예' 1988년 6월호에 실린 시인 배인철의 큰형 배인복의 인터뷰를 토대로, 용동에서 아이들 만세운동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우현선생이 태극기를 직접 그려서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고 초가집 지붕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꽂았습니다.우리들은 모여서 만세를 부른 후 동네를 돌다가 체포되었지요. 7~8세의 어린아이들은 훈방으로 금방 풀려났지만 우현선생은 유치장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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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월북 작가 황영준 지면기사
조선 마지막 어진화가 이당 김은호 제자인천 매개 사제의 연… 월북 후 종군화가이념·친일 잣대로 회합까지 막아선 안돼남북 문화예술 교류로 '상봉展' 이어지길며칠 전 중국 베이징에 출장을 갔다가 어떤 미술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북한 미술작품 전문 전시관이었다. 그 중국인 미술관 대표는 오랫동안 북한의 미술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고 했다. 북한의 유명 작가들이 그린 작품 수천 점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가 전시되어 있지 않은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그중에 화봉(華峰) 황영준(1919~2002)의 그림은 풀세트로 있었다. 충남 태생인 황영준은 월북 작가다. 1950년 6·25 전쟁이 나자 북으로 갔다.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가로 불리는 이당 김은호(1892~1979)의 제자다. 운보 김기창, 월전 장우성 등이 동학이다. 황영준은 북에서 공훈 예술가 칭호를 받을 정도로 작품 세계가 우뚝하다. 황영준이 김은호의 제자라는 얘기를 듣고 맨 먼저 떠오른 것은 인천이었다. 이당이 인천 관교동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2명의 임금 어진을 제작한 이당 김은호와 북한의 최고 미술 작가 황영준은 인천을 매개로 하여 사제간의 연을 이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황영준의 작품은 북에서의 활동을 총체적으로 보여줄 만큼 다양했다. 그 중국인 미술관 대표는 황영준의 수많은 연습 작품도 많이 갖고 있었다.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특히 황영준이 월북 하자마자 종군화가로 참여했음을 증명하는 작품들도 있었다. 전투 현장의 최전선까지 들어가 화폭에 담았다. 길가에 길게 늘어선 부서진 차량 행렬 작품과 두 동강이 난 채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 작품은 묘하게 대비되었다. 비행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을 차량과 육상에서의 총탄 세례를 받고 추락했을 비행기의 모습이 서로 포개졌다. 못쓰게 된 3대의 탱크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모두 미군 탱크로 보였다. 포신을 땅에 처박고 있는 것, 양쪽의 궤도가 벗겨진 채로 있는 것, '824'라는 탱크의 고유번호까지 선명한 것도 있었다.전쟁이 끝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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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줌밖에 안 남은 햇살의 가난함에 마음을 비운다 지면기사
#2018년을 보내며해가 집니다.한 해가 저렇게 저물어 갑니다.석모도 상주산 꼭대기에 아스라이 걸린 저 해는우리의 일 년을 몽땅 쓸어 담고 갑니다.희망도,아쉬움도,모두 다 빨아들여 갑니다.강화도에서 하늘만 치어다보면가난한 시인 천상병의 '귀천'이 떠오릅니다.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천상병 시인이 강화에서 그랬던 것처럼우리는,한 줌밖에 안 남은 저 햇살의 가난함에서아름다운 소풍을 노래해야 합니다.-강화 고려산 낙조봉에서 글/정진오 인천본사 정치부장 schild@kyeongin.com사진/김용국 인천본사 사진부장 yo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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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작약도의 운명 지면기사
한때 전국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았지만어느 개인에게도 소유 허락하지 않은 섬인천시, 해양 친수공원으로 조성 청사진'작지만 커다란 공공재'로 쓰일 운명인듯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면서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가장 많이 간직한 섬을 꼽으라면 단연 인천의 작약도(芍藥島)가 아닐까. 해방 이후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이 섬을 소유하려 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서 오히려 자신이 망하고 말았다. 서구세력의 한반도 침략 시기, 그 풍랑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섬이기도 하다. 사람으로 치면 기구하고도 사나운 팔자라고 할 수 있다. 작약꽃처럼 생겨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는데 실제로 보면 생김새가 꼭 작약 같지는 않다. 원래 이름은 물치도(勿淄島)였다고 한다. '문둥이 시인' 한하운(1919~1975)도 작약도에서 시를 쓰고는 했던 모양인데 작약도에 작약꽃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작약꽃 한 송이 없는 작약도에/소녀들이 작약꽃처럼 피어.//갈매기 소리 없는 서해에/소녀들은 바다의 갈매기.' '한국문학' 1977년 6월호에 실린 한하운 시인의 '작약도-인천여고 문예반과'란 제목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개인 혼자서 소유하기엔 벅찬 물건이 있다. 그걸 흔히들 공기(公器)라 한다. 공공의 기관도 그렇고, 자연유산도 그렇다. 덩치의 크고 작음에 따라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공공의 이해와 직결되거나 역사적으로 긴요한 역할을 해 왔을 때 그것을 누구 혼자서 독차지할 수는 없을 터이다. 작약도의 소유권 변동을 훑어보면 그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대개의 섬이 그렇듯 작약도 역시 국가 소유였다. 영종진(永宗鎭)에 땔나무를 공급하던 수목지였다고 한다. 일제시기에는 스스기라는 일본인의 소유가 되었다. 처음으로 개인에게 넘어간 거였다. 해방 후 이종문이라는 사람이 이 작은 섬에 살면서 고아원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는데 6·25 전쟁으로 폐쇄됐다. 전쟁이 끝난 뒤 성창희라는 이가 불하받았다가 문제가 되었으며,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가졌다가 한보가 부도가 났다. 1996년 인천의 해운업체 원광이 소유해 해상 관광단지를 건설하려다가 원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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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노무현의 인사법 지면기사
장관 퇴임후 시장 수행비서에 90도로 인사진정성 묻어나 상대방 마음 움직이게 해지난 지방선거때 허리 굽혔던 정치인들지금은 목이 '뻣뻣'… 그땐 정중한척 했을뿐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집 창문 밖에 한 달가량이나 조기(弔旗)를 내걸었던 인천시 공무원이 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이념 성향이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이른바 '노빠'도 아니었다. 그는 딱 한 차례 인간 노무현과 만났을 뿐이었다. 그 만남이 그렇게 만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천생 시골 사람 같은 소박함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날 때고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다. 이른바 노무현의 인사법은 그렇게 퍼져나갔다. 조기를 내걸었던 그 인천시 공무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마치 부모라도 돌아가신 양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조기를 내거는 것 말고는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아직도 보수적 성향의 이 공무원은 잘 알지도 못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왜 그렇게 애통해 했을까. 아주 사소한 인연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타계하기 7년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6대 해양수산부장관을 그만둔 이듬해, 제16대 대통령 취임 1년 전인 2002년이었다. 노무현 전 해수부장관이 인천시청을 찾았다. 최기선 인천시장 시절이었다. 노 전 장관이 시장실에 들어서면서 최 시장의 수행비서와 먼저 인사를 나눴다. 노 전 장관은 그 수행비서에게 허리를 거의 90도로 꺾으며 악수를 청했다. 7급이었던 그 수행비서는 장관을 지낸 분에게 그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받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깍듯이 인사하던 그는 이듬해 대통령이 되었다. 이 또한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그 7급 공무원의 마음속에 노 전 대통령이 그렇게 크게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는 어디를 가나 자신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은 것을 이야기하고 다녔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그랬고, 퇴임하고 나서도 그랬다. '꼴통'까지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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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환경공단, 국가생산성대회 '총리 표창' 지면기사
인천환경공단(이사장·이주호)은 16일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제42회 국가생산성대회'에서 서비스우수기업 부문 국무총리표창을 수상했다고 밝혔다.국가생산성대회는 매년 산업현장에서 생산성 향상을 통해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기업, 법인 및 단체와 유공자를 발굴해 포상하는 정부포상제도다. 인천환경공단은 환경기초시설 운영을 통한 환경보전은 물론 다양한 에너지원과 시민편의시설을 이용한 온실가스 감축과 사회적 비용 절감 노력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주호 공단 이사장은 "이번 수상을 계기로 시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시민들이 원하는 맞춤형 환경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면서 "앞으로도 '환경으로 행복한, 살고 싶은 도시 인천'을 만들도록 인천의 공기업으로서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