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
[아임 프롬 인천·(28)] “이 다음 세계가 재밌죠”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
어차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공부마저 이 시대의 것을 하기는 싫었어요. 저의 오랜 취미 중 하나가 SF 영화를 보는 겁니다. 아임프롬인천 이번 호 주인공은 서양 고전 연구가인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이태수 교수는 해방직전인 1944년 율목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낯선 것에 자극받고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끌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전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을 때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 사람도 모르는 그대 그리스어를 마치 골목길을 헤매듯 한 글자 한 글자 단어의 원형을 찾아가며 익혔다. 동네 언덕에 올라 인천항을 드나드는 거대한 외항선을 바라보며 마도로스를 꿈꾼 시기도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율목동은 흐릿했다. 하지만 철학자 이태수를 설명하는데 율목동이 어쩌면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좀 머리가 커지고 난 뒤에 생가를 찾아갔어요.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생가도 거리도 모조리 바뀌어서 도저히 그 지역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집 근처에 일본 사람들 공동묘지가 있었고요. 나중에 어린이 놀이터가 생기기도 했고 그런데 다 없어졌죠. 아쉬워요. 없어지는 건 다 아까워요." 이태수 교수가 태어난 율목동은 옛 부촌(富村)이다. 지금도 한옥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우리말로 밤나무골 혹은 밤나무굴로 불린 마을이다. 의사이면서 향토사학자 신태범(1912~2001)의 '인천한세기'는 율목동에 대해 “야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언덕이 바로 현재 율목동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천을 개척한 선대는 서슴지 않고 이곳을 밤나무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관가에서는 유식하게 한자로 율목리라고 했음직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향 율목동의 골목 풍경은 이태수 교수의 기억 속 아스라이 남아있다. 그럴싸한 장난감이나 놀이터가 따로 없던 시절, 골목에 생긴 조그만 자투리 공간, 무너진 집터는 꼬마들의 더없이
-
[아임 프롬 인천·(27)] '신도시' 만수동서 나고 자란 기본소득당 서태성입니다 지면기사
지극히 인간적인 세상 꿈꾸는 '인공지능'… "지역에서 기반 만들기 집중" 만수3지구서 유년, 신설 남동초 입학"자주 찾던 상점들 대부분 그대로"힘든 일도 부딪쳐보는 성격 모친 닮아대학때 노래패 가입… 사회운동 관심제대후 KOICA 소속 미얀마 교육봉사"국적따라 삶 달라져…" 평등 고민용혜인 의원과 기본소득당 창당 주도한결 같은 성격 "동료들 AI라 불러""2년뒤 지선, 기초단체장 출마 고려" "기본소득 누가 지킬 수 있습니까… 기본소득 실현을 위해 살아온 제가 경기도 기본소득을 지키겠습니다."서태성(39) 기본소득당 경기도당 상임위원장은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후보 기호 4번으로 나섰다. 득표율 0.16%인 9천314표를 얻었다. 경기도지사에 출마한 6명 후보 중 6위로 선거를 마쳤다. 그는 낙선 이후에도 '기본소득 구현'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기본소득당 창당 멤버이기도 한 서 위원장은 기본소득이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며 정치 활동을 지속한다. 지난 2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서 위원장을 만났다.서 위원장은 인천에서 태어나 유년·학창시절을 보냈다. 그가 살았던 인천 남동구 만수6동은 '만수3지구'로 불린다. 버스 정류장 이름도 만수3지구로 돼 있고, 각종 상점의 지점 명칭은 '만수3지구점'으로 표기돼 있다.남동구청, 남동구보건소 등 주요 행정기관이 있고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이 동네는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바글바글한 신도시였다. 7천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은 서 위원장이 거주했을 당시 지은 지 얼마 안 된 '새 아파트'가 많았다. 서 위원장이 다닌 남동초등학교와 남동중학교 역시 1992년 설립된 '신설 학교'였다. 그는 이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입학했다. 현재 만수3지구 아파트들은 노후화돼 재건축을 바라보고 있다.인천에는 1990년 전후 지어진 아파트가 많다. 정부는 일정 규모 이상의 노후 아파트 단지들을 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노후계획도시 정비
-
[아임 프롬 인천] 서태성 기본소득당 상임위원장 "고향이자 더 알고싶은 곳… 정치인으로 성장에 도움" 지면기사
인천 '만수3지구' 출신 청년 정치인, 서태성(39) 기본소득당 경기도당 상임위원장을 아임 프롬 인천 스물일곱번째 초대 손님으로 만났다. 서태성 위원장은 1990년대 인천의 신도시로 아파트 단지 7천세대가 밀집한 만수3지구(만수6동)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주안동에서 혼자 떡집을 15년간 운영했다. 서 위원장은 '난관에 부딪혀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책을 찾는 기질을 어머니에게 물려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기본소득당 창당 멤버로 초창기 '온라인 당원 모집'을 주도했다. 국내 첫 온라인 기반 정당이 서태성 위원장 그리고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힘으로 태동했다. 올해는 서 위원장이 대학에 입학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인천에서 산 기간만큼 경기도에서 터를 잡고 생활했다. 기본소득당 소속으로 경기도지사 선거에 출마해 완주했다. 지금도 '기본소득 확대'라는 가치를 정치 활동을 통해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 위원장은 "기본소득을 포함하는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정치인이자 행정가가 되고자 한다"고 말했다.서태성 위원장에게 인천은 '더 알아가고 싶은 도시'다.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거주하는 곳 중심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인천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많이 경험하지 못했다. 또 인천을 떠나 정치인이 된 뒤로는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때문에 "인천을 많이 알지 못한다"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애착과 관심이 큰 도시가 고향 인천이다. 서 위원장은 "인천을 알아가는 것이 제가 앞으로 정치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27)] '신도시' 만수동서 나고 자란 기본소득당 서태성입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
"하와이 동포·전국 공무원 뜻 모아… 공업입국 사명, 무지막지 공부"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26)] '검단 토박이' 인하대 1회 졸업생 남종우입니다 옛 경기 검단면 '의령 남씨 집성촌' 출생한국전쟁 겪으며 인천중·인천고 졸업국민방위군 자원… 2013년에야 유공자로이승만 "한국에 美 MIT 같은 학교 필요"한인기독학원 매각·1호 이민자 후손 기금공무원까지 봉급 5% 갹출해 인하대 설립"우리도 제트기 만들자 축사 가슴에 새겨"조중훈, 부총장 맡기고 의대 신설 부탁"전국 찾아다니며 공부선수 스카우트"한국 화학공학 기초 다지고 학회 강화도"기업도 회장 가능 정관 바꿔 재정 확보"올해로 개교 70주년을 맞은 인하대학교 이야기를 '아임 프롬 인천'에서 지나칠 수 없다. 어떤 인물이 70년 인하대를 상징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학교 측 인사가 "1회 졸업생이 있는데, 여전히 정정하시다"고 귀띔했다. 게다가 인하대 교수로 재직하며 부총장까지 역임하고 정년퇴직했다니, 인터뷰 상대로 더할 나위 없었다.1933년생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은 "인물보다 학교를 조명해 달라"는 조건으로 조심스럽게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지난 2일 오후 인하대 교정에서 만나 학교 이곳저곳을 설명한 남종우 전 부총장은 망백의 나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꼿꼿하고 또렷했다. 보청기도 끼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 자택에서 인하대까지 홀로 오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두어 달에 한 번은 지인들을 만나러 인천에 온다"고 했다.남 전 부총장은 옛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원당리 의령 남씨 집성촌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고향은 1995년 3월 인천시 서구로 편입됐다. 13대조 할아버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인천 사람보단 검단 사람으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하다. 서구 원당동에 있는 의령 남씨 종중 묘역은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김포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농촌이던 남 전 부총장의 고향 동네는 종중 묘역만 남고 전부 '검단신도시'가 조성됐다.그는 일제강점기 김포초등학교에 입학해 해방 후 수석으로 졸업했다. 초등학교는 2개 반이었다. 남 전 부총장은 수학을
-
[아임 프롬 인천] 남종우 前 인하대 부총장 "개교때 목표처럼 세계 최고대학 되길" 지면기사
1회 졸업생 남 전 부총장 조언 남겨 남종우(91·사진) 인하대학교 전 부총장은 지금껏 만난 26명의 '아임 프롬 인천' 주인공 중 최고령이다. 인하대 화학공학과 54학번인 남 전 부총장은 인하대 70년 역사에서 '전설의 1회 졸업생'이다. 다시 말해 개교 70주년을 맞은 인하대 출신 중 남 전 부총장보다 더 앞선 인물은 없다는 뜻이다. 그 존재 자체로 하나의 도서관이자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남 전 부총장은 전쟁이 끝날 줄 모르던 1953년 6월 초 '한국의 MIT(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를 만들겠다'는 대통령 특별 담화에 이끌려 인하대 진학을 택했다고 한다. 1902년 인천에서 하와이로 떠난 동포들이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사탕수수 농장에서 새 삶을 개척했듯, 전쟁의 폐허 속에서 국가 산업을 재건할 공학도의 삶을 열어가고 싶었다고 한다. 1999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모교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행정 총괄자로서 학교 발전의 기틀을 다졌으니 그 꿈은 어느 정도 이룬 듯하다.남 전 부총장의 고향은 옛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원당리로, 현재 행정구역은 인천시 서구 원당동이다. 남 전 부총장은 김포초등학교, 인천중학교, 인천고등학교, 인하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도쿄공업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하의과대학 설립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1984년 의과대학 설립을 총괄하기도 했다.학교를 향한 평생의 애정이 쓴소리도 만든다. 남 전 부총장은 "국·공립이 아닌 사학의 경우에는 재단의 적극적 후원 없이는, 또한 시대 조류에 걸맞은 대학 총장의 혁신적 학교 운영 체제 확립 없이는, 유능한 인력 영입 방안 없이는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며 "인하대가 개교 당시 목표처럼 인천을 넘고 한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대학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하와이 동포·전국 공무원 뜻 모아… 공업입국 사명, 무지막지 공부")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
[아임 프롬 인천·(26)] 개교 70주년 인하대 ‘1회 졸업생’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
올해로 개교 70주년을 맞은 인하대학교 이야기를 '아임 프롬 인천'에서 지나칠 수 없다. 어떤 인물이 70년 인하대를 상징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학교 측 인사가 “1회 졸업생이 있는데, 여전히 정정하시다"고 귀띔했다. 게다가 인하대 교수로 재직하며 부총장까지 역임하고 정년퇴직했다니, 인터뷰 상대로 더할 나위 없었다. 1933년생 남종우 전 인하대 부총장은 “인물보다 학교를 조명해 달라"는 조건으로 조심스럽게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지난 2일 오후 인하대 교정에서 만나 학교 이곳저곳을 설명한 남종우 전 부총장은 망백의 나이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꼿꼿하고 또렸했다. 보청기도 끼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 자택에서 인하대까지 홀로 오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두어 달에 한 번은 지인들을 만나러 인천에 온다"고 했다. 남 전 부총장은 옛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원당리 의령 남씨 집성촌에서 나고 자랐다. 그의 고향은 1995년 3월 인천시 서구로 편입됐다. 13대조 할아버지부터 터전을 잡고 살았다고 하는데, 인천 사람보단 검단 사람으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하다. 서구 원당동에 있는 의령 남씨 종중 묘역은 인천시 기념물로 지정된 문화재이기도 하다. 김포평야가 드넓게 펼쳐진 농촌이던 남 전 부총장의 고향 동네는 종중 묘역만 남고 전부 '검단신도시'가 조성됐다.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남 전 부총장은 주민등록상 1934년생이다.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골에선 어린 아이가 마마(천연두)나 홍역 같은 질병에 걸리면 일찍 죽어요. 그래서 아버지가 형제들 모두 1년씩 늦게 출생 신고를 했습니다. 멀리 있는 면소(면사무소)에 가서 출생 신고를 해놓고 1년도 안 돼 죽으면 또 가서 신고해야 해서 번거로우니까. 내 고향은 아주 시골이었는데, 지금은 인천이 돼 버리고, 조상님 산소들만 남고 전부 아파트 단지가 돼 버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네요." 그는 일제강점기 김포초등학교에 입학해 해방 후 수석으로 졸업했다. 초등학교는 2개 반이었다. 남 전 부총장은 수학을 참 좋아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6
-
[아임 프롬 인천·(25)] 배다리 헌책방 골목서 미래를 꿈꾼 이인석입니다 지면기사
40년전 학생 알아본 책방주인… "도시가 날 기억할때, 도시와의 사랑이 시작"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무감독 시험' 전통 제물포고 출신"양심훈련 3년, 소중하고 대단한 경험"대학졸업후 코트라 입사… 해외 파견"오일쇼크 독일, 그때부터 에너지 전환"1980년 서울 올림픽 유치현장 지원도현지서 김대중 만남… 통일 의견 구해대통령 당선뒤, 2년여간 청와대 근무'인천재발견' '도시재생' '산업재건' 인천발전연구원장 부임, 정책방향 제시"과거가 곧 미래… 현재서 출발해야"김대중 대통령 국민의 정부 시절 헌신한 이인석(81) 전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을 '아임프롬인천' 지면에 초대하기까지 작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인석 전 비서관은 1943년 황해도 연백 출신인데, '너무나 끔찍한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기억이 절반은 될 것"이라며 기억의 오류를 염려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남겨줄 만한 것도 아닌, 숱하게 흔하디흔한 이야기…"라는 걱정도 내비쳤다.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는 비교적 또렷한 기억으로 자신의 삶을 들려줬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던 시절 넓은 세상에 나가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체득한 경험은 지금 다시 들어도 충분히 흥미진진했다.이인석 전 비서관은 제물포고 재학 시절 '무감독 시험' 이야기부터 들려주겠다고 했다. 무감독 시험은 지금껏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더없이 엄격한 내 인생의 감독 역할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무감독 시험은 제물포고를 '양심'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무감독 시험은 제물포고 초대 교장을 지낸 길영희 선생 제안으로 시작됐다. 때는 1956년 봄. 길영희 교장은 교직원 회의에서 무감독 시험을 제안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파격 제안에 교사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길 교장은 끝내 뜻을 관철시켰다.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라는 선서를 하고 시험을 치르는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무감독 시험에 대한 제물포고
-
이인석 前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 "인천은 스스로 잊지 말고 과거와 현재 기반, 꿈 펼쳐야" [아임 프롬 인천] 지면기사
이인석(81·사진) 전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은 황해도 연백 출신인 인천 사람이다. 이 전 비서관은 한국전쟁 발발 후 어머님과 함께 내려와 인천에 정착해 성장한 피란민이다. 창영초·인천중·제물포고·서울대 독어독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69년 대한무역진흥공사(코트라)에 입사해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가 일어난 직후인 1997년까지 30년 가까이 몸담았다.그는 인천에서 성장하면서 바다 건너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를 꿈꿨다. 국가 간 여행이 흔치 않던 시기였다. 그는 '외국을 경험할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아 대학에 진학했고 취업 기관을 선택했다. 독문학을 전공한 것도 코트라를 택한 것도 그런 기준이 반영된 결과다.프랑크푸르트·서베를린·취리히·함부르크·동베를린 등의 도시에서 일했다. 1970년대 오일쇼크, 바덴바덴에서의 서울올림픽 개최지 결정, 독일의 통일, 냉전체제의 종식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현지에서 지켜봤다.독일 근무 중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맺은 인연을 계기로 국민의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로 자리를 옮겨 건설교통비서관으로 일했다. 이후 인천의 '싱크탱크'인 인천발전연구원(현 인천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해 인천을 위해 애썼다. 퇴임 후에는 인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인천대 석좌교수 등으로 일하며 인천이 나아가야 할 길을 고민했다. 그가 원장 재임 시절 내세운 '인천 재발견' '도시재생' '산업 재건' 등 방향성은 2000년대 이후 인천시 정책의 줄기가 됐다.이인석 전 비서관은 앞으로의 꿈도 중요하지만 과거와 현재를 기반으로 꿈을 펼쳐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인천에서 근무하면서 늘 아쉽게 느낀 것이 있다. 전 세계는 인천을 손금처럼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인천은 스스로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아 늘 아쉽다"면서 "과거를 잊고 꿈에서 계획을 출발시킨다. 너무 오랜 기간 내용은 없고 꿈만 좇는 구호에 인천 시민이 중독되어 왔다. 정치인들이 각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25)] 배다리 헌책방 골목서 미래를 꿈꾼 이인석입니다) /김성호기
-
[아임 프롬 인천·(24)] 씨름판 새 모래바람 일으킨 김다영입니다 지면기사
늦었지만 포기하긴 너무 젊었다… '황소' 잡은 힘센여자 연성중 1학년때 코치 권유로 유도 시작인천체고 입학후 두각… '제주컵' 정상"희망 크게 안보여" 졸업후 운동 그만둬사촌오빠 '금강황제' 임태혁 "한번 해봐"진로 고민하던중 씨름으로 종목 전환2021년 추석 무궁화 장사 '황소 트로피'지난해 다시 정상… "천하장사가 목표"라이벌 이다현 선수와 '쌍다대전' 유명"롤모델은 임수정, 제겐 영웅 같은 분"여자씨름 활성화 소망 "유소년부 없어"아직 20대 나이 "인천은 친구가 있는 곳"지난해 7월26일 충북 제천체육관에서 열린 '2023 위더스배 제천의병장사 씨름대회' 여자부 무궁화급(80㎏ 이하) 장사결정전은 '쌍다대전'으로 치러졌다. 괴산군청 소속 김다영은 '우승 후보'인 거제시청 이다현과 대결을 펼쳤다. 김다영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다현을 되치기로 제압하고 황소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21년 추석장사 씨름대회 무궁화급에서 꽃가마에 오른 뒤 두 번째 장사 타이틀이었다. 남들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씨름에 입문한 김다영은 각고의 노력 끝에 전성기를 맞았다. 아임프롬인천 스물네 번째 초대 손님 김다영을 지난 2일 괴산군청 인근 체력단련장에서 만났다.여자 씨름선수 김다영은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렸을 때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가 운동선수를 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소녀였다. 인천연성중학교 1학년 때 엄마를 따라 찾아간 체육관에서 유도를 처음 배웠다. 운동선수로서 김다영의 재능을 알아본 연성중 유도코치의 권유로 학교 유도부에 입부했다. 김다영은 "코치님이 먹을 것(빠삐코)을 주면서 권유해서 넘어갔다"며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선수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김다영이 입부하자마자 유도부 1년 일정 중 가장 소화하기 힘든 여름 전지훈련이 시작됐다. 동기들이 "왜 지금 유도를 시작했느냐"고 말할 정도로 1주일간의 전지훈련은 고됐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유도선수 김다영의 진로가 시작됐다. 성과가 바로 나오지는
-
[아임 프롬 인천] 유도선수에서 '모래판 스타'로 "무한도전" 지면기사
'무궁화 정상급' 괴산군청 김다영 대한씨름협회 소속 여자 씨름단 6곳에 48명의 선수가 등록돼 있다. 2011년 9월 구례군청반달곰씨름단을 시작으로 거제시청(2017년), 안산시청(2018년), 화성시청(2018년)에 이어 영동군청과 괴산군청이 2021년 1월부터 여자씨름단을 운영한다. 괴산군청 소속 김다영(24·사진) 선수는 늦깎이 씨름선수로 2019년 화성시청씨름단에 입단하면서 데뷔했다. 본래 유도 국가대표를 꿈꾸던 그는 성인이 된 후 씨름으로 전향했고, 무궁화급에서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아임프롬인천 스물네 번째 손님 김다영은 인천 출생이다. 인천연성중 1학년 때 유도를 시작했고, 인천체고 유도부에서 활동했다. 씨름 선수가 된 그의 목표는 전 체급 통합 장사인 '천하장사'가 되는 것이다. 유도 국가대표의 꿈을 씨름에서 천하장사로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김다영의 또 다른 바람은 '여자 씨름 활성화'다. 여자 씨름은 중고교 운동부가 없어 선수층이 얇다. 명절 때마다 TV 중계가 이뤄지는 남자 씨름과 비교하면 여자 씨름에 대한 관심은 낮다. 김다영은 "그래도 대회 때는 50명 정도 관람객이 오는 편인데, 앞으로는 더 많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김다영은 괴산에 살고 있다. 고향 친구를 만나러 종종 인천을 찾는다. 인천으로 향하는 길은 항상 즐겁다. 모래판에서는 어떤 선수에게도 쉬이 밀리지 않는 장사이지만, 친구들은 만나면 서로 진로 고민을 나누는 평범한 20대 청년이기도 하다. 인천체고에서 만난 친구들 중 현재까지 선수로 활동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고 한다.김다영의 바람은 현재 내딛고 있는 모래판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또 그 모래판을 더욱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서른이 되기 전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지도자로서 제자를 육성하는 미래도 꿈꾸고 있다. → 관련기사 (늦었지만 포기하긴 너무 젊었다… '황소' 잡은 힘센여자) /정운기자 jw33@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