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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율곡과 유지의 플라토닉 러브

    [with+] 율곡과 유지의 플라토닉 러브 지면기사

    유지사(柳枝詞)는 율곡의 애절한 사랑노래다. 관기 유지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기약 없어 율곡은 애달프다. 그 애달픔이 많은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율곡의 나이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다. 관찰사라면 최고의 지방 장관이다. 재임 기간은 5~6개월 정도였다. 첫날 관아에서 저녁을 맞았다.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리따운 소녀가 주안상을 내왔다. 그녀가 유지였다. 주안상을 내려놓고 뒷걸음질 쳐 물러가며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몸매에 곱게 단장한 얼굴은 갓 피어난 백합화 같았다.율곡이 물었다. "몇 살인고?" "열두 살이옵니다." 행동거지가 얌전하고 말투 또한 교양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이 기적에 오른 선비의 딸이었다. "시침 들려고 온 것이냐?" 어린 소녀여서 율곡은 다시 물었다. 아직 갈래머리 소녀인 동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유지는 부끄러워 얼굴에 홍조를 띠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행수 기생의 명을 받들고 왔사옵니다." "아니다. 수종이나 들고 나가거라." 유지가 조용히 물러났다.그 후 율곡은 유지를 늘 옆에 두고 말벗으로 삼았다. 유지와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녀를 예뻐해 주고 아껴주었으나 율곡은 갓 피어난 꽃봉오리를 보기만 할 뿐 꺾지는 않았다. 아리땁고 청순한 유지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율곡이었다. 나이 39세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해'선비의 딸' 열두살 관기와 첫 만남늘옆에 두고 말벗 삼아 마음에 평온 유지는 율곡의 높은 학식과 인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율곡과 함께하는 시간은 유지에게는 커다란 산 공부고 깨우침이었다. 기녀가 지녀야 하는 몸가짐과 기예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주고는 늘 몸으로 실천하게 했다.얼마 후 율곡은 임기를 마치고 한양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지는 율곡을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립고 안타까웠으나 찾아 나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유지에게 율곡은 때론 어버이이고 때론 지체 높은 양반이고 때론 정을 주는 연인이기도 했다. 서로 만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

  • [with+]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with+]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인데 지면기사

    여덟 살 딸아이는 학교 방과 후 수업이 끝나면 태권도장으로 간다. 태권도가 끝나면 바로 그 옆집, 피아노학원엘 가고. 워킹맘 가정의 흔한 풍경이다. 운동을 하고 음악을 배운다는 목적보다는 사실 보육 시설에 가깝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당연한 듯 하루를 보낸다.아이가 온종일 '독도는 우리 땅' 노래를 불러댔다. 내가 어릴 적 불렀던 노래와는 가사가 달랐다. 경상북도 울릉군 남면 도동 1번지였는데 아이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라고 노래한다. 평균 기온 12도, 강수량은 1천300㎜이었는데 아이는 평균 기온 13도, 강수량은 1천800㎜이란다. 그래, 주소도 바뀌었고 기후도 바뀌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는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87㎞다. 200리를 아이들은 모른다. 그래서 87㎞다. 내 아이와 내가 사는 세상이 이만큼 바뀌었다. 아이는 유튜브에서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몹을 찾아달라고 했다. 영상을 켜보니 어라, 아이가 매일 집에서 춤추던 그 모습과 똑같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은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모두 같은 춤을 추고 있었다. 태권도장에서 배운 거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어지간한 대한민국 아이들은 태권도장에서 다 이걸 배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나 어릴 때 배웠던 국민체조 생각이 났다. '빠라바라바, 빠라바라바' 하는 음악에 맞추어 전 국민이 똑같이 움직였던 그 체조. 우리 세대라면 모를 수 없는 그 풍경. 나는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며 그만 울어버렸다."엄마, 왜 울어?"내 아이는 나중에 자라 '독도는 우리 땅' 플래시몹을 친구들과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 그땐 다 그 플래시몹 따라했잖아. 우리는 어린이집에서부터 핼러윈 파티를 했잖아. 핼러윈 파티 때마다 엄마가 마녀 옷을 사줬고 호박 바구니에 사탕을 담아 동네를 뛰어다녔잖아. 우리 그때 진짜 신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며 추억에 잠길 것이다.'독도는 우리땅' 플래시몹·핼러윈축제내 아이 세대에겐 문화이자 추억이다 핼러윈의 유래가 뭔지 나는 잘 모르지만 해마다 어린이집 핼러윈 파티 공지를

  • [with+] 오래된 미래와 수원 지역의 교가

    [with+] 오래된 미래와 수원 지역의 교가 지면기사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향수는 과거에서 파생된 추억이다. 미적인 공간을 함의한 좋은 기억은 소위 고향뿐만 아니라 청소년기 성장을 함께해온 모교에서도 향수의 결로 묻어있다. 오래전에 떠나 왔지만 사라지지 않는 그러한 기억의 저장고에는 추억의 노래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바로 중고교 시절 목청 높여 불렀던 교가가 그것이다. 교가는 누구에게나 강한 기억으로 각인되어서 당시의 향수를 불러오고는 한다. 그만큼 재학생 시절 다 함께 공유했던 교가의 리듬과 가사는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세월을 타고 생생한 유년의 추억을 자극하기 마련이다.이같이 학교를 표상하는 교가는 건학 정신과 함께 지역의 정서가 내재 되어 있다. 대부분의 교가는 4분의 4박자 또는 4분의 2박자를 통해 합창하기 쉽게 반드시 후렴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교내외 교육 활동을 알리는 이 노래는 입학식 또는 졸업식 등 학교 행사나 의식에서 쓰인다. 학생들은 교가를 다 함께 반복해서 부르게 되면서 외울 필요 없이 가락에 붙여진 가사를 습득하게 된다. 이렇게 학습된 교가는 자연스럽게 애교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모교의 긍지를 가지게 한다. 또한 가사가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익히게 됨으로써 미래의 양식으로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교가의 본질은 이 노래를 제창하는 재학생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재학생들의 미래가 교가에 응축되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인류애와 보편적인 세계관으로서 다음 세대를 정의롭게 펼칠 수 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반복, 학습함으로써 나만의 소리가 아닌 나도 소리를 내면서 서로 어우러진 하모니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물론 졸업생들에게는 교가가 기억의 잉여물로서 지울 수 없는 향수와 같은 것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이같이 수원 지역 사회에서도 100여 년이 훌쩍 넘은 유서 깊은 학교들의 고유한 교가가 전통을 이어주고 있다. 게다가 졸업생들은 동문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노래를 향유하면서, 선후배들이 모여 순수했던 그 시절 동질성과 결속력을 다지는 것도 그 연유다. 애교심 발동·모교 긍지 불러오지만다문화·다민족·정보 문명사회

  • [with+] 의연한 자세

    [with+] 의연한 자세 지면기사

    목 디스크, 허리 디스크, 테니스 엘보 등의 병으로 고생한 적이 있다. 그래서 2년에 한 번씩 건강 검진을 받을 때면 또 다른 병이 생길까 봐 긴장하곤 한다. 몇 년 전 건강 검진의 결과지를 우편물로 받았는데 정밀 검사가 필요하니 재검사를 받으라는 게 하나 있었다. 유방암 검사였다. 유방암은 전 세계 여성이 가장 많이 걸리는 암이라 겁이 났다. 마음을 졸이며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괜찮다는 진단 결과를 전해 듣고서야 안도했다. 그때 큰 병에 걸리더라도 버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그래서인지 내가 닮고 싶은 인물 유형 중 첫 번째는 병이 생기더라도 그 병을 이겨내고 의연함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마치 환자였던 적이 없는 것처럼 근심 없는 듯 밝은 얼굴로 사는 사람이다. 시련을 겪고도 겉으로 티 내지 않고 산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병이 생기더라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밝게 산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가 책을 통해서 닮고 싶은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란 소설에 나오는 맹인을 보고 그의 정신 자세를 닮고 싶었다. 그 맹인은 상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의 집에 방문한다. 그는 아내의 오랜 친구다. 방문자가 집에 도착하자 아내는 방문자와 '나'를 인사를 시키고 '나'는 초면인 맹인과 악수를 한다. "어쩐지 전에 이미 본 사람 같구먼"하며 방문자는 '나'에게 쩌렁쩌렁하게 말한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 '나'를 이미 본 사람 같다고 농담을 할 줄 아는 유머인이다. 시각 장애인인 데다가 상처까지 했기에 그의 낙천성이 퍽 인상적인 대목이다. 이런 이는 어떠한 고난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의연한 자세로 돌아올 것만 같다. 불행의 나락 속에서도 의연한 자세를 갖는 이를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실제로도 존재하니까. 가수 이동우가 그렇다. 그는 1993년 SBS 2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고 남자 개그맨들로 결성한 가수 그룹인 틴틴파이브의 멤버로 활동하다가, 2004년 병원에서 '망막

  • [with+] 책상… 섬의 항해기

    [with+] 책상… 섬의 항해기 지면기사

    10월은 연달아 쉬는 날이 많았다. 직장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간 날이 많으면 여러 계획을 세우게 된다. 부모로서 아홉 살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놀러가느냐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최소한 요 정도는 써야지'하는 작업계획도 세우고, 사놓고 못 읽은 책들을 읽어치우려는 계산도 하게 된다.개천절을 낀 주말에는 겨우 책 한 권만 읽었다. 놀다보니 그리된 것이지만 왠지 억울하다. 내 노트북에 새로 쓴 글자가 몇 알이나 담겨있나, 냉장고에 들어있는 사과가 더 많을 것이 아닐까, 스멀스멀 불안이 몰려오면서 작가만의 고해성사를 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고해소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신부님께 털어놓게 되는 것이다. "이번 주에는 놀기만 했습니다. 책은 달랑 한 권, 그것도 매우 얇은 산문집 한 권 읽었습니다. 소설 파일을 아예 펴보지도 않았고 노트는 두 장 썼나? 아무튼 형편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세히 늘어놓다보면 갑자기 또 화가 난다. 왜 이렇게 쩨쩨해졌나! 프랜 레보비츠의 경구를 떠올려 보라고! '난 너무 천천히 글을 써서, 내 피를 잉크로 써도 다치지 않을 정도다'. 이 정도 넉살을 떨어줘야 나무늘보 작가로서 장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에잇, 모르겠다. 놀자! 그리고 놀았다. 한 주가 훌쩍 흘러 한글날 연휴가 끝나가자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의 경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왜 글을 쓰는가? 쓰지 않으면 삶 속에 처박히기 때문이다'. 한창 삶에 처박히는 중이라 그런가 더는 참지 못하고(?) 글을 썼다. 물론 시작은 반성문으로, 끝에는 뭐가 나올지 모를 문장을 우선 달려본다. 휴일 잔뜩 품은 10월 첫째·둘째 주방황끝에 카페 이동 닻 내린 '책상' 쓰면서 문득 생각하니 이 곳이 얼마나 비싼 비용을 치르고 얻은 책상인가 싶다. 대체휴일이 끝나가는 월요일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나는 북카페의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있고, 옆 탁자에는 이숲이가 나무클립을 끼워서 만드는 뭔가에 푹 빠져있다. 이렇게 엄마를 놔주기까지 우리는 문구사에 가서 공작세트를 사오고, 쌀쌀한 날씨에 대비한 옷을 사고

  • [with+] 무거운 식탁

    [with+] 무거운 식탁 지면기사

    소소한 취미가 하나 생겼다. 매일 어디에서 뭘 누구와 함께 먹었는지 기록하는, 취미라는 말을 붙이기에도 애매한 일상의 루틴 정도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기록을 들여다보니 내 일상의 패턴이 보인다. 식생활만 놓고 보면 간단 그 자체다. 아침을 거르니까 하루 두 끼 중 80% 이상이 외식이고, 집밥은 20% 남짓이다. 집에서 밥을 먹더라도 배달이나 포장 음식을 자주 먹는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집에서 둘이 밥을 함께 먹는 일은 더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둘이 먹을 때에는 밥상을 차려 먹는 편인데, 그마저도 직접 만들어 먹기보다는 밀키트나 가공식품을 살짝 조리하는 수준이니, 차려먹는다는 말이 무색하다. 먹는다기보다는 한 끼를 해치우는 수준인데, 매 끼니 정성을 들여 해먹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가끔 친구들과 농담처럼 엄마가 해주는 집밥은 곧 멸종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요즘은 그게 곧 현실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엄마가 해주는 집밥은 곧 멸종"친구와 농담이 곧 현실될 것 같아 얼마 전 장민영 음식탐험가와 김태윤 셰프가 인도네시아 여행에서 보고 생각한 것들을 나누는 토크 세션 'IN TO THE WILD'에 다녀왔다. 인도네시아는 관광지로 유명한 발리 외에는 잘 모르는 나라였는데 1시간 반 남짓한 시간 동안 전혀 다른 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의 4개 지역을 일주일씩 순회했다는데 바닷속부터 야생 열대우림, 대도시 자카르타까지 지역도 다양했다. 길거리 음식부터 최고급 레스토랑까지 섭렵하고 온 셰프가 재현해 내놓은 다양한 식감의 인도네시아 샐러드 '가도가도'와 달큰한 '떼보틀'까지 곁들여지니 한국이 아니라 인도네시아 어딘가에 와 있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인도네시아 어디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떼보틀은 딱 달달한 자스민차여서 음료의 맛만 놓고 보면 전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가득한 샐러드와 함께 먹으니 나중에는 왜 같이 먹는지 알

  • [with+] 유희경을 사랑한 매창

    [with+] 유희경을 사랑한 매창 지면기사

    유희경(劉希慶)은 16세기 조선의 유명한 시인이다. 당대의 대시인이요 풍류객인 유희경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다. 부안 기생 매창이었다. 매창은 유희경의 문명을 이미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다. 그의 시를 찾아 읽으며 유희경을 흠모하기 시작했으나 만날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된다면 그와 시를 겨뤄보고 싶기도 했다. 유희경의 부친은 품계로 종칠품인 동계공랑이었다는 것만 전할 뿐,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유희경은 예학에 밝아 국상이 나거나 사대부가에서 상을 당하면 그를 부르곤 했다. 임란 때는 의병에 참여할 만큼 나라를 걱정했다. 그는 시문학을 통해 사대부들과 친교를 맺었다. 유희경은 당시 여항시인인 백대붕과 교류하면서 '풍월향도'라는 이름의 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매창(李梅窓)의 본명은 이향금이다. 계유년에 태어나서 계생(癸生), 계랑(桂娘)이라고도 불렀다. 매창은 1573년에 부안현리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관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기적에 올랐을 것이다.매창은 한시와 시조에 능했고 가무 및 거문고에 빼어난 기량을 보였다. 시조와 한시 59수가 작품집 '매창집(梅窓集)'에 전해지고 있다. 홍만종(1643~1725)이 '근래에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서로 견줄 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 후 매창은 황진이와 함께 조선의 여류시인으로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만나기전 서로 설레기는 마찬가지매창의 거문고에 유희경 가슴 촉촉매창의 한시 '자상(自傷)'에서 '서울 꿈 삼년/호남에서 또 한 봄이 가는구나/황금에 처음 마음이 바뀌어/한밤에 홀로 마음이 상하는구나'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서울에서도 3년 정도 기녀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임서(1570~1624)의 '석촌유고(石村遺稿)'에는 매창의 시 한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시 아래에 '일찍이 내 친구의 첩이 되었다가 지금은 청루에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첩실 생활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그 후 매창은 부안으로 돌아왔다.

  • [with+] 새벽 전화

    [with+] 새벽 전화 지면기사

    휴대전화 진동음에 눈을 떴다. 아직 어두웠다. 새벽의 전화가 일상적인 용무일 리는 없다. 엄마였다. "왜? 무슨 일이야?" "거긴 비 많이 안 와? 여기 비가 와서 난리도 아냐." 나는 발칵 화를 내고 말았다. "아니, 비 온다고 이 시간에 전화를 한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놀랐어?" 엄마가 하하하, 크게 웃는다. 이봐요, 엄마.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이 새벽에 비 온다고 전화를 하다니. 나이 든 부모를 둔 딸 마음을 좀 헤아려 달라고. 행여 나쁜 소식일까봐 그 짧은 시간 동안 오그라붙은 내 마음을 좀 알아달라고.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심통이 머리끝까지 오르고 말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비 소식은 심각했다. 엄마가 카톡으로 보내온 사진을 보고 나는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현관문을 살살 열고 사진을 찍었는데 마당은 이미 잠겨 있었다. 그나마 단을 높인 현관이라 현관문 바로 앞까지 물이 찰랑댔다. 비는 그쳤지만 마당에는 주전자와 빗자루와 작은 화분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내 말에 엄마가 불퉁거렸다. "넌 뉴스도 안 봐? 포항에 비 많이 와서 다 이 모양 됐어." 부랴부랴 뉴스를 켜보니 온통 포항 비 소식이었다. 비소식 전한 엄마 연락 심통났지만수해 심각한 고향집 사진보며 놀라아버지가 아끼던 차도 절반쯤 잠겨 내가 태어나 19년을 자란 포항은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고요한 곳이었다. 게다가 나는 사택단지에서 자랐다. 사택단지에서 자란다는 건 포항 토박이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어도 포항 사투리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충청도에서 경기도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사택단지에 모여 살며 똑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가장을 두었다. 처음에는 자전거를 타고 형산강 다리를 건너 포스코로 출퇴근하던 아버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오토바이를 샀고 아침이며 저녁, 형산강 다리는 거대한 오토바이 물결로 뒤덮였다. 오토바이들은 훗날, 그 아버지들이 포니2나 엑셀 등 작은 승용차를 사며 서서히 사라졌지만."멀쩡해" 기뻐

  • [with+] 이고 선생의 정신과 수원의 얼굴

    [with+] 이고 선생의 정신과 수원의 얼굴 지면기사

    얼굴은 '얼과 꼴'의 합성어다. 인간 내부에 있는 '얼'은 정신이며 외부에 있는 '꼴'은 모양이다. 얼은 보이지 않지만 꼴은 보이는 것으로, 누구나 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외면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늙고 병들고 죽지만 내면의 얼굴은 시간을 초월하며 죽어도 죽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인간 정신이 지향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타자와 세계라는 다자의 이익과 평안을 모색하는 데 있다. 이 같은 시대를 넘나들면서 역사의 선각자를 통해 우리는 인간 정신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기록에서 재현되며 공동체 문화 속에서 살아있다. '팔달산 주인' 별칭… 충·효로 거듭착한 삶 권하며 실천 '권선동' 유래 수원의 경우 역사적으로 이고(李皐, 1341~1420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 말과 조선 초기 충효의 대표 인물인 이고 선생은 공민왕(1374년) 시절에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학사를 지냈다. 그는 '팔달산 주인'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수원을 충과 효로 거듭나게 한 수원 정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이고 선생의 생전에 명명된 팔달산의 어원으로 두 가지 유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고려말 대사성 집현전 직제학으로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광교 남 탑산'(光敎南塔山)에서 기거했다. 당시 공민왕의 신화를 통해 안부를 묻는 공민왕에게 이곳 산천의 풍광을 극찬하면서 사통팔달(四通八達)로 막힌 데가 없다는 말이 전해진다.그 후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이고 선생에게 여러 번 관직에 나설 것을 권유했으나 사양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때 잠시 관직에 오르기는 했으나 고려의 충절을 끝내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태조는 이고가 거처한 곳을 화공에게 그리게 해 이것을 보고 나서 '팔달산(八達山)'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의 행적은 지금 수원의 권선동에서도 발견된다. 권선(勸善)이라는 지명은 이고가 이 지역에 머물면서 백성들에게 착하게 살기를 권하면서 선을 몸소 실천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의 높은 인간 정신을 이어받은 주민들은 이고 정신을 통해

  • [with+] 모든 추측을 경계하라

    [with+] 모든 추측을 경계하라 지면기사

    뜻밖의 결말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다. 오 헨리가 쓴 '마녀의 빵'이라는 소설이다. 마사 양은 미혼 여성이고 마흔 살이다. 작은 빵집을 운영하는 그녀는 중년 남자인 단골손님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 손님은 낡은 옷을 입었지만 말쑥해 보였고 예절이 깍듯했다. 그는 늘 저렴하게 파는, 오래 묵어 딱딱한 빵 두 덩어리를 샀다. 언젠가 마사 양은 그의 손가락에 적갈색 얼룩이 묻은 걸 보고 그가 무척 가난한 화가라고 믿었다. 그녀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빵집에 일부러 그림을 갖다 놓았는데, 그 그림을 본 그가 데생이 잘된 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고 그가 화가인 게 확실하다고 느꼈다.어느 날 그 손님이 평소처럼 묵은 빵을 달라고 했다. 마사 양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딱딱하게 굳은 빵 두 덩어리 안에 손님 몰래 버터를 듬뿍 넣어 손님에게 주었다. 그에 대한 호감의 표시였다. 그날 그 손님과 낯선 남자가 빵집에 왔다. 그 손님은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하고 "당신이 날 망쳐 놨어" 하고 소리도 질렀다. 마사 양은 낯선 남자에게서 그 손님이 성난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제도사이고 공모전 수상이 걸려 있는, 새 시청 설계 도면을 그리느라 석 달 동안 열심히 작업했다고 한다. 제도사들은 연필로 도면을 그리고 잉크 작업을 끝내고 나면 굳은 빵 부스러기를 문질러서 연필 선을 지워 버린단다. 그런데 그녀가 빵에 살짝 넣은 버터 때문에 그의 설계 도면이 쓸모없어졌다고 한다. 마사 양의 부정확한 추측이 결과적으로 그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대 본모습 어떤지 개의치 않고주관적으로 해석 판단하면 안돼 우리도 소설 속 마사 양처럼 제멋대로 추측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보겠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게 오면 자기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늦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늦었던 것. 연인이 하품을 하면 자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전날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하품을 했던 것. 무섭게 생긴 괴물이 그려진 영화 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