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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2]황해도 순위도 출신 임경애 할머니(1) 지면기사
1·4후퇴 이어 휴전협정때 군 철수로 두번째 피난파라다이스호텔 자리 천막생활때 생선장수 시작서울까지 전철 타고 대야 들고 다니며 5남매 키워소매치기·아동유기 많았던 하인천 어물전서 분투이후 지역 최대 연안부두로 터전 옮겨 장사 이어와인천에서 60년 넘게 생선장사만 한 임경애(84) 할머니는 1934년 개띠 해에 황해도 옹진군 순위도에서 태어났다. 작년까지만 해도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지난해에 갑자기 당뇨가 심해져 지금은 어시장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쉬고 있다.할머니는 피란살이를 두 번이나 할 정도로 곡절 많은 삶을 살았다. 첫 번째는 처녀 때 오빠와 함께 둘이서 순위도 근처 비압도를 거쳐 백령도에 잠시 머물다가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면에 배치됐다. 1·4 후퇴 때로 기억한다. 나환자촌인 소록도가 바로 앞이었다. 임 씨 집성촌이었다."커다란 기와집이었는데 임 씨 집이었어. 거기서 나는 밥을 해주고, 오빠는 일을 해주면서 밥을 얻어먹었지. 그러다 섬이 복구됐다고 해서 고향에 갈 배가 목포까지 왔어."겨울에 나와서 도양면 임 씨 집에서 모내기까지 해줬다. 순위도 고향에 돌아가서는 억지 결혼을 했다. 신랑이 나이도 아홉 살이나 많은 데다 서구적으로 생겨서 친구들이 '네 신랑은 양키'라고 놀려댔다. 결혼을 안 하겠다고 밥을 닷새나 굶었지만 소용없었다. 전선이 또다시 인민군에 밀리게 되자 두 번째 피란을 했다. 이번에는 친정에 시댁 식구들까지 다 나왔다. 부모는 백령도에 남았고, 시누이 등 여섯 명이 인천으로 넘어왔다. 그 피란민들은 지금의 파라다이스호텔 인천(옛 올림포스호텔) 자리에 친 대형 천막 8개에서 생활했다. 열아홉에 결혼해 첫째를 스물에 낳았다.여기서 잠시 당시 전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쟁이 터지면서 1차 피란을 나왔고, 수복된 뒤 고향에 돌아갔다가 1·4 후퇴 때 다시 피란을 한 것으로 여기는 게 보통의 생각이다. 하지만 임경애 할머니는 전쟁이 났을 때 바로 피란을 나올 수가 없었다. 순위도에서는 그때 군인이나 경찰들만 피란선을 탈 수가 있었다고 한다. 민간인은 거의 피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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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고향은 잃었지만 '기억' 마저 잃을 순 없다 지면기사
강물은 이쪽과 저쪽을 잇는 연결의 공간이어야 한다. 하나 저기 저 강물은 남북 단절의 상징으로 남은 지 70년. 사람도 강도 이제 그 이름마저 잊었다. 조강(祖江). 한없이 낯설기만 하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교동을 지나 서해에 이르는 물길을 예로부터 조강이라 이름하였다. 조강은 한강 물도 흐르고 임진강 물도, 예성강 물도 보태졌다. 세 개의 강물이 하나 되어 흐르는 강, 조강.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그 이름의 흔적은 동방의 시호(詩豪) 이규보(1168~1241)의 작품에 있다. 1219년, 지금으로 치면 인천광역시장 격인 계양부사로 부임하면서 바로 이 조강을 건넜다. 그 순간의 감흥을 작품에 풀어냈다. 조강부(祖江賦) 1편과 시편 2편이 남아 있다. 신임 계양부사 이규보는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아 조강을 거쳐 김포반도에 이르는 코스를 택했을 것이다. 이후 조강이란 이름은 해방 직후까지도 사람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조강은 남북 분단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현재 발행되는 거의 대부분의 지도에서는 조강이라는 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냥 한강으로만 돼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런 표기를 하지 않은 것도 있다. 사람이 왕래하지 않게 되면서 그 이름을 부를 일이 없어졌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잊힌 존재가 되어 버렸다.실향민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 실향민들의 인생이며 기억은 둘로 정확하게 나뉜다. 북녘에 살 때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생활이 너무나 뚜렷하게 구분된다. 저쪽에서의 삶과 이쪽에서의 생활 모두 기록하지 않으면 잊힐 수밖에 없다. 그네들의 삶과 기억은 후세에 계속해서 전해져야 한다. 역사가 단절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실향민 이야기-꿈엔들 잊힐리야'를 준비하는 이유이다.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실향민 이야기'에서는 고향 생각에 잠을 설치는 실향민들의 그 기억을 담아낼 터이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라도 날아가겠다는 고향에 대한 그 간절한 그리움을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맨손으로 시작해 일가를 이룬 성취과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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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이야기 꿈엔들 잊힐리야·1]프롤로그 지면기사
빈손으로 일가를 이룬 실향민 취재꿈틀대는 역사 한편의 기록으로…70년 가까운 세월 1세대 수는 줄고북한은 송두리째 변해 옛 모습 잃어더 늦기전에 이야기 복원하려 기획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함께한 고향은 늘 밤하늘의 별처럼이나 많고도 빛나는 추억의 창고이다. 그래선지 그 고향을 노래한 정지용의 절창 '향수'는 국민 시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은 더욱 짙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고향을 마음속에서만 기억하고 되뇌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이북 실향민이다. 전쟁 통에 잠깐 떠나는 것일 뿐 금방 다시 돌아오겠다면서 그렇게 길을 나선 것이 어느새 그만 70년이 다 되었다.경인일보가 2017년 연중기획으로 실향민 이야기를 풀어내기로 했다. 빈손으로 내려와 죽을힘을 다해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야 했던 그들의 삶의 궤적과 그 실향민들이 그동안 하루도 잊지 못한 고향 이야기를 매주 목요일 한 차례씩 1, 2부로 나눠 엮어 나간다.실향민들의 낯선 남한 땅에서의 삶은 그야말로 처절한 분투기이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무의 상태에서 직업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워냈다. 누구는 시장에서 장사도 하고 노동판을 전전하기도 했으며, 누구는 또 그럴듯한 사업가로 성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우리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그 분투기는 우리 현대사의 단면이 된다. 그 점을 각각의 실향민 이야기 제1부에서 하게 될 것이다. 여러 분야에서 일가를 이뤄 온 그분들의 꿈틀대는 이야기를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남기겠다는 게 취재팀의 각오다.제2부는 고향 땅 이야기이다. 실향민 시인 김규동은 여든여섯 되던 2011년 2월에 펴낸 자전 에세이 '나는 시인이다'에서 "고향 집 우물가 느릅나무는 안녕한지 모르겠다"면서 "소원이 있다면 세상 떠나기 전 꿈속에서처럼 고향 땅 함경북도 종성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고 했다. 시인은 그만 그해에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명 영화감독 신상옥이 김규동 시인의 친구이다. 신상옥은 1970년대 후반 북으로 납치됐다. 북한에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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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하 수상한 연말을 보내며 지면기사
촛불 정국에도 朴대통령 명예회복 별러 결딴날 판각국 새 외교질서 짜느라 숨가쁜데 우리만 허우적무능·참혹 절절했던 1950년 연말과 별반 차이없어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는 말은 필시 요즘 시국에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연초만 해도 한 해를 넘기기가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주 남은 연말의 느낌이 여느 해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시절은 하 수상하기 그지없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의 어원이라고 할 수 있는 1905년 을사년(乙巳年)만큼이나 국민의 마음은 쓸쓸하고 어수선하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반대했던 김상헌(1570∼1652)이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썼다는 시조의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 둥 말 둥 하여라'는 대목처럼 한 치 앞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정국이 계속되고 있다.벌써 두 달째 주말 저녁마다 서울 광화문과 청와대 일대는 촛불에 뒤덮인다. 전국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하야 요구로 들끓는다. 그 목소리에 국회는 탄핵안 통과로 응답해야만 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 본인은 천부당만부당하다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이라고 억울해 한다. 박 대통령 옹호세력도 나름대로 힘을 모으고는 있지만 들불처럼 타오르는 촛불의 위세를 어쩌지는 못하는 형국이다. 대한민국의 컨트롤 타워인 청와대는 이미 국민들에게 코미디 극장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정작 박 대통령은 명예회복을 벼르고 있다. 그 사이에서 자칫 대한민국이 결딴나게 생겼다.지금의 시국을 병자호란이나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했던 그 난리 통에 비유하는 것은 그만큼 목하의 사태가 엄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개월 뒤면 러시아와의 밀월 시대를 진작부터 예고해 왔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미·일·러 3국이 한반도 문제를 포함한 국제 이슈에 공동보조를 취할 가능성도 높아졌다. 중국은 그만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세계 각국은 새로운 외교질서를 짜느라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정말 난리 통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만 '대통령 문제'에 빠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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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일 남북대표단 하상령 선생, 하늘로… 지면기사
인천지역 민족진영 인사 중에서는 유일하게 1948년 남북회담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북했던 하상령(河相領) 선생이 지난 2일 타계했다. 향년 100세. 하상령 선생은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의 시작점에서 중요한 축을 형성했던 백범 김구(1876~1949)와 조소앙(1887~1958), 이 두 인물과 특별히 가깝게 지냈다. 1917년 인천 동구 화평동에서 태어난 하상령 선생은 창영초등학교(당시 인천공립보통학교) 20회 졸업생이다. 수도국산 근처에서 정미소를 하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그 어린 나이에 생계를 챙겨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서점이었다. 지금의 동인천역 부근인 인현동 1번지에 위문당(爲文堂)이란 서점을 냈다. 80년이 지나도록 당시 서점 명함을 소중히 간직해 왔다. 그 명함에 적힌 이름은 하연숙(河璉淑)이었다. 여자 이름으로 하면 오래 산다는 속설에 따라 남자가 귀하던 집안에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상령(相領)으로 바꾸었다.일제강점기 인천에는 유독 서점이 많지 않았다. 그런 점을 간파하고 서점을 낼 만큼 영민했던 하상령 선생은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몇 년 뒤 수석 사무원에까지 오른 그는 인천에서 평양에까지 다니면서 법원 관련 업무를 처리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0년대 중반 갑자기 그 일본인 변호사가 본국으로 떠나면서 직장을 잃었고, 다시 인천에서 서점을 냈다. 중일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면서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해 조선인 징용을 시작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하 선생은 일본 유학을 택했다. 공부하던 중 1943년 귀국해 동구 만석동 조선기계제작소에 들어갔다. 이 또한 일본 본토까지 뻗쳐 온 징용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여기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다시 서점을 내 세를 키웠지만 옆 과일가게에 불이 나는 바람에 서점을 통째로 날려야 했다.실의에 빠진 그에게 주변에서 권한 것이 사회운동이었다. 30세에 그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인천지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대한건국 인천청년회도 조직했다. 이 단체 이름은 직접 지었다. 당시 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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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2명의 '트 대통령'과 한반도 지면기사
트루먼, '전쟁 빌미·공산화 위기 탈출' 병주고 약 줘트럼프, 미군주둔비 100%부담 등 주장 '격랑 예고''정치인 불변·최순실 자괴감' 이래선 美와 상대 못해예전의 우리 신문에 실린 미국 대통령 이름을 보면 폭소가 터진다. 케네디 대통령은 '케 대통령',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아 대통령'하는 식이었다. 마치 박 대통령, 이 대통령 하듯이 한 것인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표현이지만 당시에는 친근감의 표시였다고 할 수 있다. 국민들로 하여금 미국인과 우리의 이름 부르기를 비슷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동질감을 심어주려 했던 게 아니었던가 싶다. 이번에 제45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를 이렇게 옛날식으로 하면 '트 대통령'이 된다.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중 두 번째 '트 대통령'이다. 1945년부터 1953년까지 대통령을 지낸 트루먼이 선배 격이다.지난 주말 서울 광화문 일대를 가득 메운 촛불 인파를 보고서 2명의 '트 대통령'과 한반도의 처지가 자꾸 겹쳐졌다. 트루먼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있을 때 우리는 근현대 최대의 격변기를 보냈다. 해방과 동시에 미 군정 치하에 들어갔다. 그리고 분단이 됐고, 6·25 전쟁이 터졌다. 그 전쟁은 트루먼이 국무장관으로 앉힌 애치슨이 한반도를 미국의 방위라인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한 게 주요 동인이 되었다. 북한 김일성과 소련의 스탈린에게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신호를 준 셈이다. 트루먼 때 미군은 2번의 인천상륙작전을 펼쳤다. 우리가 다 아는 1950년 9월 15일은 두 번째다. 첫 번째는 1945년 9월 8일에 있었다. 이때 미군 사령부는 일본 도쿄에 있었다. 해방군으로 상륙하는 그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수 많은 인천시민들이 인천항 부두에 몰려갔다. 그런데 당시 질서유지를 일본 경찰이 맡았고, 그 일경이 쏜 총에 맞아 여러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어찌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이렇듯 첫 번째 '트 대통령'은 우리에게는 병 주고 약 주고를 반복했다. 전쟁의 빌미를 주기도 했고,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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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고려 지진과 지금, 그리고 정치권 지면기사
경주 강진·태풍 '차바' 정부 사후약방문만 남발역대 한반도 발생 자연재해 살펴봤는지 의문 '고려사절요' 상·벌에 대한 기록 새겨 들어야여러 해 전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숙제처럼 읽어야 할 때가 있었다. 13세기 여몽전쟁을 취재하면서였다. 수많은 고려시대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재미있게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특별하게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었는데, 바로 지진이었다. 그 책을 읽을 당시만 해도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지진은 남의 나라 얘기일 뿐이었다. 고려 때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지진이 자주 일어났다. 우리에게서 그 지진이 언제부터 남의 일로 치부될 정도로 멀어졌는지가 궁금했다."10월 기축일에 지진이 일어나 지붕의 기와가 다 떨어지고, 을미일에 또 지진이 있었다."(1226년 고종 13년)"6월 경술일에 땅이 크게 지진이 있어 담과 집이 무너진 것이 있었다."(1260년 원종 원년)"지진이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1343년 충혜왕 후 4년)"7월 기묘일에 3일 동안 지진이 있었다."(1385년 우왕 11년)'고려사절요'에 나오는 지진 관련 기사 중 몇 가지만 추려 적었다. 고려시대 지진은 시기적으로 때를 가리지 않고 자주 일어나는 천재지변이기도 했지만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한반도 이곳저곳에서 발생했다. 1320년(충숙왕 7년)에는 여름에 지진이 잇달았다. 6월에만 여섯 차례나 있었다. 7월과 8월에도 지진 기사가 한 꼭지씩 나온다. 강진도 여러 차례 발생했다. 집이 무너질 정도로 강력한 지진도 있었다.지난달 경주에서 발생한 강진으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지진 안전지대로 인식해 온 한반도에 집을 무너뜨릴 만큼의 강진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국민들을 짓눌렀다. 그 속에서 우리 정부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었다. 국민의 원성만 키웠다. 안전과 관련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할 국민안전처는 국민걱정처라는 비난을 샀다. 며칠 전 부산에 역대급 물폭탄을 떨어뜨린 태풍 '차바' 때도 정부는 사후약방문만 남발했다.우리 정부가 역대 한반도에서 발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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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詩, 인천을 짓다·17] 이세기作 '생계 줍는 아침' 지면기사
생계 줍는 아침할멈 둘이 앞서 걸어가고 있다살얼음 갯바위 틈새얼어죽은 한 마리 주꾸미라도 주우려갯바위를 걸어서굴바구니 들고 갯티에 가는생계 줍는 아침-이세기(1963~)노후 대책이란 말은 도시에서나 들어맞는다. 엄밀히 말해 섬에서는 '노후'란 게 있지를 않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늙은이는 늙은이대로 일을 해야 한다. 손을 쓰지 않고서는 생계를 이을 수 없는 곳이 섬이다. 겨울이라고 다르지 않다. 굴까는 기구인 '좨'를 들고, 굴 담을 바구니를 메고 가는 섬 할머니 둘. 할머니들은 어제도 그제도 그 길을 오갔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다. 지금은 뭍에 나가 있는 자식들을 그 걸음으로 키워냈다. 갯바위 겨울바람은 유난히 시리다. 그 찬 바람을 이겨내며 바다와 맞닿은 섬의 둘레, '갯티'를 지켜왔다. 덕적군도가 고향인 시인은 잘 안다. 할머니들이 늙어가면서 섬의 생계 줍는 아침도 자꾸만 희미해져 간다는 것을. 섬의 생계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위 시를 읽고 감상문을 보내주시면 선정과정을 거쳐 인천대학교 기념품, 또는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지은 책 '한국문학의 산실, 인천문학전람'을 드립니다. 감상문 작성은 경인일보 홈페이지(www.kyeongin.com) '인천의 시, 인천을 짓다' 배너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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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천시청 북카페, 감보다 단 고욤으로 지면기사
과연 시민발길 이어질까… 어떤 책 놓일지도 궁금질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지역관련 책 얼마나 될지작지만 인천수준 깊고 넓게 잘 드러날 수 있길 기대올 여름휴가는 서울로 다녀왔다. 산으로, 바다로 달려가는 게 보통의 휴가 풍경인데 그와 반대로 푹푹 찌는 더위에 사람들로 득시글대는 서울로 휴가를 갔다. 느닷없이 서울 구경이 하고 싶어졌다. 인천에 산 지가 20년이 넘다 보니 이제는 인천에 대해 조금은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인천과 역사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서울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 일이 있을 때 가끔 서울을 들르고는 했을 뿐이다. 인천을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서울을 깊이 있게 알아야 할 것 같았다.우선 서울시청부터 찾았다. 서울의 전체적인 그림이 서울시청에 가야 보일 것 같아서다. 지하철로 연결된 서울시청사 지하 1층에 가서 뜻밖의 책방을 보고서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이름하여 '서울책방'. 서울의 온갖 이야기가 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서울책방'에서 취급하는 도서 목록만 150종이나 되었다. 책을 징그럽게도 안 읽는다는 요즘, 판매량은 하루에 10만 원 정도로 매우 적지만 꾸준하다고는 한다. 일정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책방 옆은 작은 박물관이었고 전시장도, 공연장도, 카페도 붙어 있었다. 어디고 사람이 많았다. 서울의 컨트롤타워다웠다.그 서울시청 지하에서 불현듯 인천시청이 생각났다. 마침 인천시청 청사 1층이 공사 중이다. 중앙홀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북카페, 역사갤러리, 어린이 시정 체험장, 미팅룸 등 갖가지 공간을 만들겠다고 한다. 시민들을 위한 볼거리를 시청 청사에 갖추겠다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이 된다. 자칫하면 전시행정의 표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우선 인천시청은 시민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다. 대민 부서가 많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역에서 오가기도 불편하다. 여기저기로 연결된 서울시청과 달리 일부러 인천시청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잘못하면 공무원 휴게실이 될 공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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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詩, 인천을 짓다·16]조병화作, 소라의 초상화 지면기사
소라의 초상화당신네들이나영악하게 잘 살으시지요나야 나대로히나의 생리에 맞는 의상을 찾았답니다 -조병화(1921~2003)어릴 적 소라딱지를 귀에 대 본 적이 있다. 그저 윙~ 소리를 낼 뿐이었다. 시 잘 쓰는 시인은 확실히 다르다. 소라와 깊이 있는 대화를 했다니 말이다. 시인은 해방 직후 인생 진로를 놓고 고심하던 시절, 인천 월미도 해변에서 소라를 만났다. 시인의 첫 작품 '소라'(경인일보 2016년 7월 27일자 1면 보도)는 그렇게 태어났다. 시가 막힐 때마다, 혼자서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마다 시인은 '소라'와 이야기를 나눴던가 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소라한테서 혼쭐이 났다. 너무 이해타산에만 매달리지 말라고. 그만 좀 영악하라고. 백사장 위를 느릿느릿 기어가던 소라가 약삭빠른 인간을 향해 일침을 가했다. 빠르고 늦고, 많고 적고 하는 것은 다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죽비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더디게만 보이는 소라의 걸음을 놓고, 자기 집을 지고 다녀야 하는 소라의 신세를 놓고서 속 터진다면서 비웃어 온 우리가 아니던가. 소라의 더딘 걸음이 빠른 것만을 추구하는 우리에게 느림의 미학에 대해, 소라의 단출한 껍데기가 화려하고 비싼 집만을 추구하는 우리의 재산 관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정진오기자 schild@kyeongin.com※ 위 시를 읽고 감상문을 보내주시면 선정과정을 거쳐 인천대학교 기념품, 또는 경인일보 특별취재팀이 지은 책 '한국문학의 산실, 인천문학전람'을 드립니다. 감상문 작성은 경인일보 홈페이지(www.kyeongin.com) '인천의 시, 인천을 짓다' 배너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