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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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다 지면기사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 보자. 경기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반복해서 아주 오랫동안 진행한다. 그 결과 어느 한 편이 계속해서 이기고 다른 한 편은 계속해서 진다. 그리고 그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지속한다면 어떤 판단을 하는 게 상식적일까. 성실하지 못하거나 실력이 모자란다고 패자를 탓하거나 승자는 경기에서 이겼으니 모든 권리를 누릴 권리가 있어 마땅하다고 해야 할까. 과연 다른 상상을 해 볼 수는 없을까. 계속해서 어느 한 편이 이기거나 다른 한 편이 지는 이유가 혹시라도 경기의 규칙을 잘못 설계해서 그런 것은 아닐지를 말이다.아이들의 놀이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어느 한 편이 계속해서 지면 아이들은 규칙을 바꾼다. 보통은 진 쪽에서 제안한다. 때로는 이긴 쪽에서 먼저 나서기도 한다. 이렇게 규칙을 바꾸는 과정은 일종의 보정이다. 지금까지의 결과가 앞으로도 반복하여 나타나리라는 예측이 충분한 상황에서 아이들의 이러한 선택은 지금까지의 놀이 규칙에 문제가 있었다는 인정이다. 진 쪽이나 이긴 쪽이나 모두 인정하게 되면 소위 기울어진 운동장을 좀 더 평평하게 하는 새로운 규칙으로 놀이를 이어가게 된다. 만약 규칙 바꾸기를 합의하지 못하게 되면 놀이판 자체가 멈춘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앎이야말로 규칙 너머의 규칙이 아닐 수 없다. '정희정' 돌봄의 고립 단면을 전해위험 사회 진입했으나 규칙은 여전사람과 사람 관계는 말라비틀어져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경기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를 경기의 규칙에 비유해 보자면, 사회의 공공복리는 경기의 결과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경기의 결과로 나타나는 복지에 문제가 있고 그 수준이 심각하며 앞으로도 개선할 수 없는 것으로 예측이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지금의 규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물어야 하며, 어떻게 재설계하여야 삶의 수준이 나아질지 다투어야 마땅하다. 놀이판 아이들의 지혜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못하면 놀이판이 멈추듯이 사회가 멈출지도 모르기 때문이다.연극 '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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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약한 곳으로 번져 나갑니다 지면기사
연극 '산재일기'(이철 작·연출, 7월4~10일, 전태일기념관 울림터)는 산업재해를 소재로 우리 사회의 위험 지도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위험 지도는 인터뷰를 기반으로 하여 대본을 구성하고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것처럼 무대를 연출하는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산업재해로 쓰러지고 남겨진 사람들이 이어서 말하고 쓴 보고서 형식을 취하고 있다.그 붉은 기록의 면면은 이렇다. "이 사람들을 연료 삼아서 자기 밥줄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저는 전문가도 그렇고 정치인도 그렇고 공무원도 그렇고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얘기를 연료 삼아서 먹고산다고 생각해요.", "그 하청이라는 게 없어지지 않으면 이 죽음이 안 없어지는 거지. 똑같이 간다고 고용 구조와 산재가.", "그전까지 회사 다녀서 암 걸린다는 생각을 누가 했겠어요.", "근데 이제야 뭔가 보이는 거예요. 저희가 알바 했던 곳들이 얼마나 위험한 현장들이었는지.", "그전에도 계속 죽고 있었는데 그리고 죽음이라는 게 언제나 가장 극한의 상황인데, 그전까지 그걸 당연하게 죽는다고 생각하고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게 너무 신기하지 않나."위의 붉은 기록에는 산업재해 당사자도 있고, 그 동료도 있으며, 활동가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지만 하나의 공통 감각을 갖고 있다. 혼자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전해질 수 있도록 함께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울림을 이어가는 사람이 옆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는 아무리 소소해도 사소하지 않다. 연극 '산재일기'는 그렇게 위험 지도를 함께 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그 목소리를 함께 연대하는 장치 그 자체이다. '반복적인 참사' 산업재해 소재로사회 위험지도 그리는 '산재일기' 녹색병원은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중독 환자들의 직업병 인정투쟁의 성과로 설립된 병원이다. 녹색병원 원장의 다음 대사는 원진레이온 사건의 또 다른 이면을 전해주고 있다.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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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낮은 곳부터 침수가 된다 지면기사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전윤환 작·연출, 5월11일~6월5일, 명동예술극장)은 제목이 말하는 그대로 기후위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지구 사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인 기후위기를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이번 공연은 주목할 만한 성취를 보여주었다. 연극 제작과정에서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직접행동을 실천한 것이다. 단지 기후위기의 실태를 조사하거나 '기후위기비상행동' 그룹이 진행한 캠페인에 참여한 것을 희곡 창작과정에 반영한 정도가 아니다. 사전워크숍을 통해 활동가와 대기과학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나아가 연습과정과 연극 제작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를 줄이려는 여러 실천은 사회변화실험의 좋은 보기가 될 만하다.공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암전이다. 암전을 이 공연만큼 효과적으로 활용한 작품이 또 있었을까. 암전은 무대장치나 장면을 바꾸기 위해서 쓰인다. 그러니까 암전을 작품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 장면 전환을 위해서 쓰이는 게 보통이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 주목할 암전은 세 번 나온다. 공연의 처음, 중간 그리고 끝에 나오는 세 번의 암전은 그 지속 시간을 놀라울 정도로 길게 연출하였다. 다분히 의도한 연출이라는 점을 관객이 알아차리도록 한 것이다. 오퍼레이터의 조작 미숙이 아니라 의도한 연출이라는 사실을 관객이 눈치채야만 극적 효과를 배가할 수 있기에. 연극 '기후비상사태: 리허설'은지금의 성장은 지속할 수 없다는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해 정전을 경험한 적이 있는 사람과 정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 한 극장에 있었다면 아마도 그 둘의 극적 체험이 조금 다르지 않았을까. 대부분 후자가 아닐까. 볕이 좋은 날 한두 개라도 전등을 끄고 수업을 하는 선생님을 만난 적이 없는 쪽이거나 정전으로 밝혀둔 초가 녹아내리면서 불로 번진 집을 본 적은 더욱 없는 편일 것이다. 옆에 앉은 사람과 말할 수도 없는 극장에서 만들어진 긴 암전의 시간에 관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루 내내 밝혀둔 전등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긴 암전의 시간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극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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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불가불 가요, 아니면 불가 불가요? 지면기사
연극 '불가불가'(이현화 작, 이철희 연출, 3월26일~4월10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는 선택에 관해 말하고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결정을 하는지에 따라 삶의 경로는 달라진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의 시간도 수많은 선택이 빚어낸 무늬의 결을 간직하고 있다.연극 '불가불가'는 역사에서 그 소재를 가져왔다. 을사조약 체결을 앞두고 열린 어전 회의에서 김윤식은 불가불가(不可不可)란 네 글자의 한자를 적어서 제출한다. 띄어쓰기 없이 붙여 쓴 네 글자는 읽기에 따라서 그 해석이 극명하게 갈라진다. 불가, 불가로 끊어 읽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부정의 의미를 지닌다. 반면 불가불, 가로 끊어 읽으면 하지 아니할 수 없어 가능하다는 긍정의 의미를 지닌다.불가불가에 대한 기록은 매일신보 1922년 1월19일자 3면에 등장한다. '당시 합방에 대한 참의부의 의견을 하문할 때 '불가불가'라고 써서 대답한 사람인 바 이 불가불가의 넉자는 조선인 측으로 보면 불찬성이란 의미인데 일본인으로 보면 불찬성은 불가라는 의미'라고 매일신보는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김윤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러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다루면서 불가불가의 해석을 함께 전하고 있다.연극 '불가불가'는 우리 삶의순간순간 내리는 결정·선택에책임 따른다는 진실 환기 시켜줘 불가불가로 붙여 쓴 네 글자의 제출은 판단의 중지이자 기피이다. 읽는 사람이 어느 호흡에 끊어서 읽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도록 함으로써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 결정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얼핏 중립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도 좋고 저도 좋은 중립이 아니라 기회주의의 무관심일 뿐이다. 마땅히 책임져야 할 선택의 순간을 회피함으로써 힘의 논리에 따른 결정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판단의 중지와 기피는 윤리의 결핍이다.역사에서 판단의 중지가 가져온 참사의 목록에서 빠질 수 없는 사례에는 아이히만이 있다. 나치는 유대인 학살을 자행하는 동안에 독특한 언어 규칙을 활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유대인 절멸이 아니라 그것을 최종해결책이라고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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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뱀은 어떠세요? 지면기사
연극 '탈피'(작품·신효진, 연출·강윤지, 1월28일~2월13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공감과 해방에 관한 이야기이자, 또한 동시에 불편한 질문과 감각에 관한 이야기이다.연극 '탈피'의 무대는 실내 동물원이다. 이 작품은 운영이 어려워 매각이 임박한 동물원에서 주인공 소진과 알비노 버마 비단구렁이 사이의 소통과 교감을 다루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도 힘겨워진 우리 시대에 사람과 뱀 사이의 소통과 교감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 퇴물이 된 비단구렁이가 탈피를 멈춘 상황에서 연극은 시작한다. 실내 동물원 전시관에 갇힌 채 죽어가는 동물을 바라보는 소진의 시선은 점차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탈피를 멈춘 비단구렁이를 바라보는 염려의 시선이 우리 사회에서 약자로 내몰린 사람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게까지 그 시선이 점차 이동하는 과정에서 소진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동물원이라는 비유가 가리키는 곳에는 인간중심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의 착취를 통해 이룩한 근대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 동물원인 것이다. 그 공간에 전시된 동물은 생명체로 여겨지지 않고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전시물로 취급받는다. 스스로 윤리감각 돌아보게 할 것인지인간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채폭력 세계에 속할 것인지 묻는 것 우리 사회에서 동물원 옆에 놓일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공장식 축산의 공간이다. 축산 동물에게 가해지는 품종 개변에서부터 절대적으로 열악한 사육 시설에 이르기까지 축산의 공간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공간이다. 부리 절단의 신체 손상과 섭식량을 늘리기 위한 조명 시설 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단지 인간중심주의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맹목의 폭력적 눈감음이 있을 뿐이다.이제 동물원이나 축산의 공간을 조금 더 확장해보자. 이주노동자의 주거 공간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이주노동자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주거권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대한 보고서는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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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달에서 노래가 나온다면 지면기사
연극 '그때도 오늘'(오인하 작, 민준호 연출, 1월8일~2월20일,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2관)은 백 년의 시간을 다루고 있다. 192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이어지는 백 년의 시간은 네 개의 에피소드로 나뉜다. 1920년대의 경성, 1940년대의 제주, 1980년대의 부산, 그리고 2020년대의 DMZ. 네 개의 에피소드는 각각 독립된 이야기이지만 네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어를 가지고 있다. 바로 평화가 아닐까. 비록 대사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연극은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 제국과 국가의 폭력을 소환한다. 그런데 폭력을 소환하기는 하지만 폭력의 현장에서 조금씩 거리를 둔 채 무대에 가져온다. 폭력의 세기를 지나온 백 년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판단은 관객마다 다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네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밑바탕에 평화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모든 싸움 멈추게 하는 그 노래평화위해 새해엔 상상력 가져볼 만 1920년대의 경성.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가 배경이다. 선후배 사이인 용진과 윤재가 주재소에 갇힌 채 고초를 겪고 있다. 둘의 대화를 통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제암리 사건을 전해주고 있다. 교회 건물에 사람을 가둔 채 불을 지른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하고 있다. 만주에 가고 싶다는 용진과 민들레 홀씨가 되고 싶다는 윤재는 무거운 보고 중간중간에 여유를 잃지 않으려 애쓴다. "독립하면 그 냉면 좀 먹어 보자"는 말은 끝내 이루지 못한다.1940년대의 제주. 친구 사이인 윤삼과 사섭은 제주 중산간 지대에 산다. 윤삼은 땅을 처분하고 육지로 가려고 한다. 사섭은 부치던 땅을 빼야 하는 상황이 영 못마땅하다. 친구 사이라도 한 사람은 땅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땅을 부치고 있다. 여기까지라면 우정에 관한 이야기나 소작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 수도 있겠으나 역사의 무게는 1948년으로 점차 가라앉고 있었다. 토벌대에 의해 중산간 지대가 초토화되고 있었다. "그냥 농사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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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우리 서로의 이름을 기억합시다 지면기사
연극 '마웅저씨의 출판기념회'(조혜연 작·연출, 11월2~4일, 대학로 플랫폼74 소극장)는 일인극이다. 한 명의 배우가 모든 배역을 혼자 맡아 하는 일인극은 규모가 작지만 관객과의 교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형식이다. 때로는 시적인 장면을 만들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서사적인 장면을 펼치기도 하며 관객에게 다가가는 장르이다. 배우가 노래를 하거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무대를 관객이 바로 그 현장에서 함께하기에 둘의 호흡이 충만하게 되면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연극 '마웅저씨의 출판기념회'는 미얀마 출신의 마웅저가 주인공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마웅저가 책을 출판하기까지의 사연이 펼쳐진다.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연극은 그러나 그 배경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관객은 이 연극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역사라는 사실에도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 '마웅저씨의 출판기념회'는미얀마 출신이 주인공, 때는 1994년의 일이다. 마웅저는 미얀마 군부독재의 탄압을 피해서 한국으로 오게 된다. 초기의 한국 생활은 여느 이주노동자의 삶과 겹쳐 있다. 월급을 떼이기도 하고,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아 일자리가 사라지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생전 처음 본 날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한글을 배운다. 그곳에서 공장에서는 물어보지 않는 말을 듣게 된다. 선생님이 마웅저에게 물은 것이다. 기분이 어떤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사람의 말을 들은 것이다. 아니다.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준 사람을 그렇게 만난 것이다.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강아지 똥'을 읽게 된다. 동화책에서 가르치려는 말이나 명령의 말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그는 결심한다. "내가 똥이 되어 미얀마 아이들이 민들레처럼 피어나게 할 거야." 그렇게 그는 한국 생활에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후 그는 한국 그림책을 미얀마어로 번역하다가 동화작가로 활동을 하게 된다. 2002년을 지나는 무렵 작은 연대 운동이 2010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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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년의 '늘찬문화'] 지속 가능한 문화를 위해 지면기사
대선과 지방선거의 시절이 왔다. 법에 따라 5년마다 속절없이 찾아와서 속속 일상을 뒤흔들어놓은 뒤 잊은 듯 시간을 보내면 또 속절없이 찾아온다. 만약 우리가 선거의 주기적인 방문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능숙하고 노련하게 대처하게 되는 공식 속에 있었다면, 매번 좀 더 나아지는 맛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더해지는 단맛보다는 감해지는 쓴맛을 더 많이 보았던 것 같다. 그런데도 삶의 변화와 나아가는 문명을 기대하는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대선·지방선거의 시절이 왔다후보들은 예외없이 문화강국 언급국가경쟁력을 갖추겠다고… 인류의 삶에 있어서 문화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예술의 가치가 허투루 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일상에서 느끼고 있다. 알다시피 전국 12개 도시가 법정문화도시로 지정되어 '시민을 위한, 시민에 의한, 시민의 도시'를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도시성장을 위한 '문화적' 과정을 기획, 실천하고자 원탁회의가 만들어지고, 인접 도시와 협업하여 행정구역이 아닌 생활구역으로의 삶을 돌아보기 시작하였으며, 동네의 문제를 스스로 발견, 이를 해결하고자 나서고 있다. 말하자면 정치, 경제, 행정, 과학 등이 그동안 '전문적 영역'이라는 강력한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서 의사결정이 다 이루어졌던 '전문가의 시대'에서, 생활 속에서 구현되지 않으면 전문 영역이라는 허상이 내 삶에서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채 가는 과정이 시작, 21세기가 요구하는 '시민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라 본다. 법정문화도시는 한 도시가 5년 동안 시민의 손으로 도시를 만들어가는 실험을 하여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는 중요한 사업이며, 과정을 오롯이 겪어내지 못하면 결코 '내 것'이 되지 못한다는 자각이 통용되는 사업이다.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은 무거운 책임을 갖는다는 점에서 민주시민, 민주주의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김해시도 2차 지정 때 법정문화도시가 되었다. 비록 투·융자심사가 늦어 하반기에 예산을 받아야 하는 절차로 인해 진행의 더딤이 있기는 하나, 또한 코로나19로 인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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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플라스틱을 뚫고 자라난 꽃 지면기사
연극 '호모 플라스티쿠스'(김지선 작, 김한내 연출, 10월21~26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자연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플라스틱을 소재로.연극의 주요 인물은 무영과 영인이다. 선후배 사이인 둘을 이어주는 끈은 환경운동이다. 현재 동화작가인 무영은 환경운동을 그만둔 지 오래지만 플라스틱을 소재로 한 동화를 집필 중이다. 그러니까 무영은 활동가로서의 운동은 접었으나 환경 문제를 저버리지는 못한 그런 인물이다. 영인은 무영의 영향을 받아 활동가의 삶을 살고 있다. 둘의 대화가 때로는 시적인 대사로, 때로는 프로파간다의 대사로 진행되며, 그 중간중간에 무영이 창작 중인 동화가 극중극 형식으로 펼쳐진다. 연극 호모 플라스티쿠스는심해 생물로 'PET 조각 발견' 소재 연극 제목에 나오는 플라스티쿠스는 필리핀과 일본 사이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에서 발견한 한 생명체에 붙인 학명 '에우리테네스 플라스티쿠스'에서 왔다. 이 생명체는 갑각류의 일종으로 해저 6천900m 심해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놀라운 것은 그 소화 기관에서 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PET) 조각이 발견된 것이다. 해저 6천900m라니. 바야흐로 플라스틱의 전 지구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갈매기, 펭귄, 거북, 고래에 그치지 않고 에우리테네스 플라스"티쿠스에 이르기까지 지구를 플라스틱이 점령한 것이다.새롭게 발견한 생물종에 플라스티쿠스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 만큼 지구의 생태계가 재앙으로 치닫고 있지만 현실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버리기 위해 만들어진 플라스틱이 지구를 점령하는 동안 풍요와 발전을 노래하기에 급급했다. 그 성장의 바퀴를 멈출 수 없는 소비사회에서 동화 작가인 무영은 나약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가 연극이 말하는 자연과 사람이 하나로 묶인 존재라는 메시지의 요약이다.만약 연극 '호모 플라스티쿠스'에서 다음에 소개할 일화가 없었다면 동화 작가 무영만큼이나 막막했을 것이다. 무기력 상태에 빠진 동화 작가 무영이 창작하고 있는 동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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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산소 마시러 가는 날 지면기사
연극 '언제부턴가 하늘에서 까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허윤영 작·연출, 8월4~8일, 소극장 혜화당)는 근대 문명의 끝을 상상하는 작품이다.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구의 생태계가 무너진 상황을 무대화하고 있다. 배경은 2035년이다. 음식은 '구워 먹거나 삶아 먹을 수 없다'. 생식이 기본이다. 제한적으로 공급되는 산소로 숨을 쉬어야 하는 마당이니 운동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일상의 삶이 모두 무너진 상황이다.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직접적이다. 대재앙 이후를 말하면서 연극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이다. 왜 대재앙을 막지 못했는지를 묻고 있다. 202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묻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처한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일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대체 뭘 했단 말인가. 이 물음을 던지기 위해 무대를 2035년으로 옮겨간 것이다. 연극 '…하늘에서 까만 눈이…'는2035년 문명 끝을 상상하는 작품 인도 동부에 위치한 자리아에는 불타고 있는 석탄 광산이 있다고 한다. 이 화재는 1916년에 시작되었다.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타고 있는 것이다. 이 불타는 석탄 광산의 이미지는 오늘날 지구가 처한 기후 위기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끊임없이 탄소를 내뿜고 지면의 온도를 끌어올리며 불타고 있는 것은 광산이 아니라 지구 그 자체이다. 그 불길은 석탄이 모두 재로 바뀌기 전에는 도무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검은 재로 덮인 지구의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소설이나 영화에서 익히 보고 들은 장면들을 떠올려 봄직하다. 아니다. 연일 보도되고 있는 뉴스를 보면 소설이나 영화를 떠올릴 일이 아니다. 2021년 올해만 하더라도 터키, 그리스, 알제리, 이탈리아 그리고 미국을 강타한 산불에서부터 벨기에, 미국, 중국 그리고 일본을 휩쓴 폭우와 홍수에 이르기까지 이상기후에 대한 뉴스는 멈추지 않고 있다. 이상기후는 이제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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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피켓라인 넘었다며? 지면기사
철강 노동자들 살아가는 '美 레딩'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 아닐까노동시장의 연대 차단 더 강해지고사회는 더 경직되고… 어쩜 레딩은군산·울산·부산 영도 어디쯤 아닐까연극 '스웨트'(린 노티지 작, 안경모 연출, 6월 18일~7월 18일, 명동예술극장)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레딩에서 2000년부터 2008년까지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레딩은 작은 공업도시이다. 그곳에서 철강 노동자로 살아가는 신시아와 아들 크리스, 트레이시와 아들 제이슨 그리고 바텐더인 스탠과 보조로 일하는 오스카가 주요 인물이다.레딩에서 철강 노동자로 살아가는 삶에는 일종의 자부심이 있다. "할아버지는 장인이었어. 손을 써서 일하는 사람을 존중했어. 그때는." 전형적인 백인 노동자인 트레이시의 말이다. 레딩에서 삼대에 걸쳐 철강 노동자로 살고 있다. 노동으로 흘리는 땀에 대한 존중과 인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흑인인 신시아와도 막역한 사이로 20년 넘게 지내고 있다.그러던 2000년 어느 날 이들에게 균열이 생긴다. 신시아가 관리직에 뽑히고부터 균열의 골은 커지다가 공장 폐쇄와 파업으로 균열은 극에 달한다. 경기가 좋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균열이 경기가 나빠지자마자 적대적 관계로 벌어진다. 그 균열의 틈새를 폭파하는 방아쇠를 오스카가 당기고 만다. 콜롬비아 출신인 오스카가 임시직으로 공장에 들어간 것이다."피켓라인 넘었다며?" 바텐더인 스탠이 오스카를 만류한다. 오스카는 시간당 11달러를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잘만하면 풀타임 자리가 나올지도 모른다며 스탠의 만류를 뿌리친다. 오스카도 절박하다. 그의 아버지는 공장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했지만 노조에서 받아주지 않아 평생 임시직으로 살아야 했다고 항변한다.피켓라인을 넘는 이야기 중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빌리 엘리어트'(2000)가 있다. 이 영화는 발레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년 빌리가 발레리노로 성공하는 전형적인 성장 서사의 이 영화는 가족과 사랑, 그리고 열정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가 그렇고 그런 뻔한 이야기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장치 중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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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난민은 여러 번 죽어요 지면기사
지중해 건너는 사람들을운 나쁜 상황이라고 말해선 '곤란'그것은 권리 박탈당한 비정상 간주 지속적 삶의 터전 떠나게 만드는지금의 체제 눈감도록 한다연극 '정글'(조 머피·조 로버트슨 작, 김혜리 연출, 5월22~29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프랑스 칼레의 난민캠프가 배경이다. 2015년 칼레에는 죽음의 바다 지중해를 건너 도착한 사람들이 임시 거주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리비아, 수단,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출발했다. 국경을 넘으면서 형제를 잃었다. 사하라 사막을 지나는 동안 자매를 잃었다. 지중해를 건너면서 가족을 잃었다.칼레는 도착지가 아니었다. 장벽을 넘을 때마다 동료와 혈육을 묻어야 했던 그들이 도착한 칼레는 통과해야 하는 또 다른 관문에 불과했다. 영국으로 이어지는 터널의 입구 앞에서 그들은 막혔다. "갈 수 있는 곳이 없잖아." 그렇게 칼레는 난민캠프로 변해갔다. 2015년 3월부터 2016년 여름이 지날 무렵까지 칼레에는 삶의 터전을 박탈당하고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칼레에 도착한 사람들이 들어야 했던 말은 환대의 말이 아니었다. 그들의 도착이 전해지자마자, 그 도착은 정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그들에게 날아왔다. 유럽연합의 난민수용 조치보다 빠르게 그들에게 날아온 것은 "우리가 누구와 함께 살고 싶은지를 결정할 권리는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었다. 헝가리를 비롯해서 유럽의 곳곳에서 그들의 도착을 미리 막고 나선 것이다. 혐오와 인종주의의 담론 앞에서 그들은 삶의 터전만 잃은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다.한나 아렌트는 "더 이상 어느 정치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두고 그들이 생명, 자유, 행복 추구의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은 단지 법 앞에서 불평등한 것이 아니라 법의 테두리 바깥으로 내몰렸다는 의미이다. 공동체에서 축출당한 사람들은 몇몇 권리를 상실한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로 인해 그들은 법의 경계 바깥으로 추방당해 무권리의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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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지면기사
연극 'X의 비극' 사내가 한 말중'그렇게'에 방점 찍어야재앙과 폭력에 고통받는 사람들비극으로 내몰리는 사람들 못보고앞으로만 달리는 우리 현실 가리켜연극 'X의 비극'(이유진 작, 윤혜진 연출, 3월12일~4월4일, 소극장 판)은 우리 시대에도 비극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는 작품이다. 이미 낡아 버린 이 질문을 다시 묻는 것은 제목 때문만은 아니다. 재앙과 폭력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현실에서 비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 우리는 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한 사내가 눕는다. 어느 날 느닷없이 눕는다. 쓰러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운 것이다. 연극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사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뿐이다. 1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누워서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않는다.사내가 눕자 가족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아내가 생계를 꾸려야 한다. 경력 단절로 인해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렵다. 온갖 일을 다 해 보지만 생활은커녕 생존하기도 힘들다. 아내가 사내에게 말한다. "대출금이라도 갚고 눕든가." 하지만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아들은 고등학생이다. 입시 준비에 차질이 생겼다. 도저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아들이 말한다. "아저씨가 차라리 나아요."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든 아들도 눕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아들에게 사내가 말한다. "너도 곧 어른이 되겠구나. 너무 무리는 하지 마라."연극 'X의 비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X에 대해. X는 누구일까.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을 붙이는 게 규칙이다. 안티고네, 햄릿 그리고 오셀로. 이런 식이다. 사내에게 이름이 없는 것도 아니다. 강현서. 왜 '강현서의 비극'이 아닌가. X의 자리에 누가 오더라도 마찬가지라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모두가 비극의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다음으로 비극에 대해. 비극은 몰락으로 인한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주어진 운명의 제약과 한계에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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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미리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면기사
연극 '고역' 도덕실험 교본 같아선택따라 그 향방 달라지는 삶과그 몫 끌어안은 삶 말 하려는 것일까고통과 괴로움 가득 찬 인간세계또 다른 선택의 시간으로 넘어간다지난 2월19일부터 28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연극 '고역'(김성배 작, 신동일 연출) 공연이 있었다. 공간은 지금은 운영하지 않는 게스트하우스이다. 마당에는 40년 수령의 오동나무가 있다. 시간은 어느 봄날부터 여름까지.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고역이라고 짓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손님을 환대하기는커녕 왔던 손님도 되돌아갈 만한 이름이 아닌가. 마치 손님이 찾지 않기를 바라는 듯한 이름을 가진 게스트하우스 고역의 주인은 윤상요이다. 대체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 사연을 알면 윤상요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을까.이 작품은 여러 인물과 장치를 통해 이 물음을 풀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우선 한규진 기자이다. 출판을 앞둔 윤상요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온 한규진에 의해 최근 몇년 간의 행적이 드러난다. 사회학자인 윤상요는 2018년 여름,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우리 사회가 조건 없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가짜 난민과 진짜 난민을 구분하고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난민 수용 반대의 주장을 신인종주의라고 비판했다. 과거 피부색으로 차별과 배제를 합리화한 인종주의와 달리 신인종주의는 문화의 차이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며 제주에 도착한 예멘 난민을 잠재적인 범죄자로 낙인찍는다는 것이다.인터뷰의 장치를 통해서 윤상요를 사회학자로 설정한 이유는 설명되지만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고역이라고 한 까닭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다른 장치가 필요하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송민기의 등장은 틈입에 가깝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에 느닷없이 나타난 송민기는 윤상요에게 출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송민기의 등장으로 무대의 이야기는 예멘 난민 문제에서 윤상요가 겪은 과거의 사건으로 전환한다.이 대목에서 관객은 또 다른 극적 질문을 하게 된다. 송민기는 누구인가. 대체 송민기와 윤상요는 어떤 사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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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사랑에 빠진 표정 지면기사
교양연극 '에볼루션 오브 러브'는사랑의 담론에 관한 보고서사랑을 하는 사람이 듣고싶은 말 "사랑해"라는 말의 대답으로 충분한 말은 "사랑해"이기 때문연극 '에볼루션 오브 러브'(연출·이영은, 1월8~17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본격 교양연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주석에 가깝다. 모두 열 두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무대는 수많은 참고 문헌을 인용하며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사랑의 담론에 관한 보고서이다.열 두개의 장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열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독립된 장면으로 구성된 열개의 장은 사랑의 기원, 사랑 찾기. 너무 많은 사랑, 사랑의 고통, 인공적 사랑, 사랑과 가족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셰익스피어와 라신의 작품에서 대사를 인용하기도 하고 사랑에 관한 사회문화적 의미를 탐구하기도 하며 심리학과 생물학에서 말하는 사랑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렇게 이 보고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이 보고서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랑에 빠진 표정'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이며 사랑은 행복이 아니라 희열이라고 보고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반복적으로 보고라는 말과 보고서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이 작품은 사랑을 주제로 한 인물 사이의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표정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할 뿐 사랑에 빠진 인물의 이야기는 없다는 말이다.아무튼 '사랑에 빠진 표정'이라는 말에는 묘한 그 무엇이 있다. 여기 사랑을 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사랑을 하는 사람이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고 하자. 여기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에 빠진 표정을 볼 수 있을까. 당연히 볼 수 없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사랑에 빠진 표정은 사랑을 하는 사람 자신이 볼 수 없다. 그 표정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받는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표정은 사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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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말은 흔적이죠 지면기사
연극 '배를 엮다' 는 13년 넘게사전을 만드는 이야기다만든 순간 낡아 가는데 왜 일생을 그래도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 흔적 남겨야… 결국 사라지게 되더라도연극 '배를 엮다'(강현주 연출, 11월 5~8일, 여행자극장)는 사전을 만드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도록 이끈 힘은 과연 무엇일까. 사전인가, 아니면 사전을 만드는 사람인가.사전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는 어떤 형식이 적합할까. 이야기를 장악할 수 있는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1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전을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라면 좀 다를 수 있다. 소설, 영화 그리고 연극은 그 장르의 형식에 최적화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해야 한다. 특히 연극의 경우에는 그 13년의 시간을 한정된 무대의 시간으로 어떻게 압축할 것인지가 힘겨운 숙제일 수밖에 없다.사전을 만드는 작업은 시간과 싸우는 과정이다. 단어를 찾고, 용례를 모으고, 그렇게 쌓인 말 가운데 실을 것과 버릴 것을 고르고, 표제어로 선정한 말의 뜻을 풀이해야 한다. 출판까지의 작업은 지난한 반복의 시간을 견디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그 지루한 반복의 시간을 연극 무대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나름의 장치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권투 영화라고 해서 권투 장면만 내내 보여줄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화 '록키'에서 권투 장면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마찬가지이다.연극 '배를 엮다'는 그 13년의 시간을 두 번 생략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한 번은 12년 후, 다른 한 번은 1년 6개월 후. 그러니까 이야기가 시작한 시간에서 12년을 건너뛰고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다시 1년 6개월을 건너뛰는 생략의 방식을 택했다. 그 방식이 최선이었는가를 묻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생략과 휴지의 시간이 과연 사전은 무엇일까, 사전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물음으로 이끌도록 했다.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에는 사전 편찬자인 야마다 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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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원고는 불타지 않아요 지면기사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검열 금지 풀어야 하는 불가코프답장 받지 못한 편지 쓰기를 반복기다리게 하는 것은 권력의 특권편지 쌓여갈수록 영혼은 침식후안 마요르가의 연극 '스탈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손원정 연출, 10월8~18일, 스튜디오76)는 검열로 인해 소멸해가는 한 영혼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러시아의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1891~1940)의 일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29년 불가코프는 자신의 작품이 공연 금지를 당하자 스탈린에게 편지를 쓴다. 이후 편지 쓰기를 반복하지만 답장을 받지는 못한다.연극은 불가코프가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편지의 목적은 분명하다. 스탈린을 설득해야 한다. 검열 금지를 풀어야 하는 불가코프. 아내가 스탈린 역할을 한다. 스탈린 입장에서 불가코프의 편지를 읽는다. 편지를 수정한다. 편지를 쓰고 또 쓴다. 편지 쓰기의 시간은 쌓여가지만 스탈린에게서 답장이 오지는 않는다.근대 매체에서 편지만큼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장치가 또 있었을까. 편지를 사이에 두고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 누군가가 가로챈 편지, 도착하지 않은(못한) 편지, 뒤늦게 도착한 편지는 그 편지가 제때 도착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을 만들게 된다. 가로챈 편지는 편지를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정보가 넘어감으로 인해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도착하지 않은(못한) 편지는 답장을 받아야 할 사람의 시간 그 자체가 사건이 된다.스탈린에게 보내는 불가코프의 편지는 도착하지 않은(못한) 편지에 가깝다. 스탈린의 답장이 없는 상황에서 불가코프가 반복하는 편지 쓰기는 강박으로 치닫는다. 편지가 잘 도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는 불가코프는 이제 멈출 수도 없다. 편지 내용에 무슨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고 편지를 다시 쓴다. 쓴 편지를 다시 읽고 수정한다. 그 반복하는 시간에 쌓여가는 것은 편지만이 아니다. 강박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스탈린에게서 아무런 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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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무슨 빛깔이노 지면기사
"할머니는 무채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빨갛고 노랗다." 다큐멘터리 '황보출, 그녀를 소개합니다'(지민 감독, 2007년)의 내레이션이다. 그 무렵 황보출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가슴에 있는 말을 나는 못한다. 그래서 입이 쓰다. 참고 참고 또 참고 있다. 그래도 언젠가는 나도 내 말을 하겠다. 가슴에 있는 말을 하겠다." 2016년, 황보출은 시집 '가자 뒷다리'(도서출판 돋보기)를 간행한다. 연극 '화전가'를 보면서 황보출을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 빛깔 때문일 것이다.지난 8월6일부터 1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화전가'(극작·배삼식 극작, 연출·이성열) 공연(2월28일 초연 예정이었으나 8월6일 초연, 23일까지 공연 예정이었으나 18일까지만 진행)이 있었다. 1950년 4월의 경북 안동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연극 '화전가'는 여러 면에서 독특한 작품이다. 그 독특함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전략으로 생략과 부재의 기법을 활용한 결과로 보인다.거대 사건이 없다. 작품의 제목과 달리 화전놀이가 펼쳐지지도 않는다. 환갑을 맞은 김씨를 찾아온 식구들이 밤을 새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시대극에 나올 법한 거대 서사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전쟁 두 달 전으로 설정한 배경이 사건을 촉발하는 힘으로 작동하지도 않는다. 극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중심 사건을 만들지 않는 이 전략으로 인해 이 작품은 일상의 시간과 삶에 특별한 무게감을 부여한다. 거대 서사를 중심으로만 삶이나 역사를 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남성이 없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홉 명은 모두 여성이다. 중심인물 김씨, 딸 셋(금실이, 박실이, 봉아), 며느리 둘(장림댁, 영주댁), 고모 권씨, 독골할매와 그의 딸인 홍다리댁,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은 20여 년 넘게 소식이 없다. 장남은 4년 전 병으로 죽고 차남은 감옥에 있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이는 남성 부재의 인물 설정은 거대 서사의 생략과 함께 이 작품이 소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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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바다엔 경계선이 그어져 있지 않아 지면기사
대학로 연극 '이카이노의 눈'오사카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강제동원과 4·3, 전쟁에 떠난 이들1973년 동네 이름 지워졌어도정체성의 물음은 사라지지 않아지난 7월 2일부터 12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이카이노의 눈'(원수일 원작, 김연민 연출, 2019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작품의 공간인 이카이노는 일본 오사카시에 있는 재일조선인 집단거주지역의 이름이다. 시간은 1970년대 말로 설정되어 있다.서울 대학로에서 오사카의 이카이노를 이야기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 1970년대의 이야기를 가져와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이카이노가 지금 여기의 우리와 어떤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연극의 중심 인물은 영춘이다. 영춘은 남편의 첫 기일에 남편이 남긴 비망록을 다시 읽는다. 해방, 4·3, 전쟁…. 허망하기 그지없다. 유언이라 할 수도 없다. 재산 목록은 더더욱 아니다. 근현대사의 사건이 그저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그 사건의 목록을 읽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남편은 왜 그런 비망록을 남겼을까. 영춘의 비망록 다시 읽기를 통해 그 물음은 관객에게 전달된다.비망록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연극 밖으로 나와야 한다. 원작 소설인 원수일의 '이카이노 이야기'를 포함하여 재일작가의 다른 텍스트나 근현대사의 콘텍스트를 참고해야 한다. 이카이노가 도일 제주민들의 '작은 제주'로 불리게 된 배경에는 지난 역사의 시간이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1922년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는 여객선이 운항하면서 제주민들이 대거 이주하게 되는 과정, 강제동원의 역사,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4·3으로 제주를 떠난 사람들, 그리고 전쟁.극중 인물인 영춘 세대의 정체성을 잘 담고 있는 목소리 가운데 하나는 김시종의 '조선과 일본에 살다'이다. 부제가 '제주에서 이카이노로'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시종은 4·3으로 제주에서 밀항하여 이카이노에 정주한 재일시인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동네'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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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이유가 있겠지요 지면기사
대학로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파인텍 노동자 고공농성 모티브편의점 직원·주인·배달 알바…'삶의 마지막' 내몰린 사람들절박함에 터져나온 목소리 담아지난 5월7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이연주 작, 이양구 연출, 2019년 초연) 공연이 있었다. 파인텍 노동자의 고공농성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이 재공연 중이던 지난 29일 강남역 철탑 위에서 김용희씨가 내려왔다. 철탑에 오른 지 355일만의 일이다.지붕, 옥상, 다리, 망루, 굴뚝, 크레인, 광고탑, 전광판, 조명탑, 철탑. "땅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란 말을 전하기 위해 올라간 곳. 1931년 평양 을밀대 지붕에 올랐던 강주룡에서부터 2019년 서울 강남역 철탑에 올랐던 김용희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노동자가 마지막으로 택한 곳.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가 모티프로 하고 있지만 무대에 나오지 않는 고공.작품의 배경은 편의점이다. 좀 더 정확하게는 편의점 뒷마당이다. 왜 편의점일까. 편의점은 주인공 정화의 일터이다. 그의 일터에 다른 인물이 찾아오며 이야기가 모인다. 명호, 선영 그리고 보람이 그들이다. 그들을 따라 사건이 편의점 뒷마당에 펼쳐지고 쌓여간다.명호는 정화를 누나라고 부른다. 명호는 정화 남편의 회사 동료다. 남편은 굴뚝 위에 있었고 명호는 그 아래에 있었다. 밧줄 하나로 묶인 두 사람이었으나 남편이 굴뚝에서 내려온 뒤로는 그 끈이 끊어졌다. 집밖을 나가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꾸리는 정화의 입장에서는 명호를 마주할 수 없다. 그런 명호가 편의점으로 찾아온 것이다. 남편이 빌려간 돈을 돌려 달라며.선영은 학습지 교사이다. 교사로 처음 가르친 학생이 정화의 아이들이다. 밀린 학습비를 대납할 정도로 애정이 많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나며 그도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워졌다. 실적이 좋지 못해 학습지 교사 자리가 위태롭다. 하루에 만원씩이라도 받아야겠다며 편의점에 찾아온 것이다. 보람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지금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편의점 점주가 지급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