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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일반
인천의료원-8개교회 공공의료서비스 협약 지면기사
인천의료원(원장·김철수)이 대한예수교침례회 인천교회(목사·서도석, 이하 인천교회) 등 8곳의 교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인천의료원은 지난달 의료원에서 시설 이용 및 환자 안정 등 상호 지원을 골자로 한 업무 협약식을 가졌다. 이번에 협약을 체결한 인천교회 등 8개 교회에 다니는 성도는 총 4천여 명에 달한다. 의료원은 건강검진 및 장례식장 시설이용 등 공공의료 서비스를 지원하고, 이들 교회 측에서는 의료원 환자들에 대한 안정활동 및 봉사활동 등을 제공할 예정이다.김철수 원장은 "의료원은 지역 대표 공공의료기관으로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다"며 "상호 협력을 통해 건강한 지역을 만드는데 공헌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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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데스크 칼럼]"하필(何必) 왜 불필(不必)입니까" 지면기사
정치인들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눈치 못 채선거때마다 출마자들 특권 내려놓겠다고 아우성'진정 '쓸모있음'은 비움에서 출발' 성철은 가르쳐김정남은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독살을 당했을까. 김정남은 그렇게도 북한 측에 불필요한 존재였을까. 이 두 문장에서 쓰인 하필(何必)과 불필(不必)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우리가 자주 하는 말이다. 요즘 정치판에는 참 많은 군상이 등장한다. 대통령을 필두로 정치인은 필수이고 관료와 법조계 인사, 그리고 대학교수 집단까지. 돈이면 물불 가리지 않고 좇아가는 저잣거리 간상배나 진배없는 이들의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 장면을 연속극 보듯 해야 하는 우리에게 이들은 어김없이 우리의 눈과 귀를 괴롭혀 결국은 자괴감에 젖게 한다. 그러면서 드는 질문 하나, 저들은 꼭 필요한 존재일까. 그 질문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요새는 '나는 필요한가'로 옮아가고야 말았다. 답을 못 내놓는 불초한 입장에서 스스로 묻고 답하기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이 두 단어를 말하기 위해서는 성철 스님(1912~1993)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1957년 스님의 딸 수경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머리를 깎았다. 성철은 딸에게 법명을 내렸는데 바로 '불필(不必)'이었다. 딸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쓸모없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으니 그 맘이 오죽하였으랴. "하필 왜 불필입니까." 딸은 따지듯이 물었다. 이제 사바세계의 아버지가 아니라 산중의 스승이 된 성철은 답했다. "하필(何必)을 알면 불필을 알게 된다." '왜 꼭 필요한지'를 알면 '쓸모없음'을 알게 된다니, 세속에 찌든 우리야 도무지 알 수 없는 얘기다.성철은 산중으로 자신을 찾는 이들 누구에게나 삼천배를 시켰다. 노인이나 병자도 예외가 없었다. 절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춘다는 의미이다. 몸이든 마음가짐이든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절보다 나은 것이 없다. 삼천배를 하는 데 며칠이나 걸린 경우도 있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폐병 말기 비구니가 있었다. 죽기 전에 스님의 법문을 꼭 듣고 싶었다. 성철은 죽게 생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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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3]황해도 순위도 출신 임경애 할머니(2) 지면기사
임경애 할머니(84)가 들려주는 피란 이전의 어릴 적 삶은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딴 세상 이야기이다. 할머니가 태어난 황해도 옹진군 흥미면 순위도는 북한의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남도 강령군 순위리에 속한다. 기다랗게 뻗어 내린 작은 섬인데 가운데 허리 부분이 잘리다시피 움푹 파인 모양새가 특이하다. 섬은 강령반도의 끝자락인 등산곶을 서쪽에서 방파제처럼 막아주고 있다. 창린도와 기린도 너머는 그 유명한 옹진반도의 장산곶이다. 등산곶에서 장산곶으로 이어지는 해안은 연평도와 백령도로 연결되는 물길과 맞닿아 있는데 작가 황석영은 소설 '장길산'의 첫 페이지를 바로 이곳에서 시작한다. '황해도는 동으로 함경도와 강원에 인접해서 마식령 산맥의 산세에 닿고… 팔대 명산의 하나이며 태곳적 단군의 도읍지인 구월산은 그 줄기가 남서쪽으로 우회하여 추산을 따라 불타산에 이르고, 막바지로 그친 곳에 장산곶이라는 험한 해안 마루턱이 있으니 … 조기 떼가 연평을 경유해서 대청 소청 앞바다를 지나가는 철이 돌아왔다.' 타고난 이야기꾼 황석영이 장산곶매에 얽힌 전설을 풀어내는 장면이다. '장길산'의 문을 여는 장치로 장산곶과 해동청 보라매를 설정했다는 것은 이곳이 아마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이자 통일 염원의 절절함이 넘쳐 흐르기 때문이었을 터이다.할머니는 열아홉 살 먹던 해인 1951년 첫 피란 때까지 순위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자동차라는 것도 피란길에 백령도에서 처음 봤다. 미군 차량이었다. 할머니의 집은 순위도에서도 섬의 가운데 허리 쪽인 널목이란 동네에 있었다. 할머니는 '널먹'이라고 불렀다.할머니는 계모 밑에서 컸다. 다섯 살에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그 이듬해에 아버지(임응태)는 새엄마를 얻었다. 계모의 학대는 가혹했다. 응석받이로 유치원에나 다닐 예닐곱 어린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심했다. 일곱 살부터 밥을 하라고 시켰다. 절구보다도 작은 애가 절구질까지 했다. 기막힌 노릇이다."일곱 살 애가 무슨 밥을 할 줄 알겠어. 솥에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작았지. 부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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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데스크 칼럼]최순실과 그들이 찾아 준 수표 3장 지면기사
김기춘·조윤선 나란히 구속 법조인 생리 떠올라대학때 산 법률서적 뒤적이다 10만원권 수표 발견기한 지나 못 쓴다면 누구에게 조력 구하나 걱정이제는 많은 국민이 변호인의 조력 없이도 검찰 수사나 법원의 재판에 임할 수 있게 된 듯싶다. 정말이지 법률 선진국의 문턱까지 왔다는 느낌이 확 든다. 이게 다 '선생님'으로 불렸다는 최순실과 그들의 덕분이다. 보통 사람들은 으레 검찰의 소환 통보만 받아도 다리가 후들거리게 마련이다. 이런 국민들에게 최순실과 그들의 사건 응대는 너무나 많은 법률정보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앞으로는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검·경의 수사나 법원의 재판이 호락호락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다. 몸이 피곤하거나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고 하면 수사에 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미 알게 되었고, 헌재가 부르는데도 나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팁까지 받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나는 모른다'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이면 웬만한 조사는 통과 가능한 '전가의 보도'처럼 쓸 수 있다는 점도 각인시켰다. 앞으로는 '최순실은 되고 나는 왜 안 되느냐'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수사 대상자들이 늘어날지도 모른다. 검·경만 골치 아프게 생겼다. '최 선생님과 그들의 법률 강의'가 생각보다 더 오래간다면 변호사들마저 그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다.20여 년 전 법조 출입 초창기에 '미란다 원칙'이라는 다소 낯선 법률 지식을 알게 되었다. 법원 관계자에게서 보기 드문 판결이 나왔다는 얘기를 우연히 듣고 취재했던 바다. 경찰관이 범죄용의자를 연행하는 과정에서 그 이유와 변호인 선임권, 진술 거부권 등을 고지했어야 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아 무죄 판결이 내려진 경우였다. 경찰 영화에 많이 나오는 그게 바로 미란다 원칙이란 거였다. 수사 과정에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판결이다. 명색이 법조 출입기자가 기본적인 것도 몰라서야 되겠냐는 생각에 법률 상식을 다룬 책부터 샀다. 요새 부쩍 그렇게 법률 지식에 다가갔던 기억이 새롭다.유명 법조인 출신인 김기춘 전 비서실장과 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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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해방 이전의 인천 어시장 지면기사
관련 기록 '중구난방' 역사 바로잡기 절실인천은 바다의 고장이다. 당연히 고기잡이도, 어시장도 발달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인천 어시장과 관련해 속 시원히 설명해 주는 자료가 많지 않다. 인천지역 어시장의 연원은 인천종합어시장의 시작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일본인들이 1933년에 펴낸 '인천부사'와 의사이자 향토사가였던 신태범(1912~2001)이 쓴 '인천 한 세기'에서 인천 어시장의 태동 당시를 짐작할 수 있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1887년 조선 정부의 허가를 받아 경기도 남양에서 강화에 이르는 인천 앞바다에서 어로 행위를 하기 시작했다. 일본 어선 15척이 참여했다. 이들은 어선 1척당 은(銀) 10원(圓)씩을 1년 수수료(면허세)로 냈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잡은 물고기를 별도의 세금을 내지 않고 인천항에서 판매했다. 이게 인천 어시장의 시초라 할 수 있다.일본인들이 생선장사로 돈벌이를 시작하니 조선인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터이다. 조선인으로는 정흥택(鄭興澤)이라는 사람이 수산물 거래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다. '인천 한 세기'에서는 '1890년대 초에 한양 청파인 정흥택 형제가 인천으로 내려와 어물객주를 차렸다. 선창가였던 현 신포슈퍼마키트 자리에 한옥으로 어물시장을 짓고 도매시장을 개설했다. 한국인의 취향에 맞는 생선은 행상인이 받아가고, 일인이 좋아하는 생선은 그 자리에서 소매를 했다. 이곳이 후일에 유명해진 인천의 생선전의 시초였던 것'이라고 썼다. 이 부분을 '인천부사'는 명치 28년인 1895년께로 밝혔다. '인천부사' 속 다른 부분에서는 명치 38년인 1905년께로 달리 적기도 했다.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전후해 이들 전쟁의 출발 지점이었던 인천지역에 생선이 없으면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폭발적으로 늘면서 수산물 수요도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흥택이 본격적으로 일본인들과의 수산물 판매 경쟁시대를 열었고, 일본인들 내부에서도 수산물 판매 다툼이 치열했다. 조그만 중구 개항장 일대에 어시장이 2곳으로 늘었다가 1907년 합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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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황해도 순위도 출신 임경애 할머니(1) 지면기사
1·4후퇴 이어 휴전협정때 군 철수로 두번째 피난파라다이스호텔 자리 천막생활때 생선장수 시작서울까지 전철 타고 대야 들고 다니며 5남매 키워소매치기·아동유기 많았던 하인천 어물전서 분투이후 지역 최대 연안부두로 터전 옮겨 장사 이어와인천에서 60년 넘게 생선장사만 한 임경애(84) 할머니는 1934년 개띠 해에 황해도 옹진군 순위도에서 태어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지난해에 갑자기 당뇨가 심해져 지금은 어시장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쉬고 있다.할머니는 피란살이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첫 번째는 처녀 때 오빠와 함께 둘이서 순위도 근처 비압도를 거쳐 백령도에 잠시 머물다가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에 배치됐다. 1·4 후퇴 때로 기억한다. 나환자촌인 소록도가 바로 앞이었다. 임 씨 집성촌이었다."커다란 기와집이었는데 임 씨 집이었어. 거기서 나는 밥을 해주고, 오빠는 일을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었지. 그러다 섬이 복구됐다고 해서 고향에 갈 배가 목포까지 왔어."겨울에 나와서 도양면 임 씨 집에서 모내기까지 해줬다. 순위도 고향에 돌아가서는 억지 결혼을 했다. 신랑이 나이도 아홉 살이나 많은 데다 서구적으로 생겨서 친구들이 '네 신랑은 양키'라고 놀려댔다. 결혼을 안 하겠다고 밥을 닷새나 굶었지만 소용없었다. 전선이 또다시 인민군에 밀리게 되자 두 번째 피란을 했다. 이번에는 친정에 시댁 식구들까지 다 나왔다. 부모는 백령도에 남았고, 시누이 등 여섯 명이 인천으로 넘어왔다. 그 피란민들은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인천(옛 올림포스호텔) 자리에 친 대형 천막 8개에서 생활했다. 열아홉에 결혼해 첫째를 스물에 낳았다.여기서 잠시 당시 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이 터지면서 1차 피란을 나왔고, 수복된 뒤 고향에 돌아갔다가 1·4 후퇴 때 다시 피란을 한 것으로 여기는 게 보통의 생각이다. 하지만 임경애 할머니는 전쟁이 났을 때 바로 피란을 나올 수가 없었다. 순위도에서는 그때 군인이나 경찰들만 피란선을 탈 수가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은 거의 피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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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고향은 잃었지만 '기억' 마저 잃을 순 없다 지면기사
강물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연결의 공간이어야 한다. 하나 저기 저 강물은 남북 단절의 상징으로 남은 지 70년. 사람도 강도 이제 그 이름마저 잊었다. 조강(祖江).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교동을 지나 서해에 이르는 물길을 예로부터 조강이라 이름하였다. 조강은 한강 물도 흐르고 임진강 물도, 예성강 물도 보태졌다. 세 개의 강물이 하나 되어 흐르는 강, 조강.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이름의 흔적은 동방의 시호(詩豪) 이규보(1168~1241)의 작품에 있다. 1219년, 지금으로 치면 인천광역시장 격인 계양부사로 부임하면서 바로 이 조강을 건넜다. 그 순간의 감흥을 작품에 풀어냈다. 조강부(祖江賦) 1편과 시편 2편이 남아 있다. 신임 계양부사 이규보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조강을 거쳐 김포반도에 이르는 코스를 택했을 것이다. 이후 조강이란 이름은 해방 직후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조강은 남북 분단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발행되는 거의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조강이라는 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냥 한강으로만 돼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런 표기를 하지 않은 것도 있다. 사람이 왕래하지 않게 되면서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졌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다.실향민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 실향민들의 인생이며 기억은 둘로 정확하게 나뉜다. 북녘에 살 때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생활이 너무나 뚜렷하게 구분된다. 저쪽에서의 삶과 이쪽에서의 생활 모두 기록하지 않으면 잊힐 수밖에 없다. 그네들의 삶과 기억은 후세에 계속해서 전해져야 한다. 역사가 단절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준비하는 이유이다.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실향민 이야기'에서는 고향 생각에 잠을 설치는 실향민들의 그 기억을 담아낼 터이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라도 날아가겠다는 고향에 대한 그 간절한 그리움을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맨손으로 시작해 일가를 이룬 성취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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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프롤로그 지면기사
빈손으로 일가를 이룬 실향민 취재꿈틀대는 역사 한편의 기록으로…70년 가까운 세월 1세대 수는 줄고북한은 송두리째 변해 옛 모습 잃어더 늦기전에 이야기 복원하려 기획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함께한 고향은 늘 밤하늘의 별처럼이나 많고도 빛나는 추억의 창고이다. 그래선지 그 고향을 노래한 정지용의 절창 '향수'는 국민 시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은 더욱 짙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고향을 마음속에서만 기억하고 되뇌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이북 실향민이다. 전쟁 통에 잠깐 떠나는 것일 뿐 금방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 어느새 그만 70년이 다 되었다.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실향민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했다. 빈손으로 내려와 죽을힘을 다해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야 했던 그들의 삶의 궤적과 그 실향민들이 그동안 하루도 잊지 못한 고향 이야기를 매주 목요일 한 차례씩 1, 2부로 나눠 엮어 나간다.실향민들의 낯선 남한 땅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처절한 분투기이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무의 상태에서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워냈다. 누구는 시장에서 장사도 하고 노동판을 전전하기도 했으며, 누구는 또 그럴듯한 사업가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그 분투기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 된다. 그 점을 각각의 실향민 이야기 제1부에서 하게 될 것이다.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 온 그분들의 꿈틀대는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남기겠다는 게 취재팀의 각오다.제2부는 고향 땅 이야기이다. 실향민 시인 김규동은 여든여섯 되던 2011년 2월에 펴낸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에서 "고향 집 우물가 느릅나무는 안녕한지 모르겠다"면서 "소원이 있다면 세상 떠나기 전 꿈속에서처럼 고향 땅 함경북도 종성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시인은 그만 그해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명 영화감독 신상옥이 김규동 시인의 친구이다. 신상옥은 1970년대 후반 북으로 납치됐다. 북한에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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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데스크 칼럼]하 수상한 연말을 보내며 지면기사
촛불 정국에도 朴대통령 명예회복 별러 결딴날 판각국 새 외교질서 짜느라 숨가쁜데 우리만 허우적무능·참혹 절절했던 1950년 연말과 별반 차이없어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는 말은 필시 요즘 시국에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연초만 해도 한 해를 넘기기가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주 남은 연말의 느낌이 여느 해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시절은 하 수상하기 그지없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라고 할 수 있는 1905년 을사년(乙巳年)만큼이나 국민의 마음은 쓸쓸하고 어수선하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반대했던 김상헌(1570∼1652)이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썼다는 시조의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둥 말 둥 하여라'는 대목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정국이 계속되고 있다.벌써 두 달째 주말 저녁마다 서울 광화문과 청와대 일대는 촛불에 뒤덮인다. 전국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하야 요구로 들끓는다. 그 목소리에 국회는 탄핵안 통과로 응답해야만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 본인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이라고 억울해 한다. 박 대통령 옹호세력도 나름대로 힘을 모으고는 있지만 들불처럼 타오르는 촛불의 위세를 어쩌지는 못하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의 컨트롤 타워인 청와대는 이미 국민들에게 코미디 극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정작 박 대통령은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다. 그 사이에서 자칫 대한민국이 결딴나게 생겼다.지금의 시국을 병자호란이나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던 그 난리 통에 비유하는 것은 그만큼 목하의 사태가 엄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개월 뒤면 러시아와의 밀월 시대를 진작부터 예고해 왔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미·일·러 3국이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국제 이슈에 공동보조를 취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중국은 그만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세계 각국은 새로운 외교질서를 짜느라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정말 난리 통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만 '대통령 문제'에 빠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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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인천 유일 남북대표단 하상령 선생, 하늘로… 지면기사
인천지역 민족진영 인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1948년 남북회담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던 하상령(河相領) 선생이 지난 2일 타계했다. 향년 100세. 하상령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했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조소앙(1887~1958), 이 두 인물과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 1917년 인천 동구 화평동에서 태어난 하상령 선생은 창영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 20회 졸업생이다. 수도국산 근처에서 정미소를 하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그 어린 나이에 생계를 챙겨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서점이었다. 지금의 동인천역 부근인 인현동 1번지에 위문당(爲文堂)이란 서점을 냈다. 80년이 지나도록 당시 서점 명함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그 명함에 적힌 이름은 하연숙(河璉淑)이었다. 여자 이름으로 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남자가 귀하던 집안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상령(相領)으로 바꾸었다.일제강점기 인천에는 유독 서점이 많지 않았다. 그런 점을 간파하고 서점을 낼 만큼 영민했던 하상령 선생은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몇 년 뒤 수석 사무원에까지 오른 그는 인천에서 평양에까지 다니면서 법원 관련 업무를 처리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0년대 중반 갑자기 그 일본인 변호사가 본국으로 떠나면서 직장을 잃었고, 다시 인천에서 서점을 냈다.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면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 징용을 시작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하 선생은 일본 유학을 택했다. 공부하던 중 1943년 귀국해 동구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에 들어갔다. 이 또한 일본 본토까지 뻗쳐 온 징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여기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다시 서점을 내 세를 키웠지만 옆 과일가게에 불이 나는 바람에 서점을 통째로 날려야 했다.실의에 빠진 그에게 주변에서 권한 것이 사회운동이었다. 30세에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인천지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대한건국 인천청년회도 조직했다. 이 단체 이름은 직접 지었다. 당시 좌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