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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식 크리스마스 풍경 지면기사
[경인일보=]"교수님은 크리스마스 선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어떤 것이었나요?" 연구실을 찾아온 1학년 학생들이 내게 물었다. 나는 이런 사소한 질문에 오히려 당혹하곤 한다. 이런저런 선물을 받기도 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른이 되면서 어느 순간 크리스마스와 관련한 즐거운 추억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머뭇거리다 "종합선물세트"라고 답한다. 사십 번이 넘는 크리스마스를 보내면서 과자와 사탕이 가득 든 종합선물세트보다 더 값비싼 선물을 받기도 했었는데 내게 크리스마스 선물로는 종합선물세트 이상을 능가한 것이 없었던 듯싶다.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오빠와 언니, 나는 제사 때나 다락에서 꺼내는 커다란 교자상을 펼쳐놓고 친구들에게 보낼 카드를 만들었다. 당시 우리들 대부분은 카드 살 돈이 없었다. 물감과 색연필, 물통, 붓, 도화지, 풀, 가위 등을 어질러 놓고 각자 무엇을 그릴지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언제나 제일 먼저 붓을 잡는 것은 오빠였다. 오빠는 쓱쓱 하얀 눈사람과 나무를 그린다. 그 앞을 루돌프가 끄는 설매를 타고 산타 할아버지가 웃으며 지나간다. 그러면 언니와 나도 눈사람과 나무를 따라 그린다. 한 번은 검은 도화지 위에 눈사람과 나무를 그리던 오빠가 칫솔에 하얀 물감을 찍더니 엄지손톱으로 긁어 하얀 눈가루를 도화지에 뿌리기도 했었다. 그때 검은 도화지에 뿌려지던 눈가루는 정말 놀라운 환상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엉성하기 그지없는 그림들이지만 나는 카드가 완성될 때마다 행복한 기분이 들곤 했다. 각자 대여섯 장의 카드가 완성되면 우린 조용히 그 안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사실 침묵 속에서 우리가 비밀스럽게 써 내려간 글줄은 '즐거운 성탄을! 내년에도 변함없는 우정을 간직하자!'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친구를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만든 카드에 이 같은 글을 쓸 때부터 난 내가 받을 친구의 카드를 떠올리며 가슴 벅차했다.드디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우린 저녁 내내 아버지를 기다렸다. 일 년에 단 한번만 받을 수 있는 종합선물 상자에 올해는 무엇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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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도 입증해야 옳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사법연수원 교수로 있을 때 사법 연수생들이 결혼 배우자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심지어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 필자에게 주례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배우자로 선택한 사람들이 아름답고 훌륭하여 어디에서 이렇게 좋은 배우자를 찾아서 데리고 오나 하는 생각도 하곤 하였는데 그들에게 한결같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중세시대 유럽의 외눈박이 성주가 자신의 멋진 초상화를 후세에 남기고 싶어 하였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초상화를 그려주면 엄청난 포상을 주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화가들을 초청하였다.처음 화가는 성주의 외눈박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그렸지만 성주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주는 그 초상화가 자신의 모습이기는 하였지만 항상 콤플렉스로 생각하고 있는 외눈박이 모습이 싫었던 것이었다. 다음 화가는 그 소식을 듣고 성주가 애꾸눈임에도 정상적인 눈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초상화를 그렸지만 성주는 이 또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정상적인 눈을 가진 얼굴은 꿈에도 그리던 모습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어떤 화가가 초상화를 그렸는데 성주가 아주 흡족하여 많은 포상을 내렸다고 한다.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서 마지막 화가가 어떻게 성주의 초상화를 그렸는지 묻곤 하였다. 대부분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머뭇거리기도 하였지만 몇몇은 그 화가가 성주의 정상적인 눈이 있는 옆모습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라는 정답을 말하곤 하였다.외눈박이 성주로서는 정상적인 눈만 있는 옆모습이 그려진 초상화가 자신의 모습임에 틀림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결점인 애꾸눈이 가려져 있어 드러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워 하였다고 추가 설명하곤 하였다. 결혼이라는 중요한 선택을 한 사법연수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는 서로에게 그와 같은 마음으로 결혼생활을 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서였다.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사람은 저마다 결점을 마음속에 품고 있고, 결혼 전에는 알지 못하였지만 결혼하여 매일매일 같이 살다보면 그 결점이 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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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를 닮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지면기사
[경인일보=]백형이 가을걷이도 무사히 끝내고 김장까지 담갔다고 와서 쌀이며 김치며 가져가라 하신다. 근래는 생활비를 줄입네, 반찬값을 아낍네, 뻔뻔하게 맨손, 맨입으로 생쥐 풀 방구리 드나들 듯하면서 김치를 달라, 쌀을 퍼간다 부산했던 날도둑 동생을 또 먼저 챙기신다. 작지 않은 살림 규모에 수다한 가솔을 거느린 나의 백형은 올해도 어김없이 엄청난 김장을 담그셨다. 근 200포기에 달하는 김장이라면 요즘 보통 가정집에서는 드문 양이지만 형제며 자식에게 나눠주고 명절이며 제사며 집안대소사를 준비해야 하는 백형께 특별한 건 아니다. 올해는 여름 폭우에, 잦은 가을비에 쌀 수확이 한참 줄었는데 그나마 정미소에서 쌀을 도둑 맞기까지 하셨다고 한다. 어떤 놈이 집어갔든 쌀을 먹기는 먹겠지 하고 쓸쓸하게 웃으시는 모습이 들녘에 남은 잔국(殘菊)을 닮으셨다.조선 후기 뛰어난 학자이면서 또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다산 정약용은 국화의 아름다움을 다섯가지로 꼽았다. 늦게 피는 것, 오래 견디는 것, 향기로운 것,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깨끗하면서도 싸늘하지 않은 것. 이 네 가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국화의 덕이고 아름다움이었고 여기에 다산이 더한 것이 '국화 그림자(菊影)'였다.먼저 산만하고 들쑥날쑥한 물건을 모두 치워 벽을 깨끗하게 한다. 벽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국화를 세우고 알맞은 곳에 촛불을 놓아서 국화의 그림자가 벽에 비치게 한다. 가까운 그림자는 꽃과 잎이 서로 어울리고 가지와 곁가지가 질서있게 늘어서 마치 묵화를 펼쳐놓은 것 같고 그 다음 그림자는 너울대고 어른거리며 춤추듯 하늘거려 달이 떠오를 때, 동쪽 나뭇가지가 서쪽 담장에 비춘 것 같으며 멀리 있는 그림자는 흐릿하여 엷은 구름이나 노을 같고 없어지거나 소용돌이치는 그림자는 밀려드는 파도 같다고 하였다.다산 흉내를 내보겠다고 촛불 앞에 국화를 둔 적이 있다. 벽을 깨끗이 치우지 못해 다산의 묘사에는 견줄 수 없었지만 너울대는 촛불, 불꽃심, 속불꽃, 겉불꽃 겹겹의 밝기와 온도를 가진 촛불, 국화는 촛불 앞에서 정말로 묵화 같기도 하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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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래어에 대한 오해! 지면기사
[경인일보=]한글 특강을 다니다 보면 외래어를 남용하지 말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하게 된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공감을 표시하지만, 그래도 "오늘 얘기의 포커스가 아주 좋았다"라든가 "저희가 다음에 다시 콜 해도 또 와 주시겠죠?"하는 식의 얘기가 곧잘 튀어나온다. 언어도 습관이다.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렵다. 그래서 평소 좋은 언어 습관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그런데 더러는 이렇게 묻는 분들도 있다. 외래어가 본디 외국어였지만 이미 우리말이 된 것이니 써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첫째는 남용의 의미이다. 남용은 '일정한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 함부로 씀'을 뜻한다. 그러므로 함부로 쓰지 않고 적절하게 쓰는 것은 '남용'이라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외래어라 해도 아주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컴퓨터, 디지털 카메라 같은 말은 대체할 적당한 말이 없기 때문에 쓰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이런 말은 외래어를 남용하지 말자는 주장의 대상조차 되기 어렵다.둘째는 외래어를 우리말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외래어를 "외국에서 들어온 말로 국어처럼 쓰이는 단어를 일컫는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처럼'에 주의해 보자. '처럼'이란 모양이 서로 비슷하거나 같음을 나타내는 격조사이다. 그렇다면 '국어처럼'이란 국어와 비슷하거나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풀이 또한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사고로 가족을 잃은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라고 해도 그는 짐승이 아니다. "철수는 도깨비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라고 해도 '철수=도깨비'는 아니다. 유리알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인다고 해서 다이아몬드는 아니다. 아무리 반짝여도 다이아몬드가 아닌 이상 유리알을 100만원이나 1천만원씩 주고 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원어민처럼 영어가 유창했다"고 해도 결코 원어민은 아니다. 비슷할 뿐이다.그런데 '처럼'이란 말 풀이에 왜 '같다'는 뜻이 들어가 있을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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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여행 지면기사
[경인일보=]정현종 시인은 '여행을 기리는 노래'에서 "벌써 오르지 않어?/이 다람쥐 쳇바퀴/이 죽어가는 되풀이를/끊으면서,/다른 시간이/열리면서,/무지개가/걸리면서,/거기가/낡은 시간의 새 데이트 아냐?/장차 갈 길들에서 피어날/고달픈 신명들의 원천 아니야?"라고 노래한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의 죽은 시간에 새로운 시간의 살을 덧대는 것이 여행이다. 그것은 고달프지만 신명나는 의도적 선택 행위이다. 무엇인가를 얻어내야 한다는 목적 지향적 행위와 뚜렷한 차이를 갖는 것이 여행의 가치이며 매력이다. 생산에 대한 욕망도 결과에 대한 부담도 없이 자기 자신을 방목할 수 있는 이 자유로운 시간은 얼마나 소중한가!여행자는 크게 두 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지금 여기'가 싫어서 떠나는 자와 다른 하나는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 때문에 떠나는 자이다. 이곳의 혐오와 피로 때문에 어디론가 떠나는 자는 낯선 곳에서의 휴식과 평화를 기대할 것이다.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 때문에 이곳을 떠나는 자는 이색적 체험을 즐기며 권태로운 삶을 쇄신할 것이다. 어느 부류에 속하든 모든 여행자들은 다시 원래의 삶으로 복귀한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변화된 자아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본질적으로 낭비가 아니라 풍요이다.이 같은 여행에도 각자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인도여행을 하며 한국의 대학생들과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다. 그들의 여행방식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돌아본 것을 자랑거리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초인적 힘을 발휘하여 보름 만에 델리와 캘커타와 뭄바이에 깃발을 꽂는다.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을 보기 위해 이틀을 달려와서는 하루를 머물다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다. 그것은 영웅담처럼 여행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예찬된다.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그렇게 스치듯 지나치며 무엇을 보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같은 방식에는 질보다 양을 내세우는 우리의 세태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무한경쟁사회의 정복욕이 그들에게도 내면화된 것은 아닐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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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도 실천하기 나름 지면기사
[경인일보=]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 삶의 질이 높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되는 것일까?미국 사회학자들은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실험을 해보았다고 한다. 즉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각각의 집단으로 구성한 다음 로또복권을 구입하게하여 그 당첨 확률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실험이었다.결과는 어떠하였을까? 필자가 이런 질문을 사석에서 몇 번 하였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집단의 당첨 확률이 높았을 것이라고 답하곤 하였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로또복권의 당첨 확률이 높아질 리가 없다. 당연히 당첨 확률은 양 집단이 똑같았다.미국의 사회학자들은 그럼에도 긍정적인 사람의 삶의 질이 더 높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 원인을 더 추적해보았더니 로또복권을 구입하는 과정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즉 긍정적인 사람은 로또복권을 구입하러 가서도 같이 복권을 구입하는 사람들 또는 복권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 이야기를 하는 반면 부정적인 사람은 복권만 구입하고는 바로 돌아오는 것을 발견하고 로또복권 당첨 확률은 동일하지만 복권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이어지는 인간관계가 결국 그 사람의 질을 변화시킨다고 결론지었다는 것이다.어느 저녁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을 때 같이 있던 선배 한분이 갑자기 미국 미식축구 결승전에 우승한 팀의 모자가 어떻게 경기가 끝난 후에 바로 판매되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던 적이 있다.미식축구 결승전이 열리면 모자를 공급하기로 계약되어 있는 업체에서 양쪽 팀의 모자를 모두 제작한 후 우승팀이 확정되면 다른 팀의 모자는 모두 소각하고 우승팀의 모자만을 판매한다고 한다. 대신 우승팀의 모자는 보통 모자의 약 3배값을 받기 때문에 패한 팀의 모자를 모두 소각하여도 손해를 보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본론이 아니었다. 그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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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에게 무슨일이 생겼는지 알고있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어려서 읽으며 자란 책으로 '한국의 위인'이라는 12권짜리 전집이 있었다.한 권에 열명 정도 위인의 행적을 시대별로 기술한 것인데 요새 같으면 한 명에 한 권은 됨직한 수준으로 꽤 문학적이면서도 균형감각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 책이다.경지사라는 출판사에서 1972년에 발간한 것인데 그해에는 우수도서로 지정되기도 했었고 사학자 이기백, 아동문학가 이원수, 미술사가 최순우 같은 분들이 서문을 쓰고 신지식, 신현득, 장욱순, 이종기 같은 분들이 필진으로 참여하였다.진실과 정의가 단일한 길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는 이 위인들의 역사는 읽을 것이 많지 않았던 어린 시절, 줄잡아 수십번은 읽었고 나에게는 친한 친구이며 귀한 선생이었다.예를 들면 청나라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 항복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싸움을 해야한다는 주전론자 김상헌과 화친을 해야한다는 주화론자 최명길은 모두 충신이었다.쇄국정책으로 변화를 거부한 대원군이나 개화를 위해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이나 모두 충신이었다.이기일원론인지 이기이원론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퇴계와 이율곡은 모두 뛰어난 학자였고 김부식은 정지상을 질투하여 부당하게 정지상을 처형했지만 이들 모두 대단한 문장가였고 시인이었다.묘청과 허균은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였지만 이들의 반란에는 명분과 대의가 있었고 이들의 실패는 안타깝고 절망적이었다. 요컨대 이들 또한 위대했다. 그러나 별이 떨어지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고 이상한 꿈을 꾸고 집안에 향기가 감돌고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이 노한 듯 벼락이 치고 위인들의 탄생과 죽음은 늘 뭔가 신이한 현상을 동반하였다. 평범한 중에도 특히 평범했던 나에게 '위인'의 세계는 뭔가 초월적이고 특별한, 인간 세계 너머에 있는 것이었다. 신이하고 비범한 영웅들, 위인들의 세계는 교육적이기보다는 문학적, 설화적이었다고 해도 좋겠다.이들의 세계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사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이었다. 어떤 위인이 사망하게 되었을 때의 날씨를 기술한 짧은 구절이 있었다. 한 위대한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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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언어는 쉬워야 한다! 지면기사
[경인일보=]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소득 수준에 따라 부동산대출액을 제한하는 DTI, 즉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은행권에서 제2금융권으로 확대 시행된다고 한다. 잘 들어보니 소득을 기준으로 부동산을 구입할 때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을 제한한다는 얘기인 것 같다. 문제는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하면 되는데 DTI라는 말을 꼭 앞에 갖다 붙인다는 점이다. LTV는 만기 10년 이하 또는 만기 10년 초과ㆍ담보가액 6억원 초과 아파트에 대해 현행 60%이내인 LTV를 50%이내로 강화한단다. 역시 문제는 LTV이다. LTV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해줄 때 담보물의 가격에 대비하여 인정해주는 금액의 비율을 말한다. 즉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다. 이것을 50%로 강화한다는 것은 앞으로는 돈을 덜 빌려주겠다는 얘기이다. 글쓴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총부채상환비율 규제 확대나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을 강화하는 것이 옳다든가 그르다든가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주장할 것도 없다. 문제는 뉴스를 전하는 기자의 보도 태도이다. DTI라고 먼저 말하고 나서 즉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확대된다고 말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DTI로 운을 뗄 필요 없이 그냥 총부채상환비율 규제가 확대된다고 하면 되고, LTV를 언급할 것 없이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라고 하면 된다. 총부채상환비율과 주택담보대출인정비율이라는 말을 줄여 쓰고 싶은 심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라면 '총상비'라든가 '대출인비' 하는 식으로 약어를 만들어 써야 한다. 그런데 이 두 말은 약어를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 '총상비', '대출인비'라고 했을 때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DTI와 LTV를 쓰는 것일까? 하지만 DTI와 LTV는 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DTI'라고 하고 다시 '즉 총부채상환비율'이라고 말하는 식의 보도 태도는 말하는 시간을 절약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불필요한 외래어 남발은 우리말의 순수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점점 어렵게 만든다. 다소 복잡하고 장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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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곳에 관한 단상 지면기사
[경인일보=]내가 도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초등학교 운동장이다. 저녁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쯤 되면 나는 종종 그곳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보곤 한다. 꽃밭도 나무도 교실도 다 운동장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다. 그 위로 운동장만한 밤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다. 이 텅 빈 공간이 울긋불긋한 꽃밭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다.공터가 사라진 지 오래다. 도시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공원도 너무 많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꽃밭과 분수, 놀이기구, 별로 감동스럽지 않은 조각상들. 공공의 장소엔 언제나 볼거리를 늘어놓아야 한다는 발상일 것이다. 지난 봄 구청에서 동네에 있는 조그마한 놀이터를 새로 정비한 적이 있다. 이것저것 기구들을 들여놓고 나무도 다시 심어 놓았는데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것을 설치하다보니 정작 아이들이 뛰어다닐 공간은 더 작아져버렸다.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지금은 미끄럼틀 아래 모여 쪼그리고 앉아 논다.없는 것이 없는 서울. 채우고 교체하고 다시 설치하고 꾸미기를 반복하면서 대부분의 공간은 늘 무언가로 가득하다. 조용한 카페조차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곳이 없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더러는 음악을 틀어놓지 않은 카페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빈 공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 도시의 생리이기도 하지만 뭐든 가득 채운다고 해서 반드시 풍요로운 것은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갖는 미덕이 있다. 우리의 감각을 유혹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은 마음을 향하게 된다. '사색'하는 인간의 시간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사색의 시간은 적막과 고요를 요구한다.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라면 소란 속에서 제대로 생각에 몰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일주일에 하루 혼자 평일 산행을 감행하곤 하는데 그것은 빈 길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말(言語)을 버리고 싶은 욕구에서이다. 나는 등정주의자도 아니고 무심을 즐기는 산책주의자도 아니다. 내가 하루 종일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리며 하는 것은 무수한 잡생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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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이 연금술이다 지면기사
[경인일보=]안양 평촌에서 서울 태릉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시간만 1시간이 걸렸고, 걷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편도 1시간30분이나 걸리면서 출근 또는 퇴근을 하였다.처음에는 태릉에 있는 직장으로 발령낸 사람들을 원망하기도 하였지만 곧 왕복 2시간이라는 독서 시간을 확보한 것이라고 마음먹고 2년6개월 동안 수많은 책을 읽었고, 그 때 읽었던 책들이 지금의 내 생각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 책들 중에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처음 읽을 때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스페인의 평범한 양치기 청년 산티아고가 어떤 노인의 제안에 따라 이집트 피라미드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으러 갔다가 결국 보물은 고향무화과 나무 밑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온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이 '연금술사'라는 제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렇게만 내 머리 속에 담아져 있던 중 '연금술사'라는 제목을 단 이유를 깨닫는 계기가 있었다. 사법연수원에 근무할 때 사법연수생들과 함께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는데 그 일정 중에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하게 되었다. 평소 책과 연습기록 속에만 파묻혀 있었는지 여자 연수생들 중 몇몇이 백록담 정상을 3㎞ 정도 앞두고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좌절하는 여자 연수생들을 설득하는 말을 찾던 중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기서 좌절하면 다시는 백록담을 구경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음에 또 오더라도 이쯤에서 또 주저앉아 버리지 않겠느냐. 정말 더 이상의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한번 더 힘을 내어서 앞으로 나가려는 노력이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연금술이다."그러면서 여자연수생들을 뒤에서 재촉하여 결국 모두 백록담에 올라갔고 그때 여자연수생들은 역시 올라오길 잘했다고 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건네었다. 산티아고가 이집트 피라미드에 가서 사막 한가운데 땅을 파고 한참을 내려갔으나 보물이 나오지 않아 포기하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지금 네가 쓰러져 있는 바로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