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본 기사
-
[인터뷰] 보선 당선… '취임 한 달' 박용철 강화군수
2024-11-14
-
강화군 방문한 이재명 “소음 피해 막기 위한 남북 소통 채널 가동해야”
2024-10-31
-
세계유산 강화 고인돌 풍화현상 발견… 보존 처리 작업
2024-08-16
-
강화군수 보선 후보 4인, 유권자에 마지막 호소… 16일 민심이 마침표 찍는다
2024-10-15
-
[경인 Pick] 제2의 고향처럼… 쉼을 선물한 강화도 힐링 프로젝트 '잠시섬'
2024-10-27
최신기사
-
사회
[뉴스분석-'난쏘공' 300쇄와 징용 노동자상 건립]2017년에도 인천을 떠나지 못한 '40년전 난장이' 지면기사
日 강점기·자본가 욕심에 휘둘리던 노동자 도시최저임금·비정규직 문제 등 오늘날도 아픔 여전일제에 의해 강제로 부평의 군수공장에 끌려 와 일해야 했던 징용 노동자들을 기리는 동상이 이번 주말 전국에서 처음으로 인천 부평에 세워진다. 이를 계기로 인천은 노동자 도시로서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징용 노동자상 건립과 함께 인천에서 노동과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일이 하나 더 있다. 인천의 노동과 문학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조세희의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난쏘공·사진)이 올해 상반기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300쇄를 찍어내는 데 성공했다. '난쏘공'은 1978년 6월 초판 1쇄를 출간한 뒤 1996년 6월 100쇄, 2005년 11월 200쇄를 찍었으며 지난 4월 300쇄를 출간했다. 1쇄 이후 지금까지 총 137만 부가 팔렸다. 우리 문학 작품 중에 300쇄를 출간한 것은 '난쏘공' 이외에는 아직 없다고 한다.'난쏘공'의 무엇이 40년간이나 꾸준히 읽히도록 한 걸까. 책을 읽지 않는다는 요즘에도 독자들은 어찌하여 40년 전의 '난쏘공'을 여전히 찾는 것일까. 1970년대,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노동자 가족의 삶을 다룬 '난쏘공'은 읽는 이의 마음을 여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악하기 그지없는 작업 환경 속에서 밤낮없이 일만 해야 하는 '난장이 가족'의 이야기는 완전히 오늘날의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 여전히 우리는 '최저임금'이나 '비정규직'과 같은 기본적인 노동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산업화의 현장도시 인천은 여전히 집값 비싼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몰려드는 그런 공간이다.'난쏘공'의 주요 무대로 등장하는 '기계도시 은강'은 인천이다. 그 인천에서는 1883년 제물포항 개항과 함께 본격적인 부두 노동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 항만 주변에 각종 공장이 들어서면서 산업도시로 자리를 잡았고 그 인천에는 당연히 전국의 노동자들이 밀려들었다. 그 속에는 돈벌이에만 급급
-
대통령실
[정부,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식 '사법 살인' 이후 첫 공식 예우]58년만에 도착한 대통령의 화환 지면기사
비 내리는 서울 망우리공원 묘소줄잇는 애도 인파 눈길 사로잡아독립·건국 유공 '복권' 계기 기대대한민국 정부가 죽산 조봉암 선생이 '사법 살인'을 당해 세상을 떠난 지 58년 만에 처음으로 죽산을 향해 공식적인 예우를 갖췄다.문재인 대통령은 31일 오전 11시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서울 망우리 묘지공원 내 죽산 묘소에서 거행된 '죽산 조봉암 선생 제58주기 추모식'에 화환을 보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제헌 국회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제2대 국회 부의장, 제2대와 제3대 대통령 후보를 지낸 죽산의 삶을 기리고 58년 전 그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했다. 이날 추도식장에는 묘소 앞 제단 왼쪽에 '대통령 문재인'이라고 적힌 추모 화환이 놓여 참석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통령의 화환이 온 것은 죽산 서거 58년 만에 처음이라고 유족 측은 밝혔다.1959년 7월 31일 간첩죄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던 죽산은 52년 만인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의 무죄 판결을 받고 사법적인 억울함을 벗었지만 당시 이명박 정권과 그 뒤를 이은 박근혜 정부에서는 독립과 건국 유공자로서의 복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날 추모식 내내 참석자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화환을 계기로 죽산이 목숨을 걸고 수행한 독립운동과 건국 헌신의 정신이 국가보훈처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했다.국가보훈처는 아직까지 죽산을 독립운동가로도, 건국의 주역으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1941년 12월 23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일본군 위로금 기부 기사를 내세워 죽산이 친일행적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죽산의 친일 주장은 그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 죽산은 해방 당일에도 일제에 체포돼 있었으며 해방과 동시에 풀려나 그 즉시 건국 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그동안 꾸준히 죽산 추모사업을 벌여 온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은 "죽산 선생 서거 58년 만에 예전의 유력 대통령 후보를 현직 대통령이 처음으로 예우하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면서 "죽산
-
정치·지역정가
[죽산 선생 58주기 추모식 풍경]지역 대표적 정치가 기리는 인천 사람들 지면기사
유력 인사, 대거 묘역 찾아 장사진화환들, 진보·보수 따로없이 다채장마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울 망우리 묘지공원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 제58주기 추모식'은 온통 '인천 사람' 일색이었다. 또한 이날 추모식에 놓인 화환만 본다면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었다.인천이 낳은 대표적 정치가인 죽산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 답게 인천의 유력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 위원장, 조동암 인천시 정무경제부시장,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 홍미영 부평구청장, 조우성 인천시립박물관장, 권혁철 경인방송 대표이사, 이호웅 전 국회의원, '죽산 평전'의 이원규 작가, 박한섭 부평시설관리공단 이사장, 신희식 (사)아침을 여는 사람들 대표 등이 추모식이 열린 죽산 묘역을 직접 찾았다. 또 인천상공회의소 이강신 회장, 인천재능대학교 이기우 총장, 인천항만공사 남봉현 사장, 수도사 주지 김용복 스님, 스카이72 김영재 대표, 인천 법사랑회 조상범 회장 등은 화환을 보내 죽산을 추모했다.정치권의 화환도 다양했다. 화환제단 오른쪽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의 화환이 세워졌고,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의 화환도 자리를 잡았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 위원장, 정유섭 자유한국당 인천시당 위원장, 이학재 바른정당 인천시당 위원장, 윤상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등의 화환도 눈에 띄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화환도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죽산을 인정하고 이날 추모식에 동참한 셈이다.이날 죽산 조봉암 선생 58주기 추모식이 문재인 대통령과 정세균 국회의장이 추모 화환을 보낼 정도로 뜻깊고도 다채롭게, 또한 인천사람 위주로 진행될 수 있었던 데에는 새얼문화재단 지용택 이사장의 관심과 독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죽산의 손녀사위이자 죽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인 유수현(65) 씨는 "그동안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가리지 않고 인천에 계신 지용택 이사장님께서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셔서 그저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
-
칼럼
[데스크 칼럼]부채와 선풍기 지면기사
부채, 사진·초상화 돋보이게 하는 소품 제격옆 사람에게도 바람 나눠주는 '넓은 마음씨'선풍기, 나을것 없지만 詩를 탄생시켜 '위안'선풍기를 볼 때마다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라'는 어느 시인의 충고가 생각나 우습기도 하고 실제로 선풍기 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일도 잦아지기는 했다지만, 올해처럼 선풍기에 관하여 오랫동안 마음을 쓴 적은 일찍이 없었다. 올 여름은 어디를 가나 선풍기를 손에 들고 바람을 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손 선풍기의 인기가 그야말로 선풍적이다. 선풍기가 우리들의 손안으로 들어온 대신 부채를 들고 우아하게 더위를 쫓는 사람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손 선풍기를 얼굴이며 겨드랑이며 몸 이곳저곳에 가져다 대며 땀을 식히는 모습을 보자니 왠지 안쓰러운 생각도 들고 기온이 예전보다 많이 오르기는 올랐구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서 부채와 선풍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 본다.부채는 예술적인 면에서는 단연 선풍기를 앞선다. 글씨도 산수화도 얼마든지 품을 수 있는 부채는 그 자체로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말했다. 부채는 조상들의 삶 속에 예술이 얼마나 가까웠던가를 웅변해준다고, 천하의 절경을 간편하게 접어 손안에 들고 다니다가 생각 날 적마다 척 펼쳐내서는 그림 속 산수가 불어내는 맑은 바람을 쏘이게 한다고, 금강산 일만 이천 봉도 내 손안에 쥘 수 있거니와 끈 끝의 선추(扇錘)에 향이라도 매달았다면 그윽한 자연의 향내까지 더하여 음미할 수 있게 한다고.부채는 선물로서의 격조도 선풍기보다는 낫다. 부채 선물 풍속은 아주 오래되었다. 당장 우리는 퇴계 이황 선생이 손자와 주고받은 편지글을 묶은 책 '안도에게 보낸다'에서 그 부채 선물 이야기를 확인할 수가 있다. 퇴계는 참 일찍이도 부채 선물을 준비했다. 퇴계는 1566년 정월에 손자와 그 손자의 장인에게 부채를 선물했다. 두 계절을 앞서서 이미 여름을 준비한 퇴계의 자상함을 엿볼 수가 있다. 퇴계는 또 그해 6월에는 손자에게 '칠선(漆扇)'을 선물하기도 했다. 칠선은 종이에 옻칠을 한 부채를
-
국회·정당
[374회 새얼아침대화 초청강연]사드배치, 국민에 솔직하게 설명해야 지면기사
정계원로 이부영 前국회의원 일침文정부, 여론 휘둘려선 안돼 비판몽양 70주기 한반도 정세 풀이도보수와 진보를 넘나들며 정치를 했던 정계 원로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와 관련해 문재인 대통령의 대국민 설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부영 전 의원은 12일 오전 7시 쉐라톤그랜드인천호텔에서 열린 제374회 새얼아침대화에 연사로 나와 "미국이 북핵을 앞세워 사드배치를 강요한다면, 미국이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사드를 배치한다고 한다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당장 끊을 수 없는 현실이니 그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당당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이부영 전 의원은 이날 '왜 지금 다시 몽양 여운형인가'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그 말미에 문재인 정부에 대한 70% 이상의 높은 지지율은 헛된 것이라고 전제한 뒤 촛불 시민들의 지지 속에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사드 문제에 대해 촛불 시민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솔직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 의원은 현 정부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하면서 (사드 문제와 관련해) 솔직하게 못하고 있는데 지지층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설명할 것은 설명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이 전 의원은 "일본과 한국에서 지난 70여 년을 미국의 동아시아 패권질서 속에서 기득권층을 형성했던 세력들이 미국의 퇴조 가능성에 불안해 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또 이부영 전 의원은 "오는 19일이 몽양 여운형 선생 70주기가 되는 날"이라면서 몽양의 일대기를 설명한 뒤 죽음을 무릅쓰고 평화통일을 추구했던 몽양 정신에 비추어 오늘의 한반도 주변 정세를 풀이하기도 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부영 전 의원이 12일 오전 쉐라톤그랜드인천호텔에서 열린 제374회 새얼 아침대화에서 '왜 지금 다시 몽양 여운형인가'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임순석기자 sseok@k
-
칼럼
[데스크 칼럼]유정복 시장 3년과 인천의 운율 지면기사
'인천 주권 선언' 타도시와 대결구도 아닌지역사적으로 열려있는 개방도시, 늘 포용해와특질 잘 반영하고 다른지역과 벽 세워선 안돼얼마 전부터 문학과 관련한 강좌를 듣고 있다. 매주 한 차례씩 하는 것인데 강의실까지 가자면 인천에서 2시간이나 걸린다.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훌쩍 넘어서 듣는 강의라서 그런지 먼 길을 오가는 불편보다는 오랜만에 찾은 배움의 기쁨이 더 크다는 생각으로 견디고 있다. 지금까지 세 번을 들었는데, 강사들은 저마다 전공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이었다. 문학 강의라는 게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지게 마련이지만 아직은 집중력을 잘 유지하면서 재미있게 듣고 있다. 잘 가르치는 사람에게서는 그 나름의 운율 같은 게 뿜어져 나온다.운율은 시와 같은 문학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삶에도 운율이 있어야 한다. 노래나 시에 강·약이나 높낮이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나 '고진감래(苦盡甘來)' 같은 옛말은 다 그런 생각의 응집일 터이다. 내공 깊은 강사들의 강의가 수강생들에게 따분하지 않은 배움을 주는 것은 가르치는 운율이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평생 한 가지만 좇아 온 그 강사마다 제각각의 운율이 있었는데, 그 운율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의 깊은 울림을 줬다.유정복 인천시장이 취임 3주년을 맞았다. 며칠 전 만난 유정복 시장에게서 묘한 운율이 느껴졌다. 유 시장은 그동안 많은 시민에게 '모범생' 스타일로 비치고는 했다. '집, 도서관'만을 왕복하는 공부 잘하는 학생 같은 느낌 말이다. 그 유정복 시장이 새로 팠다면서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유정복을 드립니다'. 이름과 직함, 전화번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냥 한 구절뿐이었다. '복'이라는 글자를 크게 쓰고, 거기에 한자(福)까지 도장을 찍어 색다른 느낌을 줬다. '나, 유정복을 머슴처럼 부리라'는 뜻도, '내 마음을 받으면 당신에게 복이 될 것'이라는 뜻도 담은 중의적인 의미가 읽혔다.최초의 인천 태생 인천시장이라
-
정치·지역정가
인천과 같이 가야 지속발전 가능 지면기사
제373회 새얼아침대화가 14일 오전 7시 쉐라톤그랜드인천호텔에서 열렸다. 이날은 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나와 '인천시와 인천공항의 미래 비전'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정일영 사장은 인천공항공사를 향한 인천시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듯 강연 도중 여러차례 인천공항이 인천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무엇인지를 소개했다. 정일영 사장은 "인천시와 같이 하지 않고 인천공항 혼자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면서 "인천시와 같이 가야 인천공항이 지속 발전할 수 있고 의미 있는 발전이 된다"고 강조했다.정일영 사장은 그러면서 인천공항공사가 인천지역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청중들에게 자료를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수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토목공사와 같은 분야에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막대한 지방세 납부로 재정에 기여하고, 문화와 복지향상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정 사장은 또 인천공항이 국가적인 화두로 떠오른 4차 산업혁명의 집약 공간이라면서 공항에서 자동차산업과 항공산업, 그리고 유통이 어우러진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인천공항은 5조원을 투입한 제2터미널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며 제2터미널이 정상 가동되면 연간 1천800만명이 더 이용할 수 있어 현재 이용객 5천400만명에 추가하면 7천200만명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제2터미널도 3년 뒤면 용량부족 문제를 겪을 수 있다면서 2023년에는 1억명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확장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고 정일영 사장은 설명했다.정일영 사장은 "인천공항이 2030년까지 새로운 터미널을 건설해 1억3천만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면서도 "하지만 중국과의 경쟁이 큰 문제"라고 했다. 중국의 항공사 1곳이 소유한 비행기 숫자가 우리나라 국적기 전체보다도 많은 실정이라는 비유도 들었다. 이런 곳과 가격이나 서비스 면에서 앞서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정 사장은 또 인천공항공사는 공항이 있는 영종에서 강화와 개성을 잇는 국
-
기획·연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3]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下) 지면기사
■첫째형 '오타후쿠 솜공장'새 일자리 인천 젊은층 몰려 현재 남구 숭의동 일대 위치인천서 사다 준 농구화 추억■둘째형 '이북장사·인삼농사'4명의 형 중 가장 잊지 못해돈 벌어 중·고·대학 보내고강화 정착도 도와 고마움 커■셋째형 '고려정미소'일본이 세운 정미업 시작점아마 권투 전국대회 우승자구락부 운영 친선전도 주선■용산동 용수산 밑자락 고향 마을은?결혼식 풍경 이색… 손님마다 상 하나씩 내놔부인 김기희 할머니 개성보쌈김치 솜씨 자랑35m폭포 돌 던져 넘긴 실력 투수이력 밑바탕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의 가족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상하리 만큼 인천과 인연이 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전쟁 이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부터 인천의 중요 경제현장을 할아버지의 형들이 누벼 왔다. 할아버지에게는 위로 형들이 4명이나 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첫째 형이 해방 전에 인천의 '오타후쿠와타'에서 일했다고 했다. 일본어 '와타(わた)'가 솜이나 목화를 뜻하니 솜 공장이다. 또 둘째 형은 전쟁 직후 강화에서 '이북장사'를 하고 인삼 농사를 지었다. 셋째는 해방 전 '고려정미소'에서 일하면서 권투를 했다고 했다.넷째 형은 국내 유명 건축가라고 했다. 동생도 한 명 있어 모두 6형제였다. 이들 중 홍순주 할아버지를 포함해 4명이 인천 경제사의 중요 축을 이루는 분야에서 일했다. 솜 공장과 정미소, 인삼 재배가 그것이다. 첫째와 둘째 형은 일제강점기에 개성에서 제물포 개항장으로 건너 와 직장을 구하고 인천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이는 당시 새로운 일자리가 넘쳐나던 인천에 개성과 같은 대도시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음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이기도 하다.할아버지의 첫째 형(홍순경)이 일했다는 '오타후쿠' 솜공장은 할아버지와 부인 김기희 할머니가 그 상징마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예전에는 유명했던 모양인데, 지금 그와 관련한 기록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에 스치듯 언급돼 있고, 당시 신문 기사 몇 꼭
-
기획·연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2]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中) 지면기사
1900년대초 재배 시작 해방직후까지 '미미'개성인삼 근원은 경상·전라서 전파 '추측'이북장사 접은 둘째 형따라 농사 뛰어들어아내도 초교 교사 그만두고 밭일 뒷바라지거름 만들고 종삼 키우기 등 만만찮은 작업개성·강화는 인삼 재배 넘어 상호보완 관계껍질 깎는 일거리 등 후한 인심 동네서 인기도둑 들끓어 삼포마다 관리자 두고 밤 순찰1928년생 홍순주 할아버지가 휴전 되던 해에 강화에 정착한 뒤로 가장 오래 한 일은 인삼농사다. 20년 정도 했다고 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강화인삼의 명성이 높았던 데는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 출신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강화에 많이 살게 된 이유가 크다.이들이 있었기에 개성 인삼의 전통이 그대로 강화에서 이어질 수 있었다. 강화도에서 인삼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강화군청을 비롯한 주요 행정관서에서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다만, 1980년 '지리학 제22호'에 실린 논문('인삼 재배지역의 형성과 전파에 관한 연구-강화도를 중심으로')속에서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강화도의 인삼재배가 개성인들의 왕래에 의하여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보면서, 그 최초 시작점을 1903년으로 밝히고 있다.이때가 논문에서 말하는 1차 강화도 인삼재배의 시기이다. 2차는 홍순주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의 피란민들이 강화도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논문에서 인용한 1973년도 전국 삼업조합별 인삼 경작면적을 보면, 강화는 홍삼재배면적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홍삼과 달리 백삼은 금산 지역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강화는 2위였다. 이 시기는 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에서 한참 인삼농사를 지을 때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강화에서의 인삼 재배는 그다지 큰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1948년 해방 후 국내 첫 문화원 잡지로 창간된 '강화'에 당시 강화군청 간부 공무원이 낸 기고문에는 강화지역의 인삼 재배 현황을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이 기고문에 붙은 강화 지역의 '밭 종합이용면적 상황표'에 따르
-
문화일반
참성단 소사나무, 1947년엔 없었다 지면기사
천연기념물 강화 마니산 소사나무는 누구나 생각하듯이 150년을 참성단에서 자생한 게 아니란 점이 새롭게 드러났다.경인일보가 지난 1일자 1면에서 보도한 '해방 직후 강화도 모습' 사진 중 개성 학생들이 오른 마니산 참성단 부분을 확대해 보면, 당연히 있을 것으로 여겨진 소사나무 한 그루가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2009년 9월, 수령 150년으로 추정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 소사나무는 그 세월 동안 척박한 참성단 꼭대기에서 홀로 자생해 온 것으로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가들까지 생각해 왔다. 이런 점에서 이 사진 1장은 이 소사나무가 최소 1947년 이후 참성단 위에 새로이 옮겨 심어졌다는 사실을 얘기해 준다.문화재청은 '참성단 소사나무'가 외양도 단정하고 균형이 잡혔으며, 특히나 마니산 참성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다는 독특한 점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고 천연기념물 지정 이유를 설명했다. 천연기념물 지정은 국내 소사나무로서는 처음이었다. 참성단 소사나무 앞 안내판에는 '수령 150년(추정)'이라는 내용도 새겨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물기와 양분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참성단 위에서 홀로 150년을 살아온 신령스런 나무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나무 전문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도 이 소사나무가 중간에 참성단에 옮겨 심어졌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나 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얻은 홍순주 할아버지의 해방 직후 수학여행 사진 속 참성단 모습에서는 돌단 위 어디에서도 이 소사나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한 국내 유명 나무 칼럼니스트는 '참성단 소사나무'를 일컬어 '흙 한 줌이 고작인 참성단 돌 틈에서 1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온 장한 나무'라고 썼다. 홍순주 할아버지의 사진 1장은 천연기념물 소사나무가 참성단에서 150년을 계속해서 살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산기술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석권 박사는 "해방 직후 참성단 주위에 소사나무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