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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호근 칼럼]아버지의 아버지생각

    [전호근 칼럼]아버지의 아버지생각 지면기사

    커다란 고무신 물끄러미 바라보며할아버지 그리워하던 아버지 얼굴그후로 기억에서나마 만날수 있어공광규 시인 '소주병' 뜻밖에 읽고초라해진 나의 부친 초상과 같았다"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가 읽던 책을 읽지 못하는 것은 손때(手澤)가 남아있기 때문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쓰던 그릇을 쓰지 못하는 것은 입때(口澤)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유학의 고전 '예기'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왜 아버지의 경우에는 '책'이고 어머니의 경우에는 하필 '그릇'을 예로 들었는지 다소 유감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 문제를 따지는 일은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어쨌거나 이 말은 지금 곁에 없는 어떤 사람을 추억하는 데 평소 그가 애용하던 사물이 때로 긴요한 역할을 한다는 작은 진실이 담겨 있으니 말이다.나에게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 있다. 나는 중학교 시절 이후로 지금껏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이곳에서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어릴 때부터 집을 떠나 서울에서 홀로 생활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서울에 오신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학교에서 학부모 면담이라도 하게 되면 아버지가 올라와서 선생님을 만나곤 했고 그런 경우는 일 년에 한두 번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지는 생전에 서울 땅을 밟아본 적이 별로 없었다.아무튼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적 진학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아버지가 서울에 왔을 때의 일이다. 둘이서 시장 길을 지나고 있었는데, 문득 아버지가 보이지 않기에 뒤돌아보았더니 아버지는 어느 가게 앞에 우두커니 서 계셨다. 뭘 보시나 했더니 아버지의 눈길은 신발 가게에 진열된 커다란 고무신에 멈춰 있었다. 그리곤 혼자 말처럼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저 고무신을 사다 드릴텐데…" 하셨다.어촌의 농사꾼이었던 할아버지는 발이 유난히 컸다. 그 때문에 꼭 맞는 신을 구할 수 없어서 고무신 뒤축을 가위로 잘라서 신고 다니기 일쑤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장이 들어서는 날이면 큰 고무신을 찾아 돌아다니곤 했지만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라 할아

  • [전호근 칼럼]어벤져스와 초원의 집

    [전호근 칼럼]어벤져스와 초원의 집 지면기사

    예나 지금이나 '히어로물'에 열광원더우먼등 에피소드는 기억 안나가족이야기 다룬 '초원의 집' 인상공동체의 평화, 영웅의 헌신 아닌가난한 사람 협력으로 지켰기때문마블 스튜디오에서 만든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6일 한국 관객 수 천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번 작품은 동명의 시리즈뿐 아니라 영화 역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할 전망이란다. 영화의 줄거리는 기존의 히어로물과 별 차이가 없다. 캡틴 아메리카를 비롯하여 아이언맨, 토르, 헐크, 호크아이, 블랙 위도우 등 이른바 슈퍼히어로들이 한 팀이 되어 악의 세력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는, 매번 같은 이야기다.예나 지금이나 히어로물에 열광하는 이유는 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만큼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들 개인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곤경에 처했을 때 어디선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영웅이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다만 전에는 탁월한 히어로 한 명이면 너끈히 지구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만큼 악의 무리도 힘이 커져서 한 명으로는 턱도 없다. 이른바 드림팀을 이뤄서 단체로 달라붙어야 간신히 이기는 지경이 된 것이다.나 또한 어린 시절부터 이런 종류의 드라마를 자주 보았는데 중학생 무렵에는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 '원더우먼' 등 주로 초능력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다. 매주 빼놓지 않을 정도로 즐겨 보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단 한 개의 에피소드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매번 지구를 구하는 식상한 이야기가 반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반면 당시 미국 드라마 중 서부 개척시대의 가족이야기를 다룬 초원의 집은 그다지 자주 보지 않았는데도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몇 개 있다. 그중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이야기를 소개한다.어느 날 주인공 소녀의 아버지가 거부였던 먼 친척으로부터 상속을 받게 되자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하던 마을에 심상찮은 변화가 일어난다. 아버지는 졸지에 유명인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극진한 대우를 받는가 하면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 [전호근 칼럼]늦게 도착한 시집

    [전호근 칼럼]늦게 도착한 시집 지면기사

    석달 지나 발견한 '파일명 서정시'쉽게 꺼낼 수 없는 두려운 말 가득표현하지 못하고 소리·가락 이룬 것 파일서 해방돼 시어 만끽하고 싶어그러기엔 다물어야 할 입 너무 많다며칠 전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경기도 용인)에 갔다가 어지럽게 뒤섞인 행정실 우편물 더미 속에서 나희덕 시인이 보내온 시집 《파일명 서정시》를 발견했다. 겉봉의 우체국 소인에는 분명히 '2018.11.23'이라 찍혀 있는데 대관절 어찌하여 석 달도 더 지난 지금, 계절마저 바뀐 뒤에야 내게 왔단 말인가. 게다가 적힌 주소는 서울 회기동인데 어디를 떠돌다가 이곳으로 배달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태 전 시인의 산문집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달, 2017)를 읽으며 사소한 일상에서 커다란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글에 감탄했던 나는 이번에도 비슷한 기대감을 품은 채로 시집을 펼쳤다가 그만 아픈 데를 찔린 병자처럼 지금껏 움찔거리고 있다.나는 시인이 이전에 펴낸 또 다른 서정 시집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 서정시라는 말에 어울릴 만큼 하나같이 아름다운 시어들로 가득한 시집들이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는 쉽사리 입에서 꺼낼 수 없는 두려운 말들로 가득하다. 후기에는 시인의 고백이 이렇게 적혀 있다."이빨과 발톱이 삶을 할퀴고 지나갔다 / 내 안에서도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말들이 돋아났다 / 이 피 흘리는 말들을 어찌할 것인가 / 시는 나의 닻이고 돛이고 덫이다 / 시인이 된 지 삼십년 만에야 이 고백을 하게 된다"닻과 돛과 덫. 세 단어의 받침에 웅크린 'ㅊ'이 마치 가시처럼 보였다. 과연 시에는 상처 자국이 선연하다. 그래, 가시가 여기저기 걸려서 오는 길이 이렇게 험하고 더디었구나. 닻은 내리고 돛은 올리고 덫은 걸리는 것이다. 시인은 어쩌면 돛을 올려 다다르거나 닻을 내리고 잠시 머무는 장소를 찾으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읽히는 시(<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여기서는 잠시>)가 드문드문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이 어디든 덫에 걸려 몸부림 친 흔적이 역력하다. 덫은 땅 위(<

  • [전호근 칼럼]베르메르와 쉼보르스카와 희망

    [전호근 칼럼]베르메르와 쉼보르스카와 희망 지면기사

    그림속 '우유를 따르는 여인' 만큼사회 노동자들이 하는 일 매우 중요연간 1천여명 작업장에서 죽어가기계로 인해 일터에서 목숨잃는 한 우리에겐 희망을 가질 자격 없다2012년 세상을 떠난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네덜란드 레이크스 미술관에 간 적이 있다. 시인이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작품을 감상했는지 알 수 없지만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 '우유를 따르는 여인' 앞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기 때문이다.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 단지에서 그릇으로 /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베르메르, 최성은 옮김)시인은 베르메르의 그림에서 고요와 집중을 읽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림의 장소는 하녀가 일하는 주방이다. 비록 테이블 위에 놓인 빵에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앉고 있지만 그림의 작업장이 고요하거나 따뜻할 리 없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 놓여 있는 발난로를 보더라도, 장식이라곤 없는 벽을 보아도 그곳은 춥고 지저분하며 시끄러운 곳임에 틀림없다.그러나 시인은 그림 속의 풍경에서 우유가 쪼르르 흘러나오는 소리를 또렷이 들었을 것이다. 그림 속의 여인이 따르는 우유와 테이블 위에 놓인 빵은 아마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닐 게다. 그럼에도 하얗고 가느다란 우유 줄기에서 그녀의 집중이 분명히 보인다. 그것은 누군가를 공양하기 위한 그녀의 정성이자 세상을 지탱하는 숭고한 힘이다.그러기에 시인은 저 여인이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다"고 받아 적은 것일 테다.아름다운 그림 한 폭과 그에 맞춤한 아름다운 시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이 이야기를 지배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저 여인에게 이 일이 이토록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니까 너는 평생 우유나 따르라고 이야기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순식간에 성자는 노예가 되고 숭고는 마취제가

  • [전호근 칼럼]편지

    [전호근 칼럼]편지 지면기사

    3년전 수강생 졸업 앞두고 보낸 안부훌쩍 성장한 향기로운 소식 읽으며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 생각했다1학년 학생들 마지막 시험후 인사그 모습 사랑스럽고 대견해 보였다3년 전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 졸업을 앞두고 편지를 보내왔다. 종종 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지만 이처럼 훌쩍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혼자 읽기 아까워 이곳에 나눈다.안녕하세요 교수님. 저는 2015년 1학기에 경희대에서 교수님의 고전읽기 강의를 수강했던 연극영화학과 학생입니다. 저는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으며 학교생활을 돌아보던 중 제게 가장 큰 인상으로 남은 분이라 이렇게 안부 차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성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학생이라 아마 절 기억하지는 못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난이 깊은 풀숲에 있어 찾는 사람이 없다고 하여 그것이 향기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라는 공자의 말을 자신의 사유로 풀어내는 것이 기말 시험이었습니다.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저는 신동엽 시인의 '오렌지'를 말머리에 쓰고 외부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을 글로 썼습니다. 또 제가 예술을 하는 것과 여성인 자신을 인정하기 위해, 나의 향기를 긍정하기 위해 누군가의 코가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덧붙였습니다. 사실 저는 유학을 비롯한 한국철학에 흥미가 없던 학생이었고 당시 교수님의 수업도 학점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강했습니다. 한국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왠지 보수적이고 정체되어 있을 것 같다는 편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그토록 중시하는 '인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답변을 유학 고전강의에서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교수님은 인간을 정의하는 것은 두 개의 팔과 다리가 존재하고, 말을 할 수 있으며, 남성과 여성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등 그런 다수의 보편성에 기대는 분류가 아니라 스스로 누군지 알고 그 정체성에 충실한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강의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 [전호근 칼럼]빛이 된 두 사람

    [전호근 칼럼]빛이 된 두 사람 지면기사

    참형 당한 동학 1대 교주 '최제우'제자 최시형이 후천개벽 시점 묻자"때가 있으니 마음 급히 하지 말라기다리지 아니하여도 자연히…"그의 말은 절망의 시대 비추는 '빛'1864년 3월 10일, 경상도 대구의 관덕정 뜰에서 동학의 1대 교주 수운 최제우가 참형에 처해졌다. 사도를 일으켜 정도를 어지럽혔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이었다. 그의 나이 41세, 동학을 창도한 지 3년 만이었다. 그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등불이 물 위에 밝았으니 의심이 없고(燈明水上無嫌隙) 기둥이 마른 것 같지만 아직 힘이 남아 있다(柱似枯形有餘力)."최제우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제자 최시형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861년 여름이었는데, 이후 최제우는 최시형의 득도를 인정하고 1863년 7월 23일에 그에게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바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등불이 물 위에 밝았다"는 말은 바로 바다 위에 떠오른 달 '해월(海月)'을 가리키는 비유다.최제우가 최시형에게 도를 전수하게 된 데는 깊은 내력이 있다. 최제우가 관의 지목을 피해 전라도 남원으로 피신했다가 몰래 경주로 돌아와 은신하고 있던 1862년 봄의 일이다. 스승의 종적을 알 수 없게 된 최시형이 스승을 그리워하며 수행하던 중, 반 종지의 기름으로 스무하루 동안 밤을 새우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그때의 체험을 이렇게 이야기했다."임술년(1862) 정월이었다. 여러 달 동안 밤이 새도록 등불을 켰기 때문에 기름이 반 종지밖에 남지 않았다. 다시 스무하루 동안 밤새움을 했는데도 기름이 닳지 않았다. 이로써 마음에 '자연의 이치'가 있음을 알아차렸다."이렇게 마음에 있는 '자연의 이치'를 터득한 그는 누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스승이 있는 곳을 알고 찾아가게 된다. 최제우는 그가 찾아오자 깜짝 놀랐다. 당시 최제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그가 아직 전라도 어딘가에 피신하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기

  • [전호근 칼럼]위대한 패배

    [전호근 칼럼]위대한 패배 지면기사

    1907~1910년 일제강점기 의병들맨몸으로 일본군 신식무기에 맞서이길 수 없는 전쟁 치른 이유는억압하고 핍박하던 못난 나라도자유로운 삶 위해 지켜야했기 때문"다 죽는구나. 다 죽어."드라마를 보던 아내가 길게 탄식을 내뱉는다. 무슨 드라마인가 물었더니 한말 의병과 관련된 이야기를 배경에 깔고 있는 '미스터 션샤인'이라며 줄거리를 간단하게 이야기해준다. 이야기를 들은 나는 이 드라마가 의병운동의 실상을 제대로 그려냈구나 싶었다. 동학 농민 전쟁부터 시작해 한말의 의병 운동은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1년여 전 나는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개최한 학술대회에 참가하여 장일순의 평화사상을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함께 학술대회에 참여했던 동학연구자인 원광대 박맹수 교수는 '전봉준의 평화사상'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다. 나는 박교수의 발표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전쟁이라고 생각했던 전봉준의 무장투쟁이 실제로는 일방적인 피학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박교수가 발굴한 자료에 따르면 전봉준의 지휘에 따른 농민군은 전쟁 내내 철저하게 불살생(不殺生)의 원칙을 지켰다. 전봉준이 내린 군령의 첫 번째 조항에는 적을 마주할 때 병기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이기는 것을 으뜸가는 공훈으로 삼는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 어쩔 수 없이 싸우더라도 결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친다는 내용과 함께 행군하는 곳마다 절대 백성들의 물건을 해하지 말라는 명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도무지 군령이라고 볼 수 없는 내용이다.실제 동학농민군을 시종일관 비판적인 입장에서 기술했던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에 따르더라도 1차 동학 농민혁명당시 농민군은 민폐를 전혀 끼치지 않은 반면, 서울에서 파견된 홍계훈의 경군은 막대한 민폐를 끼쳤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도쿄아사히 신문', '시사신보' 등 일본측 신문에도 일본 상인 가운데 농민군에게 피해를 입은 상인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조선잡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규율을 두고 '문명적'이라고 기술하기도 했다.그날

  • [전호근 칼럼]어느 가족이 본 '어느 가족'

    [전호근 칼럼]어느 가족이 본 '어느 가족' 지면기사

    '혈연 아닌 서로 필요해서 산다'는영화속 다섯명의 주인공들마지막 장면에서는 서로를 위해자신이 가장 소중한 것을 준다내가 본 '유일한' 가족 영화였다며칠 전 가족과 함께 집 근처 영화관을 찾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을 보기 위해서다. 당초 식구 넷이 다 같이 편안하게 즐길 만한 영화로는 적당치 않을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염려가 없지 않았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지만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기에는 적잖이 불편한 장면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가족 모두 어엿한 성인인데다 의견 일치가 쉽지 않은 우리 가족의 특성상, 모처럼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드문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가족 간 의견 일치가 어떻게 쉽지 않은지 궁금해하실 분이 계실 것 같아 잠시 옆길로 새자면, 우리 가족은 좋아하는 음식도 각기 다르고, 독서나 음악 취향도 모두 다르며 세대 차이도 꽤 심각한 편이다. 무엇보다 밥상머리 대화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는 잘 듣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끝까지 해대는 통에 번번이 논쟁이 일어나 서로 얼굴 붉히기가 십상이다.이처럼 모래알 같은 가족이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어느 가족'을 보는 데 찬성했으니 영화를 보기도 전에 고레에다 감독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졌다.'어느 가족'은 원제가 '만비키 가족(万引き家族)'이다. '만비키'는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훔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원제를 우리말로 옮기면 '좀도둑 가족' 정도가 된다. 제목만 놓고 보면 가족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가족파괴 영화라 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직업으로 간주할 수 없는 도둑들의 이야기가 어찌 가족 영화일 수 있단 말인가.게다가 주인공들 중 사회가 용인하는 정상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가족 구성원 중 남편 역할을 하는 오사무는 아이를 시켜 가게의 물건을 훔치게 하고 때로 자동차의 창문을 부수고 직접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아내 역할을 하는 노부요는 세탁소에서 일하지만 세탁물에 잘못 딸려온 고객의 물건을 수시로 훔친다. 딸 역할을 하는 아키는

  • [전호근 칼럼]정성껏 물을 주면

    [전호근 칼럼]정성껏 물을 주면 지면기사

    모든 교육과정 대입위한 수단 간주연령대별 익혀야 할것들 팽개쳐 둬싹 자라기는 커녕 더 말라가기만사회구조 바뀌지 않는한 파행 지속유일한 방법은 학생들 변화시켜야송나라의 어떤 사람이 곡식 싹이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을 답답하게 여긴 나머지 조금씩 뽑아 올려주었다. 그는 집에 돌아가서 가족에게 곡식이 자라는 것을 도와주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아들이 깜짝 놀라 뛰어가 보니 싹은 이미 말라죽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는지 묻는 제자에게 맹자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른바 알묘조장(알苗助長, 싹을 뽑아 자라는 것을 도와줌)의 고사로 '맹자'에 나온다. 호연지기는 한 사람이 올바른 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일종의 도덕적 끈기와 유사한 것으로 플라톤이 이야기한 용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한 철학자답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것이 양심(良心)이다. 하지만 양심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얽히면 쉽사리 양심을 저버리고 이익을 취하기 일쑤다. 양심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연지기는 이런 양심을 떠받치는 힘이다. 그러므로 호연지기를 기르지 않으면 양심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올바른 행위를 할 수도 없게 된다.맹자가 예로 든 알묘조장의 뜻은 이렇다.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는 곡식 싹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세상 사람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속성으로 기르다보니 호연지기가 길러지기는커녕 도리어 말라죽고 말았다는 얘기이다. 맹자는 이어 세상에 조장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고 탄식했다.지금 이 나라의 교육자나 학부모 중에도 아이들의 싹을 뽑아 올리는 조장(助長)을 하지 않는 이가 드물다. 모든 교육과정이 대학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어 연령대별로 꼭 익혀야 할 것은 팽개쳐 두고 오로지 대학입시를 위한 학습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조장도 이런 조장이 없다. 그러니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 대부분이 말라죽어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대학도 조장에 나서긴 마

  • [전호근 칼럼]시인(詩人)을 존경한다

    [전호근 칼럼]시인(詩人)을 존경한다 지면기사

    시는 갑자기 찾아오는게 아니라시인으로 사는자에게만 다가오는것겨울과 강·나무와 풀 늘 말 걸지만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두 귀가 순해진 시인뿐이다언젠가 나를 소개하는 글 끄트머리에 "가난한 시인을 존경한다"고 쓴 적이 있다. 그 무렵 '책 읽는 사회 문화재단'에서 주관하는 시 낭송회에 참석하기 위해 동숭동에 있는 일석기념관에 갔다가 이모 시인을 만났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가난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내가 왜 자신을 멀리하는지 비로소 알았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슬쩍 넘어갔지만 아무래도 내 글이 부담을 준 것만 같아 지금까지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이 남아 있다.나는 늘 시인이 부러웠다. 나도 시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깜냥으로는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시를 많이 읽다 보면 마침내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백석과 윤동주, 김수영과 기형도의 시를 읽고 또 읽었다. 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칠레의 시인 네루다도 시에서 이야기하길,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며,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시인조차 시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말한 셈이니 그저 난감하기만 했다.그러다가 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의 글을 읽고 난 뒤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도정일 선생은 시인이 세상을 향해 뭔가 보여주고 싶을 때, 이를테면 나무라든가 구름, 당나귀 같은 것을 보여주고 싶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그냥 한 사람의 시인으로 사는 것이라 했다.('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문학동네) 요컨대 시인으로 살면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가, 수필가, 화가는 '가'이되 시를 쓰는 사람만큼은 '시인'이다. 그가 갖고 있는 재주가 아니라 그냥 온전히 존재 자체가 시인 사람, 시인이라서.방법을 알았지만 또 다른 어려움에 부딪쳤다. 시인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 시인이 아닌 나로서는 도무지 알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