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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유정복 시장 3년과 인천의 운율 지면기사
'인천 주권 선언' 타도시와 대결구도 아닌지역사적으로 열려있는 개방도시, 늘 포용해와특질 잘 반영하고 다른지역과 벽 세워선 안돼얼마 전부터 문학과 관련한 강좌를 듣고 있다. 매주 한 차례씩 하는 것인데 강의실까지 가자면 인천에서 2시간이나 걸린다. 대학을 졸업한 지 20년이 훌쩍 넘어서 듣는 강의라서 그런지 먼 길을 오가는 불편보다는 오랜만에 찾은 배움의 기쁨이 더 크다는 생각으로 견디고 있다. 지금까지 세 번을 들었는데, 강사들은 저마다 전공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이었다. 문학 강의라는 게 따분하고 지루하게 여겨지게 마련이지만 아직은 집중력을 잘 유지하면서 재미있게 듣고 있다. 잘 가르치는 사람에게서는 그 나름의 운율 같은 게 뿜어져 나온다.운율은 시와 같은 문학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삶에도 운율이 있어야 한다. 노래나 시에 강·약이나 높낮이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우리 생활도 마찬가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나 '고진감래(苦盡甘來)' 같은 옛말은 다 그런 생각의 응집일 터이다. 내공 깊은 강사들의 강의가 수강생들에게 따분하지 않은 배움을 주는 것은 가르치는 운율이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평생 한 가지만 좇아 온 그 강사마다 제각각의 운율이 있었는데, 그 운율은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을 만큼의 깊은 울림을 줬다.유정복 인천시장이 취임 3주년을 맞았다. 며칠 전 만난 유정복 시장에게서 묘한 운율이 느껴졌다. 유 시장은 그동안 많은 시민에게 '모범생' 스타일로 비치고는 했다. '집, 도서관'만을 왕복하는 공부 잘하는 학생 같은 느낌 말이다. 그 유정복 시장이 새로 팠다면서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유정복을 드립니다'. 이름과 직함, 전화번호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냥 한 구절뿐이었다. '복'이라는 글자를 크게 쓰고, 거기에 한자(福)까지 도장을 찍어 색다른 느낌을 줬다. '나, 유정복을 머슴처럼 부리라'는 뜻도, '내 마음을 받으면 당신에게 복이 될 것'이라는 뜻도 담은 중의적인 의미가 읽혔다.최초의 인천 태생 인천시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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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같이 가야 지속발전 가능 지면기사
제373회 새얼아침대화가 14일 오전 7시 쉐라톤그랜드인천호텔에서 열렸다. 이날은 정일영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이 나와 '인천시와 인천공항의 미래 비전'이란 주제로 강연했다. 정일영 사장은 인천공항공사를 향한 인천시민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듯 강연 도중 여러차례 인천공항이 인천지역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 무엇무엇인지를 소개했다. 정일영 사장은 "인천시와 같이 하지 않고 인천공항 혼자서 세계 최고가 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면서 "인천시와 같이 가야 인천공항이 지속 발전할 수 있고 의미 있는 발전이 된다"고 강조했다.정일영 사장은 그러면서 인천공항공사가 인천지역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다고 청중들에게 자료를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수많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계속되는 토목공사와 같은 분야에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막대한 지방세 납부로 재정에 기여하고, 문화와 복지향상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정 사장은 또 인천공항이 국가적인 화두로 떠오른 4차 산업혁명의 집약 공간이라면서 공항에서 자동차산업과 항공산업, 그리고 유통이 어우러진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인천공항은 5조원을 투입한 제2터미널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와 있다며 제2터미널이 정상 가동되면 연간 1천800만명이 더 이용할 수 있어 현재 이용객 5천400만명에 추가하면 7천200만명 규모로 성장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데도 이 제2터미널도 3년 뒤면 용량부족 문제를 겪을 수 있다면서 2023년에는 1억명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확장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고 정일영 사장은 설명했다.정일영 사장은 "인천공항이 2030년까지 새로운 터미널을 건설해 1억3천만명 정도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면서도 "하지만 중국과의 경쟁이 큰 문제"라고 했다. 중국의 항공사 1곳이 소유한 비행기 숫자가 우리나라 국적기 전체보다도 많은 실정이라는 비유도 들었다. 이런 곳과 가격이나 서비스 면에서 앞서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정 사장은 또 인천공항공사는 공항이 있는 영종에서 강화와 개성을 잇는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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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3]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下) 지면기사
■첫째형 '오타후쿠 솜공장'새 일자리 인천 젊은층 몰려 현재 남구 숭의동 일대 위치인천서 사다 준 농구화 추억■둘째형 '이북장사·인삼농사'4명의 형 중 가장 잊지 못해돈 벌어 중·고·대학 보내고강화 정착도 도와 고마움 커■셋째형 '고려정미소'일본이 세운 정미업 시작점아마 권투 전국대회 우승자구락부 운영 친선전도 주선■용산동 용수산 밑자락 고향 마을은?결혼식 풍경 이색… 손님마다 상 하나씩 내놔부인 김기희 할머니 개성보쌈김치 솜씨 자랑35m폭포 돌 던져 넘긴 실력 투수이력 밑바탕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의 가족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상하리 만큼 인천과 인연이 깊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전쟁 이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부터 인천의 중요 경제현장을 할아버지의 형들이 누벼 왔다. 할아버지에게는 위로 형들이 4명이나 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첫째 형이 해방 전에 인천의 '오타후쿠와타'에서 일했다고 했다. 일본어 '와타(わた)'가 솜이나 목화를 뜻하니 솜 공장이다. 또 둘째 형은 전쟁 직후 강화에서 '이북장사'를 하고 인삼 농사를 지었다. 셋째는 해방 전 '고려정미소'에서 일하면서 권투를 했다고 했다.넷째 형은 국내 유명 건축가라고 했다. 동생도 한 명 있어 모두 6형제였다. 이들 중 홍순주 할아버지를 포함해 4명이 인천 경제사의 중요 축을 이루는 분야에서 일했다. 솜 공장과 정미소, 인삼 재배가 그것이다. 첫째와 둘째 형은 일제강점기에 개성에서 제물포 개항장으로 건너 와 직장을 구하고 인천을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다.이는 당시 새로운 일자리가 넘쳐나던 인천에 개성과 같은 대도시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음을 보여주는 귀한 사례이기도 하다.할아버지의 첫째 형(홍순경)이 일했다는 '오타후쿠' 솜공장은 할아버지와 부인 김기희 할머니가 그 상징마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예전에는 유명했던 모양인데, 지금 그와 관련한 기록을 찾기가 쉽지는 않다. 양준호 인천대 교수가 펴낸 '식민지기 인천의 기업 및 기업가 : 데이터베이스의 구축'에 스치듯 언급돼 있고, 당시 신문 기사 몇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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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2]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中) 지면기사
1900년대초 재배 시작 해방직후까지 '미미'개성인삼 근원은 경상·전라서 전파 '추측'이북장사 접은 둘째 형따라 농사 뛰어들어아내도 초교 교사 그만두고 밭일 뒷바라지거름 만들고 종삼 키우기 등 만만찮은 작업개성·강화는 인삼 재배 넘어 상호보완 관계껍질 깎는 일거리 등 후한 인심 동네서 인기도둑 들끓어 삼포마다 관리자 두고 밤 순찰1928년생 홍순주 할아버지가 휴전 되던 해에 강화에 정착한 뒤로 가장 오래 한 일은 인삼농사다. 20년 정도 했다고 했다. 지금은 예전만 못하지만 강화인삼의 명성이 높았던 데는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 출신들이 전쟁으로 인하여 강화에 많이 살게 된 이유가 크다.이들이 있었기에 개성 인삼의 전통이 그대로 강화에서 이어질 수 있었다. 강화도에서 인삼이 언제부터 재배되었는지에 관하여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강화군청을 비롯한 주요 행정관서에서도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다만, 1980년 '지리학 제22호'에 실린 논문('인삼 재배지역의 형성과 전파에 관한 연구-강화도를 중심으로')속에서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강화도의 인삼재배가 개성인들의 왕래에 의하여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보면서, 그 최초 시작점을 1903년으로 밝히고 있다.이때가 논문에서 말하는 1차 강화도 인삼재배의 시기이다. 2차는 홍순주 할아버지와 같은 개성의 피란민들이 강화도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 논문에서 인용한 1973년도 전국 삼업조합별 인삼 경작면적을 보면, 강화는 홍삼재배면적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다.홍삼과 달리 백삼은 금산 지역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강화는 2위였다. 이 시기는 홍순주 할아버지가 강화에서 한참 인삼농사를 지을 때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강화에서의 인삼 재배는 그다지 큰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1948년 해방 후 국내 첫 문화원 잡지로 창간된 '강화'에 당시 강화군청 간부 공무원이 낸 기고문에는 강화지역의 인삼 재배 현황을 개략적이나마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이 있다. 이 기고문에 붙은 강화 지역의 '밭 종합이용면적 상황표'에 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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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소사나무, 1947년엔 없었다 지면기사
천연기념물 강화 마니산 소사나무는 누구나 생각하듯이 150년을 참성단에서 자생한 게 아니란 점이 새롭게 드러났다.경인일보가 지난 1일자 1면에서 보도한 '해방 직후 강화도 모습' 사진 중 개성 학생들이 오른 마니산 참성단 부분을 확대해 보면, 당연히 있을 것으로 여겨진 소사나무 한 그루가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2009년 9월, 수령 150년으로 추정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 소사나무는 그 세월 동안 척박한 참성단 꼭대기에서 홀로 자생해 온 것으로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가들까지 생각해 왔다. 이런 점에서 이 사진 1장은 이 소사나무가 최소 1947년 이후 참성단 위에 새로이 옮겨 심어졌다는 사실을 얘기해 준다.문화재청은 '참성단 소사나무'가 외양도 단정하고 균형이 잡혔으며, 특히나 마니산 참성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다는 독특한 점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고 천연기념물 지정 이유를 설명했다. 천연기념물 지정은 국내 소사나무로서는 처음이었다. 참성단 소사나무 앞 안내판에는 '수령 150년(추정)'이라는 내용도 새겨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물기와 양분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참성단 위에서 홀로 150년을 살아온 신령스런 나무로 여기게 되었다. 이런 인식은 나무 전문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도 이 소사나무가 중간에 참성단에 옮겨 심어졌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나 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얻은 홍순주 할아버지의 해방 직후 수학여행 사진 속 참성단 모습에서는 돌단 위 어디에서도 이 소사나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한 국내 유명 나무 칼럼니스트는 '참성단 소사나무'를 일컬어 '흙 한 줌이 고작인 참성단 돌 틈에서 1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온 장한 나무'라고 썼다. 홍순주 할아버지의 사진 1장은 천연기념물 소사나무가 참성단에서 150년을 계속해서 살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산기술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석권 박사는 "해방 직후 참성단 주위에 소사나무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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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성단 소사나무, 1947년엔 없었다 지면기사
천연기념물 강화 마니산 소사나무는 누구나 생각하듯이 150년을 참성단에서 자생한 게 아니란 점이 새롭게 드러났다.사료로 남아있는 '해방 직후 강화도 모습' 사진 중 개성 학생들이 오른 마니산 참성단 부분을 확대해 보면, 당연히 있을 것으로 여겨진 소사나무 한 그루가 보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이 2009년 9월, 수령 150년으로 추정하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 소사나무는 그 세월 동안 척박한 참성단 꼭대기에서 홀로 자생해 온 것으로 일반인은 물론이고 전문가들까지 생각해 왔다. 이런 점에서 이 사진 1장은 이 소사나무가 최소 1947년 이후 참성단 위에 새로이 옮겨 심어졌다는 사실을 얘기해 준다.실제 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얻은 홍순주 할아버지의 해방 직후 수학여행 사진 속 참성단 모습에서는 돌단 위 어디에서도 이 소사나무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한 국내 유명 나무 칼럼니스트는 '참성단 소사나무'를 일컬어 '흙 한 줌이 고작인 참성단 돌 틈에서 15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온 장한 나무'라고 썼다. 하지만 홍순주 할아버지의 사진 1장은 천연기념물 소사나무가 참성단에서 150년을 계속해서 살지는 않았음을 증명한다.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산기술연구소 소장을 지낸 김석권 박사는 "해방 직후 참성단 주위에 소사나무가 없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면서 "이번 기회에 참성단 소사나무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과 역사적 사실의 관계를 검증해 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천연기념물 강화 마니산 참성단 소사나무가 150년을 참성단에서 자생한 게 아니란 점이 새롭게 드러났다. 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얻은 홍순주 할아버지의 해방 직후인 1947년 수학여행 기념사진 속 참성단 어디에서도 소사나무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진 오른쪽은 강화 마니산 참성단에 자리 잡고 있는 소사나무. /홍순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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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6장의 사진, 해방 직후 강화도 모습을 훤히 비추다 지면기사
강화 마니산이 민족의 영산인 이유는 우리가 민족의 시원으로 삼는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이 있어서다. 해방 직후 촬영한 그 참성단의 오래된 사진 한 장이 세상에 나오게 됐다. 그것도 개성의 중·고등학생들이 강화로 수학여행을 와서 촬영한 것이다.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실향민 홍순주 할아버지의 중·고등학생 시절 수학여행 사진을 얻어 보게 됐다. 6년제 개성공립중학교에 다닌 할아버지는 두 번이나 강화도로 수학여행을 왔다고 했다. 그 여행의 기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학생들은 개성에서 개풍군 영정포 배터까지 목탄차를 타고 단체 이동한 뒤 배에 올라타 조강(祖江)을 건넜고 강화 갑곶나루에 내렸다. 그리고는 걸어서 전등사까지 가서는 짐을 풀었다. 전등사에서 하룻밤을 잔 뒤 마니산 정상 등정이 수학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1940년대 중반 개성의 학생들이 강화도로 수학여행을 다닌 그 실감 나는 역사가 빛바랜 사진에 훤히도 담겼다. 피란의 다급하고도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아들의 학창시절 사진을 챙겨나온 홍순주 할아버지의 어머님께 우리가 감사드려야 하는 이유이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사진왼쪽부터)강화 마니산, 강화도 전등사, 강화도 남문, 영정포 배 안, 영정포, 학생들을 태운 목탄차 /홍순주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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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1]개성 출신 홍순주 할아버지(上) 지면기사
서울서 대학 다닐때 전쟁 발발 휴전 후 고향 갈 수 없게 돼 강화에 자리 잡아 개성상인 유명세 한창수 회장과 둘째형이 각각 맡아 운영… 배로 1.8㎞ 북한 드나들어 군 당국 보호하에 서로 첩자 보내기도 "장사꾼이 이중간첩 노릇" 이승만 정권 군부 '돈 줄' 불구 군내부 갈등 탓 오래 못가 개인훈련으로 온갖 운동 섭렵 '민간 특공대' 잡고 강화 '주먹' 평정도남한과 북한이 물물교환을 한다? 꽉 막힌 요즘 남북관계에서는 도무지 생각하기 어려운 교류 방식이다. 그런데 그 참혹했던 한국전쟁 직후 남과 북이 물물교환을 했다는 얘기를 개성이 고향인 1928년생 홍순주 할아버지가 해 주었다. 그러니까 휴전이 있고 나서 1950년대 중반 3년 정도 남과 북이 강화도와 개풍을 오가며 물물교환을 하는 남북교역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그걸 '이북장사'라고 불렀다. 지난 5월 9일 강화도 자택에서 첫 인터뷰를 지켜보던 홍순주 할아버지의 부인 김기희(85) 할머니는 이것저것 자꾸만 캐묻는 기자가 할아버지 얘기를 의심이라도 한다고 여겼는지 부엌으로 가서는 참나리 그림이 선명한 법랑 그릇을 들고 나왔다. 할머니는 이 법랑이 이북장사할 때 북에서 가져온 것인데 지금도 쓴다고 했다.홍순주 할아버지는 1950년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1학년이었다. 당시는 5월 입학이었으니 대학 새내기 생활 2개월째였다. 1951년 초 군에 입대했다. 통신병이었는데 최전선에 배치되지는 않았다. 휴전이 되었지만 더 이상 고향 개성에는 갈 수가 없었다. 전쟁 전 개성은 38선 이남이었는데 휴전이 되면서 그만 개성이 휴전선 이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형님이 자리를 잡은 강화를 찾았고, 지금껏 살고 있다.이북장사는 12살 터울이 지는 둘째 형(홍순형)이 했다. '대영상사'라는 이름을 단 어엿한 회사였다. 읍내에 사무실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그 형에게서 용돈을 받아 생활했다. '이북장사'는 두 패가 맡아서 했다. 할아버지네 '대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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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직후 강화도로 수학여행 온 개성 학생들 지면기사
강화 마니산이 민족의 영산인 이유는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일컫는 단군이 하늘에 제를 지내기 위해 쌓았다는 참성단이 있어서다. 그 참성단의 오래된 사진 하나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해방 직후의 사진이다. 그것도 개성의 중·고등학생들이 강화로 수학여행을 와서 촬영한 것이다.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진행하고 있는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실향민 홍순주 할아버지의 중·고등학생 시절의 수학여행 사진을 얻어 보게 됐다. 해방 직후의 강화 마니산 참성단의 모습(사진 위), 수학여행 학생들이 개성에서 개풍군 영정포 배터까지 목탄차를 타고 단체로 이동하는 모습.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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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70년 동안 가지 못한 엽서 한 통 지면기사
한국전쟁때 부부의 애틋한 연정 담긴 편지혹시나 트럼프가 '러시아 스캔들' 돌파구로한반도 택하지 않을까 엉뚱한 걱정 앞선다여기 엽서 한 통이 있다.가을이 되었구려. 편지를 두 번 했는데, 갔는지. 나는 몸 성히 일을 보고 있습니다. 모두 당신이 염려하여 주는 덕택이요. 아이들은 잘 있는지. 폭격에 고생 많이 하겠소. 조석 식사가 걱정이겠습니다. 이곳 상급을 통하여 그곳으로 생활에 대한 수속을 하여 보겠소. 당신이나 나나 원수를 거꾸러뜨릴 때까지 고생하며 분투합시다. "정애의 건강을 빌며" 끝.67년 전인 1950년 9월 18일, 전쟁의 와중에 황해도에 나가 있던 남편이 인천의 아내에게 보낸 것인데 전달되지 못했다. 부부의 애틋한 연정이 짧디짧은 글에 녹아 있다. 왜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길이 없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이 엽서 한 장은 또한 당시 시대상도 조금은 엿보게 한다. 한국전쟁 때 미군이 노획한 북한 문서 중 편지들을 골라 묶어 펴낸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란 책에 실렸다. 이 책의 별책 주소록에 있는 바로는 황해도 벽성군의 문규원 씨가 경기도 인천시 관동 2가 2 문규원 씨 앞으로 보냈다. 아마도 인천에 자신의 명패가 달린 집에서 살던 남편 문규원이 전쟁 통에 황해도로 넘어간 듯싶다.엽서 속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남편은 '상급을 통하여 그곳으로 생활에 대한 수속을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황해도 벽성군의 북한 쪽 어느 기관에서 일하는 듯하다. '아이들의 안부'를 언급하고 있으니 끝 부분의 '정애'는 부인의 이름일 터이다. '가을이 되었다'고 했으니 한국전쟁이 터진 6월 25일 직후 여름에 집을 나가 계절이 한 번 바뀌었음을 보여준다.엽서를 부친 9월 18일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나서 사흘 후이다. 인천에서는 인민군이 자취를 감추었을 때다. 부인 '정애'와 아이들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런데 남편 문규원은 인천에 여전히 폭격이 가해지는 것으로 알 뿐 유엔군의 상륙작전이 성공했음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이들 문규원 씨 가족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