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 [with+] 선행과 이로움

    [with+] 선행과 이로움 지면기사

    '자네가 말하는 그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도, 알고 보면 쾌락 때문이야.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지. (중략) 자네가 거지에게 동냥을 하면 그건 자네 자신의 쾌락을 위한 거야. 내가 위스키 소다를 또 한 잔 마시는 게 나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나 같아'.-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중 소설 '인간의 굴레에서'를 읽다가 이 글을 만났다. 주인공 필립에게 시인 크론쇼가 한 말이다. 필립이 쾌락이라는 표현에 반감을 나타내자 크론쇼는 '행복'이라 하지 않고 '쾌락'이란 말을 사용하겠다며 그 이유는 쾌락이 사람의 목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쾌락을 최고선으로 여겼던 철학자 에피쿠로스를 상기시킨다. 우리 인간이 착한 일들을 실천하는 이유가 쾌락 때문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인간은 본래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악행은 물론이고 선행조차도 쾌락이라는 이로움 때문에 한다. 쾌락을 즐거움이나 기쁨이나 또는 흐뭇함으로 바꿔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인에게 생일 선물을 주었다면 그것이 즐거워서다.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서다. 구걸하는 거지에게 돈을 주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의 기분이 좋아져서다. 불우이웃을 위해 기부금을 냈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의 기분이 좋아져서다. 착한일 실천하는 이유는 쾌락때문거지에 돈주는 건 기분 좋아져서다 이번엔 자원봉사자들이 홍수로 침수된 지역에서 피해 복구를 도우며 고생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들에겐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일례로 흐뭇함이라는 이로움이 있을 수 있다. 자원봉사자들을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싶다. 하나는 힘들지만 봉사 활동을 하면서 그 자체로 흐뭇함을 느끼는 부류다. 또 하나는 힘들지만 봉사 활동이 끝난 뒤에 흐뭇함을 느끼는 부류다. 마치 집안 청소를 마친 후 흐뭇함을 느끼듯이 말이다. 혹자는 자신이 하고 싶어서 봉사를 하는 것이니, 자원봉사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 [with+] 인생의 슬픔

    [with+] 인생의 슬픔 지면기사

    나는 상대적으로 명랑한 사람이다. 그건 우리 엄마의 뱃속에 입장하기 전에 내가 타고 있던 구름이 유난히 푹신푹신하고 경박한 물방울 씨앗을 품었던 탓이 아닐까. 말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뛰어다니기 좋아하던 유년시절에서 출발해 여전히 말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자전거타기를 좋아하는 중년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생각한다. 인간의 생애는 왜 이렇게 슬픔이 가득할까! 도서관 한 귀퉁이에 앉아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손녀의 짧은 여행을 그린 그래픽노블을 보다가 문득 비애감에 물들었다. 책 속의 인물들이 겪는 고통은 너무나 보편적인 일이었기에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그러자 어젯밤 엄마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난밤 엄마와 나눈 이야기 떠올라이른 나이 세상 떠난 새롬이 아줌마아들에 남편마저 잃은 젬마 아줌마 엄마의 친구들, 그 중에서도 세상을 떠난 세 아주머니들이 갑자기 대화의 중심이 되었다. 첫 번째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 새롬이 아줌마. 호리호리한 몸피와 활기 넘치는 목소리. 이분은 예쁘고 세련된 외모에 위트가 넘치고 취향이 고상했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 화단을 파서 김장독을 묻던 일이 허용된 터라 엄마가 항아리에서 김장김치를 꺼내면 아줌마가 지나가다 한쪽씩 얻어가던 기억이 난다. 엄마 친구지만 내 친구이기도 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오 분이나 십 분씩 대화를 나누었다(엄마 친구 중 단독으로 대화가 '통하던' 분이다). 이렇게 빛나던 새롬이 아줌마는 이혼 후에 가난으로 고생하다 이른 나이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아주머니는 두꺼운 겨울옷이 없어 중학생 아들의 남자용 파카를 입고 있었다. 언젠가 엄마는 노래방 테이프에서(그때는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를 테이프에 녹음해주는 서비스가 있었는데) 새롬이 아줌마의 목소리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줌마의 평소 인상과 달리 노래 목소리는 비통했다. 이것이 사실인지 엄마의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고인이 된 지 십수 년이 지난 뒤 재생되어 나오는 그 노래를 떠올려보았다. 두 번째는 젬마 아줌마. 엄마와 성당 레지오를 함께 하며 단짝으로 지낸

  • [with+] 샛별 같았던 박제가

    [with+] 샛별 같았던 박제가 지면기사

    박제가(1750~1805)는 아버지 박평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좋아해서 읽은 책은 세 번씩 베껴 썼고 언제나 붓을 물고 있다가 글을 쓰는 것이 습관이었다. '내가 글을 처음 배운 것은 젖을 먹을 때였지'라는 시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아버지 박평은 서자이기는 하지만 만년에 얻은 그에게 각별한 정을 주었다. 본가에서 다른 자식들과 함께 생활하게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열한 살 때 죽고 한성부의 본가에서 나오게 되면서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는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과부로 가난하게 살면서 십여 년 동안 좋은 옷을 입어보지 못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보지 못하고 밤을 새워 삯바느질을 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박제가와 교류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 많이 알려진 사람이 많았는데 어머니는 가끔 그들을 초청해서 주안상을 차려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의 집에 다녀온 사람들은 후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그처럼 빈한한지를 몰랐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그처럼 컸던 것이다.서자로 신분·사람 차별하지 않는박지원 문하에서 많은 인물 교류자기 주장 강하고 굽힘이 없었다 박제가는 청년기에 우연한 기회에 박지원의 문하에 들어 교류하게 된다. 세상에 눈뜨게 되면서 사회적 천대와 멸시, 그리고 양반제도의 모순에 회의와 불만을 갖게 된다. 이때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여러 실학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덕무와는 절친한 벗으로 평생을 함께한다. 신분과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박지원 문하에서 여러 동료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때 교류하던 인물들 중에 홍대용은 후일 박제가의 문하생이 되는 김정희의 장인 홍담용의 사촌간이 된다. 그는 늘 고민이 많았다. 장인 이관상과 사람을 가리지 않는 박지원의 배려로 전통적인 양반교육을 받았지만 서자라는 신분적인 제약으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사상이 뿌리 깊었다. 남인인 정약용과 친

  • [with+] 소풍길

    [with+] 소풍길 지면기사

    아홉 살 딸아이가 같은 반 친구에게서 생일 파티 초대장을 받았다. 그런데 거절했단다. 못 간다고 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화들짝 놀라 왜 거절했냐 물었더니 그 시간에 태권도장과 피아노 학원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생일 파티에 가느냐는 거였다. "아니, 그깟 학원이 뭐라고. 빠지고 다녀 와!" 그랬더니 아이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인 줄 알았단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친구 생일 파티에 가는 것이 처음이다. 제 생일에도 친구를 초대해본 적 없다. 그렇구나, 코로나 세대구나. 아이를 데리고 동네 문구점엘 갔다.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쇼핑 바구니를 들고 이것저것 담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귓속말로 어떤 선물을 받고 싶냐 물었을 때 슬라임이라 대답했단다. 그래서 슬라임 한 통 담고, 산리오 캐릭터가 그려진 필통도 담고, 천원짜리 작은 수첩과 지우개도 담았다. 민트색 포장지도 골랐다. 집에 와서는 서랍을 뒤져 마스킹 테이프를 꺼내고 아끼던 스티커도 꺼내 선물을 잔뜩 꾸몄다. 파티 전날 밤, 아이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너무너무 설레고 가슴이 뛰어 불을 끄고도 한참이나 종알거렸다.우리가 사는 동네는 신축 아파트 단지다. 그래서 딸아이와 딸 친구들이 아는 '집의 형태'는 총 세 가지다. 아파트와, 아파트가 지어질 때 함께 들어선 빌라, 그리고 아파트 둘레길을 따라 지어진 상가건물(아이들은 이걸 '빌딩'이라 부른다). 딸아이는 이제 처음으로 '빌딩'에 사는 친구네에 가는 거다. 빌딩 안 집은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아이는 궁금해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사람 사는 덴 어디나 다 비슷비슷해." 엄마의 그런 말은 아이에게 소용이 없었다. 같은 반 친구 생일파티 초대받은 딸잔뜩 산 선물 꾸미며 '설레는 모습' 비가 오면 친구네 엄마가 차를 가져와 아이들을 데려간다 했지만, 비가 안 오면 친구 따라 손잡고 길 건너 '빌딩'으로 가기로 했다. 생일날 아침, 날씨는 맑다. 엄마와 아빠 없이 횡단보도를 처음 건너보게 된 것이다. 아침을

  • [with+] '관리의 죽음'이 주는 교훈

    [with+] '관리의 죽음'이 주는 교훈 지면기사

    회계원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 번째 줄에 앉아 오페라 공연을 보면서 행복의 절정에 다다른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재채기를 하여 주위를 둘러봤다. 첫 번째 줄에 앉은 노인이 자신의 대머리와 목을 장갑으로 닦으며 투덜거리는 것을 보고 그 노인에게 침이 튀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노인은 다른 부서의 브리잘로프 장군이었다. 그는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장군의 귀에 "용서하세요 각하. 제가 침을 튀겼군요. 본의가 아니었습니다만…"이라고 속삭였다. 장군은 괜찮다고 했다. 휴식 시간에 그는 장군에게 용서를 해 달라고 더듬더듬 말했고 장군은 "허, 정말… 나는 벌써 잊어버렸다니까. 아직도 그 얘기요!"라고 말했다. 그는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눈에는 원한이 담겨 있는 걸' 하고 생각했다.집에 돌아온 그는 브리잘로프 장군이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장군을 찾아가 재채기에 대해 해명했으나 장군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결국 다음날 장군을 또 찾아가 사과의 말을 했다. 장군은 "꺼져!" 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그는 공포에 질려 속삭이듯 "뭐라고요?"라고 물었고, 장군은 "꺼지라니까!" 하고 발을 구르며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의 뱃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버렸다. 그는 집에 돌아와 관복을 벗지 않은 채 소파에 누웠다. 그리고 죽었다. 여기까지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의 내용이다.소설 속 주인공 체르뱌코프는 상관의 위압적인 고함 소리에 심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숨지고 만다. 이처럼 마음의 병으로도 숨이 끊어질 만큼 우리 인간은 나약한 존재다. 재채기 같은 사소한 일로도 불행해질 만큼 우리 인간은 가련한 존재다.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 상관 고함에 주인공이 숨지는 비극자기실수 집착… 불행으로 이어져 체르뱌코프는 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브리잘로프 장군은 체르뱌코프가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하려는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의 거듭되는 사과에 분노가 치밀었다. 체르뱌코프는 장군이 자기의 사과를 받아 주지

  • [with+] 인간이라는 녹음기

    [with+] 인간이라는 녹음기 지면기사

    오랜만에 소설가 친구와 저녁 약속이 생겼다. 산책하다 골목 안쪽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막걸리도 한 병 곁들여 사는 안부와 소설 안부를 두루 묻다보니 음식이 나왔다. 밥술을 다 뜨고 마지막 잔을 먹는데 주인 할머니가 다가와 여덟 시에 식당 문을 닫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괜찮다, 다 먹었다고 자리를 정리하려는데 할머니는 아니다, 천천히 먹다 가도 된다면서 손사래를 치더니 "요즘에는 일하는 사람 쓰기가 너무 어렵다. 임금을 넉넉히 줘도 식당 문 닫을 시간되면 손님을 내쫓는다. 그래서 마무리는 주인인 내가 한다"고 푸념을 늘어놓으셨다. 그러시군요, 라고 대답한 것을 시작으로… 장장 삼십분 간,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펼쳐졌다. 다시 찾은 식당서 버튼눌린것처럼또 듣게된 주인할머니 인생이야기손님마다 수십번도 더 감았을 말들반복해 퇴고한 글처럼 높은 완성도장전된 기억, 종이로 불러오고파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할머니의 인생이 쏟아져 나오는데 흥미로워서 말을 끊을 수도 없었다. 대구 사투리와 구순 노인의 어눌한 발음으로 세 아들들, 합정동에서 크게 열었던 한식당, 영특하고 발이 넓은 둘째 아들, 그리고 영화를 하는 막내 아들 이야기가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식당이라면 십오 년 전쯤 나도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내가 그 식당 안다고, 나물이 환상이었다고 말하자 할머니는 쪼끌쪼글한 주름살이 다 펴질 것처럼 활짝 웃었다. 이야기의 1부는 상승, 2부는 하강이다. 이후 똑똑한 둘째 아들이 죽고, 막내의 영화가 실패하고, 그런데 식당이 너무 잘 된 나머지 카페까지 열다가 여차저차 망하고, 코로나가 오고, 이 골목에 자리 잡게 된 과정이 흘러나왔다. 소설가 둘이 만나서 소설 얘기 좀 해보려다가 진짜 소설같은 인생 이야기만 실컷 듣고 나온 밤이었다. 계산하면서 보니 이야기의 '증거'처럼 첫 식당의 나무 간판이 놓여있었다. 흥망성쇠를 다 듣고 나온 터여서 그런지 내 눈에는 난파된 배의 잔해처럼 보였다.한 달쯤 지나 다시 그 동네에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나는 맛집을 안다고 예의 그 식당으

  • [with+]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성처럼 사라진 천재 시인 '이언진'

    [with+]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성처럼 사라진 천재 시인 '이언진' 지면기사

    다산의 '여유당전서'를 최초로 독파했던 최익한은 자신의 저서인 '실학파와 정다산'에서 다산 정약용의 학문이 성호 이익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가 성호학파에 이언진(李彦璡, 1740~1766)이라는 시인의 이름을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이언진의 자는 우상(虞裳)이며, 호는 송목관(松穆館)이다. 그는 성호의 조카이자 제자인 이용휴의 제자다. 이용휴는 18세기 조선 문단의 큰 별이었다. 정약용은 말하기를 "이용휴는 명성이 한 시대의 으뜸이어서 무릇 글을 새롭게 바꾸고자 수련하는 자들이 모두 와서 수정을 받았다. 몸은 포의의 반열에 있으면서 손으로는 문원의 권력을 30여 년 동안 쥐었으니 예전에 없던 일이다"라고 이용휴의 위상을 평했다. 성호 이익 조카인 이용휴의 제자정해진 틀 탈피 새로운 문학 시도그의 글쓰기 단약 굽듯 했다는 것 이용휴는 성호의 경세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러나 당시 학자들이 외면하던 양명학을 비롯하여 불교와 도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아들 이가환은 조선 제일의 천재로 꼽혀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문사이자 정치가였다.이언진이 이런 이용휴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으며 그의 빼어난 재주 덕분이었다. 이용휴는 이언진의 시에 대한 첫인상을 '시집을 펼치자 빛이 괴상하고 번쩍번쩍하여 무어라 형용하기가 어려웠다'고 쓰고 있다. '시는 투식을 없애고, 그림은 격식을 따르지 말자. 정해진 틀은 뒤집고, 남이 가던 길을 벗어나자. 앞의 성인이 가던 길을 가지 말아야 비로소 훗날에는 참다운 성인이 되리라'라는 게 이언진의 시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언진은 정해진 틀, 남이 가던 길을 벗어나 새로운 문학을 시도했다. 이언진을 가장 잘 이해해 준 사람은 스승 이용휴였다. 스승은 제자의 시집 '송목관집'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시문을 짓는 작가는 남의 견해를 받아 제 견해를 세운 사람과 제 스스로 견해를 만들어 견해를 세운 사람이 있다. 제 스스로 견해를 만들어 견해를 세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고함과 편견이 개입되지

  • [with+] 두 번째 일곱 살

    [with+] 두 번째 일곱 살 지면기사

    이제 한국식 나이 셈법은 사라졌다. 내 또래 친구들은 신이 났다. 원래 나이에서 한 살 빼고 두 살 빼고, 도로 어려졌다. 하지만 우리 집 꼬맹이는 잔뜩 뿔이 났다. 작년, 만 나이 법이 곧 시행된다는 뉴스가 떴을 때 나는 여덟 살 딸아이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너 이제 내년 되면 도로 일곱 살 된다? 아홉 살 아니고?"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상황을 설명해줬더니 아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떼를 썼다. "싫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아홉 살이 되는 건데!" 웃음이 났다. 아니, 밥 먹고 잠자는 거로만 저절로 나이를 먹었으면서 이게 무슨 소리람. 하지만 아이의 반응은 격했다. 열심히 나이 먹은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등교를 하려던 아이가 문득 멈춰 섰다. 심각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엄마, 그러면 나 내년에 2학년 못 되고 유치원 도로 가야 하는 거야?" 고민은 또 있었다. "엄마, 설마… 키가 다시 작아지는 건 아니지?" 알고 보니 우리 집 아이만 그런 건 아니었다. 꼬맹이들 키우는 집들마다 아이들의 한탄에 웃음보가 터졌다.딸아이의 두 번째 일곱 살이 이제 시작되었다. 뙤약볕 비추는 날에 새 나이를 갖는 건 꽤 멋지다. "두 번째 일곱 살이야. 지난 일곱 살에 못 했던 일, 아쉬웠던 일, 다시 해봐." 내 말에 아이가 코웃음을 흥, 친다. "난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렸거든! 일곱 살 된 거 속상하거든!" 푸푸 웃으며 등교시킨 후 나도 출근을 했다. 이제 사라진 한국식 나이 셈법여덟살 딸, 도로 일곱살에 심각 내게도 두 번째 일곱 살이 왔으면 좋겠다. 나의 일곱 살은 언제나 마룻바닥의 기억에서 출발한다. 방 세 개짜리 단독주택이었으나 우리 다섯 식구에게 주어진 방은 한 개뿐이었다. 방 한 개는 작은 부엌을 덧대 신혼부부에게 세를 주었고, 나머지 한 개는 총각 아저씨에게 세를 주었다. 딸기와 포도나무가 있던 작은 마당 닭장에는 신혼부부가 겁도 없이 들여놓은 칠면조 두 마리가 있었고, 엄마는 옥상 장독대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 수돗가

  • [with+] 의도적 눈감기와 집단행동

    [with+] 의도적 눈감기와 집단행동 지면기사

    딸과 함께 길을 가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한 모텔 앞에 젊은 두 남녀가 마주보고 서 있었고 그 광경을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남의 연애에 관심이 없어 가려는데 딸이 내 팔을 잡아 걸음을 멈추게 하더니 "저 여자가 위험해 보여"라고 말했다. 가만히 보니 남성은 여성을 모텔로 끌고 들어가려 하고 여성은 모텔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여성이 비틀거리는 걸로 보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제서야 내 눈에도 여자가 위험해 보였다. 그런데 두 남녀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일에 끼어들지 않았다. 딸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려고 하며 경찰에 신고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때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경찰차가 도착했다. 어떻게 경찰차가 오게 됐는지 알 수 없었으나 경찰차를 본 남성이 그곳을 떠남으로써 그 위험한 상황이 종료됐다. 그 당시 이십 대 초반의 딸이 남을 돕기 위해 경찰에 신고하려던 것이 대견했다. 그리고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나 자신을 반성했다. 만약 그때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경찰차도 오지 않아 남성의 힘에 못 이겨 여성이 모텔에 끌려들어 갔다면, 여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길거리에서 우리의 아들딸들이 어떤 곤경에 처해 있는데 그걸 보고도 도와주는 이가 없다고 상상해 보라. 끔찍하지 않은가. 실제로 '방관자 효과'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 '방관자 효과'는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나설 것으로 생각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현상을 말한다.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눈을 감는 것이다. 불쾌하고 성가신 일 못 본척 하면'방관자 효과'로 끔찍한 일 발생다급한 상황엔 집단행동 더 낫다 마거릿 헤퍼넌의 책 '의도적 눈감기'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인식하는 데 한계가 있어 입력된 정보를 편집하고 걸러야만 한다. 이때 '우리 대부분은 연약한 자아와 중대한 신념을 뒤흔들어 놓는 것들을 편리하게 걸러 내고,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어 줄 정보들만 통과시킨다'라고 책은 말한다. 즉 우리는 불쾌하거나 성가신 일에

  • [with+] 망각의 아름다움

    [with+] 망각의 아름다움 지면기사

    초등학교 3학년인 내 딸은 '그림책의 시대'에서 빠져나온 것 같다. 그 자리에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 같은 환상적인 이야기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림은 '삽화'로 축소되어 몇 페이지만에 한 컷씩 등장하지만, 완전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삽화가 곁들여진 책 가운데 문득 에리히 캐스트너와 조우했다. 도서관에서 '하늘을 나는 교실'을 만난 것이다. 그날 밤 딸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향수에 푹 젖었다. 어렸을 때 좋아하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그 문장을 처음 읽던 나와 마주치는 일이니까. 딸이 잠든 후에도 책을 마저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겁쟁이 울리, 걸핏하면 먹을 것 타령인 마티아스, 냉소적인 재담가 제바스티안, 배에 버려진 고아 요니, 금연 선생과 사감 선생님까지. 오래된 친구들과 재회하는 기분으로 행복한 독서를 이어가다가 가난한 마르틴이 여비가 없어 크리스마스에도 기숙사에 남아있어야 하는 에피소드와 마주쳤다. 사감 선생님의 도움으로 마르틴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고, 부모님과 눈물 젖은 재회를 한 후 선생님께 감사의 편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밤하늘의 별똥별을 바라본다. 이 장면에서 스치듯 나온 마르틴의 대사에 나는 벼락을 맞는 심정이 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별빛은 벌써 몇 천 년 전의 별빛이에요. 저 빛이 우리들의 눈에 닿을 때까지는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거죠. 지금 보이는 별은 대개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라졌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빛은 아직까지 여행을 계속 하고 있어요."딸에게 읽어준 '하늘을 나는 교실'10년전 쓴 '개그맨' 같은 구절 놀라 이 장면에서 왜 놀랐냐면 10년 전에 쓴 내 단편 '개그맨'에 이런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문득 그가 들려준 이야기.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이 오래전에 죽은 별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원한 것은 별이나 그걸 바라보는 우리가 아닌 빛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죽은 별이 내고 있는 빛이 여전히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과학책에서 읽을 줄 알았는데, 시작은 어린 시절에 읽은

  • [with+]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with+]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지면기사

    이덕무(1741년 6월11일~1793년 1월25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서예가다. 호는 영처(處)·형암(炯庵) 등 무려 40여 개나 된다. 조부는 이필익, 부친은 이성호, 모친은 박사렴의 딸 반남박씨다. 처는 백사굉의 딸 수원백씨이며, 아들은 이광규, 사위는 유선과 김사황이다.그는 서얼 출신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으나 박제가와 유득공, 그리고 서상수와 성대종 등 서얼들과 어울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북학파였던 홍대용, 박지원, 이서구 등 사대부와 강세황, 심사정 등의 서화가들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 자신을 '책 읽는 바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학문하기를 즐겨 문자학과 금석학, 그리고 서화에 조예가 깊었다. 혈기 왕성한 20대부터 서얼시사집단인 백탑시사(白塔詩社)의 중요한 일원으로 활동을 주도했다. 1777년 간행된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청나라에 알려져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에는 중국으로 가는 외교사절단의 지휘부인 서장관으로 왕복 5개월 동안의 사행 기간에 보고 들은 각종 정보를 기록하여 국왕에게 보고하고 사행단의 비리나 부정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기균, 이조원, 반정균 등의 석학들과 교유했다. 그는 관직에 있는 15년 동안 정조로부터 520 차례의 하사품을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정조는 그의 문집을 간행하게 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관직을 그대로 잇게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연암 "문학이 추구해야할 두가지"갓 태어난 아이가 울고 웃는 '천진'곧장 울음이 터져 속일수없는 '진정' 이덕무는 천성이 소심하고 온건하며 섬세한 사람이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몸은 가냘팠다. 젊은 시절 지독한 가난으로 어머니와 누이가 영양실조로 폐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세상이 알아주는 독서광이었으며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아 귀한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지 않고 빌려다 베꼈다. 추위로 손가락에 동상이 걸려 부었는데도 베껴 쓰기를 쉬지 않았다. 그

  • [with+] 아욱국 향기

    [with+] 아욱국 향기 지면기사

    얼마 전부터 아예 요리를 그만두었다. 그만두었다, 라기보다는 포기했다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재능도 없고 집념도 없는 내가 마트에서 장을 보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프라이팬을 놀리는 일이 그야말로 시간 낭비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이제 매주 금요일 저녁, 일주일 치 반찬을 사러 간다. 밑반찬 다섯 종류와 메인요리 다섯 종류, 그리고 국이다. 밑반찬은 반찬통에 담아두고 메인요리와 국은 냉동실에 넣어둔다. 덕분에 내 삶은 제법 여유로워졌다. 지난주 금요일에도 나는 반찬가게엘 들렀다. 2인분씩 담아놓은 국 진열대를 지나다 보니 어라, 아욱국이다. 슴슴하게 된장 풀어 오로지 아욱만 넣고 끓인 국. 국이 담긴 지퍼백을 열면 아욱 향기가 보드랍게 코를 찌르겠지. 두 봉지를 집는다. 오래전 소설 퇴고 위해 횡성 시골로주인 할머니 마당서 뜯어온 채소 중유일하게 제대로 먹은 것은 '아욱' 벌써 오래전, 삼십 대의 나는 어느 날 짐을 싸 들고 횡성 어디쯤 시골 마을로 기어들어갔다. "또 왜! 대체 왜! 너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이 회사엘 들어왔니?" 상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걸핏하면 한 달씩 두 달씩 쉬겠다고 생떼를 쓰는 나를 익히 보아와서 아주 인연을 끊을 듯 굴지는 않았다. "올 때 로얄살루트 21년산으로 두 병 사 올게요, 진짜로요." 새벽 구름이 지붕에 닿을 듯 낮게 내려앉는 시골집에 수트케이스 두 개를 풀며 나는 마냥 신이 났다. 어영부영 붙잡고 있던 장편소설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겠다는 야심이 있었지만 나는 쓸데없이 마당에서 빨래를 삶거나 방바닥을 구르며 음악을 듣거나 했다. 언젠가는 써지겠지, 그깟 장편소설, 언젠가는 나에게 오겠지, 나는 세상만사 다 내려놓은 사람처럼 흥얼흥얼 놀았다. 주인 할머니는 마당에 무언가를 많이도 키웠다. 마당뿐 아니라 골목이 다 텃밭이었다. "아무거나 뜯어먹어. 남의 집 것들도 괜찮아." 토끼 새끼도 아니고, 아무거나 뜯어먹으라니 나는 할머니의 말이 우스워 정말 무얼 뜯어먹을까, 동네를 시시껄렁한 얼굴로 걸어다녔다. 내가 제일 먼저 뜯어온 건 옥수수였다.

  • [with+] 애착하기보다 무심하기를

    [with+] 애착하기보다 무심하기를 지면기사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 일반이나 '딸 바보', '아들 바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사랑이 각별한 부모가 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자녀에 대해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식을 품에 안고 어떤 일이든 다 해 주려는 '캥거루 맘'과 자녀의 주위를 맴돌며 학업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챙겨 주고 관여하는 '헬리콥터 맘'이란 말까지 있다. 그러나 부모의 과잉보호는 의존적인 아이를 만드는 등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쉽다.아들이 결혼한 경우엔 어머니가 아들의 결혼 생활에 사사건건 간섭하면, 고부간의 갈등이 심해져 가정불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고부 갈등으로 생긴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이 있고, 고부갈등 때문에 이혼한 사례가 있을 정도다. '고부간 나쁘고 잘되는 집 없다'는 속담이 있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한 나머지 며느리 또는 예비 며느리에게 시기나 질투를 느끼는 어머니라면 이 속담을 기억해 두는 게 좋겠다.자녀바보 넘어 헬리콥터·캥거루 맘자식 집착 다룬 서머싯 몸 '어머니'아들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인 비극지나친 사랑도 '조절' 관계유지 지혜 서머싯 몸의 단편소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강한 애착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한 마을에 얼굴이 사나워 보이는 사십 대의 여자가 이사를 온다. 그녀가 살인죄로 감옥에 있다가 출소했다는 추문이 퍼진다. 그녀에게는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스무 살의 아들이 있다. 아들이 오면 그녀는 애틋한 몸짓으로 아들을 귀여워했다. 그녀는 맹렬한 열정으로 아들을 사랑했다. 아들이 젊은 여자를 쳐다보면 참을 수가 없었고, 아들이 젊은 여자에게 구애하는 상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그런 그녀가 아들이 로살리아라는 예쁜 아가씨와 춤을 추는 것을 보자 분을 이기지 못해 신음을 토했다. 춤을 춘 이후 그녀의 아들은 로살리아에게 사랑을 고백했다.마침내 그녀는 로살리아의 앞을 막고 자기 아들과 무슨 짓을 했냐고 캐물었다. 로살리아가 길을 비키라고 해도 놓아주지 않았다. 로살리아는 그이가 결혼하자고

  • [with+]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공연

    [with+]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공연 지면기사

    이 세상에는 대단치는 않지만 이상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일은 우리가 알던 세상을 잠시나마 뒤흔들어 놓는다. 지난주 수요일에 내가 겪은 것처럼. 자주 가는 카페가 생겼다. 두 면이 유리 통창으로 되어 실내에 밝은 햇살이 들어오고, 젊은 주인 부부의 바지런한 손길이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 필터 커피가 너무나 맛있어서 원고 마감이 있는 기간에는 출근도장을 찍다시피 드나들었다. 그런데 그날은 들어서는 순간부터 실내의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긴장되고 어수선한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다. 엉거주춤 서 있는 손님들도 그렇고, 카페 주인은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말을 더듬는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새 한 마리가 카페 안에 들어와 높은 곳에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단골 카페에 새 한마리 들어와한시간 휘젓고 날아… 소동 끝에젊은 남자 손님에게 잡혀 방생 이 카페는 천장에서 육십 센티미터쯤 내려온 곳에 가늘고 긴 주광색 조명을 인테리어 삼아 매달아 놓았는데, 새의 입장에서는 영락없이 나뭇가지처럼 보인 모양이다. 참새도 비둘기도 아닌 새의 정체는 모르겠으나, 당황하는 사람들과 달리 느긋해 보였다. 새는 두 군데의 문이 활짝 열려있지만 도통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문 쪽으로 쫓으려 하면 푸르르 날아 다른 쪽 조명에 앉아버리고, 다시 쫓으면 반대쪽 주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카페 안을 휘젓고 다니던 새는 내가 처음 봤던 위치로 돌아가 앉았다. '날개 달린 짐승의 유리함은 대단하구나' 속으로 감탄했다. '아래에서 털 없는 원숭이들이 꺅꺅거리며 잡으려고 애를 써도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여유롭게 따돌리니 말이야'. 이 와중에도 새로운 손님들은 들어오고, 구경꾼은 늘어난다. 급기야 옆의 식물가게 사장님이 잠자리채를 들고 포획에 나섰다. 그물 달린 막대기가 추격하자 새도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만 이럴 수가, 유리창에 부딪치고 만다. 연거푸 두 번이나. 그리고 날기를 포기한다. 우리 모두는 그제야 저 새가 자

  • [with+] 조선 문단의 저울대

    [with+] 조선 문단의 저울대 지면기사

    이용휴(1708~1782)는 여주가 본관이며 자는 경명이고 호는 혜환이다. 정치색은 남인이어서 선대 이잠이 장희빈 사건에 연루되어 장살되면서 가문이 몰락의 길을 갔다. 막내 숙부가 성호 이익이었고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 그의 조카였으며 당대의 천재로 불리던 이가환이 그의 아들이었다. 아들의 벼슬은 형조판서에 이르렀지만 그는 신유사옥 때 죄인으로 몰려 사약을 받았다.그는 조선 문단의 저울대였다. 그렇게 불려지기에 충분할 만큼 글의 깊이를 보는 눈이 탁발했다. 목민심서로 유명한 정약용은 그를 '마음을 쏟아 문사에 전념하여 동국의 비루함을 씻어내고 힘써 중국을 따랐다. 명성이 한 시대에 우뚝하였으므로 탁마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려는 자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잘못을 바로 잡았다'고 썼다. 그는 문장의 가볍고 무거움을 잘 알았다.막내 숙부 '이익'이었던 '이용휴'글의 깊이 보는 눈 특별히 뛰어나 이용휴는 '참 나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순수했던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상이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사물과 나 사이에 조금의 거리도 없었지만 차츰 의문이 생기면서 사물과 내가 멀어지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나는 시를 원했는데 시가 나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나는 참을 바랐으나 참은 내게서 떠나갔다고,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해 오래도록 슬펐다고, 그리하여 그는 돌아가리라, 떠나왔던 첫 자리로 돌아가리라, 덧없는 명성부터 버리리라, 나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털어버리고 옛 나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니 눈이 맑아지고 귀가 밝아졌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얽어매던 것들이 풀어져나가자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세상이 더 넓게 보이고 사람이 더 밝게 보였다.그는 그토록 바라던 참 나를 되찾았다. 그것이 환아(還我)다.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좋은 시는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 나와 만나고 나를 찾아 내가 되는 것이 환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내 안의 거짓 나를 몰아내고 참 나를 깃들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한 고

  • [with+] 스물다섯 마리 병아리

    [with+] 스물다섯 마리 병아리 지면기사

    나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중이었고 초등학교 2학년 딸아이는 숙제를 하고 있었다. 전날 숙제가 있다는 것을 깜빡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짤막한 글짓기를 하느라 끙끙댔다. 평소답지 않게 공을 들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날은 학부모 공개수업 날이었고, 아이는 몇 시간 후 '꿈'에 관한 글을 엄마와 아빠 앞에서 발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꿈은 물 연구학자다. 깨끗한 물, 맛있는 물, 건강한 물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일이 분도 안 될 발표 시간을 위해 아이는 한참을 끼적이다 결국 숙제를 끝냈다. 그러고선 옷장 앞에 섰다. "오늘 아빠도 오고 엄마도 오니까 제일 예쁜 거로 입고 가야지!" 생전 옷 투정 따위 하지 않던 아이가 그런 말을 하는 게 우스웠다. 나도 아침을 차리는 내내 무얼 입고 갈까 고민하던 차였다. "엄마는 검정 슈트에다 흰 셔츠를 입을 거야. 너도 잘 골라봐." 아이가 가장 예쁘다고 고른 건 태권도복이었다. 흰 도복에 주황 띠를 매고 아이는 등교했다. 작년에는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 수업 참관으로 대신했으니 아이의 교실에 들어가본 건 처음이었다. 아이들의 책상은 하도 작아 조그만 미니어처 같았다.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올망졸망 앉아있었고 저마다 엄마와 아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도 딸아이를 쳐다보며 마스크 속에서 함빡 웃었다. 이렇게 크고 있었구나. 이 교실 안에서. '꿈' 이야기로 딸의 공개수업 참관백종원을 '유튜버'로 아는 아이들언제부턴가 저희들 언어로 '소통' 2학년 5반 담임선생님은 '꿈' 이야기로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 하다 보니 잘하게 되고, 그것이 먼 훗날 직업으로까지 이어지더라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래, 꿈이 별건가. 어렸을 적 책만 들입다 읽어대던 나는 책벌레로 자랐고, 결국 작가가 되었다. 전자오락기 게임을 좋아하던 어린 소년은 동네 오락실을 평정했고, 점점 먼 동네까지 원정 게임을 가 승리하고 돌아오더니 결국 게임 개발자가 되었다. 그게 내 딸아이의 아빠다. 선생님은 화면에 세 사람의 얼굴을 띄웠다. 백

  • [with+] 헛된 희망의 긍정적 효과

    [with+] 헛된 희망의 긍정적 효과 지면기사

    만약 자신이 가진 희망이 헛된 것이라면? 헛된 희망이라도 갖는 게 나을까 아니면 헛된 희망은 애초에 갖지 않는 게 나을까? 이에 대해 갑과 을 두 사람이 각자 의견을 개진한다. 갑은 말한다. "저는 헛된 희망을 품어서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로 보낸 이들을 많이 봤습니다. 사법시험에 다섯 번 떨어진 사람도 있었고, 가수 오디션에 수십 번 떨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희망은 속임수를 써서 우리를 가서는 안 될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 희망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희망이 물거품이 될 때 희망은 없느니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의 노예가 되는 걸 경계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이번엔 을이 말한다. "저는 정치를 예로 들어 말하겠습니다. 국민들이 좋은 정치가 좋은 세상을 만들어 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아니겠습니까. 희망 속에 사는 사람은 음악이 없어도 춤을 춘다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헛된 희망이라도 갖는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 여러분은 갑과 을 중 누구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나는 둘 다 일리가 있다고 여기지만 '을'의 의견에 동의하련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쥘르 삼촌'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소설은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화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마음속 바라는 것 있느냐 없느냐삶에 중요한 영향… 실현 가능하든 아니든 꿈을 갖고 사는게 바람직 '나'의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나 수입이 적어 '나'의 가족은 절약하며 산다. 아버지의 동생인 쥘르 삼촌은 아버지가 기대를 걸었던 유산을 축내고 빈털터리가 되어 돈을 벌러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에서 삼촌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자기 사업이 잘되어 가고 있고, 여러 해 동안 소식이 없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한밑천 잡으면 돌아가겠으며 그러면 우리는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등

  • [with+] 동네 치과 이야기

    [with+] 동네 치과 이야기 지면기사

    세상에는 신뢰를 얻기 매우 힘든 곳이 있고, 한번 얻은 신뢰는 어지간해서 흔들리지 않는 곳이 있다. 나에게 ○○치과는 그런 곳이다. 젖니에서 영구치로 갈아타는 시기, 엄마를 따라 사거리에 있는 건물의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여느 꼬마처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치과 침대만큼 공포스러운 장소가 또 있을까? 거기에 올라 초록색 턱받이를 하고 조명을 받고 있으려니 제물로 바쳐진 기분이 들었다. 마침내 의사 선생님이 다가왔고, 나에게는 거인의 발자국소리처럼 들려 눈을 질끈 감았다.과묵한 의사는 이런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식으로 노련하게 진료를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선생님은 절대로 과잉진료를 하지 않았고 비싼 치료를 권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실력이 대단했다. 걱정에 비해 순식간에 치료가 끝나자 가글을 하며 얼떨떨해 하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십수년 간 나는 이 치과의 단골이 되었다. 멀리 이사를 간 후에 치과들이 다 비슷비슷한줄 알고 다른 곳에 갔다가 폭탄을 몇 번 맞고 나니 더욱 충성심이 생겼다. 엑스레이를 찍은 후 견적부터 부르는 치과가 많다는 것도, 대형병원이라고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후로 시간을 잡아먹더라도 '치과만은' 이곳을 고수하게 되었다.어릴적부터 신뢰 쌓인 46년된 치과클래식 음악에 치료땐 양처럼 온순 ○○치과는 개원한 지 46년이 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선생님에게 입 속 동굴을 내보였을까? 몇 년에 한 번씩 치과 갈 일이 생기다보니 내게는 치과 일정이 성장기에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아가는 모종의 추억여행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이제는 사라진 서점이며 학원, 만두가게와 이불가게의 간편들이 떠오르고 퀴즈를 풀 듯 어느 곳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헤아려보게 된다. 여정의 끝에 사거리가 나오면 리모델링 했음에도 여전히 낡아 보이는 3층 건물이 보인다. 거리는 번창하고 상점들은 매번 바뀌지만 요지부동으로 변치 않는 것은 이 낡은 건물과 계단을 올라갈 때 나는 소독약 냄새다. 안으로 들어가 병원 의자에 앉아 있으면 항상 들려오는

  • [with+] 양심을 점화 시킨 오장환

    [with+] 양심을 점화 시킨 오장환 지면기사

    오장환은 1918년 5월15일,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 중앙리 140번지에서 오학근과 후처 한학수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7살이 되던 1924년 회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1927년 4월30일 회인공립보통학교를 자퇴하고 5월2일 안성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다. 1935년 1월26일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했다. 같은 해 4월 도쿄에 있는 지산중학교에 전입하였고,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어린 나이에 데뷔한 그는 1930년대에 유행하던 모더니즘 경향을 따르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6년 11월 '낭만'과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동인들과 교류하며 동인지 제작을 주도했다. 그 해에 첫 시집 '종가'를 출판하려 하였으나 '전쟁'이 검열에 걸리는 바람에 무산되었다.1937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문과 문예과 별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 그는 '자오선' 동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첫 시집 '성벽'을 자비 출판했다. 김기림은 '성벽'을 읽고 '오장환씨는 길거리에 버려진 조개껍질을 귀에 대고도 바다의 파도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환상과 직관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이번 성벽에 골라서 엮은 시편들은 그러한 꿈의 세계, 성숙하고 생각 많은 청년의 정열에 그슬린 고백으로서 꿰뚫려져 있다. 그의 시는 분명히 읽는 사람들의 정신에 정열과 양심을 점화시킨다. 우리는 이 한 권을 통해서 오장환씨의 불타는 정진의 기풍과 아울러 건강한 진전의 방향을 읽었다. 오장환씨는 새 타입의 서정시를 세웠다. 거기 담겨 있는 감정은 틀림없이 현대의 지식인의 그것이다. 현실에 대한 극단의 불신임 행동에 대한 열렬한 지향'이라고 평했다.김기림은 "첫 시집 '성벽' 시편들은꿈의 세계·성숙한 청년의 정열에그슬린 고백으로서 꿰뚫려져 있고그의 불타는 정진 기풍과 아울러건강한 진전 방향 읽었다" 고 평가 시집으로는 1937년 8월10일에 '성벽'을 펴냈으며 1939년 7월20일에 제2시집 '헌사'를 펴냈고 1946년 7월에 제3시집 '병든 서울'을, 1947년 6월에 제4시집

  • [with+] 75원의 기적

    [with+] 75원의 기적 지면기사

    초등학생 아이들과 책 만들기 수업을 한 지 벌써 3년째다. 스무 명 어린이들이 한데 모여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출판하는 프로젝트이다. 첫 수업 날에는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배우는데, 아이들의 눈이 가장 또랑또랑해지는 순간이 바로 '인세'에 관해 배울 때다. 독자가 만오천원짜리 책 한 권을 서점에서 사면 작가는 얼마큼의 돈을 벌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질문하면 저요, 저요! 손을 든다. "만오천원이요!" "에이, 그건 말이 안 되지. 종잇값도 들고 인쇄비도 들고, 서점 주인도 책을 팔아줬으니 돈을 벌어야 하잖아. 작가가 다 가질 순 없지!" 내 대답에 아이들은 입을 삐죽대며 금액을 낮춘다. "8천원이요!", "5천원이요!" 나는 계속 고개를 가로젓고 금액은 더 내려간다. "3천원?" "2천원?" 책 한 권 팔릴 때마다 작가의 인세는 10%라고 내가 답을 알려주면 아이들은 우우, 야유한다. "1천500원이라고요? 말도 안 돼!" 하지만 놀랄 일은 그다음부터다. "우리는 스무 명이 모여 한 권의 책을 만드니까 1천500원을 20으로 나눠야 하는데?" 그래, 한 권이 팔리면 어린이 작가 한 명이 받을 인세는 75원이 된다. 아이들은 꺅꺅 소리를 지른다. 성질 급한 아이들은 책 만들기를 포기하겠다고도 한다. 고작 75원인데 뭐 하러 이렇게 힘들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야 하느냐고 소리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러분 중에 돈을 벌어본 적 있는 사람, 손들어 볼까?" 너도나도 손을 든다. 할아버지 흰머리를 뽑아주고 천원을 벌었다거나 엄마 심부름을 하고 이천원을 벌었다거나 하는 거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가족들에게 용돈 받은 거 말고 밖에서 어떤 일을 해서 진짜로 남에게 돈을 받아본 적 있느냐고 묻는 거야." 그러면 일순 조용해진다. 그럴 리가 없지. 내가 쓰는 글과 그림이 정말 '돈'이라는 것으로 치환되어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는 듯 아이들은 진지해진다. 20명이 만든 1500원 짜리 책 한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