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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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일제강점기 강제 이주의 산증인…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 황예순·강정순·강춘자 할머니 지면기사
일제강점기부터 재일조선인 후세들의 삶을 다룬 애플TV+ 드라마 '파친코'는 고국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다.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드라마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후발주자로 비교적 구독자가 적은 애플TV+를 통해 방영됐음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선자'와 '솔로몬'을 중심으로 한 가족들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압축했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이민사회의 현실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인천 연수구 연수동에 있는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도 65명의 선자와 솔로몬이 살고 있다. 이들은 선자처럼 일제강점기 러시아 사할린 지역으로 떠났다가 귀국한 사람들이다. 또 머나먼 고국 땅을 그리워하며 사할린에서 살아간 조선인의 후손 솔로몬과 같은 이도 있다. 지난달 26일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을 찾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아버지 고향 잊지 않고 산 황예순 할머니할아버지가 주소 외우게 해… 아버지와 다시 만날수 있어父 규슈 탄광行 어머니도 생사 모른채 돌아가셔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 만수리.'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지내는 황예순(81) 할머니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아버지 고향을 리(里) 단위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황예순 할머니의 어린 시절, 그의 할아버지가 수백 번을 넘게 외우게 한 지명이기 때문이다.황예순 할머니가 3살이던 1942년 때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는 어린 그를 데리고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먼저 사할린에 일하러 간 아버지를 따라서 가족이 이사한 것으로 황예순 할머니는 기억했다.1938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제는 '국가 총동원령'을 시행했다.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젊은 청년들을 징집했다. 특히 벌목장과 탄광 등이 많았던 사할린 지역에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일제는 사할린으로 가면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있다고 조선인을 꾀어냈다.황예순 할머니의 아버지도 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다고 한다. 노동력을 수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적은 급여를 받았지만, 황예순 할머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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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발달장애 두 자녀 둔 워킹맘' 임신화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 이사장 지면기사
대한민국에서 발달장애 아동을 기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발달장애 아동을 바라보는 편견 어린 시선부터 사회 곳곳에 자리한 차별은 아동뿐만 아니라 부모에게까지 상처가 된다.흔히 발달장애가 있는 아동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이른바 '상동 행동'을 보인다. 이런 모습에 익숙지 않은 비장애인들은 곧바로 색안경부터 낀다. 색안경이 씌워지는 순간부터 발달장애 아동과 그 가족들은 연대가 아닌 차별의 벽에 가로막힌다.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 이사장 임신화(48)씨는 이렇게 외친다. "발달장애 아동도 엄연한 사회 구성원입니다." 꿈고래놀이터부모협동조합은 장애 아동에게 치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힘들게 장애 아동을 받아주는 교육시설을 찾더라도 치료비 대부분이 시설로 가는 단점에 대안으로 협동조합이 탄생했다.협동조합은 치료와 교육이 모두 장애아동에게 놀이가 되는 환경을 꿈꾼다. 발달장애가 있는 두 자녀를 둔 워킹맘 임 이사장은 장애를 극복이나 동정, 혹은 시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자고 했다.그는 지난 18일 수원시 권선구 협동조합 사무실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발달장애 아동은 도움이 아닌, 생애 주기별 지원이 필요하다"며 "국가책임제가 시행돼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협동조합 설립 과정은두 아이 치료비만 한 달에 300만원씩 들어'꿈고래' 어린이집 학부모와 한뜻으로 뭉쳐'치료를 놀이처럼' 건물주가 보증금 면제도봉담점 57명·수원점 30명 방과후활동 확대 두 자녀가 발달장애를 겪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심경은."첫째에게 발달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안 건 둘째가 태어났던 때다. 당시 기억이 선명하지 않지만 당장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이 자폐성 장애 1급 판정을 받으면서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제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언어, 감각 통합, 미술 놀이 등 여러 프로그램을 찾아다니며 아이들을 치료하려고 애썼다."협동조합 설립에 이른 계기는."2015년 협동조합 설립 즈음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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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다큐 감독으로 '10주년 디아스포라영화제 이끄는' 이혁상 프로그래머 지면기사
오직 인천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지만 알찬' 영화제인 디아스포라영화제가 올해 10주년을 맞는다. 2013년 1박2일짜리 작은 행사로 시작한 영화제는 지난 10년 동안 차근차근 성장해 어느덧 도시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다음 달 20일부터 닷새간 인천아트플랫폼과 애관극장에서의 10번째 개막을 앞두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디아스포라영화제는 '공존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알려왔다. 영화제는 인천시민들에게 '디아스포라'라는 말 앞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는 것이 적절한지 일깨워줬다. 특히나 디아스포라의 도시 인천에서 열리기에 영화제는 더 빛났다. 120년 전 100명이 넘는 한국인이 인천의 제물포항을 출발해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떠났고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항구와 공항을 통해 떠나고 또 들어온다. 인천은 문호를 개방한 이래 이주와 이민의 중심지였는데, 인천이 디아스포라의 도시라 불리는 이유다.영화제가 10살의 나이를 먹는 동안 절반이 넘는 세월을 누구보다 아끼고 돌봐온 이가 있는데, 바로 다큐멘터리 감독인 이혁상 디아스포라영화제 프로그래머다. 10회째를 맞이하는 영화제의 막바지 준비에 한창인 그를 인천영상위원회(이하 영상위)에서 지난 18일 만나 얘기를 들었다.5회부터 합류… 영상위 적은 인원으로 꾸려 개막식 날씨로 고생한 적도코로나 영향 아트플랫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애관극장도 허락영화제이후 스태프 정규직 전환 많아 안정된 상황에서 노하우 쌓아 - 디아스포라영화제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제5회 영화제부터 프로그래머로 합류했습니다. 디아스포라영화제 초기에는 영상위가 적은 인원으로 고생하며 힘들게 영화제를 꾸려왔죠. 영화제를 새롭게 바꾸고 싶다며 합류해달라는 제안에 참여했습니다. 영상위는 해마다 전반기에 디아스포라영화제를, 하반기에는 지금은 사라진 인천다큐포트를 치러왔는데 다큐포트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참여한 저를 본 스태프들이 점찍었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조선의 태양'이라는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일본의 재일 조선인마을에서 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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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내가 바로 제빵왕 김탁구" 업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영모 명장 지면기사
어린시절 부모가 이혼하면서 전남 해남 작은아버지 집에 맡겨져 눈칫밥을 먹다 빵집에서 일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16살 때 무작정 대구로 나와 조그만 제과점에 발을 들여놓았다. 1982년 서울 서초동에서 단 19.8㎡짜리 가게로 제과점을 시작해 지금은 성남·서울 등에 8개 제과점과 35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성공한 CEO가 됐다.1995년에는 유산균 발효법, 2000년에는 과일을 이용한 천연발효법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해 한국인에게 맞는 빵의 풍미를 찾아냈다. 1998년 노동부 선정 대한민국 제과기능장 제1호로 등극했고 대한제과협회·대한민국명장회 회장 등의 경력에 세계 쿡북대회 대상·은탑산업훈장·장한 한국인상·대통령 국민포장 등을 수상했다. 2010년 6월9일부터 KBS 2TV에서 30부작으로 방영돼 최고시청률 49.3%를 기록한 '제빵왕 김탁구'의 실제 모델이다.# 빵지순례 성남 '파네트리 제과명장 김영모'빵은 3시간만 지나도 맛이 떨어지기 시작해판교·수지·강남권과도 가까워 문 열게 돼'AI 핸드드립 머신' 들여놓고 개인 박물관도 '제과제빵업계 살아 있는 전설', '제과명장 1호', '동네빵집에서 성공한 덕후', '빵굽는 CEO' 등의 수식어가 붙어 있는 김영모 명장의 삶을 압축하면 이렇다.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경지에 올랐고 남 부러울 것 없는 위치에 서 있지만 칠순을 바라보는 김영모 명장은 지금도 여전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 4~5시간 현장에서 빵을 굽는다. 빵을 위해 살아왔고 여전히 빵과 살아가는 게 그의 인생이다. 그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오전에 일본이나 프랑스 등 유럽의 제과관련 잡지나 책을 들여다보며 세계 제과제빵 흐름을 살펴본다. 이후 빵 공장에서 후진들을 지도하며 함께 빵을 만든다.김 명장은 "좋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첫 번째 재료가 좋아야 한다. 두 번째는 정확한 공정이다. 똑같은 배합이라도 공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맛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난다. 발효가 덜 돼도 맛이 달라진다. 정확한 공정이 풍미 있는 좋은 제품을 만든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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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동반성장 사명감' 서임순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인천지회장 지면기사
지난 1월 취임한 서임순(66)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인천지회장은 "여성기업인의 매출 증대를 위해 발로 뛰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이하 여경협)는 1999년 제정된 '여성기업지원에 관한 법률(여성기업지원법)'에 따라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법정 여성경제단체다. 인천지회는 협회가 만들어지면서 함께 탄생했다. 서 회장은 올해 1월 취임해 2024년 12월까지 수장 역할을 맡게 됐다. 서 회장은 중장비용 볼트·너트를 제작하는 (주)평산기공의 대표로, 47년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서 회장은 여성을 보기 힘든 해당 업계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남성 직원 대하는 법·사업운영 '꿀팁' 배워… 지회 없었다면 회사 발전 어려워저변 확대 됐지만 코로나로 제약… 중기인이 겪는 어려움엔 남녀가 따로 없어여성기업확인 발급제도·새로일하기센터 재개… 사기 진작 포상·제품전시회도 처음부터 여성기업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1976년 남편인 고(故) 신현철씨와 함께 회사를 설립했지만 1999년 남편이 사망하면서 회사를 승계 인수했다. 남편 중심으로 이뤄졌던 경영을 서 회장이 맡아 운영하는 과정이 쉽진 않았다. 그는 "남편의 옆에서 경리 일을 하며 보조역할만 하다가 갑작스레 경영을 맡게 된 것이었다"며 "당시엔 특히 여성들이 경영을 접할 곳이 별로 없었다. 매일 강의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경영을 배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말했다.서 회장을 더욱 힘들게 했던 건 여성기업인에 대한 차별이었다. 거래처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해선 여러 사람과의 만남이 필수적이다. 여성기업인들에겐 '만남' 자체가 부담이며 차별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 서 회장은 설명했다. 그는 "당시엔 거래처 관계자와 밥 한 끼만 먹어도 별의별 소문이 나기도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그런 그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던 건 또 다른 여성기업인들이었다. 서 회장은 2000년대 초반 여경협 인천지회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서 회장은 당시 여경협 인천지회에서 '여성경제인이 살아남는 법'을 실질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고 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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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창단 30년' 전통연희단 잔치마당 이끄는 서광일 대표 지면기사
올해로 창단 30년을 맞은 전통연희단 잔치마당을 이끌고 있는 서광일(56) 대표는 1987년 6월 인천 부평에 있는 십정동의 한 성당 풍물반 강좌에서 국악기를 처음 접했다. 그는 그때만 하더라도 자신이 30년 넘도록 국악기를 손에 쥐고 살아갈 줄은 전혀 몰랐단다. 당시 경동산업 소속 노동자였던 서 대표는 풍물반에서 대학생 예닐곱 명과 뒤섞여 풍물을 배웠다."땅도 땅도 내 땅이다. 조선 땅도 내 땅이다"를 입으로 수차례 반복해 따라하며 배운 자진모리장단의 입장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그렇게 처음 국악기를 만져봤다. 오른손에 '열채'를, 왼손에 '궁채'를 쥐고 그날 어설프게 배운 입장단에 맞춰 장구를 두드려봤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고 뿌듯했다."장구를 처음 두드리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풍물이 조합원들을 지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마음뿐이었죠. 7년 뒤인 1992년 제가 잔치마당을 창단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죠. 앞으로 예술가의 길을 걷겠구나 하는 마음은 더더욱 없었고요."# 노동운동에서 문화운동으로집안형편 나빠져 중학교 겨우 졸업 '상경'무료야학 통해 검정고시 '전태일 평전'도몸담았던 노동단체 해체후 잔치마당 창단풍물 강좌와 공연… 전통혼례사업도 병행부평풍물대축제와 성장 500명 길놀이 장관 여수 돌산도 멸치잡이 '선주집'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6학년까지만 해도 유복하게 자란 편이었다. 그러다 새롭게 시작한 아버지의 배 사업의 결과가 좋지 않았고, 집안 형편이 나빠졌다.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었다. 결국 어린 나이에 학비를 벌러 상경했다. 1년 동안 왕십리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모아서 여수로 돌아왔지만, 가정 형편은 그대로였다."서울로 올라갈 때와 비교해 집안 형편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는 거예요. 우연히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봤는데, 그냥 모아놓은 등록금을 다 드릴 수밖에 없었어요."결국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 현재 한국폴리텍대학교의 전신인 광주직업훈련원을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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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응급의학과 전문의 출신' 이세호 신임 화홍병원장 지면기사
오미크론의 높은 전파력으로 국내 코로나19 일일 신규 확진자가 20만~30만명 대를 오가며 10명 중 1명이 확진됐거나 확진 경험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말 그대로 '주변에 확진자가 없다면 사회성을 의심해봐야 하는 수준'이 된 것이다. 함께 커지는 우려 중 하나가 우리 응급의료체계에 관한 것이다. 2020년 1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국내에 상륙한 이후 응급의료현장은 의료자원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 만큼, 이 험난한 파고를 효율적으로 헤쳐나가기 위해 상황에 따른 정책적·행정적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다.또 장기간 긴장을 유지해온 응급의료현장에서 의료진의 부담이 얼마만큼인지, 이를 어떻게 덜어줘야 하는지 이제는 명확한 답이 필요하다. 일반 환자 입장에서도 코로나19에 고통을 참는 것이 아니라 안심하고 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UAE 왕립병원 설립초기 응급실장 4년 8개월간 의료체계 기틀 마련PCR검사 결과 시간 단축… 음압 치료실 회전율 높이고 의료진 확대'의료시장이 왜곡' 치료 미루거나 확진자로 환자 못받는 상황 반복응급의사는 충분히 설명해 환자가 치료 선택할수 있게 하는 역할 수원 화홍병원 제2대 병원장으로 취임한 이세호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이 질문에 답변을 내놓는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서울대병원이 운영하는 UAE 세이크 칼리파 왕립병원(Sheikh Khalifa Specialty Hospital)의 설립 초기 응급실장을 맡아 4년 8개월여간 UAE의 의료체계 기틀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낯선 환경에서 의료행정을 만들어 정착시킨 경험을 가졌다.무엇보다 여전히 병원장실을 지키기보다는 방호복을 입고 환자를 만나는 시간이 더 많은 그는 의료진의 고민과 아픔까지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어 의료행정과 현장을 통합적으로 파악하고 우리 의료체계가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유연한 의료시스템 정착돼야…이세호 병원장은 "한국인의 특징이, 장점이 트렌드를 빠르게 반영한다는 것"이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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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한국 최초·아시아인 2번째 국제산업보건학회장' 강성규 가천대 길병원 교수 지면기사
"노동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앞장서겠습니다."지난달 국제산업보건학회(ICOH) 제16대 회장을 맡게 된 가천대 길병원 강성규(63) 직업환경의학과 교수의 다짐이다. 강 교수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 아시아인으로서는 2번째로 국제산업보건학회를 이끌게 됐다. 임기는 오는 2024년까지다.국제산업보건학회는 전 세계 노동자의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연구와 교육활동 등을 하는 산업안전보건분야 최고의 국제학술단체다. 국제노동기구(ILO)와 세계보건기구(WHO)의 산재 예방 관련 정책 수립 과정에서 전문적인 조언을 하는 역할을 한다.짧은기간 산업화로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오염방지시설… 전국 곳곳 공장 찾아다녀1993년 제일화학 사망사고 조사해 석면 피해 입증 '직업성 암'으로 국내 첫 인정 받아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경각심… 정부 산업별 재해원인 분석 사업주 과실 따져야 직업환경의학은 노동자 직업병은 물론, 산업재해, 환경성 질환 등을 진단·연구하는 학문이다. 급변하는 노동환경에 따라 건강문제가 전형적인 직업병이 아닌 업무 관련성 질환으로 바뀌는 데다, 산업재해와 관련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직업환경의학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연세대에서 전공의 과정을 마친 강 교수는 담당교수의 추천으로 직업환경의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1989년 당시 근로복지공사 부설 직업병연구소에서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시작했다.강 교수는 "우리나라는 직업병을 연구하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고 했다. 짧은 기간에 산업화를 이뤄냈지만, 산업화의 명과 암이 분명했다는 것이다. 공장 노동자들은 오염방지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공장에서 일하다가 직업병에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는 직업병에 걸린 노동자들의 피해 규명을 위해 전국 곳곳에 있는 공장을 찾아다녔다.강 교수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직업병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조사했던 직업병 피해 노동자의 이름과 증세 등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1993년 경남 양산 '제일화학'에서 일했던 노동자 사망사고를 조사해 국내 최초로 석면 피해를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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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3·1혁명'이라 부르는 김재옥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이사장 지면기사
차량이 줄지어 서있는 주유소 한쪽에 작은 문 하나가 있다. 좁은 계단을 오르니 그의 사무실이 나왔다. 3·1운동(그는 3·1혁명이라고 했다)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민족 대표들의 존영이 벽에 빼곡히 붙어 있었다. 해공 신익희의 장남이자 그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신하균이 퇴계 이황의 시를 옮겨 쓴 작품 등도 걸려있었다. 본업은 대신자연에너지 대표, 그러나 본업 못지 않게 3·1혁명의 가치를 되새기고 역사를 바로 조명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온 그는 김재옥 사단법인 민족대표33인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3·1절을 나흘 앞둔 지난달 25일 찾은 김 이사장의 개인 사무실이 이런 그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민족 대표 33인은 1919년 3·1혁명 당시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이들을 뜻한다.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종교별로 참여했다. 33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미독립선언서의 기획부터 3·1혁명까지 전 과정에 참여한 핵심 인사는 48인이었다. 3·1혁명 이후 48인의 재판 기록을 엮은 자료를 인터뷰 내내 손에서 놓지 않던 김 이사장은 "독립 선언과 3·1 혁명은 을사늑약 이후 10년 이상 준비된 것이다. 많은 분들이 중국, 러시아 등으로 이주해 갔고 그곳에서 독립을 위한 준비 등이 오랜 기간 이뤄져 왔다"며 "33인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핵심 인사는 48인이었다. 이중 김세환 선생은 수원에 학교를 설립하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주력했지만, 수원이 전국 독립운동의 가교 역할을 하는 곳으로 거듭나게 했던 분"이라고 설명했다.민족 대표 48인의 재판 기록을 보고 또 볼수록 나라, 그리고 민족의 소중함을 되새긴다고 했다. 김 이사장은 "기념사업회 일을 하고, 이분들의 발자취를 좇아가면서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은 정말 나라, 그리고 우리 민족이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이라며 "선열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놓고 희생했는데, 그건 결국 나라와 민족을 지키기 위한 일이었다. 그렇게 지키려 했던 나라와 민족을 후손들이 지켜내지 못한 채 남북으로 분열돼있다.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돼서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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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경기도 최다6선·최연장자' 나종석 팔탄농협 조합장 지면기사
'누가 해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 언제라도 할 일이면 지금 하자. 지금 내가 할 일이면 더 잘 하자'.'성실'에 관한 나종석(76) 팔탄농협 조합장의 지론이다. 그는 평소 이 말을 자주 했다. 또한 평생 이 말을 실천했다. 팔탄농협에서 30년째 일하고 있으니 직원들도 모두 이 말을 알고 있다. 나 조합장은 스스로 먼저 실천했고, 직원들에게도 함께 성실하자고 권했다. 어느 날, 그의 말이자 실천이자 삶인 이 글귀가 크리스털패에 새겨져 그의 책상에 놓였다. 직원의 선물이었다. 일을 하다 가끔 글귀에 눈길을 둔다. 직원의 손을 통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글귀를 보며 성실함이 지닌 힘을 실감한다. 그는 지난 1993년 제8대 팔탄농협 조합장으로 취임한 이후 30여년 동안 조합장 6선을 이루었다. 조합원 2천여명의 팔탄농협은 지난해 당기순이익 20억5천여만원을 달성했고, 조합원에 대한 환원사업 및 영농자재 보조지원 등으로 21억1천여만원을 지원했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실적은 나아졌다. 내년에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를 치르니 15대 조합장으로서의 임기가 1년 남았다. 조합장으로 보내는 마지막 1년이다.성실함으로 전국 최우수 농협으로 우뚝 세워… '미농 공적비' 제막 영광일손 부족한 농촌에 '건답직파' 재배방법 찾아… 올 60가구 70만㎡ 계획왜소한 덩치 40㎏쌀 옮기는게 버거워 미곡종합처리장 설립 결심 보람도 22일 팔탄농협 주변으로 모처럼 활기가 가득 찼다. 작고 조용한 마을에 공적비가 서니 농협 사람이고, 마을 사람이고 왁자하게 모여들었다. 이날 오후 2시에 '미농(米農) 나종석 조합장 공적비 제막식'이 거행됐다. 경기도 내 유일한 최다선 조합장이자 최연장자로서 그가 세운 업적을 기리고자 조합 임원들이 이를 준비했다. 농협중앙회 이성희 회장을 중심으로 공적비설립위원회가 결성됐다. 화성시 10개 농협 조합장들이 모두 참여했고, 팔탄농협 임원들도 합세했다. 이들은 공적비에 '팔탄농협을 연 3회에 걸쳐 전국 최우수농협으로 우뚝 세웠다. 비약적인 사업 성장을 꾀하면서 쌀 재배 농가를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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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한반도 평화 실타래 푸는' 이석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지면기사
"한반도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북한과 대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이하 민주평통)는 헌법 제92조에 근거한 평화통일정책 대통령 자문 기관이다. 지난 1981년 6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가 창설된 이후 1987년 10월부터 현재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해 9월 제20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가 출범하면서 민주평통을 이끌고 있는 이석현(71)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취임 이후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공 외교, 지역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수행해가고 있다.새해 들어 북한이 잇따라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 발사 모라토리엄(유예) 해제를 시사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이 수석부의장은 북한과의 대화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지난달 24일 민주평통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긴급 성명'을 발표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미국은 북한에 대해 보상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면서 바이든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했다. 또 북한에 대해서도 북한이 핵실험과 ICBM에 대한 모라토리엄을 해제하면 평화 협상의 판을 깨는 행위가 되는 만큼 즉각 대화에 나서 비핵화와 번영의 길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장성택 처형에 이어 지난 2017년 중국이 보호하던 김정남 암살사건이 발생하면서 중국과 북한 관계가 악화됐지만 지난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있었던 북미회담 결렬 이후 북·중 관계가 동맹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형국에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몰아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 비핵화에 따른 단계적 보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이 수석부의장은 "세계 정세는 미·중 간 무역 갈등에서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번졌고 전 세계로 넓어졌고 북한과 중국의 밀착이 강화되면서 북한이 미국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며 "최근 북한은 미사일을 연일 쏘아 올렸고 이에 미국은 추가 제재를 하겠다고 하고 있어 한반도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이 상황을 풀기 위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北은 미사일 쏘고 '추가 제재' 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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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설립 10년 맞은 정세현 '함께하는 인천사람들' 대표 지면기사
방글라데시의 경제학자 무함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83년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그라민은행(Grameen Bank)'을 설립해 빈곤 퇴치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았다. 그라민은행은 마이크로크레디트(빈곤층에게 담보 없이 받을 수 있는 소액 대출)를 제공하는 기관이다. 그라민은행은 설립 이후 방글라데시에서 빈곤 퇴치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 세계로 확산했고, 비슷한 형태의 마이크로크레디트 기관도 늘었다. '(사)함께하는 인천사람들(이하 함인사)'은 지난 2012년 '인천 사회적 은행'을 표방하며 설립된 인천형 마이크로크레디트 기관이다. 올해로 만 10년을 맞았다. 어려운 환경속 성실히 사는 분 볼 때마다 매번 감동 받고 용기 얻어대출은 끝이 아닌 시작… 지원대상자 9단계 구분 2~3점자들 집중 관리지난 2년간 대위변제율 1% 발생… 저소득층 기회 만드는 정책 제안 정세현 대표는 2014년부터 함인사 대표를 맡았다. 금융기관과 민간기업에서 근무하던 그는 지역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함인사에 합류했다고 했다. 정세현 대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분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매번 감동을 받고, 용기를 얻는다"고 말했다. 함인사는 후원을 토대로 저소득층에게 대출을 제공하는 중개 기관이다. 함인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곳은 전국적으로 5개 정도가 운영되고 있으며, 함인사를 제외하면 모두 서울에 위치해 있다. 함인사는 명칭에서 알려주듯 인천시민을 위한 사회적 은행이다. 이 때문에 대출 대상은 인천시민이다. 김포나 부천, 시흥 등 인근 지역에서 함인사에 대출을 문의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타 지역 시민들은 서울에 있는 다른 기관을 연결해준다고 한다. 함인사는 금융권에서 대출받기 어려운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담보 없이 저리로 대출을 진행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제공하지는 않는다. 생계를 위해 쓰는 자금보다는 창업 자금을 지원하는 형태다. 10년간 함인사는 595명에게 창업을 지원했다. 한 달에 5개 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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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인천 개항기 음악 발굴하는 모던보이' 인천콘서트챔버 이승묵 대표 지면기사
일제 강점기 인천 용동에는 기생들이 적(籍)을 두었던 조합인 권번(券番)이 있었다. 이화자(李花子·1918?~1950?)는 이곳 용동 권번의 대표적인 예인 가운데 하나였다. 권번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이화자는 가수로 발탁됐고 레코드 취입과 함께 국내외를 누볐다. 스타가 됐지만 이화자의 삶은 마냥 밝지 않았다. 여성은 지금도 약자로 여겨지는데, 그때는 여성 예술인에 대한 대접이 더 나빴다.개항기 인천의 근대 음악을 발굴·수집하고 또 공연으로 만들고, 다시 앨범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인천콘서트챔버가 최근 이 여성예술인 이화자의 삶과 음악에 다시 빛을 비추는 작업을 마쳤다. 이화자의 노래를 음악극으로 만들었고, 최근 앨범도 냈다.2015년부터 이러한 소중한 활동을 이어오는 인천콘서트챔버를 이끄는 이승묵(36) 대표를 지난 24일 인천 제물포구락부 인근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천시 유형문화재인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 인천에 살던 외국인들의 사교 모임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이승묵 대표는 검은 뿔테 안경과 단정한 정장 차림에 깨끗한 구두를 신고 약속 장소에 나왔다. 옛 '모던보이'가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타임머신을 타고 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의 단정한 모습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보는 이에게 호감을 준다. 인사를 나누면 바른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의 작업에 호기심을 갖게 되고,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그의 활동을 지지하는 팬이 될 정도로 매력적이다. 그의 패션은 남성 패션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이화자의 노래 음악극으로 만들고 앨범도… 옛 건물 찾아다니며 연주개항기 소외된 사람, 나아가 여성 예술인의 음악 들여다보는 작업달걀로 바위 쳐보고 싶은 마음, 무작정 역사학자 등 만나 묻고 배워 그는 왜 이화자에 집중했을까. 이 대표는 "개항기 소외된 사람들을 살펴보고자 했고, 특히 더 소외된 사람들이었던 여성, 나아가 여성 예술인의 음악을 들여다보고자 한 작업이었다"고 설명했다.특히 이화자는 자신의 음악을 '자서곡'(自書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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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한국자유총연맹 경기도지부 신임 회장' 최창환 장수돌침대 회장 지면기사
경기도가 '후끈후끈'해진다. '별이 다섯 개'로 케이블방송 CF계를 평정한 최창환(69) 장수돌침대 회장이 지난해 말부터 한국자유총연맹 경기도지부 신임 회장을 맡았다.지금까지 맡은 사회단체장과 기업 대표 이력만 30개가 넘는다. 국리민복(國利民福·국민행복과 국가발전)과 자유수호를 기치로 세운 자유총연맹과 최 회장의 철학이 맞아 떨어졌다.최 회장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한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의 정신을 감사하게 여기고 세계 대국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었다"며 "자유수호와 평등의 원칙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유총연맹의 경기도지부 회장을 맡아 국가 발전이 곧 국민의 행복이라는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 영광"이라고 말했다.최 회장과 자유총연맹의 인연은 우연이 아니다. 국제라이온스협회 서울 송파지회장을 하던 2014년 당시 자유총연맹이 통일안보 자문위원직으로 위촉해 활동했다. 이 인연을 바탕으로 장수돌침대 사업 본거지(경기도 광주시 오포읍)를 관할하는 도지부의 회장을 맡게 됐다.인터뷰를 앞두고 최 회장은 '디테일이 힘'이라는 21세기 신흥 진리를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자유회관 2층 도지부 회장실에서 사진 촬영을 앞두고 힘없이 줄지어 늘어진 태극기와 자유총연맹 깃발을 사무용 집게로 집어 판판하게 펴는 작업을 지시하고 본을 보였다.최 회장은 "해병대 병장 만기 전역을 했다. 그때부터 각 잡는 습관이 몸에 배서 우리 장수돌침대 회사 깃발도 다 이렇게 각을 잡아놨다"며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해놓고 생활을 해야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TV 홈쇼핑 준비를 할 때는 프로그램 준비하는 PD도 내 디테일에 놀랐다며 쌍 엄지를 들더라"고 했다.# 불모의 땅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최 회장은 '우리 장수돌침대'의 TV 광고에 직접 출연해 손가락 5개를 쫙 펴면서 '별이 다섯 개'를 외쳤다. 이마에 빛나는 빨간 별 스티커가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중년 탤런트인 줄 아는 이들도 다수다. 사실 탤런트는 맞다. 직접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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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우리 집은 인천 함박마을' 고려인주민회 회장 리 빅토르 지면기사
1860년 무렵부터 구한말,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역사를 지나 독립의 기쁨을 누린 1945년 8월15일까지 한국을 떠나 러시아 등 구소련 지역에 이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농업 이민, 항일독립운동, 강제동원 등을 이유로 한국을 떠나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1937년 당시 소련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조국과 멀리 떨어진 지금의 중앙아시아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이들은 머나먼 땅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조국을 그리워하며 민족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 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과 그 후손을 가리켜 고려인이라고 부른다.최근 고국인 한국으로 향하는 고려인이 늘고 있다. 이들이 국내에 정착해 모여 사는 마을도 전국 곳곳에 만들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게 인천 연수구에 있는 '함박마을'이다. 현재 함박마을에 사는 고려인은 6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이들에게 2021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지난해 4월 전국 최초로 고려인 스스로 힘을 모아 만든 마을 주민회인 '인천 함박마을 고려인주민회'(이하 인천 고려인주민회)가 발족했다. 연말에는 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진자의 가족이 고려인 등을 대상으로 한 교회 행사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함박마을 고려인들은 감염 확산에 대한 우려로 가슴을 졸여야만 했다.인천 고려인주민회 리 빅토르(39) 회장을 최근 인천지역 고려인 지원 시민단체인 '너머인천고려인문화원'에서 만났다. 리 빅토르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다. 할아버지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나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리 빅토르씨의 아버지는 그곳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나 자랐다. 리 빅토르씨가 나고 자란 곳도 우즈베키스탄의 한 고려인 마을이었다. 그는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문화를 알아간 것 같다"며 "할머니가 러시아말을 잘하지 못하고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하셨는데, 어린 시절 대화하면서 한국말도 조금씩 하게 됐다"고 말했다.리 빅토르씨는 사범대학에 진학해 한국어문학과를 선택했다. 졸업 후에는 여행사와 골프장 등에서 우즈베키스탄에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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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손잡은 업체만 1700여 곳 경영지원플랫폼 기업… 임각균 이트너스 대표이사 지면기사
어느 스타트업이 그렇듯, 이트너스의 시작도 미미했다. '이게 과연 될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는 없어도 생존이 달려있기에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실패할 지도 모르지만 아주 작은 가능성에 기대 달려오길 24년, 지금은 매출 1천억원에 달하는 기업의 대표로 대한민국 경제의 심장 판교 한복판에 섰다. 새해의 시작점, 판교에 있는 이트너스 본사에서 만난 임각균 대표이사는 "20년 이상을 노력해왔는데 여전히 부족한 느낌"이라면서도, 새해에 시도할 프로젝트를 이야기할 때는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판교에 대해 말할 때는 자못 진지하게 개선점을 언급하기도 했다.#월급쟁이, 1천700여 기업들의 '1번 파트너' 되기까지하나의 기업을 운영하는 데는 아주 많은 일들이 수반된다. 직원들에게 정확하게 월급을 줘야 하고 각종 후생복지도 이뤄져야 한다. 거래처 대금이 밀리거나 물건이 제때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막아야 한다. 실수 없이 해내야 하지만 신경 써야 할 일은 갈수록 늘어나고, 하나하나 사람 손으로 하다 보면 간혹 틈도 발생한다.이트너스는 이런 기업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는 경영지원플랫폼 기업이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필요한 복지를 적절하게 제공하는 일을 이전에는 모두 사람 손으로 일일이 해야 했다면, 이를 디지털화할 수 있게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게 이트너스의 주 업무다. 기업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여러 서비스도 제공하는데, 이를테면 해외에 주재하는 기업 직원들에게 김치 등 국내 물품을 배송해주는 일이다. 이트너스와 손잡은 기업만 1천700여 곳. 말 그대로 기업들을 위한 기업이다.지난해에는 각 산업별 발전에 기여한 기업인들에게 수여하는 산업포장을 받는가 하면, 중소벤처기업부·중소기업중앙회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이 분야에선 최고임을 인증받은 셈이 됐지만 24년 전 창업에 뛰어들 때만 해도 막막했다. IMF 바람을 피하지 못했던 월급쟁이가 가진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 하나뿐이었다."원래 월급 주고 비용을 정산하는 업무는 지극히 아날로그였는데 1998년 그때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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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12년만에 유도 9단 '유성의 반열' 김도현 인하체육인회 회장 지면기사
김도현 인하체육인회 회장이 유도 입문 60년 만에 공인 9단에 올랐다. 대한유도회는 정기승단심사를 통해 김도현 회장의 9단 승단을 결정했으며, 지난 11월 말에 단증을 교부했다. 김 회장은 8단 승단 이후 12년 만에 9단에 오르며 '유성(柔聖)'의 반열에 섰다.이로써 인천광역시의 유도 9단은 김 회장까지 3명으로 늘었다. 전국에서 유도 9단은 각 광역시·도에 2~3명 정도 있다고 보면 된다. 유도에서 9단 승단이 이처럼 힘든 이유는 단순히 유도를 잘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유도에서 5~6단 정도면 실질적인 기술은 모두 익혔다고 말한다. 그 이상은 유도 발전의 공헌과 훌륭한 인격 등 기술 외적인 요인들이 조건으로 작용한다. 유도에서 최고의 단인 9단이 되기 위해선 유도부(팀) 창단을 비롯해 새 기술을 만들어내거나, 지역 체육 발전에 공헌하는 등의 활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평택에서 출생한 김 회장은 평택중 입학 후 1학년 때 접한 유도에 심취했다. 김 회장은 "남들은 보름 동안 익힐 낙법을 하루 만에 다 배웠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면서 "당시 너무 무리했는지 며칠 후 쇄골이 부러졌는데, 집에서 알면 운동을 못 하게 할까봐 아픈 것을 감추고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동급생보다 덩치가 컸던 김 회장은 2~3세 많은 고교 선배들과 운동을 같이했고, 기량도 그만큼 빨리 향상됐다. 때문에, 동급생과 경기에선 진 적이 없었다.평택고에 진학한 김 회장은 당시 경기도 제1의 도시였던 인천시에서 열리는 대회에 종종 나섰다. 당시 경기도 학생 유도는 평택고와 인천 송도고가 양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교의 맞대결은 빈번했으며, 라이벌 의식도 상당했다.김 회장은 1968년 인하대(당시 인하공과대학) 응용물리학과에 입학했다. 체육 특기자가 아닌 입학시험을 통해서였다. 대학에서도 학업과 유도 선수로 활동을 병행하며 1학년 때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3위에 입상하는 등 성인 무대에서도 기량을 인정받았다. 군 복무 후 복학해선 일선 체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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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벼랑 끝 서민경제 살리기에 안간힘… 이민우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 지면기사
위기는 경제적 빈곤을 가속한다. 어떤 역사를 봐도 위기의 결말은 경제의 위기였다. 경제 위기는 사회체계 속 가장 연약한 곳을 찌른다. 빈곤한 이를 더 빈곤하게 하고, 한없이 비참하게 한다. '얼마 저러다 말겠지' 싶었던 코로나19가 우리 서민경제의 폐부를 후비는 것도 마찬가지다. 감기에도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확인하는 게 요즘의 일상이다. 이런 때, 제 역할을 해내야만 하는 이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선 서민경제를 안간힘을 다해 붙잡아 마지막 버팀목이 돼주어야 하는 사람들. 경기신용보증재단(이하 경기신보)의 이민우 이사장을 만났다.얼굴을 마주하자 이 이사장은 내년 3월이면 도래할 소상공인·중소기업 대출상환부터 걱정했다. 지난해 4월 코로나19로 매출 하락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중소기업을 위해 정부에서 대출만기를 총 3차례 유예했고 3번째 유예 조치가 종료되는 시점이 내년 3월이다.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심각해지는 현재 코로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이사장은 "연착륙 대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일성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코로나 장기화로 3개월 앞당겨 채권 소각절차 4586명 대상으로 진행보증심사기준 완화 공격적 금융 지원… 리스크 관리 조직 확대 개편도중기 ESG경영 도입 준비하는 게 맞아… 우리 경기신보부터 변화해야 서민경제라 일컫지만, 소상공인·중소기업은 우리 경제의 근간이다. 지금 이들은 어떤 상태일까. 이 이사장은 한마디로 "최악"이라고 단언했다. "지난해 초 우리 모두 코로나가 2년이나 길어질 거라곤 생각을 못했어요. 게다가 지금은 3년차를 바라보는 상황이 됐습니다. (소상공인·중소기업들은) 지난해엔 그동안 벌어둔 돈을 가지고 일단 급한 불을 껐습니다. 근데 계속 길어지니 올해는 빌려서 자금을 융통해서 버텼습니다. 소상공인 대부분 최저 생계비를 빌리기 위해 대출로 버텼는데, 이제 내년엔 어떻게 할 것이냐가 정말 문제입니다. 지난해와 올해 통틀어 경기신보에서도 10조 가까운 보증액이 경기도 내 소상공인·중소기업 자금으로 풀렸어요. 그만큼 가계부채가 늘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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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엔지니어 출신 1세대 CEO' 이영재 (사)남동국가산업단지경영자협의회 회장 지면기사
"기업환경 개선을 위한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영재(69) (사)남동국가산업단지경영자협의회 회장의 다짐이다. 이영재 회장은 40년 넘게 제조업체를 운영해온 엔지니어 출신의 1세대 경영인이다. 창업은 서울에서 했는데 회사가 커지면서 더 넓은 부지를 찾아야 했고, 1990년대초 남동산단에 자리를 잡게 됐다.이영재 회장은 "남동산단에서 회사를 운영하면서 자녀들 공부시키고, 집안 형편도 나아졌다. 남동산단에 입주해 그동안 많은 혜택을 받은 것 같다. 기업이 돈만 버는 게 목적은 아니다. 인천이 제2의 고향이 된 만큼 지역 사회와 남동산단 입주기업들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고, 나름의 역할을 하고 싶다"고 했다.■ "뿌리산업의 핵심. 청년 외면 아쉬워"제조업은 '가장 오래된 미래기술'로 불리는 뿌리산업의 핵심으로, 우리나라 선진국 대열 진입에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제품을 만들 때 기본이 되는 금형, 사출 등 기술력은 지속적으로 발전했고, 어느 순간 선진국을 앞서게 됐다. 이영재 회장은 "뿌리기술이 가장 밀집돼 있는 곳이 남동산단"이라며 "남동산단의 발전이 곧 인천과 국가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남동산단은 1980년 인천 남동구 남촌동·논현동·고잔동 일원 부지에 지정돼 1985년부터 1997년까지 단계적으로 조성됐다. 현재 총 957만4천여㎡ 부지에 7천여개 업체가 입주해 10만3천여명이 일하고 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인 2019년엔 27조6천여억원의 생산액과 48억1천만 달러(약 5조6천900억원)의 수출액을 기록했다. 수도권을 대표하는 국가산단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남동산단에 대한 자부심이 큰 이영재 회장이지만 아쉬움은 있다. 그는 "남동산단 입주업체들은 약 95% 정도가 5~30인 이하로, 영세 업체들이 많다"며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돈도 많이 못 버는 그런 인식이 확산하면서 젊은 청년층들이 외면하는 지역이 되고 있다"고 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따르면 남동산단 입주기업 1곳당 청년 고용인원은 남동산단의 경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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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공감] 주방용품 CEO에서 나눔문화 선봉장으로… 이순선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 지면기사
1984년 무교동에 등장한 구멍 뚫린 삼겹살 불판은 평범한 40대 주부를 수출 금자탑을 달성한 주방용품 회사 CEO로 만들었다. 또 인생의 절반가량을 살았을 무렵 찾아온 극적인 생애 전환은 그를 기부문화로 이끌었다. 경기도 기부문화의 선봉장, 이순선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회장이 '불판 나비효과'의 주인공이다.매년 12월이면 수원시 팔달구 매산로의 도청오거리엔 '사랑의 온도탑'이 세워진다. '사랑의 열매'로 널리 알려진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연말연시 기부의 목표 달성을 확인하기 위해 만든 조형물이다. 코로나19로 2년째 조촐한 온도탑 행사가 열린 지난 1일, 경기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실에서 이순선 회장을 만났다.이 회장의 삶은 전반전과 후반전이 나뉜 축구경기처럼 확연히 구분된다. 아들 둘에 경찰 공무원 남편을 둔 평범한 가정 주부로서의 삶이 전반부라면 성공한 주방용품 회사 CEO로 해외 수출에 앞장서며 기부에 몰두하는 것이 후반부다.삶의 극적인 반전은 1984년 시작됐다. 큰아들이 고등학생, 작은아들이 중학생이었던 시기였다. 지금은 흔해진 '필수 아이템'인 구멍 뚫린 삼겹살 불판을 만들어 발로 뛰며 영업에 나선 것이다. 대상은 서울 중구 무교동 일대의 삼겹살 가게였다. 기름 빠지는 삼겹살 불판이 처음부터 호응을 받았던 건 아니다.식당에 가서 5개 세트로 구매하면 1개를 끼워 넣어주는 영업을 하는가 하면 무쇠 불판의 표면 코팅이 까지면 무료로 교환해주는 서비스까지 제공했다.이 회장은 "당시에 무쇠 불판을 만드는 공장이 뚝섬에 있었어요. 삼겹살 가게는 아무래도 장사하는 곳이니까 불판을 살살 다루지 않거든요. 얼마든지 문지르고 씻고 쓰고 싶은 대로 쓰고 나중에 요청하면 공짜로 새 걸로 바꿔줬죠. 쇳물을 부어 주물로 불판을 만드니까 쓰던 불판을 가져다가 다시 녹여서 새것으로 만들면 그만이었거든요. 그렇게 가게와 공장을 오가면서 영업을 했더니 식당하시는 분들도 믿고 많이 사더라구요"라고 회상했다.1984년 사업을 시작해 1985년 사업자 등록을 하고 1994년 법인을 설립하기까지 과정이 순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