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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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6)]바다위 공항 지면기사
지반침하 우려 제기 속 성공적 건설일본 제치고 '벤치마킹' 사례로 꼽혀바다 위에 건설한 인천국제공항은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술력을 세계로부터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바다를 메운 땅에 건설했지만 지반 침하 등의 문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면서 세계적으로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고 있다.반면 일본 간사이국제공항은 지반 침하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토목 실패 사례'라는 불명예를 안았다.인천공항 지반공사 설계를 맡았던 (주)유신 최인걸 인천지사장은 "간사이국제공항은 대표적인 토목공사 실패 사례로 평가된다. 일본인들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건축물의 하나일 뿐 아니라 세계 공항에서도 간사이공항처럼 문제가 불거진 공항은 거의 없다"고 했다. (주)유신은 인천공항 건설사업 설계와 감리 업무를 수행했으며, 당시 최 지사장은 기술본부장을 맡고 있었다.그는 세계 3대 인명사전인 '마르퀴스 후즈 후'와 영국케임브리지국제인명센터(IBC)에서 발행하는 '세계 100대 엔지니어'에 등재된 토목 전문가다. 최 지사장은 "인천공항 개항 이전부터 지반 침하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시료 채취와 분석 등에 있어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했다.그는 2000년 일본에서 열린 '지반공학 국제심포지엄(ISLT·International Symposium Lowland Technology)'에서 인천공항 건설 과정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다. 이 행사에는 미국, 유럽, 동남아 등 각국에서 온 학자들이 참여했고, 인천공항을 완성한 한국 건설산업의 우수한 기술력에 찬사를 보냈다. 반면 행사에 참여한 일본 학자들은 예상보다 빨리 침하하는 간사이공항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내진 설계 등 토목 부문 기술력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간사이공항은 10m 넘게 침하했다.그는 "인천공항의 성공적인 건설이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며 "대한민국의 토목 기술은 이제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라고 말했다.한국건설산업연구원 최석인 연구위원은 "지반 침하 문제는 간사이공항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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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6)]바다위 공항 지면기사
#첨단공법 과시 영종도 대공사1992년부터 공항면적의 82% 매립 공사200만대 착륙 불구 예상침하 절반 안돼11m 내려간 '日 간사이공항 섬'과 대조'4개의 섬' 생활권 묶여… 인근섬도 변화"교통환경 나아졌지만 교류기회는 줄어"'인천국제공항, 일본을 부끄럽게 하다!'일본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국제공항 지반은 건설 당시보다 11m 이상 내려앉았다. 간사이공항은 육지에서 5㎞ 떨어진 바다를 매립해 조성한 인공섬 위에 건설됐으며, 1994년 개항했다. 매립 공항이라는 점 때문에 침하는 설계 때부터 예상됐으나, 침하 속도와 규모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예상대로라면 50년에 걸쳐 진행될 침하 폭이 조성 6년 만에 이뤄졌다. 속도는 더뎌졌으나 지금도 매년 침하가 이뤄지고 있다.인천국제공항도 바다를 메워 조성됐다. 간사이공항의 사례 때문에 인천공항도 부지 선정 때부터 개항 때까지 지반 침하 우려가 끊이지 않았다. 김포공항을 대체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신공항 부지로 인천 영종도가 선정된 것은 1990년 6월 14일이다. 설계를 거쳐 1992년 11월 1단계 부지조성공사가 시작됐다.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메우는 공사가 뼈대였다. 인천공항 전체 부지면적 5천619만8천600㎡ 중에서 해상면적은 82%에 해당하는 4천600만㎡에 달했다. 특히 활주로, 계류장, 관제탑 등 인천공항 주요 시설들은 모두 해상 부분에 위치하는 것으로 설계됐다.공항은 수백 명의 승객을 태운 항공기가 뜨고 내리는 만큼, 큰 하중을 이겨낼 수 있도록 견고해야 한다. 하지만 인천공항이 해상을 매립해 들어선다는 이유로 지반 침하 주장이 불거졌다. 특히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환경파괴와 지반침하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2000년 1월, "공사가 시작된 92년부터 시민사회단체들은 '갯벌을 매립해 공항을 건설했을 때 과연 첨단공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부등침하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었다"며 "영종도 공항은 너무나 넓은 면적에 두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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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5)]섬마을, 금싸라기 땅이 되다 지면기사
1989년 노태우 대통령 "매립 공항 건설"교통부 부인에도 외지인 몰려들어 투기그해 1분기에만 땅값 70% 넘게 올라가개발정보 유출·대기업 소유 등 의혹도1990년 6월 인천국제공항 건설이 확정됐을 때 작은 섬마을이던 영종도·용유도·삼목도·신불도는 순식간에 금싸라기 땅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 몇 년 전부터 소문이 돌면서 이미 땅값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을 계획한 일정과 예산에 맞춰 원활하게 진행하려는 '정부'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과 바다를 그냥 내어줄 수 없다는 '주민' 간 보상문제를 둘러싼 팽팽한 줄다리기가 10년 넘게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투기꾼들'까지 가세하면서 영종도에는 욕망이 들끓는 부동산 광풍이 휘몰아쳤다. 그 속에서도 마을 공동체를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다.정부가 대형 국책사업을 추진할 때 가장 큰 사회적 관심거리이자 걸림돌은 보상문제이다. 오죽하면 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에도 철거 보상이 있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이 '경복궁 영건일기'(19세기 말·일본 와세다대학 소장)를 토대로 지난해 12월 펴낸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을 보면, 1865년(고종 2년) 4월 한성부가 경복궁 주변 기와집 85칸, 초가집 592칸, 임시가옥 10칸 반에 한 칸당 각각 10냥, 5냥, 2냥씩 철거 보상금을 지급했다.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 무상으로 몰수할지를 두고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보상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이때부터 이듬해까지 경복궁을 둘러싼 기와집 1천872칸, 초가집 2천553칸, 임시가옥 77칸 등 총 4천502칸에 달하는 민가가 보상금을 받고 철거됐다. 당시 경복궁 중건사업을 위해 전국에서 거둬들인 돈은 83만4천266냥이었는데, 이 가운데 4%인 3만3천833냥을 보상비로 썼다. 1865년 경복궁 공사에 참여한 담모군(일꾼)과 장인(기술자)은 역할에 따라 하루 품삯으로 2.5~4전을 받았다. 당시 화폐 단위로 10전은 1냥이다.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경복궁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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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4)]인천국제공항 입지 지면기사
#1960년대 '신공항론' 대두일제 '대륙침략' 기항지 여의도공항 건설1939년 김포에 '군용'… 해방후 관문 역할항공수요 급증… 대체지 낙점 20여년 걸려#처음부터 영종은 아니었다1989년 4차 타당성조사까지 이름 안올라소음피해·공사비 적고 서울 접근도 용이환경훼손 논란에도 시화지구 제치고 선정소금 굽던 섬마을 인천 영종도가 왜 공항 입지로 제격이었는지는 과거의 선정 과정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오늘날 인천국제공항의 성공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인천이 아닌 곳에 공항이 들어선다는 게 상상이 안 될 정도다. 김포공항을 대체할 수도권 신공항의 영종도 유치는 한반도의 배꼽 자리에 위치해 수도권 관문도시 기능을 타고났던 인천의 숙명이기도 했다.우리나라 최초의 공항은 영종도와 마찬가지로 섬에 지어졌다. 일제는 1916년 서울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해 비행장을 건설했다. 당시 여의도는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한강의 사구(沙丘)로 도심과 단절돼 소나 키우던 작은 섬이었다. 용산과 노량진 등 당시 경인철도가 설치된 서울의 요충지와 인접해 있으면서 인적이 드문 여의도는 공항 입지로 제격이었다.1916년 6월 13일자 매일신보에는 "용산철교의 하류 한강중의 대사주(大砂洲) 여의도는 71만평의 대사원(大沙原)인데 사구상(沙丘上) 100여호의 농촌은 6월 말로 전부 퇴거케 하야 목하 과반수는 철퇴하얏는데 다수는 영등포 부근의 시흥군 관내에 이주하는 중이며 차지(此地)는 군용지로 심히 고가로 매수한 것이라더라"는 기사가 실렸다.초기 여의도공항은 간이 비행장에 가까웠다. 이후 일본에서 항공 관련 법령이 제정됐고, 1929년 노량진~여의도 사이 도로 개설 사업이 완료되면서 격납고와 대합실 등 제법 공항의 모습을 갖췄다. 1㎞ 길이의 노량진~여의도 간 도로는 지금으로 치면 영종대교와 인천대교처럼 도심과 공항을 연결해주는 기능을 했다.여의도공항은 좋게 말하면 동북아 '허브공항' 역할을 했지만, 이는 일제의 침략 거점을 의미하기도 했다. 중국 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중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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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3)]영종도 염전 지면기사
소금생산 역사 체계적 조명 필요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기 전 염전은 영종도 경제의 한 축이었다. 영종도의 염전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도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다. 소금 생산방식도 많이 바뀌었다. 고려시대부터 현대적 방식까지 염전의 역사를 꿰고 있는 곳이 바로 영종도다. 하지만 염전의 흔적은 자꾸 사라지고 있고, 옛일을 기억하는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한반도 소금 생산의 역사를 한데 보여줄 수 있는 영종도, 좀 더 체계적인 조사와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영종도에 있던 '건대염전'은 건국대학교가 조성했다. '건국대학교 70년사'에도 이러한 내용이 소개된다. 영종도 주민 이정국씨의 할아버지는 염전 축조 기술자였는데 건대염전 공사를 맡아 진행했다. 공사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염전을 관리했고, 대를 이어 아들(부친)도 염전에서 일했다. 1980년대 염전 일부를 매입했다가 되팔았다. 이정국씨는 건대염전 축조와 관련해 교도소 수감자들이 공사에 동원됐다고 했다. 그는 "염전 공사 때 재소자들이 동원됐다는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며 "건국대가 어떻게 수감자를 공사에 동원했는지 알 순 없지만, 혼란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 같다"고 했다. 영종도 주민 김홍일씨도 "당시 죄수들이 염전 공사를 한다는 이야기가 동네에 퍼져 있었다"고 했다.주민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수감자들이 민간 학교재단 염전 축조 공사에 동원된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영종역사관 김연희 학예사는 "염전 축조와 관련해 수감자들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련 기록을 찾아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영종도 염전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영종도 염전 대부분이 1950~1960년대 조성됐고 20여 년 전에 폐쇄되면서 염전을 기억하는 주민 수도 줄어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주민들의 기억을 더듬고, 기록을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영종도 주민 허재봉씨는 "염전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매년 세상을 떠나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영종지역을 조명하는 작업이 체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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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3)]영종도 염전 지면기사
고려 이곡 '소금 굽는 연기'… 영종염전 천년 증언現 주안국가산단 자리 1907년 국내 첫 천일염 생산영종 '자염' 쇠퇴… 1950년대부터 천일염전 들어서한국전쟁후 정착 실향민, 염전개척 공동주 되기도대이어 수십년 '염부' 주민들… 소유 대부분 외지인홍대·건대도 운영… 인천공항 건설로 대부분 폐쇄1곳만 남아 옛방식 고수… 씨사이드파크에 체험관영종도는 명실상부한 '공항도시'다. 영종도에서는 인천국제공항을 매개로 물류, 관광, 항공 등 다양한 분야의 경제활동이 이뤄지고 있다. 인천공항이 들어서기 전 4개의 작은 섬이었던 영종·용유지역(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은 '염전'이 최대 경제 축이었다. 영종도 주변 갯벌은 수심이 얕아 둑을 쌓고 매립해 염전을 만들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매립방식의 천일염전 이전부터 영종도는 염전의 땅이었다. 고려시대에도 영종도는 소금 생산지였다. 고려 후기 문신 이곡(李穀, 1298~1351)의 시와 산문을 엮은 '가정집(稼亭集)'에 영종도의 염전 얘기가 전한다."가는 도중에 자연도에 들러서 /뱃전을 치며 한가로이 읊조리노라 / 갯벌은 전자(篆字)처럼 꼬불꼬불 무늬 지고 / 돛대는 비녀처럼 배 위에 꽂혀 있네 / 가까이 물가에 비끼는 소금 굽는 연기요 / 멀리 산 위로 떠오르는 바다의 달이로다"자연도(紫燕島)는 영종도의 옛 이름이다. '소금 굽는 연기'라는 대목에서 자염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염(煮鹽)은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영종도에서 자염 방식의 소금 생산은 1천년 가까이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주민들은 1940년대에도 자염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1936년생 김홍일씨는 "소학교(초등학교)때 만해도 장작으로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염전이 송산(현 중구 중산동)에 있었고, 화력염전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화력염전'은 장작을 때서 바닷물을 끓이기 때문에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화력 좋은 장작을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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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2)]네 개의 섬 영종 지면기사
본래 영종·삼목·신불·용유도로 나뉘어 이어진 섬과 섬… 구읍뱃터 모여 육지로신불도, 영종도 남서쪽 500m 거리 위치실향민·원주민마을 분리 130여가구 살아인천국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원래 영종도, 삼목도, 신불도, 용유도 등 네 개의 섬이었다. 공항 건설을 위해 바다를 매립, 이들 네 개의 섬을 하나로 만들었다. 옛날 네 섬 주민들은 물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지었다. 작은 섬 마을이 하루 1천여 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하늘도시'로 변했다. 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의미인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영종도와 딱 들어맞는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그 옛날 섬마을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좇아가 보자.영종도가 신공항 건설 장소로 결정된 것은 1990년이다. 육지를 가기 위해서는 배를 타야 했지만 섬과 섬은 모두 이어져 있었다. 영종도와 삼목도는 도로로 연결돼 있었고, 영종도와 신불도는 둑길로 이어져 있었다. 도로라고 해야 좁디좁았지만 사람들이 다니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거리가 많이 떨어진 용유도와 삼목도도 도로로 연결돼 있었는데 징검다리가 도로 역할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들 섬 주민들이 육지로 가기 위해 배를 타는 곳은 영종도 구읍뱃터 한 곳이었다.1968년생 이정국 씨는 영종 운남리 출신이다. 태어난 곳은 하늘도시로 편입돼 현재는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지난 17일 만난 그는 영종중학교 인근 공원이 자신의 집이 있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건설 관련 일을 하는 그는 인천공항과 하늘도시 건설 과정에도 참여했다. 영종도가 바뀌는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셈이다. 삼목도와 연결된 도로의 영종도 지역 초입 마을을 '진등'이라고 불렀다. 바다가 메워지는 바람에 마을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주민들이 살던 초가집은 다 없어졌지만, 그 연륙도로와 연결된 작은 길은 아직 남아있다. 이정국 씨는 옛 섬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며 스카이72 골프장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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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2)]1970년대까지 초가집에 살던 영종도… 하늘도시의 격세지감 지면기사
지금의 영종도, 인천공항이 건설되기 전에는 네 개의 섬이었다. 작은 섬마을 주민들은 농사를 짓거나 어업에 종사했다. 영종도에서 유일한 사진관을 운영했던 김홍일씨가 찍은 1960~70년대 영종도 풍경이다. 주민들이 논에 물을 대고, 배에서 쌀을 나르는 모습이 이채롭다. 1960년대 '쪽배'라고 불리는 작은 목선을 타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도 그렇다. 1970년대까지 대부분의 주민들이 사진과 같은 형태의 초가집에 살았다고 한다. '하늘도시'가 된 현재의 영종도 상황에 비춰보면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글/정운기자 jw33@kyeongin.com, 사진/김홍일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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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프롤로그]'내년 개항20년' 한국의 관문, 과거·현재·미래 들여다본다 지면기사
인천 영종도가 공항 부지로 결정된 지 30년이 지났다.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한 지는 내년이면 꼭 20년이 된다. 그 사이 인천공항은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비상했다. 지난해 인천공항은 연간 40만 회의 운항기록을 세웠다. 오고 간 여객은 7천만 명을 넘어섰다. 개항 이후 최대 실적이었다. 국제여객 7천만 명 기록은 세계 5위 규모에 해당한다. 국제화물 운송 규모는 276만t이다. 이는 세계 3위 수준이다. 인천공항에서는 하루 평균 1천100편가량의 국제선이 뜨고 내린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나들목이다. 인천공항에서 일하는 상주 직원만 7만8천여 명이다. 경제효과는 가히 천문학적이다. 지난 2018년 제2터미널을 개장한 인천공항의 생산유발 효과는 10년 뒤면 130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경인일보는 올해 창간 7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인천공항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올 1년 동안, 인천공항이 들어서기 전 섬마을 풍경에서부터 공항 조성 과정, 그리고 공항 운영과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를 찾아 연중기획으로 싣는다. 국내외 공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인문학적으로 담아낸다는 각오다. 매주 1회씩 찾아갈 이번 시리즈에 독자들의 응원을 당부한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대한민국 대표 공항인 인천국제공항 제 2여객터미널을 배경으로 대형 항공기들이 착륙을 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공항으로 우뚝 선 인천국제공항은 내년이면 개항 20년을 맞는다. 경인일보는 올해 창간 7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나들목인 인천공항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예정이다 (사진은 영종도 북측방조제 인근에서 3분 간격으로 연달아 착륙하는 항공기를 다중노출로 촬영).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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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나들목' 인천공항 이야기·(1)프롤로그]제비 대신 비행기 드나드는 '영종'… 세계를 잇는 공항은 운명이었다 지면기사
고려시대 기록부터 '자연도'로 불려와제비 많고 해질녘 자줏빛 하늘서 유래이규보의 '계양망해지' 한대목 등장도대한민국 대표 공항, 인천국제공항은 태초부터 비행장의 기운을 타고난 자리에 터를 잡았다.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는 예로부터 자연도(紫燕島)라 불렸다. 자줏빛 제비의 섬이란 의미다. 겨울이 지나고 봄의 소식을 물고 오는 제비는 늘 반가움의 대상이다. 자연도란 이름은 고려시기에 비로소 등장한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는 주로 유배의 섬으로, 또한 왜적들이 약탈 대상으로 삼은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를 찾았던 중국 사신의 눈에 자연도는 그냥 지나칠 곳이 아니었다. 중국 송나라 때 문신 서긍(徐兢)은 1123년 바닷길 서해안 루트를 따라 개성을 방문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 '고려도경'이란 방대한 분량의 견문 보고서를 왕에게 올렸다. 여기에 자연도 이야기가 자세하다. 눈여겨볼 만한 대목도 많다. 고려시대부터 자연도는 외교적으로 무척 중요한 공간이었다. 고려 제일의 문장가 이규보(1168~1241)가 계양산에서 조망한 자연도 이야기는 그의 문집에 남아 아직도 전한다. 1219년 여름부터 1220년 여름까지 1년여 동안 계양부사로 있었던 이규보의 그때 시선은 꼭 800년이 흐른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까. 지난 5일 오후 3시 계양산에 올랐다. 인천국제공항을 품고 있는 영종도를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겨울은 강추위 없이 지나간다는 얘기를 했는데 입춘이 지나자마자 살을 에는 듯한 추위가 한반도를 덮쳤다. 인천지역도 모처럼 영하 10℃ 아래로 떨어졌다. 시야를 가리는 중국발 미세먼지를 날려버릴 절호의 기회였다. 춥지만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리던 차였다. 그렇게 오른 계양산. 영종도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마침 비행기 한 대가 영종도 북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영흥도 쪽 하늘에서는 비행기 두 대가 잇따라 고도를 낮추며 영종도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인천공항이 어디인지를 비행기들은 그렇게 알려주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