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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수원시 고등동 중국인 거리 지면기사

    조선족 범죄 부정적 인식깨야25년전 수원 고등동에 살았던 김모(53·여)씨는 최근 우연히 이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살던 작은 동네가 어느새 ‘중국인 거리’가 돼 있었기 때문. 한 슈퍼마켓 주인은 “10년전부터 중국 음식점이 하나둘 생기더니 3~4년 전쯤에 비슷한 가게가 곳곳에 들어서 딴 동네가 됐다”고 말했다.수원 고등동의 변화상은 중국 동포들의 한국 진출 역사와 맞물려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산업연수생 자격 등으로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중국 동포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쉬운 서울 구로와 영등포, 안산·시흥 등 공단 주변에 모여 들었고, 2007년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방문취업제 실시 후 집값이 좀 더 싸고 서울로 가기 편한 수원역 주변 등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거리도 모습이 바뀌어, 양꼬치·우육탕 등 중국인에게 친숙한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자리를 잡았다. 중국 노래방과 술집 등은 물론 환전소와 식료품점 등 생활에 필요한 가게들도 쉽게 눈에 띈다.‘코리안드림’은 불법체류와 외국인 범죄라는 어긋난 형태로 나타나,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중국인 중 7.8%가 불법체류자다. 여기에 오원춘·박춘풍 사건이 이슈가 되면서 중국인 거리엔 한국인들의 제노포비아가 집중되기도 했다. 중국인 거리가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려면 지자체와 주민들이 스스로 상생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성수동 공단에서 일하는 중국 동포들의 거주지였던 서울 자양동은 2011년 동일로 18길이 ‘양꼬치 거리’로 지정되며 변화의 물꼬를 텄다./글 =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일본 ‘브라질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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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일본 ‘브라질타운’ 지면기사

    1990년 취업 허용에 급증포르투갈어 간판들 즐비우리나라에 수원 고등동 같은 ‘중국인 거리’가 있다면 일본에는 ‘브라질타운’이 있다. 1990년대부터 일자리를 찾기 위해 온 일본계 브라질인들(일계인)이 일본 군마현 오이즈미초에 브라질타운을 형성했다. 중국인 거리에서 한자 간판과 양꼬치 판매점 등을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브라질타운에서도 브라질 현지 음식점과 포르투갈어 간판을 쉽게 만날 수 있다.전남대 임영언·김재기 교수가 지난 2011년 발표한 논문 ‘일계인 디아스포라의 귀환과 브라질타운 형성에 관한 연구-군마겐 오이즈미초 일계 브라질인타운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많은 일본인들이 남미로 이주했는데, 1990년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일계인 2·3세의 취업을 허용하면서 브라질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일계인들의 유입이 급격히 늘었다. 이들은 주로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 밀집지역 오이즈미초로 몰렸다. 현재 오이즈미초는 일본에서 가장 외국인이 많은 지역으로, 지난 2011년 기준 이곳에 사는 외국인의 71.6%는 일계인이다. 자연스레 일계인들을 위한 브라질타운이 오이즈미초에 형성됐다. /글 =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매해 400여만명 찾는 인천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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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매해 400여만명 찾는 인천 차이나타운 지면기사

    공갈빵·화덕만두 먹거리 군침 중국풍 건물 이색 데이트 코스1884년 선린동 일대에 중국 조계지(조선 말 외국인이 자유롭게 거주하던 치외법권 구역)가 들어선 후 청나라 영사관을 중심으로 화교들이 본격 진출하면서 탄생한 인천 차이나타운은 그동안 한국인들에게 ‘작은 중국’으로 인식돼왔다. 짜장면이 처음 태어난 곳도 바로 이곳이다.‘짜장면의 고향’답게 차이나타운에는 많은 중식당들이 들어서 있다. 지금은 짜장면을 처음 만든 곳으로 알려진 그 옛날 ‘공화춘’의 이름을 딴 곳부터, 원조 ‘공화춘’ 사장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곳까지 각양각색의 중화요릿집들이 ‘짜장면 거리’를 이루고 있다. 평일에도 점심시간만 되면 곳곳에서 짜장면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려는 이들이 몰려든다. 중국 춘장에 캐러맬을 혼합한 오리지날 한국식 짜장면과, 오이채·계란 프라이 등을 곁들여 먹는 짜장면, 대만·중국 현지에서 노하우를 익혔다는 하얀 짜장면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2012년에는 옛 공화춘 건물을 개조해 전국 최초로 ‘짜장면 박물관’이 문을 열기도 했다.우리네 송편처럼 중국에서 추석 때 먹는 과자인 월병과 중국식 호떡인 공갈빵 역시 차이나타운을 찾는 이들에게 인기다. 대만 출신 화교들이 많아 대만의 대표 간식인 펑리수도 만나볼 수 있다. 월병 안에 팥소나 말린 과일을 넣었다면, 펑리수에는 파인애플 잼을 넣은게 특징이다. 커다란 화덕에서 구워내 ‘화덕만두’라고도 불리는 옹기병과 밀가루 반죽 안에 팥과 크림치즈, 초코 등의 소를 넣어 굽는 빵인 홍두병 역시 관광객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이색적인 먹을거리와 중국풍 건물들이 어우러져, 색다른 경험을 하고 싶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은다. 최근에는 동화 속 내용을 벽화에 담은 ‘동화마을’이 바로 옆 송월동에 조성되며 연인과 가족들 사이에서 새로운 데이트 코스, 가까운 가족 여행지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인천 중구에 따르면 지난해 차이나타운을 찾은 관광객은 410만명에 달한다./글 =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중국에는 없는 짜장면의 고향인 인천 차이나타운은 주말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세계속의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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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세계속의 차이나타운 지면기사

    1840년대 교역 통해 성장美 샌프란시스코 등 유명1842년 청나라는 아편전쟁을 끝내기 위해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했고, 이후 영국을 비롯해 미국, 프랑스 등 서양 국가들과의 교역이 확대되면서 많은 중국인들이 해외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터를 옮긴 중국인들이 하나둘 모여 꾸린 마을이 차이나타운이다. 서구에서는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요코하마가 유명하다.전세계 차이나타운 중 가장 규모가 큰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은 1850년부터 중국 광둥에서 이민온 화교들이 몰린 곳으로, 현재 4만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화교들을 위한 상점이나 학교·공공기관·은행 등이 잘 갖춰져있고, 식료품 등이 저렴해 화교뿐 아니라 많은 이주민들이 오가며 샌프란시스코의 주요 관광 코스 중 하나로 자리잡은지 오래다.요코하마 차이나타운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1859년 요코하마가 개항할 때 유럽 상인들이 중국인 통역관을 대거 들여왔는데 이 통역관들의 거주지가 시초가 됐다. 이후 일본에 진출한 중국 상인들이 학교와 상점을 짓고, 중국인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차이나타운이 됐다. 이곳 역시 요코하마 관광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했다. /글 =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아이클릭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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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인천 속 작은 중국]얻을 것 없는 요우커들, 서울로 유턴 지면기사

    11일 찾은 차이나타운에는 짜장면을 먹고 선물용 월병을 손에 든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카페리로 인천항에 들어오는 중국 관광객들이 꾸준히 찾아오긴 하지만,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처럼 여행 정보를 얻거나 하루쯤 고국 음식을 맛보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다. 화교보다 지자체가 중심이 돼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 주된 요인으로 꼽히는데, 인천을 비롯한 한국 차이나타운이 정작 요우커들에겐 외면받는 이유다.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의 ‘2014년 외래 관광객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을 찾은 중국 관광객 중 4.4%만 인천을 방문했고, 이중 63.4%만 차이나타운에 갔다.그동안 전국 지자체가 요우커를 겨냥해 추진한 차이나타운 개발 사업들은 줄줄이 무산됐다. 지난 2004년 고양시 대화동 6만9천여㎡에 조성하려던 고양 차이나타운 사업은 개발 주체의 자금난으로 5년만에 중단됐고, 서울시 역시 화교들이 모여 살던 연희동·연남동 일대를 중국문화특화거리로 조성하려다 주민반대로 계획을 철회했다.차이나타운이 한국인들뿐 아니라 요우커들에게도 ‘한국 속 작은 중국’으로 거듭나려면 중국 관광객들의 실질적 여행 거점이 돼야 한다. ‘화교 마을’ 서울 연남동이 중국 관광객을 겨냥한 화교들의 투자로 최근 몇년새 요우커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된 게 한 예다. 이곳엔 화장품과 인삼 등 중국인들이 선호하는 한국 물품을 한번에 구매할 수 있는 전문 면세점과 중국 현지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노점들이 몰려있다. 여기에 홍대 앞 음식점·카페들이 하나둘 자리를 옮겨오면서 ‘강북의 가로수길’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 /글 = 강기정기자 kanggj@kyeongin.com

  •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현충원 찾는 다양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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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현충원 찾는 다양한 사람들 지면기사

    한국·베트남전쟁 사망자 친척 추모방문‘자식에 손주까지’ 대가족 50년째 찾기도“보고싶은 사람인데, 자주못와 미안하지”국립묘지에는 오늘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산화한 영령이, 또 그들을 그리는 이들이 찾아온다. 현충일을 일주일여 앞둔 지난달 31일 서울 동작동의 국립서울현충원. 매일 오후 2시에 열리는 봉안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소방상이유공자 1명과 군경유공자 1명, 한국전쟁 참전용사 4명의 봉안식이었다. 유골이 봉안식장에 도착하자 경례와 함께 분향, 조총 발사와 묵념으로 조용히 식은 진행됐다. 검은 상복을 입은 유족들이 고요하게 이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유골이 안치되는 충혼당의 한 관계자는 “하루 평균 3~4명의 봉안식이 거행된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마지막 길이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모시고 있다”고 나지막히 말했다.50년째 자식도 없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삼촌의 묘를 찾는 예순살의 조카는 묘비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선양(63)씨의 삼촌 고(故) 이한명씨는 한국전쟁 당시 봉화지구전투에서 전사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삼촌이지만, 자손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한 아버지가 꼭 삼촌을 기억해달라고 부탁해 매년 현충일마다 찾고 있다. 이씨는 “20살 때 죽은 삼촌을 늘 그리워하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며 “우리 세대의 형제들은 그래도 삼촌을 기억하고 때마다 묘지에 찾아왔지만, 이제 내가 가고 나면 가족들에게 삼촌이 잊혀질까 두렵다”고 토로했다. 전라남도 순천에서 30년째 베트남전쟁에서 사망한 형을 그리워하며 현충원을 찾는 동생도 있다. 장지일(64)씨는 매년 6월이 되면 제사음식을 준비해 형의 묘소를 찾는다. 형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 3일 전에 전사했다. 장씨는 “4남매 중 돌아가신 형님이 특히 나를 아꼈다. 월남 가는 날 큰 형님과 내가 말렸지만, 건강하게 돌아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며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대를 이어 현충원을 찾는 가족도 눈에 띄었다. 한귀자(67·여), 귀석(65)

  •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권율정 대전현충원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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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권율정 대전현충원장 인터뷰 지면기사

    위인들 묘역 현장답사로 보훈교육야생화 단지·생태공원 힐링나들이“지금 현충원은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죽은 자를 위한 곳으로 남을지, 산 자를 위한 곳으로 다시 태어날지…. 우리는 산 자를 위한 현충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권율정(53) 국립대전현충원장은 국립묘지가 역사와 정치이념 논란으로 점철된 현재를 벗어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산 교육의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그는 “알링턴 국립묘지를 비롯해 미국의 국립묘지 140여 곳은 미국인 모두가 그 곳에 안장되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기는 성소이자 정치적 사회적으로 갈라진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통합의 광장”이라며 “현충원도 안장과 참배를 넘어 사회통합을 이루는 성스러운 장소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권 원장은 국립묘지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피력했다. 그는 “일제 강점 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부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참전 유공자를 비롯해 최근의 연평해전과 천안함 사건 용사들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지켜낸 족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는 현충원 뿐”이라며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일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곳이 바로 국립묘지”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유가족들 조차 찾지 않는 현충원의 현실을 바라보면 암담하다. 권 원장은 국민들이 언제든 편안하게 찾을 수 있는 곳으로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국립묘지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실제로 대전 국립현충원은 ‘열린 현충원, 밝은 현충원’을 가치지향점으로 삼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초등학생에서 노인층까지 다양한 연령을 대상으로 역사교육과 함께 직접 역사 속에서 활약했던 인물의 묘와 현장을 답사하는 등의 보훈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아울러 일반인들이 매월 정기적으로 묘비단장과 묘역정리에 참여하는 묘역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체험식 호국교육은 현충원을 찾는 시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권 원장은 한국전쟁으로 국한돼 있던 현충원 역사교육을 일제강점기 부터 최근까지 확대해 과거와 오늘날 사회를 연결하는 평생교육의

  •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후손들에 잊혀진 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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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후손들에 잊혀진 현충원 지면기사

    국가추모행사, 정치권 싸움장으로 변질일반인은 물론 직계가족까지 찾지 않아대학생 표본설문… 29%만 “가본적 있다”국립묘지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응축된 역사교실이다. 일제시대를 거쳐 한국전쟁, 4·19, 5·18 민주화운동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던진 영혼들의 엄숙한 도열은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웅변한다. 국난 극복의 영감이 충만한 곳, 모든 갈등을 소멸시키는 민족 공동체 의식의 발원이다. 하지만 현실의 국립묘지는 해원과 상생의 상징과 거리가 멀다.이희완 소령은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그는 “직계가족들조차 찾지 않는 황량한 곳이 됐다.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안식을 취하는 곳이다. 지금보다 가치 있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만난 한국전쟁 전사자 유가족은 자식도 없이 조국을 위해 전사한 삼촌의 묘를 찾아 “우리 가족들마저 삼촌을 잊어가고 있다. 국가와 사회는 이미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조상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고 한탄했다.광복 70주년을 맞는 해다. 역사의 해석은 각각일 수 있지만, 국가를 위해 헌신한 영령 앞에서 대의를 모으지 못하는 우리는 너무나 부끄러운 후손은 아닌가.■산 자들의 당쟁에 수난받는 국립묘지 = 청산되지 않은 과거에 대한 앙금은 국립묘지를 수십년 째 괴롭히고 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들의 갈등은 봉합되지 못하고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5·18민주묘지는 수난받는 국립묘지의 대표격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두고 정치권의 논란이 벌어졌다. 1997년 5·18 민주화운동이 정부기념일로 제정된 이후 2008년까지 행사에서 기념곡으로 불리던 이 노래는 정부 공식행사에 애국가 대신 부르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보훈, 안보단체들의 반대로 8년째 정부와 정치권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올해도 결국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이 무산되면서 5월 단체와 유족, 5·18재단 등 관련 단체들은 국립묘지 공식 기념식에 불참, 5

  •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국립묘지 갈등’ 전문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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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국립묘지 갈등’ 전문가 분석 지면기사

    국립묘지를 둘러싼 갈등의 원인과 관련 전문가들은 현충원이 제대로 된 과거 청산과 안장의 명확한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점을 지적했다.김준혁(48) 한신대 정조교양대학 교수는 “제 1 국립묘지인 현충원은 본래 한국전쟁 이후 전사자를 안장하는 장소로 시작됐다”며 “하지만 광복 전후 완벽한 일제청산이 실패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친일 군·경들이 전쟁에 참전, 전사해 국립묘지에 안장되면서 현충원을 둘러싼 역사적 논란이 점화됐다”고 설명했다. 친일과 반공의 과공이 교차하는 역사적 교집합에서 균열이 생겼다는 얘기다.이런 논란이 국가적, 국민적 합의로 종결되지 못한 채 수십년 지속되면서 결국 국립묘지 안장자의 애국심에 대한 의심으로 번졌고, 국립묘지는 자연스럽게 ‘정치다툼의 장’, ‘고리타분한 공동묘지’ 쯤으로 취급되며 젊은 층에게 외면받게 됐다는 것이다. 노명우(44)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립묘지를 둘러싼 부정적 시각은 젊은 세대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 겪는 전반적인 현상이라고 지적했다. 노 교수는 “위로부터 강요되는 애국심이 문제”라며 “우리 국민에게 국가는 시민을 보호하는 존재라기보다 시민에게 의무만 부과하는 존재로 군림해왔다. 국립묘지에 대한 무관심은 젊은층 뿐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사람의 생각이 반영된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이들은 국립묘지가 올바른 역사적 잣대와 미래상을 제시하는 사회통합의 장으로서 제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정치권이 국립묘지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지 않고, 사회적 통합과 화해의 상징으로 활용하는 사례들이 나오며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며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고 미래 공동체를 위해 보수와 진보 모두의 상식에서 용인되는 사람을 안장해 그들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유은총기자 yooec86@kyeongin.com

  •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제2 연평해전 참전 이희완 소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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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와이드·국립묘지를 가다] 제2 연평해전 참전 이희완 소령 지면기사

    월드컵 함성노린 ‘北의 포성’ 젊은장병 목숨 앗아간 31분 전투국립묘지는 소임다한 군인 안식처… 묘비 수만큼 조국은 건재애국, 여기 깃들다 지난달 22일 국립대전현충원. 내내 유쾌했던 소령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이미 각이 잘 잡힌 군복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모자를 반듯하게 매만졌다. 현충원 후방에 위치한 ‘제2 연평해전 전사자 묘역’을 안내하던 이희완(39) 소령은 묘역을 알리는 현수막이 시야에 들어오자 말을 멈췄다. 수많은 묘비가 자로 잰 듯 일렬로 쭉 늘어선 모습을 대면한 취재진도 잠시 말을 잃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비장함에 가슴이 턱 막혀왔다.고(故)윤영하 소령의 묘역 앞에 그가 섰다. 말없이 경례를 한 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묘역을 바라보며 이 소령은 2002년 6월 29일, 뼈아픈 기억을 끄집어 냈다. 참수리 357호 부정장이었던 그 당시를 회상했다. “그 해 6월엔 이상하리만큼 북한 함정과 대치하는 상황이 많았어요. 아마도 우리가 월드컵 축제 분위기에 빠져 있다는 걸 북한이 노린 것 같습니다. 그 날도 아침부터 작은 도발을 시작했고 결국 북한 함정 2척이 동시에 북방한계선인 NLL을 침범하면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31분간 이어진 전투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북한 함정의 무력 도발에서 대한민국 바다를 지켜낸 대가로 젊은 장병들은 꽃 보다 붉은 선혈을 조국의 바다에 뿌려야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진두지휘하던 윤영하 정장님이 뒤로 쓰러지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합니다. 정장님을 구하러 달려갔는데 정장님을 1m남짓 앞두고 저 역시 쓰러졌습니다. 포를 맞아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이 떨리는데 미동도 없는 정장님을 보니 일단 지휘를 해야겠다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부하들에게 몸을 은폐할 수 있는 공간으로 피하라고 지시하고 함수(배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전속력을 내라고 지시했습니다.” 구조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포에 맞아 함정 곳곳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공간이 좁은 함정의 특성상 모든 사람을 동시에 구조하는 일은 어려웠다. 조타장이었던 한상국 중사는 결국 구조되지 못했고, 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