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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를 닮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면기사
[경인일보=]백형이 가을걷이도 무사히 끝내고 김장까지 담갔다고 와서 쌀이며 김치며 가져가라 하신다. 근래는 생활비를 줄입네, 반찬값을 아낍네, 뻔뻔하게 맨손, 맨입으로 생쥐 풀 방구리 드나들 듯하면서 김치를 달라, 쌀을 퍼간다 부산했던 날도둑 동생을 또 먼저 챙기신다. 작지 않은 살림 규모에 수다한 가솔을 거느린 나의 백형은 올해도 어김없이 엄청난 김장을 담그셨다. 근 200포기에 달하는 김장이라면 요즘 보통 가정집에서는 드문 양이지만 형제며 자식에게 나눠주고 명절이며 제사며 집안대소사를 준비해야 하는 백형께 특별한 건 아니다. 올해는 여름 폭우에, 잦은 가을비에 쌀 수확이 한참 줄었는데 그나마 정미소에서 쌀을 도둑 맞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어떤 놈이 집어갔든 쌀을 먹기는 먹겠지 하고 쓸쓸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들녘에 남은 잔국(殘菊)을 닮으셨다.조선 후기 뛰어난 학자이면서 또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다산 정약용은 국화의 아름다움을 다섯가지로 꼽았다. 늦게 피는 것, 오래 견디는 것, 향기로운 것,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싸늘하지 않은 것. 이 네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국화의 덕이고 아름다움이었고 여기에 다산이 더한 것이 '국화 그림자(菊影)'였다.먼저 산만하고 들쑥날쑥한 물건을 모두 치워 벽을 깨끗하게 한다.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국화를 세우고 알맞은 곳에 촛불을 놓아서 국화의 그림자가 벽에 비치게 한다. 가까운 그림자는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질서있게 늘어서 마치 묵화를 펼쳐놓은 것 같고 그 다음 그림자는 너울대고 어른거리며 춤추듯 하늘거려 달이 떠오를 때, 동쪽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비춘 것 같으며 멀리 있는 그림자는 흐릿하여 엷은 구름이나 노을 같고 없어지거나 소용돌이치는 그림자는 밀려드는 파도 같다고 하였다.다산 흉내를 내보겠다고 촛불 앞에 국화를 둔 적이 있다. 벽을 깨끗이 치우지 못해 다산의 묘사에는 견줄 수 없었지만 너울대는 촛불, 불꽃심, 속불꽃, 겉불꽃 겹겹의 밝기와 온도를 가진 촛불, 국화는 촛불 앞에서 정말로 묵화 같기도 하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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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에 대한 오해! 지면기사
[경인일보=]한글 특강을 다니다 보면 외래어를 남용하지 말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하게 된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공감을 표시하지만, 그래도 "오늘 얘기의 포커스가 아주 좋았다"라든가 "저희가 다음에 다시 콜 해도 또 와 주시겠죠?"하는 식의 얘기가 곧잘 튀어나온다. 언어도 습관이다.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렵다. 그래서 평소 좋은 언어 습관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그런데 더러는 이렇게 묻는 분들도 있다. 외래어가 본디 외국어였지만 이미 우리말이 된 것이니 써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는 남용의 의미이다. 남용은 '일정한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 함부로 씀'을 뜻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쓰지 않고 적절하게 쓰는 것은 '남용'이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외래어라 해도 아주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컴퓨터, 디지털 카메라 같은 말은 대체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이런 말은 외래어를 남용하지 말자는 주장의 대상조차 되기 어렵다.둘째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외래어를 "외국에서 들어온 말로 국어처럼 쓰이는 단어를 일컫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처럼'에 주의해 보자. '처럼'이란 모양이 서로 비슷하거나 같음을 나타내는 격조사이다. 그렇다면 '국어처럼'이란 국어와 비슷하거나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풀이 또한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사고로 가족을 잃은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라고 해도 그는 짐승이 아니다. "철수는 도깨비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해도 '철수=도깨비'는 아니다. 유리알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인다고 해서 다이아몬드는 아니다. 아무리 반짝여도 다이아몬드가 아닌 이상 유리알을 100만원이나 1천만원씩 주고 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원어민처럼 영어가 유창했다"고 해도 결코 원어민은 아니다. 비슷할 뿐이다.그런데 '처럼'이란 말 풀이에 왜 '같다'는 뜻이 들어가 있을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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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여행 지면기사
[경인일보=]정현종 시인은 '여행을 기리는 노래'에서 "벌써 오르지 않어?/이 다람쥐 쳇바퀴/이 죽어가는 되풀이를/끊으면서,/다른 시간이/열리면서,/무지개가/걸리면서,/거기가/낡은 시간의 새 데이트 아냐?/장차 갈 길들에서 피어날/고달픈 신명들의 원천 아니야?"라고 노래한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의 죽은 시간에 새로운 시간의 살을 덧대는 것이 여행이다. 그것은 고달프지만 신명나는 의도적 선택 행위이다. 무엇인가를 얻어내야 한다는 목적 지향적 행위와 뚜렷한 차이를 갖는 것이 여행의 가치이며 매력이다. 생산에 대한 욕망도 결과에 대한 부담도 없이 자기 자신을 방목할 수 있는 이 자유로운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여행자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지금 여기'가 싫어서 떠나는 자와 다른 하나는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 때문에 떠나는 자이다. 이곳의 혐오와 피로 때문에 어디론가 떠나는 자는 낯선 곳에서의 휴식과 평화를 기대할 것이다.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 때문에 이곳을 떠나는 자는 이색적 체험을 즐기며 권태로운 삶을 쇄신할 것이다. 어느 부류에 속하든 모든 여행자들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변화된 자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본질적으로 낭비가 아니라 풍요이다.이 같은 여행에도 각자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인도여행을 하며 한국의 대학생들과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그들의 여행방식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돌아본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여 보름 만에 델리와 캘커타와 뭄바이에 깃발을 꽂는다.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을 보기 위해 이틀을 달려와서는 하루를 머물다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그것은 영웅담처럼 여행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예찬된다.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그렇게 스치듯 지나치며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같은 방식에는 질보다 양을 내세우는 우리의 세태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무한경쟁사회의 정복욕이 그들에게도 내면화된 것은 아닐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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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도 실천하기 나름 지면기사
[경인일보=]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미국 사회학자들은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실험을 해보았다고 한다. 즉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각각의 집단으로 구성한 다음 로또복권을 구입하게하여 그 당첨 확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실험이었다.결과는 어떠하였을까? 필자가 이런 질문을 사석에서 몇 번 하였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집단의 당첨 확률이 높았을 것이라고 답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로또복권의 당첨 확률이 높아질 리가 없다. 당연히 당첨 확률은 양 집단이 똑같았다.미국의 사회학자들은 그럼에도 긍정적인 사람의 삶의 질이 더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 원인을 더 추적해보았더니 로또복권을 구입하는 과정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즉 긍정적인 사람은 로또복권을 구입하러 가서도 같이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 또는 복권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 이야기를 하는 반면 부정적인 사람은 복권만 구입하고는 바로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로또복권 당첨 확률은 동일하지만 복권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이어지는 인간관계가 결국 그 사람의 질을 변화시킨다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어느 저녁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을 때 같이 있던 선배 한분이 갑자기 미국 미식축구 결승전에 우승한 팀의 모자가 어떻게 경기가 끝난 후에 바로 판매되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던 적이 있다.미식축구 결승전이 열리면 모자를 공급하기로 계약되어 있는 업체에서 양쪽 팀의 모자를 모두 제작한 후 우승팀이 확정되면 다른 팀의 모자는 모두 소각하고 우승팀의 모자만을 판매한다고 한다. 대신 우승팀의 모자는 보통 모자의 약 3배값을 받기 때문에 패한 팀의 모자를 모두 소각하여도 손해를 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본론이 아니었다. 그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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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에게 무슨일이 생겼는지 알고있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어려서 읽으며 자란 책으로 '한국의 위인'이라는 12권짜리 전집이 있었다.한 권에 열명 정도 위인의 행적을 시대별로 기술한 것인데 요새 같으면 한 명에 한 권은 됨직한 수준으로 꽤 문학적이면서도 균형감각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책이다.경지사라는 출판사에서 1972년에 발간한 것인데 그해에는 우수도서로 지정되기도 했었고 사학자 이기백, 아동문학가 이원수, 미술사가 최순우 같은 분들이 서문을 쓰고 신지식, 신현득, 장욱순, 이종기 같은 분들이 필진으로 참여하였다.진실과 정의가 단일한 길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이 위인들의 역사는 읽을 것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줄잡아 수십번은 읽었고 나에게는 친한 친구이며 귀한 선생이었다.예를 들면 청나라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 항복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싸움을 해야한다는 주전론자 김상헌과 화친을 해야한다는 주화론자 최명길은 모두 충신이었다.쇄국정책으로 변화를 거부한 대원군이나 개화를 위해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나 모두 충신이었다.이기일원론인지 이기이원론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퇴계와 이율곡은 모두 뛰어난 학자였고 김부식은 정지상을 질투하여 부당하게 정지상을 처형했지만 이들 모두 대단한 문장가였고 시인이었다.묘청과 허균은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였지만 이들의 반란에는 명분과 대의가 있었고 이들의 실패는 안타깝고 절망적이었다. 요컨대 이들 또한 위대했다. 그러나 별이 떨어지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꿈을 꾸고 집안에 향기가 감돌고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이 노한 듯 벼락이 치고 위인들의 탄생과 죽음은 늘 뭔가 신이한 현상을 동반하였다. 평범한 중에도 특히 평범했던 나에게 '위인'의 세계는 뭔가 초월적이고 특별한, 인간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이었다. 신이하고 비범한 영웅들, 위인들의 세계는 교육적이기보다는 문학적, 설화적이었다고 해도 좋겠다.이들의 세계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사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이었다. 어떤 위인이 사망하게 되었을 때의 날씨를 기술한 짧은 구절이 있었다. 한 위대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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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언어는 쉬워야 한다! 지면기사
[경인일보=]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부동산대출액을 제한하는 DTI, 즉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은행권에서 제2금융권으로 확대 시행된다고 한다. 잘 들어보니 소득을 기준으로 부동산을 구입할 때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한다는 얘기인 것 같다. 문제는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하면 되는데 DTI라는 말을 꼭 앞에 갖다 붙인다는 점이다. LTV는 만기 10년 이하 또는 만기 10년 초과ㆍ담보가액 6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해 현행 60%이내인 LTV를 50%이내로 강화한단다. 역시 문제는 LTV이다. LTV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해줄 때 담보물의 가격에 대비하여 인정해주는 금액의 비율을 말한다. 즉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다. 이것을 50%로 강화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돈을 덜 빌려주겠다는 얘기이다. 글쓴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총부채상환비율 규제 확대나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을 강화하는 것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주장할 것도 없다. 문제는 뉴스를 전하는 기자의 보도 태도이다. DTI라고 먼저 말하고 나서 즉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확대된다고 말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DTI로 운을 뗄 필요 없이 그냥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확대된다고 하면 되고, LTV를 언급할 것 없이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라고 하면 된다. 총부채상환비율과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라는 말을 줄여 쓰고 싶은 심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라면 '총상비'라든가 '대출인비' 하는 식으로 약어를 만들어 써야 한다. 그런데 이 두 말은 약어를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 '총상비', '대출인비'라고 했을 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DTI와 LTV를 쓰는 것일까? 하지만 DTI와 LTV는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DTI'라고 하고 다시 '즉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말하는 식의 보도 태도는 말하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불필요한 외래어 남발은 우리말의 순수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점점 어렵게 만든다. 다소 복잡하고 장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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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곳에 관한 단상 지면기사
[경인일보=]내가 도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초등학교 운동장이다. 저녁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 되면 나는 종종 그곳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보곤 한다. 꽃밭도 나무도 교실도 다 운동장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그 위로 운동장만한 밤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 텅 빈 공간이 울긋불긋한 꽃밭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공터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도시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도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꽃밭과 분수, 놀이기구, 별로 감동스럽지 않은 조각상들. 공공의 장소엔 언제나 볼거리를 늘어놓아야 한다는 발상일 것이다. 지난 봄 구청에서 동네에 있는 조그마한 놀이터를 새로 정비한 적이 있다. 이것저것 기구들을 들여놓고 나무도 다시 심어 놓았는데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것을 설치하다보니 정작 아이들이 뛰어다닐 공간은 더 작아져버렸다.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지금은 미끄럼틀 아래 모여 쪼그리고 앉아 논다.없는 것이 없는 서울. 채우고 교체하고 다시 설치하고 꾸미기를 반복하면서 대부분의 공간은 늘 무언가로 가득하다. 조용한 카페조차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곳이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더러는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카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빈 공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의 생리이기도 하지만 뭐든 가득 채운다고 해서 반드시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갖는 미덕이 있다.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은 마음을 향하게 된다. '사색'하는 인간의 시간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사색의 시간은 적막과 고요를 요구한다.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소란 속에서 제대로 생각에 몰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일주일에 하루 혼자 평일 산행을 감행하곤 하는데 그것은 빈 길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말(言語)을 버리고 싶은 욕구에서이다. 나는 등정주의자도 아니고 무심을 즐기는 산책주의자도 아니다. 내가 하루 종일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리며 하는 것은 무수한 잡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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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이 연금술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안양 평촌에서 서울 태릉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만 1시간이 걸렸고, 걷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편도 1시간30분이나 걸리면서 출근 또는 퇴근을 하였다.처음에는 태릉에 있는 직장으로 발령낸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하였지만 곧 왕복 2시간이라는 독서 시간을 확보한 것이라고 마음먹고 2년6개월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 때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내 생각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책들 중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처음 읽을 때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스페인의 평범한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가 어떤 노인의 제안에 따라 이집트 피라미드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으러 갔다가 결국 보물은 고향무화과 나무 밑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이 '연금술사'라는 제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만 내 머리 속에 담아져 있던 중 '연금술사'라는 제목을 단 이유를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사법연수원에 근무할 때 사법연수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 일정 중에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하게 되었다. 평소 책과 연습기록 속에만 파묻혀 있었는지 여자 연수생들 중 몇몇이 백록담 정상을 3㎞ 정도 앞두고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좌절하는 여자 연수생들을 설득하는 말을 찾던 중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서 좌절하면 다시는 백록담을 구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또 오더라도 이쯤에서 또 주저앉아 버리지 않겠느냐. 정말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한번 더 힘을 내어서 앞으로 나가려는 노력이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연금술이다."그러면서 여자연수생들을 뒤에서 재촉하여 결국 모두 백록담에 올라갔고 그때 여자연수생들은 역시 올라오길 잘했다고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산티아고가 이집트 피라미드에 가서 사막 한가운데 땅을 파고 한참을 내려갔으나 보물이 나오지 않아 포기하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지금 네가 쓰러져 있는 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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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면기사
[경인일보=]칭찬이라면 뭐든 좋지만 칭찬 중에도 은근히 맘에 남는 칭찬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에는 개인 웹페이지에 친한 친구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무개만 같아라' 하고 적어놓은 구절인데, 친구는 칭찬이라기보다 희망사항으로 그 같은 구절을 적어놓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가위같은, 추석같은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 그 구절을 볼 때마다 새로워 마음에 남는다고 보는 편이 옳겠다.따져 보면 더도 덜도 필요없다는 것은 완벽을 의미한다. 선인들은 한가위를 더도 덜도 필요없는 날이라 일컬었다. 추석을 가리키는 옛말이 '가배'이고 가배는 가운데라는 의미였으며 '한'은 크거나 중심인 것을 의미하는 말이니 한가위란 일년 중에 가장 중심이 되는 날, 가장 완벽한 날이라 할 수 있을까? 한가위가 완벽한 날이라면 한가위를 쇠는 사람들의 심정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날이 완벽하다고 사람까지 완벽한 기분이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오히려 그렇게 풍성하고 완벽한 명절이기에 부족한 것이 더 도드라지고 더 서러운 것은 아닐까? 명절이야 음식이 주장이고 음식은 여성의 몫이었기로 최근 들어서는 명절 증후군같은 우울한 증세마저 없지 않지만 여전히 더도 덜도 필요없는 추석을 결코 완벽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이 좋은 시절에 가족과 이웃과 마음껏 지낼 수 없는 현실이 있기 때문 아닐까?1920년대 가난한 기층 민중의 삶을 섬세한 여성적 시선으로 형상화하며 진지한 작품 세계를 구축한 것이 박화성이다. 박화성은 등단작 '추석 전야'에서 '추석'이라는 풍요로운 시간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사라진 척박한 사회를 대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영신은 남편도 없는 홀어미의 몸으로 두 자식과 시어머니를 부양하며 산재를 입은 몸으로 치료는커녕 낮에는 방직회사의 여공으로 폭력과 성적 희롱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가혹한 노동을 감당하고 밤에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위해 밤새 삯바느질을 한다. 집집마다 떡내음, 기름내음, 칼도마 소리가 나는 풍성한 추석 전날밤이지만 영신의 집은 밀린 집세를 내고 나니 달랑 50전짜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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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글 사회복지를 생각하자 지면기사
[경인일보=]사회복지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강의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사회복지사들 앞에서 과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에 관해 문외한인 사람이 감히 그런 곳에 가도 될까? 그동안 참여했던 봉사활동에 대한 얘기라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보건복지가족부에서 노숙인과 부랑인을 대신할 법정 용어로 하필이면 '홈리스'를 쓰려고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잘 곳이 없어 한데서 잠을 자는 이들을 우리는 노숙인이라 부른다. 전에는 노숙자라고 불렀었는데 '자'가 어감이 좋지 않았는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어느 틈엔가 노숙인이 되어 있었다. 노숙인이 잘 곳이 없어 단지 한데 잠을 자는 사람이라면 부랑인은 거처도 직업도 없이 떠도는 사람을 뜻한다. 부랑인도 과거에는 부랑자였다.그러고 보면 '자'를 '인'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말이 꽤 있는 것 같다. 장애인도 과거에는 장애자였다. 그런데 요즘에는 장애인도 적절치 않았는지 '장애우'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에서 당선되었을 때 며칠 동안은 당선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어느 날부터인가 '당선인'으로 말이 바뀌었다. 실제로 '자'가 그렇게 부적절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자' 붙은 말을 기피하는 것이 요즘 경향인 듯하다. 그런데 '응시자', '합격자', '탈락자', '우승자'는 왜 '응시인', '합격인', '탈락인', '우승인'이라고 하지 않을까? '기자'는 왜 '기인'이라고 하지 않을까?괜한 시비를 건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과연 '자'를 '인'으로 바꾼 것이 적절한 처사였는지 의문이 들어 그렇다. 물론 '자'가 태생적으로 질이 나빠서 그냥 두면 우리 언어생활이 험악해지고 특히 청소년들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주는 말이라면 모르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드는 때문이다. '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당사자들을 존중해서 그 '자'를 '인'으로 고친 정상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왠지 필요 이상의 일을 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니 시작함만 못한 결과가 돼버렸는지도 모른다.그렇다면 부랑인과 노숙인을 대신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