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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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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상생의 공동체 세상 만들기 지면기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아직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며칠 전 뉴스에 우크라이나 드론이 모스크바를 공격했다고 하니,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도 편할 수만은 없는 듯하다. 편하지 않은 게 아니라 큰일이다. 뉴스에 의하면 푸틴 대통령은 징집 연령 상한선을 27세에서 30세로 높이고 소집 영장이 발부된 사람은 출국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싸울 군인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금방 끝내려던 전쟁이 오래 계속되고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강화되면서 러시아 청년들이 허무하게 대량으로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탱크 안에서나 들판에서 우크라이나 드론의 표적이 된 병사들이 희생되는 장면을 텔레비전은 전자게임을 보여주듯 송출하곤 한다. 비록 전쟁을 먼저 건 나라의 병사라 해도 꽃 같은 목숨이 아니던가. 우크라이나는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고골을 러시아 작가로 알고 성장하는 한국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민족적 정서나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이번 전쟁을 통해서야 비로소 소상히 알려지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를 코앞에 두고 여러 쟁점들이 산적한 가운데 나토 가입을 서둘러 푸틴의 전쟁 정책에 빌미를 제공한 점은 없었던가? 그렇지 않아도 푸틴은 체첸 지역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전쟁 상태를 야기함으로써 국민적 지지를 끌어올리는 지도자가 아니었던가? 두 나라는 비록 지배와 피지배로 얼룩진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전쟁으로 서로를 또다시 살상해야 하는 새로운 비극을 연출하지는 않았어야 한다. 이 전쟁에서 나는 국민을 이끄는 지도자가 얼마나 현명해야 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봉기로 세상 바로잡고자한 전봉준젊은 강일순 무고한 희생 염려 거부 고부에서 전봉준이 거사를 일으키고자 하여 같은 고을의 젊은이 강일순을 찾아갔다. 이는 증산교 경전인 '도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정확하게 옮길 수 없지만, 봉기를 일으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한 전봉준의 이야기에 강일순은 무고한 백성이 희생될 것을 염려하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동학군이 결정적인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것은 공주 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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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백범 김구를 생각한다 지면기사
백범(白凡) 김구라 하면 평생 독립운동을 한 지사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주석으로 알았다. 필자가 이 김구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접하기는 춘원 이광수가 해방 후에 '백범일지'를 다듬어 펴낸 문제를 살피고자 할 때였다.일제 말기에 대일협력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광수에게 백범은 어째서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자서전을 펴내게 했던가? 이광수와 김구의 만남은 1908년 황해도 안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김구는 안악 양산학교에서 김홍량이라는 분과 함께 교육운동에 매진하고 있었고, 바로 그때 일본 메이지중학에 유학하던 학생 이보경(이광수)이 여름방학을 맞아 신민회 황해도 지부 몫을 하던 안악의 '면학회'를 찾아 야학 일을 도왔다.이러한 김구와 이광수의 만남은 당시에 신민회 운동을 주도한 도산 안창호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광수는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 앞에서 연설하던 안창호의 정신과 인품에 감화된 학생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고향도 아닌 안악으로까지 방학길을 멀다 않고 찾아갔다. 그렇다면 김구는 어찌하여 그 무렵 그곳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던 것일까?위태로운 국운에 동학투쟁한 김구교육운동 필요 깨닫고 양산학교로안창호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결성 황해도 해주 사람인 김구는 반상의 계급적 현실과 위태로운 국운에 의기를 품고 동학에 입도하여 투쟁한 배외주의적 색채가 강한 인물이었다. 동학 투쟁에서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의 비밀서신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김구는 국모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으려 일본 군인 토전양량(土田讓亮)을 척살한 죄로 인천 감옥의 사형수가 되었다. 그의 사상이 일대 전환을 맞이한 것은 바로 이 인천 감옥에서였다. 인천의 외국계 형사범들을 가둬두는 감옥은 외국문물에 밝은 개화사상가들의 학교와도 같았다. 김구 또한 여기서 옥리가 가져다준 '태서신사'니 '세계지지' 같은 책들을 읽으며 동학투쟁에서 교육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를 발견했다.과연 김구는 '관념의 사람'이 아니라 '행동의, 실천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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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바야흐로 역사혁명 시대 지면기사
유튜브는 실로 놀라운 매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의 요건만 갖추면 누구나 발신자가 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여기서도 일종의 '검열' 같은 것이 있고, 권력 메커니즘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언론의, 매체의, 혁명은 혁명이다.이 유튜브에서 요즘 두드러진 것이 역사 채널, 특히 고대사 채널이다. 최근 필자가 즐겨 보는 채널은 '책보고'라는 것, 그리고 '황현필 한국사'라는 것, 그리고 '이덕일 역사 TV' 같은 것인데, 그 공통점이 고대사 인식을 바꾸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특별히 몇몇 예를 들었지만 그밖에도 유튜브에는 이런저런 고대사 재인식을 겨냥한 채널들이 많다. 필자는 이 채널들을 대부분 '구독' 표시를 해놓았다. 역사라는 것이 어떤 주장을 들어서 진위를 판단하기 쉽지 않고,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도 넘쳐나는 것이 유튜브일 것이다. 제각기 다른 고대사 이야기를 펼치는 많은 '유튜버'들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어떤 대목은 비교도, 대조도 해보아야 하고 정히 궁금한 것은 해당 역사서를 직접 찾아보기도 해야 한다. 최근에는 '흠정 만주원류고'라는 책도 사보았고 '고구려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도 구입해 놓았다.빅데이터 시대 각종 문헌·역사서컴퓨터에서 비교·유추해야 할 것남 보기에 흉이 될 만한 것은 차라리 드러내 버리는 게 낫다. 후배들 가운데 공부를 아주 열심히 하고 있고 그래서 각별히 믿고 경청하는 사람이 있어, 요즘 내가 이렇다 하니, '환빠'가 될까 걱정이라고 한다. '환단고기'를 진서(眞書)라 하고 단군이며 환웅을 신화에서 건져내 역사로 만드는 사람들에 휘말릴까 걱정이라는 것이다. 듣고 보면 과연 그렇다. 이광수를 연구한다고, 그의 역사소설들을 분석한다고 하다 보니 '마의태자'며, '원효대사'며, '사랑의 동명왕' 같은 작품들의 이면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려니, 신채호며, 최남선 같은 일제강점기 역사가들 담론을 '겉핧기'로나마 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남선은 모르겠다.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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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인구 문제, 경제주의를 넘어 지면기사
분명 인구 문제를 경제 문제에 연결시키는 방식은 5·16 직후에 정책화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치면서 예각화되었다.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하더니,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 했다. 안 낳아야 한다는 논리가 이미 40년 전에 정식화되었다. 386세대는 군사독재의 경제성장 논리에는 분배 요구를 내세워 저항했지만 인구가 증가하면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맬서스 인구론적 사고법에는 어떤 문제 제기도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요구와 함께 여성해방 사상도 함께 제출되었고, 그 시점부터 결혼 기피, 출판 기피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X세대는 경제적 풍요로움을 구가하면서도 개인의 행복이나 윤택함을 위해 자손을 포기할 수 있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한 최초의 세대였고, IMF세대는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생각한 최초의 세대였다. 이후 88만원 세대가 뒤를 이었는데, 이는 실질임금의 저하나 빈부 격차의 역행적 확대로 인해 미래에 대한 비관이 확산되고 신념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86세대부터 IMF 세대에 이르기까지 30년 이상을 결혼과 출산에 비판적이었으므로 그들의 자녀 세대인 MZ세대, 즉 밀레니엄 세대부터 Z세대에 이르는 젊은이들에게 이 낡은 전통을 일으켜 달라 하는 것은 현실성 없는 해법 같다. 지금의 20~30대를 설득할 방법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젊은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사회적 진출의 장애요소이자 경력 단절이며, 남성 청년들에게도 그 무거운 사회적 절차는 수행하거나 달성하기 어려운 과업으로 여겨진다. 청년층 결혼·출산 기피 해결 방법은능률·노동집중 위주 자본주의 탈피가족삶 향유 보장시스템 도입해야 과연 방법은 없는 것일까? 만약 지금 정부가 착수해야 할 일이 있다면 사회 전체를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하는 일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지금 진행되는 상황에 따르면 인간 생명을 유지하고 증식시키는데 끝내는 불리한 경제제도임이 밝혀지는 것 같다. 경제가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생산활동에 다투어 투입되어야 하고 이 과중한 노동 집중은 가족적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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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인구, '경제주의'가 문제다 지면기사
바야흐로 인구감소시대다. 2021년, 한국의 출산율이 사상 최저를 기록했다고 했다. 가임여성 1인당 8.808명이었다. 이 해에 태어난 아이들 숫자는 26만500명,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출산율이 1명 이하인 국가는 한국이 유일했다. 여러 곳에서 인구 감소 추세가 뚜렷하다. 무엇보다 학교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요즘 고등학교 교실은 한 반에 스무 명 아래위를 오르내린다고 한다. 농촌 소재 학교는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폐교되는 곳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결혼하지 않으려는 비혼주의,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낳지 않으려는 심리의 소유자들을 주위에서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출산율은 더 떨어질 테고 인구는 격감할 것이다. 한 해에 26만명이 태어난다면 십 년이면 260만명이요, 삼십 년이면 780만명이다. 인구 많은 베이비 붐 세대가 물러가면 한국 사람,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구는 완연히 줄어들 것이다. 어째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너나없이 경제가 문제라고 한다. 먹고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고, 젊은이들이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에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해주지 않는다면, 교육비나 기타 양육비 부담을 줄여주지 않는다면 이런 현상이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아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경제주의다. 오늘의 낮은 출산율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산아제한 정책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처음부터 인구 제한이 '경제개발', '경제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것처럼 표방해 왔다. '경제와 인구 제한' 오랜 사고구조'X→IMF→88만원 세대' 더 극단화MZ세대 '비혼·출산 기피' 결정판 우리의 경우, 군사정부가 들어선 1961년 5월 이후 산아제한 정책이 본격화되었다. 핵무기보다 무서운 인구폭발 운운하며 '적게 낳고 잘 기르자'고 했다. 1970년대 초가 되어서는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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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아버지와 병실에서 지면기사
한밤이다. 병실의 아버지 옆에 누워 옛날 영화를 찾는다. 기억에, 아역배우 김정훈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수술실인지에서 나왔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쓰고 목 아래는 무슨 흰 상자 같은 것에 싸여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었던가, '정훈이'는 부모와 떨어져 껌팔이도 하고 있었다.세상이 좋다. 뭐든 검색을 하면 나온다. 몇 번 찾다가 못 찾은 것을 이번에는 신기하게도 금방 찾았다. 1970년에 상영한 '미워도 다시 한 번 3'이다. 관객 반응이 폭발적이어서 두 번, 세 번, 네 번을 거듭해서 제작했다. 지금 아버지 계신 병원의 의사가 되어 있는 첫째 동생이 이 영화를 보면서 엉엉 울었다. 일곱 살 적에 살던 공주, 스크린에 비가 내리는 공주극장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까지 함께 본 영화였다.김정훈의 극중 이름은 영신이었다. 극중 신호로 분한 신영균은 시골에 아내가 있으면서 서울에서 사업하다 혜영(문희)과의 사이에 영신을 낳게 된다. 혜영은 영신을 신호 부부에게 맡기지만 우여곡절 끝에 영신을 데리고 바닷가로 내려가 혼자 키운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미워도 다시 한 번'이다.세 번째 시리즈에 오면 혜영은 재일교포와 결혼해 일본으로 떠난다. 영신은 신호의 부부에게 맡겨진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영신은 집을 뛰쳐나가 헤매다 범죄를 일삼는 조직에 잡혀가고 만다. 어렸을 적 내 뇌리에 깊이 박힌 장면은 그러던 영신이 교통사고를 당한 대목이다.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가슴이 아프다. 나는 현재에 살고 있지만, 옛날 사람처럼 옛날에 살고 있다. 삶 마지막 고비 넘고 계신 위태로움나는 요즘 정치 신경 쓸 여유없지만 아버지는 병원에 다시 입원해서 두 달 넘으셨다. 작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 누워서만 지내시다 요관암으로 시술까지 받으셨다. 한국 나이로 아흔 살, 삶의 마지막 고비를 넘고 계신다. 십수 년 전에 발견된 위암과 신장암에 이어 네 개째의 암이요,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다.코로나 이후에 병원에서는 환자 옆에 오로지 한 사람만 있을 수 있게 한다. 가족인 보호자든 간병인이든 한 사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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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이태원 참사의 진실을 묻는다 지면기사
기막힌 참사,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비극이다. 즐겁고 기뻐야 할 축제의 현장이 잠깐 사이에 젊은 목숨들을 빼앗기는 죽음의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제2의 세월호라는 말이 있다. 겉만 보면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참사와 유사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필자에게 두 '사태'는 전혀 같지 않다. 그리고 이 다른 점은 사태의 본질에 대한 또 다른 규명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하는 수없이 세월호 참사 당시를 잠깐 회상해 본다. 그때 모든 것이 이상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의 연속이었다. 안산 단원고에서 애초에 예약한 배가 세월호로 갑자기 변경되었고, 배는 안개가 자욱한 비정상적인 상황을 무릅쓰고 출항했다. 항해사는 출항 직전에 세월호 회사에 입사한 사람이었고, 그가 침몰 과정에서 무슨 일을 벌였는가는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진도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이미 배는 상당히 기울어져 있었고, 그럼에도 선박의 선장이며 항해사는 계속해서 항진했다. 이윽고 아침에 배가 수상한 충돌과 함께 기울어지기 시작했지만 선장이며 등등은 승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되풀이했을 뿐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 해경선이 도착했지만 해경은 기울어지는 배에 갇힌 사람들, 선상에 매달린 사람들을 보고만 있었다. 해군도, 공군도 적극적인 구명 활동을 벌이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의 군함이 구조를 돕겠다 하는 제안조차 거부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 그날 아침 일찍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열리고 있었다는데 여기에 늦게 보고된 세월호 사태를 접하고도 정부는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대통령은 연락이 닿지 않았고, 1970년대 한성호 침몰 사건을 기획했는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사는 노인이 모든 것을 주재하는 듯했다. 세월호 큰의혹 간단히 묻히는 현실납득 할 수 없는 또하나의 대량 희생 필자는 반드시 국가 권력을 쥔 누군가가 이 참사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참사에 이은 국정 농단 사태로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대통령은 참사의 의혹을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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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인터넷과 민주주의 지면기사
오래 전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정보화 혁명이 막 부각될 때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던 의제가 있었다.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증진시킬 것인가, 저해할 것인가? 그 무렵만 해도 가상공간이 이처럼 거대한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는 보통 사람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필자 또한 그런 필부 가운데 하나였다. 인터넷의 확산, 보급은 정보 공유로 직결될 테고 이는 보통 사람들, 서민들, 민중, 중산층의 의식 각성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한국은 인터넷과 휴대전화 보급에서 첨단적 수준을 갖춘 나라로 비약했고 모든 면에서 과거의 개발도상국이라든가 제3세계의 일원이라든가 하는 상황과는 절연해 버렸다. 그러면 민주주의와 인터넷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는가? 정치인, 선거 움직이는 여론에 촉각온갖 채널 통해 왜곡·변형되기 일쑤 한국은 국민들의 보통선거를 통해 국가 최고 지도자와 의회에서 일할 사람들을 선출하는 나라다. 선거가 국가 운영의 방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각각의 정치적 세력들은 이 때문에 선거에 명운을 건다.그리고 이 선거를 움직이는 것은 여론이다. 정치세력들은 여론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형식상 이 여론을 대표하는 것은 방송과 신문이고, 포털 사이트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매체들이며, 특히 최근에는 유튜브가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여론조사 기관이라는 것이 우후죽순 생겨 시시각각 국민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조사한다. 그 결과는 각종 통계로 수치화되어 발표된다.참으로 다이내믹하다 못해 숨이 가쁘다. 하루종일 다른 것 안 하고 이런 것들만 보아도 하루가 다 가고 심심치가 않다. 세상 어느 나라도 우리 한국만큼 리듬이 빠르지 못할 것이다.민주주의는 그 속도만큼 증진되는 것 같지 않다. 이것이 최근 필자가 도달한 결론이다. 무엇보다 여론은 인터넷을 통과하면서 굴절되다 못해 왜곡, 변형되기 일쑤다. 온갖 채널의 시사 프로들, 각종 정치 성향의 유튜브들은 무엇이 국민들의 진실한 생각이고 느낌인지 제대로 전달해 주지 않는다. 각종 '여론기관'들은 자신들의 신조에 따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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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다시, 개벽 지면기사
전북 정읍에서 이 고장의 문학을 이야기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내 전공은 소설이므로 정읍의 소설가들, 소설 작품을 논의해야 했다. 날짜는 다가오고 몇몇 정읍이 낳은 중요 작가를 헤아려 보는데, 이 고장이 전봉준과 강일순의 땅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 고장에서 난 작가들을 여럿 논의에 올리지 못하더라도 이 문제를 빼놓고는 정읍의 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녹두장군 전봉준은 태어나기는 여러 이설이 있지만 고창에서 났고, 혁명의 깃발을 높이 올린 것은 고부에서다. 그는 1855년생이라고 했다. 증산교를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강일순은 1871년생이다. 그 또한 고부 사람이고, 지금은 고부가 정읍시의 일부다.증산도 경전인 '도전'에 따르면, 1894년 거사를 앞두고 전봉준 명숙이 젊은 강일순을 찾아가 함께 하자고 한다. 강일순은 이를 거절하는데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될 것을 염려해서였다고 한다. 공주 우금치에서의 '최후' 결전을 앞두고 강일순은 전봉준을 찾아가 역시 농민군이 희생될 것을 염려하여 전투를 만류했다고도 한다. 전봉준·강일순 만남은 그들의 운명분명한건 그 시대 같이 지금도 난세코로나·극심한 경제난과 빈부 격차 전봉준과 강일순의 시대는 난세 중의 난세였다고 할 것이다. 안으로 부패한 조선 관리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수탈을 서슴지 않았고, 밖으로부터는 청나라와 '양이'와 '왜'가 조선을 둘러싼 패권을 노리며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탐학과 환난에 지친 백성들은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고 있었다. 임란 이후 '정감록'의 예언과 '남조선'의 이상을 꿈꿔온 백성들 앞에 경주 사람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포교 3년 만에 처형을 당한 그이지만 그가 남긴 원리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는 가뭄 속 단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부 사람 전봉준에게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 즉 마음을 지켜 하늘을 공경하는 길로, 그러면서도 보국안민(輔國安民)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원리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지방에 만연한 탐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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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칼럼] 개벽의 시대를 기다리며 지면기사
시인 김지하가 세상을 떠난 것은 지난 5월8일이다. 학교 일에 몸이 몹시 좋지 않아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아는 분이 원주 토지문화관에 모신 그의 묘지 비석을 사진 찍어 보내주었는데, 수식 없이 너무 간략해서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그의 시집 '황토'와 시 '타는 목마름으로'는 1980년대 중반 학번인 나에게도 고전이나 다름없었다. 그 무렵 김수영 시집을 끼고 다니지 않으면 지성인 흉내를 낼 수 없었다는 과장법이 있지만 나는 김수영도 김수영이지만 김지하의 시를 좋아했다. 그러고 보면 그때는 선배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김민기의 '금관의 예수', '공장의 불빛', '친구', '아침이슬'은 잊힐 수 없는 노래들이었다.나중에는 김지하의 시집이면 무엇이든 구해서 읽는 버릇을 들이기도 했다. 그때 솔출판사에서 나온 김지하 재간 시집들이 장정이 좋아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확실하지만은 않지만 그때 '검은 산 하얀 방'이라는 시집을 아주 아껴 읽었다. 그 시집이었을 것이다, 시를 퇴고를 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그대로 적어서 옮긴 시들을 수록했다는 것이. 이렇게 음유 시인적인 기질을 지녔던 그가 독재체제와 맞서 싸우며 생명을 내걸었던 것이, 그래서 사형선고까지 받고 감옥에 오래 갇혀 있었다는 것이, 다 지난 일이라는 게 덧없으면서도 한없이 쓸쓸한 감정을 자아내는 요즘이다. 1970년대 긴급조치 시대 시인 김지하1980년대 죽음물결 적응 어려웠을 것 이 김지하 시인이 노태우 정부이던가 아래서 젊은이들이 체제에 저항한다는 뜻을 담아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하는 칼럼으로 세인들, 특히 이른바 진보파 지식인들, 문학인들의 뭇매를 맞고 문인단체에서 제명까지 당했던 것은 돌이켜 생각하면 씁쓸한 아이러니의 하나라 하지 않을 수 없다.스스로 생사를 넘나드는 사형수의 지경에까지 몰렸던 그는 어째서 목숨을 끊은 잇따른 행렬을 향해 그와 같은 말을 해야 했던 것일까?나는 지금도 전태일의 분신에 대해 거듭 생각할 때가 많다. '전태일 평전'을 여러 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