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with+
칼럼니스트 전체 보기-
[with+] 만해 한용운과 '님의 침묵' 지면기사
불교 상상력 형이상학적 가치 노래독자에 사랑받는 대표작 '님의 침묵' 이별의 슬픔 비감한 감정 빠져들어슬픔의 힘, 운명 맞서는 인간 역동성 비극적 운명 초극하는 의지 돋보여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남 홍성에서 출생했다. 3·1 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줄기차게 불교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다. 여러 논문과 장편소설을 쓰고 불교서적을 저술했다. 장편소설 '흑풍' '후회' 등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불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형이상학적 가치를 주로 노래했다. 시집으로 '님의 침묵'이 있다.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위키백과)'님의 침묵'은 첫 행부터 비감한 감정에 빠져든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전개된 첫 행은 복받치는 이별의 감정을 드러낸다. 푸른 산빛과 붉은 단풍나무의 대립이 이별하는 님과 나의 조응으로 읽히면서 별리의 아픔이 더 깊어지는 듯하다. 여기서 푸른빛은 님과 사랑하던
-
[with+] 로켓의 속도를 포기하면 지면기사
건설현장보다 배로 힘든 쿠팡 심야조자본주의 속도전에 죽어나는 노동자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감시·견제해야 불편하지만 속도의 편리함 포기하고 모두에게 안전한 노동환경 개선 필요어릴 적부터 로켓은 빠른 속도의 상징이었다. 불을 뿜으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로켓은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던 지구의 중력을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빨랐다. 그래서 누군가 매우 빠르다고 말할 때, '로켓'처럼 빠르다고 이야기했고 악당 로봇을 무찌르는 빠른 주먹도 '로켓' 주먹이라고 불렀다. 굳이 물리의 법칙을 떠올리지 않아도 속도가 빨라지면 힘의 크기가 늘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렇지만 그 힘을 책임감 없이 함부로 사용하면 누군가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게 되고 그게 바로 로켓 주먹을 맞는 악당이 된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쿠팡에서 심야조(밤 9시~새벽 6시)로 일한 적이 있다. 원래 밤에 글을 쓰는 올빼미족이라 졸릴 걱정 없고, 코로나 때 폐업했지만 체육관에서 주짓수를 가르치던 시절에 매일 생업으로 운동을 해왔던 터라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새벽 물류 일을 하러 나가보니 컨베이어 속도에 맞춰 상·하차 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생계 때문에 종종 다니던 건설현장보다도 배로 힘들었다. 중간에 딱 한 번 30분 쉬고 새벽 내내 쉬지 않고 일했다. 반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일이 손에 익어 할만 해지면 컨베이어에 물건을 더 많이 쏟아서 속도를 높였다. 숙련자가 많아 할당 물량을 빨리 끝낸 그룹은 쉬는 것이 아니라 높은 층에서 지켜보던 관리자가 물류가 쌓인 곳으로 이동시켜서 계속 일하게 했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도착하는 로켓의 속도는 시스템이 아니라 물류 노동자들의 땀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냉방 장치는 없었고 선풍기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없고 차가 수시로 드나드는 개방된 곳이기에 냉방뿐 아니라 겨울에 난방이 제대로 될 리도 없었다. 일당이 세다고 해서 갔던 건데 손에 쥔 돈은 9만원을 조금 넘었다. 뉴스에선 쿠팡에서 계속 사람이 죽었다. 로켓배송은 없
-
[with+] 그때처럼 지면기사
한때 친구들과 어디든 덜컥 다녀어느 순간 결혼·출산 10년이 훌쩍떠나는 법 잊은 나, 문득 여행 제안"오랜 만에 여행, 하나도 겁 안 나""여행 뭐가 겁나, 인생이 겁나지"드라마 작가 A와 마케팅회사에 다니는 B는 한때 나와 가장 자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었다. 가장 일하기 싫은 목요일 오후쯤이 되면 슬그머니 여행사 홈페이지를 열어두고 마우스를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칭따오 먹태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러시아 현지에서 마시는 보드카도 정말 낭만적일 것 같지 않아?", "신주쿠 고루덴가이라는 곳엔 진짜 끝내주는 튀김집이 있대." 하릴없이 그런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대부분은 덜컥 결제를 해버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절 칭따오도, 블라디보스톡도, 도쿄도 아무렇게나 떠나곤 했다. 여행뿐이 아니어서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빼먹지 않고 챙겨주었고 가끔, 아주 가끔 누군가가 쓸쓸하다 하소연하면 가장 빨리 달려와 주었다. 종교인도 아니면서 크리스마스이브는 반드시 같이 보냈고,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셋이서 발렌타인 17년산을 마셨다. "있잖아, 매일 그렇고 그런 선물 말고 조금 로맨틱하게, 목욕가운 같은 선물을 받고 싶어." 누군가 말을 꺼내면 누군가 반문했다. "무슨 날이기에 선물 타령이야?" 그러면 뻔뻔하게도 대답했다. "아무 날도 아닌데?" 아무 날이거나 말거나 우리는 목욕가운을 사주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투정을 부려 통 쓰잘 데 없는 커다란 곰 인형을 선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다 옛날얘기다. 웃자고 꺼낸 이야기라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추억담은 뭐랄까, 한물간 배우가 옛날 좋았던 시절을 온종일 주절대는 것 같아 청승맞았다. 어느 순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는 건 내가 그랬던 시절로부터 십 년을 훌쩍 뜀뛰기 했다는 거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다 추억 뜯어먹고 사는 거야." A와 B, 나는 칭따오보다 훨씬 맛없는 먹태를 동네 맥줏집에서 추억처럼 뜯어먹으며 투덜거렸다. "열 살이면 십대 아냐? 십
-
[with+] 이번 판은 무르고 지면기사
뻔한 악보다 착한 사람이 수수께끼결핍 없이 자랐다고 선해지지 않아부부가 황금 어떻게 쓰는지 보고프면행운의 여신이여 숫자 빼먹지 말고여섯 자리를 고대로 점지해주기를살다보면 친척은 아니지만 친척과 유사한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시댁인 속초에 갈 때마다 만나는 가족이 있다. 아이들끼리 노는 궁합이 잘 맞아 명절이나 방학에 속초에 가면 부러 시간을 만들어 한나절을 보낸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깊은 인상을 주었다. 보기 드물게 선한 사람들이라고 할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은 아니나 동네의 홍반장 노릇을 하며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이웃들을 살뜰히 챙긴다. 폭설에 제설작업이 미진한 골목길은 알아서 치우고, 손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서서 돕는다. 부부가 한마음으로 팀워크를 발휘하는데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 성격이라 나 같은 느림보가 보기에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다양한 일을 척척 해낸다.내게는 착한 사람들이 수수께끼다. 악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사랑의 부족과 결핍으로 인해 뒤틀린 인격, 자신에 대한 미움을 타인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내는 투사, 악의 플롯은 진부하다. 대체로 비슷비슷한 서사를 지녔기 때문이다.반면 결핍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반드시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칫 타인의 불운에 무지해질 우려, 자기가 누려온 것들을 당연시한 나머지 악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으니까. 무탈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비밀과 그늘이 없어 실존의 그림자가 옅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신기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힘든 성장기를 보냈는데도 주변에 밝은 빛을 드리우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종교인도 아닌데!여기 선희(가명)네가 그렇다. 이 부부는 둘 다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지나 공짜로 주어지는 것 하나 없는 치열한 청년기를 통과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라는 것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속초로 내려간 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려놓은 상태를 말한다. 남편은 에어컨을 설치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겨울에 미리 에어컨을 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고된 육체노동에 속한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 부부
-
[with+] 한강의 노벨상과 인쇄소 비명 지면기사
노벨상 덕에 출판계 좋아졌다 여겨현실은 한강 책만… 다른 책 안 나가 인쇄업계 젊은층 기피 3D업종 전락일거리 줄고 공실 늘어 공포감 만연'작별…' 주문 폭주에도 큰 감흥 없어이틀 전 아는 작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아무래도 한강은 전생에 지구, 아니 우주를 구했나 봐요. 출판사도 한강 덕택에 책 많이 나가죠?" 필자 역시 한강이 그런 상을 탄 것이 너무 놀랍고 기쁜 일이라고 맞장구를 친 뒤 "책이 전혀 안 나가요. 팔리던 책도 뚝 끊어졌는걸요"라고 대답했다. 이게 우리 출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판사들의 책을 보관하고 있는 물류업체 역시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다. "한강 책이 터져서 더 안 나가요. 사람들이 그것만 보는 거죠. 요즘, 사람들이 출판계통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개뿔' 좋아지기는…. 없어요. 경제가 엄청 좋으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겠지만, 이렇게 경기가 나쁜데 그것만 사야 하니까 다른 데 눈을 돌릴 수 있겠어요?"필자는 최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를 찍은 H인쇄소의 담당자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물론 노벨상 소식이 들려오기 전의 일이다. 그 담당자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가 좋은 시절이었고 지금은 인쇄업계가 3D업종(2교대 12시간씩)이라 워라밸을 외치는 젊은이들은 '야간근무'라는 말만 들어도 아예 발길을 돌린다고 했다. 그 인쇄소에서 가장 어린 직원이 44세! 내년과 내후년이 되면 인쇄기를 돌리는 기장(책임자)들이 정년(61세)을 하는데 후임자가 없어 퇴직자들을 계약직으로 계속 고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필자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책을 찍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눈이 침침하고 행동도 굼뜨고, 몸도 여기저기 아픈 퇴직자들이 계속 현장에 있는 건 인쇄사고가 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후속세대가 끊어지는 것이니 이보다 아득한 일이 또 없다.그렇지 않아도 근래 신간을 보면 확실히 예전보다 오류가 빈
-
[with+] 기형도와 심야극장 지면기사
누나 세상 떠난 무렵 시 쓰기 시작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29세 생일 엿새 앞두고 숨진채 발견처음이자 마지막 '입 속의 검은 잎' 한국 시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아기형도(1960~1989)는 1960년 3월13일 경기도 옹진군 안평리 392번지에서 태어났다. 3남4녀 중 막내였다. 부친 기우민의 고향은 연평도에서 건너다보이는 황해도 벽성군이었으나 6·25를 겪으며 당시 황해도 피란민의 주된 이동 경로인 연평도로 건너왔다.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면사무소에 근무하며 정착했다.1964년 일가족이 연평을 떠나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 현 광명시 소하동 701-6으로 이사했다.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가 되기도 하는 도시 배후의 근교 농업이 주를 이루는 농촌이었다. 1969년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져 전답을 팔아 약값으로 쓰고 모친이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 때 기형도 나이 열살이었으니 가혹한 시절이었다. 1973년 신림중학교에 입학했다. 3년 내내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1975년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깊은 슬픔을 갖게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중앙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3월에는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했다. 교내 문학 서클에 가입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했다.그해 12월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 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시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되었다. 이어서 1980년 3월 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했다. '80년의 봄'이 시작되어 철야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하고 교내지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했다가 형사가 학교로 찾아오는 등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81년 3월 병역관계로 휴학하고 부산과 대구 등지로 여행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연세대학교 교내 문학 서클인 '연세문학회'와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연세문예춘추'에서 제정하고 시상하는
-
[with+] 의자 앉기 지면기사
공항 봉사자·마트 계산원 보며 제일 먼저 '앉을 의자 있느냐' 생각 앉아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 어디서든 서서 일하는 사람 없도록지켜보고 '의자 없음'에 의문 가져야인천국제공항으로 출근하며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통로 입구 앞 안내 데스크에 계신 자원봉사자 어르신이다. 이른 아침부터 단정하면서도 멋스러운 정장 차림에 반백의 머리칼을 잘 빗어 차분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을 하시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안내를 해주시는 모습은 잠깐 스쳐지나갈뿐인 내 마음에도 친절한 사람의 호의를 마주하며 느끼는 기분 좋은 행복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서 계신 입식 단상 뒤에 의자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볼 때마다 서 계신 모습이어서 혹시 안내를 요청하는 여행객들이 없을 때에도 앉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사실 나의 의자 걱정은 유구하다. 대형 마트의 계산원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객들의 줄을 마주하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백화점의 의류매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직원들을 보면, 카페 BAR 테이블 너머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알바생들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앉을 의자가 있느냐'다.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앉기를 갈망하는가. 물먹은 솜뭉치마냥 늘어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아침 출근길의 전철을 기다리는 노동자는 먼저 온 사람들의 등 뒤로 길게 이어진 줄 끝에서 발을 구르며 얼마나 자리가 나기를 바라는가.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요행히도 금방 다음 역에서 내려 자리가 났을 때 급하게 엉덩이를 붙이는 사람의 얼굴은 얼마나 안온한가. 어린 밤 야쿠르트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다리가 잘라져 나가는 것 같구나"하시며 한숨을 쉬셨다. 선생은 죽은 듯 조용하지 않은 초등학교 교실의 아이들을 혼내주려고 한 시간 동안 서서 수업을 듣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의자를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라났다. 앉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자랐다.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일할 때였다. 새벽 3시부터 낮 3시까지 12시간을
-
[with+] 지구 불시착 지면기사
늦은 나이 출산… 산후우울증 겪어 어느날 발견한 오래된 사진 한 장 친구와 사진 속 식당서 만나 울컥우울한 시간 지나보니 무책임해져"다 지나갈 거야, 겪어보니 그래"가끔씩 내 생애를 둘로 쪼개보곤 한다. 쪼개는 시점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가장 합리적인 시점은 아무래도 출산이다. 나는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았고, 그러는 순간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만큼 큰 변화가 있었다. 짐작이야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뭐랄까, 나는 무인도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친구들은 자주 전화를 걸어 나와 아기의 안부를 물었고, 가족들은 아기를 보러 이전보다 더 자주 나를 찾아왔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아무 비행기도 날지 않는 하늘을 막막하게 바라보며 SOS 모닥불을 피워둔 기분이었다. 나를 발견해 줘. 내가 여기 있어. 그런 나 따위 아무려나 상관없다는 듯 푸르디푸른 하늘과 희디흰 뭉게구름이 정지 화면처럼 선 풍경."그거, 산후우울증이야. 다들 그래."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쉽게 생각했다. 곧 나아지겠지. 남들도 다 그랬다는데, 뭘. 유난인 척하기 싫어서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가만 긴 밤을 보냈다. 산후우울증이 저절로 괜찮아진 건가,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건가 판단하지는 못했으나 나는 말수가 준 사람이 되었고, 온종일 창밖 한 번 내다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산다니까 이런 삶도 나쁘지 않은 건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고 그랬던 어느 날, 나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웃음이 쿡 터졌다. 뭐 이런 사진을 다 찍었지? 사진 속 그날은 친구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단골 실내포차에서 만났다. 산오징어회를 만이천원에, 소라탕을 만오천원에 팔던 실내포차 이모는 우리에게 참말 살가웠다. 사실 우리 빼고는 손님도 없던 식당이었다. 천장이 낮은 식당이 들썩들썩 할 만큼 우리는 소란스럽게 놀았다. 이모는 쉴 새 없이 낙지를 볶고, 잔치국수를 끓이고, 소라탕에 소라를 더 넣어주었다. 헤어진 남자친구
-
[with+] 명랑만화는 왜 '명랑'일까? 지면기사
생각만해도 웃음나와서 '명랑'일까부담없이 물장구 칠수 있는 웅덩이그곳에서는 꺼벙이·둘리가 주인공 늘 소동 일으키지만 작은 승리 거둬정답 모르지만 질문만으로도 아득내가 만화를 처음 본 것은 글자를 익히기도 전인 여섯살 무렵이다. 고모네 집에 놀러갔는데 식사때가 되어도 만화방에 가서 오지 않은 사촌오빠를 찾아 나섰다. 오빠는 "마저 읽겠다"며 다 읽은 책 한권을 내밀었는데, 글자를 모르던 나로서는 그림이 빽빽이 들어있는 칸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세 장도 채 넘기지 못했는데 오빠가 "그만 가자"며 책 더미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많은 글과 그림을 단번에 독파해나간 오빠가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른다.시간이 흘러 내가 만화에 빠질 차례가 되었다. 나는 '보물섬'과 '소년중앙'에 나오는 만화를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아기공룡 둘리' '꺼벙이' '맹꽁이 서당'과 같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이 첫번째 친구가 되어주었다. 월간지의 연재만화는 따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스마트폰이나 게임은 고사하고, TV를 틀어도 어린이 프로그램이 한 시간 남짓인 세상에서 오롯이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만들어지는 창작의 세계는 당시에 만화밖에 없던 것 같다.잡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펼쳐보는 만화는 그때그때 바뀌었지만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이 1위였던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데, 도입부는 한결같다. 학동들이 한바탕 싸우고 깨고 부수고 말썽을 부린다. 훈장님이 기다란 담뱃대로 학동들의 머리통을 내리쳐서 커다란 선인장 같은 혹을 만든 후 "이제 공부하자"며 책을 펼친다. 그러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조르고, 훈장님은 우리나라 역사나 한자 고사성어 같은 것을 풀어서 술술 들려준다. 심지어 마당쇠도 같이 듣는다. 마당쇠는 아이와 어른, 무책임과 책임의 중간자적 존재다. 거의 어른이지만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도 있고, 훈장님이 없을 때 엉터리로 가르치기도 한다. 만화를 읽다보면 조선시대 서당의 맨 뒷자리에 앉아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
-
[with+] '장동일지'와 이철·민향숙 부부 지면기사
잔혹한 옥중 비망록 '장동일지' 재일동포 이철, 간첩 누명 옥살이무죄선고·정부사과 후 발간 결심조국 원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간첩 엮은건 정권이지 민족 아냐"'1967년 일본 주호대학에 입학했는데 4·19 때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한국영화를 보여줬다. 나는 '7년이나 지난 영상을 보여줘서 뭘 어쩌자는 거지?'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50년 전 이야기라도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고문당해 연못에서 의문사하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사형 집행된 사람도 많고…. 대한민국이 민주사회로 이행되고 있구나 했는데 지금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니, 우리가 마음을 놓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고통과 아픔은 현재적 의미라는 걸 깨닫게 된다'.지난 4월 출간된 '장동일지'(서해문집)는 우리가 얼마나 엄혹하고 야만적인 현대사를 통과했는지 경각심을 던져주는 옥중 비망록이다. 지은이 이철(李哲·76)은 재일한국인으로 조국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1973년 고려대학교로 유학 온 청년이었다.그러나 시절이 너무 안 좋았다. 박정희의 독재가 극악해지면서 벌인 일련의 간첩조작 사건에 그도 걸려들고 말았다. 1975년 11월25일 유신정권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발표 후 그는 남산으로 끌려갔다. 약혼자와 장모를 데려와 그의 앞에서 '그짓'을 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하며 정신이 무너졌고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39일만에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수로 3년6개월을 포함해 13년간 옥살이를 했고, 출소 후 13년간 한국에 입국금지가 되었다. 결국 한국에서 살겠다는 꿈은 좌절되었고 오사카에서 낮에는 전기기술자로, 밤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살아왔다. 책 출간을 계기로 올해 잇달아 한국을 찾고 있는 그는 9월3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에서 책 내용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지금도 '기억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형수 생활을 가볍게(?) 증언하려 애를 썼다. 얼굴의 깊은 주름은 지난날의 형극(荊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의 구명운동에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