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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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은 수백년 궁궐터 지켰건만… 사라지는 근대건축물 안타까워"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23)] 용현동 유튜버 '궁돌이 홍쌤' 홍현도입니다 용마루서 어린시절… "언덕 집 많았다"경복궁 모습에 매료… '다음 카페' 활동매달 모임… 성인 회원들앞에서 해설도문화재학과 졸업후 건축 전공 석·박사인천시립박물관서 영단주택·사택 조사"다른 지역과 차별성 있는 중요 건축물"서울역사박물관 옮겨 '정동 모형' 고증옛날 사람들 생활 알고싶어 한복 입어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유튜브 채널 '궁돌이 홍쌤'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다. 흔치 않은 건축 전공 학예사다.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경인전철을 타고 서울 종로구 일대 고궁을 답사하러 다니던 소년 홍현도는 궁궐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낸 어엿한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의 관심사는 한국 전통 건축의 정점인 궁궐에서 서민·노동자가 살던 인천의 근대 건축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인천 출신입니다'라는 주제의 기획 시리즈 스물세 번째 초대 손님으로 '용현동 궁돌이' 홍현도 학예사는 안성맞춤이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오후 인천 중구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인근 송학동3가 4번지에 있는 1950년대 근대 건축물이면서, 지난해 인천 엽서 문방구로 새롭게 문을 연 '디어프롬'에서 진행했다.홍현도 학예사는 1984년 인천 옛 남구, 지금의 미추홀구 옛시민회관사거리 인근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옹진군 자월면 자월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울 출생으로 고등학생 무렵 인천 동구 만석동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홍 학예사가 3살 때 고인이 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할머니는 연안부두에서 꽃게 도매업을 하고, 용현동 용일시장에서 꽃게를 직접 팔면서 살림을 꾸렸다. 홍현도 학예사 아버지는 아들이 3살 때 대우중공업 경남 창원 사업장에 직장을 얻었다. 가족 모두 창원에 살다가 홍 학예사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으로 돌아왔다."창원에 살던 시절 아버지는 인천이 참 좋은 동네였다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아버지는 다시 인천으로, 용현동으로 돌아와 대우자동차 세일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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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 홍현도 학예사 "전통한복, 재미 아닌 체험" 지면기사
궁궐 유튜버… 고향 역사 관심도 조선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옥빛 전통 한복에 갓까지 눌러쓰고, 소형 카메라를 든 채로 서울 경복궁 안팎을 거니는 사람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홍현도(40·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일 가능성이 크다. 소형 카메라는 '유튜버'라는 그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홍 학예사가 전통 한복을 입고 다니는 목적은 '재미'가 아닌 '체험'이다. 그는 "역사·문화를 다루는 직업상 옛 사람들이 실제로 옷을 어떻게 입고 다녔는지가 궁금했다"며 "(조상들이 한복을 입고 다녔을 당시) 불편함은 무엇이고, 편리하게 입으려면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를 직접 느끼기 위해 한복을 맞췄다"고 말했다.1984년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태어난 홍현도 학예사는 소년 시절부터 서울의 궁궐을 열심히 다녔고, 궁궐을 연구하는 게 꿈이었다. 스스로 '궁돌이'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궁궐에 대한 애착이 크다. 궁궐은 그가 학예사의 길을 걷게 한 이유다. 궁궐 등 전통 건축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인천 근대 건축물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인천시립박물관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2014년에는 인천이 공업도시로 변모하던 일제강점기 말 곳곳에 지어진 '관영주택과 사택'을 조사해 보고서를 완성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이 모여 살던 용현동에도 일제강점기부터 산업화 시대까지 많은 공장과 노동자들이 거주한 관영주택·사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때서야 깊이 알게 됐다고 한다.궁궐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그를 인천 밖으로 뻗어 나가게 했지만, 고향의 가치 있는 역사유산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그대로다. 홍 학예사는 "국내에선 옛 공업단지의 흔적이 남아 있고 현대까지 산업도시로 이어지는 지역은 인천밖에 없다"며 "인천을 떠나 있지만 앞으로 근대 건축 등 인천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선조들은 수백년 궁궐터 지켰건만… 사라지는 근대건축물 안타까워")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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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23)] ‘갓 쓰는 궁돌이 유튜버’ 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홍현도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유튜브 채널 '궁돌이 홍쌤'을 운영하는 크리에이터이기도 하다. 흔치 않은 건축 전공 학예사다. 그는 '성덕'이다. '성공한 덕후(일본어 오타쿠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신조어로, 한 분야에서 전문가 이상으로 열정과 흥미를 가진 사람을 지칭)'를 요즘 식으로 줄인 말인데,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직업으로 삼아 성과를 이뤄 나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의 표현이다.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서 경인전철을 타고 서울 종로구 일대 고궁을 답사하러 다니던 소년 홍현도는 궁궐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따낸 어엿한 전문가로 성장했다. 그의 관심사는 한국 전통 건축의 정점인 궁궐에서 서민·노동자가 살던 인천의 근대 건축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면에서 '나는 인천 출신입니다'라는 주제의 기획 시리즈 스물세 번째 초대 손님으로 '용현동 궁돌이' 홍현도 학예사는 안성맞춤이다. 이번 인터뷰는 지난달 26일 오후 인천 중구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인근 송학동3가 4번지에 있는 1950년대 근대 건축물이면서, 지난해 인천 엽서 문방구로 새롭게 문을 연 '디어프롬'에서 진행했다. 홍현도 학예사는 1984년 인천 옛 남구, 지금의 미추홀구 옛시민회관사거리 인근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당시 부모님은 용현동 수봉공원 인근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옹진군 자월면 자월도 출신이고, 어머니는 서울 출생으로 고등학생 무렵 인천 동구 만석동으로 터전을 옮겼다고 한다. 홍 학예사가 3살 때 고인이 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할머니는 연안부두에서 꽃게 도매업을 하고, 용현동 용일시장에서 꽃게를 직접 팔면서 살림을 꾸렸다. 그렇게 일군 한집안은 할머니의 용현동 큰집 주변으로 분가해 가까이 살았다. 홍현도 학예사 아버지는 아들이 3살 때 대우중공업 경남 창원 사업장에 직장을 얻었다. 가족 모두 창원에 살다가 홍 학예사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인천으로 돌아왔다. “창원에 살던 시절 아버지가 약주를 드시면 항상 할머니부터 시작해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등 가족과 친지들한테 돌아가면서 전화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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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새 역사 증인 "작은 고분 시범 발굴한 것이 천마총"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22)] 돛단배 타고 인천으로 피란왔던 박영복입니다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출생남포제련소 유명 "인천과 닮은 도시"1·4후퇴때 떠나, 전후 부평서초 입학중학시절 선생님 영향 역사학도 꿈꿔사학 전공… 서클 통해 고고학 접해대학원땐 '경주 고적발굴' 조사 참여국민적 관심… 박정희 대통령 방문역사·고고학자·문화재 행정가 일생"인천, 옛 것속 현재 그리는 것도 중요"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전자·전기제품 등이 선적됐다. 이 배는 북에서 농수산물·광물자원·바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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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 박영복 "지금의 나, 초·중때 대부분 완성" 지면기사
훌륭한 선생님·좋은 친구 만나 박영복(79·사진)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문화재 행정가다. 대학 시절 몸담은 '고고학 서클'과 경주 참성단, 황남대총, 안압지 등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문화재 행정가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등이 그가 거친 일터이자 현장이다.박 관장은 1945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1·4 후퇴 당시 피란길에 오른뒤 고향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대로 인천에 눌러앉아 인천을 고향으로 여기고 살아온 인천사람이다.전쟁이 끝나지 않은 어수선한 시기 또래보다 조금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 1958년 부평서초교와 1961년에 인천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 인천에서 보낸 성장기가 지금 내 자신의 대부분을 완성했다"며 "훌륭한 선생님과 좋은 친구들을 그때 만났다"고 말했다.그는 평생 문화재 행정가로 일을 했지만 오직 옛것만을 고집하지 않는 균형감각의 소유자다. 그는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하다"며 "문화재라는 옛것을 지키는 일을 해왔지만 현재도 중요하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하고 맞춰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시 인천에 대해서는 "인천이 항구도시 이미지를 복원하려 애쓰는 모습을 많이 본다"면서 "옛것만 이야기하면 굳은살이 생긴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면 가라앉고 만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고고학 새 역사 증인 "작은 고분 시범 발굴한 것이 천마총")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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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22)] 과거 훑어본 길에서 내 길 찾은 것…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 “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 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지식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출타하시면서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면 꼼짝없이 문간방에 앉아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였다. 박 관장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진남포에서 소련군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소련군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행진하는데 이상한 게 뭐냐 하면 손을 앞뒤로 흔들지 않고 좌우로 흔들어요. 좌우로 흔드는 겁니다. 어린아이 눈에는 그게 이상하니까 팔짓을 따라서 해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 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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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육상부 첫 金 주인공… "달릴때 가장 빛나는 나, 포기 못하죠"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21)] 운동·공부 모두 잡고 싶은 Z세대 박다윤입니다 계양구 태생… 초교 4년때 육상 시작승부욕 강해… 부모님 설득 운동 계속중1때 400m 두각… 첫 전국대회 1등인천체고 진학… 국가대표 상비군에학업 병행 노력끝에 서울대 수시 합격"스포츠 미디어 분야서 일하는 것 꿈"日 강점기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공부하는 선수' 원조… 야구단 유명한때 동양 최대 자랑한 '선인체육관'2013년 해체… 인천체고, 청라 이전'공부하는 스프린터'란 수식어가 싫지만은 않다고 했다. 이제껏 없던 유형의 운동선수, 이제껏 없던 유형의 서울대생. 방향이 전혀 달랐던 두 갈래 길을 하나로 이어 온 박다윤의 노력과 성취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가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는다.2022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51회 종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대학부 200m 경기에 서울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박다윤이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자, '깜짝 금메달'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박다윤의 실력보다는 '서울대생 최초 우승'이란 타이틀에 방점을 찍은 놀라움의 표현이었다.한 달 후 전북 익산에서 열린 제77회 전국대학육상선수권대회 2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제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400m 1위, 200m 2위를 기록하며 더는 '깜짝'이란 표현이 맞지 않음을 박다윤은 입증했다. 대학 2학년인 지난해 10월 전남 목포에서 열린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를 차지하며 이 종목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설마 대학 3학년이 돼서도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느냐란 시선에 박다윤은 "올해 목표는 우승뿐 아니라 개인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라고 의지를 다진다."저도, 부모님도 대학교에 입학하면 대학 생활에 더 집중하고 운동은 취미 정도로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서 첫 대회에 출전했는데 좋은 성적이 나오니까 저도, 부모님도 계속 운동을 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제가 가장 빛날 때는 육상을 할 때인데, 잘하는 걸 굳이 포기하기가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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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 서울대생 스프린터 "선수의 삶 더 다양하게" 지면기사
박다윤, 전국체전 육상 400m 金… 엘리트 체육 속 새 유형 주목 서울대학교 재학생으로 전국대회 육상경기에서 첫 금메달을 목에 건 육상선수 박다윤(21·사진)은 그동안 '아임 프롬 인천'에서 만난 21명 가운데 최연소이면서 유일한 20대다.'서울대생'이란 타이틀로 유명해졌으나, 그 타이틀이 육상 선수로서 박다윤의 기량을 제대로 빛나게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육상 선수 박다윤이 일반 전형으로 서울대에 입학하는 과정, 전문 지도자의 지도 없이도 선수 생활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달리는 이유에 더 주목해야 한다. 그의 선택은 결승선이 아니라 출발선이다.인천 계양구 출신 박다윤은 인천체육고등학교 재학 중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됐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 잘하는 선수로 유명했다. 엘리트 체육인 육성 시스템이 굳어진 한국에서 새로운 유형의 운동선수가 출현한 것이다.박다윤은 지난해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여자대학부 400m 1위, 200m 2위를 차지했다. 한두 해 정도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 그만둘 것이란 세간의 시선과 달리 올해에도 대회에 출전해 금메달과 개인 기록 경신을 노린다. 박다윤 특유의 승부욕이 그를 트랙 위로 부르고 있다. 박다윤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많은 어린 운동선수들이 그를 롤모델로 여기고 있다. 그렇게 '성적 지상주의'에 작은 균열을 내고 있다.박다윤은 "후배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으라고 조언하고 싶다"며 "운동선수도 다양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서울대 육상부 첫 金 주인공… "달릴때 가장 빛나는 나, 포기 못하죠")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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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21)] “올해 목표도 금메달”…공부하는 스프린터 박다윤
'공부하는 스프린터'란 수식어가 싫지만은 않다고 했다. 이제껏 없던 유형의 운동선수, 이제껏 없던 유형의 서울대생. 방향이 전혀 달랐던 두 갈래의 길을 하나로 이어 온 박다윤의 노력과 성취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수식어가 이것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2022년 4월 대구에서 열린 제51회 종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대학부 200m 경기에 서울대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 박다윤이 가장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자, '깜짝 금메달'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박다윤의 실력보단 '서울대생 최초 우승'이란 타이틀에 방점을 찍은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한 달 후 전북 익산에서 열린 제77회 전국대학육상선수권대회 200m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10월 울산에서 열린 제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도 400m 1위, 200m 2위를 기록하며 더는 '깜짝'이란 표현이 맞지 않음을 박다윤은 입증했다. 서울대 소속이든 아니든 박다윤은 항상 우승 전력감인 선수다. 대학 2학년인 지난해 10월 전남 목포에서 열린 제104회 전국체육대회 400m 1위, 200m 2위를 차지하며 이 종목 강자로 자리매김했다. 설마 대학 3학년이 돼서도 운동선수 생활을 이어가겠느냐란 시선에 박다윤은 “올해 목표는 우승뿐 아니라 개인 기록을 경신하는 것"이라고 의지를 다진다. “저도, 부모님도 대학교에 입학하면 대학 생활에 더 집중하고 운동은 취미 정도로 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교에서 첫 대회에 출전했는데 좋은 성적이 나오니까 저도, 부모님도 계속 운동을 해보자는 쪽으로 기울었어요. 제가 가장 빛날 때는 육상을 할 때인데, 잘하는 걸 굳이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웠죠." 과거의 엘리트 체육인 육성 방향이 꼭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박다윤은 전문 지도자의 지도 없이 운영해 동호회에 가까운 서울대 육상부에서 부원들과 매주 2차례 훈련하고, 수업 외 시간을 쪼개 혼자 운동한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곤 서울체육고등학교에서, 주말이나 방학엔 모교인 인천체육고등학교에서 연습하고 있다. 때때로 고교 은사와 대학 조교수·교수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전문 지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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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겨웠던 인천항 눈부시게 변화… 신산업·해양관광으로 순풍 탈것"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20)] 청운의 꿈 안고 나홀로 인천 유학 왔던 김재균입니다 당진서 공부 위해 초교 마치고 이주선인중·고 거쳐 인하대 산업공학 전공졸업후 카이스트로 옮겨 석사 과정40년간 울산대 교수로 연구·후학 양성울산항만公 사장 맡으며 인천 방문"자유공원~배다리 이어진 길 좋아해""자동차·바이오 등 성장… 전망 밝아""인천에서 보낸 시간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였습니다."김재균 울산항만공사 사장은 1956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인천으로 유학을 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1960년대 인천은 당진과 비교하면 '큰 도시'였다. 당시 당진을 포함해 충청남도 지역에서 중·고등학교 때 인천으로 유학을 가는 학생이 많았다. 이 때문에 인천은 다른 지역보다 충남 향우회 활동이 활발하다.김 사장은 중학교 1학년 때 혼자 인천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부모님은 당진에 계셨다.그는 선인중·선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인하대학교 공과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10년 안팎을 인천에서 살았다. 10대 대부분을 인천에서 산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카이스트에서 공부하고, 울산대학교에서 교수로 40년 일했다. 2021년부터는 울산항을 운영·관리하는 울산항만공사 사장을 맡고 있다.그는 "제 인생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인천에서 생활했다"며 "인천에서의 삶이 지금의 내 모습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그가 인천에서 유학했을 때는 10대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공부를 하기 위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사했다. 부모님 영향도 있었겠지만, 스스로도 원한 일이었다. 김 사장은 "어렸을 때 특별한 목표가 있지는 않았다"며 "단지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더 큰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 있었다"고 회상했다.1960년대는 도로 상태가 지금처럼 좋지 않았다. 충남에서 인천으로 이동할 때 배를 타는 게 육로를 이용하는 것보다 빠르고 편리했다. 그가 살았던 곳은 농촌이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합덕까지 2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