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부모가 자식을 제일 몰라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부모가 자식을 제일 몰라 지면기사

    가족 균열·몰락 다룬 ‘붉은 낙엽’ 범인 추적중 숨겨진 진실 드러나고 물음의 전환 통해 이야기 본질 탐구 새 가족의 형태 인정하고 받아들여 가족 서사 새롭게 구축해야할 시대 연극 ‘붉은 낙엽’(토머스 H. 쿡 원작, 김도영 각색, 이준우 연출, 1월8일~3월1일, 국립극장 달오름)은 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집에 세 명이 살고 있다. 아버지(에릭 무어), 어머니(바네사 무어), 그리고 아들(지미 무어).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지미의 삼촌(웨렌 무어)이 살고 있고, 할아버지(빅터 무어)는 요양원에 있다. 이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지면기사

    레빗 일대기 다룬 ‘사일런트 스카이’ 하늘과 별·우주와 인간 위대함 담겨 자기 경험 한계 넘어 초월의 삶 살며 상상력 끈 놓지 않고 끈질기게 추적 우주등대로 불리는 ‘레빗의 법칙’ 남겨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로렌 군더슨 작, 김민정 연출, 11월29일~12월28일,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는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는 하늘과 별과 우주와 인간이 있다. 그리고 위대함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여기가 여자들이 작업하는 공간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싶었던 레빗을 기다린 것은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제 말 알아들어요?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제 말 알아들어요? 지면기사

    '바다를… ' 이주·정주 이야기'누구도 남겨두지 않는다'는차별금지법의 원칙에 따라종교나 신념·장애·연령·성적지향따른 차별 금지하는 규칙 만들어야연극 '바다를 넘어온 나무'(최진아 작·연출, 10월18~27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이주와 정주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심인물인 은하의 삶터와 일터가 무대이다.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고 소소한 일상의 삶이 펼쳐지는 작품이다. 삶터에서는 이주노동자 파샤와 은하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파샤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말이 유창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은하는 첫 만남에서 "제 말 알아들어요?"라고 말하고 말았다. 아마도 이때부터 둘의 관계가 꼬이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파샤는 6개월 동안 임금을 못 받고 있다. 현재 미등록 상태이다. 일터에서는 고려인 리나와 은하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리나는 러시아어 번역일을 하고 있다. 리나는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고려인의 후손이다. 한 달을 넘게 기차에 실려 가면서도 볍씨를 고이 챙겨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2도나 확장한 고려인의 후손답게 리나는 사과 씨앗을 심는다. 재외동포(F-4)비자를 갖고 있다.연극 '바다를 넘어온 나무'는 우리가 이 지구에 도착할 때 처음 내린 그곳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처럼 여겨지는 제도의 문제를 저변에 깔고 있다. 처음 내린 곳에서 정주하지 않고 이주하게 되면 이주하는 곳이 그 어디든 그 꼬리표가 따라붙는 규칙을 문제 삼고 있다. 그러한 제도와 규칙은 한 사회에 살고 있더라도 누구는 포함하고 누구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 권리를 다르게 부여하고 제한한다. 우연한 도착이 운명처럼 차별하도록 작동하는 셈이다.유럽의 차별금지법 비교 분석(국가인권위원회, 2022년)에 따르면, 유럽연합은 2000년 차별금지를 위한 EU 법률을 채택하면서 인종평등지침(출신 인종 또는 민족에 관계없는 평등대우원칙을 이행하는 유럽연합이사회 지침)과 고용평등지침(고용 및 직무에서의 평등대우를 위한 일반 체계를 수립하는 유럽연합이사회 지침)을 마련했다. 그 중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나 가면 누구한테 말할래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나 가면 누구한테 말할래 지면기사

    연극 '은의 혀', 생면부지 정은·은수서로 돌본 것처럼 의존하는 삶이제 우리 사회도 '의존'이 갖는부정적 이미지 걷어내고 그곳에선택의 상태·권리 채우면 좋겠다연극 '은의 혀'(박지선 작, 윤혜숙 연출, 8월15일~9월8일,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는 상호돌봄에 관한 이야기이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아프면 돌보는 관계'로 바뀌는 이야기이자 또한 의존하지 않는 삶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이다.이야기의 시간은 정은과 은수의 만남에서 떠남까지이다. 상조도우미와 상주로 두 사람은 장례식장에서 만난다. '그렇게 텅 빈 눈은 처음이었습니다'. 정은의 눈에 은수가 들어온 순간이다. 어린 자식을 잃은 은수가 눈에 밟혀 정은은 퇴근하던 발길을 돌려 장례식장에 남는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정은과 은수는 일 년이 걸렸다. 그 동안 은수는 세 달 간격으로 303호 장례식장을 찾는다. 303호는 어린 아들의 장례를 치렀던 곳이 아니던가. 아무 연고도 없는 장례식장에 앉아 소주를 들이켜는 은수에게 정은이 조금씩 다가선 것이다.은수의 시간은 속박의 시간이다. 303호 장례식장을 반복해서 찾는 기이한 은수의 행동은 자신을 벌하는 시간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슬픔은 우리가 꼭 묘사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자아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또 우리가 자율적이고 통제권을 갖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어렵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속박의 상태를 드러낸다"라고 말했다. 은수의 그 속박의 시간을 정은이 함께한 것이다.그러던 어느 날 은수가 찾은 303호 장례식장에 정은이 없다. 정은은 항암 치료 중이다. 이제 은수가 다가갈 차례이다. 어린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스스로를 속박하고 있던 은수에게 문턱의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멈출 것인가 아니면 나아갈 것인가. 은수는 정은의 곁에 서기로 한다. 그리고 '아프면 돌보는 관계'가 되기로 한다. 그만큼 친밀성이 쌓인 것이다."집에 가서 아플 거야. 집에 가자, 제발."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더는 총을 겨누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더는 총을 겨누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지면기사

    연극 '당연한 바깥'은 분단에갇힌채 살아가는 우리들 이야기탈북 브로커가 중심 인물이데올로기로 또다른 세계상상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아픔연극 '당연한 바깥'(이양구 작, 송정안 연출, 7월20일~8월 4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은 분단에 갇힌 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분단으로 인해 잃어버린 바깥에 관한 이야기이자 상실한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이다.탈북 브로커가 중심인물이다. 그는 '막힌 것처럼 보이는 곳에 난 길'을 안내한다. 끊긴 길을 잇고 막힌 길을 돌아서 안과 밖을 또한 밖과 안을 연결하는 사람이다. 통행료를 받기는 하지만 사람을 물건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반나절이면 건너갈 길을 평생이 걸려도 가지 못하는' 그 길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그는 분단으로 막혀버린 곳에 길을 내는 사람에 가깝다. '저쪽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나를 잡아주려는 손길인지, 아니면 총을 겨눈 손인지. 나는 알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강은 건너야 하니까, 앞으로 걸어가면서' 상실한 바깥과 남겨진 안을 이어가는 사람이다.연극 '당연한 바깥'에는 연결하고 이어주는 실 모티프 외에도 진주와 새 모티프가 분단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 진주조개는 '이물질이 안으로 들어오면 그걸 밖으로 밀어낼 수 없을 때 겹겹이 감싸'며, '내보낼 수 없는 이물질을 안에서 가둬' 진주를 만든다. 진주는 분단 시대가 겹겹이 쌓은 결정체인 셈이다. "풀어주라고 파는 거예요." "생명을 살리는 걸 파는 거죠." "누군가는 가두고 누군가는 풀어주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거죠." 브로커가 묻는다. "그 '함께'에 새들도 포함되는 건가요?" 당연한 바깥을 상실한 줄도 모른 채 궁핍한 상상력의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분단이라는 새장에 갇혀 있는 셈이다.'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천둥 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시인 박봉우가 1956년에 노래한 '휴전선'의 한 부분이다. 그 꽃은 꼿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자리가 없거든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자리가 없거든 지면기사

    연극 '연안지대'는 전쟁으로저마다의 상처·사연 남긴 이야기장례 통해 서로 연대를 경험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걷는 설정이 작품의 미덕중 미덕이다연극 '연안지대'(와즈디 무아와드 작, 김정 연출, 6월 14~30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레바논 내전으로 열 살에 고국을 떠나야 했던 와즈디 무아와드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다.연극은 주인공 윌프리드에게 전해진 아버지 이스마일의 사망 소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윌프리드에게 숙제가 생겼다. 아버지를 어디에 묻을 것인가. 왕래가 없던 아버지이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다. 윌프리드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로 한다.처음 생각은 분명했다. "아버지를 어머니 곁에 묻어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외갓집 식구들 생각은 달랐다. 윌프리드에게 당연해 보였던 일이 외갓집 식구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언제부터 살인자를 희생자와 함께 묻었니?" 아버지가 살인자라니. 엄마 잔은 윌프리드를 낳다가 죽었다. 허약해서 아기를 갖기 힘들었던 잔이 아이를 포기하지 않은 선택을 한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느라 윌프리드를 돌보지 않았다. "네 이모들과 이모부들이 네 교육을 전부 책임졌다." 외갓집 식구들에게는 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묻을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해 보였다.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아버지가 남긴 빨간 가방에서 편지를 발견한다. 부치지 못한 편지다. 편지는 윌프리드와 아버지를 이어주는 실타래가 된다. 지난 시간의 여백을 채우고 기억을 떠올린다. "아버지의 고국으로 갈 겁니다." 하지만 고향 땅에서도 아버지는 눕지 못한다. "왜요?" "자리가 없거든." 시신을 묻기 위해 망자의 관을 열어 망자와 망자를 함께 묻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은 자들이 모든 땅을 차지하고 있어." 더욱이 아버지는 고국에서 도망친 자로 낙인이 찍혔다. "도망친 곳에서나 묻힐 수 있지." 그렇게 아버지는 고향 땅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났다.그렇다면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윌프리드는 아버지를 메고 도착 없는 길을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공연 허가를 드릴 수 없습니다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공연 허가를 드릴 수 없습니다 지면기사

    금지에 관한 연극 '웃음의 대학'검열관·극작가 대본 수정 이야기초연된 1996년 日서 상당한 반향일본 사회가 1940년 체제 흔적다 지우지 못한 표지 아닐까연극 '웃음의 대학'(미타니 코키 작, 표상아 연출, 5월11일~6월9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은 금지 혹은 금기에 관한 작품이다. 검열관과 극작가 두 인물이 무대를 끌고 간다. 휴일을 포함해 팔 일간 공연 대본을 검열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함께하는 이야기이다. 2008년 국내 초연한 이 작품의 배경은 1940년 일본이다.일본에는 1940년 체제라는 말이 있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국가총동원 체제를 말한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가 극에 달하며 태평양전쟁을 준비하는 1940년의 일본은 전쟁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기이다. 국가가 산업이나 금융뿐만 아니라 언론을 통제하며 쌀도 배급하던 때다. 검열관이 "전국민이 하나로 뭉쳐서 현재의 난국을 헤쳐나가도 모자랄 판에 코미디를 볼 때입니까"라고 말하는 배경이다.아들과 엄마가 나눈 4년간의 편지를 묶은 '소년기'(하타노 이소코)에는 당시 일본 사회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전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저하지 않고 적진으로 뛰어들 수 있는 사람이 부럽습니다." 전선으로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전쟁 기계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헤아리기엔 아직 어린 이치로가 중학교 1학년 때 쓴 편지의 한 대목이다.연극은 화요일에 시작해 화요일에 끝난다. 첫째 날. 검열관은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검열하며 "도대체 이딴 걸로 웃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검열관의 말은 명령하는 언어이다. 이런 식이다.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을 복수를 기본으로 하는 '햄릿'으로 그 설정을 바꾸라고 강요한다. 그것도 내일 아침까지. 국가총동원 체제에 따라 공연을 금지하거나 대본 수정을 명령하는 검열관의 언어에는 코미디와 웃음이 없다.셋째 날. 극작가의 말은 웃음의 언어이다. 그는 반복하는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땅도 안 나눠준다는데…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땅도 안 나눠준다는데… 지면기사

    희곡 무대화한 연극 작품 '고목'해방직후 1946년 역동적 배경 '농지개혁' 평등지권 실현 사건지금은 물·바람·햇빛 사고 팔아누구 소유 잊지않고 다른 규칙 중요연극 '고목'(함세덕 작, 전인철 연출, 3월26~31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함세덕이 1947년에 발표한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사실적 재현에 반하는 여러 장치를 활용하였다. 배우의 동선을 개방하여 무대를 객석까지 확장하거나 마이크를 사용하여 사건을 중개하는 기법을 도입했다. 연기 또한 몰입과 이완의 거리두기를 통해 서사극의 효과를 살렸다.연극은 해방 직후인 1946년이 배경이다. 해방을 맞이한 지 일 년이 안 된 시점이다. 해방공간으로 불리기도 한 이 시기는 우리 사회가 가장 역동적으로 변동하던 때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틀과 규칙을 설계하는 정치의 계절이기도 했다. 비록 미국의 직업 군인이 통치하는 미군정의 시기이기는 했으나 해방은 식민시기에 억눌렸던 민중의 열망이 분출하던 시기였다.그중에서도 토지개혁이 단연 최고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북한이 1946년 3월, 3개월만에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함에 따라 남한의 미군정 또한 그에 대응하는 수순을 밟게 된다.연극에서는 오각하(이승만)의 연설 장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삼십 년만의 폭우로 인한 재난을 수습하는 와중에도 오각하의 연설을 들으러 수많은 군중이 모여드는 상황이다. 오늘 오각하가 발표하는 내용에 따라 저마다의 처지가 달라질 수 있다. 주인공인 거복은 오각하가 있는 한 북한과 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정미소, 전당포, 그리고 농장을 운영하는 대지주이다. 반면 맹첨지와 막봉이는 처지가 다르다. 맹첨지는 거복의 노복이고, 막봉이는 거복의 소작인이다."나눠는 주되 돈을 받고서 나눠준다고 하십디다." 맹첨지가 전하는 오각하의 입장이다. 이 한마디에 연설을 듣고 있던 군중의 한 무리가 빠지고 만다. 그 무리에 막봉이도 있다. 연설장에 가기 전에 그렇게도 기세가 등등했던 막봉이가 아니던가. "아, 지금이 어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거짓이 없는 고백은 쉼표가 필요합니다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거짓이 없는 고백은 쉼표가 필요합니다 지면기사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조현병 앓는 엄마와 무너진 일상돌봄의 역할 개인·가족에게 전가'억압하지 않는 의존' 떠올려야혼자 감당하지 않는 사회 기대 연극 '이상한 나라의, 사라'(원인진 작, 최치언 연출, 2월23일~3월3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는 상처와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다. "엄마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라고 말하던 사라가 "엄마는 이상한 게 아니야. 아픈 거야"라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사람이 물건처럼 구겨질 수 있다는 걸 목격하면서부터 상처가 시작된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엄마를 이송하는 장면에서다. "구겨질 수 있구나. 물건처럼."일상이 무너지는 날이 있다. 그날 이후 사라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친숙했던 존재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거기서 공포의 감정이 싹튼다.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세계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대상이 다르게 보인다. 익숙했던 삶의 시간이 무너지게 된다. 너무 느리거나 지나치게 빨라진 시간의 리듬에 몸이 따라갈 수 없다. 익숙했던 생활의 공간에 균열이 생긴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학교나 집이 이제는 안전을 보장하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나를 공격하는 적들이 출현하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다. 평온했던 일상에 난입하여 나의 세계를 파괴한다.준비 없이 닥친다. 각본이 없어 연습할 수도 없다. 사라에게 찾아온 난입은 집에서부터 일어난다. 엄마와 아빠로부터. 가까운 존재로부터 찾아오는 낯섦에서 공포의 감정은 극대화한다. 괴물로 바뀐 아빠의 모습에서, 그리고 엄마의 행동을 곁눈질하며 정상과 비정상으로 분류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서 충격과 혼란을 느낀다. 집 밖에서는 친구와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당한다. "너네 엄마 집 밖으로 못 나오게 해." 사라가 연필을 집어 친구를 찍으며 한 말은 "악마 같은 새끼"다. 조현병 환자와 그 가족의 고통에 대해 이웃과 사회가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은 결과이다.돌봄의 최전선으로 개인과 가족이 내몰려 있다. 공적 영역에서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개인이 각자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저는 조선 사람입니다"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저는 조선 사람입니다" 지면기사

    연극 '아들에게' 조선희 소설'세여자'의 파란만장한 삶 떠올려여기에 현미옥을 추가해야할 듯그 어디서든 배척당한 인생 그려대사가 지닌 무게 모두를 짓눌러연극 '아들에게'(구두리 작, 김수희 연출, 1월13~21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극단의 시대를 살았던 한 삶에 관한 보고서다. 그 이름은 현앨리스. 우리 이름으로는 현미옥. 1903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1953년 평양에서 체포될 때까지 어쩌면 평생 신은 구두보다 더 많은 도시를 전전했다. 그가 머문 도시는 자그마치 열 곳이 넘는다. 하와이, 서울, 상하이, 오사카, 거창, 블라디보스토크, 부산, 뉴욕, 로스앤젤레스, 프라하 그리고 평양. 평생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여러 나라와 도시를 오갔다.역사의 연표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때로는 한 사람의 삶과 그 시대 전체에 대한 통찰을 이끄는 표지가 될 수 있다. 극단의 시대라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보다 시대가 더욱 역동적인 행위자로 부상한 때이니 말이다. 현미옥의 요람에서 무덤 사이에는 3·1운동(1919),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 해방과 분단(1945), 한국전쟁(1950) 그리고 휴전(1953)이 있다. 조국의 독립을 그토록 꿈꾸었으나 해방된 조국은 급기야 전쟁을 치르고 만다. 하나로도 벅찰 사건이 생애 내내 연이어서 일어난다. 야만과 폭력이 난무한 이 연표에 한 사건을 더해도 좋다면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을 꼽고 싶다. 1894년을 지나며 일본 군국주의의 급팽창으로 조선을 둘러싼 동아시아 질서는 요동한다. 이후 한반도는 아주 오랫동안 피로 물들게 되는 극단의 시대를 지속하게 된다.연극은 역사적 사실과 극적 상상을 교직하며 전개한다. 역사적 사실 부분은 현미옥의 연대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 현순의 딸로 하와이에서 태어나는 이야기에서부터 북한에서 미국 간첩 혐의로 숙청당하는 에피소드까지 50년의 세월이다. 극적 상상 부분은 가공의 인물인 박기자가 현미옥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펼쳐진다. 그러니까 인터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이름이 뭐였지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이름이 뭐였지 지면기사

    면접장 무대 '너 자신이 되라'극한 상황 몰기 과장 심하지만'종결 이야기' 뭘지 상상 힘들어저렴하다 못해 싸구려 돼버린우리 삶 문틈에 벌거벗은 채 있다연극 '너 자신이 되라'(콤므 드 벨시즈 작, 까띠 라뺑 연출, 11월30일~12월10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면접장이 무대다. 면접 사회의 단면을 그리는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2017년에 초연되었고, 한국에서는 작년에 초연되었다. 여성 부장인 면접관과 젊은 여성 면접자 두 명이 이야기를 끌고 간다. 면접관이 묻고 면접자가 답한다. 때때로 면접관이 설교하고 면접자가 경청한다. 그리고 때때로 면접관이 요구하고 면접자가 수용한다. 두 사람이 선 자리가 포인트다. 묻고 설교하고 요구하는 자리는 면접관의 차지이며, 답하고 경청하고 수용하는 자리는 면접자의 몫이다."당신에 대해 말해주세요." "노래해 보세요." "다 벗어봐요." "나를 유혹해 보라고 요구할게요." 금방 누구의 말인지 짐작할 수 있다. "준비됐습니다." "전 이 면접 준비를 위해 여러 시간 코칭을 받았어요… 나 자신을 잘 소개하기 위해 정말 비싼 돈을 주고요. 모든 걸 준비했고, 다 점검했고,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어요." "학교에서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어요." 역시 누구의 말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면접관은 "당신 이력 말고, 당신"을 보여달라고 면접자를 닦달한다. 묻고 설교하고 요구하는 자에게 언제나 힘이 있다.친숙한 장면이다. 영화 '내 깡패 같은 애인'(2010)이 포착한 취업 준비생 한세진의 애환도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래를 불러야 했고 춤을 춰야 했다. 지방대 출신의 여성 취업 준비생에겐 묻는 것이 달랐다. "프랑스 백수 애들은 일자리 달라고 다 때려 부수고, 우리나라 백수 애들은 다 지 탓인 줄 알아요." 많은 공감을 받은 대사다. 사회 구조로 인한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려고 애써야 하는 사회에서 세진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겼다. 연이은 탈락으로 무력감에 사로잡힌 세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면접에서야 그의 말이 면접관에게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이야기 안에서까지 숨고 싶지 않아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이야기 안에서까지 숨고 싶지 않아 지면기사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진주 작, 이인수 연출, 10월27일~11월5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여성 서사의 작품이다. 무대는 18세기 후반 최대감 집 별당이 배경이다. 열녀문이 세워지며 시작한 연극은 열녀문이 불타며 끝난다. 열녀 모티프를 가져와 과거의 시간으로 에둘러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는 무엇일까.여기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 책과 일기. 책과 일기에 얽힌 각각의 에피소드가 교차하며 연극을 엮어간다. 우선 책이다. 책 에피소드의 중심인물은 난이다. 난이의 목표는 엄마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책쾌를 하던 엄마가 남긴 과거를 찾아 도착한 곳이 최대감 댁 별당이다. 별당은 만남과 창조의 장소이다. 아버지 최헌과 여러 여인을 만나는 장소이자 동시에 그들과 함께 '박씨전'을 창작하는 장소이다. 연극 '열녀를 위한 장례식'은 금서 목록에도 올랐던 '박씨전'을 가져오면서 살짝 비틀었다. 작자 미상의 '박씨전'을 다수의 여성이 집단 창작했다는 상상력으로 비틀면서 여성 창작 주체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최대감 집 별당에 모인 여인들은 비밀 독서 계 모임을 이어가다가 책쾌인 난이와의 만남이 촉발하여 마침내 이야기를 창작하기에 이른다.다음 일기이다. 일기 에피소드의 중심인물은 운선이다. 동생 월령의 죽음으로 열녀문이 세워졌으나 운선은 도무지 그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운선의 목표는 월령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마침내 일기를 찾는다. 일기는 발견의 장치이다. 그 발견의 결과로 열녀문을 불태우게 된다. 묻히지 않고 증발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기어이 살아남아 전해진 문장들이다. '제가 귀감이 될 거래요', '언니, 배가 고파요', '열녀문이 세워지면 언니도 절 기억해주시겠죠', '다음 꽃놀이 함께 가자는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요'.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이 연극에서 책과 일기는 말하고 기록하여 살아남았으나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말할 수 없는 자들 앞에는 금기라는 이름표가 붙은 경계선이 놓여 있다. 그 선을 넘지 말라는 주문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잘 지켜봐 주기만 하면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잘 지켜봐 주기만 하면 지면기사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강현주 작·연출, 9월5~23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는 식물학자들의 이야기다. 무대는 식물 분자생물학 연구실이다. 이곳에 여러 식물학자가 있다. 인턴, 석사과정생, 박사과정생, 박사후 연구원 그리고 교수가 함께 저항성 유전자를 찾고 있다.연구실이라니. 도무지 사건이 일어날 법한 장소가 아니지 않은가. 연구실이나 실험실의 시간은 되풀이의 시간이지 않은가. 관찰과 실험의 반복과 지속이 연구실의 문법이라면 그것은 동일성의 시간에 속한다. 동일성의 시간 흐름 속에서 사건을 만들어내기는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하지만 연구실이 말하고 있다. 연구실이 단지 이야기의 배경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연극은 식물의 이야기에서 우리 사회의 이야기로 거듭난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닦달로 만들어진 어른들 사회어떤 모습일지 설명 필요 없어 연구실이 들려주는 말은 식물의 상상력을 인간·동물의 상상력으로 치환하게 한다. 식물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가 어느새 인간·동물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어 있다. 이를테면 "그냥 우리 귀에 조용한 거야. 살려고 바둥대는 생명이 조용할 리가 있어?"라든가, "충분하지 않았겠지. 안전하다는 걸 믿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이"라는 대사를 배양실에 있는 애기장대(식물학 실험에서 널리 사용하는 모델 식물)나 귀화식물의 이야기로만 들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연구비 삭감은 곧 인권 삭감"이라는 대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온통 식물에 대한 대사뿐이지만 그 모든 말들이 곧 인간·동물의 삶과 생명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식물의 배양실이 아닌 인간·동물의 교실은 어떤가. 조용한가? 안전하다는 걸 믿는 데까지 필요한 시간을 기다려주는가? 이경숙은 "시험은 질문의 향연이어야 한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시험에서 만나 세상을 읽고 다시 해석하며 세상을 재창조할 꿈을 꿀 수 있다면 좋다. 질문의 향연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다. 질문을 통해 다른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라고 '시험국민의 탄생'에서 말했다. 과연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날 물건으로 생각하나 봐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날 물건으로 생각하나 봐 지면기사

    연극 '새빨간 스피도'(루카스 네이스 작, 이영석 연출, 8월11~2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다루고 있다. 미국의 극작가가 쓴 미국 사회의 이야기이지만 한국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만큼 최근의 우리 사회는 승자 독식의 사회로 치닫고 있다."너하고 론, 니들이 4번, 5번이다." 네 명만 살아남는다고 감독이 말한다. 주인공 레이는 수영선수이다. 수영을 계속하려면 4등 안에 들어야 한다. 아니면 퇴출이다. 아마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레이는 선을 넘기로 마음먹는다. 약물에 손댄다. 수영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레이이다. 퇴출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압도당했을 것이다. 이 사건, 그러니까 레이가 약물에 손댄 사건은 연극이 시작하기 오래전에 있었던 일이다.'새빨간 스피도' 스포츠 드라마 아냐회사 엔론 사라졌으나 모델은 건재지식공장 대학·건강기업된 병원 연극은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하루 앞둔 날 시작한다. 선을 넘은 이후 레이는 승승장구해서 올림픽 국가대표 발탁을 눈앞에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사건이 터지는 법이다. 숨겼던 약물이 발견된다. 레이는 범인으로 들통나는 게 걱정이 아니다. 선발전에서 탈락이 두렵다. 약 없이 선발전을 통과할 수 없다. 이미 돌아갈 길이 없는 레이는 약을 구하기 위해 전 여자친구인 리디아를 찾아간다. 이후의 레이는 결승선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를 닮았다. 옆을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린 채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경주마는 무한 경쟁에 내몰린 현대인의 모습이다. 파산한 이후에도 여전히 유명한 회사가 있다. 미국의 대기업 엔론이다. 엔론은 파산과 함께 엔론 모델을 남겼다. 최고의 성과를 올린 직원이 보너스를 독식하고 성과가 낮은 직원은 해고한다. '등수 매겨 내쫓기'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이 모델은 '랭크 앤드 양크'(Rank and Yank), 혹은 '20/70/10 룰'로 불린다. 연말에 하위 10%를 해고하면서 그 이름, 사진, 미달의 목표를 공개해 모욕을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그걸 아직도 기억해?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그걸 아직도 기억해? 지면기사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도은 작, 이래은 연출, 7월6~21일, 국립정동극장 세실)는 사랑에 관한 작품이다. 제목을 살짝 비틀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 코끼리에 더 갇히게 하는 법이다.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랑 이야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재은과 윤경의 사랑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친구, 연인, 부부, 그리고 동료로 이어지는 2007년부터 2099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재은과 윤경은 둘 다 여자다.사랑 이야기는 둘로 나뉜다. 행복한 결말과 슬픈 결말. 행복한 결말은 소년이 소녀를 만난다, 소년이 소녀를 잃는다, 소년이 소녀를 얻는다는 순서다. 슬픈 결말은 소년이 소녀를 만난다, 소년이 소녀를 얻는다, 소년이 소녀를 잃는다는 순서를 갖는다. 잃은 다음에 얻을 것인지 아니면 얻은 다음에 잃을 것인지 그것이 문제다. 잃은 다음에 고난을 극복하고 마지막에 얻으면 행복한 결말, 얻은 다음에 어떤 이유로 마지막에 잃으면 슬픈 결말이 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재은과 윤경의 이야기는 슬픈 결말의 사랑 이야기에 속한다.그렇다면 재은과 윤경의 사랑 이야기를 조금 특별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물을 바꾸었다. 소년과 소녀에서 소녀와 소녀로 변화를 준 것이다. 이야기 설계에서 인물의 변화는 흔한 일이다. 소년과 소년으로 바꾼 이야기는 또 얼마나 많은가. 더 다양한 변주를 원한다면 소년과 소녀의 자리에 다양한 성격의 인물을 넣어 보기만 하면 된다. 나이에 변화를 주면 노년의 이야기가 된다. 출신 지역을 바꾸거나 출신 계급에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나 초월적 힘을 가진 존재여도 좋다. 때로는 과거나 미래로 그 시간을 바꿀 수도 있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동성간 결혼 2062년 이후 법제화 문학평론가 김현은 '행복한 책읽기'에서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 '공포는 동일자가 갑자기 타자가 되는 데서 생겨난다. 타자가 동일자가 될 때 사랑이 싹튼다. 타자의 변모는 경이이며 공포다. 타자가 언제나 타자일 때, 그것은 돌이나 풀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우리 이웃들이죠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우리 이웃들이죠 지면기사

    연극 '우리 교실'(타데우시 스와보지아네크 작, 전용환 연출, 6월2~10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폴란드의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1928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간 동안 폴란드의 한 마을이 배경이다. 무대는 버려진 교실이다. 이제는 유령이 된 같은 반 친구들 10명의 이야기를 통해 폴란드의 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다.이 작품에서 극적 상상력의 출발은 교실이다. 교실은 표면적으로 폴란드의 역사를 학습하는 공간이다. 1교시부터 14교시까지 이어지는 동안 관객은 자연스럽게 폴란드의 역사를 학습하게 된다. 동시에 교실은 폴란드의 역사를 만들어간 사람들 그 자체이자 그 사람들의 공간이다. 그 교실에 10명의 아이들이 있다. 반은 폴란드 아이들이고 나머지 반은 유대계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꿈이 있다. 구두장이, 농부, 의사, 선생님, 마부, 군인, 재봉사, 영화배우, 그리고 조종사. 꿈은 서로 달랐으나 여덟 살 무렵의 아이들은 함께였고 하나였다.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시대의 아이들'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우리들은 시대의 아이들, 바야흐로 시대는 정치적.//너와, 우리와, 너희의 모든 일들, 낮과 밤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이 모든 것이 정치적.//원하건 원치 않건 우리의 유전자에는 정치적인 과거가, 우리의 피부에는 정치적인 색채가, 우리의 눈동자에는 정치적인 양상이 담겨 있다.//…그동안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고, 동물들은 죽었고, 집들은 불탔고, 들판은 폐허가 되었다." 연극 '우리 교실'이 왜 교실과 교실의 아이들에 주목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아르키메데스의 법칙과 별을 바라보는 칸트를'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으나 이후 아이들의 삶의 경로는 서로 달랐다. '우리 교실' 폴란드 현대사 압축역사 학습공간 '교실' 극적 상상력 무엇이 함께 하나였던 아이들을 갈랐을까. 무엇이 동무에서 적으로 그들을 갈랐을까. 무엇이 그들을 고문, 강간, 그리고 학살에 이르도록 만들었을까. 폴란드 아이들과 유대계 아이들 사이에 생긴 작은 균열이 마침내 폭발하여 자기 자신과 동무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모든 방향에서 모든 사람에게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모든 방향에서 모든 사람에게 지면기사

    연극 '몬순'(이소연 작, 진해정 연출, 4월13일~5월7일,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동시에 전쟁 그 너머까지를 다루면서 평화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가상의 세 나라를 배경으로 30년 이상 지속하고 있는 전쟁으로 인해 일상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는 폭력과 그 잔혹성을 고발하고 있다.몬순은 연극의 제목이면서 무기를 생산하는 회사의 이름이다. 연극 제목의 몬순은 비와 바람의 이미지를 통해 전쟁의 폭압을 상징한다. 하늘에서 내리꽂는 미사일의 수직적 상상력과 '모든 방향에서 모든 사람에게 불어오는 바람'이 전하는 광풍의 상상력은 전쟁의 야만을 전면적으로 그리기에 충분하다. 무기를 생산하는 몬순 기업은 군산복합체의 전형이다. 미사일을 생산하면서 동시에 "로켓도 만들어"라며 무기 생산을 정당화한다. 미사일과 로켓을 만드는 기술은 하나다. 드론이 게임으로 쓰일 때는 스포츠산업에 속한다. 하지만 미사일로 쓰일 때는 군수산업에 속한다. 기술주의의 폐해가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사회 에너지 어디에 쓸지 선택할때지향하는 가치·문명의 수준 결정연극 '몬순' 제목서 전쟁 폭압 상징 아이젠하워는 1961년 대통령 퇴임 연설에서 군산복합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대한 군사조직과 거대한 군수산업 간의 결합은 미국인들이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입니다. 경제적인 영역, 정치적인 영역 및 심지어는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하고 있는 전면적인 영향력은 어느 도시, 어느 주 정부, 어느 연방 정부의 사무실에서나 뚜렷이 느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오도된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여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은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존재할 것"이라며 군산복합체의 부당한 영향력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젠하워의 메시지는 냉전의 시기를 지나는 내내, 그리고 조직화한 폭력의 세계화 시대에 치러진 무수한 전쟁에서 단지 경고로만 그치지 않았다.우리가 사회적 에너지의 역량을 어디에 사용하는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사회의 에너지를 어디에 쓸지를 선택하는 과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여기가 내 자리야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여기가 내 자리야 지면기사

    연극 '엑스트라 연대기'(전성현 작, 윤한솔 연출, 3월4~12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점거를 소재로 삼고 있다. 작품의 시간은 1931년부터 2030년까지다. 지난 백 년 동안 있었던 점거 사건을 병렬하면서 노동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평양의 을밀대 지붕에 올라 노동해방을 외쳤던 강주룡에서부터 부산 영도의 타워크레인에 올라 노동해방을 외쳤던 김진숙에 이르기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점거의 현장을 재구성하고 있다.누가 올라가는가. 연극의 대사는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모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으나 그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고 몫이 없는 존재로 남겨진 사람들이 올라간다. 그들은 말하려고 올라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말하려는 자이다. 그들이 빼앗긴 것은 노동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어마저 빼앗겼다. 착취와 수탈에 맞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말마저 빼앗겼다. 그들은 빼앗긴 말을 되찾으려는 자이다. 가슴에 응어리진 말을 터트리려는 자이다. 그래서 오른다. 그래서 점거의 장소에 어제도 오늘도 오른다. 평원고무공장의 강주룡이 그러했고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이 그러했다. 평양 을밀대 지붕·부산 영도…타워크레인서 '노동해방' 외쳤던강주룡·김진숙… 오르고 나서 '특별' 어디에 올라가는가. 생활과 일터의 자리에 오른다. 그 점거의 장소가 특별해서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르고 나서야 특별해진다. 오르기 전에는 일상의 평범한 공간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른 후에는 해방의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선언에서 온다. 빼앗겼던 말들을 되찾는 선언에서 온다. 착취와 수탈의 폭력에 맞선 선언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내 자리야." 그 선언으로 말미암아 생활과 일터의 공간이 권리를 향한 해방의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선언이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 머물러 있을 풍경에 그 선언으로 균열을 만들게 된다. 점거는 그렇게 생활과 일터의 공간을 변혁의 장소로 재탄생하게 한다. 강주룡이 오른 을밀대가 그러했고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악기가 되고 싶은 장총'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악기가 되고 싶은 장총' 지면기사

    연극 '빵야'(김은성 작, 김태형 연출, 1월31일~2월26일, LG아트센터 서울 유플러스 스테이지)는 '악기가 되고 싶은 장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45년 2월에 생산된 소총 한 자루가 주인공이다. 인천 조병창 제3공장에서 만들어진 이후 지금의 소품 창고에 오기까지의 긴 여정이 곧 이 작품의 이야기 시간이다. 여든에 가까운 그의 나이는 한국 현대사의 시간과 겹쳐 있다.장총은 어디에서 왔는가. 장총의 쇠붙이는 어디에서 왔는가. 펌프, 가마솥, 삽, 호미, 촛대, 그리고 자전거였다. 녹일 수 있는 쇠붙이는 모두 녹였다. 장총의 나무는 어디에서 왔는가. 백두산과 지리산의 그 졸참나무가 베어졌다. 그리고 호른의 밸브는 방아쇠가 되었다. 생활과 생명 그리고 영혼의 숨결을 녹여서 폭력의 시대를 연장하였다.그렇게 만들어진 장총을 거쳐 간 사람이 자그마치 열일곱 명이다. 그중에는 일본 관동군도, 중국 팔로군도, 국군도, 인민군도, 그리고 빨치산도 있다. 만주, 제주도, 낙동강, 지리산을 누비며 수많은 목숨을 거두었다. 일제강점기, 해방기, 제주 4·3, 그리고 한국전쟁에서 장총은 그 주인을 바꾸어 가며 셀 수 없는 생명을 앗아갔다. 때로는 제국의 이름으로, 때로는 반제국의 이름으로, 그리고 때로는 해방과 통일의 이름으로 장총의 방아쇠는 당겨졌다. 그 폭력의 시대를 '기억하고 기록하고 증언하는' 자서전을 장총은 그렇게 써 내려가고 있다.장총은 민간인과 군인을 구별하지 않았다. 또한 장총은 어린아이와 산모도 구별하지 않았다. 서해성의 시에 이지상이 곡을 붙여 노래한 '나무를 심는 사람들'에도 이러한 총탄과 포탄의 잔혹이 담겨 있다. '저 총탄이/ 아이와 군인을 구별한단 얘기를/ 난 듣지 못했네/ 저 총탄이/ 우유공장과 탱크를 구별한단 얘기를/ 난 듣지 못했네 … 저 포탄이/ 노인과 여자를 구별한단 얘기를/ 난 듣지 못했네/ 저 포탄이/ 군수공장과 병원을 구별한단 얘기를/ 난 듣지 못했네/ 총탄이 날아온 그 숫자만큼/ 꽃씨를 뿌려요/ 평화의 꽃씨를/ 총탄이 날아온 그곳을 향해서/ 노래를 불

  •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바다로 가요

    [권순대의 '대사 한 줄로 읽는 연극'] 바다로 가요 지면기사

    연극 '등장인물'(신재 연출, 11월 16~20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은 그 제목이 독특하다. 제목 앞에 '아직 등장하지 않은'이라는 작은 글자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아직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이 정확한 제목이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이라는 제한이 붙어 있는 이유를 짐작하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처한 환경을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공연 내용은 단순하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직접 가사를 쓴 '시원한 여름'과 '사랑의 마음'에는 그들의 소망과 마음이 담겨 있다. 바다에 가고 싶고, 물놀이도 하고 싶다. 소박하다. 그러나 '바다에 가요'라는 가사가 그들에게 얼마나 힘겨운 숙제인지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들에게 사랑의 마음은 친구들이 다칠까 봐 도와주는 마음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줄게요. 마음을 다 주면 그 사람도 알겠죠'라고 노래한다.연극 '등장인물'의 출연자들은 중증발달장애인이다. 출연자가 장애인이라서 공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장애인 연극이 전무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지원사업으로 장애인 당사자가 출연하거나 창작하는 여러 작품이 매년 꾸준하게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연극 '등장인물'이 특별한 것은 그 중심에 해방을 향한 실천이 있어서다. 출연자는 2~3년 전부터 시설에서 나와 자립생활을 시작했으며, 그중에는 시설에서 38년을 지낸 분도 있다고 한다. 최근 탈시설 운동이 확산하면서 지역사회가 함께 돌보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자립과 의존에 관한 낡은 관점에서 벗어나 상호의존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자립은 의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존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이 장애인용으로 돼 있지 않으니 장애인은 의존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적습니다. 장애인이 너무 의존하는 게 아니라 의존할 게 부족하기 때문에 자립이 어려운 겁니다. 인간은 약함을 서로 보충하고 의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면서 강해졌어요. 장애인만 의존하지 말라는 것은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