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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가을에 살아 있음을 기뻐하라 지면기사
가을 아침을 살아서 맞는 일은 기적이다. 가을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질서를 세우며 강한 고요를 안쪽에서부터 확장해간다. 하늘은 청명하고, 모과나무 가지에서 모과가 익어갈 때 제 궤도를 도는 행성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물은 언제나 더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한해살이풀들은 시들어 버석거리고, 철새는 기하학적 편대를 이루고 북쪽에서 날아온다. 하지만 저탄장에 쌓인 석탄은 더 이상 까매질 필요가 없고, 젖소에게서 짜낸 젖은 더 이상 하얘질 필요가 없다.가을은 외롭고 슬픈 영혼들의 합주로 완성된다. 달이 가을밤의 지휘자라면, 물은 겸손하게 낮은 곳에서 저음의 음역대를 맡고 밤의 정적을 깨며 우는 풀벌레들은 높은 소프라노 파트를 맡는다. 가을에는 누군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대성당의 늙은 신부이든 해안에 뒹구는 조약돌이든 상관이 없다. 누구라도 내 고해성사를 받아준다면 나는 조금 더 단순해지고, 조금 더 착해질 것이다. 슬픈 것들은 슬픈 것대로 제 영혼을 정돈풀벌레들은 다른 세상 포기하라고 속삭여 우리는 단 하나의 삶을 살지만 동시에 하나의 삶에서 변주된 여러 삶은 산다. 여럿의 삶을 살다보니 여러 자아가 필요하다. 내 자아의 가장 밑바닥에는 시골 사람이 산다. 시골은 장소나 자연이 아니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고, 잃어버린 낙원이며, 회복되지 않는 상처다. 나는 시골에서 나고 풀숲에서 새 둥지를 찾고, 봉분이 무너진 무덤가 구덩이에서 뱀이 떼를 지어 엉겨 있고, 비 온 뒤 마당에서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걸 보며 자랐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연민하는 일은 시골 사람의 덕목이다. 시골을 떠나며 내 안의 시골은 멸실되고, 시골에서 길러진 덕목은 사라졌다. 이건 내 안에 자연의 신비와 알 수 없음을 잃어버린 탓이다.이제 나는 규격화되고 목적지향적인 삶을 지향하는 도시 사람이다. 나는 했다. 도시사람은 도덕적 완성이나 영혼의 점진적 성장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도시에서의 성공은 자신을 극복하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는 뜻이다. 도시 사람은 땅에 씨를 뿌리거나 열매들을 땀 흘리며 손으로 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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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위기의 여름 지면기사
그날 나는 여행가방을 사야한다고 마음먹은 참이었다. 여행을 자주 다니지도 않으므로 중고 물건이면 충분했다. 원하는 브랜드, 원하는 크기의 중고 여행가방이 강남 어디쯤에 마침 있었고 게다가 거래장소 바로 근처에 절친이 살고 있었다. 여행가방을 사러 가는 길에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면 딱 알맞을 것 같았다. 나는 친구에게 메신저를 보내 다음날 만날 약속을 정하기 시작했다.오랜만의 만남이 일사천리로 성사되는가 싶었다. 친구의 집으로 갈지 가까운 음식점에서 만날 지 의논하던 중에, 친구가 갑자기 양해를 구했다."잠시 후에 다시 연락할게. 주차장이 침수 될 것 같다고, 차를 옮겨놓으라고 하네."여러 날 뉴스를 장식했던 침수 대란의 시작이었다. 친구는 아파트를 둘러싸고 버려진 차들이 둥둥 떠있는 현장 사진들을 여러 장 보내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중고거래는 취소되었다. 더이상 미래공포가 아닌 현실이 된 '기후위기'저소득 국가가 겪던 재난… 선진국까지 확장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공포가 아니라 현실이 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작으로 '총, 균, 쇠'가 가장 유명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문명의 붕괴'다. 이스터 섬, 중미 마야 문명, 노르웨이령 그린란드 같은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루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탁월한 해박함과 통찰력으로, 번성하던 문명이 어느 날 붕괴하고 폐허로만 남게 된 수많은 예들을 분석하여 그것이 무분별한 자원 오남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 그리고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편견 때문이었음을 보여주었다.그린란드에 한때 번성했던 사람들은 대기근 이후 집단 아사했다. 지력이 약한 땅에서 무리하게 축산업과 농업을 고집한 것도 어리석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곳은 지구상에서 가장 수산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바다와 강과 호수에 들끓는 연어와 대구와 넙치를 그대로 놔두고 그들은 굶어죽었다. 말 그대로 '죽도록 어리석었던' 것인데, 아마도 그들은 우글거리는 물고기를 볼 때 우리가 '곤충식량자원'을 대하는 것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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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윤 대통령의 몫이다! 지면기사
정당불신이다. 국민 10명 중 7명은 "양당이 제 역할을 못한다"고 한다. 양당 지지층조차 절반을 넘는다. '대통령 당으로의 거듭나기와 주류세력 교체'로 바쁘지만 국민은 냉담하다.윤석열 대통령 취임 100일의 여론조사 92개에 나타난 정당 지지율 흐름은 상반된다. 국민의힘은 지방선거 때 최고치를 찍은 후 계속 하락하여 9주차부터 30% 중후반대를 유지한다. 더불어민주당은 11주차 이후 국민의힘에 계속 앞선다. 최근 10개 조사로 좁혀보면 민주당이 7대 3으로 앞서지만 내용은 복잡하다. 민주당 지지율은 최고 49.3% 최저 33%, 국민의힘도 최고 38.4% 최저 32.5%를 기록하는데 민주당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유동성이 높다. 국민 10명 중 7명 "양당 제 역할 못한다"'반사이익 정치' 없어… '실력 발휘' 관건 '반사이익의 정치는 없다'는 뜻이다. 윤 대통령을 선택했지만 지지를 철회한 사람 중 '민주당을 지지한다'는 사람은 12.4%다. 지지 이탈층의 29.5%는 지금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민주당이 대통령이나 여당의 낮은 지지율의 반사적 이익을 바란다면 바보 같은 일'이다. '누가 비전과 콘텐츠를 갖고 실력을 보여주느냐'가 관건이다. 여야 어느 쪽이든 열려있는 신당 창당론이 주목되는 이유다. '이재명의 민주당'이 확실시되는 민주당은 비명(非明)계의 선택이 관심이다. 핵심은 '팬덤정당 vs 대중정당'의 싸움이다. 소수의 열정적이며 적극적인 행동가인 강성 지지자들의 확대된 영향력으로 유권자들과 더욱 괴리된 정당으로 변화하는 부정적 결과의 우려다. '위명(明)설법' 주장은 '왜 우리 스스로 방패를 내려놓고, 우리를 지키는 성의 뒷문을 활짝 열어서 우리 동지들을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고 할 여지를 열어놓느냐'는 반론에 작아진다. '닥치고 투쟁' 기조의 민주당은 곧 어떻게 중도층을 끌어안을지 시험대에 오른다.'이준석 갈등'은 여권분화의 뇌관이다. '좌파세력 외에 정권교체를 갈망했거나 윤석열 정부탄생에 기여한 당외 인사 등을 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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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반(反)의 경 지면기사
기록적인 집중호우에 도시는 마비되고, 농촌은 큰 상처를 입었다.침수된 차량이나 무너진 건물은 다시 고치고 지으면 되지만 안타까운 인명 피해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슬픔으로 남는다.이번 폭우로 반지하에 거주하던 세 식구가 들어찬 물의 수압으로 문을 열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은 그 어떤 폭우 피해 소식보다 마음을 찢어 놓는다."하늘은 과연 있는가?" 역사가 사마천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하늘이 있다면 평생 나쁜 짓만 하며 살았던 도척 같은 도둑의 괴수는 왜 천수를 누리며 잘살다 가게 하고, 백이와 숙제 같은 의로운 사람은 수양산에서 굶어 죽게 만드는가를 질문한 사마천의 심정에 동감하는 요즘이다.큰일 생기기 전 작은 징조들 있기 마련쉽다고 방치했던 일이 뒤집혀 크게 번져 재해는 미리 예방할 수 없는 것인가? 초윤장산(礎潤張傘), 밖에 나가기 전 주춧돌(礎)에 습기(潤)가 젖어 있으면 비가 내릴 징조이니 미리 우산(傘)을 준비(張)하라는 뜻이다.어떤 일이 벌어지기 전에 반드시 작은 조짐들이 있게 마련이다. 1:29:300의 하인리히 법칙은 어떤 큰일이 1번 벌어지기 전에 29번의 중간급 사건이 터지고, 그 전에 300번의 작은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세상에 갑자기 찾아오는 재앙은 없고, 졸지에 다가오는 행복도 없다.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서둘러 해결했으면 큰일이 아니었는데 무시하고 방관하다가 결국 큰일로 번져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분들은 조그만 조짐과 징조에 주목하라고 말한다.세상에 어떤 큰일이든 작은 일에서 시작되고, 풀기 어려운 문제도 결국 쉬운 문제를 방치하는 데서부터 발단이 된다.노자는 이것을 '반(反)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어떤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작은 일들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거꾸로(反) 뒤집힌다는 것이다.쉽다(易)고 생각하여 방치했던 일이 뒤집혀 풀기 힘든 어려운(難事) 일이 되고, 작다(細)고 무시했던 것이 어느 순간 뒤집혀 해결할 수 없는 큰일(大事)로 번진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렵고 큰일이 닥치기 전에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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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훈계질이 싫다… 어떤 약전(略傳) 지면기사
훈계질이 싫다. 얕은 지식으로 깊이 아는 체를 하는 자를 경멸한다. 소음과 서커스, 거짓과 허언, 정치가의 웅변이 싫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이념들, 일체의 회의주의도 없는 종교, 영혼이 깃들 여지가 없는 과학, 자동차 경적을 마구 울려대는 자를 싫어한다. 무능력한 가장, 함량미달의 책들, 말없이 끊는 전화, 자기가 정의롭다고 외치는 자들, 낯색 변하지 않고 뻔뻔한 말을 늘어놓는 정치가들, 탐식하는 자를 싫어한다. 봄날 아침 숲속에서 들려오는 뻐꾹새 소리, 펄럭이는 깃발, 4월의 잎사귀들, 막 떠오른 햇살에 금빛으로 빛나는 떡갈나무를 좋아한다. 라벤더꽃이 핀 들판, 빨래가 마르는 가을 오후를 좋아한다. 죄없는 동물을 학대하는 자들에겐 살의마저 솟구친다. 끔찍한 인간들. 불친절을 증오한다. 혼자 캐치볼을 하는 소년, 11월의 마가목 열매, 여행 마지막 날의 쓸쓸함을 좋아한다. 그 여행지가 다시 올 수 없는 먼 곳일 때 그 애잔함은 더욱 짙어진다. 그늘에서 꽃을 피우는 현호색과 바위의 초록 이끼를 좋아한다. 작고 여린 생명들, 어린 고양이, 호수를 가로지르는 물뱀, 작약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끓여주신 호박죽과 수제비를 좋아한다. 목포의 삼합, 평양냉면, 통영에 가서 먹은 봄날의 도다리쑥국과 여름철 민어회를 좋아한다. 여름 아침에 수련 꽃핀 것, 진공관 앰프로 들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의 한 소절, 잘 마른 면 셔츠를 입고 외출하기, 공중으로 도약하는 무용수, 친구의 첫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후에 자는 듯이 죽은 개는 너무 슬퍼서 나를 화나게 한다. 부엌에서 끓고 있는 어머니의 배추된장국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고요하고 적막한 식욕. 나는 곧 맛있는 저녁을 먹겠구나, 하는 기대를 품는다. 낯색 변치 않고 뻔뻔한 정치가들 싫어하고세상이 기만할 때마다 나도 세상을 속였다 당신의 미소는 나를 행복하게 한다. 당신의 하얀 이마와 쇄골을 사랑한다. 사랑할 수 없음, 그 불가능마저 사랑한다. 무지개가 뜨지 않은 다정한 저녁들, 여름 저녁 가장 먼저 떠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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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담을 넘는 사람들 지면기사
어린 시절 나를 생물학의 길로 이끌었던 영웅들이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곤충들의 생태에서 마법 같은 이야기들을 뽑아내던 장 앙리 파브르와 캐나다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야생 늑대들의 삶과 죽음을 기록한 어니스트 시튼이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사춘기 이전까지 나의 숨겨진 자아 정체성은 늑대였다. 내가 네 발로 기어다니거나 방구석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내가 늑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둑한 화장실에서 낯선 침입자 늑대를 물리치고 마루 아래 숨겨진 덫을 찾아내고 장롱에 숨겨둔 어린 늑대들을 보호하며 혼자만의 늑대 세계에 거주했다.청소년기에 새로이 찾아낸 영웅이 템플 그랜딘이었다. 템플 그랜딘은 자폐인으로서 축산 현장의 관행과 구조를 낱낱이 파악하고 동물이 고통이나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는 동물친화적 도축 시스템을 개발했다. 그녀의 통찰에 의하면 죽음 자체는 동물에게 큰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오로지 현재에 충실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도축장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큰 칼의 존재에도 두려움이나 비애를 느끼지 않는다. 템플 그랜딘 같은 자폐인의 '남다른 기억력'이같은 능력 최대 활용한 변호사 드라마 화제 가축이 패닉에 빠져 난동을 부리게 하는 것은 펄럭이는 깃발이 드리우는 그림자의 빠른 움직임, 발굽이 미끄러지는 젖은 철판, 직각으로 구부러지는 통로, 듬성듬성한 나무판자 사이로 돌연히 쏟아지는 눈부신 빛 같은 뜻밖의 사물들이다. 템플 그랜딘은 도축장에서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제거하여 동물들이 안정적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고요한 최후를 맞을 수 있는 동물친화적 도축장을 설계했다. 동물친화적 도축이라니 이율배반적으로 들리지만 패닉에 빠진 동물이 몸부림치다가 다치면 도축된 고기와 가죽의 품질이 저하되었기 때문에 이는 축산 농가의 비용을 절감하고 효율을 높이는 데에 크게 기여했고 템플이 설계한 새로운 시스템은 북미 축산 농가에 빠르게 적용되었다.보통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 동물의 사고를 한눈에 꿰뚫고 기존 건축 문법과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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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윤석열 어젠다, 위기극복의 시작이다 지면기사
권력의 결심은 확고하다. 지지율 하락은 감당할만하고 감수할 수 있으며 새로운 권력질서의 확립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의 결과다. 권력은 두 가지 선택지를 갖는다. 하나는 단기대안으로 지지층 중심의 진영접근이자 보수적 요구의 부응이다. 대통령의 '국기문란'과 '국가범죄' 언급을 두고 일부에서는 '문재인 정권 털기의 사정정국 강경 드라이브 임박'으로 해석한다. 문제는 단기처방으로 지지층을 지킬 수 있느냐인데 이게 쉽지 않아 보인다. 최근 여론동향을 보면 '데드크로스'를 넘어 출범 한 달 20일 정도에 이런 사태는 심각한 상황의 '총체적 난국'이다.6월 중순 이후 조사를 보면 ARS방식에서는 부정평가가 절반을 넘었고, 면접방식에서도 긍정평가가 빠르게 줄어드는 추세였다. '이준석 징계효과'로 부정평가가 60%를 넘는 조사가 나왔는데 정부출범 후 가장 큰 격차다. 정당 지지도에서조차 민주당 역전현상이 나타난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이 조정 없는 하락세로 저점을 계속 경신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대통령 지지율이 여당 지지율보다 낮게 나오는 경우는 핵심 지지층의 동요를 의미한다. 2030과 50대 그리고 중도층이 먼저 떠났고 영남과 60대 이상 그리고 보수층의 이탈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특별감찰관 임명·인사 시스템 점검 시급여당·한덕수 내각의 책임 역할 부여해야 윤석열 지지의 '반사체적 성격' 때문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은 없다. 작년 12월31일부터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이 시작되기 직전인 지난 3월2일까지 여론조사 260개의 정권교체 평균 지지여론은 51.6%였다. 대선에서 그는 '반(反)문재인+비(非)이재명 결집'으로 48.6% VS 47.8%, 0.73% 포인트의 신승을 거두었다. 정권교체라는 대선의 정치적 어젠다에 올라탔고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의 필요와 지지로 간신히 이겼다. '정권교체의 도구'가 윤석열 권력과 정치의 출발점이어야 하는 이유다.최근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정권교체' 이후의 '윤석열 어젠다'를 요구하는 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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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아버지 노릇하기의 어려움 지면기사
어려서 외할머니 아래서 외삼촌들과 함께 자랐다. 오랫동안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기억에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부부는 고향을 떠나 낯선 고장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경기도 북부의 운천이라는 소도시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운천이 어딘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미군부대에서 용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자식을 떼어 놓고 낯선 고장에서 삶을 개척하는 젊은 가장의 수고와 고단함을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나는 열 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자랐다. 영유아기 때 아버지와의 접촉 기억은 없다. 너무 어린 시절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를 떠올리면 엷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어쨌든 아버지의 자애를 경험하지 못한 채 성장한 것은 내 불운이다. 아마도 아버지의 사랑과 따뜻한 훈육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면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오랫동안 '아버지 노릇하기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에 사로잡혔던 데는 그런 곡절이 있었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자신에게서 쪼개져 나온 또 다른 자기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신의 유전 형질을 물려주며 거기에 아들은 후천적으로 아버지를 닮고자 노력한다. 육아에서 배제된 아버지가 자식의 성장에 끼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라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아버지는 자식의 지능, 사회성, 언어능력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자식은 자신에게서 쪼개져 나온 또다른 자기아버지 된다는 것, 돌봄 의무 기꺼이 지는 일 인간 사회에서 아버지가 제 자식에게 애정을 쏟고 돌보는 현상은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포유류 전체에서 보면 포유류 수컷 중에서 제 자식을 돌보는 것은 불과 5% 정도라고 한다. 포유류에게 아버지의 돌봄 현상은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버지의 자식 돌봄은 자식의 사회경제적 성공을 위한 일종의 투자다. 아버지의 부재는 분명 자식의 신체나 인지 측면에서의 발달과 성장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버지와 떨어져 산다는 것은 그만큼 아버지의 돌봄 투자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진다. 모든 남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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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영원한 것은 없다 지면기사
우리집은 광화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광화문에도 사람이 사냐는 반문이 흔히 돌아오곤 한다. 광화문에 사람이 산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출장을 가면 헬리콥터가 우리집 위로 날아갔다. 헬리콥터 날아가는 소리가 상당히 커서, 대통령의 지방 일정을 모르고 넘어가기 어려웠다. 이제 청와대는 시민공원이 되었으므로 그 일도 모두 추억이 되었다. 광화문이라는 특별한 동네에 한평생 살다보니 이래저래 정치가 일상생활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일이 많았다. 내가 30대였을 때까지는 대통령이 한번 출타할 때마다 20~30분은 족히 걸리는 교통통제를 했다. 대통령의 일정만 중요하고 시민들의 스케줄이야 아랑곳없던 시절이었다. 하염없이 서있는 버스 속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울화통을 터뜨리는 게 일상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VIP의 편의를 위한 광화문 일대의 차량통제는 차츰 사라졌다. 지난 10여 년간은 대통령 출타 때문에 교통통제로 불편을 겪은 일이 없다. 민주주의적 사고와 교통통제 기술력이 함께 높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묘하게 교통신호를 조작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교통경찰이 잠깐씩 일반차량 통행을 지도하는 사이에 의전차량은 놀라운 속도로 복잡한 도심을 통과한다. 의전차량이 지나간 뒤 곧바로 일반차량들이 잠시 빨라진 도심통행속도를 즐기며 그 뒤를 따른다. 이 모든 일은 1~2분 안에, 눈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진다.대통령 출장 헬리콥터 소리·시위정보 확인광화문에 살다보니 '정치'가 일상속 자리 기억하건대 2008년 광우병 사태 이전까지 광화문 일대는 도심 시위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도심 시위는 서울역, 을지로, 명동, 대학로 하는 식으로 구도심 일대 여기저기에서 일어났다. 광장이 생긴 이후 광화문은 시위의 메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다. 이후 10여년간 광화문 거주자는 아침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듯 오늘의 시위정보를 확인하며 지내게 되었다. 시위 시간은 몇시인지, 시위대의 규모는 얼마인지, 행진 구간은 어디인지, 버스 우회구간과 지하철 무정차 통과구간은 어디인지, 하나하나 꼼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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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칼럼] 아버지와 아들 지면기사
"재벌 집안에 아들과 아버지가 있는 줄 알아?" 집안 문제를 아버지와 상의해보라는 내 권유에 재벌 회장 아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동안 그가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낼 때면 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에둘러 표현하는 줄 알았다.그런데 그 말을 듣고부터 그를 만나고 나면 뭔가 허전했다. 한번은 임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저렇게 굽실대기만 하는 놈들이 회사에 꽉 차 있다. 저놈들 보는 것도 지긋지긋하다"며 빨리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겉치레 겸손을 수없이 보며 자랐을 재벌 아들 자리가 안쓰럽게 느껴졌다.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 부잣집이 부러웠다. 널따란 정원에서 아빠가 사다 준 멋진 자전거를 타는 아들, 생일이면 선물을 한 아름 들고 나타나는 아빠…. 내 아버지는 한 번도 그런 선물을 해주지 않으셨다.하지만 아버지는 늘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나와 바둑, 장기를 두었고 어려운 산수문제도 같이 풀었다. 가끔은 돈을 걸고 화투도 쳤다. 한약방을 하는 아버지가 저울을 들고 한약을 지으면 나는 작두로 약재를 썰었고, 내가 늦은 밤까지 공부를 하면 아버지는 연필을 깎아주었다.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부터 찾았고, 어떤 시험 문제를 어떻게 틀렸는지까지 다 말했다. 손님이 많아 한약방 서랍에 돈이 모이는 날이면 내 주머니가 든든한 듯 기뻤다. 그렇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였다. 그런데 그 재벌 아들에게는 그토록 많은 것을 이룬 아버지가 그런 존재라니…. 늦은 밤 공부하면 연필을 깎아주었던 아버지친구처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 듯 세월이 흘러 아들이 회장이 되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수사를 받거나 구설에 오르는 그를 본다. 우리에게 진정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중학생 때 섬마을에 2년이나 가뭄이 들었다. 나는 물 긷는 사람들이 드문 한밤중에 십여 리 떨어진 샘터에 가서 졸졸졸 나오는 물을 한참 동안 모아 길어 와야 했다. 물동이에 물을 가득 담아 물지게를 지고 걷다가 쉬고 걷다가 쉬곤 했다. 그래도 아버지와 함께 가는 날이면 그 고된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