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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세종시 수정안을 배워라" 지면기사
[경인일보=]2010년은 정치권이나 신문·방송권 모두 세종시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종시의 원안 고수냐, 수정안이냐가 여·야간 갈등, 지역간 갈등을 일으키는 진원지로 급부상하였다. 양쪽의 견해차가 너무 커서 소통과 대화로의 해결구도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경기도 처지에서 보면 세종시, 즉 행정중심복합도시의 문제점을 이미 예측하고 국가발전 차원에서 부당함을 주장했으므로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리라고 짐작은 하였지만, 도에서 너무 섣부르게 세종시의 정부 대안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세워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으면 한다.경기도는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에 자족형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아이디어와 정책을 담았는지 유심히 살피고 지역개발에 참고할 사항이 없는지 면밀하게 분석하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그러면 세종시 수정안에 담긴 내용을 2가지 측면에서 분석해본다. 가장 핵심은 자족기능 강화를 위한 조치로 행정중심복합도시에서 교육과학경제도시로의 변화다. 행정중심의 종합청사를 이전, 2030년까지 인구 50만의 자족기능이 가능한가 하는 현실적 문제는 세종시를 추진하던 지난 정부내부에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 왔으나,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미명아래 묻어놓았던 용암이 시기가 되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교육과학경제도시의 정체는 무엇일까? 교육은 대학 유치가 중심이 된다. 현재 KAIST, 고대는 확정이 되었고, 서울대나 기타 외국대학의 유치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특목고 등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여러가지 교육개혁에 따른 자사고 등의 방안이 수립될 수 있으므로 '교육'이라는 명칭은 분명히 세종시 수정안의 근간인 자족기능의 한 축이 될 수 있다.과학은 과학비즈니스벨트를 중심으로 한 첨단과학시설 배치이다. 인구 유입효과는 교육보다 덜하지만 상징적 의미로서 상당히 중요하다. 지금까지 연구시설의 집적지는 대덕연구단지였지만, 세종시를 중심으로 기초과학메카로 새롭게 부상한다는 점에서 과학계에서는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국내 연구개발 중심지의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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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집행이 법을 세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중국의 전국시대를 마무리하면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국력의 근저에는 법가(法家)사상이 있었다. 진시황제 시절에 승상으로 있던 이사(李斯)와 더불어 순자(筍子)에게 배워 법가사상을 대성한 한비(韓非)가 유작으로 남긴 '한비자'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물이 불을 제압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불이 물을 증발시켜버린다. 법이 무도한 사람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법과 무도한 사람 사이에서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가마솥과 같은 역할을 하면 법은 증발되어 버릴 것이다'.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법이 세워지기도 하고 증발되기도 한다는 것을 2천년도 훨씬 넘은 시절에 한비는 간파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서 적지 않게 감탄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가마솥과 같이 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의도적으로 가마솥이 되는 경우이고, 둘째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가마솥이 되는 경우이다.경찰관이 도박 현장을 적발하고도 판돈을 챙기면서 도박의 규모를 줄여주거나 불법오락실 단속 정보를 미리 알려주는 것이 전자의 예라고 한다면, 마작을 어떻게 하는지 전혀 몰라서 마작 도박을 한 사람들의 변명에 휘둘려 제대로 조사하지도 판단하지도 못하는 것이 후자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검사로 재직하던 때에 마작 도박으로 구속된 피의자를 수사하던 후배 여검사가 자신은 마작을 할 줄 몰라 피의자의 변명이 맞는지 판단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조언을 구하는 것을 보고 검사를 제대로 하려면 참 여러 가지를 다 해보아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법연수원 교수로 있으면서 수료여행을 갔을 때에는 일부러 여자 사법연수생들을 앉혀 놓고 마작이나 카드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검사나 판사가 자신만의 함정에 빠져 독선적인 결정이나 판단을 하는 경우 또한 법을 있는 그대로 실현되지 못하게 한다는 면에서 후자의 예이다.법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국민들의 합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법을 법대로 집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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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고집이 두명이 된 이유 지면기사
[경인일보=]옛날 옹달 우물과 옹연못이 있는 옹진골 옹당촌에 한 사람이 살았으니 성은 옹가요, 이름은 고집이었다. 재주도 있고 용모도 멀끔하였으며 재산도 남부럽지 않게 넉넉하였으나 성미가 괴팍하여 인간이 서로 화락한 것을 보지 못하고 풍년 드는 것을 싫어했으며 심술 또한 맹랑하여 매사를 고집으로 버티었다. 때는 흉년이라 마을의 친구, 친척들은 모두 곤핍하였다. 이럴 때 지각이 있는 자 같으면 곳간을 열어 더불어 복을 누리련만 이 불측한 옹가놈, 옹고집은 오히려 의당 차례진 밥을 먹으려는 이의 수저를 빼앗고 자리를 낚아채니 그 무례함이 측량할 길이 없었다. 이를 들은 한 도인이 허수아비에 숨을 불어넣어 옹고집과 똑같은 모습을 지어 옹가네 집에 보내었다. 둘이 된 옹가는 진위를 다툰다.우리 고전 '옹고집전'은 비상하게 철학적이다. 이 작품에서 진짜 옹가와 가짜 옹가가 하나는 악인이고 하나는 이를 벌하기 위한 가짜라는 사실을 잠깐 괄호치고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만약 우리와 똑같은 누군가가 있어서 진위를 판별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사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보면 전제의 진위에 좌우된다. 참인 전제에서 참인 결론이 나오고 거짓인 전제에서 거짓인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도저한 자기분열의 상황에서 거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명의 옹가는 스스로는 진위를 판별해낼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 근거이다. 두 옹가에게 첫 번째로 제시된 판단근거는 옷에 뚫린 구멍이다. 의식주(衣食住)라, 사람에게 필수적인 요소라면 먹을 것, 입을 것, 살 곳인데 그중에서도 옷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람을 판별하는 데 첫 번째로 사용하는 판단기준이다. 그러나 옷에 난 불구멍쯤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로 닥친 근거는 신체적 증거이다. 사람이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가. 눈이 큰가? 코가 오똑한가? 옹가 정수리에는 금이 있고 그 한 가운데에 흰털이 있단다. 그러나 머리카락 또한 얼마든지 나고 자라고 빠질 수 있는 것이니 무엇으로 옹가를 판별하는가? 두 옹가를 발가벗겨 놓고 비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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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에 감염된 사회 지면기사
[경인일보=]지난 1월 15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소공동에 있는 매장을 시작으로 전국의 세븐일레븐에 산뜻한 딱지가 두 장 붙었다. 딱지라니까 어렸을 때 놀이하던 딱지를 연상하는 이도 있겠지만 스티커의 다른 이름으로 딱지란 말을 쓴다. 애당초 딱지는 '놀이딱지'이기도 하지만 우표나 증지처럼 붙이는 종잇조각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티커(sticker)'에 익숙하고 '딱지'에 낯선 삶을 살고 있다. 딱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삐 풀린 말들 속에 멀어지는 우리 사이(으뜸상 유보람). 난데없는 외국어에 갈데없는 우리말글(버금상 송유경). 어렸을 때 욕 좀 했다는 말은 이제는 달라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최근 화제가 된 '빵꾸똥꾸'도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른 것 같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빵꾸똥꾸 이상의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이들이 많다. 물론 욕이 곧 악은 아니다. 말은 곧 인격이라는 말이 있지만 욕을 잘 하는(?) 이들 중에도 고상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심성이 고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나 입이 좀 걸어. 원래 그래. 친구 사이에 욕 좀 하면 안 되나? 갑자기 끼어들기에 욕 좀 했지. 하지만 욕은 욕이고 인격은 인격이야. 차원이 다른 얘기지. 여하간 나 인격자야. 나 고상해. 나 교양 있어!"욕을 참 잘(?)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이 하는 욕은 상스럽지 않고 친근하게까지 들린다. 허물없는 사이를 증명하기도 하고 끈끈한 정을 대변하기도 한다. 욕을 재미있게 해서 남을 웃기는 이들도 있다. 재주가 참으로 신통하다. 하지만 욕은 그렇게 웃기고 정겹고 즐겁고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욕을 하고 나면 속이 후련할 때도 있겠지만 가슴이 아플 때도 있다. 욕은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타인에게 깊은 상처를 준 욕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준다. 욕은 인간관계를 파괴한다. 이것이 욕의 가장 큰 폐해이다.그런데 어느 새인가 우리 사회는 욕설에 감염돼 있었다. 욕설은 남녀도 나이의 많고 적음도 직업이나 신분의 차이도 따지지 않고 시간과 장소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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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의식은 미래에 대한 책임 지면기사
[경인일보=]고등학교 다닐 때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래 되어서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 '나그네'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주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택시에 손님으로 승차하여 타고 갈 때에 운전 잘하는 기사를 만나면 택시 안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거나 택시의 진행상태에 대하여 아무런 걱정하지 않고 앉아 있기만 해도 되고, 택시 기사가 운전을 잘못하는 경우라면 가능한한 다툼을 벌이지 않고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자신이 운전하여 갈 때에는 잠을 잘 수도 없고, 가는 길도 미리 확인하여 두어야 하며, 특히 가족이나 아는 사람들을 태우고 운전할 때에는 감기는 눈을 비벼가며 조심스럽게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더구나 평소에도 자동차를 청소하고 상태를 점검하여 운전에 문제가 없도록 관리해야 한다.얼마전 일요일에 그동안 더러워진 자동차를 세차하고 오후 무렵 아파트에 돌아와 주차하려고 하는데 평소와 달리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길 바로 앞 지상 주차장이 비어 있어 기쁜 마음에 그곳에 주차를 했다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그날 저녁에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눈이 온다는 예보를 듣고 지상 주차장을 피해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는 바람에 지상주차장이 비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 자신만을 탓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현명한 선택에 감탄하였다.진정한 주인의식이란 단지 현재의 관리와 책임뿐만 아니라 앞날을 예상하고 그에 대하여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에게 적용되는 이런 부분들은 결국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우리나라를 일본에 강탈당한 시절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이 주인의식을 이야기한 것은 이런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국가의 주인으로서 국민들이 국가를 잘 지켜내고, 또 앞날을 준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던 것은 아닌가.앞날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면 결국 눈이 덮인 자동차를 보고 한숨을 내쉬면서 한동안 놓아두었다가 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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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은 도시의 주인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시민'이란 단어가 문학작품의 제목으로 쓰여 주목을 받은 것은 1949년 김경린, 박인환, 임호권, 김수영, 양병식 5인이 공동으로 낸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처음인 듯하다. 이들은 일본어를 국어로 칭하던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전통적인 한국어 시어감각에는 익숙지 못하였으나 국권 상실이나 친일, 분단에 대한 죄책감 없이 되찾은 국토, 되찾은 도시, 되찾은 언어가 주는 기쁨을 자유로이 만끽하였다. 허름하고 화려하고를 떠나 처음으로 도시의 공간을 자신들의 장소로 재편할 수 있었던 것이다.1930년대에도 이미 일군의 모더니즘 작가들이 새로운 도시 풍경을 자신들의 세계로 호명하면서 새로운 언어감각을 선보인 바 있었지만 이들은 국권상실시기, 주권이 제약되어 끝없이 지배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이들 또한 복숭아꽃, 살구꽃 핀 어느 먼 시골이 아니라 잘 정돈된 시가지, 높은 건물과 새로운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근대 도시에서 태어나, 물소리 새소리보다 전차소리, 자동차 경적소리에 친숙하고 흥미를 느끼며 성장했지만 그 도시, 그 거리에는 늘 조선인을 소외시키고 우물쭈물 경원하게 만드는 일본인들이 진짜 주인처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전시대에 책임이 있는 기성세대는 민족과 인민의 이름으로 논쟁과 분란을 겪어야만 했지만 발랄한 이 젊은이들은 공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의 첫 번째 시, 김경린의 '파장처럼'에서 전쟁조차 '시름없는 여파를 나의 뜰앞에 남기고 지나갔다'고 가볍게 넘어서면서 전시대의 것을 '낡아빠진 전통'으로 규정하고 마음껏 조소하면서 새로운 도시의 주인이 되어 함께 목청껏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물론 그들의 시가 대단히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그들은 일본어가 국어이던 시기에 학교를 다녔고 천황과 전쟁의 이념에 총동원되었으니 공부가 출중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한국어 표현은 어눌하고 시어는 생경하며 모호한 지시어와 불필요한 개념이 남발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그 시기를 윤택하게 만든 중요한 문화자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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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글이 바로 서는 2010년을 바란다! 지면기사
[경인일보=]2010년 호랑이해가 밝았다. 방기곡경의 해가 가고 강구연월의 해가 왔다. 옳고 바른 길을 두고 샛길과 굽은 길을 택했던 묵은해가 가고 평화롭고 태평한 새 세상을 맞이했다.하지만 강구연월은 아직 싹도 트지 않은 가녀린 희망일 뿐이다. 그래도 한 줌 희망과 기대로 새해를 맞이하고 '근하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덕담을 주고받는다. 수도권을 멈춰 세운 100년 만의 폭설도 '서설'이라 여기며 구두끈을 졸라맨다.새해를 맞아 다시 한 번 금연과 금주를 결심해 본다. 해가 서쪽에서 떠도 음주 운전만큼은 하지 않는다. 하루에 두 시간은 어학 공부에 투자하고 주말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식이요법과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살을 왕창 뺀다. 날마다 가계부를 쓰고 매달 일정한 금액을 저금한다. 학교에 꼭 가고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한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순종하고 친구와 다투지 않는다.국민은 정치의 안정과 경기 회복을 바란다. 일방통행도, 말로만 법치도 싫다. 쌍방향 소통과 합의의 정치, 진짜 법치를 원한다. 경제가 좋아지고 물가가 안정되길 바란다. 월급쟁이들은 월급이 오르길 바라고, 청소년들은 용돈 인상, 휴대전화 요금 인하를 바란다. 학부모는 사교육비와 대학 등록금이 내리길 바란다. 취업을 앞둔 이들은 신입사원 채용이 늘길 바라고, 결혼을 앞둔 이들은 전셋값이 내리길 바란다. 장사가 잘 되길 바라고 대출 이자가 내리길 바란다. 이 정도만 이루어져도 2010년은 살 만할 것이다.어떤 소망은 이룰 수 없는 소망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꿈꾸는 것만큼 인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없다.우리말글을 사랑하는 이들은 2010년이 우리말글 사랑 실천의 해가 되길 바란다. 정부와 공무원은 우리말글 사랑을 솔선수범한다. 정부에서 하는 일에 데이케어, 원스톱서비스, 그린푸드존 같은 영어 이름을 쓰지 않는다. 정치인이나 지식인들도 펀더멘털, 투트랙 협상, 스펙 같은 알쏭달쏭한 외국어 남발을 삼가고 알기 쉬운 우리말을 사용한다. 국민 모두가 우리말글 중심의 언어생활을 한다. 텔레비전, 라디오, 컴퓨터 같은 외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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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이벤트'의 이면 지면기사
[경인일보=]인간관계를 잘 유지시키고 그것의 가치를 더욱 깊은 것으로 발전시키는 교감의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혈육의 정이든 우정이든 연인 간의 사랑이든 자신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상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매개가 필요하다. 한 마디의 말이나 몸짓, 함께 나누는 음식, 편지, 꽃, 선물 등이 그런 매개 역할을 한다. 인간에겐 받고 싶은 욕망만큼이나 주고 싶은 욕망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우리의 내면은 더욱 풍요로워진다.이때 중요한 것은 내용과 형식의 일치이다. 내용이 마음이라면 형식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내용에 합당한 표현 형식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부족한 애정표현은 인색한 느낌 때문에 관계의 긴밀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반대로 과도한 애정 표현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나아가서는 애정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자연스러운 친밀감 형성에 방해요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계를 위한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상대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우리 시대는 어떤 교감의 방식으로 상대에게 마음을 전하는가? 여러 가지 방식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요즘 가장 성행하는 최고의 표현 방식은 '깜짝 이벤트'이다. 사람들은 수많은 기념일을 만들고 기념일마다 파티를 기획한다. 심지어는 특정 공간을 통째로 빌려 수많은 촛불로 하트를 만들고 백 송이의 장미와 와인으로 식탁을 장식해 놓음으로써 상대를 더 할 수 없는 감동에 싸이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상대에게 감동의 물결을 안겨주는 게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다 TV 드라마에서 배운 몰개성한 방법이다.요즘 사람들은 왜 기념일에 그토록 매달리는 걸까? 무언가를 기념한다는 것은 그 기념 대상의 의미를 더욱 증폭시키고 기억하겠다는 의도이다. 좋은 날, 좋은 의미를 함께 되새김으로써 우리는 '하나'가 되고 싶어 한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벤트를 준비하는 사람들. 그 순간을 영원과 바꾸고 싶은 사람들.여기에는 현대인의 다양한 심리적 상황이 함의되어 있다. 이것저것 기념할 것들을 챙기며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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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겨울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4계절 중 하나인 '봄'을 왜 '봄'이라고 부를까?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법연수원에 입소하는 연수생들을 상대로 한 첫 수업시간에 필자가 그와 같은 질문을 하곤 하였다.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봄'은 '보다'의 명사형이고, 봄에 여러 새로운 생물들을 보게 되어서 그와 같이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하는 설명을 하곤 하였다. 그러다 보면 '여름'은 '열다'의 명사형이고, '가을'은 아마도 '가다'에서 유래되고, '겨울'은 '겨우 살다'의 뜻을 가진 명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설명을 하곤 하였다.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가을의 전설'의 영어 제목이 'The legend of fall'이라는 것을 보고 오역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기억하겠지만 한 가족의 몰락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으므로 'fall'을 '가을'이 아니라 '몰락'으로 번역해야 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영화 공급사의 입장에서는 '몰락의 전설'이라는 것보다 '가을의 전설'이라는 영화 제목이 흥행에 더 도움이 될 것으로 보여서 의도적으로 오역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그렇지만 '가을'이라는 우리말의 어원이 '가다'에서 온 것이라면 틀린 것도 아니라는 생각은 그 뒤에 들었다.80년대에 대학교를 다닌 세대라면 경찰관들을 '짭새'라고 부른다는 것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경찰관들을 '짭새'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은 듯하다. 필자 또한 한참 후에야 '짭새'라는 것은 '잡다'와 사람을 뜻하는 접미어인 '쇠'의 합성어인 '잡쇠'가 그 어원이며, 사람들이 그 단어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짭새'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용하는 단어들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탄생하고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 통용되게 된다. 이런 약속을 거부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스위스 작가 페터 빅셀이 쓴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을 고등학생 시절에 읽고 사고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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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삶은 아름답다 지면기사
[경인일보=]4대 기서가 중국만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통의 고전이라는 것이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그 중 '서유기'는 유·불·선 삼교의 세계관과 상상력을 넘나드는 최고의 판타지 문학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도 '날아라 슈퍼보드' 같은 뛰어난 개작이 이루어져 근두운 대신 슈퍼보드를 타고 가는 손오공은 '보드'라는 새로운 풍물에 주목하게 했고, 뺀질거리는 태도로 높이기는 하되 말끝을 안쓰는 '~하셔' 같은 특이한 저팔계의 어법은 새로운 구어의 유형이 되었다. 원작을 넘어 창조된 말귀 못 알아듣는 사오정 캐릭터는 한때를 풍미한 유머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다. 또 '치키치키차카차카~'라는 특이한 의성어로 시작하는 이 만화영화의 주제가는 요즘도 양치질하기 싫어하는 어린이들을 달래는 노래로 쓰이기도 한다.아쉬운 것은 '서유기'가 단지 아동물로만 취급되는 통에 모험이야기라는 일차원적인 측면만 강조되고 이 작품을 관통하는 차별에 저항하는 하위 주체, 지배계급의 정치적 책략과 대결 방식에 대한 고발, 고도의 풍자정신과 화해를 만들어내는 민중적 세계관의 중요성은 종종 망각된다는 점이다. 사실 고전을 축약본으로 읽는 것은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다. 더구나 '서유기' 같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을 다루는 작품은 그 유쾌한 상상 뒤편에 대놓고는 말할 수 없어 숨겨진 복잡하고도 예민한 이야기가 첩첩이 쌓여있게 마련이고 이것을 곱씹으며 음미하는 맛이야말로 비할 데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서유기' 제10회의 '당 태종, 저승에 갔다 환생하다'라는 부분이 있다. 뜻하지 않은 저승송사에 걸려 저승으로 출두한 당 태종의 이야기다. 당 태종 이세민은 저승에서 자신 때문에 숨진 많은 귀신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당 태종을 '세민'이라 부르며 자신의 목숨을 돌려달라 원망한다. 요즘에야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지만 전통적으로 사람의 실명은 함부로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이름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부를 때만 사용했다. 높은 가문에서는 아이조차 아명을 따로 지어 불렀으며 성년이 되면 동년배에서 쓸 이름 자(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