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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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프랑스의 '판소리 전도사'… 한유미·에르베 페조디에 부부 지면기사
불어로 옮긴 '우리 소리'… 프랑스에도 구전될 '판소리의 위대함' 단편영화 속 커플로 출연… 친구서 스승·제자, 동반자로 발전매년 佛'한국소리 페스티벌'·'Kvox 단체' 등 이끌며 보급 활동"다섯바탕 전부 출판해 파리 센강서 큰 잔치 벌이는게 우리 꿈"지난달 18일 인천 미추홀구 학산소극장에서는 한 백인 남성이 프랑스어로 판소리 심청가의 한 대목을 멋지게 선보였다. 한국어가 아니었음에도 객석은 멋진 추임새로 화답했다. 그 가운데 한 한국인 여성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즐기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판소리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는 한유미·에르베 페조디에(Herve Pejaudier)씨 부부다. 서울에 잠시 머물고 있는 부부를 최근 서울의 한 한옥 카페에서 만났다.에르베씨는 '우정출연'으로 지난 무대에 섰다. 김경아 명창과 조정래 영화감독이 지난 4월부터 4차례에 걸쳐 선보인 '심청 이야기' 공연의 마지막 무대였다. 강산제 심청가를 4차례에 걸쳐 나눠 부르는 공연이었다. 마지막 4회차에 심봉사가 눈뜨는 대목을 김경아 명창이 먼저 부르면 이어서 불어로 에르베씨가 연기를 한 것이었다. 불어를 못하는 관객도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재미있게 연기했다. 관객들의 '엄청난' 추임새에 그는 많이 놀랐다고 했다.에르베씨는 "관객이 불어를 모르실 텐데, 너무나 적절한 '타이밍'에 추임새를 해주셔서 놀랐다"면서 "아마도 제가 프랑스에서 불어로 판소리를 연기하고 한국 전통을 알리고 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해 주신 것 같은데, 아주 기뻤다"고 말했다.이들 부부가 프랑스 관객이 아닌 인천 관객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김경아 명창과의 인연으로 인천 무대에 섰다. 이들은 지난해 김경아 명창이 정리한 책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파리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이들이 프랑스에서 매년 개최하고 있는 11번째 'K-Vox Festival'(한국소리 페스티벌)에 김 명창을 초청해 무대를 만들었다. 에르베씨의 우정 출연은 그에 대한 화답이다.아내 한유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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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경찰관 봉사단체' 이끄는 가든버런티어 단장 김정원 경사 지면기사
"민중의 지팡이가 돼서, 봉사의 기쁨 외면할 수 없었죠" 대학생 시절, 전문직들 재능기부 보며 몸소 겪은 '사회환원 참맛'"알량한 권력에 취하지 말고 약자 도와라" 어머니의 당부 원동력활동하며 들은 감사인사, 매너리즘 빠진 동료들에게 긍정적 영향시민의 안전과 치안을 담당하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에게 '봉사'란 단어는 어찌보면 당연한 임무인 것처럼 느껴진다. 시민에게 헌신하겠다는 마음 없이 공무를 집행하는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경찰의 봉사와 헌신을 넘어 자발적으로 소외계층을 향해 온정의 손길을 전하는 경찰관이 있다. 수원서부경찰서 형사과 실종팀 형사이자 경기남부경찰청 최초의 경찰관 자원봉사단 '가든버런티어(Garden Volunteer)'의 단장을 맡고 있는 김정원(33) 경사다.김 경사는 지난해 10월 가든버런티어를 만들었다. 자신의 이름인 '정원(Garden)'에서 착안, '자원봉사자(Volunteer)'를 뜻하는 영단어를 합성해 가든버런티어로 정했다. 사계절 내내 울창한 정원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활동하겠다는 각오를 이름에 담았다. 현재는 수원 서·남·중부서와 안산상록서, 부천오정서 등에 근무하는 경기남부청 소속 경찰관 35명이 활동 중이다. 수원 지역을 중심으로 홀몸어르신, 노숙인 등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도시락과 떡을 만들어 제공하는 일을 지난해부터 매달 한 차례 진행해 오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어르신 240여명에게 식사를 대접했고, 지난달에는 최근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뉴진스님(개그맨 윤성호)'과 함께 취약계층을 위한 도시락 제작에 나서기도 했다.김 경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 '봉사 경찰관'이다. 본연의 업무로 바쁜 와중에도 주말마다 시간을 쪼개 각종 봉사활동에 앞장선다. 2년 전 제20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당시 김 경사는 1천228시간 봉사활동의 기록을 인정받아 전준영(천안함 피격 사건 생존자), 김나영 소령(3대 병역명문가 출신 간호장교), 성민정 소방장(14년간 매년 660여건 구급활동을 한 코로나 전담 구급대)과 함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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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일상 속 스포츠 굿즈 자리매김 꿈꾸는 '오버더피치' 최호근 대표 지면기사
"유럽선 축구 유니폼이 패션… 신포시장 어르신도 입는날 오길" 韓 대표팀·나이키·아디다스부터 최근 김민재 소속팀 콜라보 제작도인천Utd 창단 20周·SSG랜더스 등 고향팀과 작업 "행복했던 경험"글로벌 구단과 협업하며 스포츠 문화 확산 도움 "하나의 장르되길""신포시장의 할머니도 인천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자연스럽게 입는 날이 왔으면 합니다."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프로축구나 프로야구 유니폼은 '직관 갈 때 입는 옷'이라는 인식이 짙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유니폼을 일상에서나 여행 갈 때 입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국내 프로스포츠 구단들이 마케팅 수단으로 유니폼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게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했기 때문이다.축구를 주제로 한 패션 브랜드인 '오버더피치'의 최호근 대표는 유니폼과 스포츠 관련 상품의 일상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그는 "팬이 아닌 사람도 축구 패션을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소화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며 "미국이나 유럽처럼 국내에서도 스포츠 유니폼을 자연스럽게 입는 문화가 퍼지길 꿈꾼다"고 했다.■ 축구선수 꿈 포기했지만 결국 축구로 향한 디자이너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최 대표의 꿈은 축구선수였다. 브라질의 축구 스타 호나우두의 팬이었고, 그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서 축구 유니폼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중학생 때는 프로축구 인천유나이티드가 주최하는 미들스타리그에 학교 대표로 참가해 문학경기장에서 열리는 결승전까지 뛰었던 축구광이었다.그는 "농구로 유명한 송도중학교와 야구 역사가 오래된 제물포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모든 스포츠를 좋아했지만, 축구를 향한 꿈이 더 컸다"며 "집안의 반대로 축구선수의 길을 포기한 뒤에도 계속 운동장에서 축구공만 찼다"고 했다.인천대에서 시각디자인학과를 전공한 최 대표는 학부생 시절 축구와 디자인을 접목한 활동에 나섰다.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롯이 축구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최 대표는 "처음에는 축구 유니폼 디자이너를 하고 싶어 포트폴리오를 만들 겸 아마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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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뮤지컬 배우이자 한세대 교수 병행… 데뷔 16년차 '카이' 지면기사
"허구인 쇼에서 진짜 연기 찾는 일, 비우는 데서 시작" '프랑켄슈타인' 세 시즌째 참여경험한 모든 것 가감없이 전달후배들 성공 확률 높여주고 파공연예술학과 교수직 받아들여 "사실 매체 인터뷰가 좀 어렵습니다."뮤지컬, 연극, 콘서트, 대학 강의까지 쉴 틈 없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배우 '카이'. 데뷔 이후 어느덧 16년, 그동안 적잖이 해왔을 인터뷰가 '어렵다'는 말을 서두에 꺼내자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이'라는 사람은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을 던지고 그것들을 사유하고, 그 안에서 방법을 깨닫고,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를 늘 생각해왔다고 한다. 이렇게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듣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거나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오히려 좋아!' 단편적으로 보이는 것들에서 좀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카이가 말한 '깊이'는 곧 그가 배우이자 교육자로서 걸어가는 길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성악 전공 후 '크로스 오버' 도전자신 둘러싼 선입견 깨기 '난제'지금은 맡은 배역 의식흐름 좇아'나만의 방식'으로 캐릭터 구축 배우로서 보낸 지난 16년은 많은 사람이 그렇듯 칭찬하고 싶은 부분도,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이를 뒤로 한 카이는 앞으로 '나는 어떤 마음가짐과 형태로 무대 예술 활동을 이어나가야 할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는 시점이 온 것 같다고 했다. 성악을 전공했던 그가 뮤지컬을 시작했을 당시를 더듬어 보면 장르를 넘나드는 아티스트와 크로스 오버라는 장르가 익숙하지는 않았다. 그런 미지의 어딘가에 첫발을 내딛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이다.성악 발성, 똑똑할 것 같고 영어를 술술 내뱉을 것 같은 이미지, 지고지순한 사랑을 지키는 도련님…. 그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선입견을 깨는 것이 가장 '난제'였다고 떠올렸다. 카이는 "무관심보다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역량에 대해 폭넓게 바라보기보다 어떤 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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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인천에 신재생에너지 시장개척' 박정민 오스테드코리아 대표 지면기사
해상풍력 불모지던 인천섬… '미래 먹거리' 상생 신바람 불것" '녹색에너지 전환' 국내 탄소중립 기조와 부합… 도전 가능성 발견어업활동 영향 최소화 약속 등 3년간 설득해 인근 섬주민 반대 극복사업성공 디딤돌 될 '배후항만'… 3년내 확보 목표로 관계기관 협의인천 앞바다에서 해상풍력발전사업을 추진 중인 '오스테드(Ørsted)'는 덴마크 국영 에너지 기업이다. 본래 석유 등 화석연료를 생산하던 기업이었지만, 2012년부터 재생에너지 사업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다. 현재는 세계 최대 해상풍력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오스테드는 인천 옹진군 덕적도 서쪽 50㎞·35㎞ 해상 두 곳에 각각 800㎿씩, 총 1천600㎿ 규모의 해상풍력 발전단지 조성을 추진 중이다.오스테드가 한국 풍력시장에 진출한 시기는 2018년이다. 국내에서도 탄소중립을 위한 신재생에너지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고 해상풍력 발전사업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오스테드코리아의 신임 대표이사로 선임된 박정민 대표는 오스테드의 '한국 상륙'부터 인천 앞바다의 입지 선정, 지난해 이뤄진 발전사업 허가까지 모든 과정을 함께했다. 전북 전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박 대표는 인천대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후 유니슨 해외풍력사업개발, 삼성물산 상사부문 신재생에너지 업무 등을 거쳐 오스테드 한국법인 첫 직원으로 입사했다.박 대표는 "큰 조직에서 다양한 해외 프로젝트를 진행한 경험은 있지만, 한국 해상풍력 시장을 새롭게 개척해야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초창기 불안감도 컸다. 하지만 덴마크에 본사를 둔 오스테드가 대만 등 아시아 시장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던 점, 회사가 추구하는 녹색에너지 전환이 국내 탄소중립 기조와 부합하는 점 등에서 미래 가능성을 봤다"고 했다.오스테드가 한국 시장 진출 후 해상풍력 입지로 인천 앞바다를 선정하기까지는 약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시장조사를 진행하면서 인천이 수도권 전력 공급을 위한 최적의 해상풍력 대상지라는 판단이 섰다. 이후 오스테드는 2020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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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지역 매력 알리고픈 지영빈 동두천 두드림뮤직센터장 지면기사
"제 눈엔 모델같은 시민들… 동두천 애환 사진에 전부 담고파" 미군 떠나며 상권 쇠락·기지촌 여성 등 역사적 아픔… 보듬고파규모 작더라도 여러 곳서 문화사업 계획… 소외된 이 없도록 노력'119소방관 사진전'·'워낭소리 그 후 화보집' 그의 손끝에서 작업지영빈 감독은 이선희, 조용필 등 당대 내로라하는 가수, 전 대통령 등 유명 정치인의 사진을 찍은 유명 사진작가다. 119 소방관 사진전, 워낭소리 그 후 화보집 등 제목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진들이 모두 그의 손끝에서 나왔다.그런 그가 경기북부의 끝자락, 동두천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며 제주도에서 작품 활동을 했는데, 지난 4월1일자로 동두천두드림뮤직센터의 센터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의정부 출신인 지 감독은 자신의 경험과 인적 네트워크를 살려 동두천의 문화적 가치를 널리 알리고 싶다는 열의를 불태웠다."동두천은 정말 매력적인 동네입니다. 대한민국 어느 지자체보다 한(恨)도 많고, 문화적 잠재력이 풍부한 곳이죠. 대표적으로 보산동만 하더라도 영화 세트장이 따로 없습니다. 과거 미군부대의 정취와 그때 그 시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죠. 동두천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끌어내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주력할 생각입니다. 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아티스트 인재들을 발굴하는 역할도 하려 합니다."지 감독이 동두천에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고향 경기북부로 돌아와 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박형덕 시장과의 오랜 인연도 계기가 됐다는 후문이다."과거 한미2사단에서 사진기자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의정부 CRC(캠프 레드클라우드), 동두천 캠프 케이시 등을 드나들며 활동하던 그때도 전 동두천의 거리와 문화에 매료됐었죠. 그때 많은 연예인을 불러 협업하는 과정에서 시민들 사이에 저라는 사람이 좀 알려지는 일이 있었고, 당시 도의원이었던 박 시장님과는 우연히 만나 문화적 가치관을 교류하고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동두천과 좋은 인연을 이어오면서 홍보대사 활동도 하고…. 이제는 이렇게 동두천을 위해 일하게 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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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38년 인천시향 생활 마침표 찍는 바이올리니스트 정난희 지면기사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눈물 왈칵… 동료들과 울린 감동의 헌정곡 은퇴 공연 뒤 긴장풀려 지독한 감기로 병치레… 이달 말 정년 퇴임부당한 일에 먼저 목소리낸 '왕언니'이자 주도하던 '분위기 메이커'소년범 바이올린 강습 등 계획 "여유롭고 의미있는 나날 보내고파"1966년 창단한 인천시립교향악단(이하 인천시향)이 아트센터인천에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을 초연(初演)한 지난 5월 17일. 이날은 1986년 인천시향에 입단한 제1바이올린 정난희(60) 상임단원의 시향 은퇴 연주이기도 했다. 특히 80분에 달하는 긴 연주시간의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연주자와 청중 모두에게 난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정난희 단원은 이 초연작에서 인천시향에서 38년간 쌓은 경륜을 모두 쏟았다고 한다. 그렇게 큰 산을 오르는 듯한 연주가 끝난 직후,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와 박수 속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는 이병욱 인천시향 예술감독이 평소와 다르게 마이크를 잡았다. 이병욱 예술감독은 은퇴 연주를 마친 정난희 단원을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소회를 물었다. 그리고 인천시향은 슈만의 '헌정'(Widmung)을 연주해 정난희 단원에게 헌정했다.정난희 단원의 인천시향 마지막 연주가 애초 계획된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이 아닌 난생 처음 무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동료들과 함께 연주한 '헌정'이 된 사연이다. 그 감동의 순간은 유튜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인천시향 역사의 절반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정난희 단원 이야기가 곧 시향의 역사일 것이다. 그의 소회를 듣고 싶어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마지막 공연 한 달 후인 지난 21일에야 만날 수 있었다. 공연 직후 긴장이 풀린 탓인지 평생 겪어보지 못한 수준의 지독한 감기로 병치레를 했다고 한다. 다행히 건강을 되찾은 정난희 단원은 인천시향에서 '왕언니'로 통했던 에너지 넘치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이달 말 정년 퇴임한다."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는지, 이렇게 심하게 감기를 앓은 적은 처음이었어요. 그동안 참 건강하게 인천시향 생활을 했는데 말이죠. 시향에서 마지막 공연인 브루크너 교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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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인터뷰…공감] 백의종군길 순례 마친 '미국 이민 1세대' 윤봉한 씨 지면기사
'아메리칸 드림' 이룬 동포… 도포자락 휘날리며 국토종주 한국인의 정체성 잊지 않으려낮엔 일, 밤엔 韓역사 공부 매진월남 파병도 자처… 이젠 인생2막"우리 전통 안지키는 듯해 아쉬움"직접 고국땅서 홍익인간 계승 '白衣從軍(백의종군)'.등허리에 짊어진 깃발 속 네 글자는 정갈했다. 머리에는 갓을 쓰고 있는가 하면, 손에는 기다란 죽봉도 들었다. 흡사 조선시대 선비의 환생 같은 윤봉한(76)씨의 모습에 거리의 시민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빛 바랜 하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지난 10일 경인일보 본사에 등장한 그는 첫 인사부터 "'망건'을 잃어버려 격식에 맞지 않는 차림새라 미안하다"고 말하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수적으로 전통을 고수하는 모양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이상하게도 그의 답변에서는 중간중간 영어 문장이 섞여 나왔다."No guts, no glory." 그는 '용기 없이는 성공도 없다'는 자신만의 신조를 아주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읊었다. 70대 남성, 한복 차림 그리고 세련된 영어 발음이 맞물려 궁금증을 자극했다. 하얀 도포자락에 더해 햇볕에 그을린 듯 보이는 피부도 예사롭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1970년대 미국으로 향했던 이민 1세대 동포였다. 현재도 미국 오리건주에 거주하고 있다. 더 특이한 점은 조선시대 선비의 모습으로 지난달 10일부터 장장 한 달가량에 걸쳐 전국을 일주했다는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백의종군에 나섰던 길을 좇아 두 발로 돌았다고 한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잠시 깃발을 내려놓고 영어 공부에 매진했던 젊은 시절부터 순례에 나선 지난달까지를 차근차근 회상했다."서른 살쯤에 미국에 이민을 갔어요. 지금까지 46년을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살면서 그래도 죽기 전에 인생의 마지막을 보람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요. 젊은 시절 조국을 위해 희생하며 애국하신 분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도 조금이나마 조국에 보탬이 되고자 젊었을 때는 월남에 파병을 갔다 오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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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인천 유일 ‘아트북페어’ 포문 연 슬로보트 북극서점 대표 지면기사
"왠지 들어가고픈 '책방'… 존재만으로 독서를 설득한다" 친구와 기타 연습하려던 곳… 독립서점 변신지자체 도움·문화공간 활용하며 8년째 생존부평구·區 문화재단에게 '북마켓' 지원 요청'북페어' 기획 제안 답신… 현재 市주최 행사지난 1일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인천 유일의 아트북페어가 성황리에 열렸다. 전국의 독립서점, 출판사, 작가 160개 팀이 선보인 독립출판물을 맘껏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행사. 바로 ‘2024 인천아트북페어(IABF)’다. 올해 5회째를 맞은 인천아트북페어에서는 독립서점·출판사·작가들의 창작물을 전시·판매하는 아트북 마켓과 더불어 인문학 강연과 다채로운 공연·전시가 열렸다. 인천아트북페어를 구성하는 모든 프로그램은 한 사람으로부터 기획됐다. 슬로보트(44·예명) 북극서점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북극서점은 인천시 부평구 굴포천역 인근에 위치한 독립서점이다. 슬로보트는 ‘자유롭게 살자’는 신조로 2016년 북극서점의 문을 열고 8년째 ‘생존’하고 있다. 틀에 박힌 삶에서 벗어나 자신이 추구하는 인생관대로 살고 있다는 슬로보트. 그녀의 삶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초등교사에서 작가와 가수, 책방지기 그리고 문화 기획자까지슬로보트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 ‘책’은 슬로보트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을 줬다. 책은 매번 슬로보트를 새로운 곳에 데려다줬고, 성장시켰다. “책이 가진 위로의 깊이는 남다르다”는 게 슬로보트의 경험이다. 책은 그렇게 그의 인생에 자리잡았고, 작가의 꿈을 키우게 했다.슬로보트는 초등학교 교사로 사회에 발을 들였고 13년간 교직에 몸담았다. 2016년 퇴직하고 꿈을 좇았다. ‘슬로보트(slowboat)’라는 필명으로 독립출판물(책)을 내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같은 해 10곡의 포크송을 담은 앨범 ‘섬광’도 발매했다.생각지 못한 친구 제안이 독립서점의 문을 연 계기가 됐다.“그 해에 초단편 소설을 쓰며 혼자 놀다가 3년 정도 여행하면서 마음껏 글을 쓰는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복직할 계획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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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인터뷰…공감] 국내 첫 '요트 단독 세계일주'… 못말리는 탐험가 김승진 선장 지면기사
남극 근방 케이프혼 4만2천㎞ 항해… "동경하던 바다, 인생에 입항한 순간" 요동치는 가슴따라 40대 후반 5년 된 중고요트 구매충남 당진서 출발해 209일 여정… 세계서도 드물어"요트 건조시장 400억달러… 韓산업 성장 일조 목표" 일생 딱 한 번의 경험이었다고 했다. 달이 사라진 그믐날 밤,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바람이 멎으며 요트가 멈췄다. 수개월씩 항해하면서도 좀처럼 겪지 못하는 완벽한 무풍이었다. 밤바다는 조금의 너울도 없이 반듯했고, 밤하늘엔 구름 한 점 걸쳐 있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가 먹색으로 맞닿은 적막한 그곳으로 별이 쏟아져 움직였다. 우주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믐날이어야 하고 바람이 멈춰야 하고 구름은 없어야 한다는 조건에, 결정적으로 그 바다에 가 있어야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기에 다시 눈에 담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그는 아련하게 미소 지었다. 그토록 동경하던 바다를 가슴 속에 들이게 된 탐험가 김승진(62) 선장의 이야기다. 항구에 들르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대한민국 최초로 요트 단독 세계일주에 성공한 김 선장이 '특별한 바다'와 처음 마주한 건 고교 수학여행 때다. 충북 청주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동해로 수학여행을 가다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바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고속도로가 없어 미시령과 대관령, 진부령 등을 구불구불 넘어야 동해에 도달하던 시절, 그가 탄 버스는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향하고 있었다. 김 선장은 "날씨가 너무 좋은 상태에서 산맥 사이로 드넓은 바다가 펼쳐지는데, 진하고 아름다운 수평선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바라봤다"며 "반 친구들은 버스 안에서 신 나게 노래하고 떠들고 했지만 나는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고 돌이켰다.벅찬 기억을 안고 대학생이 되어 똑같은 길로 다시 찾아간 바다는 작아 보였다. 김 선장은 이미 탐험가의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미대생이었던 그는 "대학에 입학해서도 묘하게 잠수라든지 바다에 대한 관심이 계속 생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