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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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 서영석 한의사 "서울 변두리 아닌 국제적 면모 갖춰가는 고향 모습 즐거워" 지면기사
198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 전국 자연계 수석을 인천 학생이 차지했다. 인천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전국 1등 학생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그 학생은 대학 교수를 꿈꾸며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현재는 조금 엉뚱하게도 한의사가 돼 한약 산업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이번 아임프롬인천 31번째 손님 서영석(59·사진) 대한원외탕전협회 회장의 이야기다.서 회장은 1965년 인천 산곡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평동초·부평동중·선인고 등에서 공부했다. 학창시절 서 회장은 궁금한 걸 참지 못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관심이 많았다. 서울대 입학 후에는 강의실보다 길거리에서 투석전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서울대 4학년 재학 시절인 1986년 5월 18일 인천 동구 송림동에서 '5·18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해 구속됐다.복학 후 대학을 마쳤지만 구속 이력 때문에 취업까지 이르지 못했다. 생계를 위해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학원 강사로 일하다 16년 어린 후배들과 경쟁해 한의대에 진학했다.면허 취득 후 개원하고 한의사로 진료 활동을 이어가던 중 대한한의사협회 부회장으로 호출됐다. 한방 처방을 양약 형태 약품으로 개발한 모양으로 만든 '천연신약물' 처방권을 양의사에게만 부여한 보건당국의 정책과 맞서 싸웠고, 한의사도 엑스레이, 초음파 등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리학을 전공한 한의사 출신으로 TV 토론에 나가면 논리에서 쉽게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토박이인 그는 30대 중반 넘어서까지 인천에서 생활했다. 현재는 인천을 떠나 살고 있지만 그는 자신을 "고향 인천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늘 고향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며 "서울 변두리 도시가 아닌 국제적인 면모를 조금씩 갖춰가며 변화하는 고향의 모습을 보면 즐겁다"고 말한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31)] 1983학년도 학력고사 자연계 전국수석 서영석 입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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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1)] 인천이 낳은 ‘공부수저’ 학력고사 1등 서영석 한의사
1983학년도 대입 자연계 전국 수석 민주화 시위 참여해 복역한 경험도 언제나 1등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누구나 1등을 꿈꾸지만 그 기회가 모든 이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아임프롬인천'은 1등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인천 선인고 출신 서영석(청연한방병원 대표 한의사) 대한원외탕전협회 회장이다. 198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 전국 자연계 수석을 차지하며 고향 인천과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지금도 그렇듯 대학입학 전형과 관련된 시험에서 수석 혹은 만점을 차지한 수험생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전국 자연계 수석을 차지한 서영석 회장의 기사도 당시 여러 일간지에 실렸다. 어렵지 않게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서영석군은 “수석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부족한 과목에 노력을 집중했다"고 자신의 '비결'을 밝혔다. '개교 이래의 큰 경사'라는 표현도 옛 기사에서 보인다. 2024년 현재 서 회장의 이야기도 당시 고교생 서군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 회장은 “내가 재미있고 하고 싶어서 (공부를) 했다"며 “공부가 진짜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7일 서 회장과 함께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는 모교 선인고를 찾았다. 조철수 선인고 교장이 반겨줬다. 조 교장은 “지금의 선인고가 있는 자리는 옛 효열초등학교 운동장 터"라고 설명했다. 서 회장의 옛 기사를 보면 “도시락을 2개씩 싸들고 다니며 학교 수업이 끝나고 밤 11시까지 도서관에 남아 공부에 열중했다"고 했다. “밤새 공부하던 옛 도서관을 한번 보고 싶다"는 서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조 교장이 현재 선인중으로 안내했다. 서 회장이 공부하던 옛 선인고 건물은 현재 선인중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인중 건물 7층 옛 도서관 자리는 칸막이가 설치된 도서관이 아닌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하는 특별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수업 중인 모습도 얼핏 볼 수 있었는데, 학생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서 회장은 “옛날 생각이 난다"며 감회에 잠겼다. “2학년 어느 날 갑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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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0)] 주안에서 세계를 꿈꾼 보이스카우트 원대로입니다 지면기사
"싱가포르와 닮은 점 많은 인천, 역외특구 지정 해볼만하다" 부평 출생… 주안서 어린시절 보내교사였던 아버지, 퇴직후 원목상으로유복한 환경 덕, 해외문화 많이 접해제대후 유럽 여행 "설렘 잊지 못해"대학 마치고 삼성물산서 첫 사회 생활국내 1세대 벤처캐피털 기업으로 이직싱가포르서 오랜 근무… 컨설팅社 창업"여전히 외국서 국내 투자 까다로워""시행착오 나로 충분… 길잡이 되고파"1970~1980년대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주안 일대에 퍼져 있던 대규모 염전은 1970년 매립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국가 주도 산업단지인 '주안공단'이 들어섰다. 공단 주변에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도심이 성장했다.아임프롬인천 서른 번째 주인공 원대로(54) 윌트벤처빌더 대표의 유년 기억은 이곳 주안에서 시작된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의 동아시아 진출 컨설팅과 유망 기업의 금융 투자, 경영 등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VC)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싱가포르 벤처 투자 전문가인 원 대표를 만나고 관련 인물·자료를 찾아보니, 40~50년 전 인천 주안의 변모와 활기를 빼놓고 그를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소년 원대로가 주안에서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택했던 도시, 주안에서의 삶원 대표는 1970년 외가가 있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비슷한 시기 그의 조부모도 함경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늦둥이 막내 아들이 귀한 손주를 낳자 고령이었던 그의 친할머니는 '원대로' 다 이루었다며 기뻐했다. 당시엔 순한글 이름이 생소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큰 길(大路)이라는 의미의 한자를 붙였다.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원 대표 가족은 충북 청주에서 그가 5살이 되던 해까지 살다 상경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으면서다. 1977년 주안국민학교(현 주안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의 가족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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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 '윌트벤처빌더' 창업 원대로 대표 지면기사
"주안에서 세계로, 앞으로도 원대로(元大路) 살것" 아임프롬인천 서른번 째 주인공인 원대로(54·사진) 윌트벤처빌더 대표가 겪은 유소년의 인천, 청년 시절의 한국은 역동적이었다. 그의 친가는 함경도, 외가는 황해도 출신 실향민이다. 교사 출신 부친은 '아파트 건설 붐' 속에서 주안공단에 수입 목재 사업장을 차려 부를 이뤘다. 1970년대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동은 상전벽해라 할 만큼 변화 속도가 빠른 동네였다. 옹기종기 초가집이 늘어선 염전 마을은 양옥집이 채웠고, 주안에 정착한 이주민은 중산층 이상의 삶을 누렸다. 40~50년 전 주안은 인천의 신도시와도 같았다.원 대표는 다문화,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보이스카우트 정신'을 유년기 주안에서 체득했다. 1970년대 설립된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 초대 단장 박상도씨는 미군부대 군무원이었다. 원 대표를 비롯한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 아이들은 용산 미군기지를 방문해 미군 자녀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당시 아이들이 쉽게 경험하기 힘든 국제 교류의 장이었다. 원 대표는 1982년 8월엔 전북 무주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 태평양지역 국제 잼버리'에도 참가해 28개국에서 온 타국 소년들과 함께 야영생활을 했다.1991년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한 원대로 대표는 해외여행 자유화에 발맞춰 세계 각국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1997년 이후 외환위기 시절에도 삼성·대우 등 국내 대기업은 대학생 해외 탐방을 확대했다. 해외에서 국내 기업 공장을 견학하고 봉사활동을 벌인 자리에 원 대표가 서 있었다. 자연스레 세계로 눈을 넓히게 됐다.대학 졸업 후 삼성물산에서 상사맨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IT·인터넷 기기를 러시아 시장에 팔았다. 2000년대 이후 국내외 유망 중소기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 열풍이 불자 투자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2016년부터는 싱가포르에서 자신의 회사를 열고 자신의 경험을 살려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국내 스타트업의 컨설팅 활동 등을 이어오고 있다.인천에서 자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원 대표는 싱가포르 국적 재외동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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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0)] 원대로 윌트벤처빌더 대표 “한국인 반골 기질은 스타트업 소스”
스타트업 해외 진출 길잡이 되고 싶죠, 시행착오는 나 하나로 끝내자는 생각입니다. 1970~1980년대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주안 일대에 퍼져 있던 대규모 염전은 1970년 매립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국가 주도 산업단지인 '주안공단'이 들어섰다. 공단 주변에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도심이 성장했다. 아임프롬인천 서른 번째 주인공 원대로(54) 윌트벤처빌더 대표의 유년 기억은 이곳 주안에서 시작된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의 동아시아 진출 컨설팅과 유망 기업의 금융 투자, 경영 등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VC)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싱가포르 벤처 투자 전문가인 원 대표를 만나고 관련 인물·자료를 찾아 보니, 40~50년 전 인천 주안의 변모와 활기를 빼놓고 그를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소년 원대로가 주안에서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택했던 도시, 주안에서의 삶 원 대표는 1970년 외가가 있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비슷한 시기 그의 조부모도 함경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늦둥이 막내 아들이 귀한 손주를 낳자 고령이었던 그의 친할머니는 '원대로' 다 이루었다며 기뻐했다. 당시엔 순한글 이름이 생소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큰 길(大路)이라는 의미의 한자를 붙였다. 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원 대표 가족은 충북 청주에 그가 5살이 되던 해까지 살다 상경했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으면서다. 1977년 주안국민학교(현 주안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의 가족들은 인천 남구 주안에 자리를 잡았다. 부친은 학교를 그만두고 목재 수입 사업에 나섰다.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때다.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해 아파트 건축·인테리어 자재로 팔았다. 어린 원대로에게 공장에 쌓인 원목은 장관이었다. 그는 “큰 트레일러 여러 개를 연결해 놓은 크기였고, 주변에서 쉽게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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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29)] "가장 아끼는 성대모사는 배철수 형님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지면기사
누나들따라 인천에 터잡은 목소리 천재 배칠수입니다 부평산단 등에 먼저 정착한 형제들"크게 될 애" 막내 동생 인천으로 불러와미술·운동 소질… 예고 좌절후 방황도19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대상 데뷔인터넷 방송서 '배캠' 패러디로 유명세유명인 50명가량 음성 모사 '연습 벌레'17년 만에 라디오 경인방송 DJ '컴백'"잘돼야 배철수 형님 나올수 있습니다""올웨이즈(Always) 인천, 배칠수입니다."지난달 27일부터 경인방송(90.7㎒) 라디오 오후 4~6시 프로그램 'Always 인천'의 진행을 맡아 중저음의 편안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이같이 오프닝 멘트를 전하는 DJ 배칠수. 본명 이형민보다 예명 배칠수가 대중에게 더 익숙하므로 '아임 프롬 인천' 스물아홉 번째 초대 손님으로 그를 방송인 배칠수라 소개하려 한다.'배칠수가 인천 출신이었어?'라고 되묻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1972년 전남 무안에서 칠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배칠수는 스스로 '인천 출신'이라 지칭하지 않지만, 자신이 '인천 사람'이라고 분명히 얘기한다.그는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먼저 왔던 형제들 손에 이끌려 열살 무렵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인천이 배칠수처럼 많은 이주민의 보금자리로 꾸려진 도시임을 그의 이야기로 새삼 깨닫는다.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경인방송 사옥 6층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칠수는 "인천 친구들에게 '내가 일을 다 그만두면 꼭 돌아올게'라고 얘기했던 것을 비롯해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 다시 인천에서 방송을 시작했다"며 "숭의동 자택에서 차로 8분 거리라 가까워서 참 좋다"고 말했다.■ 누나들 손 잡고 인천 올라온 시골 소년배칠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무안에서 그를 자식처럼 키우던 누나들은 하나둘씩 인천으로 떠나 모여 살고 있었다. 누나들은 영특한 소년 배칠수를 두고 "크게 될 애를 고향에 두면 베린다('버린다' 방언)"며 인천으로 불러들였다.당시 배칠수 누나들은 1969년 조성된 수출공단 4단지(부평국가산업단지)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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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 'Always 인천' 방송인 배칠수 지면기사
17년만에 경인방송 컴백전국 라디오방송 진행하던 시절 인천사연 많이 소개인천출신 아니지만 나는 '인천 사람'IT 열풍과 함께 '패러디' '엽기' 같은 단어가 대중문화 코드로 주목받던 2000년대 초반, 인터넷 방송과 지상파 라디오를 가리지 않고 정치·시사 풍자 코미디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은 물론 노무현, 이회창, 정몽준 같은 2002년 대선 주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라디오에서 아이러니하고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펼쳐지자 대중은 '가짜'를 '진짜'처럼 들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누군가는 불편하기도 했다.그 중심에는 성대모사의 달인, 방송인 배칠수(52·본명 이형민·사진)가 있었다. 50명 넘는 인물의 성대모사를 할 수 있는 배칠수는 주로 라디오에서 활약했다. 이른바 MZ세대에게는 중독성 있는 CM송 '배칠수의 꽃배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배칠수를 설명하는 여러 열쇳말 중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 '인천'이다. 1972년 전남 무안에서 칠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배칠수는 열살 무렵 가족과 함께 인천에 정착했다. 가족이 한꺼번에 인천으로 올라온 게 아니라 형과 다섯 누나들이 일자리를 찾아 차례로 고향을 떠났다. 부모를 일찍 여읜 배칠수는 당시 지방에서 인천에 온 이주민들의 삶이 그랬듯 형제들과 어렵지만 꿋꿋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을 겪은 배칠수는 자신을 누구보다도 '인천 사람'이라고 말한다.1999년 슈퍼보이스 탤런트 선발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데뷔한 배칠수는 25년 동안 종횡무진 방송가를 누볐다. 지난달 27일부터 인천에 자리한 수도권 라디오 방송사 '경인방송'의 새 프로그램 'Always 인천' 진행을 맡아 인천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 2007년 경인방송에서 잠시 프로그램을 진행한 이후 17년 만이다. 배칠수는 "전국 라디오 방송을 진행할 때 인천 사연을 많이 소개했는데, 어느 청취자로부터 자기 동네 얘기만 한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며 "인천으로 돌아오니 확실히 듣는 분들의 수는 적지만, 그게 오히려 더 동네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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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29)] 성대모사의 달인, “Always 인천” 외치는 방송인 배칠수
“올웨이즈(Always) 인천, 배칠수입니다." 지난달 27일부터 경인방송(90.7㎒) 라디오 오후 4~6시 프로그램 'Always 인천'의 진행을 맡아 중저음의 편안하고 친근한 목소리로 이같이 오프닝 멘트를 전하는 DJ 배칠수. 본명 이형민보다 예명 배칠수가 대중에게 더 익숙하므로 '아임 프롬 인천' 스물아홉 번째 초대 손님으로 그를 방송인 배칠수라 소개하려 한다. '배칠수가 인천 출신이었어?'라고 되묻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1972년 전남 무안에서 칠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배칠수는 스스로 '인천 출신'이라 지칭하지 않지만, 자신이 '인천 사람'이라고 분명히 얘기한다. 그는 일자리를 찾아 인천으로 먼저 왔던 형제들 손에 이끌려 열살 무렵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방송인으로 데뷔한 이후 서울을 주무대로 활동했으나, 줄곧 인천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인천이 배칠수처럼 많은 이주민의 보금자리로 꾸려진 도시임을 그의 이야기로 새삼 깨닫는다. 지난 10일 인천 미추홀구 경인방송 사옥 6층 스튜디오에서 만난 배칠수는 “인천 친구들에게 '내가 일을 다 그만두면 꼭 돌아올게'라고 얘기했던 것을 비롯해 여러 상황이 맞아떨어져 다시 인천에서 방송을 시작했다"며 “숭의동 자택에서 차로 8분 거리라 가까워서 참 좋다"고 말했다. ■누나들 손 잡고 인천 올라온 시골 소년 배칠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늦둥이 막내를 출산한 후 좀처럼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무안에서 그를 자식처럼 키우던 누나들은 하나둘씩 인천으로 떠나 모여 살고 있었다. 누나들은 영특한 소년 배칠수를 두고 “크게 될 애를 고향에 두면 베린다('버린다' 방언)"며 인천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배칠수 누나들은 1969년 조성된 수출공단 4단지(부평국가산업단지)나 1973년 들어선 수출공단 5·6단지(주안국가산업단지)에서 일하며 부평구와 계양구 등지에서 살았다. 자취하거나 일찍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인천 올라와서 처음 산 동네는 갈산동(부평구)이었고, 효성동(계양구) 갔다가, 청천동(부평구) 갔다가,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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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28)] 책을 많이 좋아했던 아이 밤나무골 이태수입니다 지면기사
"국민은 행복할 권리 있어… 그런 기대 못한 우리 세대, 태극기부대로" 율목동서 태어나… 흔적 거의 사라져일본인묘 있던 곳, 지금 '재개발' 현수막고교시절, 잘 사는 유럽의 문화 동경서울대서 평생스승 故 박홍규 교수 만나"국내 기반 필요" 고전문헌학 유학 권유독일서 '국민 위해 돈 쓰는 국가' 체험"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더 요구해야…다른 삶 산 기성세대 나라 망한다 인식""현실이 전부라는 생각, 스스로 가둬"낯선 것에 호기심… 먼 미래·과거 흥미"어쩌면 항구도시서 자란 덕일수도…"서양 고전 연구가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해방 직전인 1944년 율목동에서 태어나 유년과 청소년기를 보낸 인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낯선 것에 자극받고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끌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전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을 때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 사람도 모르는 고대 그리스어를 마치 골목길을 헤매듯 한 글자 한 글자 단어의 원형을 찾아가며 익혔다. 동네 언덕에 올라 인천항을 드나드는 거대한 외항선을 바라보며 마도로스를 꿈꾼 시기도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율목동은 흐릿했다. 하지만 철학자 이태수를 설명하는데 율목동이 어쩌면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났어요. 지금은 생가도 거리도 모조리 바뀌어서 도저히 그 지역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집 근처에 일본 사람들 공동묘지가 있었고요. 나중에 어린이 놀이터가 생기기도 했고 그런데 다 없어졌죠."이태수 교수가 태어난 율목동은 우리말로 밤나무골 혹은 밤나무굴로 불린 마을이다. 의사이면서 향토사학자 신태범(1912~2001)의 '인천한세기'는 율목동에 대해 "야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언덕이 바로 현재 율목동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천을 개척한 선대는 서슴지 않고 이곳을 밤나무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관가에서는 유식하게 한자로 율목리라고 했음직하다"고 기술하고 있다.고향 율목동의 골목 풍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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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 율목동 태생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 "인천 항구 바라보며 미지의 세계 꿈 채웠다" 지면기사
이태수(80·사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고전 연구자다. 인문학의 기본이 되는 서양 고전 연구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이태수 교수는 인천 율목동 태생으로 신흥초·인천중·제물포고·서울대 등에서 수학했다. 독일정부 초청 장학생 자격으로 독일 괴팅겐대학교에서 철학과 고전 문헌학을 10년 가까이 공부했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전을 라틴어 고대 희랍어 등으로 직접 해석하고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가 드문 시대였다고 한다. 독일 유학 당시 스승인 고(故) 박홍규(1919~1994)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의 "고전 문헌학을 배워 오라"는 당부가 있었다. "한국 학생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끔 터를 닦는 것이 평생 교수하면서 할 일"이라는 특명과 함께였다.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해 후학을 양성했다. 대학교 교무부처장, 교육부 대학정책실장, 서울대 인문대학 학장, 서울대 대학원장 등의 역할을 맡아 일했다.이태수 교수는 학창 시절부터 새롭고 낯선 것에 이끌렸다고 한다. 이러한 자신의 성향이 철학과 고전 문헌학을 공부하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그의 성장기는 "인천의 항구를 바라보며 더 넓은, 미지의 어떤 세계로 가고자 하는 꿈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고 했다. 그는 고향 인천이 이러한 자신의 삶의 시작점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모든 것이 빠르게 소비되고 인공지능(AI)이 활약하는 시대다. 이태수 교수는 이러한 시대를 사는 이들을 위한 조언을 남겼다.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느냐를 항상 생각하라'는 서양 고전의 문구를 자주 인용하고는 합니다. 내가 이 일을 왜 해야 할까 자문하는 것은 인간 지성의 특권이면서 동시에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인간 지성의 특징은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이 과연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가, 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을 만드는가가 시금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어쨌든 심각한 공부입니다.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생각하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