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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th+] 십 년 만에 작업실

    [with+] 십 년 만에 작업실 지면기사

    출산 이후론 사라진 '당연한 공간'예전의 오피스텔 맞은편 새로 계약한권씩 묶일 책들 생각하면 실웃음딸도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쁜손길매주 한번씩 복층서 같이 자야겠다스마트폰 인터넷뱅킹 앱을 켜놓고 한참 들여다보았다. 각각의 통장을 들고나는 액수를 가만히 본다. 한 달에 얼마큼씩 빠지면 티 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 화면에 도도독 찍힌 잔액 중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돈은 얼마큼일까. 물론 그런 액수란 애초 존재하지 않겠지. 잔액이란 크면 클수록 좋은 것이지 들어내서 좋은 액수란 없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곰곰 계산했다.하지만 내 계산 따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오피스텔 임대인의 마음이다. 뱅킹 앱을 접고 다시 부동산 앱을 켰다. 양재역 뱅뱅사거리 근처 오피스텔 월세는 만만치 않다. 게다가 관리비까지 보태야 하니 말이다. 나는 작업실로 쓸 오피스텔을 구하는 중이었다."네가 왜? 작업실을 왜 따로 구해?"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나는 집에 어엿한 서재가 있다. 커다란 책상이 두 개나 있고, 편백나무로 짠 책장이 있고, 편안한 의자도 있다. PC도 새로 세팅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작업실이 필요할까. 나는 우물쭈물하다 친구에게 대답했다. "그냥, 갖고 싶어서." 그런 거다. 그냥 나는 작업실이 갖고 싶은 거다. 내 대답이 나도 어처구니없어 웃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작업실은 구해야겠다. 평소 갖고 싶은 것이 많아 카드빚 쌓는 사람도 아닌데, 내 인생에 작업실 하나쯤 선물하는 게 뭐 어떻다고.끝내 오피스텔 계약을 마치고 이번에는 평면도를 들여다 보았다. 소설을 쓰는 책상은 창가에 두고, 그림 작업을 할 긴 책상은 가운데에 두고…. 그렇게 색연필로 표시를 하고 있으니 열 살 딸아이가 참견을 한다. "이건 뭐야? 이 네모난 건?" 아이가 가리킨 건 복층 도면이다. "그건 이층이야. 거긴 매트리스 두고 가끔씩 피곤하면 누울 거야."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층이 있다고? 여기가 이층집이라고?" 엄마

  • [with+] 기억의 날개

    [with+] 기억의 날개 지면기사

    나를 무아경에 빠지게하는 '나비'기억이 활짝 날개를 젖히는 순간몰두했던 밤 생생하게 되살아나시간을 안 믿지만 부디 탈출하는 멋진 순간 새해엔 더많이 만나길최근에 쓰고 있는 소설에는 꿈과 현실이 반대로 작동하는 주인공이 나온다. 현실이 진창일수록 꿈속이 찬란해지는 주인공은 어느 날 거래를 하게 되고…. 독자들이 나중에 읽으셔야 하니까 이하 내용은 생략, 아무튼 지금 내게 필요한 자료는 독특하고 풍성한 꿈들이다. 그래서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은 강력한 꿈, 사실상 유래가 있는 꿈, 꿈꾼 지가 너무 오래되어 어느 순간부터 소설가의 언어로 오염된 꿈들을 캐고 있다. 그러다 꿈과는 상관없는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십여 전에 해외 레지던스 작가로 선정되어 쿠바에 3개월간 체류한 적이 있다. 그때 알게 된 이들과 2박 3일간 동행했다.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K, 그녀의 다섯 살짜리 아들 J, 일 때문에 이들 모자와 함께하는 대학을 갓 졸업한 R. 이 세 명과 어느 리조트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듣자니 하루에 2만5천원만 내면 숙박은 물론 식사와 수영장, 무제한의 맥주와 닭튀김이 제공되는 리조트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 종일 리조트 앞 바다와 수영장을 오가며 물에서 나오지 않았고, 닭튀김도 실컷 먹었다.저녁이 되자 일행은 태양과 수영에 지쳐 일찍 곯아떨어졌다. 선잠에서 깨어난 나는 살그머니 밖으로 빠져나와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았다. 야자수 너머 달이 떠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밴드의 음악이 들려왔다. 라틴 특유의 시끌벅적하고 쿵짝거리는 리듬, 춤추는 사람들의 환호성이 아득히 메아리쳤다. 내 옆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키 큰 화초가 서 있었는데 달빛을 받아 음영이 칼날처럼 선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어 큰 창처럼 보였다.몸에서 잠과 더위가 빠져나가자 미지근한 욕망이 고였다. 무언가 쓰고 싶다는 욕망. 다행히 늘 들고 다니는 펜이 끼워진 수첩이 손에 있었다. 쓸 것은 오로지 묘사뿐. 우선 숙소의 일행이 떠올랐다. 나무로 만들어진 방갈로 안에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엄마와 아들, 젊은 처녀의 잠은 탐욕스럽고 적나

  • [with+] 만학의 김득신

    [with+] 만학의 김득신 지면기사

    59세 과거 급제 조선 대표 만학도80세 생마감 때까지 책 놓지 않아김홍도·신윤복 함께 3대 풍속화가'파적도'엔 긴장감·역동성 느껴져그는 둔재였으나 노력으로 극복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조선의 대표적인 만학도이다. 그는 회갑이 다 된 5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8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고 전한다. 백이전은 1억1만3천번을 읽었고 노자전은 2만번을 읽었으며 중용서는 1만8천번을 읽었다. 사기(史記)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밖에 유종원, 주책, 중용서, 목가산기, 백리해강을 수없이 읽었다.백이전을 읽은 것은 글이 드넓고 변화가 많아서였고 중용서를 읽은 것은 이치가 분명하기 때문이었고 유종원을 읽은 것은 문장이 정밀하기 때문이었고 목가산기를 읽은 것은 웅혼해서였고 백리해강을 읽은 것은 말은 간략한데 뜻이 깊어서였다. 그는 자신이 노둔함을 알아 매일 같은 책을 읽으면서 횟수를 일일이 기록했다고 전한다.김득신이 태어날 때 아버지 김치가 꿈에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아이 이름을 노담 혹은 몽담으로 지었다. 그러나 신통한 태몽을 꾸고 태어난 아이는 머리가 나빴다. 열 살이 되어서야 글공부를 시작했고 공부가 늘지 않았다. 주변에서 저런 둔재가 있느냐고 비아냥거렸지만 아버지는 화 내지 않았다. 아들이 노자의 정령을 타고 났으니 반드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김득신은 10대 후반에 도화서의 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화원으로서의 활약은 순조 대까지 이어졌다. 그는 김홍도, 신윤복과 더불어 조선의 3대 풍속화가로 일컬어지고 있지만 대중에게는 덜 알려진 화가이기도 하다. 김득신의 본관은 개성이고 자는 현보, 호는 긍재(兢齋), 홍월헌(弘月軒)이다. 1754년(영조30)에 출생하였다고 전하지만, 큰아버지 김응환(1742∼1789)과 나이 차이가 12살밖에 나지 않는다. 둘 중에 한 명의 생몰연도는 오류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김득신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한 문헌은 1772년(영조 48)에 편찬된 '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

  • [with+] 뻔뻔한 회장 김건우

    [with+] 뻔뻔한 회장 김건우 지면기사

    동화책 속 건우는 '특별한 아이'딸은 "이상한 아이야" 라고 말안해특수학급 다니는 딸 친구 준규를연민했는지 키링선물후 마구 변명난 더 잘크려 다시 한번 책 펼쳤다잠깐 놀고 들어오겠다던 아홉 살 딸아이가 도통 들어오지 않아 집 앞 놀이터로 나가보았다. 미끄럼틀에 대롱대롱 매달려 집에 올 생각이 없다. "조금만 더 놀고!" 그럴 줄 알았다. 나는 별수 없이 벤치에 앉았다. 찬 바람이 부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 '놀멍'을 하는 시간은 정말 재미가 없다. 그냥 두고 나는 들어갈까, 생각하던 참에 옆에 서 있던 남자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따님이 정말 성격이 좋네요. 줄넘기도 진짜 잘하고요." 으응? 고개를 들었는데 "저, 준규 아빠입니다" 하신다. 그러고 보니 준규가 있다. 미끄럼틀 끄트머리에 서서 딸아이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손짓도 하고 있다. 화들짝 일어나 인사를 드렸다.준규는 딸아이 반 친구인데, 인기가 아주 많다. 딸의 말을 빌리자면, 반 아이들은 대부분 준규와 짝을 하고 싶어한단다. 아홉 살이면 남자아이들이 한참 개구쟁이 짓을 할 때인데 준규는 그와 달리 조용하고 잘 웃는 아이인 데다 색연필도 잘 빌려주고 지우개도 잘 빌려주기 때문이란다. 딸아이도 준규랑 짝이 되고 싶어하지만 제비뽑기를 하다 보니 그게 늘 실패다. 다만 단점도 있단다. 준규는 오전에는 같은 반에서 공부하지만 오후가 되면 특수학급으로 간다. 그래서 준규와 짝이 되면 오후에는 좀 심심해진단다.놀이터에서 만난 준규 아빠는 무척 예의바른 분이었다. 그리고 다정한 분이었다. 미끄럼틀을 잘 오르지 못하고 아래에서만 맴맴 도는 준규에게만 눈을 두어도 바쁠 판국에 이리저리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우리 딸에게 계속 소리쳤다. "와아, 너 진짜 멋지다! 정말 용감한데? 아저씨는 너처럼 날랜 아이를 처음 봐!" 그 마음이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우리 준규와 놀아줘서 고마워, 그것이었을지도 몰랐다.아홉 살 내 딸과 반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준규 아빠의 조마조마함을. 열한 살이 되고, 열두 살이 되면 준규는 '나랑' 조금 달

  • [with+] 따끔한 충고에 관한 생각

    [with+] 따끔한 충고에 관한 생각 지면기사

    당사자가 지적 필요하지 않다면친구간 따끔한 말 안하는게 낫다전국 19~59세 꼰대인식 조사결과'굳이 안해도 될 조언·충고' 1위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수 있어그녀는 기차를 탄다. 커다란 짐을 가진 할머니가 손잡이에 매달려 서 있고 빈 좌석이 없다. 할머니 앞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학생이 뭔가를 펴들고 열심히 읽고 있다. 그녀는 금방 학생의 이기주의에 기가 막혀서 울분을 터트린다. "뭐예요? 당신은 젊은 학생이면서 이 무거운 짐을 가진 노인이 안 보여요. 빨리 일어나서 자리를 양보하세요." 그러나 뜻밖에도 할머니 쪽에서 반박했다. "그만두시오. 나는 아직 노인이 아니고, 첫째로 이 짐은 솜이에요." 차 안의 모든 손님은 웃음을 터트린다. 일본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쓴 '마음껏 참견을 할 것'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에 나오는 이야기다.이 여성처럼 누구나 따끔한 충고를 해 주고 싶을 때가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가 가벼운 솜을 무거운 짐으로 잘못 알아 남의 일에 쓸데없이 참견한 결과를 낳았듯이, 충고자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어렵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충고를 하려고 할 때 우리 대부분은 상대편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말하더라도 듣는 이의 성품에 따라 충고를 고맙게 들을 수도, 불쾌하게 들을 수도 있으니 충고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여러분에게 도박에 빠져 있거나 외도를 하고 있는 친구가 있다고 가정하자. 여러분은 따끔한 충고를 해야 한다고 보는가, 따끔한 충고를 삼가야 한다고 보는가? 이에 대해 갑과 을 두 사람의 의견을 들어 보자. 충고를 해야 한다고 보는 갑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친구가 가서는 안 될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충고를 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도박에 빠진 친구는 멈추지 않으면 재산을 탕진할지 모릅니다. 외도를 하고 있는 친구는 멈추지 않으면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를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남의 집 불구경하듯 방관하고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충고가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한 사람은 없으며, 충고가 필요한 이에

  • [with+] 죄와 벌

    [with+] 죄와 벌 지면기사

    내 첫번째 단편집 '개그맨' 포함16세 아이에 책 5천권 해킹 당해그에게 50권쯤 읽게하면 어떨까 어쨌든 돈으로 환산 못하는 독서소중한 재산이므로 손해는 아냐이따금 소설가에도 '이건 참 소설 같은데'라는 상황이 찾아온다. 출판사에서 메일을 받았다. 알라딘 커뮤니케이션에서 전자책이 해킹당해 5천권 가량이 유출되었는데, 내 첫 번째 단편집 '개그맨'도 포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범인은 16세 고등학생으로 텔레그램에 해킹된 책의 일부분을 자랑삼아 올려놓은 뒤 36억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지급하라며 회사와 협상을 시도했다. 9월에 범인은 잡혔으나 이미 '손을 탄' 책들의 운명이 가늠되지 않는 가운데 이번에는 알라딘과 50여 개의 출판사 사이에서 보상을 놓고 대립 중이다. 출판사는 초유의 사태에 제대로 된 선례를 남기기 위해 개별 보상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알라딘은 '사회기금'을 조성해 피해 출판사의 전자책을 사서 도서취약계층에 주는 등 사회적 보상을 하겠다는 입장이다. 결국 출판사들이 신간의 전자책을 알라딘에 넣지 않는 사태로 이어진 것이 최근까지의 진행 상황이다.이 뉴스는 나에게 복잡한 마음을 안겨주었다. 내 머리 속에는 5천권의 책들이 인질로 잡혀있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16세의 해커, 그 아이에게 이 책들은 단지 전자화된 프로그램에 불과하고 수십억대의 코인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일 뿐이다. 비가시적인 세계에서 비가시적인 세계로의 전환과 대박의 꿈만이 책들의 유일한 가치다.그런데 5천권의 책 가운데 한 권인 내 첫 책에는 등단작을 비롯해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대학 졸업 후 8년이 지나 등단을 했는데, 등단작이 은퇴작이 될까봐 겁에 질려 무수히 밤을 새웠다. 젊음과 시간과 에너지와 숱한 불면의 밤들이 통과한 그 이야기들은 내게 소설 쓰기를 가르쳐줬을뿐더러 지독한 육체노동의 결과물이다. 중년이 된 지금, 갈수록 소설쓰기가 육체노동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체감하고 있다. 한마디로 작가에게 책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노동의 가시적인 결과물이다. 그 아이는 전혀 상상

  • [with+] 과거시험의 천재 노긍

    [with+] 과거시험의 천재 노긍 지면기사

    답안지 대필해준 죄로 귀양살이여러번 급제했지만 벼슬길 막혀'부패한 당대' 향한 냉소 있었을듯젊은날 꿈과 좌절·절망 다 접고손주의 재롱보는 노년 원했을 것 노긍(1737~1790)은 과거시험을 보기만 하면 급제를 했다. 그러나 관직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훌륭한 답안지를 작성해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더 행복했었는지도 모른다. 이름을 신중(愼仲)이라했다가 여임(如臨)으로 고쳐 쓴 것을 보면 살얼음을 밟듯 세상을 조심조심 살았던 사람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이름 한원(漢源)은 문장의 근원이 흐르는 물처럼 유장하다하여 얻은 이름이기도 하다. 문체가 꽃 구슬을 흩어놓은 언덕과 같다하여 산주파(散珠坡)라고 부르기도 했고 사는 집이 복사꽃 흐드러지게 피는 골짜기에 있다 해서 도협(挑峽)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다.정조가 즉위한 후 정권의 주류가 바뀜에 따라 노긍은 벽파의 미움을 사 과거 시험장에서 답안지를 팔아 선비의 기풍을 더럽혔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위원 땅에서 6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과거시험 답안지를 팔아먹은 죗값으로는 가혹하다면 가혹한 형벌이었다. 노긍의 아버지 노명흠은 야담집 '동패낙송'을 엮은 사람이다. 부자 모두 과거시험에는 당대에 어깨를 겨룰 사람이 없었다.영정조 시대 시파와 벽파가 치열한 정쟁을 벌이던 때에도 시파인 홍봉환 집안의 문객으로 수십 년을 얹혀살기도 했다. 이런 사람이 세상을 뜨자 이가환은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우리나라 수천 리 둘레에서 하루에 태어나는 자가 몇이며 죽는 자가 몇이던가. 태어나도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지 않고 죽는대도 사람이 수가 줄어들지 않는 그런 자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영조 14년 12월18일 광주부 쌍령촌에 산이 운 것이 세 번이요 시내가운 것이 세 번이었다. 그리고 노긍이 태어났다. 정조 14년 5월3일에 자최로 연복을 입고 예법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그 이튿날 문간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정침에 돌아와 갑작스레 눈을 감더니 노긍이 죽었다.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리나라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한다

  • [with+] 나는 아직 괜찮아

    [with+] 나는 아직 괜찮아 지면기사

    우연히 마주친 '구남친' 환한 웃음옛 추억 떠올리며 웃은 이유 골몰문득 낡은 유선 이어폰 보며 확신시간 지날수록 민망함만 앞서다가'MZ 트렌드' 말 듣고 당당함 찾아구남친도 여러 종류다. 어떤 구남친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웃으면서 묵은 안부를 나눌 수 있고, 어떤 구남친은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쉬워 맥주 한잔 할 수도 있다. 또 어떤 구남친은 남편이 되었고, 어떤 구남친은 마주치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수도 있겠지.얼마 전 우연히 길에서 구남친과 마주쳤다. 안부를 나눌 사이는 아니고, 차 한잔할 사이는 더욱 아니고, 그렇다고 못 볼 것 본 사람처럼 홱 야멸치게 돌아설 사이도 아니어서 나는 잠깐 망설였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아, 뭘 이렇게 마주쳐… 못 알아본 척할까, 하는 사이에 그가 먼저 환하게 웃어주었다. 얼결에 따라 웃었다. 인사까지 나누지는 않았다. 길을 건너던 중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가던 길을 갔다.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환하게 웃어줄 사이였나? 우리의 마지막이 어땠더라? 도대체 몇 년 만에 만난 거지? 돌이켜 보니 우리는 그냥 모르는 척, 못 본 척 정도가 어울렸을 것 같았다. 격하게 연애했던 사이도 아니고, 피 터지게 싸우며 헤어진 것도 아닌, 어쩌다 만나고 어쩌다 헤어진, 조금은 흐리멍덩한 사이. 굳이 이렇게 햇살도 눈부신 오후, 뿌리 염색 시기를 놓쳐 희끗해진 머리카락을 하고, 대충 차려 입은 모양새로 강의를 가다가 만날 것까진 아니었는데. 그냥 젊었던 시절로 기억에 남는 편이 나았을 텐데. 하지만 그쪽이 먼저 웃어줬잖아. 그것도 아주 환하게. 그러니까 나도 웃는 게 맞았어. 그렇게 어색하고 민망한 재회는 아니었던 거야. 그딴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나는 계속 걸었다.그런데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어. 내 이어폰. 치렁치렁 줄을 늘어뜨린 내 낡은 유선 이어폰! 촌스러운 것이라면 질색하던 그쪽이 그 이어폰을 본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쟤는 저런 구식 이어폰을 여태 끼고

  • [with+] 상황의 반전

    [with+] 상황의 반전 지면기사

    육아·집안일·과외교사 힘든 시절하루라도 딸들없이 자유 원했지만이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현재 연로한 친정엄마 보살피는중내게도 언젠가는… 겸손을 배운다내가 결혼한 해인 1988년에 시어머니는 55세였다. 그해 시어머니의 생일날이 되었을 때, 나는 백화점에서 미리 사 놓은 옷을 생일 선물로 드렸다. 할머니가 입을 법한 디자인의 흰 스웨터였다. 시어머니는 그 옷을 반기지 않는 눈치였다. 시누이가 옆에서, 이건 할머니들이 입는 옷이라고 조심스레 말했다. 시어머니는 할머니가 아니니 옷을 잘못 샀다는 뜻이었다.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어머님이 할머니시잖아요"라고 말해 버렸다. 해선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어린 외손자가 있어서인지 내 눈엔 영락없이 노인이었다. 아니 20대 며느리였던 나의 눈에는 50대들이 다 늙어 보였으리라. 시어머니는 노인 옷이라며 흰 스웨터를 장롱 깊숙이 넣어 두셨다.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죄송할 따름이다. 50대라도 마음은 젊다는 것을 몰랐다. 노인 취급을 받는 게 기분 나쁘다는 것도 몰랐다. 난 철부지 새색시였다.그로부터 35년이 흘렀다. 35년 전의 시어머니보다 나이가 더 많은 나는 나를 노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최근 평균 수명이 길어지고 외모가 젊어진 것도 이유이지만, 그것보다 예전의 시어머니처럼 마음이 젊은 것이 더 큰 이유겠다. 난 청바지를 즐겨 입고 운동화를 즐겨 신고 발레를 배우러 다니며 젊게 산다.몇 년째 발레 학원에서 발레를 즐겁게 배우고 있다. 발레를 하면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 건강에 이롭고 몸매 관리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발레를 하는 동안 내 나이를 잊고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몸이 따라 주지 않아 발레를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발레를 하는 시간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발레 선생이 나에게 스트레칭 자세가 많이 좋아졌다며 칭찬해 준 날이 있었다. 집에 와서 20대 작은딸에게 발레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하니 "그건 엄마가 발레 학원을 오래 다니게 하기 위한 립서비스야"라고

  • [with+] 기도의 주어

    [with+] 기도의 주어 지면기사

    가을 나들이를 다녀왔다. 충북 음성에 있는 매괴고등학교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왔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이 일대의 성당과 저수지를 돌아다닐 여행 일정이 펼쳐졌다. 강연을 마친 후 학교 옆에 있는 매괴성당으로 향했다. '매괴'는 장미꽃다발을 한자식으로 풀이한 것으로, 성모에게 바치는 묵주기도를 뜻한다. 내가 로사리오(묵주기도)를 처음 한 것이 언제였을까? 아마도 첫 영성체를 받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일 것이다. 당시 우리 본당은 건물도 없어서 오랫동안 컨테이너 박스로 된 임시 건물에서 미사를 드렸다. 나는 '양력'과 다르게 흘러가는 두 시간대를 좋아했다. 하나는 농부인 큰아버지에게 유의미한 24절기가 인쇄되어 있는 달력이다. 농협에서 주는 달력에는 월력과 더불어 중요 절기가 따로 표기되어 있다. 또 하나는 성당에서 쓰는 그레고리력이다. 사순절, 부활절, 성모성월, 대림절과 대축일들로 흘러가는 그레고리력에 따라 신부님이 제대 위에서 입는 의복이 달라진다. 강력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시간, 학교에 가고 의무를 배우고 성적이 매겨지는 시간과는 또 다른 시간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것은 물처럼 잡을 수 없는 시간 위에 띄우는 또 다른 부표로서, 일상이 다른 빛깔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난 내킬때만 성당 찾는 불량 신자지구 한쪽선 이해할 수 없는 전쟁감곡 매괴성당은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성당으로, 가을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벽돌건물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산책길에는 사제서품을 받은 이듬해 한국에 와서 이 성당을 지은 '임 가밀로'라는 초대신부님의 가묘가 나온다. 안내문에는 문맹퇴치를 위해 학당을 세운 신부님의 공을 치하하여 고종황제가 태극기를 하사한 일,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자 태극기를 제대 속에 숨겨 놓고 지내다가 광복 후 음성에서 가장 먼저 태극기를 내걸었던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긴 수염을 기른 푸른 눈의 사제이자 한 인간의 삶을 상상하니 아득해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자라면서 나는

  • [with+] 배론 성지의 가을 햇빛

    [with+] 배론 성지의 가을 햇빛 지면기사

    처음부터 배론 성지를 찾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가을 햇빛이 너무 찬란하니, 어디든 떠나자 한 곳이 배론 성지였다. 제천의 의림지를 한 바퀴 돌면서 배론 성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지라면 더욱 그 땅을 밟아보고 싶었다. 천천히 차를 몰아 배론 성지를 찾아 나섰다. 아직 산하는 푸르러 가을 정취가 깊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차창으로 보이는 산줄기에서 가을의 분위기가 번져왔다.송골매의 CD를 걸었다. '모두 다 사랑 하리'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시작으로 삼십여 곡을 다 들었다. 담백한 목소리가 좋았다. 기교 없이 흐느끼지 않고 흐르는 선율이 매력 있다. 차는 미끄러지듯 성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경내를 둘러봤다. 고즈넉하다.1801년 순교한 황사영 토굴 초가집성직자 양성 천주교 첫 신학교 교사그는 교황 있는 서양 연결 꾀하기도우선 황사영의 토굴을 찾아갔다. 토굴은 깊지 않았다. 한 사람이 겨우 은거할 수 있는 크기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8개월 동안 토굴에 머물며 중국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간곡한 편지를 썼다. 편지는 명주 천으로 세필로 쓴 글자 수가 122행에 무려 11만3천여 자나 되었다. 그것이 황사영 백서다. 이 백서는 인사말, 신유박해의 진행과정, 순교자 열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안, 맺음말로 되어 있다. 백서는 주교에게 전달되기 전에 압수되었고 백서의 전달을 맡았던 토마스가 그 해 9월 배론에서 체포되어 1801년 11월5일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의 죄로 능지처참 되었고 6일 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도로, 아내 정난주(마리아)는 제주도로, 두 살 된 아들 황경환은 추자도로 귀양갔다. 황사영은 체포되어 그해 11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황사영 토굴이 있는 곳의 초가집은 우리나라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요셉 신학교의 교사였다. 1855년 초 성인 장주기(요셉)의 집에 설립된 요셉신학교에는 프랑스인 프레티에, 프티니콜라

  • [with+] 원 플러스 원 새송이버섯

    [with+] 원 플러스 원 새송이버섯 지면기사

    아홉 살 딸의 친구들은 놀이터에서 놀다 말고 군것질거리를 사러 편의점에 가는 모양이지만 우리 아이는 아직 그런 적이 없다. 편의점은 놀이터에서 아주 가깝지만 폭 좁은 횡단보도를 건너야 한다. 엄마나 아빠 없이 길을 건너는 건 절대 금지라고 누누이 말한 터라 아이는 그래 본 적이 없는 거다. "그럼 친구들이 편의점 갈 때 너는 그냥 기다려?" 내가 물었을 때 아이가 대답했다. "진정한 친구들은 안 가. 내가 못 간다고 하면 나를 위해서 자기도 안 가는 거지. 하지만 나 보고 그냥 기다리라고 하면서 갔다 오는 친구들도 가끔 있어. 그래서 나도 요즘은 편의점에 가보고 싶기도 해. 진짜 재밌을 것 같거든." 아이의 표정은 아쉬워 보였다.나는 소심한 사람이라 아이들끼리 길 건너는 걸 두려워하고, 소심하지는 않지만 아이 아빠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쯤 아이도 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하고는 있었다. "그럼 마트에 가면 안 돼? 마트도 놀이터랑 가깝고 길도 안 건너잖아." 놀이터 옆에는 편의점 말고 작은 마트도 한 곳 있다. "하지만 친구들이 마트는 별로 재미가 없대. 편의점이 재밌대. 그리고 친구들한테 마트 가자고 할 것까진 아닌 것 같아. 아빠가 아홉 살 어린이가 벌써 돈 쓰고 그러는 거 좋은 일은 아니라고 했어." 하긴, 편의점에는 동네 꼬마들이 좋아할 아이템들이 꽤 있다. 캐릭터 인형이 달린 사탕 반지나 젤리, 초콜릿 같은 것들 말이다. 부모없이 횡단보도 건너기 금지 당부친구들과 편의점 못 가본 아홉살 딸대신 마트 가기로 큰 결심했다는데 아이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침 메뉴는 아보카도를 얹은 토스트다. 버터 넣고 프라이팬에 지진 토스트에 아보카도 반 개를 잘라 얹고, 달걀 프라이와 오렌지 반 개, 그리고 새송이버섯 한 개를 얇게 썰어 구우면 그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아보카도는 소금과 후추만 살짝 뿌려도 고소하고, 새송이버섯에다 오렌지 썬 걸 한 번에 입에 넣으면 식감이 아주 그만이다. 그런데 아침에 새송이버섯이 똑 떨어진 걸 모르고 있었다. 별수 없이 버섯 대

  • [with+] 시기심과 쌤통 심리

    [with+] 시기심과 쌤통 심리 지면기사

    만약 당신이 직장 동료의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것을 다른 동료들에게 말할 것인가? 당신이 배려심이 깊다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는 사람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그런데 남의 비밀을 오히려 들추는 데 혈안이 된 인물이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빅튀르니앵 부인이다. 그녀는 공장에서 일하는 팡틴이라는 여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는다. 빅튀르니앵 부인은 쉰여섯 살로 추녀이고, 팡틴은 젊고 아름다워서 주위에 시기하는 여자가 많다. 사람들은 팡틴이 다달이 몽페르메유의 여인숙으로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을 알았고, 팡틴에게 어린애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빅튀르니앵 부인은 팡틴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자기 돈을 들여 멀리 있는 몽페르메유에 다녀오기까지 한다. 그 결과 빅튀르니앵 부인은 팡틴이 그곳의 여인숙 주인 부부에게 딸아이를 맡기고 양육비를 부치고 있는 미혼모라는 것을 알아냈고, 이 사실을 발설하며 즐거워한다. "35프랑이나 들여서 다 알아냈지요. 어린애도 봤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팡틴은 유일한 피붙이인 딸아이와 함께 살고 싶지만 양육비를 벌어야 했으므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여운 인생을 사는 팡틴에게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타인의 불행은 나의 기쁨'이라도 되는 듯 그녀는 신바람이 난다. 우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중자기보다 앞서 있는 사람 부러워 해 인간에게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남의 불행은 꿀맛이다'라는 일본 속담과 같이 남의 불행에 쾌재를 부르는 심보가 있기도 하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를 느끼는 것이다. 샤덴프로이데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한다는 뜻을 가진 독일어다. 리처드 H. 스미스가 쓴 '쌤통의 심리학'(이영아 옮김)에서는 샤덴프로이데를 '쌤통 심리'로 번역했다. '쌤통의 심리학'은 부제가 말해 주듯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은밀한 본성에 관하여' 쓴 책이다. 이 책에서 읽은, 아리스토

  • [with+] 유령작가의 기쁨

    [with+] 유령작가의 기쁨 지면기사

    연휴기간에 속초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했다. 그 카페는 내가 머무는 집과 해변의 중간에 있어서 긴 문장의 한가운데 박힌 쉼표 같았다. 사거리 모퉁이의 가게는 크지 않지만 노란색과 주황색의 실내장식을 하고 있어 밝은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스피커가 훌륭하여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커피가 맛있다. 나는 즉각 이 카페에 눌러앉기로, 그러니까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침마다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침 산책 이후 카페에서 책을 읽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좋은 시간이 되었다. 두 면이 통창으로 된 이 카페는 어항 같았다. 12차선 도로가 정면에 있어 길 건너의 사람이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걸어와 건널목을 다 건너고 가게 옆으로 빙 돌아서 해변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나는 영화의 한 장면을 보듯 사람들이 내 쪽으로 다가와 길가로 돌아가는 모습을 감상했다. 사람들은 해변으로 향하는 중이거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라 그런지 독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치고 행복한, 설렘이 살짝 들어있는 표정. 유리 너머 보는 풍경이기 때문에 모두 스크린 속 배우들 같았다. 내마음의 쉼표 같은 속초의 카페여행중인 사람들 표정 보는 재미책속 문장까지 추출 살뜰한 독서 그러다 노란 테이블로 돌아와 - 이 카페의 단 하나뿐인 넓은 탁자- 내 노트와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마침 들고 온 책의 표지와 탁자가 똑같이 노란 색인 것이, 이 우연한 일치가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줄 친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다가 문득 생각한다. 나는 필기 자체를 참 좋아한다고. 작업을 시작할 때 나는 우선 책을 읽고, 책 속에서 나의 마음을 건드렸던 문장을 펜으로 옮겨 적는다. 그러다가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연필을 꺼내 구분하여 적는다. 노트에 필기하는 순간은 글을 쓰기 위한 예열 단계에 해당한다. 다이빙 선수가 수영복을 입고 실내로 들어와 준비운동을 한 다음에 다이빙대에 올라가 하나 둘 셋, 바를 튕기고 마침내 입수! 하기 전까지 거치는 단계라고 할까. 줄 친 문장을 옮겨 적으면 원석 가운데 빛나는

  • [with+] 안동 병산서원의 배롱꽃

    [with+] 안동 병산서원의 배롱꽃 지면기사

    매년 안동 병산서원을 찾는다. 병산서원은 사적 제 260호로 지정된 문화재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도로다. 부분적으로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스팔트길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높지 않은 산줄기들과 낙동강 상류의 휘돌아나가는 모습이 여유롭고 정겹다.병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병산서원은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던 교육기관이었다. 얼마나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병산서원은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서원이다. 1978년 3월31일 사적 제260호에 지정되고, 2010년 7월31일과 2019년 7월10일 각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문화재청은 2010년 6월 안동 병산서원을 포함한 하회마을 일대와 양동마을 일대를 한국의 역사마을로 지정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를 신청했다. 그 결과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성룡의 학문·업적 기리는 서원정문 복례문 넘으면 고고한 모습웅장함에 저절로 옷 매무새 고쳐연못에 그늘 드리우는 배롱나무낙화된 꽃잎들 아름다움에 황홀"유성룡을 파직시키라." 조선 14대 임금 선조에게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은 1598년 11월19일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있는 중 영의정으로서 국난 수습에 앞장섰던 이름 난 재상 유성룡은, 전란이 끝나갈 무렵 북인들의 정치적 음해와 공격에 한 달 넘게 고초를 겪으며 수세에 몰려 있었다. 계속되는 상소를 견디다 못한 선조는 유성룡 축출을 명했던 것이다. 유성룡은 일본군이 철수했다는 기쁜 소식을 듣기도 전에 재상이라는 관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같은 날인 1598년 11월19일, 남해 해전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백성들이 가슴을 치는 일이 벌어졌다. 임진왜란 최후의 해전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줘 노량해전을 대승으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전투 중 전사한 것이다. 파직당해 낙향할 처지에 있던 유성룡은 절친한 사이로 함께 국난 극복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이순신의 전사

  • [with+]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

    [with+]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 지면기사

    엄마가 택배로 김치를 보냈다. 한 통은 배추김치, 나머지 한 통은 열무김치. 내가 불러주는 맞춤법 퀴즈를 풀던 아홉 살 딸아이는 김치 때문에 퀴즈가 멈춰 골이 났다. '해도지'가 아닌 '해돋이', '낭떨어지'가 아닌 '낭떠러지', 그런 퀴즈가 요즘 세상에서 제일 재미나단다. 나는 쉬운 문제만 골라낸다. 행여 한 문제라도 틀리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입술을 삐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날 내는 문제만 내주어서 수십 번 퀴즈를 풀어도 아이의 맞춤법 실력은 별 발전이 없다. 이걸 왜 저녁마다 하고 있는지 나도 모를 지경이니 말이다. "엄마가 웃긴 얘기 하나 해줄까?" 김치통을 보고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요즈음 학교 분위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적엔 한 학교에 한두 명쯤 유별난 우등생이 있었다. 좋게 말해 우등생이지, 시험 때만 되면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선 한 문제라도 틀릴라치면 악을 빽빽 쓰고 시험지를 찢어발기고 온 반 아이들을 정신 사납게 하는 그런 아이 말이다. 도대체 시험이 뭐라고, 시험 문제지 걷어가자마자 서랍 속 참고서 우다다다 뒤져서 정답 찾아보고, 틀렸다 싶으면 세상 떠나가라 울어젖히는 못 말리는 진상.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내가 바로 그런 애였다. 진심이다. 중학교 시절, 나는 평소에는 멀쩡했다. 잘 놀고 잘 웃고 친구들과 잘 지냈다. 친구들의 연애편지도 대필해주고, 그 공으로 바나나우유도 얻어먹었다. 쉬는시간엔 함께 도시락을 까먹고 점심시간엔 친구들과 매점으로 달려가 보름달 빵을 사먹던 평범한 열다섯 살, 중학교 1학년. 그런 내가 시험 때만 되면 돌변했다. 전교 1등을 놓치면 죽는 줄 알았던 나는 한 문제라도 틀리면 문제집을 다 찢어버리고 쓰레기통에 처박은 후 눈물콧물 다 쏟으며 법석을 떨었다. 친구들이고 선생님들이고 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간고사 가정 시험이었다. '다음 중 김치의 재료가 아닌 것은?'이라는 문제였고, 나에게는 답이 보이지 않았다. 네 개 모두 김치에 들어가는 재료였다. 아마도 마늘, 생강

  • [with+] 재물과 행불행

    [with+] 재물과 행불행 지면기사

    부유하지만 근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검은 수사'에 나오는 예고르 세묘니치다. 그는 크고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다. 나이 든 그는 집에 놀러온 젊은 코브린에게 정원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자네가 보고 있는 이런 모습은 나 없이는 단 한 달도 유지되지 못할 걸세. 이 정원이 성공을 거둔 까닭은 엄청나게 크고 일꾼이 많아서가 아니라네. 성공의 진짜 비밀은 내가 이 일을 사랑한다는 데 있단 말일세"라고. 그리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접붙이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고 묘목도 심고 모든 걸 자기가 한다면서, "내가 죽으면 누가 그걸 다 돌볼까? 누가 일을 할까?"하고 걱정을 한다.미셸 드 몽테뉴의 책 '에세'에는 돈을 갖게 된 때 근심을 가졌던 이야기가 나온다. 여행을 갈 때면 돈 가방 때문에 짐꾼들이 믿을 만한지 걱정되고, 돈 가방이 눈앞에 없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돈궤를 집에 두고 오면 항상 그쪽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며,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고 몽테뉴는 썼다. 우리 주위에도 부유하나 행복해 보이지 않는 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가 지인한테서 들은 70대 할머니는 여러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을 갖고 있었다. 계약보증금은 싸지만 월세가 비쌌기에 짭짤하게 재미를 보았다. 그런데 경기가 침체되면서 월세를 몇 달 내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세입자들과 다툼이 일어나 속을 끓이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사했다. 소문에 따르면 노인은 젊은 시절부터 악착같이 돈을 모아 몇 년 전 건물을 샀다. 건물을 산 뒤에도 구두쇠였던 노인은 비싼 음식을 사 먹지 않았고, 비싼 옷을 사 입지 않았다. 그는 어쩌면 돈의 노예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 불행한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위의 세 가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재물은 행복을 보장해 주지 않고 마음에 그늘이 지게 만들기도 한다. 부자일수록 근심은 더 많다는 속담이 있다. 부자는 아무 근심도 없는 것 같지만 그 생활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가난한

  • [with+] 나라는 박물관의 관람객

    [with+] 나라는 박물관의 관람객 지면기사

    일주일간 대대적인 '집 안 이사'가 있었다. 원래는 딸의 방을 새로 만들어주려는 이유였는데, 그러다보니 함께 쓰던 공부방을 분리하고 남편의 취미 방을 처분하고 내 서재를 독립해나가는 식으로 일이 커졌다. 끝나고 보니 방 세 개의 모든 가구가 재배치되는, 방들끼리 이사를 다니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참에 오래된 물건도 솎아내고 묵은 먼지도 털어 내다보니 모든 것이 정리되는데 일주일이나 걸렸다. 서재에 앉아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딸이 태어난 후 십 년만에 온전한 서재를 되돌려 받게 된 셈이었으니까. 책장을 정리하면서 나만의 버릇대로 '심장' 칸을 하나 만들었다. 책장 한 가운데를 비우고, 그 안에 가장 좋아하는 '경전' 몇 권을 가져다 놓는 것이다. 거실 벽을 책장으로 채울 때 만들어본 방법인데 이렇게 한복판을 비워두고 평생 읽을 보물 같은 책들을 채우면 책장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진다. 자동차로 치면 엔진룸에 해당한다고 할까? 거실의 심장 칸에는 '돈키호테'와 '모비딕', '보르헤스 단편집'과 '빌러비드' 등이 있고 그 위쪽으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 있다. 서재의 심장에는 무엇을 넣어둘까? 나는 즐거운 고민에 빠져 일단 전집에서 '안나 카레리나' 세 권을 가져다 넣어두었다.(이 글을 쓰다말고 일어나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도 추가했다.) 서재 심장엔 '안나 카레리나' 세권한쪽엔 습작·편지 등 '인생 기념품' 여섯 개의 책꽂이로 둘러싸인 책상은 견고한 성채처럼 보인다. 큰 책상에 대한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결혼하면서 6인용 탁자 두 개를 사서 하나는 책상으로, 하나는 식탁으로 쓰고 있다. 이 커다란 짐승 같은 탁자를 책상으로 길들이기 위해 두꺼운 옥스포드 천을 깔고 몇 개의 '성물'을 늘어놓았다. 자주 쓰는 파일꽂이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 필기구와 핸드크림이 꽂힌 도자기통, 나침반이 그려진 문진과 향초 등등이다. 이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있으려니 정찬을 준비하는 집사 같다. 달리보면 나만이 유일한 요리사요 손님이지만 이제부터 이 책상에서 쓰게 될

  • [with+]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 이옥

    [with+]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 이옥 지면기사

    이옥(李鈺, 1760~1813)은 경기도 화성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시인이다. 효령대군의 후손이었으나 서얼이었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가선대부 호위별장 이만림이고, 할아버지는 어모장군 행용양위부사과를 지낸 이동윤이며, 아버지는 이상오이고, 어머니는 남양홍씨로, 이성현감 홍이석의 딸이다. 실학자 유득공은 이모의 아들로, 이종 사촌형이 된다.그는 18세기 조선 문단의 이단아였다. 정조는 선비들의 기풍을 바로잡겠다는 생각을 하고 문체반정을 통해 대대적인 문장개혁을 실시했다. 당대의 문장가들인 박지원이나 이덕무, 박제가도 반성문 제출을 왕으로부터 요구받았다.이옥은 문체반정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과거시험 자격이 여러 차례 제한되기도 하고 멀리 기장까지 쫓겨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그의 불경스럽고 불온한 문체가 늘 말썽이었다.정조, 선비기풍 잡으려 '문장개혁'불온한 문체로 왕의 미움받은 이옥 그는 왕의 미움을 받고 고향으로 쫓겨 내려가면서도 부지런히 글을 썼다. 예컨대 남정십편(南程十篇) 등이 그것인데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보고 들은 것들 열 편을 쓴 것으로 반성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고 불경스럽고 해괴한 내용들이었다.이옥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어려서의 이름이 기상이며 호는 경금자(絅錦子)라고 썼다. 별볼일 없는 무반의 후손으로 당색은 당시 몰락의 길을 가던 북인 계열이었다. 그의 문집은 제대로 수습되지 못해 필사본이 여기저기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들을 2009년 휴머니스트 출판사에서 다섯 권의 전집으로 묶어 출판했다. 그의 복권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만한 분위기다.그는 시인이면서도 시는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의 '이언'은 무엇 하고자 지은 것인가? 어째서 국풍이나 악부나 사곡을 짓지 아니하고 굳이 이언을 지었소?" 이언은 네 여성의 삶을 서로 다른 가락으로 노래한 그의 시다. "내가 한 게 아니라오. 주재자가 그렇게 시킨 것이라오."이 질문은 처음부터 '이걸 시라고 썼는가'

  • [with+] 조금 다정한 노후 대책

    [with+] 조금 다정한 노후 대책 지면기사

    "인생이 꾸꾸무리하다."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선배의 말에 나는 푸푸 웃었다. "왜요?" 내가 묻자 그냥 한숨이다. 들어보니 회사 옆자리 동료가 퇴사를 했단다. 그게 뭐라고, 회사 생활 어언 25년 가까이 한 사람이 고작 동료의 퇴사에 울적해졌다니. "내 또래거든. 이제 더는 다른 회사에 들어가긴 힘들다는 말이잖아. 인생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퇴사라는 거지." 아, 나는 짧게 탄식했다. "이젠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어. 아무도 나와 놀아주지 않아." 그럴 테다. 점심시간에 제일 먼저 부장님에게 무얼 드실 건지 물어보는 사람은 이제 더 없고 퇴근길, 한잔할까? 하는 부장님의 말에 알겠습니다! 하고 벌떡 일어나는 사람도 이제는 없다. 그런 자세를 가진 사람은 이제 다 부장님이 되었거나 퇴사했다. 부장님은 혼자 놀아야 한다. 그래서 외로운 부장님에게 내가 말했다. "목요일마다 그림 모임 안 할래요? 생초보들 모여서 노닥노닥 얘기 나누면서 그림 그리기로 했거든." 태풍이 온다던 날이었다. 폭염에 지쳤다가 비 오기 전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자 나는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림 모임 같은 것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난 것이었다. 늘 그랬듯 나는 즉흥적인 사람이라 꼼꼼한 계획 같은 건 세우지도 않고 페이스북에 짧은 알림 글을 올렸다. 뭐 대단히 예술 하는 거 말고, 소소하게 그림 그리다가 사는 이야기나 조잘조잘 나누고, 두어 달 그리다 보면 완성작도 모일 거고, 그러면 조그마한 동네 갤러리 같은 데 대관해서 전시회도 해보는 거 어때요? 하고 말이다. 그림이라는 게 말이 쉽지 한 번도 안 그려본 사람투성이일 텐데 사람들이 모이겠어? 생각했지만 순식간에 여덟 명이 모였다. 정말 순식간이었다.동료 퇴사에 울적해하던 직장인 선배외로운 부장님께 초보 그림모임 권유이유는 할머니 됐을때 행복하려고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색연필, 물감 등을 가득 펼쳐놓고 일을 벌이기엔 장소가 마땅찮았으므로 우리는 아이패드만 챙기기로 했다. 그림 선생님도 없고, 그러니까 무얼 배우려고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