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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거짓 왕자와 공주 지면기사
[경인일보=]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아이를 위해 열심히 동화책을 읽어준다. 아이에게 꿈과 환상을 열어주는 동화의 세계! 아이들이 책을 통해 처음 대면하는 진리가 이 세계에는 없는 혹은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환상은 유익한 것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환상은 초자연적이고 초인과론적인 법칙을 지닌다는 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이다. 인간에게 환상이 필요한 까닭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지탱하는 모든 질서와 규칙, 나아가서는 도덕적 원리가 늘 심리적 안정감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을 거대한 사회에 종속시키고 때로 자유를 억압하는 결박의 끈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사회의 구조적 압력이 강해질수록 환상에 대한 동경은 강화된다. 환상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난 미묘한 즐거움과 억압된 감정을 이완시켜 주기 때문이다. 현실의 결핍을 위안해주고 보상해주는, 혹은 초월하게 하는 모든 환상은 우리의 의식을 사로잡으며, 그 사로잡힘에 적극적으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삶의 의미 체계를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억압으로부터의 일탈을 촉진시키고 존재 전환의 힘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작용력을 갖는다. 일상의 규범과 질서를 흔들어 놓는 것이 환상의 매력이라면 이러한 매력은 현실을 비웃고 부정하며, 때로 그것을 초월하고자하는 힘을 내포한다. 환상의 가치는 삶의 고착된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환상문학 이론가 로즈마리 잭슨은 환상을 전복의 매개물로, CS루이스는 매혹적 인식의 자극제로, '반지의 제왕'의 저자 JRR 톨킨은 즐거움의 제공처로 그 효과와 가치를 설명한다.그러나 환상이 언제나 이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만은 아니다. 거짓 환상은 망상을 낳는다. 이 세계는 동화책에서 읽었던 풍요로운 환상과 신비한 모험의 세계가 내면의 긍정적 에너지로 바뀌기도 전에 동화의 순수한 세계를 다른 환상으로 대체해버린다. 현란하게 포장된 물질적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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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트라, 신비한 주문 지면기사
[경인일보=]류시화 시인을 유달리 좋아하는 필자는 류시화 시인의 시와 수필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고는 하였는데 부장검사를 마지막으로 명예퇴임식을 할 때에도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는 법이 없다'라는 시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다른 사람들에게 즐겨 이야기한 내용은 류시화 시인이 인도 등지를 여행하면서 체험한 내용을 쓴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책에 들어 있는 '세 가지 만트라(신비한 주문)'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은 삶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자주 갖게 해주었는데, 어떤 요가수행자로부터 전수받았다는 세 가지 만트라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울리고 있다. 류시화 시인이 인생의 완벽한 스승을 찾기 위해 설산 히말라야를 헤매던 중 만났다는 요기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이 세 가지 만트라를 기억한다면 그대는 다른 누구도 스승으로 섬길 필요가 없다. 그대의 가장 완벽한 스승은 그대 자신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첫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너 자신에게 정직하라. 세상 모든 사람과 타협할지라도 너 자신과 타협하지는 말라. 그러면 누구도 그대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 찾아오면 그것들 또한 머지않아 사라질 것임을 명심하라.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기억하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넌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것이다. 셋째 만트라는 이것이다. 누가 너에게 도움을 청하러 오거든 신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네가 나서서 도우라.그런데, 마음 깊이 울리는 세 가지 만트라를 음미하던 중 살며시 나타나는 의문은 첫째와 둘째 만트라를 따르면 어떻게 된다는 부연 설명이 있는 반면 셋째 만트라를 따르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론을 완전히 맺지 않고 열어둠으로써 더 많은 생각을 키워내려고 하는 것이 류시화 시인의 의도라고 혼자 생각하고는 여러 날을 되씹어 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셋째 만트라에 따르면 결국 '이 땅에 신이 의도하는 세상이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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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장을 맞드는 지혜 지면기사
[경인일보=]'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종이를 맞들다니 잘못하면 찢어지지 않을까. 어려서 본 어떤 코미디에서는 백지장을 맞들다가 찢어먹고는 '백지장은 맞들면 찢어진다!'로 패러디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백지장을 맞들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옛 속담은 일상 생활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분명히 백지장을 맞들어야 할 일이 있었기에 그런 속담이 생겨났던 것이다.필자가 자란 집은 유리창도 몇 있었지만 방문과 샛문과 곁창문 등은 창호지를 바른 문이었다. 여름 지나 찬바람이 나기 시작할 무렵이면 볕 좋은 휴일에 문들을 모두 떼어 창호지를 새로 바르곤 했다. 문창호 새로 하는 날은 잔칫날이라도 되는 듯, 온 식구들이 모여서 북적댔다. 방문이며 창문을 모두 떼어 안마당에 내놓은 뒤, 물을 끼얹고 솔로 문질러 가며 박박 닦아낸다. 웬만한 종이들은 북북 뜯어내면 되지만 문살에 달라붙은 종이들을 말끔히 떼어내지 않으면 새로 종이를 붙였을 때 얼룩이 지고 눈에 거슬리기 때문이다.종이를 북북 뜯어내는 일은 어린 사람들이 신나서 해치우는 일이었다. 이날만은 문에 구멍을 내도 꾸중도 안 들으니 뽕뽕 소리내며 구멍을 낸 다음 손을 넣어 종이를 잡고 주욱 찢어내는 맛도 경쾌하였다. 그러나 문살에 달라붙은 종이를 긁어내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다. 요즘처럼 솔의 품질이 좋기나 했던가, 모지라진 수세미, 칫솔까지 동원하여 문살을 깨끗이 닦는다. 그리고 한쪽에 세워 잠깐 말리면서 마당을 아주 깨끗이 치우고 물기도 말린다. 새로 풀칠하는 종이가 젖거나 더러워지면 안되니까.잠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면서 마당과 문살을 말리고 나면 새로 창호지를 바를 차례이다. 우선 신문지 따위를 바닥에 넓게 펴고 그 위에 창호지를 펼친다. 멍울이 없도록 깔끔하게 쑨 풀을 고르게 창호지 전체에 펴 바른다. 풀에 젖은 종이를 들어 문살에 붙이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도 해보려고 문살에 풀을 먼저 칠하고 종이를 붙여봤는데 실패했고 어른들에게 꾸중만 들었다. 문살 옆으로 풀이 비어져 나와서 얼룩이 생기고 그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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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남용하는 사회 지면기사
[경인일보=]지인이 전자우편으로 발송하는 '우리말 편지'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지인의 조카가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 맥주를 마시러 갔는데 가게 이름이 'beerlaon'이었답니다. 한글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영어 알파벳으로만 적혀 있었답니다. 'laon'이란 말이 너무 생소해서 외국인 친구에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 친구가 먼저 영어에는 'laon'이란 낱말이 없다면서 무슨 뜻이냐고 묻더랍니다. 결국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놀랍게도 laon은 '즐기다'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이라는 거였습니다. 기절초풍까지는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라온'이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왜 영어 알파벳으로 적어 놓았는지, 왜 우리나라 사람도 못 알아보고 외국인도 못 알아보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그 조카의 주장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우리 한글로 적자는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다음날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정말로 '라온'이 '즐기다'라는 뜻인가요? 제 딸 이름이 '나온'인데,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순 한국말이지요. '즐거운, 기쁜'이란 뜻이 있습니다. '라온'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네요. 답변을 기다릴게요.'우리말 편지' 애독자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라온'이란 말은 틀리고 '나온'이 맞는 말인가? 사전에서 '나온'을 찾아보았습니다. 옛말 '납다'의 활용형이고, 뜻은 '즐거운'이었습니다. '납다'를 찾아보니 형용사로 '즐겁다'는 말이었습니다. "엇디 납디 아니료"라는 예문까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온'도 있었습니다. 역시 옛말로 '즐거운'이라는 풀이가 붙어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라온과 나온 둘 다 맞는 말이고, '비어라온'은 '즐거운 맥주' 아니면 '맥주를 즐기자' 정도가 되겠지요.뜬금없이 'beerlaon'이란 표기로 인해 제법 긴 얘기가 돼버렸습니다만, 요즘 한글보다 영어 알파벳을 더 많이 쓰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수년 전 대학의 어느 영어 강사께서 1980년대 혜화동 로터리에 'yield'란 교통 표지판이 있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저도 그런 걸 본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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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 온기가 사라지고 있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인간의 거주 공간 가운데 가장 신성한 곳은 서재나 침실이 아니라 부엌이다. 부엌은 기원전의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가 말했던 물질의 기본 원소가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로 결합하는 연금술의 공간이다. 음식의 다양한 재료들은 물, 불, 공기와 더불어 반죽되고 끓여지고 발효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형태와 맛으로 재탄생된다. 흙에서 자란 것과 물에서 자란 것이 서로 만나고, 쓰고 맵고 짜고 시고 단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기묘한 맛으로 변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질적인 것들이 순식간에 조화를 이루는 부엌은 인간이 거주하는 곳 가운데 가장 독특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이질적인 재료들을 서로 합쳐 조화로운 음식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부엌에 들어선 사람은 풍부한 상상력과 감각과 정성을 가지고 재료를 다루어야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 특히 정성이 많이 들어간 음식일수록 그 맛이 깊다. 어머니의 손맛이 맛 중의 맛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정성 때문이다. 거기에는 음식을 나누어 먹을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과 건강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부엌은 가족의 몸과 마음을 지켜내는 약제실이다.사람들이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은 아마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눌 때일 것이다. 음식을 나누는 순간에는 즐거움과 휴식과 정감이 함께 있다. 싸움을 한 사람들은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아니 함께 밥을 먹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수저를 놀리는 손길이 어색해지고 마주한 얼굴을 보는 것이 곤혹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천하의 산해진미도 모래를 씹는 듯 변질되고 만다. 관계가 어그러지면 밥상도 치워야 하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음식은 관계의 회로를 돈독히 하는 매개이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맛의 쾌락을 함께 나누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요리를 하는 사람은 요리 하기 전에 누구와 이것을 먹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감안하면서 요리에 넣을 것과 뺄 것을 정한다. 그 마음이 훌륭한 밥상을 완성하는 것이다.그런데 요즘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