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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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아직은 작은 아이들 지면기사
불량 급식·이불 덮어 질식사…끊이지 않는 어린이집 아동학대CCTV설치 효과없이 불신 키워보육선생님 자격강화·처우 개선교사로서 자부·소명의식 회복을도서관을 운영하다보니 도서관 이용 예절을 배우거나 책을 보기 위해서 단체로 방문하는 어린이 이용자들을 자주 맞이하게 된다. 사립으로 운영되는 어린이집이나 국·공립 유치원 등 다양한 곳에서 온 교사와 어린이를 만난다. 어린이 이용자들의 공통점은 보통 처음에는 조용히 책을 보는듯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뛰어다니고, 책을 던지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가만히 책을 보기는 어렵다. 교사 혼자서 대여섯 살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보살피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유치원에서 단체로 도서관을 방문할 때는 마음을 다잡고 아이들을 주위로 불러 모아 책을 읽어주곤 한다. 이런 어린이 이용자들이 떠나고 나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흩어진 책들을 정리하면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어린이집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잠을 자지 않는다고 이불을 덮어씌우고 몸으로 눌러 질식사로 숨지게 하거나 밥을 잘 먹지 않는다고 아이를 들어 내동댕이치고 음식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는 등의 아동학대 사건, 사과 7개로 90명이 넘는 아이들에게 간식으로 나눠주고 상한 음식을 먹이는 등 부실 급식 문제, 폭염 속 통학차량에서 미처 내리지 못해 질식사 한 사건 등 어린이집 관련 사건은 오래전부터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건들을 접하면, 도서관에서 단체 이용자로 만났던 어린이집 교사들의 고충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이집 교사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어떤 이유로도 어린 아이들에 대한 학대는 정당화 될 순 없다. 다만, 어떤 범죄사건처럼 특정한 누군가가 저지르는 일이 아니라 많은 어린이집에서 왜 이런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매번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이 발생하면 터진 댐의 구멍 막듯이 정부에서는 대책을 마련해오고 있다. 어린이집에 CCTV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면 사고를 막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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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석가모니의 비구 승가 해산과 탁발 없는 조계종 지면기사
걸식은 육신 욕망 끊는 수행이자가장 적극적인 무소유의 실천타인 통해 자신 존재 깨닫는 계기한국 1964년부터 '탁발 금지'타당한 근거 어디엔가 있길 바라당분간 조계종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불교계 상황은 암울할 듯하다. 총무원장 설정을 탄핵했다고는 하나, 그간 만연했던 악습을 청산해 나갈 세력이 두드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측에서는 현재의 간선제를 반대하고 있다. 선거인단 대부분이 자승 전 총무원장의 영향력 아래 있으므로, 자승 전 총무원장의 지원을 받는 후보가 새로운 총무원장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공론화되지 않았을 뿐 기실 자승 전 총무원장을 둘러싸고 제기된 여러 의혹들도 사소하다 치부하기는 곤란한 수준이다.혼란한 불교계를 접하면서 석가모니의 비구 승가 해산 일화가 떠올랐다. 공양물의 배분을 두고 비구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자 석가모니는 승가를 해산시켜 버렸다. 이후 뉘우친 비구들이 하나, 둘씩 다가와 사죄하며 모였을 때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출가의 목적이 생활필수품을 마련하는 데 있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데 있다는 내용이었다."걸식이라는 것은 삶을 영위하는 가장 미천한 방법이다. 세상에서 걸식하러 돌아다닌다는 것은 욕하는 말이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바른 목적을 추구하는 자라서 걸식하는 삶을 산다. 왕에게 이끌려서도 아니고, 도둑에게 이끌려서도 아니며, 빚 때문에, 두려움 때문에, 생계 때문에도 아니다. 오직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근심·탄식·고통·절망에 빠져 있고, 괴로움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괴로움의 무더기가 끝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다."(상윳따니까야- '걸식경')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구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 즉 걸식(乞食, 탁발)이 아닐까 싶다. 주지하다시피 음식 섭취 문제는 생존에 직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식하라는 것은 음식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초기승가에서는 음식에 대한 집착 및 욕망을 막기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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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교육개혁 지면기사
여전히 이 사회는 명문대학 프레임산업시대 교육 허상에 갇혀 있다정부, 근본적 위기 이해하고 있는지개혁 당위성 불구 장관 교체 그쳐'재정논의로만 맹목 대처' 어쩌나한 국가에서의 교육에는 여러 가지 목표가 있다. 교육의 일차적 목표는 개인에게 필요한 전문지식과 직업 적합성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그와 함께 교육에는 정치적이며 존재론적 목표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 교육은 국가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리와 토대로 작동한다. 국가가 성립되기 위한 외적 실재를 넘어 국가를 구성하는 원리와 국민적 동의를 보편적으로 국가 구성원에게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정치적 함의이다. 나아가 교육은 근대 대학의 원리에서 보듯이 개인의 자아와 존재를 실현하는 문화교양 교육이란 존재론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의 경우 교육의 정치적 원리는 헌법에서 규정한 대로 민주제와 공화정으로 표현된다. 또한 전문지식교육이란 측면에서는 근대화와 함께 교육에 담긴 근본적인 교양교육의 원리가 토대로 작동한다. 지난 2016년 겨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 집회는 교육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과 그 과정에서의 온갖 비리에 대한 항의가 이 집회를 촉발시켰지 않은가. 촛불 집회의 혁명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는 별개로 이 과정에서 나타난 시민의 정치적 의사는 이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의 토대일 뿐 아니라, 그 목소리에 국가의 원리에 대한 구성원의 포괄적 합의가 담겨있다는 사실도 명백하다. 촛불 집회의 시작은 교육에 대한 개혁 요구였다. 그런 만큼 이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과 과제에서 교육이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너무도 아쉽게도 지난 1년 반 동안의 교육 정책은 이런 요구에 대해 또 다른 절망을 안겨준 시간이었다.정시와 수시 비율 조정 정도가 지옥과도 같은 입시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라는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 충분했던가? 이른바 명문 대학이란 허상을 향한 부나비 같은 질주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교육이 공공재이며, 공동선이란 토대 위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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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대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면기사
취업·진로와 직결 평가결과 민감구성원들 스스로 성찰·혁신 필요학생성공 헌신·연구성과 없다면지역·학교·경제 동시에 '도산'퇴출당한 대학들의 '마지막 경고'촌지. '마음이 담긴 작은 선물'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때로는 뇌물로, 청탁으로 변질되었다. 왜 촌지 문화가 변했을까. 공직자의 경우 촌지 수수의 주된 이유가 사교육비 때문이라는 조사도 있었다. 각종 사교육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난마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점에는 항상 대학이 있었다. 어떤 정부도 교육부총리도 사교육과 입시라는 난제를 성공적으로 돌파한 적이 없다.그런 대학에 최근 위기감이 넘쳐난다. 대학 절반이 도산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있다. 저출산의 쇼크가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취업 절벽과 비정규직이라는 현실에 절망한다. 지난주 발표된 대학 2주기 구조개혁 발표가 충격을 주고 있다. 해당 대학 총장들이 책임을 지고 사퇴의사를 밝히고 있다. '재정지원제한'대학은 사실상 퇴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미 1주기에 퇴출된 대학의 지역경제는 초토화되었다. 식당도 원룸도 커피숍도 문을 닫았다.대학이 처한 어려운 현실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대학 등록금이 동결된 지 오래다. 연구시설이나 연구 장비는 물론이고, 연구비도 부족하다. 몇 년째 동결된 임금에 대한 불만도 크다. 대학의 재정난 때문일까. 교육부가 최근 기본역량진단에서 전임교수 강의비율을 제외하였다. 대학평가를 하는 국내 언론사도 교수확보율에 대한 배점을 낮추었다. 대신 외국인 학생 비율과 기숙사 배점을 확대하였다. QS 세계대학평가는 외국인 교수와 외국인 학생 비율을 각 5%씩 반영한다. 대학이 외국인 학생과 외국인 교수 확보를 통해 탈출구를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이다.물론 대학평가가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평가지표의 정당성에 대한 시비다. 과거의 잣대라는 비판이나 교수와 종합대 중심의 평가라는 비판도 마찬가지다. 상업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측에서는 평가 거부를 요구하기도 한다. 외형보다는 내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평가결과에는 모두가 민감하다.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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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공룡이 된 동영상 플랫폼 유튜브, 사회적 책임 필요 지면기사
출범초 상업주의로부터 거리 둔'모든 사람의 텔레비전'이라는지향과 멀어져가는 것인가?막강한 영향력 고려한다면국내 서비스와 동등규제 이뤄져야글로벌동영상 서비스 유튜브의 성장세가 눈부시다. 올해 상반기 국내 모바일 동영상 앱 점유율이 85.6%에 달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고 2017년 동영상 광고매출에서도 38.4%로 1위를 차지했다. 스마트폰의 보급, 소셜미디어의 성장과 유튜브는 함께해온 것이다. 2014년 12월 MBC, SBS의 방송콘텐츠가 유튜브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MBC, SBS 등이 만든 온라인 영상광고대행사가 유튜브와 광고 수익 배분을 놓고 힘겨루기를 하다가 포털에만 방송콘텐츠를 제공하게 된 적이 있다. 신문이 단결해서 콘텐츠 제값 받기를 하지 못해 지금 포털과 불평등한 관계에 처한 것을 반면교사로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튜브의 성장세에 지상파방송과 종편은 유튜브에 뉴스콘텐츠를 서비스할 수밖에 없었다. 방송사들은 공익성이 있는 뉴스와 시사교양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유튜브가 어린이, 청소년의 미디어이기 때문에 미래 시청자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도 클 것이다.이미 유튜브는 10대에게 검색, 뉴스, 오락 등에서 가장 중요한 미디어가 됐다. 지난 1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표한 '10대 청소년 미디어 이용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청소년의 26.7%가 유튜브 같은 1인 방송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들은 기존 미디어가 만든 프로그램이 아니라 이용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상을 스마트폰을 통해서 주로 소비하고 있다. 청소년들에게 유튜브의 외설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가 미치는 영향력 이외에 최근 극우채널들이 제공하는 가짜뉴스도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네이버와 카카오 등 국내 동영상 서비스는 유튜브와 비교해서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규제 역차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유튜브에 인터넷 망사용료, 콘텐츠 규제 등에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게 만든 정부의 책임이 크고 검색시장 등의 점유율에 취해서 동영상 서비스에 대한 대응을 간과한 네이버 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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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강물이 흘러가도록 지면기사
인명피해 컸던 라오스댐 붕괴사고제주도의 비자림로 확·포장 공사새로운것 만들려는 인간의 욕심지구 아프게 해 결국 재앙 몰고 와이젠 개발보다 보전에 힘써야 할 때라오스라는 나라와 인연이 닿아 3년째 라오스 산골마을 초등학교 한 공간을 그림책도서관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한 주 전에 사전답사로 라오스를 방문해야 했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달리 이번 라오스 방문은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7월에 일어난 댐 붕괴 사고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SK건설이 라오스에서 시공 중인 세피안-세남노이 댐의 보조댐 하나가 집중호우와 맞물려 무너지면서 인명 피해가 컸고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는 등 큰 어려움에 놓였다. 라오스의 남동부 아타파 주의 세피안-세남노이 수력발전소 댐은 다섯 개의 보조댐과 두 개의 본 댐으로 지어지고 있었다. 이번에 사고가 난 곳은 '새들 댐'으로 불리는 보조댐 중 한 곳이다. 세피안-세남노이 댐은 한국의 SK건설과 한국서부발전, 태국의 라차부리전력 등이 합작법인(PNPC)을 구성해 수주했다. 2013년 착공됐고, 내년부터 상업운전에 들어갈 예정이었다.라오스에서 현재 가동 중인 수력발전소는 모두 46개에 이른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기의 80%는 태국 등 인접국가에 수출한다.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라오스는 전력이 주요 수출품목이다. 라오스 정부는 2020년까지 전력 생산량을 두 배로 늘려 '동남아의 배터리'가 되는 목표를 내걸기도 했다. 댐의 붕괴 원인이 부실 공사로 인한 것인지, 자연 재해로 인한 것인지는 분명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지만, 인간의 과욕이 부른 참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번 라오스 댐 붕괴사고를 접하면서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 생각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그림책이 있다. 아름다운 자연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 훼손하는 일은 세계적으로 많이 있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1900년대 초기에 미국 뉴잉글랜드의 쿼빈에서 댐을 만들어서 아름다운 고향이 물에 잠겨야 했던 이야기가 그려진 < 강물이 흘러가도록 / 바버러 쿠니 그림. 제인 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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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대대(待對)와 생물학적 페미니즘의 한계 지면기사
싸움이라면 증오로 충분하겠지만다른 세상 그리기 위해서는희망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일부 페미니즘이 우려스러운 것은이를 망각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구릉 한 편에 해가 비치면 다른 편에는 그늘이 진다. 양(陽)이고 음(陰)이다. 양과 음은 속성상 반대되는 타자이지만, 적대적인 관계라 보기 어렵다. 오히려 상대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각자 존재할 수 있는 관계로 이해해야 온당하다. 이를 인정한다면 음양이라는 상반 관계는 배척 관계가 아닌, 상호 대립하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하는 관계로 정리할 수 있다. 동아시아 사상가들은 '대대(待對)'라는 용어로 이를 개념화하였으며, 만물 변화의 추동 원리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동의하기 곤란한 일부 페미니즘 운동의 양태를 접할 때면 대대 개념을 떠올리게 된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마땅히 극복해야 하겠으나, 그렇다고 남성을 멸절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호 대립하면서 갈등하되, 상호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여성남성)의 측면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페미니즘 운동의 몇 가지 사례는 쉽사리 동의하기가 곤란하다. 또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과연 도움이 될는지도 의문으로 남는다.예컨대 남성혐오 커뮤니티 '워마드'에서 벌어진 '성체(聖體) 훼손'을 보면, 사건이 일으킨 논란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효과는 거의 없어 보인다. 물론 예수는 남성이었으며, 가톨릭에서 성체는 예수의 육신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로써 성체가 훼손되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율법에 따라 간음한 여인을 단죄하라는 남성들(서기관들, 바리새인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답변하여 그네들을 돌려세우는 예수를 보건대, 그가 주장했던 사랑의 가치가 여성을 비껴서 적용되지도 않았던 듯하다.(요한복음)천주교에서 여성은 왜 사제가 될 수 없는가. 천주교에서는 왜 낙태를 반대하는가. 내가 보건대, 성체 훼손은 이와 같은 부류의 물음 혹은 비판과 층위를 달리 한다. 찬반 여부를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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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지식인선언 지면기사
수많은 영역 근본기조 변함 없어변화 요구 진보의 조급함이나정략적 발언으로 몰아가지 말라 많은 세력 담대하게 척결 안하면이 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문재인 정부의 담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7월 17일자 지식인 323명 선언에 대해 이른바 좌우협공이란 비판과 함께, '현장 감각 제로 건백서'로 '속대발광욕대규'로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앞의 비판은 한겨레신문, 뒤는 중앙일보의 칼럼이니 어쩌면 좌우협공으로 비치기도 하겠다. 그러나 이런 선언을 좌우협공 따위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게 정략적이다. 촛불의 열망을 딛고 선 이 정부에게 이 선언은 가깝게는 사회경제의 담대한 개혁을 요구하거나 크게 보면 해방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해 말하고 있다. 권력은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공공성에 바탕해야 하며, 이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맹목적 자본주의에 의한 끝없는 경쟁이 아니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공정함이란 주장이 담겨있다. 또한 그동안의 일면적 경제성장에 대한 강박을 넘어 사회와 경제 체제에 민주와 평등을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더 멀리는 지겨운 종북논쟁을 넘어 이 땅의 지속적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했을 것이다.여기에 좌와 우가 자리할 곳은 없다. 촛불 시민은 흔히 말하는 좌우나, 진보 보수란 프레임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인간다운 사회를 요구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향 분석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미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에 따른 개혁의 담대함을 요구한 것이다.(2017년 10월 30일자 월요논단) 너무도 오래 우리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었던 개발독재 시대를 넘어서는, 이후의 사회와 인간다움에 대한 요구를 좌우협공 따위의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 선언의 의미를 지나치게 정쟁적 관점에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촛불이 척결하기를 바란 것은 보수가 아니라, 특권을 독점하는 음습한 수구 세력이다. 그 세력을 우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그런 세력은 벌써 사라져야 했음에도 여전히 우란 이름으로 이 정부의 실패를 바라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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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계엄령 트라우마 지면기사
80년대 경험 집대성한 증보판 소름기무사 문건은 일종의 헌정유린권력찬탈 향한 기획이라는 의심헌법 파괴하고 국민에게 총 겨누는악마의 지침서란 사실 용서 못해트라우마(Trauma). '큰 상처'를 뜻하는 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은 잊거나 되돌아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상처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 때가 있다. 최근 기무사가 준비했다는 계엄문건 보도를 보면서 40년 전 상처가 떠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던 1979년 10월. 대학은 물론 강의실에까지 경찰과 기관원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절대 권력의 상징이 사라지자 대학에는 바로 휴교령이 떨어졌다. 대학에 탱크와 군인이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이 일상이 되었다. 종강도 없이 방학을 했다. 성적이 리포트로 대체되는 사이 12·12가 발발했다. 상황을 짐작한 학생운동권 일부가 잠수를 탔다. 겨울은 길었다. 고시를 핑계 삼아 암자로 도피했던 친구가 월정사 근처에서 조난을 당해 짧은 인생을 끝냈다. 남몰래 민주화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던 친구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슬펐다. 그리고 서울에도 봄이 왔다. 하지만 3김에 대한 희망은 정치적 욕망과 뒤섞이면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계엄해제를 외치며, 최루탄으로 범벅이 되는 날들이 길어졌다. 꿈도 대학생활 마지막 봄도 5월 17일 계엄령 확대로 사라졌다. 대학은 또 문을 닫고, 비극적인 광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 계엄령은 크든 작든 국민들의 인생을 흐트러 놓았다. 그해 5월 광주로 입영신체검사를 받으러 갔던 친구는 다른 시민들의 죽음을 목도했다. 그는 오랫동안 방황을 한 후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아마 계엄령이 없었다면 그도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많은 친구들의 삶이 헝클어진 것은 계엄령과 쿠데타 때문이었다. 헌법 제77조는 '대통령은 전시·사변 등 국가비상사태에 있어서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에는 영장제도,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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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논단]검색인간과 인공지능 알고리즘 투명성 지면기사
알고리즘의 투명성 제고는합리적이고 공정한 판단 할 수 있게정보 신뢰도 높이는 소중한 원칙갈수록 뉴스와 여론 영역에서지배력 강화… 책임성 또한 중요낯선 용어였던 '알고리즘'이 이젠 우리 생활 속, 깊이 들어와 있다. 포털의 검색서비스와 추천서비스, 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추천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정보기호학자인 이시다 히데타카는 우리가 '검색인간'이 됐다고 말한다. 인터넷에서 정보와 지식을 얻는데, 검색으로 세계가 열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우린 인터넷에서 네이버, 카카오, 구글의 첫 화면에서 출발해서 검색을 거듭하면서 몇 분이 지나면 각기 다른 화면으로 이용한다. 검색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검색인간은 검색과정에서 주도권을 갖지 못한다. 검색어로 자신을 개인화하고 있을 뿐이다. 검색어는 순위가 매겨지고 광고가 연동되는 존재이다. 포털서비스 이용자는 화면 상단에 노출되는 기사와 자주 사용되는 언어(검색어)에 영향을 받게 된다. 또 검색을 통해 그 이력이 포털에 축적되어 개인화된 마케팅과 광고의 대상이 된다. 검색이력을 들여다보면서 소비경향을 읽어서 이용자들에게 개인화된 맞춤형 광고와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검색최적화(검색사이트에서 자사 콘텐츠나 페이지를 상위 페이지에 노출시키기 위한 작업)'란 용어가 마케팅업계에서 쓰인 지도 오래됐다. 개인의 소비활동이 알고리즘화되어 관리되는 알고리즘형 소비가 등장한 셈이다. 더 나아가 이시다 히데타카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규율되어 모든 정보가 추적되고 방향이 정해지는 원리적으로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 알고리즘형 통치사회가 등장한다고 지적했다.알고리즘의 상업적 활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여론형성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포털의 기사배열과 기사 추천 알고리즘일 것이다. 포털이 언론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최근 여러 수용자조사에서 포털을 언론으로 인식한 응답자가 50%를 넘어섰고 법원도 여러 차례 포털의 언론성을 인정한 바 있다. 다만 포털이 기존의 언론과 성격이 같으냐 아니냐만 남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