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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모든 추측을 경계하라 지면기사
뜻밖의 결말을 보여 주는 이야기가 있다. 오 헨리가 쓴 '마녀의 빵'이라는 소설이다. 마사 양은 미혼 여성이고 마흔 살이다. 작은 빵집을 운영하는 그녀는 중년 남자인 단골손님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 손님은 낡은 옷을 입었지만 말쑥해 보였고 예절이 깍듯했다. 그는 늘 저렴하게 파는, 오래 묵어 딱딱한 빵 두 덩어리를 샀다. 언젠가 마사 양은 그의 손가락에 적갈색 얼룩이 묻은 걸 보고 그가 무척 가난한 화가라고 믿었다. 그녀는 그를 시험하기 위해 빵집에 일부러 그림을 갖다 놓았는데, 그 그림을 본 그가 데생이 잘된 편이 아니라고 말하는 걸 보고 그가 화가인 게 확실하다고 느꼈다.어느 날 그 손님이 평소처럼 묵은 빵을 달라고 했다. 마사 양의 머리에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 딱딱하게 굳은 빵 두 덩어리 안에 손님 몰래 버터를 듬뿍 넣어 손님에게 주었다. 그에 대한 호감의 표시였다. 그날 그 손님과 낯선 남자가 빵집에 왔다. 그 손님은 그녀를 향해 고래고래 악을 쓰기도 하고 "당신이 날 망쳐 놨어" 하고 소리도 질렀다. 마사 양은 낯선 남자에게서 그 손님이 성난 이유를 듣게 되었다. 그는 화가가 아니라 제도사이고 공모전 수상이 걸려 있는, 새 시청 설계 도면을 그리느라 석 달 동안 열심히 작업했다고 한다. 제도사들은 연필로 도면을 그리고 잉크 작업을 끝내고 나면 굳은 빵 부스러기를 문질러서 연필 선을 지워 버린단다. 그런데 그녀가 빵에 살짝 넣은 버터 때문에 그의 설계 도면이 쓸모없어졌다고 한다. 마사 양의 부정확한 추측이 결과적으로 그를 그토록 화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대 본모습 어떤지 개의치 않고주관적으로 해석 판단하면 안돼 우리도 소설 속 마사 양처럼 제멋대로 추측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어 보겠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게 오면 자기를 소홀히 여기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늦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늦었던 것. 연인이 하품을 하면 자기와 함께 있는 시간이 지루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알고 보니 전날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하품을 했던 것. 무섭게 생긴 괴물이 그려진 영화 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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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시침과 분침 지면기사
내가 최초로 배운 지식은 '시계 보는 법'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살았던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방 두 칸을 연결하는 마루가 있고, 마루 끝에는 간유리가 끼워진 유리문이 있는 집. 나는 나무마루에 앉아 반사되는 햇빛을 받으며 엄마로부터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방마다 보름달 만한 시계가 걸려 있고 마루에는 추까지 달린 괘종시계가 있었지만 그 사물의 기능에 대해서 전에는 의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오후에 그 사물에는 새로운 생명력, 모종의 신성한 임무라고 할 것이 부여되었다. 엄마는 종이에 동그라미를 그린 후 12시와 3시, 6시, 9시를 나타내는 표시를 하고 길고 짧은 막대기를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이건 여섯시고, 이건 아홉시고…" 이해가 가지 않았음에도 시침과 분침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각도는 신비로운 도형이나 기호처럼 매혹적이었다. 나중에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집시 멜키아데스가 들고 온 나침반에 열광하는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에게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진하고 열광적인 태도는 내가 시계 보는 법을 배우던 모습과 유사했다. 시간이 훌쩍 흘러, 초등학교 2학년인 내 딸은 이제야 시계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우리 엄마와 달리 나는 딸에게 시계 보는 법을 미리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계가 알려주는 메시지란 대체로 독촉이 아닌가? 자기 리듬으로 살아가는 게 더 편한 아홉 살 인생은 내버려 두자고. 이렇게 중얼거리다 문득 깨닫고 보니, 우리 집 벽시계들은 전부 숫자가 없고 눈금뿐이다. 엄마가 그려가며 알려준 '시계보는법'시간흘러 자명종 못읽는 딸 가르치며특정 시기의 '무지' 신비롭게 느껴져자라는 모습보며 생기는 '기억의 눈금'다가올 '앎' 기다리는 마음 경이롭다 당연히 딸은 숫자가 박히지 않는 시계는 읽지 못한다. 그래서 숫자판이 있는 자명종을 들고 온다. 이때부터 '지금이 몇 시인지'라는 퍼즐풀이가 시작된다. 딸의 추리 과정은 이럴 것이다. 1)엄마가 묻는다. "이숲아, 지금이 몇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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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추모와 애도에도 '공간'이 필요하다 지면기사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더니 요 며칠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시 구절이 떠오르는 파란 하늘의 연속이다. 꼭 푸르른 날이 아니어도 그리운 사람이 생각날 때가 있다. 떠나간 사람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길 때면 사진을 찾아보기도 하고, 차 한 잔을 마셔보기도 하지만 뭔가 허전하다. 만약 납골당이나 묘지 외에 다른 곳에서도 함께 그 사람을 추억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꼭 누군가를 추모하거나 애도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납골당·묘지외 추억 잠길 곳 있으면英 '메모리얼 파크' 평범한 동네 공원세상 떠난 아이들 기리지만 친근해 몇 년 전, 영국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장소가 있다. 아이들이 손을 뻗으면 손쉽게 만질 수 있을 만한 키 낮은 가로등에 색색의 풍선이 매달려 있었다. 영국에 공원이 워낙 많긴 하지만 이런 가로등이 있는 공원은 흔치 않다. 공원을 걷다보면 한쪽에 작은 수로가 조성되어 있다. 맑은 물속에 누군가의 이름을 새긴 돌들이 가득하다. 모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이다. 수로 주변에는 오늘 아침에 꽂아두고 간 것처럼 싱싱한 꽃다발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고 '내 정원에 온 걸 환영해요(Welcome to my garden)'라고 적힌 돌 옆에 활짝 웃는 아기의 사진이 함께 자리한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적은 편지도 꽃다발 옆에 꽂혀 있다.이 공원은 영국 미들랜드 지역 버밍엄에 위치한 '메모리얼 파크'로, 일찍 세상을 떠난 발달 장애 아이들을 기억하고 추억하기 위한 공간이다. 발달 장애로 가족을 잃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편하게 공원에 올 수 있지만, 공원 곳곳은 먼저 떠난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흔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엄숙하거나 경직되어 있지 않고 관리와 통제를 받는 공간이 아닌, 평범한 동네 공원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구석구석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고 사람들이 편하게 드나드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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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전함의 노예 백대붕 시인 지면기사
백대붕의 출생년도는 불분명하지만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나 '학산초담(鶴山樵談)'의 기록에 의하면 허봉이나 심희수 등과 더불어 터놓고 사귀었다고 되어 있다. 그 기록을 참조한다면 아마도 1550년 전후에 태어났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군함의 노를 젓는 전함사의 노예라고 밝히고 있다. '술에 취해 수유꽃 꽂고/혼자 즐기다가,/산에 가득 밝은 달빛 물드니/빈 술병 베고서 누웠다네./길 가던 사람들아, 무엇하는 놈인가/묻지를 마소./티끌세상에서 세어진 머리 전함사의 종놈이라오.'라고 노래한 것을 보면 전함사의 노예인 것이 분명하다. 때는 음력 9월9일, 상서로운 날인 중양절(重陽節)이었을 것이다.자신의 시에서 천민 신분 밝혀같은 처지 시인들과 모임 주도 이날에는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서 주머니에 넣어 차거나 산수유 가지를 머리에 꽂고 산에 올라 국화주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백대붕은 붉은 산수유 열매가 달린 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국화주를 마셨을 것이다. 어느덧 술을 다 마시고 빈 병만 남았을 것이다. 그 병을 베고 누우니 어느새 아흐레 둥글게 차오르는 달이 떠올라 온 산에 달빛이 가득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해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분노와 절망의 고함이었을 것이다. '지체 높은 놈들아,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전함사의 종놈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시의 제목은 '동유주(東遺珠)', '대동시선(大東詩選)', '소대풍요(昭代風謠)' 등에는 '9일(九日)'로, '기아(箕雅)'에는 '취음(醉吟)'으로 되어 있다. '9일(九日)'이라는 제목은 중양절의 날짜를 드러낸 것이고, '취음(醉吟)'은 국화주를 마시는 중양절의 풍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취음(醉吟)'이라는 시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백대붕은 같은 천민인 유희경과 서로 시를 주고받았는데 책 한 질이 될 만큼 많았다. 백대붕과 유희경은 같은 처지의 위항 시인들을 모아 '풍월향도'라는 모임을 이끌어나갔다. 17세기 중엽은 사대부들의 폐쇄적인 시단에 하층계급 출신의 위항 시인들이 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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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상하고 아름다운 그랜마호텔 지면기사
연남동 작은 카페에는 선생님 두 분이 먼저 와 있었다. 시인 한 분, 소설가 한 분.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이 나왔고 나는 포크보다 생맥주잔을 먼저 들었다. 더워도 너무 더운 날이었다. 땀을 식힌 다음에야 나는 가방에서 책 두 권을 꺼냈다. 두 분께 드릴 선물이었다. "요즘 출판사들은 진짜 책 너무 예쁘게 만드는 것 같아. 정말 공들였네." 책을 쓰다듬으며 소설가 선생님이 한 말에 시인 선생님이 투정처럼 말했다. "몰라. 미안해. 난 안 보여. 눈이 너무 나빠졌어." 이젠 책보다 노안 이야기가 더 재밌다. 다초점 안경은 어디가 잘하는지 묻고, 큰 글씨 책은 자존심 상해 못 사겠다는 이야기도, 그래서 생전 안 보던 전자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나도 이제는 태블릿으로 전자책을 본다. 종이 넘기는 재미 없이 무슨 책을 읽느냐 생각했던 나인데도 글씨를 마음껏 키워볼 수 있는 전자책이 요즘은 종이책보다 편하다. 그래서 전자책을 처음 읽던 시기, 나는 걸핏하면 손가락에 침을 묻혀 태블릿을 넘기곤 했다. 소설가 선생님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비닐봉지엔 오이와 고추, 감자가 들어있었다. "강릉에서 보내온 거야. 가져가서 먹어." 나는 고맙다고 냉큼 받았다. 만날 때마다 선생님은 뭐든 한아름씩 안겨준다. "선생님! 우리 10년쯤 더 나이 들면 매일매일 친구들 불러다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차도 마시면서 그렇게 설렁설렁 같이 늙어요. 소설이랑 시 얘기나 하면서 그렇게요." 내 말에 선생님이 대답했다. "어? 나 벌써 그렇게 사는데? 만두 백개씩 빚고 김장 80킬로씩 해. 친구들 먹이는 재미로 살거든. 서령도 우리 집 놀러와!"친구·선후배들 하루 멀다하고 초대제라늄·금잔화 핀 마당서 소맥 말고3층짜리 건물 사 식당에선 낭독회… 나는 예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잘 웃고 잘 노는 수다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친구들과 선배들, 글 쓰는 후배들을 하루가 멀다고 집에 초대해 제라늄과 금잔화 잔뜩 핀 마당에 상 펴고 앉아 소맥을 마는, 웃기고 이상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집에 손님들이 하도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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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건축가 정약용과 김동훈 지면기사
정약용과 김동훈은 시대를 달리하는 건축가다.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고, 김동훈(1955~)은 현재 대학교수 출신으로, 이 둘은 200여년이라는 역사와 시대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수원에서 획기적인 건축물을 계획하고 설계하고 실행한 건축가로서 정약용과 김동훈은 공통점이 있다. 정약용의 수원화성 축성과 김동훈의 수원시 연화장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의 성곽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은 방어기지로서 백성들의 안보와 치안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근대적 건축물이다. 반면 혐오시설에서 향수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은 수원시 연화장은 무연, 무취시설로서 망인과 유가족을 위한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 있는 전위시설의 현대적 건축물이다.이러한 건축물의 배후에는 정치·문화적으로 발현하고 주관한 현자를 찾을 수 있는데 수원화성의 정조대왕과 수원시 연화장의 고 심재덕 시장이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면서 왕권 강화와 함께 안전하고도 새로운 정치적 무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신도시의 축성을 설계하고 감리할 수 있는 정약용이 발탁되었고, 정약용은 10년 예상되는 공사를 2년 반 만에 완공하고 공사비용도 4만냥을 절약하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수 세기가 흐르는 동안 수원화성은 문화적 기능과 예술적 가치까지 추가되어 한국을 넘어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미래의 인류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수원서 건축물 설계 실행한 공통점정약용은 수원화성·김동훈은 연화장백성·나라… 지역 중요시했던 철학 장사문화인 매장과 다르게 화장에 관한 인식은 2001년 수원시 연화장 개장 전후로 바뀐다. 수원시 연화장이 있기 전에 화장은 무연고자 또는 가난하고 불행하게 생을 마감한 망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이 같은 화장 풍토를 첨단시설을 통해 장사문화의 패러다임을 있게 한 인물이 심재덕 시장이고, 김동훈은 연화장의 선진적 설계를 한 장본인이다. 다만 이것은 정치적 발탁이 아니라 공모전을 통해 민주적 채택 방식에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38.5% 화장률에 지나지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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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무탈함의 행복 지면기사
인간의 행복과 재산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기 위해 돈 걱정이 없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재산 축적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듯 행운이 있으면 액운이 따르게 마련일까. 복권 당첨자가 이전보다 불행해진 사례가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심심치 않게 소개된다. 돈이 화를 부른 경우다. '로또 복권 1등 당첨되어도 불행해지지 않는 법'이란 제목의 유튜브 동영상이 있을 정도이니, 거액이 생기면 오히려 불행에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다.유산이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로부터 들었는데 동네 사람 중에 부모의 유산이 생기는 바람에 등지게 된 형제들이 있다고 한다. 삼형제가 의좋게 지내다가 7천만원쯤 되는 유산분배문제로 멀어졌단다. 장남은 장남이라서 본인 몫이 더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머지 두 형제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단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 형제는 유산을 나누지 못한 채 명절에도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다. 여러가지 조건 두루 갖추기 힘드니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어려운 모양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해야 하므로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 필요하리라. 돈 걱정이 없어야 하고, 형제간이나 친구 간에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하고, 몸이 건강해야 하고, 직업 만족도가 낮지 않아야 하고, 결혼을 한다면 믿음이 가는 배우자를 만나야 하고, 속을 썩이는 자식이 없어야 하고, 지루한 시간을 보낼 취미가 있어야 하는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추기 힘드니 행복하게 사는 게 어려운 모양이다. 반면 우리가 불행해지기는 얼마나 쉬운가. 최근 내가 집에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은 일이 있다. 어느 날 몇 분 간격으로 쿵 하고 큰 소리가 반복적으로 나서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추측해 보건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라 이웃집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아마도 창문을 열어 놓고 모두 외출하여 아무도 없는 집에서 바람 때문에 방문이 닫혔다 열리고 다시 닫히기를 계속 되풀이되는 듯했다. 우리집이 12층 아파트인데 문제는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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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여름의 맛 지면기사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딸은 물속에 들어가 있고, 나는 글 속에 들어가 있으나 둘 다 절반 정도 몸을 밖으로 내놓고 머리만 익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깊이가 일 미터 남짓한 간이 수영장에서 사방으로 물을 튕기며 즐겁게 첨벙거리는 딸을 보고 있으려니 내 글쓰기도 저렇게 즐거우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나 역시 10매 가량의 글을 붙들고 있으면서 온 사방에 단어란 단어는 죄다 흩뿌려놓은 채 허우적거리다가, 멍하니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연주 동영상을 재생하는 것이다. 17세 소년의 무서운 몰두를 보면서 오래가지 않는 반성의 채찍질을 한번 휘두르며, 억지로 종이 속에 뛰어든다. 아아, 수박이나 먹고 싶다….시고모님이 펴낸 요리 산문집 도착시어머니·둘째 고모의 엄청난 손맛 문득 한 권의 책이 도착한다. 시고모님이 내신 요리 산문집이다. 시를 쓰는 둘째 고모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오고 목소리는 성악가같은 분으로 결혼 전에 시부모님보다도 먼저 만나 뵙던 분이다.속초가 고향인 남편을 만나면서 서울토박이인 내게는 바닷길이 열린 셈이 됐는데, 그 길에 가장 먼저 떠내려온 것은 다름 아닌 음식이었다. 우선 홍게가 있다. 시아버지가 현역 선장님이던 시절, 나는 이 비싸고 귀한 홍게를 물릴 때까지 실컷 먹을 수 있었다. 백골뱅이와 소라는 덤이다. 그 외에 도치 알탕이며 도루묵조림, 총알 오징어와 가자미 식혜를 비롯해 난생 처음 먹어보는 물고기들, 온갖 나물과 해초무침, 이 모든 것을 제압하는 여왕같은 김치를 맛볼 수 있었다. 산과 바다에서 나는 싱싱하고 다채로운 식재료를 엄청난 손맛으로 요리하는 시어머니와 둘째 고모의 음식솜씨 때문에 제사 때마다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고 가야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게 된다. 남편에게 반한 것도 사실은 남편이 해준 요리 탓이 크다. 그런데 책을 넘기니 그 요리의 근원이라고 할까, 맛있는 음식이 뚝딱 만들어지는 손들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길이 보이고, 그 끝에 돌아가신 시할머니의 모습이 나온다.'작가가 나온 집은 망한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자기 집안사를 낱낱이 글에 써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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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새로운 공간의 시대 지면기사
최근 '프롭테크(proptech, 부동산 자산과 기술이 합쳐진 단어로 첨단 정보기술과 부동산 서비스가 결합한 것)' 컴퍼니가 부쩍 늘었다. 직접 돌아다니는 '발품' 대신 휴대전화를 이용한 '손품'이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공간을 중개하는 플랫폼들도 다양해졌다. 이 지면에서 소개한 바 있는, 취향이 담긴 개인 공간으로 낯선 사람들을 초대하는 '남의 집' 서비스도 대규모 투자를 받는 등 몸집을 키우며 영역을 확대 중이다. 코로나19 시기를 지나면서 사무실과 상가 등 기존 공간들의 공실률이 올라가고, 임차인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공간 플랫폼뿐만 아니라 관심사나 취미가 같은 사람끼리 모여졌다 흩어지는 '스팟 살롱문화'를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도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공간을 소유하기보다는 한 시간 동안 쓰더라도 내가 원하는 공간을 찾아 이용하고, 부모님과 함께 살거나 원룸에 거주하고 있어 자신들의 취향과 수요에 맞춰 공간을 사용하기 어려운 MZ세대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터조차 뮤직비디오 촬영장으로 인기가 많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N잡러로서의 활동을 하는 새로운 세대의 출현인 것이다.첨단 정보기술·부동산 서비스 결합최근 '프롭테크' 컴퍼니 부쩍 늘어소유보다 취향 중요한 MZ세대 특성 코리빙(Cooperative+Living, 공용 공간과 문화 시설을 공유하며 여러 입주민이 생활하는 주거 공간) 하우스, 코워킹 스페이스(공유업무공간), 커뮤니티 스페이스처럼 기존의 공간 구분과 다른 공간들도 속속 등장 중이다. 실제 공간 중개 플랫폼들을 살펴보면 공연장, 회의실, 세미나실, 콘퍼런스, 갤러리, 녹음실, 독립오피스, 강의실, 운동시설처럼 대관을 할 법한 공간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파티룸, 연습실, 촬영스튜디오, 스터디룸, 공유주방, 레슨연습실, 렌털스튜디오, 라이브방송, 보컬연습실, 호리존, 스몰웨딩, 악기연습실, 실외촬영, 비상주서비스, 기숙사·연수원, 글램핑, 팝업스토어… 마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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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관노 어무적(魚無跡)의 시편들 지면기사
어무적은 관노였다. 관청에서 부리는 노비였던 그는 가난한 백성들의 탄식을 귀담아듣던 시인이다. 할아버지는 생원 어변문이며 아버지는 사직(司直) 어효량이다. 사직은 무반직으로 정도전의 주도로 군제를 개편하면서 훈련관의 종5품을 이르는 벼슬이다. 관직에 있던 어세겸과 어세공과는 육촌형제다.어머니가 관비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어효랑의 배려로 보인다. 어무적은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났다.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새벽에 절간을 지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산도 손님 오자 예절을 차려, 머리에 흰 구름의 갓을 썼도다(靑山敬客至 頭戴白雲冠)'라는 시였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시의 재능은 뛰어났으나 서얼이어서 과거시험과 같은 신분 상승의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할아버지 때 김해로 내려갔으나 아버지는 사대부였지만 어머니가 관노비여서 법의 규정에 따라 어무적은 관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관노였던 그가 어떻게 노비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서얼이었던 그에게 신분에 맞게 주어진 미관말직이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었다.가난한 백성 탄식 귀담아 듣던 시인상소문에 힘겨운 삶 잘 드러나 각별 어무적은 1501년(연산군 7년), 김해에서 백성이 겪고 있는 어려운 생활고를 낱낱이 밝힌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으나 무시되고 말았다. 상소문에는 지배계급의 향락 근절과 민생의 보호와 임금의 군주다운 자세의 확립과 선비의 각성, 그리고 언로의 창달을 위한 간절한 뜻을 담았었다. 이를 신유상소(辛酉上疏)라 하여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7년 신유 7월 을해조(乙亥條)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선조 임금은 지방수령들의 폐습과 악행을 알고 있었다. 그는 올라오는 상소문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특히 어무적의 상소에 백성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어 각별하게 다루었다. '어무적의 시에 궁궐에선 백성 걱정해 조서를 늘 내리는데, 주현(州縣)에서 한낱 그저 종이로만 전해 받는다고 노래하고 있으니 옳은 지적이로다. 나라의 폐습이 그러하니 드러나는 대로 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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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총각 아저씨 지면기사
여섯 살 때 우리 집 사랑방에는 '총각 아저씨'가 살았다. 부엌이 딸리지 않은 방이라 사람들은 총각 아저씨들이 사는 문간방을 '잠자는 방'이라 불렀다. 그래서 제철소 앞 사택단지 우리 동네에는 전봇대마다, 대문마다 '잠자는 방 있음'이라는 벽보가 자주 붙었다. 그들은 결혼을 하고서야 잠자는 방을 떠났고 그러면 다른 총각 아저씨가 그 자리를 채웠다. 여섯 살 봄, 우리 집에 왔던 총각 아저씨는 조금 특별했다.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았고 제철소에서 돌아오면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게 그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좁은 문간방에선 유화물감 냄새가 풍겨나왔고 가끔 열리는 문틈으로 보이는 캔버스들. 그래, 나는 그 캔버스들이 참 궁금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다정하지도 살갑지도 않아서 나는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 월급날이면 웨하스나 알사탕 한 봉씩 사다 주던 다른 총각 아저씨들과 달리 말이 없던 화가 아저씨는 나한테도 별 관심을 준 적이 없었는데 어느 날, 서령아, 불렀다. 농담 같지만 그 목소리가 나는 기억난다. 서령아.나는 마루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펴 중간에 가로선을 길게 쭉 긋고(그건 벽과 바닥의 경계선이었다) 아이 셋과 어른 둘을 그렸다(그건 우리 가족이었다). "아저씨가 뭐 하나 가르쳐줄까?" "뭘요?" 아저씨는 내 스케치북 한 장을 넘겨 새 종이를 편 뒤 선 세 개를 그었다. 먼저 세로선을 위에서부터 3분의 2 지점까지 긋고, 그 선 마지막에서 가로선 하나를, 그리고 사선을 그었다. 이게 뭐지? "이게 뭘까?" 아저씨는 종이를 들어 올려 내가 더 잘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잠시 바라보던 내가 아! 탄성을 질렀다. 그건 놀랍게도 '방'이었다. 가로선 하나로 내가 긋던 벽과 바닥이 아니라 벽이 두 개고 바닥이 있는, 어떤 공간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손바닥을 들어 입을 막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평평한 종이 안에 공간이 있다니!문간방서 그림 그리던 '특별한 사람'어느 날 스케치북에 가르쳐준 선 3개종이 위에 만들어진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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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코끼리만두와 목포홍탁 지면기사
최근 토속 음식을 가업으로 이어나가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사정과 구직난도 한 몫 하겠지만 부모님의 가업을 천직으로 아는 젊은 세대다. 이들의 특징은 2대와 3대에 걸쳐 고유한 음식 맛을 전하기 위해 조리법을 익히며 식당업을 지켜나간다는 자부심이 새겨져 있다. 거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단골손님이다. 주인과 단골손님은 서로 가족처럼 반겨주며 응원해주는데 음식에 대한 오랜 믿음과 축적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같이 우리 집 부근에 자주 가는 토속 음식을 하는, 단골 식당이 두 군데 있다. 이 식당들은 공통적으로 시장에서 40여 년 이상 터를 잡고 있는 수원에 사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곳이다. 바로 수원 팔달문 시장의 코끼리 만두와 권선시장의 목포홍탁 집. 이 식당의 주요 메뉴인 만두와 홍어는 전통 음식이며 잔치에 쓰였던 토속 음식이다. 2대에 걸쳐 음식점을 하고 있는 이곳은 전통 계승처럼 부모님의 손맛을 승계하고 있다. 40여년 시장서 대 잇는 단골 맛집토속음식은 계승돼 전통가치 지녀 코끼리 만두는 중학교 때부터 자주 가던 분식점으로 80년대 수원 상권의 중심지에 있었다. 외식 문화가 발달 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이곳이 만남의 장소 또는 각종 모임의 공간으로 기억된다. 얼마 전 코끼리 만두를 찾았을 때 그때 주인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되어 주방을 보고 계셨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님을 맞이했다. 친절하게 반기던 이 남자는 이 집의 막내아들. 들리는 말로는 공부를 곧 잘하여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유학생 출신이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식당에 오는 손님들을 가족처럼 맞이하고 배웅하며 성심껏 행동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밀가루 피에 여러 가지 식재료가 들어간 만두는 원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유래되고 발전된 고대 음식이 원조다. 지금은 각 민족과 나라에서 이와 유사한 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두란 말이 처음 기록된 것은 1643년 영접도감 의궤에 나온다. 여기서 만두는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만들었고, 그 후 궁중 잔치에도 쓰여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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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몰인정해 보이는 또 하나의 이유 지면기사
뭘 바라고 남에게 호의를 베푼 것은 아니나 막상 보답이 없으면 섭섭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한 지인은 보답이 없는 이를 보면 몰인정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보답이 없는 사람을 다른 시각으로 보려 한다. 몰인정한 게 아닌데 오해를 받는 사례가 있다고 믿어서다. 내가 경험한 일도 있고 지인으로부터 들은 얘기도 있어 이를 바탕으로 예를 들어 보겠다. 베푼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상대 속마음 몰라 무정함으로 판단느끼는대로 생각하는 탓 오해 생겨 첫 번째 예. A씨는 어떤 강좌를 듣는다. 쉬는 시간이 되면 한 수강생이 복도에 있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수강생 전원에게 돌린다. 그 수강생은 스스로 선심을 쓰며 기쁨을 누리는 것 같았다. 그때는 오후였고 A씨는 카페인이 수면에 방해를 준다고 여겨 오전에만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 수강생이 주는 커피를 사양했다. 그랬더니 그 수강생은 커피 대신 다른 음료를 갖다 주겠노라고 해서 미안하여 그냥 커피를 받곤 했고 마시지는 않았다. A씨는 상대에 대한 배려의 차원에서 커피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커피를 몇 번 받았으니 그에게 보답을 해야 할까?두 번째 예. B씨는 걷는 걸 좋아한다. 지인들 모임이 끝나 집에 갈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데 지하철역까지 걷는 걸 즐긴다. 그런데 걷고 싶은 B씨를 방해하는 이가 나타난다. 승용차를 몰고 다니는 지인으로 모임이 있을 적마다 같은 방향이라며 차에 B씨를 태워 지하철역까지 바래다주려는 사람이다. 그가 동승을 권해 B씨는 몇 번을 사양했으나 자꾸 사양하기가 미안해서 그 차에 타서 신세를 진 게 두 번이었다. 신세를 진 B씨는 즐거운 산책을 포기하고 동승했는데도 그에게 꼭 답례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지 않으면 인정 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세 번째 예. C씨는 중학생인 딸아이에게 독선생으로부터 수학 과목을 배우게 했다. 일주일에 두 번 집에서 수업하는데 겨울 방학이 되니 하필 아이와 점심을 먹으려는데 선생이 올 때가 많았다. C씨는 선생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여러 번 권했고 선생은 사양하다가 함께 먹곤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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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책상에 옷을 입히다 지면기사
최근에 내 책상에서 단편소설을 써서 탈고했다. 당연한 듯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소설의 중요 부분을 내 책상이 아닌 '바깥에서', 그러니까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써 왔던 것이다. 책상은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길 때나 인쇄를 할 때만 마지못해 앉았다. 그러니 내 방, 내 책상에 들어앉아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쓴 것이 나름대로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책상이 홀대를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나는 항상 큰 책상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고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식탁으로, 하나는 책상으로 사용하면서 그 꿈을 이뤘다. 마침내 프린트도 올려놓을 수 있고 읽던 책들로 작은 탑을 쌓아도, 스탠드며 향초며 공기정화용 식물까지 모두 거뜬히 담아 놓고도 자리가 넉넉한 책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거기 앉아 책을 읽고 공부할 수는 있어도 소설은 안 써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작업은 '새 소설 쓰기'이고 책상의 가장 큰 의무 또한 소설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책상과 나, 둘 다 그 일에 실패했다. '나는 집에서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인가 보다, 도서관이든 카페든 사람들 속에 익명으로 섞여야 글이 가장 잘 나오는 모양인가보다' 스스로를 이렇게 생각해왔다. 친구의 선물 평직으로 짠 러그 깔아차고 딱딱한 책상 포근하게 바뀌어자꾸 '인력' 느껴지며 소설쓰기 성공 그런데 아주 작은 전환점이 생겼다. 어느 날 팔뚝에 닿는 책상의 감촉이 너무 차가워서 무심코 친구가 선물한 얇은 러그를 반으로 접어 깔아보았다. 러그는 평직으로 짠 직물로, 기하학적 패턴 안에 우주인이 무중력 상태에서 떠 있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러그를 깐 책상에 앉아보았더니 내 팔이 닿는 부분의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으로 바뀌어 있었다. 책상은 옷을 입은 것처럼 아늑해 보였다. 러그를 책상에 깔아놓은 후부터 자꾸 책상의 '인력'을 느꼈다. 좀 더 자주 앉았고, 앉아서 무중력 상태인 우주인을 들여다보다 말도 걸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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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당신의 별점은 몇 점인가요 지면기사
오래된 영화 잡지에 '개봉작 20자평과 별점'이라는 코너가 있다. "별이 다섯 개!"라고 강조하던 어떤 침대 광고처럼 별 5개는 최고의 칭찬이다. 별 1개부터 반 개 단위로 매겨지는 이 평은 최신 영화에 대한 정보를 한꺼번에 확인하고 싶을 때 꽤 유용하다. 별 개수와 한 줄의 평으로 그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부터 관람 여부까지 생각하게 만든다. 공개적으로 글을 쓴 지 오래되었다. 출판된 책은 없지만 이름과 얼굴을 내놓고 신문과 같은 지면에 글을 쓰다 보면 댓글이 달릴 때가 종종 있다. 사실 칭찬하는 댓글보다는 비난하는 댓글이 더 많다. 처음으로 내 글을 비난하는 댓글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간단한 한 줄이었는데 그 한 마디가 반복 재생되는 느낌이었다. 글을 쓰다가도 그 댓글이 생각나면 더 이상 글이 잘 써지지 않고 의기소침해졌다. 몇 번 비슷한 경험을 한 후에는 댓글창을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가끔 궁금해질 때면 찾아 들어가서 보긴 하지만, 대부분 후회로 끝난다. 이제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 댓글 창이 숨김으로 되어 있는 것이 편안하고, 농담처럼 이야기하던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게 됐다.작가들도 창작물 평가 궁금해 한다요즘 인터넷서점 별점·한줄평 강력신인작가들 '별점 테러' 타격 더 커 작가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인터넷 서점 독자들이 매기는 별점이 화제에 올랐다. 작가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떤 사안에서 통일된 의견이 나오는 일은 흔치 않은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제 막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도, 어느 정도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는 작가도 목소리가 커지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즘 인터넷 서점은 꽤 자세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별 개수에 따른 평점 분포와 연령과 성별로 구분된 구매자 분포까지 확인 가능하다. 흥미로운 지점은 별 5개와 별 1개의 간극이다. 대부분의 책은 1개까지 별점은 거의 없고, 별이 3개에서 5개 사이에 몰려 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의 경우 별 5개는 55.4%, 별 1개가 25.1%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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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천민 시인 홍세태 지면기사
홍세태(1654~1725)는 천민 시인으로 조선 후기, 효종 때 무관인 홍익하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양반들과 다르지 않은 수학과정을 거쳤다. 일찍부터 서당에 다녀 5세 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8세쯤에 글을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한다.기록 중에는 그의 출신을 다르게 전하는 기록도 있다. 성대중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는 홍세태가 이씨 집안의 노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농사일을 게을리 한다 하여 주인이 그를 죽이려는 것을 그의 시를 높이 평가하던 김석주와 이항이 돈을 주고 노비의 신분을 벗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홍세태는 두 사람을 부모처럼 받들었다고 전한다.경우야 어떻든 글공부를 열심히 하던 그는 1675년 3년마다 실시하던 식년시 잡과, 기술직을 뽑던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한학관에 뽑혀 중국어를 양반들에게 가르쳤다. 그는 동갑내기인 김창흡, 이규명 등을 비롯한 사대부들과 시를 짓고 함께 감상하는 낙송시사(洛誦詩社)를 만들어 우정을 쌓았다. 글솜씨 뛰어나 사대부들과 어울려외국사신 동행 의전에 관한 글 전담지방목장 관장 종6품 감목관 지내 그는 1682년 통신사 윤지완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 1698년에 역과 합격 때에 제수된 이문학관에 실제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문학관이란 조선시대 승문원에 속하여 외교문서를 처리하는 벼슬로 중국으로 가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아했던 것이다.우리나라에 온 중국사신이 조선의 시문을 보고자 했을 때 좌의정 최석정이 숙종에게 그의 시를 추천하여 홍세태는 임금의 호감을 사게 되었다. 그 일로 제술관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기도 했으나 호사다마라 할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삼년상을 치르느라 사직하였다. 다시 관계에 나간 것은 1702년이었다.그 후 홍세태는 1705년 둔전장(屯田長)이 되고 1710년에 통례원인의(通禮院引義)에 임명되어 어전의 조회와 의례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1713년에는 서부주부 겸 찬수랑(西部主簿兼纂修郞)이 되었고 1715년에는 제술관이 되어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동행하는 수행원으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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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문쾅의 시대 지면기사
"좋겠다, 너는. 아직 애가 문쾅까지는 안 할 테니."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친구들은 종종 나에게 말했다. '문쾅'이란 엄마와 이야기하다 말고 짜증이 난 아이가 제 방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들어가 버리는 거다. 나도 안다. 어린 시절 많이 해본 짓이다. 물론 그럴 때마다 우리 엄마는 빗자루를 들고 나보다 더 큰소리로 방문을 발로 차고 쳐들어 왔지만. 우리 집 문짝은 몇 번이나 부서질 뻔했다. 내 딸은 여덟 살,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다. 중학교 2학년쯤 되면 우리 아이도 그러겠지, 막연히 상상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나에게 너무 이르게 찾아왔다. 단짝 친구 집 폐 끼치는 것 같아서여덟살 딸에게 출입금지 시켰더니짜증 내며 방문 '쾅' 어이없는 현실 문제는 단짝 친구였다. 단짝 친구 생기는 거야 좋지. 온종일 놀이터에서 함께 놀아도 모자란 것쯤 나도 안다. 친구 데리고 우리 집에 가면 안되냐고 조르는 것, 이해한다. 그래서 자주 그렇게 해주었다. 과일도 깎아주고 풍선껌도 주고 가끔은 저녁도 챙겨주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 엄마도 미안한 마음에 우리 아이를 초대했다. 문제는 너무 자주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친구 엄마에게 폐를 끼치는 일 같아서 보다 못해 친구 집 출입금지를 명했더니 아이가 짜증을 버럭 냈다. "아니, 엄마 말을 거스를 참이야?" 나도 버럭, 잔소리를 쏟아냈다. 조막만 한 녀석이 도대체 이유가 뭐냐고 따지고 들기에 조리 있게, 고작 여덟 살은 반박도 못 할 수준으로 심도 있게 설명도 했다. 아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나에게 대들었다. "이건 내가 안 가기로 결정한 거지, 엄마가 그렇게 시켰기 때문은 아니야!" 어라? 순순히 수긍하지는 않겠다는 거지? 나도 오기가 생겨 다시 한번 단단히 대답을 받아냈다. "안 가겠다는데 엄마는 왜 내 대답을 의심해?" 그러고는 그것, 아직 나에게 오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쾅'이 일어난 것이다. 아아, 지금 내 눈앞 광경이 현실이라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거실에 앉아 잠깐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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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시인 정조가 수원시장을 위하여 지면기사
수원 화성을 축성한 정조(조선 22대 왕)는 시인이었다. 정조는 시인으로서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의 샘물을 언어의 두레박으로 공급하며 인간 정신을 우위에 두었다. 평소 책 읽기와 글쓰기를 즐겨 했던 정조가 추구했던 인간 정신은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을 통해 인문학의 정수를 펼쳤다. 여기에 19세기 조선의 문예부흥을 주도했던 정조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50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한시로 그 심상을 드러냈다. 개혁 군주로서 이상적 정치를 실현하는데 그의 시편들은 근본적 철학과 시적 상상력이 고도로 함축된 문화유산으로 남았던 것. 정조가 시인이 되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찾을 수 있다. 11살 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영조와 노론 세력은 정조의 애원을 싸늘하게 외면했다.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사망한 후 정조는 왕 위에 오를 때까지 죽음의 문턱을 오가며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비극적인 아버지의 죽음으로 파생된 외로움과 고독은 그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외로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고독의 정원에서 시심의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 이로써 정조가 극복한 트라우마는 강력한 군왕으로 성장시킨 모토가 되었고, 콤플렉스는 고뇌에 찬 강인한 인간관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정조가 물려준 세계유산 '수원화성''남문 언덕' 수원을 넘어 'K-문화'역사·실제성 갖춘 '무공해 스토리' 이 가운데 사도세자가 갇혀 죽은 뒤주는 넘지 못하는 언덕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어린 정조에게 자기 키만 했을 뒤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가로막고 있는 언덕을 경계로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밖에…. 넘을 수 없었던 이 언덕은 정조 재임 시절 최고 업적으로 평가받는 수원 화성 축조로 이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런 아버지로 인해, 사도세자의 무덤을 화성으로 이장한 후 1796년 수원에 동서남북 사대문이 들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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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불행으로 얻는 행복감 지면기사
얼마 전 거실을 청소하다가 청소할 만큼 몸이 건강한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몇 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목 디스크와 허리 디스크를 지병으로 가지고 있는 데다 '테니스 엘보'라는 병을 앓게 되어 팔의 통증이 심할 때였다. 팔에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다녔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집안 청소조차 하지 못했고 우울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조심하지 않으면 병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청소할 수 있는 현재의 삶이 얼마나 감사한 삶인가.그러고 보니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7년의 아이엠에프 사태로 인해 남편의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고 나서 아이엠에프 사태 이전에 돈 걱정 없이 살았던 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적도 있었다. 돈 걱정 없이 사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임을 절감했던 것이다. 왜 인간은 불행을 겪어야만 겸손해지고 감사를 배우게 되는 걸까. 행복 출발점인 감사 모르는건 불행건강 위협 미세먼지 있었던 까닭에요즘 공기 맑으면 기쁨 맛볼 수 있듯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마을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마을의 랍비를 찾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 "우리 집은 게딱지만한데 아이들은 주렁주렁 딸린 데다가, 제 아내만한 악처는 다시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나라에서 가장 악처일 겁니다. 아, 저는 어떡하면 좋을까요?""자네 염소를 가지고 있는가?""물론이죠.""그렇다면 염소를 집안에 들여놓고 기르게나."농부는 의아한 얼굴을 하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튿날 다시 찾아와 말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악처에다 염소까지……! 더는 못 참겠습니다.""닭을 기르고 있는가?""물론입니다.""그럼 닭을 전부 집안에 들여 기르게나."사나이는 또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이튿날 또 찾아왔다. "이젠 세상이 끝장입니다!""그렇게 괴로운가?""마누라에다 염소에다 열 마리 닭에다! 오오! 하느님 맙소사!""그럼 염소와 닭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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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즐거운 성가심 지면기사
오늘 반팔을 입었다. 과연 항온동물이 맞는 걸까 싶게 추위도 더위도 많이 타는 나는 얇은 옷 위에 뭔가를 걸쳐 입기를 좋아한다. 춥고 덥고 배고프고 졸린 것을 싫어하는 정도가 성인치고 무던하지가 못해 마흔을 훌쩍 넘겼어도 덜 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요 며칠 날씨는 흠잡을 것 없이 좋았다. 그렇지 않은가? 봄의 몇 주간, 활짝 피어난 호사스러운 날씨는 대부분의 인간을 낙천적으로 만든다. 햇볕이 따뜻하고 새순이 파릇파릇한 봄날에는 여간해서 인상을 찌푸리기 힘들다.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은 1층인데, 나무 데크만 놓인 야외 발코니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칠 우려 때문에 여태껏 무용지물인 공간이었다. 그러다 발코니를 가릴 수 있는 천을 사서 둘렀더니 나비효과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노지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쇠뿔은 항상 단김에 빼는 우리 부부는 곧바로 꽃시장으로 달려갔다. 기다란 화분 세 개를 비롯해 흙과 데이지 모종, 튤립 구근 여섯 개, 약간의 야생화 한 아름을 안고 돌아왔다. 이런 욕망은 자꾸 번성하기 마련인지라 어디선가 접이식 테이블도 생기고, 의자도 놓고, 햇빛을 가릴 수 있는 2m짜리 차양도 쳐놓았더니 야외카페가 부럽지 않은 나만의 작업실이 탄생했다. 발코니 꾸미니 카페 못잖은 작업실변명인지 다짐인지 모를 글 쓰다보니어느덧 노트의 마지막 장 펼쳐졌다 이상고온으로 30도에 육박하는 사월의 어느 날, 나는 이 일인용 카페에 앉아있었다. 커피를 정성껏 내리고 멜빌의 '모비딕'을 읽는 것으로 나 혼자만의 오픈식을 경건하게 가졌다. 두 시간이 넘어가자 머리 위에 목욕탕 마크가 모락모락 떠오를 만큼 더웠지만 그래도 굳세게 앉아있었다. 나한테 뭔가가 '내세워지는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생각도, 감정도, 상상도 아니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빛으로 달아오른 공기 속에 놓여 있을 때 일정한 상태로 예열되는 '감각'에 가까웠다. 뜨거운 햇빛 속에 앉아있으면 나는 항상 여행지의 해변이 떠오른다. 첫 배낭여행지가 터키와 이집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