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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호근 칼럼] 층간소음

    [전호근 칼럼] 층간소음 지면기사

    한달전쯤부터 밤마다 정체불명 소음 가족들도 같은 소리에 불안하다고 아내, 소음의 정체 알아낸거 같다며 몸 불편한분 보행기 미는 소리 같아 이웃집 소리는 살아있다는 신호다 우르렁 우르렁… 쿵! 한 달 전쯤부터 내가 사는 아파트 위층 어느 집엔가에서 밤마다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음이다. 처음에는 먼 데서 울리는 천둥소리처럼 들렸는데 맑은 날에 그럴 리는 없기에 무슨 소린가 싶어 귀 기울여 들어보면 무거운 물건을 끌고 가다가 내려놓는 소리 같기도 하고 드릴로 벽에 구멍을 뚫거나 못질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물건을

  • [전호근 칼럼] 개소리에 대하여

    [전호근 칼럼] 개소리에 대하여 지면기사

    메타윤리학 업적 남긴 프랭크퍼트 강제된 악행도 도덕적 책임은 중요 내란사태 둘러싼 한국 사회 난장판 개소리는 거짓말과는 전혀 다르게 진실이 밝혀져도 계속돼 훨씬 위험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갑자기 유명해진 미국의 철학자가 있다. 바로 메타윤리학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해리 프랭크퍼트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교수다. 일찍이 그는 악행에 대한 강제나 처벌과 상관없이 개인의 도덕적 책임은 여전히 중요하다는 통찰을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된 상황이라면 범죄를 저지른

  • [전호근 칼럼] 과거는 어떻게 현재를 돕는가

    [전호근 칼럼] 과거는 어떻게 현재를 돕는가 지면기사

    계엄 이후 새해까지 시간 더디 흘러 남태령대첩·은박담요 두른 우주전사 세상 온갖 빛이 가득했던 이 겨울은 광장에 선 사람들의 연대일뿐 아니라 생명의 연대가 피어난 계절이었다고 지난해 12월3일 밤, 불법 계엄으로 시작된 내란 사태 이후 새해를 맞이하기까지 대한민국의 시간은 참으로 더디 흘렀다.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불법 계엄을 선포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가결, 직무 정지된 대통령 체포를 촉구하거나 반대하는 수십 차례의 집회와 시위, 새해를 사흘 앞두고 일어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 [전호근 칼럼] 소년이 온다

    [전호근 칼럼] 소년이 온다 지면기사

    계엄선포에 평화로운 일상 산산조각 최고권력자의 어이없는 불장난 분노 45년만 반복된 비극, 희극으로 재현 한강 ‘소년이 온다’ 기시감 어른거려 올겨울, 내 안의 소년도 광장에 설 것 ‘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나와주십시오.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함께 나와서 싸워주십시오. 그 목소리가 멀어진 지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군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리를 그녀는 처음 들었다. 박자를 맞춘 군홧발 소리, 보도가 갈라지고 벽이 무너질 것 같은 장갑차 소리, 그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 [전호근 칼럼] 선한 의지의 가치

    [전호근 칼럼] 선한 의지의 가치 지면기사

    근대 윤리학 서막 연 임마누엘 칸트 선한 의지,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해인류 평화 기원한 그의 철학과 달리 무력함 증언하듯 지구촌 곳곳에 전란 그럼에도 '선한 의지' 가치 줄지 않아 1724년 4월22일, 프로이센의 항구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살아서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죽어서도 그곳에 묻혔다. 그는 평생 책과 논문을 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는 혼란을 종식시킨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새로운 것을 발명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약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그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때 도시 전체가 조종을 울렸다. 독자들이 짐작하듯 그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이 세상 어디에서든 아무 제한 없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다.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만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하다. 비록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선한 의지만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자신 안에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보석처럼 빛난다. 유익함이나 무익함은 선한 의지의 가치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근대 윤리학의 서막을 알리는 이 문장은 칸트가 정언명령에 앞서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질인 선한 의지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밝히는 대목이다. 그는 '도덕형이상학 서설'에서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종교적 신앙이나 공동체의 관습 등 기존의 권위가 모두 무너져 가던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 개인의 덕성이나 경향성에 의존하지 않고 누구나 따르기만 하면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법칙이 무엇일지 고민한 끝에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률을 창안했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행위에 앞서 세 가지 단계의 판단을 거친다. 첫째,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

  • [전호근 칼럼] 질문과 오지랖

    [전호근 칼럼] 질문과 오지랖 지면기사

    질문 허용않는 韓 교육 문제라 여겨그때부터 모든 강의 질문·토론 진행그러던 때 뜻하지 않던 '도발' 만나학생 의문 아닌, 내 의문 해결 급급경청했어야… '오지랖' 후회로 남아대학에서 교양을 가르치는 나는 모든 강의를 질문과 토론으로 진행한다. 계기가 있다. 언젠가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진 뒤 기자 회견을 할 때,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기자들에게 질문을 요청했지만, 단 한 명의 기자도 질문하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 있고서부터다. 질문과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교육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듣고만 있지 말고 매순간 질문을 던지고 이의를 제기하라고 촉구했다.학생들에게 좋은 질문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말이든 글이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훈련이 교육 과정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쉽지 않았다. 문제는 학생뿐 아니라 선생인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어느 학기였던가 나는 학생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질문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나는 알지 못합니다(I don't know)'로 시작해서 '신만이 알 것입니다.(God only know)'로 끝나는 법정 진술이다. 신탁에 의해 그리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지목된 이가 "나는 모른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말로 법정 진술을 끝낸 것이다. 마침내 그가 독배를 마시는 순간 모든 그리스인들은 바보가 되고 말았다.대부분의 학생들은 소크라테스의 법정 연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이야기했지만, 한 학생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소크라테스가 비겁해 보인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도발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 학생에게 근거가 무엇이냐고, '변명' 중 어느 대목에 비겁한 구석이 보이냐고 물었다. 학생은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의심하려면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다음 강의를 마무리했다. 다음 시간에 그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소크라테스였다면

  • [전호근 칼럼] 위대한 긍정

    [전호근 칼럼] 위대한 긍정 지면기사

    인간은 누군가 도울때 더 큰힘 발휘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게 아닌것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장난 에어컨시원하게 해주는 일 즐겁다는 기사그 어떤 더위도 그를 이기지 못할 것성공을 바라는 사람이 가장 자주 듣거나 하게 되는 말 중 하나가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는 조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처럼 '하면 된다'는 식의 긍정 이데올로기를 무척 싫어한다. 알고 보면 소수의 승자들만 차지하는 경쟁의 결과물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일은 일종의 기만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긍정하는 심리 자체에 알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만은 긍정한다. 긍정의 방향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 있을 때 더욱 그렇다.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은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긍정 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마틴 셀리그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자신이 펴낸 책 '번성하라'에서 어떤 동료 교수의 소년 시절 추억담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소년이 무슨 일인가로 잔뜩 기분을 상하고 풀이 죽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면 엄마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얘야, 너 오늘 영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알지? 얼른 나가서 누구든 다른 사람을 좀 도와줘 보렴." 엄마의 그런 기분 전환법을 들으며 자란 소년은 지금 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다. 남을 도우면 내가 낫는다는 것을 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치유법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학문적'으로 풀어보기 위해 그 교수는 엄마가 일러주곤 하던 그 치유법의 효과 유무를 엄밀한 과학적 실험에 붙여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의 방식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이 일화는 한 어머니의 소박하지만 비범한 지혜가 긍정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누군가를 도울 때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 일이 실은 자신을 돕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

  • [전호근 칼럼] 세계인 송상용 선생을 기리며

    [전호근 칼럼] 세계인 송상용 선생을 기리며 지면기사

    국내 1세대 과학사가, 지난달 타계엄혹했던 시절 후학들 방패가 돼줘과학에 기반 않는 삶은 공허 강조생명윤리학회 창립, 복제기술 경종깊고 귀한 품 가시고나서 더 선연지난 6월6일 소송(小松) 송상용(宋相庸) 선생께서 타계하셨다. 선생은 철학자이자 과학자, 사학자로 한결같이 진실과 정의의 길을 걸어오신 분이었다. 선생은 우리나라 1세대 과학사가로 수많은 후학을 길러내셨다. 1960년 한국과학사학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20년 넘게 간사로 일하면서 학회의 초석을 다졌고, 전 세계의 과학자, 과학사가를 초빙하여 학회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또 1989년에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공동대표로 참여하며 엄혹했던 시절 후학들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시기도 했다. 한편으로 선생은 성균관대 재직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하다 해직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런 일을 훈장처럼 내세우지 않으셨다.선생은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계신 분이었다. 중학생때 6·25전쟁이 나서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석달을 살아본 이야기라든지 1·4 후퇴 때 걸어서 부산으로 피난하다가 길이 막혀 유성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땅을 사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던 이야기처럼 선생의 개인사도 재미있었지만, 저명한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을 만나 감격에 겨워 말이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라든가 영국에서 알고 지내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을 서울 인사동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이야기라든가 선생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나는 정규 교육과정에서 선생께 배운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일로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는 러셀의 말도 선생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또 올해는 한자로 '내년(來年)'인데 왜 이해를 올해라고 하는지는 물어서 알았다. 선생은 "올해의 올은 '오다'는 뜻이 아니라 '이르다'는 뜻이다. 올벼의 올이 그런 것처럼"이라고 가르쳐주셨다.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묘소를 먼저 보고, 나중에 트리어의 생가를 방문하는 식으로 마르크스의 삶을 역순으로 만난 경험이라든지,

  • [전호근 칼럼] 유자입정(孺子入井)

    [전호근 칼럼] 유자입정(孺子入井) 지면기사

    타인 고통이 곧 나의 고통 '측은지심'사람 살리는 마음으로 이어지는것'무조건' 생명구한 김은우 학생 찬사그런데 세상엔 손에 휴대폰 들고서 있기만 하는 '험한것'들도 있다플라톤은 인간을 가리켜 '털 없는 두 발 짐승'이라고 규정했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발로 걷는 척추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매사에 스승의 견해에 반대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찌하여 정작 인간에 대해서만은 견해를 달리하지 않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두 철학자 모두 두 발로 걷는다는 생물학적 특징만으로 인간을 정의했다는 데서 인간에 대한 뒤틀린 시선이 보인다.가령 누가 나더러 인간을 정의해보라고 주문한다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냉큼 달려가 붙잡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그것을 맹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배웠다. 이를테면 언젠가 이 지면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서울역 앞에서 노숙인에게 과자를 건네던 어린아이라든가 불길을 뚫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구출해 낸 춘천의 세 청년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이들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맹자'를 백번 천번 읽었다한들 무슨 근거로 인간이 단지 두 발로 걷는 척추동물일 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짐작건대 맹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맹자도 당시 백성의 삶을 보고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것이고,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성인이라고 말했던 왕수인도 그 사실을 거리의 사람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글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들은 인간을 정의하기 이전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맹자는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순간을 가정한 '유자입정(孺子入井)'의 비유를 들어, 사람은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흔히 연민이나 동정심 정도로 타인을 불쌍히 여기

  • [전호근 칼럼] 상명통(喪明痛)

    [전호근 칼럼] 상명통(喪明痛) 지면기사

    304명 희생된 '세월호 참사' 10주기이후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 남아자식 잃은 슬픔에 눈 안보이는 아픔시간 멈춘 유가족 마음 헤아려 본다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꼭 10년 전 이날 일어난 참사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두 304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사고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참사 이후 이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은 유가족을 비롯한 온 국민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기억 속 4·16도 그날 아침 다음의 보도를 접하면서 시작한다."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전원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가 오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고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했고, 구조가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무능과 안이한 대처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선실에 머물러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차가운 물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정부는 진상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애도와 추모를 방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유가족을 사찰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운 건 세월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막말과 패륜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사고 당일 현장에 가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을 비롯하여 정부의 기본 입장은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말, 구조헬기를 구조에 이용하지 않고 경찰 간부를 실어 나르느라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 발견된 유해를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한 일, 국가배상금을 둘러싼 저급한 왈가왈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조롱하던 패륜의 무리,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의 진실이나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려고만 들던 정부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났다.옛날에 세종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모 돌아가신 것과 자식 잃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