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방민호 칼럼
칼럼니스트 전체 보기-
[방민호 칼럼] 페이스북을 염려한다 지면기사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났다. 국회는 민주당이 지배하고 있지만 행정부, 국가 수반의 자리는 국힘에게로 돌아갔다. 그 사이에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실험의 새 길에 들어섰다고도 할 수 있다.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사이에 문학인들도 바빴다. 특히 페이스북은 특정 정치인, 정치 세력을 지지하고 다른 입장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야말로 문학이 정치에 바싹 다가서다 못해 착 하고 달라붙는 형세가 되었다.과거에 필자도 '생각없이' 어느 분이 시장 재선을 하는데 지지선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 분이 권력의 음모에 희생될 상황이라고 생각했고, 아는 사람을 통해 그런 것을 해달라고도 하니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다.사람의 생각이란 알 수 없다. 더구나 정치적 판단이란 어제와 오늘이, 그리고 내일이 같으리라 생각할 수 없다. 불과 몇 년 지나지도 않는 사이에 나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워낙 몇 사람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 지지를 표명한 것이었고, 뉴스에도 거의 오르내리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었다고나 할까. 진보·보수라는 이분법 절대화 방식선과 악 한쪽으로 모는일 지양돼야공론의 장 잘못 쓰면 나쁜것 될 수도 이번 대통령선거 때는 양상이 아주 달랐다. 문학인들 치고 '좌파' 아닌 사람이 얼마 없다고 할 정도로 현재의 여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넘치고 당선인 쪽을 지지한 사람들은 아주 적었다. 페이스북 같은 '공론장'에서 이런 분위기는 아주 두드러졌다. 대선은 분명 정치적 사안인데, 반드시 누구를 지지해야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식의 극단적 태도가 공공연히 표명되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절대 누구는 안 되고 누구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언젠가부터 한국 정치는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에는 노무현 정부 때부터였다. 그때 나는 이런 구분법을 심각히 우려했다. 이런 명명법이 '민주'와 '독재'라는 그때까지 유지되어 온 선명한 구분선을 흐리게 하고, 정의와 부정의를 변별할 수 없게 한다고 보았
-
[방민호 칼럼] 새 정의, 새 질서, 새 나라를 바란다 지면기사
이제 수요일이면 드디어 선거가 끝난다. 사전선거는 벌써 시작됐지만 9일이 정식 선거일이고 하룻밤이면 새 당선자가 가려질 것이다.이번 선거는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지난번 대선이 탄핵과 함께 시작되면서 유난히 짧게 느껴졌던 것과 아주 대조적이다. 각 당에서 예비경선이 전국을 돌며 온갖 화제와 함께 '후유증'들도 낳았고, 그렇게 선정된 주자들이 요란한 잡음들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지지율 널뛰기를 하며 최후 국면에 다다랐다.돌이켜 보면 작년 여름부터 이번 대선은 벌써 시작되었던 것 같다. 중요한 두 당에서 예비후보 경선이 시작된 한여름을, 나는 일산 명지병원 음압병실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만 11일 동안의 사투 끝에 코로나19 증세는 극적으로 V자를 그리며 회복을 향했다. 병원에서 나온 나는 걸음도 못 걸을 정도였건만, 세상은 다음번 대통령을 뽑는 일로 난리법석이었다. 가을을 넘기고 겨울 쪽으로 들어서자 선거는 점입가경, 두 후보와 안철수 후보까지 생사를 건 '도박'에 피를 말렸다.처음부터 선거는 더불어민주당 태내에서 성장한, 그러면서 민주당의 주류적 흐름에 저항한 두 사람의 각축이었다. 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민주당의 '실정'에 실망한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다른 한 사람은 권력의 '전횡'에 화난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애초에 야당은 이렇다 할 후보를 갖지 못했고, 여당쪽 사람을 빌려다 선거를 치러야 할 형국이었다. 안철수 후보의 기회는 지난 대선의 'mb 아바타' 마타도어 속에서 상실된 듯했다. 이번 대선은 그에게는 기회가 아니라 오히려 중대한 위기였다. 어떻게 해야 이를 잘 헤쳐나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었다. 민주당 계열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와 그동안의 온갖 정치적 풍상 속에서 살아남은, 그러나 운명적으로 두 당의 대표 주자로 역할이 나뉘어진 이, 윤 두 사람의 각축만이 이 나라의 향방을 좌우할 것이었다. 이름·명분으로만, 필요 위해서만정의를 외치고 민주를 자임하고국민 위하는 사람들 세상 사라져야 나는 이 선거 과정을 국면이
-
[방민호 칼럼] 상처 입은 말, 피 흘리는 말 지면기사
말은 우리 말에서 두 가지 뜻으로 쓴다. 하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요, 다른 하나는 초원을 뛰는 말이다.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고 하나는 선명한 자태를 보이지만 이 둘은 그래도 통하는 것 같다.상처 입은 말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초원이다. 배에 독한 화살촉을 맞은 말이 쓰러져 있다. 말은 거꾸러진 채 네 발을 바둥거리고 있다. 화살이 꽂힌 배에서는 흥건히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말의 눈동자에서는 상처로 인한 고통의 빛이 흐른다. 말은 지금 살아있기는 하지만 금방이라도 단말마의 순간을 맞이할 것처럼 처절해 보인다.그와 달리 푸른 초원 위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말을 생각해 보자. 그는 지금 어떤 야생동물에도 쫓기지 않은 채 풀을 뜯다가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바람이 부는 대로 고개를 돌려본다. 이 말의 눈동자는 더할 수 없이 평화롭고, 그래서 그런지 말은 지구상 어느 짐승보다도 고매해 보인다. 말은 갈기도 꼬리도 모두 매끄럽고도 윤기 있게 빛나다 못해 탐스럽기까지 하다. 선거 다가오며 말은 더 거칠어졌다말은 부드럽고 고상하고 기운찬 것 벌써 이십 년 전, 십오 년 전부터 우리들의 말은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그즈음부터 말은 진흙 구덩이 같은 진창에서 뒹구는 듯 더러운 칠을 하고, 어디서 어떻게 날아왔는지 모르는 화살들을 온몸 여기저기 맞아 피를 흘리게 되었다. 오물과 피가 뒤섞여 말은 빛나는 초원 위를 한가롭게 거닐던 아름답고 '귀족스러운' 자태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말았다.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말이다. 이 말은 지금 인터넷과 유튜브를 장악하고도 모자라 공중파 방송에로까지 번진 온갖 악취 나는 더러운 화살들에 여기저기 상처 입은 채 신음하고 있다.본래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누는 말은 어떤 것인가? 어떠해야 하는가?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말은 말끼리 만나 서로 코를 킁킁거리며 상대방이 화나지 않게 기분 상하지 않게 서로를 그윽하게 쳐다볼 줄 알아야 한다. 말들이 서로 만나자마자 뿔 가진 소처럼 상대방을 들이받을 듯 돌진하는 모양은 얼마나 볼썽사나운가. 처음 만나 서
-
[방민호 칼럼] 생존을 위한 '투쟁' 지면기사
새벽 두 시 넘어서 잠이 깼다. 일찍 잠들었으니 그냥도 깰 만한 시간이지만 악몽 때문에 깼다. 요즘 잠자리가 편치 못하다. 문득문득 숨도 가빠지는 것을 느낀다. 여름에 코로나19를 독하게 앓고 회복되기는 했지만 후유증이 만만찮음을 느낀다. 한 번 깨면 또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게 요즘 생긴 습관이다.꿈이 너무 끔찍해서 대전에서 대장암 수술을 하고 퇴원하신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다. 원래 내 꿈은 맞는 법이 없기 때문에 한편으로 괜찮겠지 하다가도 결국은 전화를 드려본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초저녁에 주무시고 한밤에도 깨어 계신 때가 많기 때문에 썩 놀라실 것 같지 않아서다. 역시나 별일은 없다. 날이 새면 어차피 대전에 다시 내려갈 테니까 큰 걱정은 안 된다. 퇴원하셨지만 고령에 워낙 큰 수술이었기 때문에 걱정이 컸다. 수술 3주 만에 집에 돌아오셨지만 당신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셨고, 식사도 거의 못하셨으며 드신다 해도 죽 두어 숟가락이 고작이셨다. 몸은 체육교사를 하신 건장한 체구가 최근 몇 년 새 부쩍 줄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종잇장처럼 얇아져 버리셨다. 아버지 수술·유튜버 김쎌 암투병…요즘 살아남는게 처절하게 느껴져코로나 위중증 환자도 1천명 향해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휴대폰을 들어본다. 잠잘 때도 언제나 머리맡에 두고 눈이 감길 때까지 보는 버릇을 없애야 한다.코로나 확진자가 오늘도 '6,689'에 고정되어 있다. 네이버 담당자가 공휴일에는 쉬는 때문일까? 아니면 토요일과 숫자가 비슷해서 차이를 못 느끼는 것일까? '7000'이 다 안 된다는 사실에 잠깐 안도한다.유튜브 앱을 여니 김쎌의 브이로그가 올라와 있다. 한때 구독 채널을 마구잡이로 늘려 근 이백여 개에 달했다. 여름에 코로나를 지독하게 앓고 나은 후 다 없애 버렸다. 지금은 이 김쎌이 단 하나 구독 채널이다. 화면 속에서 김쎌은 창백한 병기를 가리는 약간의 볼터치를 했다. 그녀는 핑크를 좋아하는지 그림도 핑크톤이 지배적일 때가 많다. 오늘은 옷도 핑크아이싱 빛깔이다.동영상을 올리지 못한 한 달 동안 무척이나 아
-
[방민호 칼럼] 다시 신분혁명을 해야 지면기사
옛날에 음서제도라는 게 있었다고들 한다. 고려시대에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제들에게 무시험으로 관리가 될 수 있도록 했고 조선시대 들어서는 2품 이상 관리의 자제들에게 그런 특전들을 주었다고 한다. 부친, 조부의 음덕을 입어 벼슬아치가 되는 것인데, 이렇게 해서 선발된 이들을 음관이라 불렀고 일반적으로는 당상관 이상의 요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그것은 원칙이었을 뿐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고 한다.현대 이전의 일, 아득한 옛날의 일이라고 하겠지만 필자에게는 이게 옛날 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요즘 대통령 선거 시즌이다. 그러다 보니 각종 '개혁' 공약이 등장하는 가운데 급기야 행정고시를 없앤다는 말들도 나왔다. '고시'라는 말이 붙은 게 사법고시, 외무고시가 있었지만, 바뀌거나 없어졌고 '행시'만 남은 것이, 그마저도 없애자는 것이다. 요즘은 공약이 난무하는 대선 시즌'행시'마저 없애겠다는 말이 있다 한편으로는 맞다. 20대 어린 나이에 '고시 패스'라고 해서 5급 공무원으로 나서는 게 바로 이 고시다. 시험 하나 잘 봤다고 경험 많고 실무 잘하는 7급이나 9급들 위에 앉는 게 좋다고만 할 수 없다. 능력을 쌓고 성실히 일하면 누구나 진급할 수 있고 더 나은 위치에 갈 수 있으면 나쁠 일은 없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행시마저 없어지면 이제 '없는 집' 자식들은 어떻게 빛을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행시마저 없어지면 '개천에서 용 났다'는 이야기는 이제 '고어사전'에서나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좋은 취지에서 시작하지만 결코 그렇지 못한 것을 여러 곳에서 본다.예를 들면 중·고등학교의 '수시평가'만 해도 그렇다. 학생도 힘들고 교사들도 힘든 것 말고 무슨 실효성이 있나. 대학을 성적순으로만 들어가지 않게 하자, 사회봉사도 할 줄 알고 책도 좀 깊고 넓게 읽은 인재를 뽑자는 게 수시평가요, 수능시험이다. 그러나 어디 뜻대로만 되었던가? 국어능력 평가는 국어교과서, 문학교과서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
[방민호 칼럼] '정치적 올바름'에 관하여 지면기사
문학 쪽에서 최근 몇 년 사이에 평론가들, 작가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다.사전에서 이 말은 이렇게 설명된다.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에서, 인종·민족·언어·종교·성차별 등의 편견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지기를, 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에서 정치적 관점에서 차별과 편견을 없애자는 취지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이러한 개념 정의에 따르면, 이 말은 원래 '말의 표현이나 용어의 사용'을 바꾸어 보자는 주장에서 출발한 것이다. 말 표현·용어 사용 차별·편견 없게다민족국가인 미국 등서 사용 시작 거금 20여 년 전쯤 일본 문단 얘기를 들으니, 특정계층이나 신분에 속한 사람들, 특정한 신체적 특징을 지닌 사람들을 비하하는 표현을 소설 작품 같은 데서 일절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차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말, 편견이 내포된 말들은 존중받아 마땅한 표현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사용이 금기시되었다는 것이다.미국에서 1980년대에 확산되기 시작한 이 흐름을 필자는 1990년대 후반의 일본에서 접할 수 있었던 것인데, 2010년쯤 되자 한국문학은 젊은 문학인들을 중심으로 이 말을 금과옥조처럼 믿는 듯한 경향이 나타났다.그런데 한국문학에서 이 말은 '문학은 정치다'라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류의 인식과 단단히 결합된다.랑시에르는 문학이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은 한 사회의 감성 체제를 새롭게 하고 그럼으로써 기존의 체제에서는 보이거나 말해지지 않던 것들을 새롭게 나타내고 표현해 준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사실주의 예술이 예전에는 재현 대상이 되지 못했던 노동자, 농민들을 예술작품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현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새롭게 해주었다는 식일 것이다. 이렇게 예술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감성 체제를 부단히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그는 감성의 분할과 재분할을 이야기했다.그런 것이 한국문학에서 이러한 담론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을, 글자 그대로, 정치적으로 올발라야 한다는 뜻으로
-
[방민호 칼럼] 코로나 병동에서 생각한 삶과 역사 지면기사
코로나19에 걸려 꼬박 열흘을 중환자실에서 보냈다. 중증환자들만 끼는 고유량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서 살지 죽을지 모르는 시간을 보내며 인생은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곱씹었다.삶과 죽음을 다투는 사나흘이 지나 완연히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친구라고는 유튜브밖에 없었다. 잠들어 있거나 비몽사몽으로 깨어 있거나 간에 창밖에 무음으로 돌아가는 세상과 연결되는 수단은 휴대폰 유튜브밖에 없었던 것이다.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대통령 선거에 관련된 뉴스들은 아예 관심이 가지 않았다. 딴 세상 얘기 같았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수도 카불에 입성했다고 하고,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이 미군 철수를 얘기한 지 불과 몇 달만에 정부가 무너졌다고도 했다. 그런 것들도 '내 세상' 바깥의 일만 같았다. '내'가 지금 당장 살고 죽는데 대통령 선거든 아프가니스탄이든 다 먼 얘기들처럼 들렸던 것이다. 감염후 꼬박 열흘… 죽다 살아났다바깥에선 대선·탈레반등 역사속 삶내가 죽는데 병상에선 먼나라 얘기 꿈을 꾸듯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유튜브는 저절로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 이경석이라는 문인이 있었다고 했다. 주전파들이 '득세'하는 가운데 인조 왕이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다시피 하다가 끝내 견디기 어려워 세자와 함께 삼십 리를 걸어서 삼전도에 나아가 청 태종에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기에 이른다. 그네들은 자기 나라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글을 써서 비문으로 남길 것을 요구하는데 이때 이 삼전도비를 쓴 사람이 이경석이라고 했다.여러 신하들이 쓴 글 가운데 그중 이경석이 쓴 글이 과장이 적다고 해서 청나라에 보냈지만 그들이 화를 내면서 글을 고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인조가 이경석을 '타일러' 조정의 명운이 달렸으니 문장을 다시 쓸 것을 명하는데, 그렇게 해서 이경석은 역사의 치욕으로 남겨진 비문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어려서 형에게 글을 배운 이경석은 그 형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글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런 한은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고 했다. 나는 병든
-
[방민호 칼럼] '자유'에 관해 생각한다 지면기사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사람이 누릴 자유를 나무에 비유자신의 삶의 영역 지키며 살아가줄기·가지 '향상성'은 중요한 가치남에 의존하지 않고 가로채지 않아다시 정치의 계절이 성큼 다가들었다. 언제인들 이 나라에서 그렇지 않은 때 있었으랴만, 바야흐로 바싹 다가온 정치는 아주 큰 일임에 틀림 없다.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정부 요인을 선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까지 나라가 두어 번은 몸을 이리저리 뒤채일 판이다.그래서 더욱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정치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한다고, 그보다 더 밑바닥, 더 근본적인 일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잔뜩 긴장하지 않으면 또 그 '정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말 테다.그렇기는 그러하나, 요즘 이 정치에 오르내리는 말, '자유'에 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됨을 어찌할 수 없다. 이 말을 가지고 어느 편 드는 정치 대신 삶의 원리에 관해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두 번 정도 열독한 적이 있다. 지금은 구체적인 내용은 거의 다 잊었다. 확실한 인상 하나, 그것은 이 책을 쓴 사람이 '자유'에 관하여 근본적인 성찰을 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자유'는 그러니까 여기에 '이즘'을 붙여 자유주의라고 환원해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하늘이 내리고 땅이 길러주는 사람의 권리와 다름 없다.이 밀의 논의에서 흥미로운 것 하나, 그는 사람이 누려야 할 이 '자유'라는 것을 나무의 자유에 비유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 당장 이렇게 생각할 법하다. 발도 달리지 않은 나무가 무슨 자유가 있으며, 이런 나무를 비유의 매개체로 삼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냐? 그런데 이 비유가 성립할 수 있음을 그는 보여주었던 것 같다. 이제 그의 논의를 필자가 수용한 방식대로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나무는 저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자신의 삶의 영역을 지키며 살아간다. 한 나무가 다른 나무를 침해하지 않으니, 이런 타자의 삶의, 그
-
[방민호 칼럼] 아, 아버님이 어머님 거 사러 오셨구나! 지면기사
휴대전화를 바꾸고 싶다는 어머니노인 인구가 많은 집 근처로 나갔다젊은점원은 '온갖 질문' 친절 응대중 뒷 목 땀에도 혼자 척척 밝은 표정나도 한참 걸려… 세상은 아직 살만어머니께서 휴대전화를 바꾸고 싶다고 하셨다. 당장 바꾸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옛날에 속 많이 썩힌 게 죄스럽기만 하다. 어머니 신분증만 있으면 어디서도 살 수 있는 휴대전화다. 집 근처에서 웬만한 것으로 장만해 드리자, 생각한다.독바위역에서 불광역까지는 서울은 서울이지만 아직도 중소 도시 정취가 난다. 이런 소리도 주민들 들으시면 집값 떨어지는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정겹다는 뜻이다. 떡집이 많은 것은 옛날 사람이 많이 산다는 뜻이다. 노인분들이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동네다. 한가한 거리를 구경꾼처럼 걷다가 휴대전화 대리점 중에 그래도 좀 크다 싶은 대리점으로 들어간다. 베스트 뭐라는 이름을 가졌다.젊은이 하나가 노인 두 분을 응대하고 있다. 역시 옛날 분들이라 하나를 설명해도 자꾸 되묻는 통에, 아예 저쪽 탁자에 가 앉아서 기다리기로 한다. 휴대전화 하나 개통하는데 얼마나 많은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지 모른다. 휴대전화 종류는 얼마나 많고 약정은 또 얼마나 많은가.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두 분이 나가시고 내 차례가 된다. 나가시던 분들이 다시 들어와 깜빡하셨다는 듯 또 뭔가를 물으신다.대리점원이라고는 토요일에 젊은이 한 사람뿐이다. 나이는 한 서른쯤 된 것 같다. 참 끈기가 있다. 말끝마다 예, 예, 그렇지요 등등 공대를 하는데 시쳇말로 요즘 젊은이 같지 않다.드디어 내 차례다. 내가 그를 향해 썩 다가선다. 그가 '아버님, 어떻게 오셨어요? 아버님 휴대폰 바꾸시려고요?' 한다.순간적으로 허를 찔린 기분이다. 내가 벌써 '아버님'으로 불릴 나이가 됐나? 하기는 지난 번에 고혈압으로 늘 다니는 내과에 가서도 같은 소리를 듣기는 했다. 오랜만에 혈액검사를 하려는데 평소에 안 보이던 간호사가 나를 보고 '아버님 이쪽으로 오실게요'한 것이다. 공대법과 명령법이 교묘하게 결합된 이 '오실게요', '하실게요'
-
[방민호 칼럼]'배민' 시대에 생각하는 '정상화' 지면기사
인터넷·정보화 시스템 덕분에코로나 시대 경제적 타격 적고Zoom 수업… 그러나 언제까지슬픔도, 웃음도, 의문 해결도직접 만나 나눌 수 있길 바란다벌써 칠팔 년은 족히 된 일이다. 충청북도 보은 가까운 어딘가로 선생님들끼리 학사협의회를 갔다. 한갓진 데로 가자고들 하셨다. 찾는다고 찾은 곳이 근처에 슈퍼도 음식점도 없다시피 한 궁벽한 산촌이었다.밤은 깊고 슬슬 뱃속이 출출해지면서 뭔가 먹기는 먹어야할 텐데 준비해 온 음식들은 거의 다 동났다. 어떻게 하나? 하고 다들 궁금해하는데 내 머릿속으로 번개같이 '배달의 민족'이 떠올랐다.그때만 해도 내가 우리 과에서 가장 최신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농담이지만, 아무튼, 휴대폰에 깔려 있는 '배민'으로 검색을 해 보니 과연 치킨 같은 것을 배달해 주는 데가 두어 곳 뜨기는 떴다. 그런데, 차로 줄잡아 20~30분은 족히 걸리는 곳이다. 그래도 전화를 하니 우리 쪽 사정이 딱해 보이셨는지 근 한 시간만에 드디어 음식이 배달되었다. 선생님들 환호성 소리가 낮지만은 않았다.그랬는데, 한동안 '배민'이라고는 그 숱한 광고들을 보고도 무심하게 지나치곤 했다. 그저껜가 웬일인지 이 '배달의 민족' 생각이 나 평소에 맛이 좋은 봉평 산골 메밀국수 음식점을 찾아보는데, 체계가 달라져도 많이 달라졌다.우선 전화로 서로 통화를 하는 게 '없어졌다'. 전화 주문이 있는지는 몰라도 화면에 그냥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 선택해서 결제하면 끝이었고, 카톡으로 완료를 알리는 문자가 달려왔다. 그러고는 음식점에서 출발했다는 둥, 어디쯤 오고 있다는 둥 하더니 현관 문앞에 배달이 되었으니 혹시라도 분실되지 않도록 빨리 수령하시라는 것이다. 배달해 주시는 분은 얼굴도 못 보고 맛있는 막국수를 맞아들일 수 있었다.경험하고 보니,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다. 요즘 가뜩이나 코로나19 덕분에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을 못하는데 이런 배달 시스템이라도 없었으면 장사하는 사람들 다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다. 그런데 이 변화는 오로지 긍정 쪽으로만 작동하는 것일까?어느 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