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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일상의 붕괴 지면기사
"한낮에 아이에게서 전화가 온 거예요. 점심시간이길래, 뭘 놓고 갔나 했어요." 우리는 함께 커피를 마시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에겐 이런 종류의 일화들이 아주 많았는데, 아무리 들어도 새로이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 하더니 우는 거예요. 난 너무 놀랐어요. 왜? 왜? 무슨 일이야? 하고 물으면서, 혹시 피싱인가 하고 의심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어설픈 구석이 없는 거예요. 말투도 그렇고, 분명히 ○○이 목소리였어요." 결국 그것은 흔하다면 흔한 피싱 이야기였다. 그녀는 놀랐지만 끝까지 주의력을 잃지 않았고, 아이가 학교에 안전하게 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좋은 마무리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이전과 다른 한가지 디테일이 더해져 우리를 좀 더 무섭게 했다. 듣는 이가 이미 피싱을 짐작하고 유심히 듣는데도 도무지 의심할 수 없이 똑같았던 '아이의 말투와 목소리'였다.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버전의 많은 '철렁한 보이스피싱 이야기'들을 들어왔지만 듣는 사람이 너무 놀라서 지레 정신줄을 놓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이것이 사기임을 짐작 가능한 힌트들이 있었다. 협박하는 사람이 특정 지역의 말투를 쓰거나 주변 잡음이 몹시 심할 때가 많았고 무엇보다도, 목소리가 숨길 수 없이 달랐다. 울거나 비명을 지르는 식으로 듣는 사람을 놀래켜서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숨기려 애쓰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힌트를 찾을 수 없었다. 아이가 울음이 섞이기는 했어도 또박또박 말했고 그 목소리는 엄마가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 들어도 분명 내 아이의 목소리였다. '피싱 전화 한통' AI로 목소리 똑같이 재현통화음 흉내 내도록 도운 통신사 등에 분노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에 관한 또다른 일화가 떠올랐다. "나 김정은한테서 축하 전화받았어요. 들어보실래요?" 한 지인이 자랑스럽게 넘겨준 전화기에서는 북한의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그의 유튜브 채널 개업을 인민의 온마음을 다해 축하한다며 유튜브 채널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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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민주주의가 위험하다 지면기사
이태원 이후 조사는 의외(?)다. 이전과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 조사시점을 기준으로 이태원 이후 첫 조사는 10월의 마지막 날부터 11월2일까지의 전국지표조사(NBS)였다. 윤석열 대통령국정운영 평가를 보면 '긍정평가 31%, 부정평가 60%'로 같은 조사의 2주 전과 같았다.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신뢰도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신뢰한다 35%, 신뢰하지 않는다 60%'로 직전조사와 비교하면 신뢰하지 않는다는 2% 포인트 상승하고 신뢰한다가 1% 포인트 하락했다.11월 1~3일 조사의 갤럽도 마찬가지다. '긍정평가 29%, 부정평가 63%'로 전주 대비 1% 포인트씩 각각 오르고 내렸다. 특이한 점은 긍정평가든 부정평가든 양쪽 모두 이태원 때문이다. 한쪽은 '사고수습을 잘해서', 다른 한쪽은 '대처가 미흡해서'다. 세월호 직후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2주 만에 59%에서 48%로 하락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이태원 이후 비슷한 시기 다른 방식의 조사들도 결과는 유사하다. 변화가 있더라도 1% 포인트 내외였다. 대체로 '20% 후반 또는 30% 초반의 긍정평가, 60% 초중반의 부정평가'다. 대통령 국정수행 평가의 일간지표로 보면 11월 첫 주 초반에는 추모 분위기로 지지율 변동이 크지 않았지만 주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사고'에서 '참사'로 '사망자'에서 '희생자'로 바뀌었고 결국 대통령 지지율은 매일 하락의 흐름이었다고 한다. 尹 지지율 '3대6 구도' 이태원 이후 변화 미미세월호 직후 박근혜 대통령 추락과 대조적 '유권자 10명 중 3명은 윤 대통령을 지지하고 국민 10명 중 6명은 반대하는 여론'은 최근 쟁점이 되었던 몇몇 사안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분포와도 일치한다. 해외순방 중 비속어 논란에 대해 외교적 참사(64%) vs 언론왜곡(28%), MBC 보도에 대한 대통령실의 대응에 대해 과도한 대응(59%) vs 적절한 대응(30%), 그리고 대통령 사과 필요성에 대해 동의(70%) vs 반대(27%) 등이 대표적 사례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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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슬픔(哀)이 상처(傷)로 남지 않기를 - 애상(哀傷) 지면기사
하늘은 인간에게 일곱 가지 다양한 감정을 주었다. 기쁨, 분노, 슬픔, 공포, 사랑, 증오, 욕망이다. 이런 인간이 겪어야 하는 다양한 감정을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칠정(七情)이라고 한다. 칠정은 인간의 네 가지 본성 사단(四端)과 함께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는 기본 골격이다. 문제는 일곱 가지 감정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인간의 마음을 교대로 흔들어댄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기쁨에 들떠 춤추며 놀다가도 화내며 슬픔에 젖어 비탄에 젖기도 한다. 공포와 두려움에 떨다가도 사랑과 연민에 어느덧 언제 공포가 있었냐는 듯 잊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왜 이렇게 다양한 감정의 기복으로 일상을 맞이해야 하는가?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유지하며 평온한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일까? 감정의 조절과 평정은 성찰의 중요한 주제이며 죽을 때까지 나의 인생 전반에 걸쳐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이태원 참사로 국민들 마음 널뛰고 있어분노와 분노 만나 갈등과 싸움으로 번져 '중용'에서 감정의 조절을 '중화(中和)'라고 한다. 중화는 인간의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면 삶의 중심축이 무너질 수 있기에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치우치거나 기울어지지 않는 감정의 조절을 통해 인간의 생명력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참으면 속으로 병이 들고, 분노가 지나치면 화로 번진다. 기쁨을 억누르면 답답해지고, 기쁨이 넘치면 음란함이 된다. 공포는 인간을 두려움에 떨게 하지만, 조절만 잘하면 긴장감으로 인간의 잠자고 있는 세포에 불을 켜게 한다. 욕망은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고, 탐욕으로 넘치면 인간의 삶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인간의 감정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길들여야 할 대상이다.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마음의 감정을 잘 조정하는 것을 '조심(操心)'이라고 한다. 인간의 감정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그 마음(心)을 잘 조종(操)할 수만 있으면 더 높은 단계의 삶을 살 수 있다. 마음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뛰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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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가족이란 이름으로 지면기사
미국 간 아들이 십년 만에 한국으로 온다고 한다. 아들이 낯선 나라에서 일자리를 찾고 뿌리를 내리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니, 새삼 애틋하면서도 대견하다. 세상의 모든 자식들은 부모에게서 자양분을 취하고 떼어가지만 그럼에도 애틋하고 안쓰러워지는 것은 피의 이끌림 탓이다. 가족은 서로에게 어둠 속의 검은 개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가족이란 보호색 안에 있을 땐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가족 울타리 밖으로 사라진 뒤 그의 존재감은 또렷해진다. 우리는 가족이란 역사 안에서 자라나는 상처다. 그럼에도 가족을 향한 정이 애틋하고 떨어지면 서로를 그리워한다. 가족 공동체가 우리가 누린 안녕과 보람과 기쁨들의 요람이고, 추억이란 상징 자본이 가족 내부에서 빚어진 것이기 때문이리라. 가족은 선물로 주어진 생물학적 소우주, 처음 만나는 사회 집단, 험한 날씨와 질병들, 크고 작은 외부의 악에게서 우리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다. 외부악으로부터 우리 지키는 '최후의 보루'피의 기질·본성·닮은 식성·욕구 공유한 존재 우연히 백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읽으며 가족의 의미를 곰곰 되새겨 본 적이 있다. H마트는 미국 내 한국인이 드나드는 한식 식재료를 파는 식료품점이다. 한국 라면, 설렁탕, 미역국, 붉은 고춧가루, 떡볶이, 어묵, 그리고 멸치 액젓, 마늘, 생강 같은 기본 재료들을 판다. 어머니의 영향 아래 자란 '나'의 식성은 완전한 한국식이다. 모녀는 생긴 건 다르지만 한식이라는 정서적 탯줄로 단단하게 연결돼 있다. '나'는 딸에게 결코 '호밀밭의 파수꾼'을 권하거나 롤링스톤스 레코드판을 권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다. 어머니는 한식을 사랑하고 그걸 만들어 가족과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가족은 피로 이어진 동맹체, 입맛과 취향으로 결속하는 공동체다. 한국인 어머니를 잃은 뒤 '나'는 상실에 따른 그리움을 앓는다. 어머니가 생시에 즐겼던 음식이 그를 향한 추억과 그리움의 끄나풀이 된다. 어머니는 '나'에게 김치를 좋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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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키오스크 앞에서 지면기사
몇 년 전 대학 은사님의 칠순 파티가 있다고 해서 비록 은사님이 애써 가르쳐주신 전공 공부는 진작에 포기해버리고 딴길로 새어버린 불충 제자였지만, 오랜만에 모임에 참석했다. 수십년 만에 다시 만나는 동문 선후배들은 무척 반가웠다. 아침나절 다투었다가 저녁나절 히히덕거리던 철딱서니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그 옛날 나를 가르치셨던 교수님보다도 더 나이가 든, 중견을 넘어 원로를 향해 달려가는 과학자들이 되어있었다.왜 이렇게 나이가 들었냐는 소리는 차마 못하고 서로 놀라움이 담긴 헛웃음만 연발했는데 더욱 놀라웠던 건 은사님의 변화였다. 은사님은 현대 의학기술의 발달로 30년 전보다 오히려 더 젊어지셨는데 함께 늙어가는 처지가 된 제자들에게 한가지 비밀을 고백하셨다. "햄버거를 먹덜 모대야. 망할놈의 키오스크 때문에." 우리 실험 데이터의 허점을 매섭게 추궁하시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능숙하게 폭소를 자아내시던 그분의 유머감각이 여전했다. 우리는 배꼽을 쥐고 웃으면서도 세월의 무서움에 고개를 내저었다. 20대 유학시절부터 미국 본토 햄버거 문화를 즐겨온 은사님이 그깟 자동주문 키오스크의 빛나는 화면 앞에서 얼어붙어 어쩔 줄 모르는 어르신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몇년 전 칠순 은사님 "햄버거 먹지 못해"메신저 앱에도 수십가지 기능 숨어있어 그때로부터 다시 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모 대학의 문학기행에 참가해 멋진 하루를 보냈다. 문학 명소를 찾아 젊은 친구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멋진 사진들을 찍었다. 말할 것도 없이 sns로 단련된 젊은이들의 사진 실력은 놀라웠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찍었는데 내 사진과 그들의 사진은 감성과 시야의 차원이 달랐다. 칙칙한 내 사진 말고 화사한 그들의 사진을 갖고 싶어진 나는 그들에게 연락처를 알려주고 사진을 받을 생각을 하며 머리를 복잡하게 굴렸는데, 그들에게는 그렇게 복잡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나는 쩔쩔맸는데, 젊은 손가락들이 내 휴대폰 설정 화면을 몇 번 터치하니까 수십 장의 사진이 고스란히 내 폰에 도착했다. 사진을 받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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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윤 대통령의 몫이다 지면기사
취임 23주차의 윤석열 대통령은 여론의 분기점에 있다. 대통령 지지율은 대체로 '30%대 긍정평가'와 '60%대 부정평가의 흐름'이다. 당분간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관심은 대통령이 상승 동력의 계기를 확보하느냐 아니면 '날개 없는 추락'을 계속하느냐로 모아진다.지금 윤 대통령은 '신뢰의 위기 끝자락'에 있다.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의 문 앞에 사람들이 충분히 모여 있고 그 가까이에도 사람들이 모이는 중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취임부터 한 달 정도는 대통령의 국정운영 신뢰도가 50%를 넘었지만 6월 말 7월 초 역전되어 대통령 국정운영의 불신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대통령 신뢰의 위기'가 임계점에 다가서고 있다는 뜻이다. 7월초 '52%(불신) vs 42%(신뢰)'였다가 10월 초에는 '63%(불신) vs 34%(신뢰)'다. 이 조사의 대통령 국정운영 신뢰도는 8월 이후 계속 하락세다. 대부분의 조사에서 나타나는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유로 '국민과의 소통을 잘해서'가 줄어드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취임 이후 윤 대통령 지지율은 축소 지향적이다. 지난 5월10일 취임 이후 최근까지 21주 동안 실시된 여론조사는 모두 145개. ARS가 104개로 대부분이고 면접조사는 41개다. 145개 전체조사에서 나타난 긍정적인 대통령의 국정평가는 '긍정평가 평균 37%, 부정평가 평균 57%'. ARS 조사가 면접조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정평가는 낮고 긍정평가는 높은 경향을 보이곤 한다. 취임 23주차 지지율 긍정 30%·부정 60%대'해외순방중 비속어 논란 대응' 대표적 사례 취임 이후 21주 동안 대통령 지지율은 계속해서 하락세다. 긍정평가는 취임 첫 주부터 5주차까지 주별 평균 50%이상을 기록하는데 최고점은 6월1일 지방선거 직전 주의 평균 54.6%였다. 부정평가도 36.6%로 이때가 가장 낮다. 지지율은 6주차부터 50% 아래로 떨어지는데 이후에는 주별 평균이 40%대 30%대로 하락한다. 13주차에 이르러 결국 주별 평균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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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숙맥(菽麥)의 난(亂) 지면기사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숙맥(菽麥)이라고 한다. 숙(菽)은 콩이고, 맥(麥)은 보리다. 크기로 보나 모양으로 보나 확연히 다른 곡식인데, 눈으로 직접 보고도 분별하지 못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렇게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런 숙맥!'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숙맥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콩과 보리뿐이겠는가? 상식과 비정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욕과 평상어를 구별하지 못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해를 보고 달이라 하고, 달을 보고 해라고 하면, 낮과 밤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성이 침묵하고 거짓이 참이 되는 시대대한민국 바야흐로 '숙맥의 난' 절정기 진시황제가 죽고 2세인 호해(胡亥)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의 곁에는 환관인 조고(趙高)가 있었다. 간신 조고는 진시황제의 가장 우둔한 아들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의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였다. 조고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조정 신하들의 마음을 시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신하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사슴(鹿)을 호해에게 바치며 말(馬)이라고 하였다. 호해가 "어찌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가"라고 하자, 조고는 신하들에게 물어보자고 하였다. 신하들은 세 부류로 나뉘었다. 한 부류는 침묵파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잘못 말하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침묵을 선택한 부류였다. 또 한 부류는 '사슴파'였다. 분명 말이 아니었기에 목숨을 걸고 사슴이라고 정직하게 대답한 신하들이었다. 마지막 한 부류는 '숙맥파'였다. 분명 말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지만, 사슴이라고 하는 순간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사슴과 말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이 되기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선택의 결과는 자명했다. 사슴파는 조고에게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숙맥파는 조고의 총애를 얻어 더욱 높은 대우를 받고 벼슬을 얻었다. 침묵파는 목숨은 건졌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두문불출하였다. 바야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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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삶이라는 기적 지면기사
요즘 기분이 나아진 것은 순전히 쾌청한 가을 날씨 덕분이다. 보온성이 좋은 수면 양말을 신고 무명이불을 덮고 잠드는 게 좋다. 새벽에 눈 뜨면 침대 한쪽에서 고양이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든 게 보인다. 고양이 등을 쓰다듬으면 고양이는 잠결에도 기분이 좋아 골골 거린다. 가을은 먼 곳에의 그리움이 속절없이 깊어진다. 상강 무렵 맑고 건조한 햇빛 아래 구절초 꽃은 피어 흔들린다. 먼 길 떠나는 자와 먼 길에서 돌아오는 자의 걸음이 우연인 듯 엇갈리는 계절이다.소규모 살림이 나아질 기미는 희박하지만 견디며 살만하다. 가끔 책을 덮은 뒤 강가에 나가 모래와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온다. 자주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다. 날씨의 독재 아래서 구두는 낡고 양말엔 구멍이 난다. 낡는 게 죄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내 안에는 감정과 욕망이 소용돌이친다. 삶을 생산하는 동력이면서 동시에 극단으로 흐를 때 해악이 되는 이것은 나를 빚는 중요성분 중 일부다. 나는 이것들에 휘둘리며 고투하는 존재이다. 다들 행복을 꿈꾸지만 무엇인지 모르고 산다아이들 자라고, 강물 흐르고, 계절 순환되고나날이 되풀이 같지만 하루도 똑같지는 않아 문득 전혜린을 떠올린다. 난방용 연료로 연탄을 태울 때 생긴 일산화탄소가 농밀하게 떠도는 서울의 탁한 공기를 들이마시면서도 독일 뮌헨의 가스등과 안개를 그리워하던 독문학도 전혜린은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고 썼다. 먼 곳을 그리워함! 인간이 저 너머를 꿈꾸는 것은 발 딛고 사는 지금의 현실이 낙원이 아니라 고통과 불행을 낳는 자리라는 부정적 인식에서 시작한다. 1960년대의 젊은 지식인 전혜린은 제 조국의 가난한 현실과 척박한 지적 토양에 진절머리를 치며 저 서구의 나라를 꿈꾸었을 테다.먼 곳을 그리워함은 우리 안에서 작동하는 본성이고,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이다. 모르는 곳에서 삶을 꾸리고 싶다는 소망이 가없는 꿈일지라도 그 달콤함에서 깨고 싶지는 않았을 테다. 이 마음의 바탕은 살아보지 못한 장소에 대한 동경,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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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구름 속에서 지면기사
어떤 양면성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다. 나에게는 대학교 3학년 겨울에 떠났던 해남여행이 그랬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학생들이 배낭 하나씩 들고 땅끝마을로 향했고 즉흥적으로 보길도까지 다녀왔다. 넷 다 주머니가 가벼웠으나 열정적으로 많은 곳을 다녔으며 잊지 못할 경험들을 했다.우리는 광주역 앞 음식점에서 여행의 첫 끼니를 해결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는 틈새 시간에 빠르게 한 끼를 해결하는 흔한 식당들이 십여 개나 늘어서 있었는데 그 중 하나였다. 벽에 높직하게 올라붙은 메뉴판에는 30가지가 넘어 보이는 음식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메뉴판을 보면서 음식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볶음밥,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등의 평범한 메뉴가 물망에 오르는 순간 불벼락이 떨어졌다. "통일해 이×들아!" 갑작스러운 욕설에 번쩍 각성되어 우리는 1초만에 볶음밥 4인분으로 통일했다. 주방에서는 계속해서 욕설이 쏟아졌다. 싸가지없는 ×들이 처싸돌아댕기면서 사람 바쁜 시간에 이거저거 시켜쌓고 싸가지 없는 ×들이…. 우리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아무 문제 없이 각자 먹고싶은 것을 주문해 잘 먹고 있었다. 우리는 놀라고 부끄러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분을 상한 것은 분명해서 음식을 먹지 말고 나갈 것인가 조용히 의논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번개처럼 빨리 음식이 나왔다. 우리는 대충 먹고 얼른 떠나자는 눈짓을 주고받으며 상한 마음으로 말없이 볶음밥을 한입 먹었다. 그리고 우리 인생 최대의 반전이 일어났다. 볶음밥은 정말이지 태어나 먹어본 어느 유명 음식점보다도 뛰어나게 맛있었다. 기차역 앞 허름한 음식점에서 호남의 손맛을 볼 것이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던 우리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얼굴을 예의주시하던 사나운 주인아주머니는 껄껄 웃기 시작했다."어딜 가거든 싸가지 있게 굴어! 기집애들이 사람 바쁜 데 눈치없이 굴지 말고!"그 말에는 분명히 아까와는 다른 온기가 묻어 있었다. 우리는 마지막 밥풀 하나까지 싹싹 긁어먹고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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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민생정치, 선거제도 개혁이 출발점이다 지면기사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정개특위는 15일 '국회 예산·결산 심사기능 강화에 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입법과 행정부 감시감독 그리고 예·결산 심사는 국회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이다. 예·결산 심사와 관련해서는 정부와의 정보 비대칭성, 총량 및 분야별 재원 배분보다 세부사업 위주의 미시적 심사, 전문성 부족 그리고 결산 심사결과의 다음연도 예산안 미반영 등이 중요쟁점이다.정개특위가 구성된 것은 지난 8월18일. 이날 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남인순 의원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여야 간사를 선임했다. 여야가 정개특위 구성에 합의한 지 한 달여 만이고, 지난 8월2일 위원 선임이 마무리되고 보름가량 지나서다. 정개특위가 내후년 총선의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까지 논의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내년 4월30일까지가 활동기한인데다 논의대상 중에는 법사위 체계·자구 심사 권한 폐지, 교육감 선출 방법 개선 그리고 국회의원 이해충돌방지제도 보완 등 여야 간 이견이 큰 현안이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국회의장단(후반기) 선출 규정과 상임위원장 배분 방식 등도 정개특위의 논의 안건이지만 제대로 될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개특위의 핵심은 국회의원 선거제도 논의인데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치가 우리들 보통사람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의 권력다툼이 그들 자신을 위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우리들 보통사람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개선하는데 초점이 모아지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가 우리들 보통사람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가 국회의석으로 가능한 비례적으로 전환되도록 하는 것이다. 비례와 대표의 문제다. 정치는 국민 삶 현장서 멀어지지 않게하고권력다툼, 보통사람 문제해결 하는데 맞춰야 우리나라 총선의 사표비율이 높다. 낙선자에게 던져진 모든 표, 사표의 비중은 가장 높았을 때가 20대 총선으로 전체 유효투표의 50.3%가 사표였다. 최근 5번의 총선 중 사표비중이 가장 낮았을 때가 지난 21대 총선인데 그래도 사표가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