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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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부대서 키운 맷집이 챔피언 밑거름 됐다"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 부평이 만든 세계적 복서 홍수환 '체력은 국력'이란 말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인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사장돼 버린, 국가주의와 산업화를 상징하는 말이라 비판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배고팠던 그 시절을 산 세대에겐 뼈저리도록 온몸으로 느꼈던 말이었다.한국이 블랙핑크, 손흥민, 소설가 한강처럼 국제 무대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거의 없던 시절인 1974년 7월3일. 스물넷 청년 복서 홍수환(사진)은 한국에서 지구 반 바퀴쯤을 돌아야 다다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고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를 외치며 국민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 순간 만큼은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체력이 곧 국력이라는 말에 공감했다.챔피언 홍수환이 복싱을 막 시작한 10대 후반부터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1974년까지 인천 부평에 살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서울내기 홍수환은 아버지를 여읜 후 어머니·형제들과 함께 부평으로 흘러와 미군기지 '애스컴' 앞 기지촌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애스컴 내 카투사 전용 스낵바를 맡아 운영했다. 어머니는 막 복서 경력을 시작한 넷째 아들 홍수환이 미군 병사들과 함께 훈련할 수 있도록 주선하기도 했다.홍수환은 애스컴에서 개최된 범태평양 미군 복싱 시합에 출전하기도 했다. '미제'(미국산) 복싱 장비도 후원받았다. 홍수환이 국제 무대에서 낯선 외국인 선수와 맞붙어도 꿀리지 않은 건 부평 미군부대에서의 경험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한국 최초로 적지(敵地)에서 세계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강심장을 갖게 된 배경이다. 부평 신촌 사람들도 홍수환을 응원하고 도왔다.한때의 좌절을 딛고 일어난 홍수환은 1977년 '4전 5기'의 신화를 쓰며 두 번째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남녀노소에게 인기가 많은 일본 게임 '포켓몬스터'(한국판)에 그의 이름을 딴 캐릭터 '홍수몬'이 있을 정도로 한국을 대표하는 복서가 됐다. 홍수환은 길지 않은 시간을 보낸 부평이 자신을 챔피언으로 성장시킨 동네라며 감사를 표했다."우리 어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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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8)] 부평이 키운 오뚝이 챔피언 복서 홍수환입니다 지면기사
"잽만 맞다 지는 비참한 패배, 노력하는 사람은 그렇게는 안 져요" 초3때 이웃 '바람개비' 김준호에 배움부친 사망후 가족들 '제2 고향' 부평 정착미군기지 일한 모친 덕에 미군과 스파링"군인복싱 대회 출전, 병사들 혀 내둘러"1974년 첫 왕좌 "엄마야 나 챔피언 먹었어""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전 국민에 희망타이틀 방어 실패후 1977년 '4전5기 신화'2번 챔피언후 은퇴… 명강사로도 활약"인생 성공·실패 있지만 한번이 끝 아냐"사각의 링 위에서 청코너와 홍코너 누구 하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펼치는 복싱을 인생에 빗대던 시절이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1976년 복싱 영화 '록키'(Rocky)가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것처럼 그때는 현실 무대에서도 명승부를 만들어 내는 복서에게 열광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4전 5기'의 세계 챔피언 홍수환이 바로 한국의 '록키'였다.1977년 11월27일 중남미 파나마의 뉴파나마체육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한국의 홍수환과 파나마의 헥토르 카라스키야가 맞붙었다.2회전 공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수환이 크로스 카운터로 날린 라이트훅이 빗나갔고, 카라스키야의 라이트 어퍼컷과 레프트훅이 홍수환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대로 다운된 홍수환은 잠깐 암전됐다가 카라스키야를 향한 파나마 관중들의 환호와 함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나선 3회전. 홍수환이 악착같이 휘두른 레프트훅이 카라스키야의 관자놀이에 명중한 순간, 그의 풀린 동공을 보고 기회를 찾은 홍수환의 연타가 50초 만에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렸다. 자신의 두 번째 챔피언 벨트를 매게 된 순간이다.지난달 28일 오후 인천 부평구 부평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홍수환은 세계 복싱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 '4전 5기'의 신화를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이야기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부평은 나를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동네야. 그래서 나는 부평을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해요."홍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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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8)] ‘4전 5기 신화’ 홍수환, 부평은 챔피언 메이커
사각의 링 위에서 청코너와 홍코너 누구 하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펼치는 복싱을 인생에 빗대던 시절이 있었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1976년 복싱 영화 '록키'(Rocky)가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것처럼 그때는 현실 무대에서도 명승부를 만들어 내는 복서에게 열광했다. 설명이 필요 없는 '4전 5기'의 세계 챔피언 홍수환이 바로 한국의 '록키'였다. 1977년 11월27일 중남미 파나마의 뉴파나마체육관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주니어페더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한국의 홍수환과 파나마의 헥토르 카라스키야가 맞붙었다. 1974년 따낸 WBA 밴텀급 챔피언 타이틀을 이듬해 빼앗기고 하향세를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던 홍수환이었고, 당시 11전 11승 11KO로 승승장구하던 카라스키야였다. 더군다나 카라스키야의 고국에서 열린 경기로, 홍수환에겐 마땅한 응원군조차 없는 완전한 적지(敵地)였다. 2회전 공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수환이 크로스 카운터로 날린 라이트훅이 빗나갔고, 카라스키야의 라이트 어퍼컷과 레프트훅이 홍수환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대로 다운된 홍수환은 잠깐 암전됐다가 카라스키야를 향한 파나마 관중들의 환호와 함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다시 일어나 심판의 카운트를 물리치고 양손 글러브를 맞부딪치며 자세를 가다듬었지만, 더 강한 카라스키야의 레프트 어퍼컷과 훅으로 다시 다운됐다. 곧바로 일어섰으나, 또다시 링 위에 처박힌 홍수환. 승리를 예감한 파나마 관중들은 만세를 불렀다. 네 번째 다운은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는 모습이었다. 겨우 2회전을 버텼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로 나선 3회전. 홍수환이 악착같이 휘두른 레프트훅이 카라스키야의 관자놀이에 명중한 순간, 그의 풀린 동공을 보고 기회를 찾은 홍수환의 연타가 50초 만에 상대를 완전히 쓰러뜨렸다. 자신의 두 번째 챔피언 벨트를 매게 된 순간이다. 지난달 28일 오후 인천 부평구 부평역사박물관에서 만난 홍수환은 세계 복싱 역사상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인 '4전 5기'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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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7)] 1994년, 육상 100m 11초49… 후배들은 아직도 그녀 뒤를 쫓아 달린다 지면기사
결승선끝 어머니 보고 달렸던 허약이 이영숙입니다 신흥동서 태어나 자라… 부친은 관세사신흥초 3학년때 담임 권유로 육상 입문어린시절 병약, 선수의 삶 생각도 못해모친, 든든한 지원자로 늘 경기장 함께양장점서 운동복, 스파이크화도 구해줘소년체전 3관왕… 인일여고때 국가대표이화여대 1학년때 100m 첫 한국신기록, 1994년까지 총 7회 작성 "10년 걸려 0.43초 줄여"… 16년간 대표, 감독으로도 오랜 활동 내년 정년 "결승점 온 듯"… "엄마의 품 같은 인천, 항상 고마워"1980년 6월 강원도 춘천에서 열린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 인천여중 3학년이던 이영숙은 100m, 200m, 400m 계주 종목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거머쥐며 3관왕에 오른다. 한국 여자 육상 단거리를 이끈 간판스타 이영숙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만든 대회로 기억된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4년 제13회 종별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11초92로 개인 첫 한국신기록을 세운다. 이후 10년 동안 모두 7차례 자신이 세운 기록을 갈아치운다. 1994년 그가 세운 마지막 한국신기록 11초49는 아직도 유효하다. 무려 30년,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뀔 시간임에도 깨지지 않고 있는 벽이다.이영숙 안산시청 육상부 감독을 최근 안산와스타디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사람의 일생을 100m 경기에 비교하자면, 이제 막바지 결승점에 이른 것 같다"면서 "이제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내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내년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있다.이영숙은 1965년 인천 중구 신흥동(新興洞)에서 태어나 자랐다. 충남 당진 출신 부친 이광구(1923~2012)씨와 같은 당진 출신 모친 김희란(1930~2015)씨 사이의 8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자랐다. 이영숙의 부친은 인천세관에서 오랫동안 몸담았고 이후에는 관세사로 일하며 신포동으로 출퇴근했다. 남들과 비교하면 유달리 유복하지 않았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지도 않았던 평범한 가정이었던 것으로 이영숙은 기억했다. 이영숙이 태어나 자란 신흥동은 인천항 내항이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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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이 전부인 삶 살았다… 구체적 목표와 꾸준함 가져야"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 '단거리 육상 레전드' 이영숙 감독 "100m 출발선에 서서 결승점을 바라볼 때 평소보다 거리가 짧게 느껴지는 때가 있어요."인천 출신 이영숙(59·사진) 안산시청 직장운동경기부 육상부 감독은 한국육상 여자100m 종목 한국신기록 보유자다. 1994년 이영숙이 세운 기록 11초49는 30년 동안 깨지지 않고 있다.그는 인천 신흥동에서 태어나 신흥초·인천여중·인일여고·이화여대 등에서 공부했다. 모교 인일여고에는 유난히 여성 스프린터가 많았다. 3년 선배 모명희, 1년 선배 박미선 등이 같은 종목에서 한국기록을 세우며 이름을 날렸다.그는 1980년 주니어 국가대표로 발탁됐고, 고교시절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1981년부터 1997년까지 16년 동안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뉴델리 아시안게임, LA올림픽, 서울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 베이징 아시안게임 등 주요 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출발선에 엎드려 결승선을 바라보고 달릴 때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며 "선수 생활 내내 육상 트랙이 전부인 삶을 살았다"고 했다.1997년 국가대표를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국가대표 육상 트레이너, 이화여대 감독 등으로 일했다. 현재는 지도자 생활 은퇴를 앞두고 있다.한국 단거리 여자 육상 '레전드'인 그도 젊은 선수들을 지도할 때는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지도자의 길이 선수 생활보다 열 배는 더 힘들다고 그는 말한다.30년 동안 깨지지 않는 자신의 기록을 보고 있으면 그의 마음도 편하지 않다. 그는 후배들이 이 기록을 깨뜨리길 바라며 조언을 남겼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또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꾸준함도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없습니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야 그 목표까지 갈 수 있습니다." → 관련기사 ([아임 프롬 인천·(37)] 1994년, 육상 100m 11초49… 후배들은 아직도 그녀 뒤를 쫓아 달린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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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프롬 인천·(36)] 난쏘공 읽으며 소설의 힘 눈뜬 최정화입니다 지면기사
"서울서 내가 버린 쓰레기, 조카 사는 고향의 매립지로… 미래 세대에 책임 지우는 느낌" 인성여고 입학후부터 책·글쓰기 관심3학년때 도서관서 조세희 작품 읽고세상 보는 시각 바뀌며 작가를 희망국문과 진학해 학회·동아리에 열정"치열한 토론 작품 활동의 밑거름 돼"2012년 '팜비치'로 창비신인상 등단"드러낼 수 없는 이들을 조명하는 것"사회적 약자 입장서 문학 세계 펼쳐기후위기 행진 등 현실 참여도 활발"쓰레기 떠다닌 옛 월미도 바다 기억더 리얼한 서해에 대한 작품 쓰고파" 소설가, 기후칼럼 기고자, 제로웨이스트 실천가, 여성주의자, 요가 수련자, 고양이 집사….소설가 최정화(45)를 정의하는 단어들이다. 그는 등단(팜비치·2012) 이후 10여년간 노동자(없는 사람·2016), 여성(나는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2021), 제로웨이스트(비닐봉지는 안 주셔도 돼요·2022), 기후위기(날씨통제사·2022, 봇로스 리포트·2023) 등 다양한 주제로 소설과 에세이를 썼다.최정화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가 어떤 도시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해진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소설가의 꿈을 심어 준 것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그에게 여전히 인천은 자신의 학창시절이 살아있는 애정 어린 공간이자, 영감을 주는 도시로 남아 있다.■ 소설의 힘을 깨닫게 한 책 한 권, '난쏘공' 1997년 인천 중구 인성여고 도서관에서 당시 고3이었던 최정화의 꿈이 시작됐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첫 페이지를 연 그는 소설에 푹 빠졌다. 날카로운 시각에서 사회를 풍자한 이 소설을 계기로 최정화는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회적 모순과 사각지대를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소설이 가진 힘을 느꼈다."어린 저는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봤었는데 막상 소설을 펼쳐보니 그렇지 않은 세상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어요.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한번 세상을 보는 게 어떨까' 하는 도전을 심어줬습니다."난쏘공의 중후반 주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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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투영된 '환경 위기' 언젠가 쓰고파"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 '난쏘공'이 이끈 소설가 최정화 소설가 최정화(45·사진)는 환경, 여성, 노동 등 다양한 주제로 작품을 쓰는 이야기꾼이다.인천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소설가의 꿈을 심어준 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었다. 인성여고 이과 3학년이었던 최정화는 이 책을 읽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난쏘공'의 주요 무대인 기계도시 '은강'이 인천 동구 만석동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의미가 남다르다.최정화는 대학 시절 동아리, 학회 활동을 하면서 선·후배들과 치열하게 토론했다. 집회에 참여해 농민과 노동자들을 만났다. 대학 시절 만난 여러 사람들의 생각과 사상을 학습했다.대학 졸업 후 최정화가 2012년 단편소설 '팜비치'로 제15회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기까지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낮에는 노무법인 사무보조, 편의점 아르바이트, 백화점 캐셔, 논술 강사, 환경잡지사 사무보조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가 원고지 7매 분량의 글을 썼다. 최정화는 "이 기간에 만난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작품을 썼고, 지난 10년은 꼭 필요했던 훈련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최정화는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소설가의 책무라고 말한다. 그는 소설과 신문 칼럼으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다.쓰레기를 줄이고 물건을 재사용하는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직접 실천하고 있는 그에게 인천의 쓰레기 매립지는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자신이 서울에서 버리는 쓰레기가 고향이자 스무 살 조카가 살고 있는 인천으로 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후위기 문제를 외면하면 미래 세대가 고스란히 그 책임을 져야 하는데 개인의 이기심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이런 그가 인천을 배경으로 어떤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을까. "쓰레기가 떠다니고 냄새나는 지저분한 바다가 익숙한 인천 사람의 시각에서 자연이 이미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쓰고 싶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익숙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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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아임 프롬 인천·(36)] “인천소설 ‘난쏘공’ 읽고 소설가 되기로 결심” 소설가 최정화
소설가, 기후칼럼 기고자, 제로웨이스트 실천가, 여성주의자, 요가 수련자, 고양이 집사…. 소설가 최정화(45)를 정의하는 단어들이다. 그는 등단(팜비치·2012) 이후 10여년간 노동자(없는 사람·2016), 여성(나는 트렁크 팬티를 입는다·2021), 제로웨이스트(비닐봉지는 안 주셔도 돼요·2022), 기후위기(날씨통제사·2022, 봇로스 리포트·2023) 등 다양한 주제로 소설과 에세이를 썼다. 최정화의 작품을 들여다 보면 그가 어떤 도시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해진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소설가의 꿈을 심어 준 것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통해 사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그에게 여전히 인천은 자신의 학창시절이 살아있는 애정 어린 공간이자, 영감을 주는 도시로 남아 있다. ■소설의 힘을 깨닫게 한 책 한 권, '난쏘공' 1997년 인천 중구 인성여고 도서관에서 당시 고3이었던 최정화의 꿈이 시작됐다.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첫 페이지를 연 그는 소설에 푹 빠졌다. 날카로운 시각에서 사회를 풍자한 이 소설을 계기로 최정화는 자신이 보지 못했던 사회적 모순과 사각지대를 향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 소설이 가진 힘을 느꼈다. “보통은 중학교 때 사춘기가 오잖아요. 저는 작가 데뷔도 그렇고 뭐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늦은 편인데, 고3 때 사춘기가 찾아왔어요. 모범생이었던 제가 학교 수업에도 심드렁해지면서 세상에 대한 이런 저런 철학적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저는 세상을 긍정적으로만 봤었는데 막상 소설을 펼쳐보니 그렇지 않은 세상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어요. 난쏘공은 학생으로서는 상상하고 접하기 어려웠던 노동자와 사용자의 계급적 관점에서 인물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한번 세상을 보는 게 어떨까' 하는 도전을 심어줬습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최정화가 '난쏘공'을 읽고 작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의미가 남다르다. 난쏘공은 대표적 '인천소설'이기 때문이다. 난쏘공의 중후반 주요 무대인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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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아임 프롬 인천·(35)] 재즈처럼 어울림이 좋았던 아이 김유진입니다 지면기사
"힘든 시절 딛고 일어난 나의 고향… 'Blue Skies' 같은 희망의 도시" 계산동 출생… 어릴때부터 사교성 좋아아토피 앓아 공기 맑은 검단으로 이사"너른 논 지나 등교" 현재 건물들 가득서구영어마을 다니며 영어·음악 친숙노라 존스의 'Don't Know Why' 듣고재즈로 진로 결정… 서울예대 보컬 전공자작곡만으로 채운 1집 '한국대중음악상'2집까지 2년 연속 수상… '비범한' 성공"싱어송라이터 색깔도 갖춘 게 장점인듯"내달 2일 새앨범, 11·12일 버텀라인 공연 '한국 재즈의 새로운 세대를 대표하는 이름'.올해 2월 열린 제21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재즈 보컬 음반' 수상자로 재즈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김유진의 2집 앨범 'Extraordinary'를 선정하며 그를 소개한 문구다. 김유진은 지난해 제20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도 1집 앨범 '한 조각 그리고 전체'로 '최우수 재즈 보컬 음반'을 수상했다.이 부문에서 2년 연속 수상은 이례적이다. 1년 남짓한 시간을 사이에 두고 나온 1집과 2집 앨범 모두 자작곡으로 채웠다. 이 또한 재즈씬에서 신선한 시도로 꼽힌다. 앞선 정식 데뷔 앨범인 1집 '한 조각 그리고 전체'에 대한 제20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 이유는 '이색적이다 못해 파격적이어서 패기 넘치는 신인의 당찬 출사표라 할 만하다'는 평가였다. 그의 2집 앨범 타이틀 'Extraordinary'(비범한 또는 특출난이란 뜻)처럼 남다른 등장이었다.김유진을 만나기 전까진 '파격'이란 낱말로 그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실제로 만나고 보니 친근함이 더 앞서는 뮤지션이었다. '아임 프롬 인천' 인터뷰 장소로 인천에서 가장 오래된 재즈클럽인 신포동 '버텀라인'을 먼저 제안한 것도 그였다. 한국 재즈에서 변방에 가까운 인천이지만, 그 안에서 비범하면서도 친근하게 존재하는 버텀라인 같은 장소가 김유진이 이야기하고 싶은 'Extraordinary'의 진짜 의미인 듯했다.추석 연휴 직전인 13일 오후 버텀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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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 음악적 내공 키워… 경계 없는 뮤지션 되고파" 지면기사
[아임 프롬 인천] '재즈 씬의 샛별' 김유진 재즈가 마니아들만 듣는 오래된 음악이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 싱어송라이터 김유진(27·사진)의 음악을 추천한다.2022년 정규 1집 앨범 '한 조각 그리고 전체'와 이듬해 2집 'Extraordinary'를 잇따라 발표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재즈 보컬리스트이자 작곡가·작사가 김유진 음악의 핵심은 '메시지'일 것이다. 그는 모든 앨범을 자작곡으로 꽉 채웠다.2집 앨범 내지에 적은 '자유, 자유롭게, 마음대로, 다양성, 다양한, 변화가 많은, 평등, 일정함, 동등, 동등한, 같은, 자유로운, 구속되지 않은' 같은 메시지들을 솔직하고 당당하게 내세운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어울러 표현한다.지난해와 올해 연속으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재즈 보컬 음반상을 수상한 것도 이 같은 그의 음악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경계 없는 음악, 다양성을 추구하는 뮤지션 김유진이 이와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는 도시 인천 출신이라는 게 새삼스럽기도 하다.김유진은 1997년 인천 계양구에서 나고 자랐다. 지금도 많이 변하지 않은 계산동 시가지에 대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초등학교 입학 후 살게 된 서구 검단지역은 그 당시와 지금을 비교하면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었다. 검단신도시 조성 때문이다. 김유진이 살던 검단은 남진의 노래 '님과 함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자연 풍경이 살아있었다.중학교 때 재즈 음악을 처음으로 접하고, 재즈 뮤지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2016년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에 진학하면서 그 꿈의 첫발을 내디뎠다. 대학에서 한 학기만 마치고 곧바로 휴학해 무대를 가리지 않고 공연 경험을 쌓았다. 독일에도 머물렀다.그렇게 방랑하며 쌓아온 내공이 폭발하고 있는 시기, '아임 프롬 인천' 서른다섯 번째 손님으로 김유진을 만났다. 그는 고향에서 보낸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경험이 뮤지션으로 성장하는 데 자양분이 됐다. 가장 큰 영향은 인천의 '영어마을'이었다는 의외의 답변도 들었다. → 관련기사 ("힘든 시절 딛고 일어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