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with+
칼럼니스트 전체 보기-
[with+] 사람 됨됨이와 언어 지면기사
그날은 언어 사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준 날이었다. 지하철 안에서였다. 내 옆 좌석에 앉은 대여섯의 여성들이 수다를 떨었다. 그들은 한 동네에 사는 것 같았고 오십 대로 보였다. 그중 한 명이 "강북 사람들은 왜 강남 사람들을 미워하는 거야?"라고 묻자 다른 이가 "강남 집값이 비싸니까 그렇지"라고 받아쳤다. 처음에 물은 이가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잖아. 억울하면 강남으로 이사 오라고 해"라는 말을 던지자 모두 까르르 웃었다.그들이 그런 얘기를 꺼낼 만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얘기에서 서울 강남 지역에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리고 '억울하면 강남으로 이사 오라고 해'라는 말이 귀에 거슬렸다. 지난해부터 집값 하락이 지속되었으나 비강남 지역에서 강남 지역으로 이사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게 현실이다. '억울하면 강남으로 이사 오라고 해'라는 말이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로 들렸다. 이 말은 출세할 능력을 가진 자에게는 격려로 들리지만 출세할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조롱하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의없는 농담 할지라도 듣는 이의자존심 건드리고 마음에 상처 입혀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면 분위기가 한껏 들떠 있어 누구나 말실수를 하기 쉽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친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지하철 타고 왔니? 웬만하면 차 좀 사라." "아직도 청바지 입니? 난 너 정장 입은 걸 못 봤어." "양주를 마셔 봐. 그다음부턴 소주를 못 마실 걸." 이런 말들은 악의 없는 농담이라 할지라도 듣는 이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특히 경제 사정이 어려운 이에게는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번에는 친구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책 좀 읽어라. 그래야 대화가 통하지." "그것도 몰라? 얘는 뉴스도 안 보나 봐." 이런 말들은 지식이나 정보가 부족한 점을 지적함으로써 듣는 이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특히 학력이 낮은 이에게는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다.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에 만연해
-
[with+] 떠나는 기쁨과 돌아오는 기쁨 지면기사
친구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에게 이것이 특별한 이유는 친구의 집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고, 4년에 걸친 가족여행을 마무리한 귀환이기 때문이다. 두 아들을 둔 친구네 부부는 몇 년 전 집을 샀는데 그때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집이 있으니까, 언제든 떠날 수 있어." 어지간한 일이 생기더라도 돌아올 집이 있으니 오히려 떠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다시 몇 년 후에 캠핑버스를 샀다. 지인이 팔려고 내놓은 것을 운명의 계시로 해석하여 모든 것을 차에 싣고…. 그렇게 라틴아메리카 종주를 시작한 것이다.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중간중간 일도 해야 했고, 여러모로 대단한 각오를 하고 떠난 모험이었다.가족은 여러 나라의 국경을 넘어 바다와 산으로 돌아다녔다. 어린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라기보다 바퀴 위의 집에서 살아가는 일에 가까웠다. 순조롭던 여정은 파나마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코로나로 모든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결국 자꾸 퍼지던 캠핑카도 처분하고 봉쇄가 풀리자 가족 모두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의 나라에서 2년 정도 살다가 이제 다시 아빠의 나라인 아르헨티나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4년간 세계일주 가족여행 마친 친구몇년전 집 사고 "언제든 떠날수 있어" 돌아간 친구에게 정말로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긴 여행을 하게 되면, 떠날 때의 기쁨과 돌아올 때의 기쁨 중에 어느 것이 더 컸어?"라는 것이었다. 젊은 부부가 아이 둘을 데리고 세계일주의 첫 발을 뗐을 때의 설렘, 산전수전에 코로나까지 겪고 4년 만에 훌쩍 큰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은 성질이 다르겠지만 어느 것의 '진동'이 더 컸을지 궁금해서였다. 이런 질문은 '오디세이'를 읽다가 떠올랐다. 트로이 원정을 떠날 때 오디세우스는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이십 대의 젊은 남자였다. 더 큰 세상, 공을 세우고 막대한 전리품을 누릴 수 있는 전쟁이라는 무대로 나아가는 그의 옆에는 아킬레우스와 같은 그리스 최고의 장수와 아가멤논, 아이아스와 같은 영웅들
-
[with+] 봄밤 지면기사
매화 꽃 몽우리가 잠 이루지 못하는 봄밤이다. 진달래 붉은 마음이 울렁이는 봄밤이다. 꽃다지 싹들이 서로를 시샘하는 봄밤이다.장옥관 시인은 봄밤을 이렇게 노래했다. '돼지가 생각나는 봄밤이다/돼지감자가 땅속에서 굵어가는 봄밤이다/시커먼 돼지들이 벚나무 아래를 돌아다니는 /봄밤이다 하이힐을 신은 돼지/뻣뻣한 털로 나무 밑동을 자꾸 비벼대는 봄밤이다/미나리꽝엔 미나리가 쑥쑥 자라고/달은 오줌보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고/여린 꽃잎은 돼지의 콧잔등을 때리고/깻잎머리 여중생들이 놀이터에서 침을 퉤퉤 뱉다 돼지를 만나는 봄밤이다 봄밤에는 돼지가 자란다/천 마리 만 마리 돼지들이 골목을 쑤시다가/캄캄한 하수구로 흘러드는 봄밤/풀어 놓은 돼지들을 모두 풍선에 매달아/하늘로 띄우고 싶은/봄밤이다'.'봄밤'의 돼지는 인간의 무한한 욕망일 것이다. 욕망은 진화와 발전의 에너지이기도 하고 절망과 파산의 원인이기도 하다. 정치가 성인 남성들의 안주거리가 된 지 오래다. 안주거리가 진지해지면 서로 핏대를 세운다. 상대방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기는 쉽지 않다. 정치인들이 그러하니 국민들도 그렇게 학습되는 양상이다. 지지하는 정당이 다르거나 미래를 거는 정치적 지향점, 예컨대 보수냐 진보냐에 따라 서로 먼 길로 들어선다. 서로의 주관성을 인정하고 타협하려는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점점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극단적인 진보주의로 흐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꿈꾸는 밤이지만 현실은 달라홀몸노인들 속풀이 말벗 있어야지자체 보살펴주지만 충분치 못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다. 인간이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모든 조직은 좋은 것을 달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형성되며 국가는 그런 조직의 완성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최종 형태이며 최선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국가는 구성원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수립해나가야 하는 책무가 있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외부적인 선, 즉 물질적인 선과 육체적인 선, 그리고 정신적인 선으로 이루어
-
[with+]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지면기사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다가 내 첫 산문집을 발견했다. 2013년에 쓴 책이니 딱 10년이 되었다.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했던 그 책의 홍보 카피 중 하나는 '마흔 살 노처녀가 들려주는 소소하고 다정한 이야기'였다. 그 카피를 가만히 쳐다보자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싶다. '노처녀'라니. 2023년 지금 '노처녀'라는 단어는 감히 출판계에서는 쓸 수 없다. 결혼을 못 하고 늙어버린 처녀라는 말을 쓰고도 무사하길 바랄 수는 없을걸. 결혼을 아직 하지 못한 '미혼'이라는 단어도 퇴출된 지 오래다. 이제는 모두 '비혼'이라는 단어를 쓴다.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쓴 걸 보고 내가 정색했다. 아직도 이런 단어를 쓰냐고, 동물이 어떻게 장난감이 될 수 있냐고 야단하는 나에게 학생이 말했다. "사전엔 있는데요?" 사전에 있어도 '애완동물'은 사어(死語)나 다름없다. 이제는 '반려동물'이다. 그러고 보니 십 년 전쯤 어느 국어학자가 신문 칼럼을 쓰며 내 소설을 들먹인 적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오래 지켜온 우리 낱말을 함부로 바꿔쓰는 작가로 나를 호명한 것이었다. 그 학자가 문제 삼은 건 '길고양이'였다. '도둑고양이'라는 올바른 낱말 대신 출처도 알 수 없는 '길고양이'라 썼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 가는데 그깟 낱말 따위. 불과 십 년 사이 우리는 다들 변했다. "잘 지냈어? 결혼은 했고? 아직 안 했어? 어쩌려고 그래?" 오랜만에 만나 그런 인사를 건네는 친구는 이제 없다. 무례한 소리라는 걸 이제 안다. 맞벌이인데 남편 밥 안 챙겨주냐고 잔소리하는 시어머니는 이제 설 자리가 없다. 아내가 늦은 퇴근을 할 때까지 쫄쫄 굶으며 기다리는 남편이 있다면 남편의 친구들도 그를 욕할 것이고, 데이트 비용을 반반 내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그건 같은 여자들에게도 욕을 먹는다. 되지도 않을 끈적한 농담 따위 지껄였다가는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초등학생이 된 내 딸도 "엄마, 여왕은 있는데 왜 남왕은 없
-
[with+] 오슈코른 영감을 떠올리며 지면기사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튀르키예 지진 같은 굵직한 사건만 큰 비극을 낳는 게 아니다. 다만 마음의 병이 깊어져 슬픈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야기를 소개한다. 오슈코른 영감은 장날에 장터로 가다가 조그만 노끈 오라기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소용이 될 만한 것이라면 주워 모아 두는 게 좋다고 여겨 그 하찮은 노끈을 주웠다. 노끈을 주운 이 행동이 남의 지갑을 주운 행동으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누군가 500프랑의 돈과 서류가 들어 있는 가죽 지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도둑으로 몰린 오슈코른 영감은 결백을 주장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아 밤새도록 앓았다. 이튿날 오후 가죽 지갑의 도난 사건이 해결되었다. 길에서 지갑을 주웠다는 사람이 주인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어서다. 그 소식이 곧 그 근방에 퍼졌고 오슈코른 영감도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의기양양해져서 온종일 누명에서 벗어난 자기 얘기를 했다. 길 가는 이를 만나도 그 얘기였고 술집에서 술 마시는 이들과도 그 얘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공모자나 공범자를 시켜서 그 지갑을 되돌려주게 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기에 대한 의심이 너무나 부당한 것임을 깨닫고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온통 노끈 이야기에 사로잡혔고 몸이 축났다. 그는 섣달그믐께 앓아눕더니 정월 초순에 죽고 말았다. 이 소설의 제목은 '노끈 한 오라기'로 기 드 모파상이 썼다. 그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앓다가 죽었을까. 그가 앓은 병에는 먹는 약이 소용없다. 자기 말을 누군가가 믿어 주는 것만이 약이 될 뿐이다. 만약 그의 말에 공감해 주는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오슈코른 영감이 범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뒤부터는 그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라도 한 듯, 지갑이 주인에게 돌아갔음에도 그의 말에 공감해 주지 않았다.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할 때 필요한 열린 마음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노끈 주워 도둑으로 몰려 앓다 숨져'결백 주장' 주
-
[with+] 하얀 담장에 난 초록색 문 지면기사
허버트 조지 웰스는 '타임머신', '투명인간' 등으로 알려진 초기 SF의 대표적인 작가다. 그의 단편 '담장에 난 문'을 읽다가 '나, 이 이야기 알아, 이건 내 이야기야'라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책 속 장면에 기시감을 느끼며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이건 정말 생각지도 않은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빨아먹는 몰아의 순간이다. 나는 읽던 페이지에 손가락을 끼운채 지금 막 떠오른 기억에 사로잡힌다. 어쩌면 책 읽기란 나에 대한 새로운 데이터를 캐는 행위인 것 같다.'담장에 난 문'의 주인공은 다섯 살 때 거리를 걷다가 '하얀 담장에 난 초록색 문'을 발견한다. 어린 윌리스는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아름다운 정원에 많은 사람들이 경쾌한 분위기를 만들고, 왠지 모르게 퓨마 두 마리도 있다. 윌리스는 친구들을 만나 재밌게 놀다가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책 한 권을 보게 되는데,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삶이 기록되어 있다. 책 속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조금 전의 자신을 발견하자 어느덧 정원 밖으로 나오고 문은 사라져 버린다. 그 후 윌리스는 평생에 걸쳐 '담장에 난 문'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정원과 퓨마에게 끌리면서도 번번이 그 문을 지나쳐 버린다. 보다 중요한 문제와 사회적인 책임과 급박한 일이 생긴 탓도 있지만 이상한 거부감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야기의 주인공이 늘 그렇듯이…. 결말은 각자 읽어보시라. 이 작품은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독특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매우 보편적인 일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은유를 풀어버리면 '우리는 혼자서 간직하던 몽상을 평생에 걸쳐 주기적으로 마주치게 되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 기시감이라고 불리는 감정의 덩어리. 몹시 끌리면서도 번번이 외면하게 되는 초록색 문과 같은 나만의 세계.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잊고 있던 꿈들이 떠올랐다. 웰스의 소설로 잊고있던 꿈 떠올라혼자 간직하던 몽상을 주기적으로마주치게 되지않나 라고 자문한다 사십대에 막 들어섰을 때 이런 꿈을 꾼 적이 있다.
-
[with+] 나는 왕이로소이다 지면기사
노작 홍사용은 1900년 5월17일(음력)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현재의 본적지는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492번지다. 석우리는 속칭 돌모루라고 불리는 곳으로 남양 홍씨의 집성촌이며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그는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3·1운동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되기도 했다. 1920년 박종화, 정백 등과 문예동인지 '문우'를 창간했다. 1922년에는 신문학운동을 주도하던 동인지 '백조'를 발간하기도 했다.홍사용 1923년 '백조'에 발표된 詩일제강점기 청년들 슬픔·분노 담겨 노작은 1923년부터 토월회에 깊이 관여하면서 연극운동에 열정을 보이기 시작했다. 토월회의 문예부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신극운동에 참여한다. 1927년 박진, 이소연 등과 극단 산유화를 결성해 창작희곡 '향토심'을 무대에 올렸으며 1930년 최승일, 홍해성 등과 극단 신흥극장을 조직해 연극운동을 펼쳐나갔다.그의 대표작은 1923년 9월에 문학잡지 '백조'에 발표된 새로운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일 것이다. 소설로는 '저승길', '봉화가 켜질 때' 등이 있다. 그의 대표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나는 왕이로소이다./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그러나 십왕전에서도 쫓기어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맨 처음으로 내가 너에게 준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신다면은/"맨 처음 어머니께 받은 것은 사랑이었지요마는 그것은 눈물이더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겠지요만은…./"맨처음 네가 나에게 한 말이 무엇이냐" 이렇게 물으신다면은/맨처음 어머니께 드린 말씀은 '젖주셔요'하는 그 소리였지요만은 그것은 "으아"하는 울음이었나이다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만은…//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
[with+] 먹 가는 밤 지면기사
벼루와 먹을 꺼냈다. 그전에 새 붓과 화선지도 준비해두었다. 사실 주문한 상자 안에는 먹물도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벼루에 먹을 갈지 않아도 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흰 화선지에 천천히 글씨를 쓰고 싶었고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그중에 500밀리 플라스틱 통에 든 먹물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먹물 통을 보니 내가 원한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씨를 쓰고 싶었다기보다는 사각사각, 하는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벼루에 천천히 먹 가는 소리. 뒤늦게 나는 다시 벼루와 먹을 주문했다. 나는 문예창작학과 졸업생이다.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기 전 다른 학교 사범대학을 3년이나 다녔다. 애초 내 꿈은 소설가였으나 철들 리가 없는 스무 살에 소설을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그저 무난하게 사범대학에 진학했던 것이다. 나는 충분히 철이 든 후에 소설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첫 소설을 쓰고 싶었다. 3년 동안 어울리지도 않게 교육학 책을 들고 다니며 나는 마냥 지루했다. 이왕 3년이나 다닌 것, 그냥 한 해 더 다녀서 졸업을 하고 교사 자격증이라도 딸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내가 기어이 사범대학을 그만두고 만 건 우습지만 먹을 갈기 싫어서였다. 먹 갈기 싫어서 사범대학 그만두고유학도 포기… 문예창작학과 졸업 당시 내가 다녔던 학교의 학과장 교수님은 명망 있는 서예가였는데 걸핏하면 학생들을 불러 연구실에서 먹을 갈게 했다. 조교가 까딱까딱 손짓을 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 그게 먹을 갈라는 소리인 줄 알아 모두가 어깨를 푸들푸들 떨며 진저리를 쳤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청춘들을 짧으면 네 시간, 어떤 날에는 일곱 시간까지도 잡아두고 먹을 갈게 하니 그걸 누가 좋아했을까. 이유를 알 도리는 없지만 내가 제일 자주 불려갔다. 사브작 사브작 교수님이 화선지 넘기는 소리를 들으며 먹을 갈았다. 그러면 사각사각 벼루 위에서 먹이 움직이는 소리가 섞였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연구실 창밖으로 노을이 졌고 잣나무가 흔들렸다. 처음에는
-
[with+] 대퇴사시대를 건너가기 위하여 지면기사
지난 연말, 아르바이트 직원이 마지막 근무 날에 팀원 모두가 소속된 단톡방에 '퇴사 레터'를 보내고 떠났다. '퇴사 뉴스레터 vol.1'이라는 제목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뉴스레터 1번이라는 건 앞으로 2번, 3번이 계속 있다는 뜻인가 싶기도 했고, 짧다면 짧은 기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이런 소회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요즘 유튜브에 퇴사 소회를 올리는 MZ세대가 많다는 기사를 보고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셈이다.퇴사 뉴스레터까지는 아니어도, 퇴사 소식과 함께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짤을 올리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이누야사'의 가영이 캐릭터는 MZ세대를 중심으로 '퇴사짤'이자 '밈(Meme·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사진이나 영상)' 열풍의 중심에 서 있다. 해리포터 영화에 나오는 '도비는 자유예요' 짤 역시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인가 퇴사는 더 이상 '인생의 결단'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로 바뀐 느낌이다. 한 회사에서 오래 일하는 것은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다. 바야흐로 '이직이 경력관리가 된 대퇴사시대'라 할 만하다. "한 회사에서 최소한 1년 이상은 버텨야 한다"는 조언은 옛날옛적 '라떼' 이야기가 된 지 오래다. 심지어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라는 용어가 급속히 확산 중이다. 조용한 퇴사는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만 하고 그 이상의 일은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MZ세대, 자유·휴식·새로운 시작…'퇴사' 10명중 7명 긍정적으로 생각당장 '원하는 것 해보겠다' 사람 늘어 예전에는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는 것이 골치아픈 상사, 낮은 연봉 등 이유가 '남' 때문이었다면 요즘은 '나'를 위해서라는 대답이 다수다. 작년 6월에 한국리서치에서 최근 2년 이내에 자발적인 퇴사 경험을 한 MZ세대를
-
[with+] 봉 원장과 이 원장 지면기사
살기 좋은 지역 사회는 좋은 차와 맑은 물의 만남과 다르지 않다. 지역 역시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과 투명한 지역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말이다.이처럼 사람과 공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지역일수록 애향심이 강하고 고장을 떠나지 않는 지역민들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타 지역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터전을 향유하고 전파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한다. 그만큼 지역에서 자라고 생산된 차와 물과 같이 지역민은 풍미를 가진 고유한 공간의 주체가 아닐 수 없다. 지역 사회에서 고향을 지키는 주체들은 이웃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서로의 경조사를 같이 해 온 이웃은 공동체 이상으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다.반대로 우리는 그것을 철새 정치인과 기업인들을 통해 많이 답습해 왔다. 정치인의 경우 당선과 낙선 사이에서, 기업인의 경우 흥망성쇠의 갈림길에서 철새처럼 갑자기 등장해서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것. 이를 테면 철새민에게 지역은 공동체의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지역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이웃을 배려한다는 데 있다. 베푸는 것에서 비롯되는 덕은 고립되지 않고 반드시 비슷한 사람을 응대하게 되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이 이웃이 되면서 경외의 대상이 된다. 바로 수원의 봉 원장과 이 원장과 같이. 지역 사회가 알아주지 않아도 명분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말에 앞서 행동을 하는 특징이 있다.수원서 활동하는 양의사·한의사의료 봉사와 지역위한 재능 기부개원후 30년 동안 남다른 애향심 봉 원장과 이 원장은 수원 사람으로 수원지역에서 활동하는 양의사와 한의사다. 이들의 주변에 환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도 여기에 있다.바로 피부과 전문의 봉하욱 원장과 이비인후과 전문인 이만희 원장이다. 수원의 모 중고등학교 선후배 동문인 이들은 지천명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수원을 떠난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 후 수원에서 개원한 봉 원장과 이 원장은 자신의 전공과 미덕을 교만과 인색으로 바치지 않고, 국내외 의료 봉사와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