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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윤동주 시인과 서시

    [with+] 윤동주 시인과 서시 지면기사

    '죽는날까지… 한점 부끄럼 없기를'읽으면 서러움·고절감 파도처럼 와18세 나이 '삶과 죽음' 등 첫시 써내아직까지도 '별 헤는 밤'은 사랑받고'참회록'을 남겨 독자들 숙연하게 해'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읽노라면 순결한 청년의 서러움과 고절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아버지 윤석영과 어머니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9세 되는 1925년 4월4일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12세 1928년부터 14세 1930년까지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청소년기의 꿈이었다.15세인 1931년 3월1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8세인 1934년 12월24일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의 시를 썼다. 이 작품들은 그의 최초의 시편이다.19세인 1935년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한다. 같은해 숭실중학교 문예지인 '숭실활천'에 시 '공상'이 처음 활자화 되었다. 20세인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광염학교 중학부에 편입한다.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를 발표하고 이어서 12월호에 '빗자루'를 발표한다. 22세인 1938년 4월9일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23세인 1939년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한다. 25세인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27세인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과 일기가 압수된다. 28세인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다. 29세인 1945년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16일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 [with+] 일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법

    [with+] 일하는 사람을 설득하는 법 지면기사

    급하단 전화에 중단된 동료 밥시간밥 넣은 배밑으로 자존심 흐르지만숟가락 놓게 만드는건 존중의 태도어디서 일하든 직원식당에 모이니우대 아니어도 '같은 대접' 해주길예전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과 밥을 먹는데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무실 문을 급히 열어야 하는데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K뿐이라는 것이다. 당시 우리가 쓰던 사무실은 번호키였고 잘 안 쓰던 사무실이 하나 더 있었는데 갑자기 그 사무실을 열어야 하는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K는 식당에서 막 주문한 음식을 받아서 겨우 몇 술 뜨자마자 급하다는 전화에 그대로 상을 물리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우리가 보기엔 그게 그리 급한 일이 아니고 밥 다 먹고 가서 열어도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일이었는데 상사의 판단은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 달랐다기 보다는 우리의 식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남은 우리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 둥의 속담을 주워섬기며 밥도 다 못 먹고 자리를 뜬 동료를 안타까워하고 상사를 욕했다.당시 다니던 직장이 박봉이라지만 지붕이라도 가린 곳에서 일하느라 눈치를 좀 더 보게 되어서 그렇지, 지붕 없이 뙤약볕에 찬바람에 부평초처럼 휩쓸리며 오면 그만 가면 그만인 노가다판에서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하면 바쁜 일에 뛰어나가기는커녕 하던 일도 다 멈추고 흙더미에 삽 던져 꽂아두고 밥 먹으러 가버리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 배도 쉽게 꺼지고 허기도 더 심하게 오기도 하거니와 몸 쓰는 사람들이 어디서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체득하게 되는 은은한 배짱과 자존심이 밥 넣은 배 밑으로 도도히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몸 쓰는 사람들이 밥 챙기는 자존심만 있고 다른 일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건 파업과 엄중한 대치 속에서도 사측이 노조를 해산시키려고 점거농성 중인 공장의 물과 전기를 끊자, 차량용 페인트가 굳지 않게 발전기로 기계를 돌렸다는 쌍용자동차의 파업 이야기는 자존심만큼이나 강했던 일하는 사람의 책임감을 떠올리게 한다.그럼 일하는 사람들이 먹던 밥숟가락 내려놓고 나서게 설득하는 방법은 뭘

  • [with+]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

    [with+] 사람이 어떻게 다 잘해? 지면기사

    "엄마가 미안, 요즘 왜 이리 까먹지"초등3 딸 휴대전화 찾아 갖다주자…자잘한 위로 들으러 학교에 왔나보다"엄마, 수업 잘해! 지각하지 말고!"내가 살살 말하면 다정하게 대답해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가 휴대전화를 놓고 등교했다. 학교 끝나고 학원에 가면서 휴대전화로 늘 보고를 하는데, 그걸 두고 갔으니 하교 후에 집으로 돌아올 것이 빤했다. 나는 일찍부터 작업실에 나갈 작정이었다. 학교 강의가 있는 날이라 작업실에 일찍 나가 다른 일들을 처리해야 했던 거다. 하지만 아이가 빈집에 혼자 들어와 주섬주섬 휴대전화가 든 가방을 챙길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혼자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일이 많은 아이인데. 이렇게 일하는 엄마와 아빠는 걸핏하면 혼자 죄책감 타령에 빠지곤 한다. 별수 없다.결국 작업실 나갈 시간을 미루고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로 갔다. 삽시간에 꼬마들이 학교 건물에서 와르르 쏟아져 나왔고 나는 행여 아이를 놓칠까봐 눈을 부릅떴다. 친구와 종알종알 떠들며 실내화를 갈아신던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 학교 안 갔어?" "응, 너 휴대전화 주고 바로 갈 거야." "지각 아니야? 안 늦어?" "괜찮아." 그러는 사이 딸아이 곁으로 친구들이 병아리 같이 모여들었다. 정말 병아리 같다. 키도 제법 크고 덩치도 작년보다 자랐지만 여태 3학년은 아기들이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방글방글 웃으며, 조금은 쑥스러운 얼굴로 다 인사를 한다. 딸아이가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엄마, 얘는 지율이고 얘는 서빈이, 유담이랑 민채는 알지? 엄마, 얘가 태윤이야! 그러고는 큰 소리로 덧붙였다. "다 내 절친들이야!" 절친이라니. 초등 3학년에게도 절친이 있구나. 마냥 귀여워서 하나하나 이름 불러주며 나도 인사를 건넸다. 친구 엄마 나타난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이리 몰려왔을까. 바람 한 점 불어도, 꽃잎 하나 날려도 그저 즐거운 게 그 나이라지만.아이들은 학원 시간이 조금 남았다며 놀이터에서 놀아야겠단다. 나는 놀이터까지 함께 걸었다. 날이 몹시도 더웠다. "아줌

  • [with+] 마차 이야기

    [with+] 마차 이야기 지면기사

    여러 승객 모시느라 혹사한 '마부'피로조차 너무 피곤해 잠이 들어작가만 이따금씩 뒤척이며 중얼잠잠해지면 의식의 작은 등불만깜박거리며 밤과 꿈 가로질러 가어쩌다보니 일년 반째 마감의 연속이다. 나는 피로에 사로잡혀 있다. 피로는 아침 햇살에 닿으면 툴툴거리며 육중한 몸을 옆으로 비켜준다. 뇌가 호통을 치며 오늘 할 일들을 읊어대기 때문이다. 우선 강의가 있고, 강의에 앞서 그보다 긴 강의준비가 있다. 짧은 글이지만 서평 마감도 있고, 무엇보다 단편소설 마감이 발등에 떨어져있다.나는 사륜마차의 마부석에 올라 채찍을 휘두른다. 지붕에는 강의에 쓸 책, 학생들의 습작, 어제까지 작업한 인쇄물, 점심으로 먹을 빵과 커피 등 되는대로 꾸려놓은 짐이 실려 있고 안에는 '작가'라는 승객이 미간에 인상을 팍 쓰며 가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마차에 오르는 다른 승객들을 민폐꾼처럼 노려본다. "내가 마감을 제때 못하면 전부 당신들 때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강사'라는 승객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이봐요, 빨리 좀 못 가겠어요?"라고 마부에게 조바심을 드러낸다. '필자'라는 승객은 코너를 회전하느라 로데오 말처럼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급히 서평을 완성한다. 그는 항상 마감의 스릴을 즐기며 이럴 때 글이 더 잘 나온다고 너스레를 떤다. 구석에 자고 있던 '나무늘보' 승객이 하품을 쩍 하더니 무례하게도 모두의 무릎위로 길게 누워 스마트폰을 보거나 이번 달 생활비 등등을 한가로이 계산한다. 잘 달리던 마차가 급정거를 하는 통에 나무늘보는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엄마'가 벌컥 문을 열고 소리를 지른다. "다들 비켜! 딸이 올 시간이야." '꼬마'가 들어온다. 꼬마는 열한 살짜리지만 마차에 탄 승객 누구보다 무겁다. 꼬마가 아기였을 때는 이보다 몇십 배로,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마차의 바퀴가 바스라질뻔 했고, 승객들은 모두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벌벌 떨 정도였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강사가 나서 힘겹게 진창에 빠진 바퀴를 건져냈고, 그 후 만 세 살이

  • [with+] "땅값 떨어지게…"

    [with+] "땅값 떨어지게…" 지면기사

    청계산 입구 도로가 위치한 장군탑문화재 살리려 인근 주민들 告祀중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행패깨끗이 치우고 가꿔온 여현섭 선생무례함에 상처받아 "사회 험악해져"지난 5월14일 석가탄신일 전야, 의왕시 청계산 입구의 도로가에 위치한 유적 '청계산 장군탑'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잊혀져가던 문화재를 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인근 주민 몇이서 떡과 술, 포를 놓고 고사(告祀)를 지내려는 찰나, 갑자기 땅 주인이라는 남자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어른들에게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을 하면서 떡시루를 엎어버리겠다느니, 장군탑 비석을 넘어뜨려 땅에 묻어버리겠다느니 하면서 거칠게 대들었다. 주장인즉, "땅값 떨어지게" 남의 땅에서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것.사람들이 마을과 집안의 안녕을 빌던 서낭당을 이렇게 철저하게 외면하는 땅 주인과는 달리 마을 노인들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가 이곳에서 제사 지내는 걸 봤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마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신이라는 이유로 제사 풍속이 일소되었을 것이다. 이 장군탑은 돌무지 구조가 뚜렷한 고분(삼국시대로 추정)으로 지름 5~6m, 높이 3~4m의 크기이며 봉분 위에는 오래 전에 잘려진 고목 밑둥이 박혀있다. 봉분의 하단에는 커다란 바위가 드러나 있으며 주변에는 30~40㎝ 크기의 냇돌이 많이 쌓여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돌을 던진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무덤 앞에는 비석이 서 있는데 '장군탑의 역사는 팔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며, 청계노인회에서 단기 4323년(1990)에 탑을 다시 세워 헌상(獻上)한다'라고 적혀있다.'장군'이라는 명칭은 민속에서는 최영, 임경업, 강감찬, 남이 장군 같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들은 굿을 할 때 무당의 몸주(혼령)가 되어 신의 원한을 풀어주고 집안의 행운을 빌어주는 선신(善神)이다. 한 마디로 '청계동 장군탑'은 만만치 않은 위인의 무덤으로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신성하게 여겨져 제사도 지내고 소원도 빌던 마을 공동체 공간이었던 것

  • [with+] 백석 시인과 여우난골족

    [with+] 백석 시인과 여우난골족 지면기사

    1912년 평북 정주군 익성동서 태어나이광수 등 걸출한 문인들 배출한 곳아버지 백시박, 장남 교육열 대단오산학교에 '기부금 10원' 기록도큰댁 '여우난골' 유명한 詩로 남아백석(1912~1996)은 1912년 7월1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1013번지에서 태어났다. 갈산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갈지면과 오갈산면으로 바뀌게 되었다. 백석이 태어날 당시에 익성동은 오산학교가 자리 잡은 오산면 관할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1952년 북한의 군·면·리 통폐합조치에 따라 갈산면은 신설한 운전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산학교가 익성동 940번지였으니 백석의 집은 오산학교 바로 앞에 있었다.정주와 오산학교는 걸출한 문인들을 많이 배출해 왔다. 백석보다 20년 앞서 춘원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광동동 신리에서 태어났으며 백석보다 열 살 많은 김소월이 구성군에서 출생하여 곽산군에서 성장했다. 소월의 스승 김억도 곽산군에서 출생하여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일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석보다 10년 후에 태어나 1980년까지 조선일보 주필로 활동한 선우휘는 정주읍 남산리가 고향이다. '창작과비평'이라는 리얼리즘 계열의 유명한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백낙청은 1938년 외가인 대구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친가는 정주군에 있었다.백석의 어릴 때 이름은 백기행이었다. 1933년 12월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은 장학생들의 모임인 '이심회'의 회보 제1호 표지에는 백석(白奭)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자야 여사'는 청진동으로 부쳐오던 편지의 겉봉에 백기영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훗날 잡지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할 때는 모두 백석(白石)을 사용했다.백석은 아버지 백시박과 어머니 이봉우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 젊은 시절 백용삼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가 백석이 오산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백영옥으로 개명했다. 백석의 아버지는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남인 백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했다. '오산백년사'에 따

  • [with+] 금분세수

    [with+] 금분세수 지면기사

    주짓수제자 블랙벨트 약속 못지킨채코로나 여파 5년만에 체육관 문닫아사범 그만두고 직장 적응 핑계 삼아수련도 게을러져… 제자들 보기 민망 선생 자리에서 내려오고 도복 물려줘무협지나, 무협영화의 세계관에 '금분세수(金盆洗手)'라는 말이 있다.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협객이나 무사가 무림의 모든 은원을 끊어내고 물러나기 위해 금대야에 손을 씻으며 은퇴를 선언하는 것을 이야기한다.'손에 피를 묻히다'라는 관용구가 있듯이 대야에 손을 씻으며 그 세월 동안의 죄과와 피값을 흘려보내고 그 바닥을 뜨는 것으로, 강호한정(江湖閑情)과 평화를 바라는 무림인들에게는 하나의 꿈과 같은 마무리다. 그러려면 무공은 바라는 만큼의 성취를 이뤄야 하고 그간 악당들을 물리치는 수많은 전투 속에서도 자신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어야 하며 틈틈이 가르친 제자는 어느새 청출어람(靑出於藍)하여 스승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리하여 끝끝내 더 노력하여 얻어낼 성취도 없고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는 이미 죽고 되갚아야 할 원한도 대부분 갚아주었으며 목숨 바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새로운 원한을 만들 만큼의 혈기도 쇠진하게 되면 어디 방짜기술 좋은 놋점에 기별이라도 보내 손을 씻을 놋대야라도 하나 주문하여야 하는 때가 이르는 법이다.얼마전 주짓수 체육관 제자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제자들이 운동을 하는 곳을 그동안 좀 뜸하게 방문했는데, 이번 스승의 날을 앞두고 한번 와달라는 소식이었다. 입시학원 국어강사 생활을 하며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깊어가는 번뇌를 좀 잊어볼까 하여 배운 외국무술이 어느덧 수련한 지 10년이 넘어서 체육관을 차렸고, 마침 차리고 몇년 안되어 코로나19가 창궐을 하여 몇차례 대출로 지싯지싯 버티다가 내 손으로 블랙벨트를 매어주마던 제자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5년만에 문을 닫고만 터였다. 폐업하고 첫 일년은 후배 체육관에서 사범 일을 하며 꾸준히 주짓수를 수련했지만 그후 사범 일도 그만두고 인천공항에 취직하여서는 직장 적응에 매진해야 한다는 말을 핑계 삼아 근 일년을 한달에 한두번 하는둥 마는둥 게으르게 주짓수

  • [with+]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with+]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지면기사

    림프종 3기 기자가 쓴 투병기 읽고허술한 내인생 다시 연습하는 기분쫄지않고 사는법 등 힌트 배운느낌그저 작가의 건강·가족 평안을 기도내가 더 배울 세상은 아직도 많았다두어 달에 한 번은 구내염을 앓는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생각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리는 소리가 많다. 입 안이 쉬이 헐고 빈도가 잦다면 암을 의심해보는 편이 좋다고. 그러면 덜컥 겁이 난다. 무언가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 걸까? 나는 아직 젊고, 아이도 어린데.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는데.늘 가던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에게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요. 저, 정밀검사 받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사는 내 입 안에 약을 발라주며 풉 웃었다. "그럴 상황은 아니고요. 검사가 필요하다 싶으면 제가 말씀드릴 테니 과로만 하지 마세요." 얼마 전에는 가슴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서 화들짝 놀랐다. 협심증일까? 이러다 심장마비가 오는 거 아니야? 하마터면 119에 전화를 걸 뻔했다. 통증은 금세 가라앉았고 또 동네 가정의학과 의사를 찾아갔다. "조금만 불편해도 병원에 오는 습관, 좋아요. 오래 사시겠어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했다. 역시나 과로를 하지 말란다.겁이 많아진 거다. 조부상, 조모상에 부의금을 보내던 시기를 훌쩍 지나 부모상은 이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종종 들려오는 본인상은 먼 인연이라도 온종일 우울하다.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인 거야? 뭔가 좀 아찔하다고."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일회용 숟가락으로 육개장을 퍼먹으며 훌쩍였다.아침마다 출판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나에게 그건 아침 신문을 읽는 것과 비슷한 습관이다. 또 얼마나 새로운 출판 아이디어가 펀딩 사이트에 올라왔을까. 또 얼마나 새로운 작가들이 데뷔 전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까.그곳에서 책 한 권에 펀딩했다. '죽음이 다가와도 괜찮아'. 연합뉴스 김진방 기자가 쓴 책이다. 이제 마흔. 마흔이라는 나이에 나는 벌써 슬펐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이 있는 작가는 림프종 3기 판정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써 내려

  • [with+] 공원 돗자리, 헤테로토피아의 목소리

    [with+] 공원 돗자리, 헤테로토피아의 목소리 지면기사

    아이들 비밀기지·연극 무대처럼'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페르시아서 양탄자는 정원 의미친구들과 돗자리 앉아 '삶을 논평'다른 나로… 유토피아 따로 없어늦게 도착한 봄이 야속하게도 이른 여름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아쉬운 봄의 끝자락, 내가 펼쳤던 돗자리들을 생각한다. 돗자리만큼 점유했던 사각형의 시간들도.호수공원 근처에 사는 나는 걸핏하면 돗자리를 끼고 나간다. 산수유와 목련에 이어 벚꽃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에는 꽃그늘마다 빈틈없이 돗자리가 펼쳐지고, 그러면 공원 전체가 대가족의 야외거실처럼 변하는 느낌이 든다. 그 한가한 소란이, 캐노피처럼 드리워진 나무 그늘 사이로 차곡차곡 겹을 이루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묘법으로 그린 그림처럼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것이 좋아서 나도 한구석을 차지하려 한다. 공원이 가장 아름답게 부풀어 오르는 봄과 가을의 한때를 놓치는 것은 쉽게 붙잡을 수 있는 행복을 놓치는 아쉬운 일이기에.호수공원이 거대한 고래라면 우리 가족은 자리를 옮겨가는 따개비마냥 올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장소를 바꿔가며 돗자리를 펼친다. 김밥 네 줄, 과일 약간, 부스럭거리며 먹을 수 있는 과자와 집에서 내려온 커피, 이 정도면 아주 풍요로운 느낌이 든다. 가방에 넣어온 살림살이를 차곡차곡 풀어놓고 각자의 시간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책을 보는둥 마는둥 하고, 남편은 음악을 듣는둥 마는둥 하는데 아이만 뭔가를 열심히 만들어 풀밭에 늘어놓고 사진을 찍고 있다.미셀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이 풍경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산문이다. 원래는 '다른(hetero)' '장소(topos)'가 합쳐져서 만든 합성어로 엉뚱한 데 붙은 신체기관을 지칭하는 의학용어라고 한다. 푸코는 이를 가져다가 '잠깐 열렸다가 닫히는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담아 뜻을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비밀 기지, 한 곳에서 여러 장소가 겹쳐지는 연극 무대 같은 곳도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된다는 점에서 헤테로토피아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오래된 헤테로토피아는 '정원'일 것이다. 페르시

  • [with+] 다시 맨발걷기

    [with+] 다시 맨발걷기 지면기사

    지난해 아파트 뒷산에 생긴 황톳길부드러운 감촉에 가벼운 '첫걸음'사람들 입김에 편리한 쪽으로 변해리플릿 나눔·꽃길 만드는 사람들도맨발로 걷다 감기로 고생 '과유불급'숲이 연한 초록빛으로 흔들리고 있다. 휑하니 드러나던 황톳길도 이제는 나뭇잎이 무성해지면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지난해 7월 하순, 내가 사는 아파트 뒷산에 황톳길이 생겼다. 이미 수년 전부터 맨발로 걷는 열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나는 우연히 산을 올랐다가 이제 막 공사를 끝낸 황톳길을 보고는 호기심에 맨발로 걸어보았다. 말캉말캉한 흙을 밟으니 발에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다리와 발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무엇보다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계단만 오르면 될 정도로 가까웠기에 그동안 해왔던 등산이나 걷기운동을 작파하고 그때부터 황톳길에 매진했다. 나한테는 이 길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복덩이였다. 실제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 나도 이사 오고 싶어"하면서 부러워하기도 했다.새벽 5~6시면 일어나 그 길에 올라가면 벌써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다. 더러 젊은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중년의 아저씨와 아줌마들, 그리고 퇴직한 지 20년은 되었음직한 노인과 지팡이를 짚고 올라오는 할머니들이 주를 이루었다. 동일한 사람이 매일 그 시간대에 오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벌써 익숙해져 인사를 나누고 오래된 사이처럼 지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줌마들의 붙임성은 대단했다. 목소리가 크고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자석처럼 붙이고 다녔다.그러나 숫기가 없는 나는 같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제일 힘들었다. 말을 붙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급적 눈을 피하는 것으로 모면하려 했지만 마냥 무심한 성격이 아니어서 내내 신경이 쓰였다.막 생긴 황톳길은 사람들의 입김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편리한 쪽으로 바뀌어갔다(주변 환경이 망가지기도 했다). 걷기를 끝내고 흙발을 닦으라고 수도를 설치해놓았는데, 처음에는 샤워기가 없었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