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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호근 칼럼] 선한 의지의 가치

    [전호근 칼럼] 선한 의지의 가치 지면기사

    근대 윤리학 서막 연 임마누엘 칸트 선한 의지,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해인류 평화 기원한 그의 철학과 달리 무력함 증언하듯 지구촌 곳곳에 전란 그럼에도 '선한 의지' 가치 줄지 않아 1724년 4월22일, 프로이센의 항구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살아서 한 번도 자신의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죽어서도 그곳에 묻혔다. 그는 평생 책과 논문을 쓴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그는 혼란을 종식시킨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새로운 것을 발명하거나 생명을 구하는 약을 만들지도 않았지만, 그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을 때 도시 전체가 조종을 울렸다. 독자들이 짐작하듯 그는 바로 임마누엘 칸트다."이 세상 어디에서든 아무 제한 없이 선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한 의지뿐이다.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만으로 무언가를 원하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 선하다. 비록 이 선한 의지가 자신의 의도를 실현할 능력을 전혀 지니지 못하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선한 의지만 남는다 하더라도 선한 의지는 자신 안에 완전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보석처럼 빛난다. 유익함이나 무익함은 선한 의지의 가치에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다."근대 윤리학의 서막을 알리는 이 문장은 칸트가 정언명령에 앞서 인간이 윤리적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질인 선한 의지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밝히는 대목이다. 그는 '도덕형이상학 서설'에서 선한 의지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지 자체가 선하기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고 이야기한다. 칸트는 종교적 신앙이나 공동체의 관습 등 기존의 권위가 모두 무너져 가던 혼란의 시대를 살면서 개인의 덕성이나 경향성에 의존하지 않고 누구나 따르기만 하면 윤리적으로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있는 법칙이 무엇일지 고민한 끝에 정언명령이라는 도덕률을 창안했다.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행위에 앞서 세 가지 단계의 판단을 거친다. 첫째,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인간은 누구나 하

  • [전호근 칼럼] 질문과 오지랖

    [전호근 칼럼] 질문과 오지랖 지면기사

    질문 허용않는 韓 교육 문제라 여겨그때부터 모든 강의 질문·토론 진행그러던 때 뜻하지 않던 '도발' 만나학생 의문 아닌, 내 의문 해결 급급경청했어야… '오지랖' 후회로 남아대학에서 교양을 가르치는 나는 모든 강의를 질문과 토론으로 진행한다. 계기가 있다. 언젠가 한국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진 뒤 기자 회견을 할 때,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기자들에게 질문을 요청했지만, 단 한 명의 기자도 질문하지 못한 부끄러운 일이 있고서부터다. 질문과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교육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듣고만 있지 말고 매순간 질문을 던지고 이의를 제기하라고 촉구했다.학생들에게 좋은 질문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말이든 글이든 다른 사람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는 훈련이 교육 과정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쉽지 않았다. 문제는 학생뿐 아니라 선생인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이다.어느 학기였던가 나는 학생들과 함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질문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나는 알지 못합니다(I don't know)'로 시작해서 '신만이 알 것입니다.(God only know)'로 끝나는 법정 진술이다. 신탁에 의해 그리스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로 지목된 이가 "나는 모른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해서 "우리는 알 수 없다"는 말로 법정 진술을 끝낸 것이다. 마침내 그가 독배를 마시는 순간 모든 그리스인들은 바보가 되고 말았다.대부분의 학생들은 소크라테스의 법정 연설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이야기했지만, 한 학생만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소크라테스가 비겁해 보인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뜻하지 않은 도발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 학생에게 근거가 무엇이냐고, '변명' 중 어느 대목에 비겁한 구석이 보이냐고 물었다. 학생은 머뭇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나는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의심하려면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 다음 강의를 마무리했다. 다음 시간에 그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소크라테스였다면

  • [전호근 칼럼] 위대한 긍정

    [전호근 칼럼] 위대한 긍정 지면기사

    인간은 누군가 도울때 더 큰힘 발휘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게 아닌것무더운 여름 날씨에 고장난 에어컨시원하게 해주는 일 즐겁다는 기사그 어떤 더위도 그를 이기지 못할 것성공을 바라는 사람이 가장 자주 듣거나 하게 되는 말 중 하나가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는 조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처럼 '하면 된다'는 식의 긍정 이데올로기를 무척 싫어한다. 알고 보면 소수의 승자들만 차지하는 경쟁의 결과물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일은 일종의 기만에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긍정하는 심리 자체에 알 수 없는 힘이 있다는 사실만은 긍정한다. 긍정의 방향이 자신이 아닌 타인을 향해 있을 때 더욱 그렇다.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은 '위대한 것에 대한 감각'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긍정 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마틴 셀리그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자신이 펴낸 책 '번성하라'에서 어떤 동료 교수의 소년 시절 추억담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소년이 무슨 일인가로 잔뜩 기분을 상하고 풀이 죽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을 때면 엄마가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는 것이다. "얘야, 너 오늘 영 기분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그럴 땐 어떻게 하는지 알지? 얼른 나가서 누구든 다른 사람을 좀 도와줘 보렴." 엄마의 그런 기분 전환법을 들으며 자란 소년은 지금 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있다. 남을 도우면 내가 낫는다는 것을 엄마는 어떻게 알았을까. 그 치유법은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통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을 '학문적'으로 풀어보기 위해 그 교수는 엄마가 일러주곤 하던 그 치유법의 효과 유무를 엄밀한 과학적 실험에 붙여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의 방식이 옳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이 일화는 한 어머니의 소박하지만 비범한 지혜가 긍정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개척하는 데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보여준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은 누군가를 도울 때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누군가를 돕는 일이 실은 자신을 돕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

  • [전호근 칼럼] 세계인 송상용 선생을 기리며

    [전호근 칼럼] 세계인 송상용 선생을 기리며 지면기사

    국내 1세대 과학사가, 지난달 타계엄혹했던 시절 후학들 방패가 돼줘과학에 기반 않는 삶은 공허 강조생명윤리학회 창립, 복제기술 경종깊고 귀한 품 가시고나서 더 선연지난 6월6일 소송(小松) 송상용(宋相庸) 선생께서 타계하셨다. 선생은 철학자이자 과학자, 사학자로 한결같이 진실과 정의의 길을 걸어오신 분이었다. 선생은 우리나라 1세대 과학사가로 수많은 후학을 길러내셨다. 1960년 한국과학사학회 창립회원으로 참여한 이래 20년 넘게 간사로 일하면서 학회의 초석을 다졌고, 전 세계의 과학자, 과학사가를 초빙하여 학회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또 1989년에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공동대표로 참여하며 엄혹했던 시절 후학들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시기도 했다. 한편으로 선생은 성균관대 재직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하다 해직당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런 일을 훈장처럼 내세우지 않으셨다.선생은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계신 분이었다. 중학생때 6·25전쟁이 나서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석달을 살아본 이야기라든지 1·4 후퇴 때 걸어서 부산으로 피난하다가 길이 막혀 유성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땅을 사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던 이야기처럼 선생의 개인사도 재미있었지만, 저명한 과학사가 조지프 니덤을 만나 감격에 겨워 말이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라든가 영국에서 알고 지내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을 서울 인사동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이야기라든가 선생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나는 정규 교육과정에서 선생께 배운 적은 없지만 이런저런 일로 선생을 가까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는 러셀의 말도 선생을 통해서 처음 알았다. 또 올해는 한자로 '내년(來年)'인데 왜 이해를 올해라고 하는지는 물어서 알았다. 선생은 "올해의 올은 '오다'는 뜻이 아니라 '이르다'는 뜻이다. 올벼의 올이 그런 것처럼"이라고 가르쳐주셨다.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묘소를 먼저 보고, 나중에 트리어의 생가를 방문하는 식으로 마르크스의 삶을 역순으로 만난 경험이라든지,

  • [전호근 칼럼] 유자입정(孺子入井)

    [전호근 칼럼] 유자입정(孺子入井) 지면기사

    타인 고통이 곧 나의 고통 '측은지심'사람 살리는 마음으로 이어지는것'무조건' 생명구한 김은우 학생 찬사그런데 세상엔 손에 휴대폰 들고서 있기만 하는 '험한것'들도 있다플라톤은 인간을 가리켜 '털 없는 두 발 짐승'이라고 규정했고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발로 걷는 척추동물'이라고 정의했다. 매사에 스승의 견해에 반대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찌하여 정작 인간에 대해서만은 견해를 달리하지 않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두 철학자 모두 두 발로 걷는다는 생물학적 특징만으로 인간을 정의했다는 데서 인간에 대한 뒤틀린 시선이 보인다.가령 누가 나더러 인간을 정의해보라고 주문한다면,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면 냉큼 달려가 붙잡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떠올리겠지만 나는 그것을 맹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 배웠다. 이를테면 언젠가 이 지면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 서울역 앞에서 노숙인에게 과자를 건네던 어린아이라든가 불길을 뚫고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구출해 낸 춘천의 세 청년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이들이 없다면 내가 아무리 '맹자'를 백번 천번 읽었다한들 무슨 근거로 인간이 단지 두 발로 걷는 척추동물일 뿐만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짐작건대 맹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맹자도 당시 백성의 삶을 보고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쳤을 것이고,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성인이라고 말했던 왕수인도 그 사실을 거리의 사람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글을 사랑하는 까닭은 그들은 인간을 정의하기 이전에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맹자는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순간을 가정한 '유자입정(孺子入井)'의 비유를 들어, 사람은 누구나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하면 그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먼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흔히 연민이나 동정심 정도로 타인을 불쌍히 여기

  • [전호근 칼럼] 상명통(喪明痛)

    [전호근 칼럼] 상명통(喪明痛) 지면기사

    304명 희생된 '세월호 참사' 10주기이후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 남아자식 잃은 슬픔에 눈 안보이는 아픔시간 멈춘 유가족 마음 헤아려 본다에둘러 말하지 않겠다. 오늘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꼭 10년 전 이날 일어난 참사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하여 모두 304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되었다. 사고 자체의 비극성뿐 아니라 참사 이후 이 나라에서 벌어진 온갖 비인간적인 일들은 유가족을 비롯한 온 국민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지금까지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기억 속 4·16도 그날 아침 다음의 보도를 접하면서 시작한다."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전원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철렁했던 가슴이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얼마 안가 오보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고 후 선장과 승무원들이 먼저 탈출했고, 구조가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무능과 안이한 대처로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따라 선실에 머물러 있던 학생들은 대부분 차가운 물 속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후 정부는 진상을 은폐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로 일관하다가 급기야 애도와 추모를 방해하는가 하면 심지어 국가 기관을 동원하여 유가족을 사찰하는 등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기운 건 세월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막말과 패륜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사고 당일 현장에 가서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곳에서 라면을 먹은 교육부 장관을 비롯하여 정부의 기본 입장은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막말, 구조헬기를 구조에 이용하지 않고 경찰 간부를 실어 나르느라 소중한 생명을 잃은 일, 발견된 유해를 유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은폐한 일, 국가배상금을 둘러싼 저급한 왈가왈부, 단식하는 유가족 앞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조롱하던 패륜의 무리,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의 진실이나 실체를 가리고 은폐하려고만 들던 정부까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났다.옛날에 세종 임금이 신하들에게 "부모 돌아가신 것과 자식 잃은 것

  • [전호근 칼럼] 정직의 가치

    [전호근 칼럼] 정직의 가치 지면기사

    공자는 창고출납 꼭 맞았다는 내용정직함 높이 평가·성현의 품성 부합나를 속이지 말라는 '대학'속 무자기남은 출장비 반납 등 실천한 사람들사마천이라면 역사에 기록했을 것수천년의 세월을 견뎌온 고전을 읽다 보면 도대체 저자가 왜 이런 기록을 남겼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 대목을 자주 만난다. 이를테면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는 어린 시절 가난하고 신분이 낮았지만 성장하여 계씨의 창고지기로 일할 때는 창고의 출납이 꼭 맞았고, 사직리(司職吏)가 되어 가축을 돌볼 때는 가축이 번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슷한 기록이 유학의 고전 '맹자'에도 보인다. 맹자는 '공자가 일찍이 위리(委吏)가 되었을 때는 회계를 꼭 맞추었고 승전(乘田)이 되었을 때는 소와 양을 잘 키웠다'고 전하고 있다.그러니까 공자가 젊은 시절 창고지기로 일할 때는 창고의 출납이 꼭 맞았고 가축을 돌볼 때는 가축이 잘 자랐다는 내용인데,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맹자가 성현의 면모를 알려주는 실례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사마천은 역사책에까지 기록했을까. 짐작건대 창고의 출납이 꼭 맞는다거나 소와 양이 잘 자랐다는 것은 창고의 물건이나 소와 양에게 먹일 사료를 빼돌리지 않았던 공자의 정직함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런 평가는 당시에는 자신이 맡은 일을 공자처럼 정직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배경이 작용했을 법하다. 그러니까 맹자는 정직함이야말로 성현의 조건에 부합하는 품성이라고 생각했고, 사마천은 한 사람의 정직한 행동은 역사책에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라 하겠다.정직과 관련 내가 늘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시험 문제를 특정 문제집에서 냈기 때문에 동네 서점에 가서 해당 문제집을 구해서 공부하면 어렵지 않게 백점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나와 내 친구들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현의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소하지만 정직을 지킨 일들은 도처에서 만난다.내가 아는 어느 어른은

  • [전호근 칼럼] 어 사우전드 앤드 원(A thousand and one)

    [전호근 칼럼] 어 사우전드 앤드 원(A thousand and one) 지면기사

    영화 배경 '1990년대 뉴욕 할렘가'실화처럼 느껴지는 강력한 현실성흑인여성 출소후 아들 데리고 도주가족과 온기 나누며 버틴곳 '10-01'영화밖 '무수한' 사람들의 공간 상징스트리밍 서비스로 영화를 보다가 올해 최고의 작품을 만났다. 새해를 맞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벌써 올해 최고의 영화 운운한다니 성미 급한 판단이라는 웃음을 살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그 영화는 이렇다 할 필모그래피가 없는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하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영화를 올해 최고의 작품으로 올리겠다. 적어도 1년 안에 나는 이보다 나은 작품을 만날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기도 하거니와 거장이 아니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다. 영화의 제목은 '어 사우전드 앤드 원'으로 흑인 여성 감독 A.V. 록웰의 첫 장편영화다.영화의 무대는 1990년대 뉴욕의 할렘가이다. 주인공 이네스(테야나 테일러)는 교도소에 잡범으로 수감되었다가 막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흑인 여성이다. 자유의 몸이 된 그녀는 유일한 가족인 아들 테리(에런 킹슬리 아데톨라)를 찾아간다. 여섯 살인 테리는 자기를 놔두고 감옥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원망하고 외면하지만, 이네스는 위탁 가정을 전전하던 테리의 불행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결국 이네스는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이를 몰래 데리고 할렘가로 도주한다. 아이를 납치한 것이다. 영화는 마치 실화에 기반한 듯 보이지만 잘 쓰인 시나리오이다. 그럼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실화보다 실화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건 영화가 지니고 있는 강력한 현실성 때문이다.이네스는 간신히 머물 곳을 구해 할렘가에 정착하여 아이를 보살피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비루한 일상과 고단한 현실뿐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에서 이네스는 살아남기 위해 그야말로 고군분투한다. 분투의 상대는 뉴욕시, 아니 세상 전체다. 아들 테리는 걸핏하면 경찰로부터 불심검문을 당하고 이네스는 위조한 아들의 서류가 들통날까 노심초사한다. 부엌과 목욕탕의 타일이 떨어지고 비가 오면 여기저기

  • [전호근 칼럼] 분향소

    [전호근 칼럼] 분향소 지면기사

    佛철학자 장켈레비치 죽음을 분류사랑하는 사람 '너의 죽음' 남달라내면의 슬픔 육체적 고통으로 인지이태원 참사 유족들 상처 치유 필요시민분향소 철거 요구는 옳지 않아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는 죽음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일인칭 죽음 곧 '나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내가 살아 있는 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수수께끼와도 같다. 두 번째는 삼인칭 죽음으로 '그의 죽음'이다. 이 경우 그가 맡았던 역할을 다른 사람이 대신하면서 극복된다. 마지막으로 이인칭 죽음이 있다. 이는 '너의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다. 이인칭 죽음은 타인의 죽음이지만, 그로 인해 한쪽 팔이 잘려나간 듯이 아파하거나 망연자실해 버릴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이인칭 죽음을 겪을 때 비로소 죽음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했다.장켈레비치의 이 견해는, 인간에게 죽음은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전제 위에 성립된 것이며 그 까닭은 죽음은 일체의 감각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일인칭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까닭은 죽음이라는 조건 속에 놓이게 되면 경험의 주체인 '나'가 사라지기 때문이고, 삼인칭 죽음을 경험할 수 없는 까닭은 경험의 대상인 '그'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라면 이인칭 죽음이라 할지라도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경험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너'는 더 이상 살아 있는 자의 경험으로 접근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켈레비치가 이인칭 죽음을 통해 죽음을 감각할 수 있다고 한 말은 실은 우리가 관계 맺고 있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죽음의 고통과 슬픔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의미로 죽음 자체를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인칭 죽음의 경우에도 죽음은 여전히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불가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으며 이것이 살아 있는 자의 한계다. 그럼에도 이인칭 죽음은 죽음이라는 추상적 의미를 구체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는

  • [전호근 칼럼] 후생가외(後生可畏)와 사반공배(事半功倍)의 가르침

    [전호근 칼럼] 후생가외(後生可畏)와 사반공배(事半功倍)의 가르침 지면기사

    지난달 은사이신 상허(尙虛) 안병주(安炳周) 선생께서 타계하셨다. 선생은 유학의 우환의식(憂患意識)과 맹자 민본사상(民本思想)의 권위자일 뿐 아니라, 한국유교학회와 동양철학연구회를 창립하여 동양철학의 학문적 저변을 확대하고 퇴계학연구원장과 국제퇴계학회 회장을 지내며 퇴계학의 위상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민족문화추진회와 전통문화연구회를 통해 고전 번역의 초석을 놓았고 대학을 비롯한 각급 기관에서 수많은 제자와 후학을 길러낸 스승으로 한국 동양철학계의 태두라 할 만한 분이다.대학시절 나는 선생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공부했다. 학교의 정규 강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족문화추진회와 퇴계학연구원 등 선생이 강의하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맹자와 논어를 비롯한 유학의 고전은 물론이고 묵자와 노자와 장자 등 제자백가서까지 배웠다. 내가 들었던 선생의 모든 강의는 다른 사람의 강의로는 대체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고 흥미진진했다. 특히 맹자를 강의하실 때면 맹자와 제자들, 당시의 임금들이 강의실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선생은 마치 스스로 맹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연기를 하며 강독하셨는데, 맹자와 대화를 나누던 제자가 실망스러워하는 대목에서는 스스로 그 제자가 되기라도 한 듯 입을 삐죽이 내밀며 강의하셨고 제나라 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고 할 때는 선생의 안색도 따라서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지금도 맹자의 그 구절들은 선생의 표정과 목소리로 내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수많은 후학 기른 동양철학계 태두은사이신 상허 안병주 선생 '타계'선생은 자신이 이룬 학문적 권위에 기대는 법이 없었다. 고전을 함께 읽을 때 새로운 견해를 이야기하는 제자가 있으면 선생의 풀이와 다르더라도 아낌없는 칭찬으로 높이 평가하셨으며 제자가 작은 성취라도 보이면 언제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씀으로 격려하셨다. 논어의 한 구절로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후생(後生)'이라는 이 말씀은 아마도 제자의 성취에 대한 칭찬에 그치지 않고 선생 스스로 분발을 촉구하는 경계의 말씀으로 입에 즐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