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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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9(끝)]남과 북을 잇는 뱃길의 시작 인천항 지면기사
'서울-평양 인접' 입지·수도관문 역할 비슷… 분단 전에도 교류 활발구호물자 운송 등 남북 오가던 유일한 정기항로, 2011년이후 올스톱北 해외연결된 항로 없어… 경협 재개땐 황해 물동량 환적 선점기회남북이 그동안 얼어붙은 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의 기지개를 켜는 화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인천항의 가치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인천에서는 남북 교류의 중심으로서 인천항의 역할을 재정립하고 평화의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인천항이 준비해야 할 것들을 찾는 세미나 또는 포럼이 앞다퉈 열리고 있다. 남북 경제협력의 핵심 거점 항만 구실을 할 인천항의 가치와 중요성이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인천항의 닮은꼴 남포항인천항이 남한의 수도 서울의 관문이라면, 남포항은 북한의 수도 평양의 관문이다. 인천항과 남포항은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척 닮았다.남북이 본격적으로 경협에 나선다면 수도를 배후에 둔 인천항과 남포항의 역할도 자연스레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천항이 남북 해상 교류의 가장 중요한 거점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인천항은 서울 경계와의 거리가 불과 20여㎞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가깝다. 고속도로와 철도 등 교통 인프라도 잘 갖춰져 있다. 남포시 또한 평양의 위성도시로, 도로·철도 등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남포항은 평양시에서 남서쪽으로 약 45㎞ 떨어진 대동강 하류의 서해안에 위치한다. 평양화력발전소·남포화력발전소와 인접해 있어 전력 공급도 원활한 항만이다. 그래서 북한 제1의 항구로 불리는 남포항은 남북 경협의 가장 중요한 항만으로 꼽힌다. 두 항만은 서해의 조수 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 표참조서로 닮은 두 항만은 분단 이전에 교류가 활발했다.일본인 저널리스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편찬한 '인천개항 25년사'를 보면, 인천항과 남포항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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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8]인천항 운영기관(하)-인천항만공사 지면기사
내년 4월 수도권 1호 크루즈전용터미널 개장 중~일~러 항로운영신국제여객터미널·골든하버 프로젝트 순항 '해양명소' 자리매김'300만TEU 돌파' 인천항 하역 능력 넘어서… 신항 컨 부두 개발남항 배후에 車물류클러스터 조성 중고차 판매·재생센터 등 구축2025년 인천 송도국제도시 9공구에 있는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크루즈 '심포니 오브 더 시즈'호(22만5천t급)에서 내린 9천여 명의 승객으로 북적거린다. 크루즈에서 하선한 승객들 가운데 일부는 인근에 조성된 상업·업무·레저 복합단지 '골든하버' 리조트로 향했다. 크루즈 전용 터미널 인근에 있는 인천항 신국제여객터미널도 한중카페리에서 내린 중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신규 개장한 인천 신항 컨테이너 부두 1-2단계 구역에는 컨테이너가 쌓여 있다. 인천항은 2025년 400만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했다. 남항에 있는 자동차 물류클러스터에서는 쉴 새 없이 차량이 수출되고 있다. 이는 인천항만공사가 목표하는 2025년의 인천항 모습이다.인천항은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연간 컨테이너 물동량 300만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를 돌파했다. 1974년 인천 내항 4부두에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부두가 문을 연 지 43년 만에 이룬 성과다. 300만TEU를 달성한 인천항은 '해양관광의 메카'로 도약할 준비에 나서고 있다.우선 내년 4월 송도 9공구에 수도권 최초의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연다. 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22만5천t급 크루즈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를 자랑한다. → 위치도 참조5천~6천명의 관광객이 탈 수 있는 초대형 크루즈가 인천항에 기항하게 되는 것이다. 국내 크루즈 전용부두는 부산 북항(22만t급), 서귀포 강정항(15만t급), 제주항(15만t급), 속초항(10만t급) 등지에 있는데 인천항이 가장 크다.인천항 크루즈 전용 터미널이 문을 열면 국내 해양관광 시장에 일대 지각변동이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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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7]인천항 운영기관(상)-인천항만공사 지면기사
개항 이래 국가가 주도해온 항만 개발·운영1990년대 후반 국제경쟁 위해 도입논의 불구정부 예산 탓·투포트 정치적 논리 밀려 방치시민들, 서명 운동등 펼쳐 2005년 출범 이뤄인천항을 관리하는 기관은 어디일까? 인천항이 개항한 1883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만시설을 구축하는 업무는 관세 사무행정을 맡았던 인천해관(세관의 중국식 이름, 1907년 세관으로 개정)이 담당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 군정청 교통국 인천부가 업무를 맡았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교통부 인천해사국이 인천항 업무를 수행한 이후에는 기관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인천항의 개발과 관리·운영 업무는 모두 정부에 의해 이뤄졌다.인천항 관리권은 2005년 7월 기업에 이관됐다. 1997년 부두운영사 제도 도입으로 민간 하역사들이 정부로부터 부두 시설을 임차해 운영한 적은 있지만, 인천항 전체 운영 권한이 민간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업에 넘어간 건 개항 이후 처음이다. '인천항만공사'가 그 주인공이다.항만공사는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 관(官)이 주도하던 항만 개발과 운영을 담당한다.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물류환경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중심 항만(Hub-Port) 경쟁에서 뒤지지 않기 위해 1999년 3월 국무회의를 통해 항만공사제도를 도입하기로 하고, 재정자립도가 높았던 인천항과 부산항을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인천항의 경우 기존의 정부 관리 체제로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는 북중국 항만들과의 경쟁이 버거울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하지만 정부 내에서도 항만공사 설립을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해양수산부는 항만공사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선 4천억원의 정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추산하고, 정부가 일정부분 예산을 보조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반면,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는 항만공사에 예산 지원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도 물류비 상승 등을 이유로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인천시민들은 인천항 발전을 위해선 항만공사제도를 조기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시민들은 부산항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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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6]하역원과 포맨 지면기사
선박에 원료·제품 싣거나 내리는 역할 출항에 맞춰 신속하게 처리 정밀성 필요컨테이너·크레인 도입으로 맞은 '위기'내항TOC통합 등 변화 겪으며 활로 찾아최근 찾은 인천항 내항 부두. 한국지엠의 신차들이 부둣가 찬바람을 뚫고 파나마 선적(船籍)의 '메디터레이니언 하이웨이(MEDITERRANEAN HIGHWAY)'호로 줄지어 오르고 있었다. 작업자들은 차량 전후 30㎝, 차량 좌우 10㎝의 빽빽한 간격으로 차를 손상 없이 실어야 한다. 그만큼 전문성이 필요하다. 시간당 60~80대 정도를 실을 수 있는데, 배가 출항하는 시간에 맞춰야 한다. 작업 속도도 매우 중요하다. 정확한 수량을 파악하는 일 역시 이들의 몫이다. 배에서 먼저 내릴 차량을 가장 나중에 싣는 등 선적(船積) 순서도 신경 써야 한다. 이 배의 경우 총 15개 층으로 돼 있는데, 선적 순서가 뒤바뀌면 목적지에서 차량을 내리는 시간이 더 걸린다.차량을 직접 운전해 선내에 싣는 '드라이버', 실린 차를 정밀하게 주차하는 '키커', 키커가 정확한 위치에 차를 댈 수 있도록 돕는 '신호수' 등 하역원과 이들을 총괄 지휘·감독하는 '포맨' 간 호흡이 잘 맞아야 한다.이들은 배의 크기에 따라 십 수명씩 조를 이뤄 움직인다. 이번 선적 작업엔 80여 명의 인력이 6개 조로 구성돼 투입됐다. "하역원들을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라고 하면, 포맨은 지휘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들이 한 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문제없이 작업을 마칠 수 있다는 의미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포맨 송한섭(60) 감독은 "제품 손상 없이 계획된 물량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도록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지난 40여 년간 하역원과 포맨 등 하역업계에서 일한 그는 "조금만 일하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는데,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벌써 40년이 됐다"며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일이지만,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포맨 송한섭 감독을 비롯한 하역원들의 이번 작업은 밤늦게까지 이어졌다.하역원은 부두에 있는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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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5]줄잡이와 라싱 지면기사
수천~10만t넘는 선박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비트와 연결하는 '줄잡이'과거엔 항만 공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50~100m 접안 위치 옮기기도라싱 작업자들, 컨테이너·화물 등 선적 하면서 철제기구·로프 이용해 고정파손 예방·평형 유지 '출항전 필수 업무'… 급하더라도 가장 꼼꼼하게 진행대한민국을 흔히 '통상 국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고, 지하자원이 부족하다. 이런 점 때문에 교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 바로 '통상 국가'다. 통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항만과 선박이다. 우리나라 교역의 98%가 바다를 통해 이뤄진다.항운노조는 바다를 통한 교역에 있어 한 축을 담당한다. 선박이 항만에 접·이안하는 것을 돕고, 짐을 내리고 싣는 모든 과정에서 역할을 한다.지난 20일 오전 11시 인천항 내항. 인천과 중국 칭다오를 오가는 카페리선 골든브릿지5호가 입항을 위해 안벽 가까이 다가오자 등에 'Line Handling'이라고 쓰인 옷을 입은 항운노조원들이 배를 맞을 준비를 했다. '줄잡이' 또는 '강취방'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선박이 부두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선박에서 제공하는 줄을 부두에 설치된 'ㄱ'자 모양 구조물인 '비트'에 고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보통 한 척의 배는 앞뒤로 각각 4~6줄을 연결한다. 적게는 수천 t에서 10만t 이상의 무게인 선박을 고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에 줄의 너비는 10㎝ 이상으로 두껍다.작업은 선박에서 육지 부분으로 내린 줄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줄은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 이와 연결된 '오소리 줄'이라고 불리는 얇은 줄로 구성된다. 선박에서 줄을 육지로 던지면 줄잡이들이 얇은 줄을 잡으면서 작업이 시작된다. 이때 비트에 묶어야 하는 줄은 바다에 빠져 있다. 줄잡이들은 먼저 얇은 줄을 끌어당긴 뒤, 비트에 연결하는 굵은 줄이 나타나면 비트에 연결한다. 줄 자체가 무거운 데다 바닷물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두 명이 힘을 합쳐 줄을 끌어당긴다. 줄을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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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4]인천항운노조 지면기사
개항기 인천항으로 몰려든 부두 노동자들별다른 장비는 커녕 일자리 불안정 시달려항운노조 시초 '모군청' 조합해 취업 주선인천항운노동조합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동조합'에 그치지 않는다. 130여 년 인천항의 역사를 함께한 주역이자, 지금의 인천항을 있게 한 역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변한 장비 하나 없던 시절 부두 노동자들은 맨몸으로 항을 드나드는 짐을 날랐다. 일제강점기엔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산업화 시대에는 인천지역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2000년 이후에는 기계화, 상용화(항만 인력 공급 체제 개편), 내항 통합 등의 고비를 극복하며 인천항 격동의 시기마다 온몸으로 맞섰다.우리나라에 부두 노동자가 처음 나타난 건 '개항기'다. 농촌에서 땅 한 평 없어 빌어먹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위해 제물포로 몰려들면서다. 이들은 처음에 어민, 소농민 등 일시적인 노동에 종사했다. 항만 물동량이 많아지면서 상시적 노동이 필요하게 되자 이들은 부두 노동자가 됐다. 처음에는 화주가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었다. 부두 노동자 특성상 일정하지 않은 작업 시간과 작업량으로 안정적인 노동 공급이 어려워지자 한국인 하역원은 중구 내동에 '모군청(募軍廳)'이라는 하역조합을 꾸려 노동자의 취업을 주선했다. 이 하역조합이 항운노조의 시초다. 조합은 개항 이후부터 2007년까지 정부의 관리하에 독점적 노무공급체제를 인정받으며 성장했다.인천 부두 노동자의 노동쟁의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부터 본격화했다. 일제의 침탈이 심해지면서 부두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일본의 군수 물자와 수탈 물자를 하역했다. 강경애(1907~1943) 소설 '인간문제'를 보면 당시 인천항 부두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은 '고통'에 가까웠다."짐이 와르르하고 부두에 쏟아졌다. 짐에서 떨어지는 먼지며 바람결에 불어오는 먼지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몸부림치는 바람에 가라앉지를 못하고 공중에 뿌옇게 떠돌았다. 사람을 달달 볶아 죽이고야 말려는 듯한 지독한 볕은 신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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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3]인천 강화도 새우젓 지면기사
국내 젓새우 70~80% 잡히는 강화도… 배에서 바로 염장해 뛰어난 품질 '전국 입소문'매년 김장철마다 북새통 이루는 외포항 수산시장, 저렴하고 맛 좋은 '추젓' 인기 높아 현대식 냉동 창고 갖춘 경인북부수협 경매장, 지역 모든 제품 거쳐가는 '유통 중심지'김장에 빠질 수 없는 젓갈의 원재료가 되는 젓새우는 인천의 바다가 선물하는 중요한 수산자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인천 강화도 인근 바다는 젓새우 황금어장으로 불린다. 강화에서 생산하는 새우젓 또한 많은 사람으로부터 명품 대접을 받는다.때문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강화의 포구는 새우잡이 어선으로 들썩이고 전국 각지에서 새우젓을 사러 온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룬다.지난 6일 찾아간 강화군 외포리에 있는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은 김장철을 맞아 새우젓 등 젓갈을 사러 온 손님과 관광객으로 북적였다.현재 외포항 젓갈 수산시장에는 18개 젓갈 판매 매장이 성업 중이다. 새우젓을 주력으로 밴댕이, 멸치 등 어림잡아 20여 종류가 넘는 젓갈을 판매하고 있다.이날 시장에서 만난 조경숙(50)씨는 서울 강남 수서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조씨는 추젓 12㎏을 샀다. 김장 100포기를 하려면 10㎏ 정도 필요하다고 한다. 그는 "강화 새우젓이 명품이라기에 올해는 강화 새우젓으로 김장을 담아보려고 멀리까지 찾아왔다"며 "김장 맛이 좋으면 앞으로 계속 강화 새우젓을 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충남 논산 강경에서 젓갈을 구매해 김장을 했다고 한다.새우젓은 가을에 담근 것을 '추젓'이라고 부른다. 5월에 잡은 새우로 담근 젓을 '오젓', 6월에 담근 젓을 '육젓'이라고 하고, 겨울에 담근 젓을 '동백하젓'이라 부른다.김장철에는 가격이 저렴하고 맛도 좋은 추젓이 인기다. 오젓과 육젓은 추젓보다 가격이 비싸다. 이날 추젓이 1㎏에 2만원, 오젓은 2만5천원, 육젓은 4만원 선에서 판매됐다.잡히는 시기에 따라 새우 크기도 다른데, 추젓은 길이가 1~2㎝, 오젓은 2~3㎝, 육젓은 3㎝ 이상 된다.짠맛의 세기를 결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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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2]인천항 관문 '갑문' (하) 지면기사
1910년대 미곡 수출 중심으로 떠오른 인천日, 곡물 반출위해 축항… 죄수등 강제동원처참했던 공사현장 '백범일지'에도 기록돼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8년 10월 26일. 일본우선주식회사 깃발을 단 기선 한 척이 인천 앞바다에 있는 사도(沙島)를 지나 바다 위 거대한 철문 앞에 멈췄다. 두 개의 갑문을 지난 배는 400m가 넘는 거대한 길이의 부두에 정박했다. 8년여 동안 진행한 인천항 축항(갑문 건설) 공사를 마무리하고 준공식에 앞서 가진 시험 운항이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30분께 2대 조선총독을 지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등 700명의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인천항 축항 공사 준공식이 개최됐다. 수심이 얕고 9~10m에 달하는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24시간 선박 접안이 어려웠던 인천항에 4천500t급 기선 세 척이 항상 정박할 수 있는 항만시설이 만들어진 것이다.조선총독부는 물자를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해 1911년 현재 인천항 제1부두 근처에서 갑문 건설사업을 시작한다. 1933년 발간한 인천부사에 따르면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한 공사에는 391만 4천455엔이 사용됐다. 1918년 당시 일본 내 쌀 한 섬(150㎏) 가격이 10엔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일본 돈으로 300억 엔, 우리나라 돈으로 3천억 원이 넘는 예산이 사용된 셈이다.조선총독부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이유는 인천항이 우리나라 미곡 수출의 중심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인천항은 1910년대부터 군산, 부산 등을 제치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쌀과 콩을 수출하는 항구 도시가 됐다고 한다. 1910년대 인천에서 투기의 일종인 '미두(米豆)'가 가장 성행한 것도 인천으로 쌀이 모였기 때문이다. 미두는 일정한 날짜를 정해 놓고 그 기간 내에 쌀을 사거나 팔아 시세 차익을 얻는 방식이다.일본이 우리나라 곡물을 자국으로 반출하기 위해 진행한 축항 공사에는 조선인이 동원됐다. 특히, 인천 내동에 있던 경성감옥 인천 분감에 수감된 조선인 죄수들이 대거 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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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1]인천항 관문 '갑문' (상) 지면기사
"NGB 인천대교 통과. 10시 20분에 갑문 도착합니다."지난달 19일 오전 10시 10분께 인천항 갑문 관제탑에서 무전이 울렸다. 인천항에 들어오는 선박에 탑승한 도선사가 보낸 것이다. 'NGB'라고 지칭된 이 선박은 인천항과 중국 웨이하이(威海)를 오가는 3만 1천t급 대형 카페리선 '뉴골드브릿지7호'. 인천 내항에 있는 제2여객터미널에 입항하려면 반드시 갑문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갑문 관제탑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한 것이다.10시 20분께 뉴골든브릿지7호가 갑문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갑문 주변에는 경고음이 울렸고, 1천50t에 달하는 외측 갑문이 천천히 열렸다. 배가 갑거(수로)에 완전히 진입하자 외측 갑문이 닫혔고, 배에서 내린 4개의 줄을 줄잡이들이 고정하기 시작했다. 인천항만공사 갑문운영팀 강석현 차장은 "내항과 외항의 수면 높이를 맞춰야 한다. 수로에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배가 흔들려 갑벽에 부딪힐 수 있기 때문에 배를 고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배가 고정되면 수로에 물이 들어온다. 이날 10시 20분께 외항의 수위는 4.7m. 내항의 해수면 높이는 최소 7m로 유지되기 때문에 수로에서 내항과 외항의 수위를 맞춰야 한다. 강 차장은 "내항의 수위가 높은 경우에는 내항 쪽에서 (수로로) 물을 보내고, (배가 수로에 들어온 후) 외항의 수위가 높으면 바다 쪽 외항으로 물을 흘려보낸다"고 했다.1883년 개항한 인천항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9~10m의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해야 했다. 썰물 때 갯벌이 훤히 드러날 정도여서 큰 배는 물론 작은 배도 인천항에 접안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선박이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으면 작은 배가 다가가 사람과 짐을 날랐다.김탁환과 이원태가 쓴 소설 '아편전쟁'에서도 이 같은 초창기 인천항의 모습이 묘사된다.'인천은 수심이 얕고 아직 부두가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 상선이 곧바로 바닷가에 닿지 못한다오. 바닥이 평평한 짐배가 나가서 상선에 붙소. 승객과 상품을 짐배에 옮겨 싣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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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40]연평도 꽃게잡이 지면기사
조기 인기에 밀려 그냥 버리던 찬밥1960년대 들어서 '대표수산물' 등극장비 열악했지만 작은배 가득 채워中불법조업 등 남획탓 어획량 급감'어민들 주 수입원' 자원 보호 시급국내 유명 포털사이트에서 '꽃게'를 검색하면 관련 검색어에 인천 옹진군 '연평도'가 나온다. 연평도를 검색하면 '연평도 꽃게'가 관련 검색어로 뜬다.서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꽃게는 인천의 대표적인 수산물이다. 특히 인천 앞바다 서해 5도 중 한 곳인 연평도는 꽃게 산지로 유명하다. 인천 소래포구 어시장이나 인천종합어시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꽃게가 한가득 담겨 있는 통과 그 앞에 적혀 있는 '연평도산'이라는 팻말이다.꽃게는 봄철과 가을철에 잡힌다. 봄철에는 알이 가득 배 있는 암꽃게가 주로 잡히며 암꽃게는 주로 게장을 담가 먹는다. 한정식에서 빠지지 않는 간장게장은 암꽃게로 만든다. 가을철에는 찜이나 탕으로 해먹는 숫꽃게가 살이 많고 맛도 좋다. 여름철은 꽃게 산란을 위해 금어기로 지정돼 있다. 가을철 꽃게잡이는 8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이뤄진다. 수온이 내려가면 꽃게가 자취를 감추기 때문에 어민들은 어획 활동을 하지 않는다.지난 11일 새벽 5시 40분 연평도 당섬선착장. 해가 뜨기 직전이라 어둠이 가시지 않았지만, 꽃게잡이 어선들이 켜 놓은 조명들이 선착장 주변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전날 풍랑주의보로 출항하지 못한 어선들이 만선을 기대하며 출항 준비에 한창이었다. 9.8t급 자망 어선인 '정복호'도 출항 준비를 마쳤다. 6시가 조금 지나자 20여 척의 어선이 일제히 바다를 향해 키를 돌렸다. 정복호는 연평도 남서쪽 해역으로 향했다.정복호 유호봉(60) 선장은 1990년대 초부터 연평도에서 꽃게잡이를 했다. 중간에 강원도나 전라도 앞바다에서 일을 하긴 했지만, 대부분 연평도에서 꽃게잡이 어선을 탔다. 자망 어선은 선원 6명과 선장 1명이 한 조로 일한다. 너비 5m 길이 500m의 직사각형 모양의 그물을 바다에 수직으로 펼쳐놓은 뒤 며칠 있다가 걷어 올리는 방식으로 조업한다. 그물과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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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9]인천항 향토하역사-우련통운 지면기사
73년간 인천항과 함께 자라온 인천의 향토 하역사이자 종합물류기업인 우련통운은 '인천우체국 사서함 1호'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우편사서함이란 우체국에서 개인이 직접 우편물을 찾아갈 수 있는 전용 수취함이다. 우체국에 가야 볼 수 있다. 인천항 인근에 있는 우련통운(주)는 인천우체국에서 사서함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장 먼저 신청해 사서함 1호의 주인이 됐다. 우련통운은 1923년 신축한 인천우체국이 2003년 중구에서 연수구로 이전하고 나서도 사서함 1호를 계속 사용 중이다. 인천우체국에는 1978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우련통운의 전신인 청구양행이 1945년 설립된 것을 고려하면 그 이전부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서함 이용 초기에는 관공서 공문, 세금계산서 등 각종 서류와 공문이 하루 100통 이상 도착해 총무과 전담 직원이 매일 우체국을 방문해 우편물을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간단한 서류 정도만 받을 뿐이다. 우련통운 윤기림 대표이사는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우편사서함을 왜 유지하는지 의아해 하겠지만, 당시 최첨단 우편서비스를 가장 먼저 채택했다는 상징이 크다"며 "우련통운은 인천의 향토 기업으로서 항상 도전하고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가고자 노력하는 회사"라고 설명했다.1945년 무역회사로 첫발 디딘 '우체국사서함 1호'세계적선사 대리점·육상운송 진출하며 기틀 닦아TOC 도입으로 내항 2부두 맡아 사료 중심 급성장최근 잇단 위기, 소금 제조 등 사업다각화로 극복■ 인천~중국 간 무역업에서 시작우련통운은 1945년 항만하역사업을 시작으로 현재는 화물운송, 보관, 제3자물류 등 인천항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업을 도맡았다. 지금은 내항통합으로 항만 하역기능이 위축됐지만, 인천 내항 2부두의 운영사이기도 했다. 운송사업 분야에서는 우련육운, 우련TLS(주)를, 물류사업 분야에서는 우련국제물류(주), 우련평택물류(주), 인천콜드프라자(주), 제조업 솔트원(주) 등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 연혁 참조우련통운의 모태 기업인 '청구양행'은 인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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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8]인천항 향토하역사-영진공사 지면기사
초기 미군 물자 위주에서 일반분야로 사업 넓혀1972년 사채동결 위기, 바레인 진출하면서 극복한중수교 이후 부두 직접 조성하며 교역에 대비 인천항과 함께 성장한 (주)영진공사가 어느덧 환갑을 앞두게 됐다. 1961년 인천의 향토 하역사로 출발한 영진공사는 대한민국 관문항인 인천항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인천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다.영진공사는 화물 하역부터 운송과 보관에 이르기까지 물류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인천항 최초로 인천 남항에 민간투자 부두를 만들어 체선·체화 방지에 이바지하고, 비교적 최근에 개장한 인천 북항 철재부두 주(主)하역사로 선정돼 세계적 수준의 고객 중심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동의 관문인 바레인에 진출해 공항·항만 운용 능력을 인정받은 영진공사는 '1등 서비스가 아니면 시작하지 않겠다'는 기업 철학으로 21세기 물류산업을 대표하는 글로벌 종합 물류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영진공사 이강신 회장은 "열린 시각으로 시대적 변화에 주목하면서 과감한 도전과 의지로 고객과 함께하는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아낌없는 성원에 감사하고 있다"며 "고객 중심의 21세기 글로벌 물류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미군 부대 군수물자 하역으로 출발2016년 12월 이기상 전 영진공사 회장이 타계하자 항만업계를 비롯한 지역사회 각계 인사들의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그는 인천항발전협의회 초대 회장, 인천항만공사 초대 항만위원장, 인천항만물류협회 회장 등을 맡으면서 인천항 발전에 이바지했다. 인천시의회 초대 의장, 대한적십자사 인천지사 회장, 인천시 야구협회 회장, 인천시 체육회 부회장 등 인천 정계와 사회단체, 체육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항만은 물론 인천의 큰 어른이었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대학 동기(연세대 56학번)이기도 하다.영진공사 초대 회장이자 창업주인 그의 형(兄) 고(故) 이기성 전 회장 역시 인천경제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인천상공회의소 회장을 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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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7]인천항 향토하역사-선광 지면기사
조선·광복서딴 사명… 창고에서 보관·운송 업무로 첫발1980년대 중동 건설 붐때 해외 하역 작업 통해 급속 성장발전소·교량 자재 등 운송 도맡아·양곡 사일로 현대화도2005년에 컨 진출… 2015년엔 야드 자동화 컨터미널 개장1883년 개항한 인천항이 지난해 304만 8천TEU의 컨테이너 물동량을 처리하며 전 세계 40위권 항만으로 성장한 데에는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향토 하역사들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특히 향토하역사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선광(鮮光)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광은 인천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인천 신항에서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을 운영하며 인천항 컨테이너 물동량의 3분의 1 가까이 처리하고 있다. 인천항의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는 평가다. SNCT는 지난해 82만TEU에 달하는 물동량을 처리했다. 이런 선광도 1948년 창업 초기에는 작은 창고에 불과했다. → 연혁 참조#선광의 태동선광은 인천 신항을 중심으로 한 컨테이너 하역사업과 평택·군산 등 지역에서의 항만 하역사업, 중량물 운송, 보관 물류, 사일로 사업 등을 활발히 하고 있다. 선광문화재단 등을 통한 사회공헌사업도 충실히 진행하고 있다. 선광은 해방 이후 인천항의 세관 창고를 기반으로 보관과 운송 사업을 시작하면서 태동했다. 70년 전인 1948년 4월이다. 창업주인 고(故) 심명구 전 회장은 선광공사라는 이름으로 인천에서 세관 창고를 임대받아 물건을 보관하고, 내주는 일을 시작했다. 심명구 전 회장의 형제는 모두 5명으로, 형님 고(故) 심봉구 씨와 세관장을 역임한 첫째 동생 고(故) 심영구 씨, 서울대 경영대학장을 역임한 고(故) 심병구 씨, 지역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낸 심정구 명예회장(87) 등이다.선광이라는 사명은 '조선'과 '광복' 두 단어에서 각각 선(鮮)과 광(光)을 가져와 정했다. 당시는 국민들 사이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국호보다는 조선(朝鮮)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시기였다. 창립 당시 사무실은 현재의 신포동 주민센터 인근의 작은 공간이었다. 당시 세관으로부터 임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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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6]한국과 중국 바닷길 잇는 한중카페리(下) 지면기사
웨이하이시, 항로개설후 인구20만→280만 성장'한러팡' 조성 쇼핑몰·식당·야시장 한국 판박이부산항에 밀려 어려움 겪던 수도권 관문 인천항'中 수출입 선점'통해 컨테이너 등 다변화 성공사드·금한령으로 찾아온 위기 '고급화'로 돌파 "웨이하이는 한국인들이 만든 도시입니다."중국 산둥(山東)성 웨이하이(威海)시에서 만난 위동항운 중국 측 관계자는 웨이하이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인천과 웨이하이를 오가는 한중카페리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웨이하이에 고층 건물은 15층 규모의 '웨이하이 호텔' 하나밖에 없었다"며 "이마저도 한중카페리 개통으로 늘어나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한중카페리 개통 이후 한국 기업들의 진출이 이어지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고, 유통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며 "지금의 웨이하이 모습을 만든 것은 한국인들"이라고 강조했다.지난 16일 찾은 웨이하이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의 한 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인천~웨이하이 카페리가 내리는 '웨이하이 신국제여객터미널'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위고광장에 도착하자 곳곳에 한국어로 된 간판이 눈에 띄었다. 광장 중심에는 롯데백화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주변에는 우리나라 유명 커피 브랜드나 외식 업체가 줄지어 있었다. 위고광장에 위치한 주중 인천(IFEZ·인천경제자유구역) 경제무역대표처 고경욱(51) 부대표는 "한중카페리가 개설된 이후 웨이하이는 중국 산둥성의 물류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웨이하이 시민들에게 한국은 지역경제를 활성화해준 고마운 나라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웨이하이시가 조성한 '한러팡(韓樂坊)'은 한국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습이다. 쇼핑복합문화센터와 한인타운을 결합한 한러팡은 한국 화장품 판매장, 영화관, 한국식 야시장 등이 운영되고 있다. 한국상품전시교역센터라는 대형 쇼핑몰이 눈길을 끌었고, 골목마다 한국어로 쓴 간판이 넘쳐났다. 한러팡 입구에는 돌하르방과 장승 등이 놓여 있었고,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치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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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5]한국과 중국 바닷길 잇는 한중카페리(上) 지면기사
한중수교 체결보다 빠른 1990년에 열린 인천~웨이하이 항로 저렴한 가격에 비자 발급 장점, 초기 표구하기 1개월씩 걸려관광객 수요 항공기에 빼앗기면서 보따리상 비율 크게 늘어호텔같은 시설·공간… 최근들어 한국인 단체이용객 증가세인천공항에서 중국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威海)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남짓 걸린다. 하지만 인천항에서 한중카페리를 타면 14시간이나 소요된다. 누가 바다에서 그렇게 긴 시간을 허비할까 싶지만, 지난해에만 13만 6천605명이 한중카페리를 이용해 인천과 웨이하이를 오갔다.15일 오후 6시께 인천 내항 1부두. 길이 196m, 너비 27m 크기의 대형 카페리선 '뉴골든브릿지7호'(3만 1천t급)에 올랐다. 이 배는 한중카페리 가운데 처음으로 우리나라 기업인 현대미포조선에서 건조한 신조선(新造船)이다. 그동안 한중 노선에 투입된 카페리들은 중국에서 건조됐거나 중고인 선박이 대부분이다. 한중카페리선사 위동항운의 새 카페리선 뉴골든브릿지7호는 기존에 운영하던 2만 6천t급 카페리선 '뉴골든브릿지2호'보다 길이가 10m가량 길고, 너비도 3m 정도 넓다. 컨테이너도 2호보다 30TEU(1TEU는 길이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 많은 325TEU를 실어 나를 수 있다.오후 7시가 되자 '두드루룽' 소리와 함께 선체 엔진이 돌았다. 갑판 위에 서자 상큼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배에 오른 승객들은 새로운 선박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선상에서 만난 위동항운 윤태정(56) 수석사무장은 1992년부터 한중카페리에서 근무한 베테랑이다. 그는 "1990년 인천과 웨이하이를 잇는 한중카페리가 처음 출항한 이후 승객 구성이 크게 3번 정도 바뀌었다"고 설명했다.한국과 중국의 서해 뱃길을 운항하는 한중카페리는 1990년 9월 15일 처음 운항했다. 한중 뱃길은 중국에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1949년 이후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당시 중국을 가려면 홍콩을 거쳐야 했다. 한중 수교(1992년)가 맺어지기 2년 전 최초의 여객 직항로인 '인천~웨이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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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4]바다 수호 첨병 해양경찰 지면기사
왕산마리나 하늘바다파출소 낮에는 배·밤에는 간이사무실 대기낚시·레저 증가에 따른 고립·조난 등 5~7분내 출동 빠르게 대응부산서 해양경찰대로 첫발, 中어선 출몰·北접경 영향 인천 이전6 → 323척 외적성장 주력하다 '2014년 세월호 책임론' 해체 아픔이후 역량 강화 사업 전개… 연안구조선 보급 등 국민 보호 노력우리나라 바다 넓이는 44만3천㎢로, 남한 면적의 약 4.5배에 달한다. 이처럼 넓은 바다는 어족 자원의 보고이면서 다양한 경제활동이 이뤄지는 곳이다. 바다를 통한 교역과 이와 연관된 산업들은 비단 바다에서뿐 아니라 육지와 연결되면서 다양한 가치를 창출한다. 인천은 바다를 끼고 있는 해양도시다. 160여 개의 섬이 있고 수도권에 위치에 있어 바다를 기반으로 한 관광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긍정적인 측면과는 반대로 바다엔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사고가 나면 수많은 생명을 한순간에 잃기도 하는 곳이 바다다. 이처럼 중요하면서도 위험한 바다에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해양경찰'이다.9월 10일 오후 2시께 인천시 중구 왕산마리나. 이곳은 인천해양경찰서 하늘바다파출소가 운영하는 '연안구조정' 정박 장소다. 18t급 선박인 연안구조정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인근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수욕장 등에서 조난 신고 등이 들어오면 출동해 구조 업무를 수행한다. 무의도 같은 섬에서 야간 시간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도 구조정이 출동해 환자를 이송한다. 최근 보트 등 해양레저기구를 이용하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해양경찰의 역할은 점차 커지고 있다.이날 연안구조정을 운항한 하늘바다파출소 배병진(43) 경위는 "순찰을 돌며 혹시나 있을 비상 상태에 대비한다"면서 "이 일대 바다는 낚시나 레저기구를 사용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에 사고도 많이 발생한다. 특히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고립되거나 먼바다로 휩쓸리는 상황도 종종 발생한다"고 말했다.하늘바다파출소는 2~3명이 주간에 연안구조정에서 생활한다. 빠른 출동을 위해서다. 야간에는 인근에 있는 왕산해수욕장에 간이사무실을 마련해 놓고 대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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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3]컨테이너와 컨테이너 수리업 지면기사
직육면체 규격화된 컨… 선적·운반 기계화·화물보호에 탁월15년 수명 불구 충격·부식 탓 활동마친 설비 10대 중 3대 손상작업자들, 국제 기준에 맞춰 작은 틈·찌그러짐 꼼꼼하게 복구1970년대 리어카로 첫발뗀 인천업체, 남항·신항등 15곳 활동컨테이너. 우리가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나라에서 원하는 화물을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안전하게 받아볼 수 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다. 국제적으로 규격화된 컨테이너는 1950년대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해 물류업계의 혁신을 가져왔다. 종류와 크기, 무게 등 천차만별인 화물을 배에 싣고 내리기 위해선 사람이 직접 들고 날라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과정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고 비용 또한 컸다. 컨테이너는 이 과정의 기계화를 가능하게 했다. 사람이 싣고 내려야 했던 화물은 거대한 크레인이 대신 나르게 됐고, 부두 내에서 화물을 옮기는 일도 지게차와 트럭이 맡게 됐다. 컨테이너의 '규격화'도 물류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철강판으로 둘러싸인 직육면체로 투박해 보이는 컨테이너는 화물의 안전한 이동에 큰 도움이 됐다. 장거리 이동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충격과 폭우 등 기상 상황으로부터 화물을 보호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세계적 석학 피터 드러커(Peter Ferdinand Drucker)는 이 컨테이너를 '세계 경제사를 바꾼 대혁신적 발명품'이라고 칭하기도 했다.물류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게 된 컨테이너는 선적·하역 등 이동 과정에서 망가지는 경우가 많다. 빈 컨테이너의 무게는 2~3t에 달한다. 물건을 채우면 최대 30t까지 나간다.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과정에서 외부 충격 등으로 찌그러지거나 찢기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손상된 컨테이너를 되살리는 이들이 있다. 바로 컨테이너 수리업체다. 컨테이너 수리업체의 수리공들은 손상된 컨테이너가 다시 제 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8월 31일 인천 신항 선광컨테이너터미널 내에 있는 컨테이너 수리업체 '콘테이너 테크닉큐 서비스(주)'의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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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2]인천의 '산업역군' 화물차 지면기사
운전기사들 장거리·근거리·시내파 3부류로 나눠긴 시간 대기·길에서 쪽잠 등 근로조건 악명 높아지역 화물연대 120대 파업시 컨 처리량 66%로 '뚝'운송료 현실화·번호판 거래 명의신탁제 폐지 절실 영업용 화물차 3만대 불구 주차장 3700여면에 그쳐환황해권 물류 중심 도약 앞두고 인프라 확충 과제툭하면 도로 위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화물차가 인천에서 모두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우선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배 안의 수입 화물들이 갈 곳을 잃고 적치돼 야적장부터 마비될 것이다. 인천의 철강, 제조, 목재, 자동차 업체는 물론 전국에 화물을 수입·수출하는 업체들은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텅 빈 고속도로만큼 마트·시장은 텅텅 비고, 매대 위 물건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를지 모른다. 그야말로 '물류 쇼크'다. 화물차는 대한민국 물류 대동맥을 잇는 핏줄이나 다름없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화물차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필요한 화물을 필요한 곳에 나르고 있다. 2000년대 들어 화물차는 환경, 안전 문제가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며 애물단지 취급을 받지만, 대한민국 그리고 인천의 경제 성장에 빼놓을 수 없는 '산업 역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7일 오전 11시께 인천 중구의 한 컨테이너 화물자동차 휴게소. 28년 경력의 화물차 운전기사 박신환(51)씨가 컨테이너를 실은 25t급 대형 화물차를 주차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박씨는 이날 아침 7시께 집에서 나와 8시께 송도 선광 컨테이너터미널에서 화물을 하나 실은 후 주차장에 정박하고, 10시께 다른 화물을 하나 더 싣고 오는 길이었다. 먼저 실은 화물은 이날 오후까지 경기도로, 다른 화물은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간다. 하역장에서 화물을 받기까지 걸리는 대기 시간이 최소 30분에서 최대 3~4시간에 달하다 보니 여유가 있을 때 화물을 미리 받아놓은 것이다. 박씨는 "갠트리 크레인(컨테이너를 옮기기 위한 항만용 기중기)이 꼿꼿이 서 있지 않고 배 위로 내려가 작업을 하고 있으면 그날은 '망했다'고 보면 된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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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1]항만과 함께 성장해온 '선사' 지면기사
외국과의 수출·입 물류 99% 차지하는 선박 직접 운용28개회사 132척, 中·美·아프리카 등 매주 54차례 누벼개항이후 외세가 장악… 국권회복까지 자산 모두 잃어1949년 대한해운공사 설립해 국적선 운항·경쟁력 쌓아작년 컨물동량 300만TEU 돌파·세계 40위권 도약 기여18일 오전 7시 50분 인천 신항 선광신컨테이너터미널(SNCT)에 1천74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분)급 컨테이너선 '흥아그린'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인천항에 정기 컨테이너 항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28개 선사 가운데 하나인 흥아해운(인천영업소) 김진구(31) 계장은 이 모습을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김 계장은 "긴 항해를 마친 배가 안벽에 붙는 순간은 수십 년씩 부두에서 일한 이들도 긴장하는 때"라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지만, 항상 부두에 나와 이상 유무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김 계장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입항 수속이다. 배가 부두에 오기 전에는 세관 승인이 정상적으로 완료됐는지 확인하고, 배가 도착한 뒤에는 배에 올라 선원 명부와 이들의 여권이 일치하는지 확인한다.오전 8시 접안이 완료되고 배와 부두(육지)를 연결하는 계단(갱웨이·Gang Way)이 설치됐다. 도선사가 내리고 질병관리본부 국립인천검역소 직원 2명이 배에 올랐다. 김 계장도 함께 배에 탔다. 컨테이너 고정 장치를 풀기 위해 부두에 대기 중이던 '라싱맨'(Lashing man) 16명이 달라붙어 컨테이너에 붙은 모든 고정 장치를 30여 분 만에 제거했다. 곧 크레인의 컨테이너 하역 작업이 시작됐다. 흥아그린호는 지난 14일 중국 세코우(蛇口)를 출항해 이날(18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인천항에 컨테이너 300TEU를 내리고 400TEU를 실었다. 인천, 부산, 광양, 상하이, 마닐라, 호찌민, 홍콩, 세코우를 운항하는 이 배는 3주에 1차례씩 인천항을 이용한다.배가 항만을 이용하는 가장 중요한 손님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선사는 이 배를 직접 운용하며 화물이나 승객을 운송한다. 항만의 가장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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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려주는 인천이야기·30]제2의 공장 '창고' (하) 지면기사
개항이후 수출입 물품 관리 위해 건립CJ대한통운·한진등 인천에서 첫발 떼1893년 무역 총액 절반 이상 점하기도오랜 역사만큼 구조적 가치 갖춘 건물아트·상상플랫폼 '창작 공간 리모델링'구도심·지역 경제 활성화 시너지 기대창고 건물은 단순하다. 외벽과 지붕 이외의 시설은 최소화된다. 건물 내부 기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 같은 건물의 특성은 창고 기능에 기인한다. 많은 물건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적재하기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창문이 없는 창고 건물도 많다. 각종 물품을 적재·이동하기 위한 선반과 각종 장비가 들어서 있어, 복잡하고 빽빽해 보일 수 있으나 구조적으로는 가장 단순한 건물이 바로 창고다.인천항 인근에 창고가 생겨난 건 1883년 개항 이후다. 이때부터 수출입 물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창고가 항만 인근에 속속 건립됐다. 개항기 인천은 국내 최대 항만이었다. 개항이 이뤄진 것은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였으나 물동량은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1907년 발간된 '인천개항 25년사'(저자 가세 와사부로, 역주 인천시 역사자료관)는 개항기 인천항의 지위를 잘 설명한다."1893년 무역 총액은 778만8천원인데 인천은 그중 5할1푼1리를 점하며 부산은 2할9푼9리, 원산은 1할9푼의 비율을 보인다." 이 책은 1893년부터 1907년까지 한국의 무역액을 항만별로 기록했는데, 인천항은 매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인천항을 통한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천항 인근에 물류기업이 설립되고, 창고들이 운영됐다. 국내 최대 물류기업인 CJ대한통운의 모태가 되는 기업도 인천에서 시작됐으며, 한진그룹 역시 인천에서 첫발을 뗐다.CJ대한통운의 모태는 일제강점기 설립된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이하 조선미창)다. 이 회사는 일본이 조선의 쌀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설립됐다. 일본 정부 주도로 서울에 설립됐으며, 인천에 가장 먼저 지점을 열었다. '대한통운 80년사'는 "회사가 당초 계획한 5개 수출항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점이 설치된 곳은 우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