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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트북] 군 공항을 옮기든 통일을 시키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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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군 공항을 옮기든 통일을 시키든 지면기사

    공군 출신이다 보니 훈련소 기간을 뺀 24개월 군 생활을 전투기 엔진 소리와 함께 살았다. 보직 특성상 공군 주력기 KF-16이 뜨고 지는 활주로 구역에서 종일 일하고 밥 먹고 잠도 잤다. 그 정도면 전투기 소리에 적응했겠지 싶지만 그렇지 않았다. 착륙보단 이륙할 때, 특히 전투기가 처음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엔진 소리가 가장 큰데 그야말로 굉음이자 괴음이다. 폭발음 같기도 하면서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연이어 찢어지거나 터지는 소리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주황색 귀마개를 양쪽 귀에 꽂아도 전투기가 이륙하는 동안 대화가 불가한 건 물론 순간 짜증이 날 정도다.고작 2년, 그 소리를 들었는데도 이 정도인데 10년, 20년 넘게 군공항 근처에 살거나 매일 출퇴근해 근무나 장사를 하고 있다면 그 스트레스는 얼마만큼일까. 뜨고 지는 전투기 아래 활주로가 아니라 공군부대 근처를 지나다가 전투기 지나는 소리를 들어도 소음 체감도는 군 생활 당시 듣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이런 군공항 소음피해와 관련한 주민 집단소송이 진행된 수십 년 동안 뒷짐만 지던 국방부가 뒤늦게 정부 차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군소음보상법을 만들었다. 내년부터 소음피해 규모에 따라 1인당 월 3만~6만원씩 준단다.그런데 보상기준이 엉망이다. 일단 같은 소음피해 지역이어도 거주자가 아닌 직장인·사업자는 보상을 못 받는다. 그러면서 거주자이긴 하나 당사자 직장이나 사업장 위치가 멀 경우엔 보상금을 깎는단다. 소음피해지역으로 새로 이사 온 사람에겐 보상금을 절반밖에 안 준다. 33년 전 군공항소음 문제가 이미 전국에 알려져 그 이후 이사 온 경우는 이를 이미 인지했을 거라는 게 이유다.이런저런 이유로 보상범위를 늘리면 그만큼 예산이 불어나고 정부가 그것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은 알겠다. 그래도 최소한 같은 보상대상지에 거주하거나 일하는 사람들끼리는 공평한 보상금을 줘야 하지 않나. 예산 때문에 보상기준도 제대로 못 세울 거면 주변 주민들이 적은 곳으로 군공항을 옮기든지, 아니면 통일을 시키든지. /김준석 사회부 기자 joonsk@kyeongin.com

  • [노트북] 출정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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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출정식의 기억 지면기사

    청년이 전쟁터에 나서기 전, 마당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굿판을 벌였다. 전쟁터에 나서는 이의 사기를 북돋우고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기원했던 의식, '출정식'이다.내가 출정식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험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수능 전날 열린 '수능 출정식'이다. 출정식의 시작은 책 버리기였다. 학생들은 의식을 치르듯 그동안 공부했던 책들을 모아 모조리 쓰레기더미에 버렸다. 책을 찢어버리는 아이들도 있었다.책을 버린 후 모인 강당에서는 우리를 위한 응원행사가 펼쳐졌다. 다 같이 '수능 대박' 구호를 외치고 비장하게 응원가를 불렀다. 강당을 나오니 입구부터 교문까지 선생님, 후배들이 양쪽으로 늘어서 우리가 지나갈 길을 만들고 있었다. 후배들은 팻말과 현수막을 들고 선배들의 고득점을 목이 터져라 기원했다. '내일 볼 수능 시험지도 아까 내동댕이친 책들처럼 찢어버릴 수만 있다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었다.수능은 증오받는 시험이다. 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헌신짝처럼 버림받은 수능 학습서들이야말로 수능이 '배움의 기쁨'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증오는 엄청난 부담감에서 온다. 몇십 년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라는,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생각으로부터. 언제부턴가 고등학교에서 해마다 열렸던 수능 출정식은 시험의 무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비장함이 은연중에 표출된 의식이기도 하다. 교육이 마치 적군을 이기고 살아 돌아와야 할 전쟁터에 비유되는 것이다.코로나19 이후 맞는 두 번째 수능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젠 코로나로 출정식은 하지 않겠지만 수능이 학생들에게 주는 부담감은 여전하다. 코로나 감염까지 신경 쓰느라 수험생들은 하루도 맘 편히 공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쉼 없이 달려오느라 고생 많았던 모든 수험생들이 무사히 시험을 치르기를, 나아가 수능이 살벌한 전쟁터가 되지 않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 /이자현 사회부 기자 naturelee@kyeongin.com이자현 사회부 기자

  • [노트북] 무엇이 그들을 불법으로 내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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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무엇이 그들을 불법으로 내모는가 지면기사

    운전할 때 가장 마주하기 싫은 상황이 있다. 주차장에 갔는데 자리가 없거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내 차 하나 세워둘 공간이 없을 때. 빈 곳이 보여 그쪽으로 가면 '장애인 주차구역'이고, 주차돼 있던 차가 빠져나가 자리가 생겨도 다른 차가 냅다 들어가면 방법이 없다. 막막함과 불안함이 나를 감싸고, 촉각을 곤두세운 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진이 다 빠진다.이런 상황을 매일같이 마주하는 사람들이 있다. 화물차 운전기사들이다. 승용차는 다른 주차장이라도 찾아서 간다지만, 주차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화물차는 대안이 없다. 올해 8월 기준 인천에 등록된 영업용 화물차는 3만2천318대인데, 인천 내 화물차 주차장은 5천560면에 불과하다. 화물차 절반가량이 타지에 나가 있다고 해도 1만대 정도는 주차장 없이 남는다.영업용 대형 화물차는 '차고지 증명제'에 따라 1년마다 주차 공간을 확보해 신고해야 한다. 도심 속 화물차 주차장이 부족한 탓에 대다수가 차고지로 활용할 수 없는 곳이나 실제론 없는 주소를 차고지로 등록해 놓고 있다. 취재하며 만난 화물차 기사들은 대부분 자신의 차고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었다.선착순으로 자리를 배정하는 공영차고지는 새벽 2~3시부터 줄이 이어질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이를 놓친 화물차 기사들은 매달 30만원 내외 비용을 내고 민영주차장을 이용하거나, 이마저도 자리가 없을 땐 단속을 감수하고 불법 주차를 할 수밖에 없다.주택가 등에 불법 주차된 화물차는 운전자와 보행자의 시야를 가려 교통사고를 유발한다. 지자체마다 불법 주차 단속을 벌이고는 있지만 이는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 '화물차는 크고 위험하다'는 인식만 있으면 안 된다. 화물차 주차장 부족은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유진주 인천본사 경제팀 기자 yoopearl@kyeongin.com유진주 인천본사 경제팀 기자

  • [노트북] 몰랐거나, 모른 체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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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몰랐거나, 모른 체했거나 지면기사

    의정부의 어느 택시조합 사무실을 찾았을 때다. '카카오T 블루' 가맹을 얻지 못한 기사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던 와중에 최성원(가명)씨가 "나라고 힘든 게 없겠어요?"라며 동료들의 말을 끊고 중간에 끼어들었다. 성원씨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카카오 가맹 택시를 몰았다. 성원씨는 영문도 모른 채 평점이 깎여 속앓이를 하는 것에 대해, "콜이 더 들어오니 '사납금'을 더 내라"는 회사의 압박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보다 그를 더 짓누르는 건 동료들에 비해 사정이 조금 낫다는 사실 자체다.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들을 단일한 어려움을 가진 하나의 '집합'쯤으로 여겼다. 제각각 감춰둔 속사정을 꺼내며 열을 올리는데, 나는 맨숭맨숭한 표정으로 목청이 높아지는 지점을 좇아 고개만 움직였던 거 같다. 플랫폼 안팎 누구나 개별적인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며칠 전 수원 권선구의 한 재개발단지 조합장이 새로 뽑혀 멈췄던 사업이 재개될 전망이라는 소식에 문동식(가명)씨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철거가 반쯤만 돼 가위로 싹둑 잘린 것 같은 위태로운 건물 옥상의 망루에서 밤낮으로 철거에 맞서온 동식씨를 본 그날이다. 당시 그는 내게 다짜고짜 "난 기자를 안 믿어"라고 했다. 그러다 지나가듯 이런 말도 했다. "부모가 일궈 놓은 땅인데…. 30년이 넘도록 내가 이 자리에 살았는데…." 나지막했지만 선명하게 귀에 꽂혀 멈칫했던 것 같다. 물론 기사 방향과 어긋난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그 말을 뒤로하고 다음 장소로 발을 뗐다. 어쩌면 그 말을 모른 체하려 애썼던 것 같다.'설루션 저널리즘'은 언론계에서 여전히 핫한 화두다. 고발과 비판은 됐으니, 언론이 사회 문제의 해결사로 거듭나라는 취지로 들린다. 무작정 까대는 언론 관행에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몰라 헤매고, 때론 부러 모른 체해야 속이 편한 내게 먼 나라 얘기가 아닐까. 그보다 꼭 해야 할 질문을 던지고, 편견 없이 대답을 받아들일 마음은 준비돼 있는가. 나는 여전히 이 물음 앞에서 자신이 없다. /조수현 경제부

  • [노트북] 아닌 밤중에 '고막 테러' 굉음 오토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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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아닌 밤중에 '고막 테러' 굉음 오토바이 지면기사

    하루를 마무리할 때면 어김없이 불청객이 찾아온다. 온 동네가 떠나갈 듯한 굉음을 내뿜으며 도로를 질주하는 불법개조 오토바이다. 잠을 청하려 눕자 오토바이 한 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귀청을 때리며 지나간다. 욱하는 마음에 밖을 내다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도로는 잠잠하다. 겨우 잠이 들면 또 다른 오토바이가 폭탄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남기며 저 멀리 사라져 간다.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술래가 된 것 같다. 이마를 손에 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말하는 사이 등 뒤에서 슬금슬금 다가오는 인기척에 신경이 곤두서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면 무슨 일 있었냐는 듯 꼼짝도 않던 친구들을 보면서 바짝 약이 올랐던 기분과 비슷하다. 창문을 닫아도 별 소용은 없다. 이어폰을 꽂거나 귀마개까지 동원했지만, 아닌 밤중에 '고막 테러'를 당하고 나면 잠이 쉽게 올 리 없다.현장 단속에 나서는 경찰들이 '상시 단속' 현수막을 내걸고 암행 순찰차까지 동원하지만 역부족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불법개조 오토바이를 따라가서 잡아내기도 쉽지 않지만, 막상 잡아도 소음 허용 기준치를 넘어서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행 소음·진동관리법상 이륜차의 소음 허용기준치는 105㏈. 오토바이를 세운 상태로 배기음을 측정하면 허용치를 넘기는 오토바이는 거의 없다. 달리는 순간 발생하는 굉음 수준의 데시벨이 측정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경찰이 현장 단속에 나서서 어렵게 측정해도, '소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심히 운행해달라'는 안내 외에는 딱히 취할 조치가 없다.이륙하는 항공기나 달리는 기차에서 나오는 소음이 100㏈ 정도인데, 도로를 달리는 오토바이의 소음 허용치가 이보다 높은 건 이해하기 어렵다. 매일 밤 곳곳에서 예고 없이 도시의 적막을 깨는 오토바이의 굉음을 단속으로만 대응하는 건 한계가 뚜렷하다.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소음 기준 허용치를 하루빨리 낮춰야 할 때다. /한달수 인천본사 사회팀 기자 dal@kyeongin.com한달수 인천본사 사회팀 기자

  • [노트북] 국감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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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국감의 추억 지면기사

    "그럴 거면 사퇴하세요.", "아니 의원님 답변할 기회를 좀 주세요."5년 전 갓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브라운관에 비친 국정감사장의 모습이다. "왜 내 말을 끊느냐"며 의원 간 고성이 오가고 정치 이슈에 대한 대책과 해명 대신 '사퇴'를 종용하던 그 모습은 국감이 '국정'을 논하는 자리가 아닌 '정쟁'을 벌이는 자리라는 걸 일깨워주던 순간이었다.이후 국민들은 잘못된 정치 관행을 저지른 대통령에 대항해 촛불을 들었고 정치적 무관심이 우려될 정도로 떨어졌던 선거 투표율은 다시 반등해 제19대 대통령선거·제7회 전국지방선거·제21대 국회의원선거 모두 각각 2000년대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좋은 사회를 만들고 누리기 위해 국민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자신이 가진 권리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등 국민 투표로 선출된 구성원들은 어떨까. 그 물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국정감사라고 생각했다.기자가 되고 처음 맞은 국감은 그래서 더 각별했다. 18일 오전 '경기도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실'이라 적힌 국감장을 들어설 때 긴장되고 설렜던 이유다."측근 비리 나오면 사퇴하겠습니까.", "7분 질의했으면 답변할 기회도 주셔야죠." 기대와 달리 직접 본 국감 현장은 5년 전 TV를 통해 본 장면과 다르지 않았다. 8시간 가까이 진행된 질의는 대부분이 '대장동'이었다. 물론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으니 그를 둘러싼 의혹 검증은 필요하다.다만 이날 경기도 정책은 22분, 도민의 '안전'과 관련된 의제는 단 6분의 질의만 있었다. 1천350만 경기도민을 위한 '정책질의'가 대장동 의혹에 묻혔다. 내게 흑역사로 각인된 국감현장은 과연 언제쯤 보다 나은 정책을 논하는 장으로 변할 수 있을까. /고건 정치부 기자 gogosing@kyeongin.com고건 정치부 기자

  • [노트북] 너의 목소리가 '다'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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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너의 목소리가 '다' 들려 지면기사

    가수 이하이의 '한숨'은 한때 내 음악 플레이리스트 최상단에 있었다. 그만큼 이 노래를 즐겨들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위층 주민이 부르던 '한숨'이 천장을 뚫고 들려오기 시작한 후로는 '한숨'은 내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졌다.참다못해 위층에 올라가 항의도 해봤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소음으로 인해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결국, 이사를 하고 나서야 윗집에서 들려오던 망그러진 '한숨'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이처럼 공동주택에 사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겪어봤을 층간소음이 개인 간 문제를 넘어 이제는 사회적 문제가 돼가고 있다.지난 9월 전남 여수에서는 층간소음에 화가 난 아랫집 주민이 윗집 일가족 4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2명이 숨지는가 하면, 인천의 한 빌라에서는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빚던 이웃 주민끼리 몸싸움을 벌이다 흉기까지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층간소음이 급기야 살인까지 부르는 '사회적 시한폭탄'이 되자 각 지자체가 층간소음 갈등 관리에 직접 팔을 걷고 나섰다. 인천시의 경우 의무관리대상(300가구 이상 공동주택, 150가구 이상 승강기가 설치된 공동 주택 등)인 아파트 등 공동주택에 '층간소음관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올해 3월부터는 '층간소음전문컨설팅단'도 운영하면서 층간소음 갈등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그럼에도 관리주체가 없는 빌라 등 다세대주택은 여전히 '층간소음관리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이 때문에 지자체는 층간소음관리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도록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이다.이러한 제도적 장치와는 별도로 층간소음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민 간 배려가 가장 필요하다. 공동주택에 살고 있다면 잘 기억해 두자. 내가 들리는 만큼 이웃에게도 당신의 목소리가 '다' 들린다는 사실을. /변민철 인천본사 사회팀 기자 bmc0502@kyeongin변민철 인천본사 사회팀 기자

  • [노트북] 문화는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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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문화는 멀리 있지 않다 지면기사

    돌이켜 보면 나의 학창시절에는 미국, 일본 등 외국 드라마와 음악, 연예인들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외국어로 된 노래를 외워 흥얼거리고, 그들이 나오는 방송을 보기 위해 한글자막은 필수였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는 바뀌었다. K-팝, K-드라마, K-푸드 등 한국이란 이름표가 붙은 문화의 개념은 더욱 광범위해졌고, 이를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우리나라 연예인들의 영상에 외국어 자막이 있는 것을 보고 새삼 우리 문화의 힘을 떠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부심 속에서 우리가 문화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인 듯하다.사실 문화는 늘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행정기관의 예산 삭감 우선순위 역시 문화다. 먹고 사는 문제와 동떨어진 분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하다.하나의 예로 경기도 미술관·박물관의 소장품 구입예산을 보자. 단 한 푼도 배정되지 않았던 예산이 2018년부터 편성되기 시작했는데 올해 반토막(5억원) 났다. 이 예산으로 경기도 산하 미술관·박물관 6곳이 나눠서 소장품을 구입해야 한다.경기도의 문화 관련 예산도 가까운 서울·인천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데, 2018년부터 전체 예산의 2%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도 수많은 지역에서 미술관을 유치하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정치적 구호쯤에 그치고 말았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문화는 거창하고 고급스럽다거나, 일부 관심 있는 사람만 찾아 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다변화된 문화의 저변에는 사람들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누구나 무엇이든 즐길 수 있는 것이 문화라고 한다면, 이제는 이에 대한 가치와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오징어게임의 전 세계 시청자가 1억1천만명이 넘은 것처럼 말이다. /구민주 문화체육팀 기자 kumj@kyeongin.com구민주 문화체육팀 기자

  • [노트북] 80대 노인의 항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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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80대 노인의 항변 지면기사

    "만약 성추행 혐의가 사실이더라도 회장이라는 지위가 있고, 노인한테 그래도 되는 거요?"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로 검찰에 넘겨진 대한노인회 한 지회 소속 회원을 옹호하겠다며 노인회 관계자가 한 말이다.그의 항변을 듣다 보면 참 기가 찼다. "성추행한 사실이 없고 있다 한들 무엇이 문제냐. 노인에게 이렇게 대우를 해도 되는 것이냐."취재현장에서 만난 가해자를 두둔하던 또 다른 노인도 이렇게 말했다. "회장님 지위도 있고 아직 조사 중인 사안인데 직원들은 당장 직위를 내려놓으라고 난리야. 말도 안 되지." 성추행 혐의를 받은 노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손사래까지 치면서 당연하다는 듯 수긍했다.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이가 혹여나, 불편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만났다. 하지만 그 자리는 굉장히 언짢았다. 취재 자리엔 굳이 아내도 동석했다. 결국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성추행 당시 상황에 대해선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없었다. 그의 아내는 30분이 넘도록 기자를 지켜봤다. 불편했다. 정작 검찰 조사를 받게 된 노인은 당당했다.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한국사회는 어른과 어린아이 사이 사회적 순서와 질서를 나눈다. 나이를 앞세운 그의 주장에 '젊은' 기자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한국사회는 수직 계열화된 서열문화가 뿌리 깊게 박혔다. 나이에 따른 서열문화가 강하다. 그 노인도 이러한 문화에 기대어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것 같다.서열이 고착화된 곳은 병든 사회다. 통용되는 사회적 기준을 뒤엎자는 것은 아니다. 바꿀 수 없다면 최소한 우리 사회가 나이에 유연해야만 한다. 나이가 곧 한 사람의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80대 노인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의 안일한 태도가 이번 사태를 불러일으킨 것은 아닐까 우려스럽다. /이시은 사회부 기자 see@kyeongin.com이시은 사회부 기자

  • [노트북] 오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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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트북] 오감도 지면기사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제4의 아해가…'.수도권 살이 4년 차, 원룸 '방'에 사는 친구가 집 얘기를 하다 "방문을 열면 거실이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친구가 무심코 내뱉은 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교육공무원으로서 남부럽지 않은 직업과 스펙을 갖춘 친구에게 사회가 허락한 물리적 면적은 열평 남짓한 방 한 칸이었다.사기업은 다를까. 이름만 대면 해외에서도 알 법한 국내 대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도 4년가량을 원룸에서 살다 최근에야 '영끌'해 6억원짜리 아파트에 들어갔다고 한다. 25평짜리 저층부 아파트를 샀다고 말한 친구는 "여기서 신발장만 내 거고 나머진 다 은행거야"라며 웃는다. 친구가 한 평 남짓 신발장을 사는 데 들인 돈은 3천만원이었다.미래의 주역이라고 불리는 청년 대다수가 따개비처럼 한 건물에 다닥다닥 붙어산다. 희한한 시대다. 이 시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주거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며 머리를 싸매곤 한다.이름만 들어서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공공주택 사업이 즐비하지만 결국 공통점은 한 사람당 열 평 남짓의 공간을 허락한다는 것이다. 주택 혹은 집보다는 방이란 표현이 더 알맞을지 모르겠다.애석하게도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방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그러했듯 침실과 거실, 손님맞이가 가능한 작은 방과 옷방, 작은 창고가 있는 집이 필요하다.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집이지 연명을 위한 방은 아니다.이쯤에서 다시 일제강점기 불길하고 이상한 마을의 모습을 나는 까마귀 눈을 통해 표현하려 했던 이상의 시 마지막 구절을 꺼낸다.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명종원 정치부 기자 light@kyeongin.com명종원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