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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로켓의 속도를 포기하면 지면기사
건설현장보다 배로 힘든 쿠팡 심야조자본주의 속도전에 죽어나는 노동자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감시·견제해야 불편하지만 속도의 편리함 포기하고 모두에게 안전한 노동환경 개선 필요어릴 적부터 로켓은 빠른 속도의 상징이었다. 불을 뿜으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로켓은 지구상의 모든 존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던 지구의 중력을 벗어날 수 있을 만큼 빨랐다. 그래서 누군가 매우 빠르다고 말할 때, '로켓'처럼 빠르다고 이야기했고 악당 로봇을 무찌르는 빠른 주먹도 '로켓' 주먹이라고 불렀다. 굳이 물리의 법칙을 떠올리지 않아도 속도가 빨라지면 힘의 크기가 늘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그렇지만 그 힘을 책임감 없이 함부로 사용하면 누군가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게 되고 그게 바로 로켓 주먹을 맞는 악당이 된다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쿠팡에서 심야조(밤 9시~새벽 6시)로 일한 적이 있다. 원래 밤에 글을 쓰는 올빼미족이라 졸릴 걱정 없고, 코로나 때 폐업했지만 체육관에서 주짓수를 가르치던 시절에 매일 생업으로 운동을 해왔던 터라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막상 새벽 물류 일을 하러 나가보니 컨베이어 속도에 맞춰 상·하차 하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생계 때문에 종종 다니던 건설현장보다도 배로 힘들었다. 중간에 딱 한 번 30분 쉬고 새벽 내내 쉬지 않고 일했다. 반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일이 손에 익어 할만 해지면 컨베이어에 물건을 더 많이 쏟아서 속도를 높였다. 숙련자가 많아 할당 물량을 빨리 끝낸 그룹은 쉬는 것이 아니라 높은 층에서 지켜보던 관리자가 물류가 쌓인 곳으로 이동시켜서 계속 일하게 했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도착하는 로켓의 속도는 시스템이 아니라 물류 노동자들의 땀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냉방 장치는 없었고 선풍기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이 없고 차가 수시로 드나드는 개방된 곳이기에 냉방뿐 아니라 겨울에 난방이 제대로 될 리도 없었다. 일당이 세다고 해서 갔던 건데 손에 쥔 돈은 9만원을 조금 넘었다. 뉴스에선 쿠팡에서 계속 사람이 죽었다. 로켓배송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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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그때처럼 지면기사
한때 친구들과 어디든 덜컥 다녀어느 순간 결혼·출산 10년이 훌쩍떠나는 법 잊은 나, 문득 여행 제안"오랜 만에 여행, 하나도 겁 안 나""여행 뭐가 겁나, 인생이 겁나지"드라마 작가 A와 마케팅회사에 다니는 B는 한때 나와 가장 자주 여행을 떠나는 이들이었다. 가장 일하기 싫은 목요일 오후쯤이 되면 슬그머니 여행사 홈페이지를 열어두고 마우스를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칭따오 먹태가 그렇게 맛있다던데", "러시아 현지에서 마시는 보드카도 정말 낭만적일 것 같지 않아?", "신주쿠 고루덴가이라는 곳엔 진짜 끝내주는 튀김집이 있대." 하릴없이 그런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대부분은 덜컥 결제를 해버리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절 칭따오도, 블라디보스톡도, 도쿄도 아무렇게나 떠나곤 했다. 여행뿐이 아니어서 우리는 서로의 생일을 빼먹지 않고 챙겨주었고 가끔, 아주 가끔 누군가가 쓸쓸하다 하소연하면 가장 빨리 달려와 주었다. 종교인도 아니면서 크리스마스이브는 반드시 같이 보냈고, 연애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셋이서 발렌타인 17년산을 마셨다. "있잖아, 매일 그렇고 그런 선물 말고 조금 로맨틱하게, 목욕가운 같은 선물을 받고 싶어." 누군가 말을 꺼내면 누군가 반문했다. "무슨 날이기에 선물 타령이야?" 그러면 뻔뻔하게도 대답했다. "아무 날도 아닌데?" 아무 날이거나 말거나 우리는 목욕가운을 사주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투정을 부려 통 쓰잘 데 없는 커다란 곰 인형을 선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다 옛날얘기다. 웃자고 꺼낸 이야기라 해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추억담은 뭐랄까, 한물간 배우가 옛날 좋았던 시절을 온종일 주절대는 것 같아 청승맞았다. 어느 순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열 살이 되었다는 건 내가 그랬던 시절로부터 십 년을 훌쩍 뜀뛰기 했다는 거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다 추억 뜯어먹고 사는 거야." A와 B, 나는 칭따오보다 훨씬 맛없는 먹태를 동네 맥줏집에서 추억처럼 뜯어먹으며 투덜거렸다. "열 살이면 십대 아냐? 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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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번 판은 무르고 지면기사
뻔한 악보다 착한 사람이 수수께끼결핍 없이 자랐다고 선해지지 않아부부가 황금 어떻게 쓰는지 보고프면행운의 여신이여 숫자 빼먹지 말고여섯 자리를 고대로 점지해주기를살다보면 친척은 아니지만 친척과 유사한 관계를 맺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시댁인 속초에 갈 때마다 만나는 가족이 있다. 아이들끼리 노는 궁합이 잘 맞아 명절이나 방학에 속초에 가면 부러 시간을 만들어 한나절을 보낸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깊은 인상을 주었다. 보기 드물게 선한 사람들이라고 할까.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것은 아니나 동네의 홍반장 노릇을 하며 독거노인이나 어려운 이웃들을 살뜰히 챙긴다. 폭설에 제설작업이 미진한 골목길은 알아서 치우고, 손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나서서 돕는다. 부부가 한마음으로 팀워크를 발휘하는데 일을 무서워하지 않는 성격이라 나 같은 느림보가 보기에는 경이로운 수준으로 다양한 일을 척척 해낸다.내게는 착한 사람들이 수수께끼다. 악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사랑의 부족과 결핍으로 인해 뒤틀린 인격, 자신에 대한 미움을 타인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내는 투사, 악의 플롯은 진부하다. 대체로 비슷비슷한 서사를 지녔기 때문이다.반면 결핍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반드시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자칫 타인의 불운에 무지해질 우려, 자기가 누려온 것들을 당연시한 나머지 악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도 상당히 많으니까. 무탈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비밀과 그늘이 없어 실존의 그림자가 옅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신기하게 보이는 사람들은 힘든 성장기를 보냈는데도 주변에 밝은 빛을 드리우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종교인도 아닌데!여기 선희(가명)네가 그렇다. 이 부부는 둘 다 파란만장한 유년기를 지나 공짜로 주어지는 것 하나 없는 치열한 청년기를 통과해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라는 것은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속초로 내려간 후 어느 정도 뿌리를 내려놓은 상태를 말한다. 남편은 에어컨을 설치하는 사업을 시작했는데, 겨울에 미리 에어컨을 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고된 육체노동에 속한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이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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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한강의 노벨상과 인쇄소 비명 지면기사
노벨상 덕에 출판계 좋아졌다 여겨현실은 한강 책만… 다른 책 안 나가 인쇄업계 젊은층 기피 3D업종 전락일거리 줄고 공실 늘어 공포감 만연'작별…' 주문 폭주에도 큰 감흥 없어이틀 전 아는 작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요. 아무래도 한강은 전생에 지구, 아니 우주를 구했나 봐요. 출판사도 한강 덕택에 책 많이 나가죠?" 필자 역시 한강이 그런 상을 탄 것이 너무 놀랍고 기쁜 일이라고 맞장구를 친 뒤 "책이 전혀 안 나가요. 팔리던 책도 뚝 끊어졌는걸요"라고 대답했다. 이게 우리 출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출판사들의 책을 보관하고 있는 물류업체 역시 비슷한 소리를 하고 있다. "한강 책이 터져서 더 안 나가요. 사람들이 그것만 보는 거죠. 요즘, 사람들이 출판계통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개뿔' 좋아지기는…. 없어요. 경제가 엄청 좋으면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겠지만, 이렇게 경기가 나쁜데 그것만 사야 하니까 다른 데 눈을 돌릴 수 있겠어요?"필자는 최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를 찍은 H인쇄소의 담당자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물론 노벨상 소식이 들려오기 전의 일이다. 그 담당자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가 좋은 시절이었고 지금은 인쇄업계가 3D업종(2교대 12시간씩)이라 워라밸을 외치는 젊은이들은 '야간근무'라는 말만 들어도 아예 발길을 돌린다고 했다. 그 인쇄소에서 가장 어린 직원이 44세! 내년과 내후년이 되면 인쇄기를 돌리는 기장(책임자)들이 정년(61세)을 하는데 후임자가 없어 퇴직자들을 계약직으로 계속 고용할 예정이라고 했다. 필자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책을 찍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눈이 침침하고 행동도 굼뜨고, 몸도 여기저기 아픈 퇴직자들이 계속 현장에 있는 건 인쇄사고가 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리고 후속세대가 끊어지는 것이니 이보다 아득한 일이 또 없다.그렇지 않아도 근래 신간을 보면 확실히 예전보다 오류가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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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기형도와 심야극장 지면기사
누나 세상 떠난 무렵 시 쓰기 시작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29세 생일 엿새 앞두고 숨진채 발견처음이자 마지막 '입 속의 검은 잎' 한국 시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 잡아기형도(1960~1989)는 1960년 3월13일 경기도 옹진군 안평리 392번지에서 태어났다. 3남4녀 중 막내였다. 부친 기우민의 고향은 연평도에서 건너다보이는 황해도 벽성군이었으나 6·25를 겪으며 당시 황해도 피란민의 주된 이동 경로인 연평도로 건너왔다. 면사무소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면사무소에 근무하며 정착했다.1964년 일가족이 연평을 떠나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 현 광명시 소하동 701-6으로 이사했다.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과 수재민들의 정착지가 되기도 하는 도시 배후의 근교 농업이 주를 이루는 농촌이었다. 1969년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져 전답을 팔아 약값으로 쓰고 모친이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 때 기형도 나이 열살이었으니 가혹한 시절이었다. 1973년 신림중학교에 입학했다. 3년 내내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1975년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깊은 슬픔을 갖게 되었으며 그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79년 2월 중앙고등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3월에는 연세대학교 정법대 정법계열에 입학했다. 교내 문학 서클에 가입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했다.그해 12월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제정 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시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에 입선되었다. 이어서 1980년 3월 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했다. '80년의 봄'이 시작되어 철야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하고 교내지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했다가 형사가 학교로 찾아오는 등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81년 3월 병역관계로 휴학하고 부산과 대구 등지로 여행을 했다. 중학교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연세대학교 교내 문학 서클인 '연세문학회'와 안양의 문학동인 '수리'에 참여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연세문예춘추'에서 제정하고 시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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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의자 앉기 지면기사
공항 봉사자·마트 계산원 보며 제일 먼저 '앉을 의자 있느냐' 생각 앉아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 어디서든 서서 일하는 사람 없도록지켜보고 '의자 없음'에 의문 가져야인천국제공항으로 출근하며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통로 입구 앞 안내 데스크에 계신 자원봉사자 어르신이다. 이른 아침부터 단정하면서도 멋스러운 정장 차림에 반백의 머리칼을 잘 빗어 차분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을 하시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외국인 여행객들에게 안내를 해주시는 모습은 잠깐 스쳐지나갈뿐인 내 마음에도 친절한 사람의 호의를 마주하며 느끼는 기분 좋은 행복감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서 계신 입식 단상 뒤에 의자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볼 때마다 서 계신 모습이어서 혹시 안내를 요청하는 여행객들이 없을 때에도 앉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사실 나의 의자 걱정은 유구하다. 대형 마트의 계산원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객들의 줄을 마주하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백화점의 의류매장 앞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는 직원들을 보면, 카페 BAR 테이블 너머에서 종종걸음을 치는 알바생들을 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앉을 의자가 있느냐'다.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앉기를 갈망하는가. 물먹은 솜뭉치마냥 늘어지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아침 출근길의 전철을 기다리는 노동자는 먼저 온 사람들의 등 뒤로 길게 이어진 줄 끝에서 발을 구르며 얼마나 자리가 나기를 바라는가.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이 요행히도 금방 다음 역에서 내려 자리가 났을 때 급하게 엉덩이를 붙이는 사람의 얼굴은 얼마나 안온한가. 어린 밤 야쿠르트 배달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다리가 잘라져 나가는 것 같구나"하시며 한숨을 쉬셨다. 선생은 죽은 듯 조용하지 않은 초등학교 교실의 아이들을 혼내주려고 한 시간 동안 서서 수업을 듣게 했다. 우리는 모두 의자를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자라났다. 앉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자랐다.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일할 때였다. 새벽 3시부터 낮 3시까지 12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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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지구 불시착 지면기사
늦은 나이 출산… 산후우울증 겪어 어느날 발견한 오래된 사진 한 장 친구와 사진 속 식당서 만나 울컥우울한 시간 지나보니 무책임해져"다 지나갈 거야, 겪어보니 그래"가끔씩 내 생애를 둘로 쪼개보곤 한다. 쪼개는 시점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가장 합리적인 시점은 아무래도 출산이다. 나는 남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았고, 그러는 순간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만큼 큰 변화가 있었다. 짐작이야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뭐랄까, 나는 무인도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친구들은 자주 전화를 걸어 나와 아기의 안부를 물었고, 가족들은 아기를 보러 이전보다 더 자주 나를 찾아왔지만 희한하게도 나는 아무 비행기도 날지 않는 하늘을 막막하게 바라보며 SOS 모닥불을 피워둔 기분이었다. 나를 발견해 줘. 내가 여기 있어. 그런 나 따위 아무려나 상관없다는 듯 푸르디푸른 하늘과 희디흰 뭉게구름이 정지 화면처럼 선 풍경."그거, 산후우울증이야. 다들 그래." 사람들은 쉽게 말했다. 그래서 나도 쉽게 생각했다. 곧 나아지겠지. 남들도 다 그랬다는데, 뭘. 유난인 척하기 싫어서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가만 긴 밤을 보냈다. 산후우울증이 저절로 괜찮아진 건가, 이런 생활에 익숙해진 건가 판단하지는 못했으나 나는 말수가 준 사람이 되었고, 온종일 창밖 한 번 내다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산다니까 이런 삶도 나쁘지 않은 건가 보다 생각했을 뿐이다. 그렇고 그랬던 어느 날, 나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보자마자 웃음이 쿡 터졌다. 뭐 이런 사진을 다 찍었지? 사진 속 그날은 친구의 생일이었다. 우리는 단골 실내포차에서 만났다. 산오징어회를 만이천원에, 소라탕을 만오천원에 팔던 실내포차 이모는 우리에게 참말 살가웠다. 사실 우리 빼고는 손님도 없던 식당이었다. 천장이 낮은 식당이 들썩들썩 할 만큼 우리는 소란스럽게 놀았다. 이모는 쉴 새 없이 낙지를 볶고, 잔치국수를 끓이고, 소라탕에 소라를 더 넣어주었다. 헤어진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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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명랑만화는 왜 '명랑'일까? 지면기사
생각만해도 웃음나와서 '명랑'일까부담없이 물장구 칠수 있는 웅덩이그곳에서는 꺼벙이·둘리가 주인공 늘 소동 일으키지만 작은 승리 거둬정답 모르지만 질문만으로도 아득내가 만화를 처음 본 것은 글자를 익히기도 전인 여섯살 무렵이다. 고모네 집에 놀러갔는데 식사때가 되어도 만화방에 가서 오지 않은 사촌오빠를 찾아 나섰다. 오빠는 "마저 읽겠다"며 다 읽은 책 한권을 내밀었는데, 글자를 모르던 나로서는 그림이 빽빽이 들어있는 칸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세 장도 채 넘기지 못했는데 오빠가 "그만 가자"며 책 더미 사이에서 일어났다. 이 많은 글과 그림을 단번에 독파해나간 오빠가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른다.시간이 흘러 내가 만화에 빠질 차례가 되었다. 나는 '보물섬'과 '소년중앙'에 나오는 만화를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했다. '아기공룡 둘리' '꺼벙이' '맹꽁이 서당'과 같은 '명랑만화'의 주인공들이 첫번째 친구가 되어주었다. 월간지의 연재만화는 따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스마트폰이나 게임은 고사하고, TV를 틀어도 어린이 프로그램이 한 시간 남짓인 세상에서 오롯이 아이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만들어지는 창작의 세계는 당시에 만화밖에 없던 것 같다.잡지를 받으면 가장 먼저 펼쳐보는 만화는 그때그때 바뀌었지만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이 1위였던 적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데, 도입부는 한결같다. 학동들이 한바탕 싸우고 깨고 부수고 말썽을 부린다. 훈장님이 기다란 담뱃대로 학동들의 머리통을 내리쳐서 커다란 선인장 같은 혹을 만든 후 "이제 공부하자"며 책을 펼친다. 그러면 아이들이 이야기를 조르고, 훈장님은 우리나라 역사나 한자 고사성어 같은 것을 풀어서 술술 들려준다. 심지어 마당쇠도 같이 듣는다. 마당쇠는 아이와 어른, 무책임과 책임의 중간자적 존재다. 거의 어른이지만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도 있고, 훈장님이 없을 때 엉터리로 가르치기도 한다. 만화를 읽다보면 조선시대 서당의 맨 뒷자리에 앉아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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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장동일지'와 이철·민향숙 부부 지면기사
잔혹한 옥중 비망록 '장동일지' 재일동포 이철, 간첩 누명 옥살이무죄선고·정부사과 후 발간 결심조국 원망스럽지 않냐는 질문에"간첩 엮은건 정권이지 민족 아냐"'1967년 일본 주호대학에 입학했는데 4·19 때 이승만의 동상을 끌어내리는 한국영화를 보여줬다. 나는 '7년이나 지난 영상을 보여줘서 뭘 어쩌자는 거지?'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50년 전 이야기라도 그 기간 동안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고 고문당해 연못에서 의문사하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사형 집행된 사람도 많고…. 대한민국이 민주사회로 이행되고 있구나 했는데 지금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하니, 우리가 마음을 놓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 고통과 아픔은 현재적 의미라는 걸 깨닫게 된다'.지난 4월 출간된 '장동일지'(서해문집)는 우리가 얼마나 엄혹하고 야만적인 현대사를 통과했는지 경각심을 던져주는 옥중 비망록이다. 지은이 이철(李哲·76)은 재일한국인으로 조국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1973년 고려대학교로 유학 온 청년이었다.그러나 시절이 너무 안 좋았다. 박정희의 독재가 극악해지면서 벌인 일련의 간첩조작 사건에 그도 걸려들고 말았다. 1975년 11월25일 유신정권의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발표 후 그는 남산으로 끌려갔다. 약혼자와 장모를 데려와 그의 앞에서 '그짓'을 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하며 정신이 무너졌고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39일만에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형수로 3년6개월을 포함해 13년간 옥살이를 했고, 출소 후 13년간 한국에 입국금지가 되었다. 결국 한국에서 살겠다는 꿈은 좌절되었고 오사카에서 낮에는 전기기술자로, 밤에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로 살아왔다. 책 출간을 계기로 올해 잇달아 한국을 찾고 있는 그는 9월3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에서 책 내용을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지금도 '기억하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형수 생활을 가볍게(?) 증언하려 애를 썼다. 얼굴의 깊은 주름은 지난날의 형극(荊棘)을 보여주고 있었다. 남편의 구명운동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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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이상과 김해경 지면기사
김해경 대신 필명 '이상' 사용경성고등공업학교 수석 졸업'12월12일' 연재 후 폐결핵 증세'날개' 발표하며 평단의 관심한국 현대시 문 최초로 열어이상은 1910년 9월23일 경성부 북부 순화방 반정동4통 6호에서 아버지 김연창과 어머니 박세창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상의 본적은 경성부 통동, 지금의 통인동 154번지로 대부분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선대로부터 줄곧 살아온 거처로 이상이 태어날 당시에는 할아버지 김병복이 가장으로 집안을 이끌었다. 부친 김연창은 일본 강점 이전 구한말 궁내부 활판소서 일하다가 사고로 손가락이 절단된 뒤 일을 중단하고 집 근처에 이발관을 개업하여 가계를 꾸려갔다. 이상의 형제는 누이동생 김옥희와 남동생 김운경이 있다.1913년 백부 김연필의 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성장했다. 이상의 백부 김연필과 김연숙 사이에는 소생이 없어서 조카인 이상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학업을 도왔다. 1917년 이상은 여덟 살 되던 해 누상동에 있던 신명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경영하는 동광학교에 입학했다. 1922년 동광학교가 보성고등보통학교와 합병되어 보성고보에 재학했다. 1928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에 본명인 김해경 대신 이상(李箱)이라는 필명을 썼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건축과 기술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1930년 '조선' 국문판에 9회에 걸쳐 장편소설 '12월12일'을 이상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했다. 이해부터 폐결핵 증세가 나타나 객혈을 했다.1931년 '조선과 건축'에 일본어로 쓴 '이상한 가역반응' 등 20여 편을 세 차례에 걸쳐 발표했다. 폐결핵의 증세가 악화되었다. 1932년 이상의 성장과정을 돌봐주던 백부 김연필이 뇌일혈로 사망했다. 이상은 폐결핵의 발병과 백부의 죽음으로 커다란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1933년 폐결핵으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자 조선총독부 기술직을 사임하고 황해도 배천에서 요양했다. 그곳에서 알게 된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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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돌봄 받는 맛 지면기사
저마다 나름의 '어른론' 있겠지만독립성·경제력 두개 조건 갖춰야돈 버는 일의 보조처럼 여긴 살림당연하게 노동 받아들이지 않고이해의 폭 넓어져야 어른의 기본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기준들을 적용할 테고 나름의 '어른론'이 있을 것이다. 가장 흔하게 들어본 말은 "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어른은 해야 하는 것을 한다"라는 말이다. 아이일 때는 욕망에 충실하지만 어른이 될수록 철이 들어서 싫어도 해야 하는 것을 먼저 하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아이들을 책임감 있게 키우고 싶은 어른들이 만들어낸 말일 테다. 사회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면 애, 어른을 가리지 않지만 대체로 어른들이므로 어른들이 욕망에 충실하지 않은지는 잘 모르겠다.조금 웃음을 보탠 말로 "요거트의 뚜껑을 핥지 않는 것이 어른이다"라는 말도 있다. 체면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어릴 적엔 한 입을 아쉬워하던 맛있는 음식, 혹은 좋아하는 음식을 간섭 없이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것이 어른이라는 이야기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조건이 같이 걸려있는데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독립성, 그리고 마음껏 사 먹을 수 있다는 경제력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결부되어 있다. 결국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성을 가지려면 기본적으로 경제력을 확보해야 한다.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자녀에게 부모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드는 "정치적 독립은 경제적 독립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생각해보면 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버는 돈으로 밥을 먹고 내 집에서 잠을 자면서 내 말은 안 듣겠다니 그러려면 네가 돈을 벌고 네가 집을 사서 독립하거라, 이런 말이다. 자식 입장에서야 계산적으로 들리겠지마는 자식이 부모의 그늘서 벗어나 어엿한 어른으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애틋한 마음으로 선해할 수도 있다.(사실은 좀 괘씸해서 하는 말일 테지만)그럼 결론적으로 돈을 버는 것이 어른이라는 말일까? 돈을 번다고 모두 독립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혹은 바꿔 말해서 독립을 한다고 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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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꼬마 뱀을 조심해' 지면기사
동시 즐기지 않는 초등학생 딸'완성되지 않은 일기'란 시 흥미자기 사연과 똑 닮은 시집 빠져공감의 포인트 제대로 배운 셈"동시는 쇼츠" 벙찌는 독후감딸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지만 여태 동시는 별로 즐기지 않았다. 베스트셀러로 널리 알려진 동시집을 여러 권 사주었지만 그중 두어 권만 좋아했을 뿐 오래오래 아껴 읽거나 하지는 않았던 거다. 꽤 책벌레인 아이인데도 그랬다.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 아이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이건 아이의 성향과도 상관이 있는 일일 것이었다. 스토리의 앞뒤가 명확하고, 주인공의 행적이 뚜렷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독서의 수준이다 보니 동시란 장르 자체가 영 미심쩍고 헛갈렸겠지. 하지만 동시의 세계가 얼마나 재미난데. 아이를 동시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나는 이것저것 수를 써보았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요즘은 일기 숙제를 내지 않는 초등학교도 많은 모양이다.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도 일기 숙제는 없다. 1, 2학년 때는 숙제가 아니어도 곧잘 쓰더니 요즘은 그래서 통 쓰지 않는다. 어쩌다 기분이 좋은 날에만 선심 쓰듯 한 장씩 쓰는데, 그날 아이는 일기를 썼다. 대가족 모두 베트남 여행을 가기로 결정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신난 아이는 도대체 이걸 어디다 자랑하나 고민하더니 일기장을 폈다. 컴퓨터 모니터로 몇 번이나 전자항공권을 들여다보며 설렜던 아이는 "드디어 사촌언니와 함께 여행을 가게 되었다"로 시작하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웬걸, 일기를 미처 다 쓰기도 전에 여행 계획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운동선수인 중학생 사촌 언니의 훈련 일정과 여행이 겹친 것이었다. 항공권은 곧바로 취소했고 딸아이는 으앙,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쓰다 만 일기 끝에 아이는 "너무 슬프다, 여행이 취소되었다"라고 썼다. 나는 옆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아이를 달랬다. "걱정 마. 날짜를 다시 잡으면 돼. 다 잘될 거야." 아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이 일기는 어떡해? 어떻게 써?" 나는 전화로 가족들과 일정을 다시 조율했지만, 원체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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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꾸이년의 단골가게들 지면기사
보름 넘게 베트남 해변서 여름여행15년 전 왕성했던 태국여행과 대조카페에서 작업하고 망고사며 집 가가족과 일상, 단순하지만 풍요로워남은 나날 금처럼 귀하게 보내고파이 해변이 한 장의 종이이고, 게들이 동글동글 뭉쳐놓은 저 흙덩이가 글자라면 거기에 무엇이 적혀있을까? 만약 게들 가운데 외계생명체가 끼어있어 '나는 지구에 조난되었다. 구조해 달라'라고 신호를 보내는 중이라면? 과일가게의 드래곤프루트가 드래곤이 되고 싶어 하는 꿈을 꾼다면? 포멜로가 두꺼운 패딩 같은 자기의 껍질을 벗고 싶어 한다면?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는 곳은 베트남 중부에 있는 도시 꾸이년의 한 해변이다. 우리 가족은 바닷가 근처 아파트를 빌려 지내고 있다. 한 곳에서 일도 하고 헤엄도 치면서 여름을 날 생각으로 떠나왔기 때문에 여정에는 별 욕심 없다.보름이 넘어가니 단골가게가 생겨나고 생활에는 루틴이 잡힌다. 낯선 도시에 단골가게가 생기는 것은 식물로 치면 뿌리를 내리는 것과 비슷하다. 매일 보면서 인사를 하는 얼굴이 있으면 도시 전체에 가로등이 켜지는 것처럼 환해진다. '아는 사람'이 있는 도시는 더 이상 낯선 곳이 아니다.가장 자주 가는 단골집은 쌀국수 가게와 작업을 하러가는 카페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쌀국수에는 주인이 직접 만드는 새우볼이 들어가는데 식감이며 맛이 정점에 달했다고 할까, 먹을 때마다 감탄한다. 여기에 얼음 넣은 콩물을 곁들이면 건강하고 든든한 아침식사가 된다. 물샐틈없이 바지런하게 일하는 주인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내가 자전거에 부딪쳐 넘어졌을 때 구급상자를 가져와 치료까지 해주신 친절한 분이다.야자수를 따라 십분쯤 걸어가면 아드밧 카페가 나온다. 나무로 된 복층 내부는 통창으로 보이는 푸른 잎 때문에 눈이 시원하다. 건축도 멋있지만 무엇보다 꾸이년 최고로 맛있고 진한 커피가 여기 있다. 이곳에서 베트남 카공족이 되어 단편 소설을 한 편 쓰고, 장편 소설의 교정도 보았다. 주구장창 오다보니 카페 스태프나 사장님과도 인사를 트게 되었다. 사장님은 애니메이션이 본업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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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전두환이 평생 무사했던 이유(?) 지면기사
건축가 김원 '땅 잘본다'는 평판에5공때 추진 독립기념관 터 찾아줘현장서 전두환에 직접 '명당' 설명'천안군 목천면 흑성산 아래' 결정"全 보복 안당함… 그 덕 봤을것"얼마 전 원로 건축가 김원(81) 선생을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젊은 시절 땅을 잘 본다는 평판으로 전두환이 추진하던 독립기념관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선생에게 이걸 글로 옮겨도 되겠냐고 했더니 "누군가는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면서 승낙을 해주었다.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본다.전두환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지 않은 것에 늘 콤플렉스가 있었다. 당시 한창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그런데 어떤 간신배가 전두환한테 "우리나라에만 독립기념관이 없다. 독립기념관을 짓는다면 모든 이들이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독립기념관이 세워지면 나라의 역사를 정리할 테니까 그 정통성 시리즈에 5공을 살짝 집어넣어라. 그럼 정통성이 부여될 것 아니냐"고 한 것이다. 그러자 전두환이 "야! 진짜 괜찮구나"해서 당장 땅을 찾으라고 이진희 문화공보부 장관한테 지시를 내렸다. 서울과 대전 사이의 약 330만㎡에 대도시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국민 성금을 모금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경쟁적으로 운동을 벌여 2달 만에 목표액 500억원을 초과 달성했다. 당초에는 모금에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땅도 못 찾고 설계도 안 된 상태에서 돈이 확보된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계속 문공부로 연락을 내려보내며 독촉하고 있었다. 당시 전두환의 명령이라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을 만큼 벌벌 떨던 때였다.나는 그 전에 풍수를 하는 건축가로 소개되어 KBS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풍수가 미신이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나는 풍수는 미신이 아니라 지구물리학이자 통계학이다, 땅에는 기운이 있는 것이다, 좋은 기운이면 사람이나 나라나 다 잘 된다라고 역설했다. 새파란 30대 건축가가 방송에서 구라를 푸는데 꽤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다.독립기념관의 터를 찾던 문공부 직원이 방송을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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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김수영 시인과 '푸른 하늘을' 지면기사
학병 징집 피해 귀국 연극 무대 서6·25 비극적 체험 '레드콤플렉스''푸른…' 자유·혁명 대한 직설적 詩어둠의 요인은 '정체성 혼란' 투사해방~1960년대말 전환기 삶 '詩作'김수영은 해방 직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한국사회의 전환기적 삶을 경험하면서 치열한 시작 활동을 펼쳤던 시인이다. 김수영의 시세계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시각으로 양분할 수 없는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면서 독특한 자신의 시세계를 열어갔던 인물이다.김수영은 1921년 11월27일 서울 종로구 종로 2가 18번지에서 아버지 김태욱과 어머니 안형순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김희종은 정삼품통정대부중추의관의 벼슬을 지냈다. 조부 김희종은 경기도 김포평야 일대와 강원도 홍천 등지에서 500여 석의 추수를 하는 지주였다. 형제로는 아우 수성· 수강·수경·수환, 여동생 수명·수연·송자 등이 있다. 같은해 종로 6가 116번지로 이사했으며 이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1924년 4세에 조양유치원에 들어갔다. 1926년 6세에 계명서당에 다니며 한문공부를 했다. 1928년 8세에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지금의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34년 14세에 폐렴과 뇌막염으로 1년여를 요양했다. 1938년 선린상고 야간부 3년을 졸업하고 주간부 2학년으로 진학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성북고등예비학교에 들어갔으나 곧 포기하고 미지시나 하루키 연극연구소에 다녔다. 1943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게 되자 조선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한 김수영은 연극 무대에 섰다. 1944년 봄에 만주에서 귀국한 어머니를 따라 지린성으로 가서 임헌태 등의 청년들과 번역극 '춘수와 같이'를 무대에 올렸다.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가족들과 개천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와 충무로 4가에 집을 마련했다. 1946년 시 '묘정의 노래'를 썼다. 1948년 박인환, 임호권, 김병욱, 양병석, 김경린 등과 동인 '신시론'을 결성했다. 1949년 동인 신시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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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집중력이 사라졌다 지면기사
무언가 창조·해석 기쁨은 사라지고오로지 도파민 자극 쾌락만 날 지배시간들여 털있는 짐승을 그려 보고서로 응원하는 마이너 운동 배우자집중력 물론 지치지 않는 체력은 덤집중력이 사라졌다. 하고자 하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 그러니까 읽던 책이 재미있어서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밥 먹는 것도 잊고 마지막 책장이 덮일 때까지 몰입하여 읽던 그런 능력이, 친구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보내기 위해 겨울밤에 부엌 냉장고에 등을 기대고 밥상을 책상 삼아 고심하며 몇 시간이고 밤이 새도록 편지를 쓰던 능력이, 과자 사 먹으라고 할아버지께서 주신 백원짜리 동전이 제법 모이면 학교 앞 문방구로 달려가서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프라모델 조립식 장난감들을 도서관 빽빽한 책등마냥 훑다가 지구를 구할 로봇을 고르듯 고심과 갈등 끝에 하나를 골라 집으로 날듯이 달려와 머리가 아파 끙끙 소리가 나도록 하루종일 앉은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불상처럼 앉아 조립도를 보며 변신 로봇을 완성해나가던 능력이 사라져버린 것이다.그리고 그 집중력의 자리는 이제 스마트폰이 차지해버렸다. 버스에서도 전철에서도 카페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잠이 들기 전에도 책을 읽던 습관이 사라지고 이제는 스마트폰을 열어 최신뉴스를 훑어본다. 그러다가 금방 흥미를 잃고 다시 SNS에 들어가서 새로 올라온 각종 소식들을 열람한다. 스크롤을 올리며 친구들의 이 얘기 저 얘기들을 읽다가 쇼츠, 릴스 등 각종 짧은 동영상을 보게 된다. 한번 보면 자꾸 그다음 영상을 보게 된다. 영상을 보다가 질리면 게임을 한다. 복잡한 것은 머리가 아프니까 간단하면서도 중독성 있는 게임을 한다. 벽돌을 쌓거나 부수거나 피하거나 맞춘다. 그러다가 지루해지면 다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서 최신뉴스를 읽는다. 그렇게 돌고 도는 손안의 스마트 세상을 즐기다보면 즐거운 것이 아니라 점점 우울해진다. 불안도가 증가하고 자존감이 떨어진다. 무언가를 생산하고 창조하고 주체적으로 해석해나가던 기쁨은 사라지고 오로지 도파민을 자극하는 수동적인 쾌락만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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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수트케이스 지면기사
내내 비혼·극강의 역마살 자랑하다출산하며 꼼짝없이 집에 갇히게 돼 떠나는 방법도 잊은 듯이 살았지만작은 수트케이스 하나에 마음 동요과거여행은 "적금같은 기억" 곱씹어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서 가방 하나를 샀다. 가죽으로 만든 작은 수트케이스다. 한참을 기다려 받은 그 가방의 포장을 풀며 나는, 아무래도 어디로든 한 번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동안 참아도 너무 오래 참았지.나는 한때 극강의 역마살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출판사나 잡지사에서는 원고 청탁을 하려다가 내게 하소연을 했다. "아니, 작가님이랑은 연락하기가 너무 힘들어요. 전화할 때마다 한국에 없어요." 데이터로밍이 비쌌던 시절이라 나는 걸핏하면 전화를 끊어놓고 돌아다녔다. "나는 그냥 이렇게 인생을 탕진하려고. 어차피 한번 놀러 온 인생이잖아." 그런 말을 풀풀 웃으며, 우습게도 뱉던 시절이었다. 건방졌다. 인생이 쉬운 건 줄 알았다.그랬던 삶이 꼬인 건 아무래도 출산이었다. 사는 내내 비혼일 줄만 알았던 나는 어느 날 화들짝 아기 엄마가 되었고, 나는 꼼짝없이 집에 틀어박혔다. 매달 월급 꼬박꼬박 받아오는 워킹맘도 아니면서 베이비시터를 둘 핑계를 찾을 수 없었기에 나는 몇 년 얌전히 지냈다. "베트남 한번 뜰 건데 너도 가능?" 이렇게 묻는 친구들에게 "미안, 이번엔 안 돼." 몇 번 대답하다 보니 친구들도 더 이상 함께 떠나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혼자 마냥 서운해하며 여행을 떠난 친구의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고양이의 밥을 챙겨주었다. 곧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었고 모두가 떠나지 못하는 시절이 오자 차라리 다행이었다. 나만 못 가는 것이 아니니 덜 심술이 났달까.코로나 시국이 지나갔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떠나는 방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한 해 절반씩 집을 비워두었던 지난날이 다 농담 같았다. 기껏해야 연례행사 뛰듯 아이와 제주도를 간다거나 부산을 간다거나 할 뿐이었다. TV 여행 프로그램을 보며 "엄만 저기도 갔다 왔어. 몰타. 저 도시 너무 예쁘지?" 한다거나 "이탈리아에 가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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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수수밭에서 책 읽기 지면기사
엄마의 강렬한 기억 남은 독서는열두어살 무렵 밭에 간다 말하고수수밭 한가운데서 읽었던 순간육남매중 다섯째가 고른 은신처책장 넘기는 장면 생각하니 애틋어렸을 때부터 책벌레였던 나는, 한참 책 속에 빠져 있는데 말을 시키는 사람을 너무 싫어했다. 그렇게 독서의 흥을 깨는 사람 중 단연코 1위는 엄마였다. "밥 먹어라." 이 말 한마디면 셜록 홈즈의 놀라운 추리도, 다리 기둥에 매달린 빨강머리 앤도 멈춰서야 했으니까. 그러면 읽던 페이지 사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불만스럽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는 투덜투덜 밥상에 앉으며 책을 읽을 때는 제발 아무 말도 시키지 말아달라고 누차 강조했다. 지속적인 호소 때문인지, 성장기 내내 엄마는 내가 책을 읽고 있으면 밥 먹으란 소리 말고는 아무 말도 걸지 않는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 엄마는 내가 쓴 책이 아니면 구태여 독서를 하지 않는다. 엄마가 섭취하는 활자는 주말에 성당에서 나눠주는 주보와 '매일미사' 외에는 없는 듯 보인다. 딸이 고생해서 쓴 글이니까, 하는 마음으로 내 책도 의무감으로 겨우 보시는 듯하다. 그런 엄마에게도 일평생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독서의 순간이 있었다.엄마가 열두어 살 무렵, 어떤 이야기 책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어서 밭에 일하러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수수밭 한가운데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고 한다."보영이랑 진숙이. 그 둘이 주인공이야. 하나는 부잣집 딸이고 하나는 가난하고. 그 둘이 친구인데 이야기에 너무 빠져가지고….""근데 왜 수수밭이야? 수수가 옥수수를 말하는 건가?""옥수수가 아니라 밥에 놓아먹는 노란 조 있잖아. 그거랑 비슷한 잡곡이 열리는 거지. 수수는 높게 자라니까 밭 가운데 들어가 앉아있으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나는 엄마의 목소리에 실려 높다란 수수가 자라는 시골풍경을 떠올려보았다. 육남매 중 다섯째였던 엄마는 집에서는 조용한 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를 골랐던 것이다. 방해받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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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관계, 세 사람 지면기사
매주 월요일 안부 전화 최근 끊겨A와 멀어진후 '일방통행' 깨달아내 감정 쏟아내고 괴롭혀 '자책감'C는 종교인 그에게 질문거리 많아 얼마전부터 고민 상의 '평형 유지' 나는 매주 월요일 세 사람한테 전화하는 것으로 한 주를 시작한다. 셋은 모두 나보다 연장자들이다. 그들에게 일주일간 일어났던 나의 일들을 털어놓고 상대방의 안부도 묻는다. 벌써 10년 이상 되었다.그런데 올 봄을 지나면서 세 사람한테 큰 변화가 찾아왔다. 한 사람은 50년을 해로한 남편이 암에 걸려 전이된 상태고, 다른 한 사람은 딸이 암에 걸려 가슴 철렁한 순간을 맞고 있다. 그 밖의 한 사람은 15년 동안 틀어박혀 책만 팠는데 갑자기 취직이 되어 매일 험한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어쨌든 그래서 정기적으로 하던 전화는 끊어졌다. 그중 가장 친했던 A는 자기애가 강한 사람으로 섬세하고 예민하며 직관력이 뛰어나다. 나는 가끔 그에게 "마이크로의 세계에 산다"고 이야기했다. 아주 미세한 것까지 감지하기 때문에 사람의 심리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잘 알아챘다. 그래서 대화가 잘 되었고 나는 그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찍어 먹어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아는 타입이고 그는 느낌이 이상하면 아예 발을 담그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매번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를 보면서 그는 무척 답답해 했고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그 지겨운 실패담을 강산이 바뀌는 시간만큼 들어주었다. 게다가 내가 나한테 매몰되지 않도록 일침을 가했다. 그것 때문에 더 그에게 의지했다.대화의 9할 이상이 내 수다였고 그는 듣고 맞장구쳐주는 역할을 했다. 나는 나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까지 들추었고 그는 해야 할 말도 아꼈다.그와 거리가 생긴 지금에서야 우리의 관계는 일방통행이었음을 깨닫고 있다. 너무 내 감정을 쏟아내 그를 괴롭혔다는 자책과 함께 한편 서운하기도 하다. 나를 진정한 대화 상대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과연 그의 입장을 한번이라도 생각해봤던가?그런가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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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 윤동주 시인과 서시 지면기사
'죽는날까지… 한점 부끄럼 없기를'읽으면 서러움·고절감 파도처럼 와18세 나이 '삶과 죽음' 등 첫시 써내아직까지도 '별 헤는 밤'은 사랑받고'참회록'을 남겨 독자들 숙연하게 해'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인 윤동주의 서시를 읽노라면 순결한 청년의 서러움과 고절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윤동주는 1917년 12월30일 아버지 윤석영과 어머니 김룡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9세 되는 1925년 4월4일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12세 1928년부터 14세 1930년까지 급우들과 함께 '새명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청소년기의 꿈이었다.15세인 1931년 3월15일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16세에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18세인 1934년 12월24일 '삶과 죽음' '내일은 없다' 등의 시를 썼다. 이 작품들은 그의 최초의 시편이다.19세인 1935년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2학기로 편입한다. 같은해 숭실중학교 문예지인 '숭실활천'에 시 '공상'이 처음 활자화 되었다. 20세인 1936년 신사참배 강요에 항의하여 숭실학교를 자퇴하고 광염학교 중학부에 편입한다.간도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 소년' 11월호에 동시 '병아리'를 발표하고 이어서 12월호에 '빗자루'를 발표한다. 22세인 1938년 4월9일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문과에 입학한다. 23세인 1939년 산문 '달을 쏘다' 시 '유언'을 발표한다. 25세인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27세인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검거되고 작품과 일기가 압수된다. 28세인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다. 29세인 1945년 해방되기 여섯 달 전, 2월16일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