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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기도의 주어

    [with+] 기도의 주어 지면기사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충북 음성에 있는 매괴고등학교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왔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이 일대의 성당과 저수지를 돌아다닐 여행 일정이 펼쳐졌다. 강연을 마친 후 학교 옆에 있는 매괴성당으로 향했다. '매괴'는 장미꽃다발을 한자식으로 풀이한 것으로, 성모에게 바치는 묵주기도를 뜻한다. 내가 로사리오(묵주기도)를 처음 한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도 첫 영성체를 받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일 것이다. 당시 우리 본당은 건물도 없어서 오랫동안 컨테이너 박스로 된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드렸다. 나는 '양력'과 다르게 흘러가는 두 시간대를 좋아했다. 하나는 농부인 큰아버지에게 유의미한 24절기가 인쇄되어 있는 달력이다. 농협에서 주는 달력에는 월력과 더불어 중요 절기가 따로 표기되어 있다. 또 하나는 성당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이다. 사순절, 부활절, 성모성월, 대림절과 대축일들로 흘러가는 그레고리력에 따라 신부님이 제대 위에서 입는 의복이 달라진다. 강력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 학교에 가고 의무를 배우고 성적이 매겨지는 시간과는 또 다른 시간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것은 물처럼 잡을 수 없는 시간 위에 띄우는 또 다른 부표로서, 일상이 다른 빛깔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난 내킬때만 성당 찾는 불량 신자지구 한쪽선 이해할 수 없는 전쟁감곡 매괴성당은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성당으로, 가을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벽돌건물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산책길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이듬해 한국에 와서 이 성당을 지은 '임 가밀로'라는 초대신부님의 가묘가 나온다. 안내문에는 문맹퇴치를 위해 학당을 세운 신부님의 공을 치하하여 고종황제가 태극기를 하사한 일,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자 태극기를 제대 속에 숨겨 놓고 지내다가 광복 후 음성에서 가장 먼저 태극기를 내걸었던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긴 수염을 기른 푸른 눈의 사제이자 한 인간의 삶을 상상하니 아득해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자라면서 나는

  • [with+] 배론 성지의 가을 햇빛

    [with+] 배론 성지의 가을 햇빛 지면기사

    처음부터 배론 성지를 찾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가을 햇빛이 너무 찬란하니, 어디든 떠나자 한 곳이 배론 성지였다. 제천의 의림지를 한 바퀴 돌면서 배론 성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지라면 더욱 그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 배론 성지를 찾아 나섰다. 아직 산하는 푸르러 가을 정취가 깊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산줄기에서 가을의 분위기가 번져왔다.송골매의 CD를 걸었다. '모두 다 사랑 하리'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시작으로 삼십여 곡을 다 들었다. 담백한 목소리가 좋았다. 기교 없이 흐느끼지 않고 흐르는 선율이 매력 있다. 차는 미끄러지듯 성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내를 둘러봤다. 고즈넉하다.1801년 순교한 황사영 토굴 초가집성직자 양성 천주교 첫 신학교 교사그는 교황 있는 서양 연결 꾀하기도우선 황사영의 토굴을 찾아갔다. 토굴은 깊지 않았다. 한 사람이 겨우 은거할 수 있는 크기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토굴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편지는 명주 천으로 세필로 쓴 글자 수가 122행에 무려 11만3천여 자나 되었다. 그것이 황사영 백서다. 이 백서는 인사말, 신유박해의 진행과정, 순교자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 맺음말로 되어 있다. 백서는 주교에게 전달되기 전에 압수되었고 백서의 전달을 맡았던 토마스가 그 해 9월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5일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되었고 6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마리아)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황사영은 체포되어 그해 11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 토굴이 있는 곳의 초가집은 우리나라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교의 교사였다. 1855년 초 성인 장주기(요셉)의 집에 설립된 요셉신학교에는 프랑스인 프레티에, 프티니콜라

  • [with+] 원 플러스 원 새송이버섯

    [with+] 원 플러스 원 새송이버섯 지면기사

    아홉 살 딸의 친구들은 놀이터에서 놀다 말고 군것질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모양이지만 우리 아이는 아직 그런 적이 없다. 편의점은 놀이터에서 아주 가깝지만 폭 좁은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엄마나 아빠 없이 길을 건너는 건 절대 금지라고 누누이 말한 터라 아이는 그래 본 적이 없는 거다. "그럼 친구들이 편의점 갈 때 너는 그냥 기다려?" 내가 물었을 때 아이가 대답했다. "진정한 친구들은 안 가. 내가 못 간다고 하면 나를 위해서 자기도 안 가는 거지. 하지만 나 보고 그냥 기다리라고 하면서 갔다 오는 친구들도 가끔 있어. 그래서 나도 요즘은 편의점에 가보고 싶기도 해. 진짜 재밌을 것 같거든." 아이의 표정은 아쉬워 보였다.나는 소심한 사람이라 아이들끼리 길 건너는 걸 두려워하고, 소심하지는 않지만 아이 아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쯤 아이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하고는 있었다. "그럼 마트에 가면 안 돼? 마트도 놀이터랑 가깝고 길도 안 건너잖아." 놀이터 옆에는 편의점 말고 작은 마트도 한 곳 있다. "하지만 친구들이 마트는 별로 재미가 없대. 편의점이 재밌대. 그리고 친구들한테 마트 가자고 할 것까진 아닌 것 같아. 아빠가 아홉 살 어린이가 벌써 돈 쓰고 그러는 거 좋은 일은 아니라고 했어." 하긴, 편의점에는 동네 꼬마들이 좋아할 아이템들이 꽤 있다. 캐릭터 인형이 달린 사탕 반지나 젤리, 초콜릿 같은 것들 말이다. 부모없이 횡단보도 건너기 금지 당부친구들과 편의점 못 가본 아홉살 딸대신 마트 가기로 큰 결심했다는데 아이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침 메뉴는 아보카도를 얹은 토스트다. 버터 넣고 프라이팬에 지진 토스트에 아보카도 반 개를 잘라 얹고, 달걀 프라이와 오렌지 반 개, 그리고 새송이버섯 한 개를 얇게 썰어 구우면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아보카도는 소금과 후추만 살짝 뿌려도 고소하고, 새송이버섯에다 오렌지 썬 걸 한 번에 입에 넣으면 식감이 아주 그만이다. 그런데 아침에 새송이버섯이 똑 떨어진 걸 모르고 있었다. 별수 없이 버섯 대

  • [with+] 시기심과 쌤통 심리

    [with+] 시기심과 쌤통 심리 지면기사

    만약 당신이 직장 동료의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것을 다른 동료들에게 말할 것인가? 당신이 배려심이 깊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는 사람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그런데 남의 비밀을 오히려 들추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빅튀르니앵 부인이다. 그녀는 공장에서 일하는 팡틴이라는 여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빅튀르니앵 부인은 쉰여섯 살로 추녀이고, 팡틴은 젊고 아름다워서 주위에 시기하는 여자가 많다. 사람들은 팡틴이 다달이 몽페르메유의 여인숙으로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을 알았고, 팡틴에게 어린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빅튀르니앵 부인은 팡틴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자기 돈을 들여 멀리 있는 몽페르메유에 다녀오기까지 한다. 그 결과 빅튀르니앵 부인은 팡틴이 그곳의 여인숙 주인 부부에게 딸아이를 맡기고 양육비를 부치고 있는 미혼모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 사실을 발설하며 즐거워한다. "35프랑이나 들여서 다 알아냈지요. 어린애도 봤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팡틴은 유일한 피붙이인 딸아이와 함께 살고 싶지만 양육비를 벌어야 했으므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여운 인생을 사는 팡틴에게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타인의 불행은 나의 기쁨'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신바람이 난다.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중자기보다 앞서 있는 사람 부러워 해 인간에게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남의 불행은 꿀맛이다'라는 일본 속담과 같이 남의 불행에 쾌재를 부르는 심보가 있기도 하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느끼는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한다는 뜻을 가진 독일어다. 리처드 H. 스미스가 쓴 '쌤통의 심리학'(이영아 옮김)에서는 샤덴프로이데를 '쌤통 심리'로 번역했다. '쌤통의 심리학'은 부제가 말해 주듯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은밀한 본성에 관하여'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읽은, 아리스토

  • [with+] 유령작가의 기쁨

    [with+] 유령작가의 기쁨 지면기사

    연휴기간에 속초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했다. 그 카페는 내가 머무는 집과 해변의 중간에 있어서 긴 문장의 한가운데 박힌 쉼표 같았다. 사거리 모퉁이의 가게는 크지 않지만 노란색과 주황색의 실내장식을 하고 있어 밝은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스피커가 훌륭하여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커피가 맛있다. 나는 즉각 이 카페에 눌러앉기로, 그러니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침 산책 이후 카페에서 책을 읽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 되었다. 두 면이 통창으로 된 이 카페는 어항 같았다. 12차선 도로가 정면에 있어 길 건너의 사람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걸어와 건널목을 다 건너고 가게 옆으로 빙 돌아서 해변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다가와 길가로 돌아가는 모습을 감상했다. 사람들은 해변으로 향하는 중이거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라 그런지 독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치고 행복한, 설렘이 살짝 들어있는 표정. 유리 너머 보는 풍경이기 때문에 모두 스크린 속 배우들 같았다. 내마음의 쉼표 같은 속초의 카페여행중인 사람들 표정 보는 재미책속 문장까지 추출 살뜰한 독서 그러다 노란 테이블로 돌아와 - 이 카페의 단 하나뿐인 넓은 탁자- 내 노트와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들고 온 책의 표지와 탁자가 똑같이 노란 색인 것이, 이 우연한 일치가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줄 친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는 필기 자체를 참 좋아한다고.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우선 책을 읽고, 책 속에서 나의 마음을 건드렸던 문장을 펜으로 옮겨 적는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연필을 꺼내 구분하여 적는다. 노트에 필기하는 순간은 글을 쓰기 위한 예열 단계에 해당한다. 다이빙 선수가 수영복을 입고 실내로 들어와 준비운동을 한 다음에 다이빙대에 올라가 하나 둘 셋, 바를 튕기고 마침내 입수! 하기 전까지 거치는 단계라고 할까. 줄 친 문장을 옮겨 적으면 원석 가운데 빛나는

  • [with+] 안동 병산서원의 배롱꽃

    [with+] 안동 병산서원의 배롱꽃 지면기사

    매년 안동 병산서원을 찾는다. 병산서원은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다. 부분적으로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스팔트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높지 않은 산줄기들과 낙동강 상류의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여유롭고 정겹다.병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교육기관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1978년 3월31일 사적 제260호에 지정되고, 2010년 7월31일과 2019년 7월10일 각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6월 안동 병산서원을 포함한 하회마을 일대와 양동마을 일대를 한국의 역사마을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를 신청했다. 그 결과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성룡의 학문·업적 기리는 서원정문 복례문 넘으면 고고한 모습웅장함에 저절로 옷 매무새 고쳐연못에 그늘 드리우는 배롱나무낙화된 꽃잎들 아름다움에 황홀"유성룡을 파직시키라." 조선 14대 임금 선조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1598년 11월19일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중 영의정으로서 국난 수습에 앞장섰던 이름 난 재상 유성룡은, 전란이 끝나갈 무렵 북인들의 정치적 음해와 공격에 한 달 넘게 고초를 겪으며 수세에 몰려 있었다. 계속되는 상소를 견디다 못한 선조는 유성룡 축출을 명했던 것이다. 유성룡은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기도 전에 재상이라는 관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같은 날인 1598년 11월19일, 남해 해전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백성들이 가슴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줘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전투 중 전사한 것이다. 파직당해 낙향할 처지에 있던 유성룡은 절친한 사이로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이순신의 전사

  • [with+]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

    [with+]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 지면기사

    엄마가 택배로 김치를 보냈다. 한 통은 배추김치, 나머지 한 통은 열무김치. 내가 불러주는 맞춤법 퀴즈를 풀던 아홉 살 딸아이는 김치 때문에 퀴즈가 멈춰 골이 났다. '해도지'가 아닌 '해돋이', '낭떨어지'가 아닌 '낭떠러지', 그런 퀴즈가 요즘 세상에서 제일 재미나단다. 나는 쉬운 문제만 골라낸다. 행여 한 문제라도 틀리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입술을 삐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날 내는 문제만 내주어서 수십 번 퀴즈를 풀어도 아이의 맞춤법 실력은 별 발전이 없다. 이걸 왜 저녁마다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지경이니 말이다. "엄마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김치통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요즈음 학교 분위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엔 한 학교에 한두 명쯤 유별난 우등생이 있었다. 좋게 말해 우등생이지, 시험 때만 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선 한 문제라도 틀릴라치면 악을 빽빽 쓰고 시험지를 찢어발기고 온 반 아이들을 정신 사납게 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도대체 시험이 뭐라고, 시험 문제지 걷어가자마자 서랍 속 참고서 우다다다 뒤져서 정답 찾아보고, 틀렸다 싶으면 세상 떠나가라 울어젖히는 못 말리는 진상.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바로 그런 애였다. 진심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평소에는 멀쩡했다. 잘 놀고 잘 웃고 친구들과 잘 지냈다. 친구들의 연애편지도 대필해주고, 그 공으로 바나나우유도 얻어먹었다. 쉬는시간엔 함께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매점으로 달려가 보름달 빵을 사먹던 평범한 열다섯 살, 중학교 1학년. 그런 내가 시험 때만 되면 돌변했다. 전교 1등을 놓치면 죽는 줄 알았던 나는 한 문제라도 틀리면 문제집을 다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눈물콧물 다 쏟으며 법석을 떨었다. 친구들이고 선생님들이고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간고사 가정 시험이었다.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이라는 문제였고, 나에게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네 개 모두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였다. 아마도 마늘, 생강

  • [with+] 재물과 행불행

    [with+] 재물과 행불행 지면기사

    부유하지만 근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검은 수사'에 나오는 예고르 세묘니치다. 그는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다. 나이 든 그는 집에 놀러온 젊은 코브린에게 정원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이런 모습은 나 없이는 단 한 달도 유지되지 못할 걸세. 이 정원이 성공을 거둔 까닭은 엄청나게 크고 일꾼이 많아서가 아니라네. 성공의 진짜 비밀은 내가 이 일을 사랑한다는 데 있단 말일세"라고. 그리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접붙이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고 묘목도 심고 모든 걸 자기가 한다면서, "내가 죽으면 누가 그걸 다 돌볼까? 누가 일을 할까?"하고 걱정을 한다.미셸 드 몽테뉴의 책 '에세'에는 돈을 갖게 된 때 근심을 가졌던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을 갈 때면 돈 가방 때문에 짐꾼들이 믿을 만한지 걱정되고, 돈 가방이 눈앞에 없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돈궤를 집에 두고 오면 항상 그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며,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고 몽테뉴는 썼다. 우리 주위에도 부유하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지인한테서 들은 70대 할머니는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을 갖고 있었다. 계약보증금은 싸지만 월세가 비쌌기에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그런데 경기가 침체되면서 월세를 몇 달 내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세입자들과 다툼이 일어나 속을 끓이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사했다. 소문에 따르면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아 몇 년 전 건물을 샀다. 건물을 산 뒤에도 구두쇠였던 노인은 비싼 음식을 사 먹지 않았고, 비싼 옷을 사 입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돈의 노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 불행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재물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고 마음에 그늘이 지게 만들기도 한다. 부자일수록 근심은 더 많다는 속담이 있다. 부자는 아무 근심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생활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가난한

  • [with+] 나라는 박물관의 관람객

    [with+] 나라는 박물관의 관람객 지면기사

    일주일간 대대적인 '집 안 이사'가 있었다. 원래는 딸의 방을 새로 만들어주려는 이유였는데, 그러다보니 함께 쓰던 공부방을 분리하고 남편의 취미 방을 처분하고 내 서재를 독립해나가는 식으로 일이 커졌다. 끝나고 보니 방 세 개의 모든 가구가 재배치되는, 방들끼리 이사를 다니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참에 오래된 물건도 솎아내고 묵은 먼지도 털어 내다보니 모든 것이 정리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서재에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딸이 태어난 후 십 년만에 온전한 서재를 되돌려 받게 된 셈이었으니까. 책장을 정리하면서 나만의 버릇대로 '심장' 칸을 하나 만들었다. 책장 한 가운데를 비우고, 그 안에 가장 좋아하는 '경전' 몇 권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거실 벽을 책장으로 채울 때 만들어본 방법인데 이렇게 한복판을 비워두고 평생 읽을 보물 같은 책들을 채우면 책장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룸에 해당한다고 할까? 거실의 심장 칸에는 '돈키호테'와 '모비딕', '보르헤스 단편집'과 '빌러비드' 등이 있고 그 위쪽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있다. 서재의 심장에는 무엇을 넣어둘까? 나는 즐거운 고민에 빠져 일단 전집에서 '안나 카레리나' 세 권을 가져다 넣어두었다.(이 글을 쓰다말고 일어나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도 추가했다.) 서재 심장엔 '안나 카레리나' 세권한쪽엔 습작·편지 등 '인생 기념품' 여섯 개의 책꽂이로 둘러싸인 책상은 견고한 성채처럼 보인다. 큰 책상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책상으로, 하나는 식탁으로 쓰고 있다. 이 커다란 짐승 같은 탁자를 책상으로 길들이기 위해 두꺼운 옥스포드 천을 깔고 몇 개의 '성물'을 늘어놓았다. 자주 쓰는 파일꽂이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필기구와 핸드크림이 꽂힌 도자기통, 나침반이 그려진 문진과 향초 등등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있으려니 정찬을 준비하는 집사 같다. 달리보면 나만이 유일한 요리사요 손님이지만 이제부터 이 책상에서 쓰게 될

  • [with+]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 이옥

    [with+]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 이옥 지면기사

    이옥(李鈺, 1760~1813)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시인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서얼이었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호위별장 이만림이고, 할아버지는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이동윤이며, 아버지는 이상오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이성현감 홍이석의 딸이다. 실학자 유득공은 이모의 아들로, 이종 사촌형이 된다.그는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였다. 정조는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하고 문체반정을 통해 대대적인 문장개혁을 실시했다. 당대의 문장가들인 박지원이나 이덕무, 박제가도 반성문 제출을 왕으로부터 요구받았다.이옥은 문체반정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과거시험 자격이 여러 차례 제한되기도 하고 멀리 기장까지 쫓겨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의 불경스럽고 불온한 문체가 늘 말썽이었다.정조, 선비기풍 잡으려 '문장개혁'불온한 문체로 왕의 미움받은 이옥 그는 왕의 미움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 내려가면서도 부지런히 글을 썼다. 예컨대 남정십편(南程十篇) 등이 그것인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보고 들은 것들 열 편을 쓴 것으로 반성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고 불경스럽고 해괴한 내용들이었다.이옥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어려서의 이름이 기상이며 호는 경금자(絅錦子)라고 썼다. 별볼일 없는 무반의 후손으로 당색은 당시 몰락의 길을 가던 북인 계열이었다. 그의 문집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필사본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들을 2009년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다섯 권의 전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그의 복권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만한 분위기다.그는 시인이면서도 시는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언'은 무엇 하고자 지은 것인가? 어째서 국풍이나 악부나 사곡을 짓지 아니하고 굳이 이언을 지었소?" 이언은 네 여성의 삶을 서로 다른 가락으로 노래한 그의 시다. "내가 한 게 아니라오. 주재자가 그렇게 시킨 것이라오."이 질문은 처음부터 '이걸 시라고 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