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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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말년에 짊어진 간병이라는 짐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3-1)]
'누구나·언젠가' 누구나 아플 수 있습니다. 또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게 '언제'라는 시점조차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죠. 갑자기, 불시에,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와 평범하고 평온했던 우리의 일상을 깨버립니다. 그렇기에 가족을 간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사례들처럼 젊은 시절 운좋게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니 나이가 들 것이고, 그래서 아프고 결국엔 죽게 되니까요. 그게 나의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말입니다. 흔히 '노노(老老)간병'이라 일컬어지는 2명의 가족간병인을 만났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간병의 고통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가족간병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다음은 최명숙(가명·64세)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 scene1. 부모님은 참 단란한 부부였다. 어딜가도 늘 '정정하다'는 말을 들었다.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도란도란 사는 모습에 안심했다. 어쩌면 나는 알면서도 몰랐다. 세월의 무게가 부모님만은 비껴갈 것 같았다. 아버지의 기력이 떨어지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했다. 자식이 4명이나 있었지만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어머니의 헌신 덕에 우리 4남매는 각자의 삶을 살았다. 연로한 어머니 혼자 아픈 아버지를 간병한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지만, 사는 게 바빠 그러려니 했다. 그만큼 어머니의 존재는 컸다. 어머니 덕에 '나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scene2. 2018년, 어머니가 쓰러졌다. 어머니는 '뇌경색'이었다. '좌측 편마비' 증상으로 어머니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환자가 됐다. 오랜 시간 아버지를 돌봤던 어머니는 이제 간병의 대상이 됐다. 어머니의 입원과 아버지의 간병이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4남매 중 누군가는 간병을 맡아야 했다. 건강이 좋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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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기특한 보호자’ 8살배기에 씌워진 덫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2-1)]
# 다음은 이정민(가명·20대 초반)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간병 약자' 사전적인 의미는 '힘이 약한 사람', 사회적인 의미는 '소외된 자'. 남들보다 열악한 위치에 있기에 아무리 노력해서 열심히 달려도 늘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 보입니다. 부당한 상황에 처해도 힘이 약하기에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고, 누구나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에서 소외되기 일쑤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건 이들에게 거리가 먼 일로만 다가옵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간병을 도맡은 '영 케어러' 이정민(가명)씨는 일찌감치 '약자'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머니의 유일한 보호자'라는 타이틀은 정민씨에게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어머니를 간병해야 하는 정민씨의 삶에서 자유롭게 교육받고 나의 진로를 고민하며 온전히 정체성을 형성할 권리는 주어지기 힘든 것입니다. 간병으로 인해 사회적 고립에 놓인 '간병약자' 정민씨에게 '선택할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요. 자신의 삶은 없었고, 엄마의 보호자라는 타이틀만 정민씨를 압도했습니다. 그렇게 '간병약자'의 삶을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정민씨. 그랬던 그는 이제 스스로가 선택해 만들어갈 '자신만의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scene1. 엄마가 쓰러졌다. 초등학교 1학년, 그러니깐 내가 8살 때 갑자기 들이닥친 일이다. 엄마는 담도가 기형이라 담즙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해 계속해서 몸속에 염증이 쌓이는 유전병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병상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염증 수치가 높아서 패혈증이 왔어요, 심장 판막 수술을 해야 돼요." 겨우 정신을 차린 엄마는 생사기로에 놓인 위중한 환자였다. 우리 가족은 엄마와 나, 단둘인데…. 초등학교 1학년, 이제 고작 8살인 나는 그날 이후 엄마의 '보호자'가 됐다. 엄마는 수술 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엄마의 대소변을 받고, 땡땡 부은 팔다리를 주무르고, 밥을 챙겼다. 엄마를 휠체어에 앉히는 것 같이 힘쓰는 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일을 했다. 엄마는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나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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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의 조건, 갖추지 못하면 약자가 된다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2-2)]
'간병 약자' 국가와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차별받아 기본적인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사회적 약자가 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신체적인 장애, 경제적 빈곤, 문화적 차이…. 우와 열이 생기는 인간사에서 약자가 생겨나는 건 어찌보면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일지 모르죠. 그럼에도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살펴보고 돌보는 건, 어쩔수 없이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적 약점을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보완하면 건강한 삶을 다같이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 1편에서 가족 간병과 일상이 서로 공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이야기했습니다. 질병과 지원책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정보 우위력', 언제든 환자를 돌볼 수 있는 '돌봄 인력', 가감 없이 의료비를 지출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 등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이는 '1형 당뇨'를 앓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가 비록 '시간 빈곤'에 처했음에도 최소한의 일상과 간병을 양립할 수 있었던 건 세 조건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가 만난 이정민(가명·20대 초반)씨는 가족 간병과 일상의 공존이 불가능한, 즉 '경제적인 여유', '돌봄 인력', '정보 우위력' 이 세 가지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족 간병인입니다. 우리는 이정민씨와 같은 가족간병인을 '간병 약자'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가족 간병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가 되고 사회적 고립상태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가족간병인은 환자에게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간병인 서비스 등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주변에 환자를 함께 돌볼 수 있는 돌봄 인력이 없다면 간병을 도맡은 간병약자는 온전히 환자에게만 자신의 시간을 쏟아내야 합니다. 간병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동안 사회경제적 활동은 점저 더 불가능해지고 환자의 상태·간병 등에 대한 정보력도 떨어지게 됩니다. 점점 더 빈곤해지고, 간병으로 인한 스트레스 역시 커집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점점 사회로부터 고립됩니다. 최근 사회적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가족돌봄청소년·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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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의 싸움 ‘1형 당뇨’… 경제적 여유도 일상 균열 막지 못하는 이유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1-2)]
'시간 빈곤' 누구에게나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인데, 일할 때를 제외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자유시간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보통 돈이 있고 없고를 두고 빈곤하거나 풍요로움을 따지는데 시간에도 비슷한 개념을 적용한 것이죠. 모두에게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시간이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습니다. 준서의 어머니를 만나며 우리가 깨달은 점은 가족 간병이라는 굴레에서는 중산층도 '시간 빈곤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중산층에게는 '경제적 여유'라는 막강한 조건이 있긴 하나, 시간에 있어선 이들 역시 불평등하게 흘러갑니다. 가족 간병을 하지 않는 보통사람들과 비교해서 말이죠. 준서의 어머니이자 간병자,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가 자신에게 주어진 간병의 조건에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론 막막함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소득이 보장되는 전문직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가족 간병과 일상의 공존을 부단히 지켜내고 있지만, 그의 삶은 어딘가 여유가 없고 숨이 차 보였습니다. 지난달 27일 경인일보 취재진은 고양시 일산동구의 김은희씨 자택에 방문했습니다. 언뜻 보기엔 언론 등을 통해 으레 우리가 알고 있는 가족 간병 가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저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집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준서는 여느 초등학생들의 모습과 똑같았고, 취재진에게 인사를 하러 잠시 나왔다가 다시 영어 공부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졌습니다. 하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차츰 김은희씨의 삶이 고요 속 곧이어 몰아칠 태풍처럼 다가왔습니다. 김은희씨는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5분에 한 번씩 스마트폰 속 차트를 확인했습니다. 말을 하면서도 멀티태스킹을 하듯 머릿속으로는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 심상치 않다 싶으면 서슴없이 준서에게로 가 '무언가'를 먹으라고 말한 뒤 다시 인터뷰 중인 식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무언가는 혈당을 곧바로 높이는 데 탁월한 오렌지 주스였습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가만히 지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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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으로 뒤바뀐 일상, 24시간도 부족한 엄마… 중산층의 ‘시간 빈곤’ [밀려난 삶의 반: 가족 간병과 나·(1-1)]
'10년' 초등학교 5학년, 부모님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 간병을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시작된 가족의 간병은 20대 성인이 돼서야 끝이 날 수 있었습니다. 간병은 가족의 시간과 연동돼 모두의 삶을 뒤바꿨습니다. 부모님의 일상은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할머니 곁에 항상 누군가 있어야 했고 잠깐 외출하더라도 집을 오래 비우지 못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할머니가 치매까지 앓자 간병은 더욱 고됐습니다.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식사를 챙기고, 때마다 병원을 모셔야 하는 모든 일이 어린 눈에도 버거웠습니다. 할머니를 향한 사랑과 책임감으로 시작한 간병이지만 지난한 돌봄에 부모님은 지쳐갔습니다. 일과 간병에 자녀 양육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쉴새없이 들이닥쳤습니다. 만성적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쌓였지만 해소할 처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가족의 몸과 마음이 모두 소진되고 나서야, 어쩔 수 없이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습니다. 그렇게 10년을 간병했지만 부모님은 여전히 할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집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간병=가족', 우리 사회에 통용하는 이 당연한 명제에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삶이 파괴될 만큼의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는 게 당연한가, 간병과 일상은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가. 마음 속 오래 품었던 그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답을 찾는 여정에서 우리는 여러 연령, 다양한 상황에 놓인 가족간병인을 만났고 심층 인터뷰를 통해 '시간빈곤' '간병약자' '언젠가·누구나' '선택할 자유' 라는 공통의 주제를 찾았습니다. 모든 인터뷰를 1인칭 시점에 담은 건 언젠가 가족은 아플 것이고, 당신도 가족간병인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의 일'이라는 공감 아래, 기자들의 기억법 '밀려난 삶의 반: 가족간병과 나'를 시작합니다. #'반추'. 다음은 김은희(가명·40대 초반)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빈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꿈을 포기하게 만드는 비참한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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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일상 속 추모' 위해… 걸어가야 할 길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동네 곳곳에서 이뤄진 유가족과 주민들의 만남 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당한 아이들의 유해만 들어온다는 것’,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라는 것’.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들이 대부분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조은정 학생의 엄마 박정화씨는 “생명안전공원을 무조건 반대했던 주민들이 막상 세월호 선체를 보고 대화를 나누면 우리의 심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행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 - 목포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 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센터는 이름을 하나 더 갖고 있다. 힐링센터 0416쉼과힘.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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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서로를 위로한 '마주침'… 남겨진 세월을 위한 변화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속 추모 지면기사
안산주민·유가족 목포기행 동행 "공원 반대하지 말걸" 오해 확인인천선 생존자 참여 작품 전시회"도움 보답해야" 봉사활동 지속 2018년 5월 안산 화랑유원지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은 적막감만 감돌았다. 고요한 버스의 탑승자는 안산 고잔동 주민들과 세월호 유가족 등 20여명이다. 이들은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 선체를 보기 위해 함께 기행을 떠나는 길이었다. 4시간 내내 함께 타고 가면서도 누구 하나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조용히 각자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거나 눈을 감았다.지난해 7월, 5년 전처럼 버스는 안산에서 출발해 목포신항으로 달리고 있다.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출발지인 화랑유원지 주차장에서부터 유가족과 주민들은 서로를 반기며 인사를 나눴다. 버스 안에서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으며 웃었다. 고잔동의 마을행사 일정이나 복지센터 프로그램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이들의 버스 여행은 '목포기행'. 주민들과 유가족 사이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 기획됐다. 이 여행을 통해 주민들은 세월호를 두 눈으로 보고,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직접 들었다. "봉안시설에는 가족이 아닌 희생학생의 유해만 들어온다"거나 "4·16생명안전공원 부지는 화랑유원지 전체가 아닌 일부에 들어선다"는 설명이다. 주민들은 소문으로 듣고 마음 속에 품었던 의문 대부분이 오해라는 것을 확인했다. 기행에 참가했던 한 주민은 "이런 줄 알았으면 화랑유원지 들어온다고 할 때 반대하지 말 걸 그랬다"라고 뒤늦은 마음을 표했다. 일반인 희생자가 중심인 인천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올해 2월 1일부터 15일까지 부평아트센터 갤러리꽃누리에서는 '그날의 사람들, 오늘의 이야기' 전시회가 열렸다.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추모관(이하·추모관)이 주최한 세월호 참사 10주기 기념전시회였다.세월호 생존자인 김병규씨를 포함한 제주시 생존자 7명,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희생자 가족 14명이 만든 작품 63점이 전시됐다.추모관은 개관 이후 지역사회와 호흡하기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안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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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이후 새로운 시작… 공동체 회복하는 '희망의 마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9·끝)] 일상 속 추모 지면기사
고잔문화복지센터 '목포기행' 기획 명성교회·연세대·선부복지관 협력유가족-주민 안정 프로그램 다양예산문제 어려움에도 필요성 제기목포기행을 기획한 건 단원고등학교 정문에서 30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잔문화복지센터'다. 2014년 9월, 명성교회와 연세대 대학원 상담코칭센터, 선부사회복지관이 협업해 문을 열었다. 세 기관이 힘을 합한 데는 이유가 있다. '공동체 회복'. 세월호 참사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간접적 피해자인 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서다. 더 깊게 들어가면, 유가족과 지역주민 사이에 생겨난 갈등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다.이렇게 유가족과 지역주민들 간 접점을 만들려는 움직임은 안산 곳곳서 일어났다. 상록구 반월동에 거주하는 이연우씨는 참사 1년 후 지역아동센터서 열린 유가족 간담회에서 마르고 기력 없는 모습의 유가족을 만난 후 마음이 바뀌었다. 반월동에 사는 '엄마'들과 함께 매달 한번씩 분향소에 밥을 지어 보냈다. 또 마을 축제, 자치회 행사마다 유가족을 위한 부스를 마련했다. 마을에서 공방 수업을 열면 416공방에 부탁해 유가족들을 강사로 초청했다.고잔동에는 마을걷기 프로그램 '같이걷자'가 운영 중이다. 시민들은 마을해설사와 함께 고잔복지센터·원고잔공원·단원고등학교·화랑유원지 등 고잔동 곳곳을 돌며 세월호참사로 인해 달라진 마을에 대해 듣는다. 눈에 띄는 건 마을 해설사다. 참사 직후 단원고에서 6개월 동안 급식봉사를 한 향미씨와 참사로 아이를 잃고 또 아이가 생존한 지인을 모두 아는 용정씨 등 고잔동 주민 6명이 마을해설사로 나섰다.■ 공동체 회복 시급한데 줄어드는 예산유가족과 주민들이 스스로 관계개선에 노력한 건 피해자 보상, 기억교실 이전 등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지역사회의 갈등이 격화되며 공동체 회복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정부도 대책 마련에 나섰다. 안산시민의 심리안정과 공동체 회복을 국가의 책임으로 의무화한 '세월호피해자지원법'을 제정했고 안산시도 2017년부터 '공동체회복 프로그램(희망마을사업)'을 본격 시행했다.이런 노력 덕에 안산 내 마을공동체 사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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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집시·장애인 학살 잊지 않기 위해… 자랑스러운 건물옆 '수치 기념비'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지면기사
국회의사당·베를린필·티어가르텐 공원 등일상속 받아들여져… 한국 '님비'와 달라"역사적 사건 대하는 방식 변화 고민해야"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주변에는 또 다른 추모 공간들도 곳곳에 있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길을 건너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학살된 집시를 위한 추모 공간'(사진)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는 베를린 필하모닉 건물 옆에는 '안락사 학살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가, 시민들이 조깅을 즐기는 티어가르텐 공원 안에는 '박해받은 동성애자를 위한 기념비'가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곳곳에 있는 추모 공간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만큼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아무렇지도 않게 베를린 시민 일상의 공간 속에 녹아들어 있었다. 지나가다가도 들러 이들의 역사를 마주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있는 곳이다.독일의 추모문화는 한국과 달리 일상과 붙어 있다. 마치 '님비현상'처럼 추모 공간을 기피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독일은 2차대전 전범국가였지만,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기억 문화'가 가장 발달한 국가가 됐다.다만, 지금은 관광지로서도 추모 공간으로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되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건립까지 시행착오가 있었다.우베 노이마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재단 이사는 기념관 건립 15주년 인터뷰에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도 '수치의 기념비'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결국 매년 거의 50만명 이상이 찾는 인기 있는 관광명소가 됐다"며 "이는 우리의 접근 방식이 완전히 틀리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젊은이들과 미래 세대가 역사적 사건을 대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과 맞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고안할 것이다. 출판물 또는 이벤트를 통해 젊은 세대를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 그가 말했듯, 추모 공간의 형태가 국한될 필요는 없다. 세대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추모 공간의 의미가 공유돼야 한다는 것이다.세월호 참사 희생자 지상준군의 엄마 강지은씨는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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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선 어떻게 참사를 기억하나 - 홀로코스트 기록 '네개의 방' [우리가 세월호를 기억하는 방법·(8)] 지면기사
역사는 반복된다는 서늘한 진실… '끝없는 증언'으로 새겼다 독일 정부 제안, 메모리얼 지하에 정보관바닥엔 희생자 일기·편지 등 이야기 가득4가지 공간 따라가며 공감 "가슴 미어져"애도 방명록에 한글로 "기억하겠습니다"2천710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지하의 정보관은 희생자의 이야기로 메워져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관람객에게 닿아 분노와 슬픔으로 표출되고 과거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다짐이 된다."두세살 남짓 되는 어린 아이들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야외 캠프용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울고 또 울고 비명을 지른다. '엄마, 엄마, 뭐라도 좀 먹고 싶어요'. 군인들은 끊임없이 총을 쏘고 그 총소리는 잠시나마 아이들을 침묵시킨다.""나는 그 옆에 쓰러졌고 그의 시체는 이미 뒤집혀 있었다. 목에 총을 맞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너도 그렇게 끝날 것이야'. 이제 죽음 속에서도 인내가 피어난다. 진흙과 섞인 피가 흘러 내 귀에서 마르고 있다."지난 14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정보관을 찾은 관람객은 바닥에 있는 희생자의 일기와 편지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쪼그려 앉곤 했다. 곳곳에선 나지막이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지상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과는 사뭇 다른 무거운 분위기다.정보관은 유대인 학살의 역사를 소상히 서술하는 공간으로 시작해 희생자와 그 가족의 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이어진다.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의 만행과 유대인 학살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관을 지나면, '차원의 방', '가족의 방', '이름의 방' ,'장소의 방'이라고 이름 붙여진 네 개의 방이 차례로 등장한다.관람객은 '차원의 방'의 손글씨 편지와 일기를 통해 희생자의 공포에 공감한다. '가족의 방'에서 소개되는 유대인 15가구의 해산·추방의 기록을 따라가며 안타까움은 극대화된다. '이름의 방'에서는 학대받은 유대인들의 이름·출생연도·사망연도가 동시에 네 개의 벽에 투사되며 그들의 짧은 일생을 내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