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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속의 아이 지면기사
연말 풍경이 지금처럼 우울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중동 산유국의 횡포로 유난히 추웠던 겨울도 보내봤고, IMF경제위기에 감원의 칼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겨울도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그 고통을 같이 이겨내려는 사회적 합의라도 있었다. 아이들은 고사리손을 호호불어 에너지절약 포스터를 그리며 성장주도세력으로 커나갔고, IMF때는 금붙이를 들고나선 시민들끼리 공동체의 진한 연대를 나누며 오히려 행복했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 누구도 소외를 원치 않는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끊임없는 연대의 확인 과정이다. 집단내에서 안전하다는 연대감은 삶을 유지시키는 순도 높은 엔돌핀인 셈이다. 집단적 위기가 집단의 발전으로 승화되는 건 이같은 연대의 확인과정이 강력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위기를 말하면서도 '위기속의 연대'에 무관심하거나 체념하고 있으니 진정한 위기는 이 때문이다. 장롱속에서 굶어죽은 어린 소년의 비극은 연대 없이 파편화된 우리 사회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순전히 아이 입장에서만 보면 꼬마의 비극은 부모를 잘못 둔 탓이다. 벌어먹이지 못하면 먹을 수 있는데다 버려라도 줄 일이지 장롱속에 가두다니, 폭력보다 더한 체념이요 무지가 아닌가. 장롱 문짝을 경계로 이승과 저승이 공존했던 그 비극적인 체념의 공간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일거리 잃은 아버지와 정신지체 어머니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그들도 모두 굶어죽을 심산 아니었을까. 그 집안의 텅빈 냉장고가 그들의 체념어린 각오를 흉칙하게 증명하고 있잖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꼬마의 부모 대신, 우리의 공허하고도 전시적인 사회 네트워크를 치열하게 비난한다. 4살박이가 장롱속에서 굶어 죽어가는 동안 이웃들은, 동사무소 직원들은 무엇을 했던가. 엽기적인 비극의 충격에서 헤어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 비극에 책임질 희생양을 찾느라, 이렇듯 분주하다. 그러면? 그러면 우리를 대신해 아이의 죽음에 책임질 사람들을 지어낸다 해서 우리의 책임은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그 순간 부터 두발 뻗고 편한 잠을 청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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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띠와 하늘에 주먹질 지면기사
'하늘에 맹세한다' '하늘이 내려다본다'고 말한다. '하늘이 두렵지도 않느냐' '천벌(天罰)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하늘에도 눈들이 있고 맹세도 받고 심판도 내릴 무서운 존재들이 있긴 있는 것인가. 하긴 유사 이래만해도 '하늘나라'에 전입신고를 한 수십 억, 수백 억 혼령과 귀신이 자옥하게 떠 있을 것이고 하늘대국(大國)에도 잘난 대통령과 못난 대통령, 똑똑하고 머저리 같은 총리를 비롯해 판·검사와 헌법재판관까지 고좌(高座)에 높직이 버티고 앉아 있을 게 아닌가.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늘나라엔 하나님이 계시다. 기독교의 하나님(God)과 이슬람의 알라(Alla) 신을 비롯해 하늘 길을 신봉하는 천도교 등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신도 하늘에 본적과 현주소를 두고 있을 것이다. 신화를 봐도 우리의 환인(桓因)과 중국의 반고(盤古), 일본의 다카마가하라(高天原) 등 민족 신은 모두 하늘에 있다. 그렇다면 아주 '쬐끔'이라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줄 알고 하늘의 심판을 받고 천벌을 받을까 두려워할 줄도 알아야 사람이고 정상이다. 그런데도 이 땅에선 저 신성하기 그지없는 하늘을 향해 1년 365일 애니 데이, 애니 웨어 주먹질, 주먹총질 하지 않는 날이 없고 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눈만 뜨면 하늘나라 판·검사와 헌법재판관 나리들을 향해, 하나님 쪽을 향해 주먹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하늘 보고 주먹질한다'는 말은 '당치도 않은 짓을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과연 하늘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을지 겁부터 앞선다. 2004년 이 해도 딱 보름을 남겨둔 1년 내내 우리는 눈만 뜨면 하늘에 주먹질을 해댔다. 떼를 지어 떼만 쓰면 통한다는 떼법(法)의 '떼∼한민국' 온갖 시위대가 매일같이 도처에서 하늘을 향해 '떼 주먹질'을 해온 것이다. 양대 노총과 전교조, 전공노가 그랬고 '4대 개혁법'인지 '개악법'인지를 둘러싼 정당과 국가 원로, 각계 단체가 그랬고 전국 지자체 이해 상충 단체들이 그랬다. 솥단지를 내동댕이쳤고 한 달에 5천여 곳씩 급증한 노점상들이 싸웠고 성매매 여성들이 하늘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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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이 태업하는 나라 지면기사
헷갈리는 말이 난무한다. 가장 최근에 들은 모순된 표현은 '12월의 열대야'다. 어느 방송국 드라마 제목이라고 했다. 뭐야? 누굴 놀리나? 서민들은 겨울나기가 한 걱정인 판에 열대야라고? 엄동설한에도 벌거벗다시피 사는 인종들이 벌이는 그렇고 그런 사랑놀음 아냐? 그러나, 전혀 동이 닿지 않는 말들을 갖다붙여 은유와 상징을 만들어내는 기법에 과민반응을 보이는 건 비웃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터.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잘 빠진 사랑얘기가 되는지나 국으로 지켜보는 게 상수다. 그러나 '우익혁명'이라는 말은 여전히 얼떨떨하다. 지난 2000년 당시 부시 진영이 클린턴에 맞서 내세웠던 구호 중에 하나가 '우익혁명'이다. 그가 올 대선에서 승리하자 우익혁명의 승리 운운하는 기묘한 표현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세상에! 우익도 혁명을 한다고? 구체제(앙시앙 레짐)를 지키고, 기존질서 유지(스테이터스 쿠오)를 추구하는 세력에게 붙여진 전통적인 이름이 우익 아니었던가? 우익이 하는 건 '친위쿠데타'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세상이 뒤죽박죽이 된 거야, 내가 처음부터 뭘 잘못 배웠던 거야? 곧이어 '수구적 좌파'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것도 상식을 심하게 흔든다. '적'자가 붙기는 했지만, 옛 것 지키려고 안달하는 세력이 어째서 계속 좌파라고 불릴 수 있지? '우익혁명'식 조어법과 쌍생아 아냐? 물론, 스탈린처럼 체제방어적 정권에 대해 그런 지칭이 성립할 여지는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이 과연 그런 걸까? 혼란스럽다. 하지만 '우익혁명'이나 '수구적 좌파'는 그런대로 이해할 만하다. 밑바닥에 깔린 정치적 의도를 감안하고, 뒤집힌 상식을 다시 이리저리 엮으면 된다. 그래도 안 되면 헛심 쓸 필요 없이 그런 말이 있나보다 하고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본의 태업'이라는 표현만은 호락호락 넘어갈 수 없다. 우리네 살림살이에 막대한 영향을 직격탄으로 미치기 때문이다. 누가 갖다붙인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사회에 '자본의 태업', 심하게는 '자본의 파업'이라는 말이 등장한 지는 꽤 됐다. 현 정권이 들어선 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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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시대와 노인성치매 지면기사
주변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벽에 ×칠해가며 오래 살라는 말이 있다. 뚝 짤라 내 오래 살라면 이보다 좋은 덕담은 없다. 그러나 실상 앞의 단어들을 연결해 붙여 놓으면 뭐를 벽에 덕지덕지 발라가며 살아가라는 뜻이니 이정도에 미치면 분명 엄청난 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인간의 본성이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도 어느 누가 멀쩡한 제정신으로 멀쩡한 벽에 ×칠해가며 살고 싶겠는가. 그렇다면 말년을 치매나 앓으며 생을 연장하라니 악담중 악담이다. 한국은 지금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기현상이 많은 우려를 낳고 있는 터이다.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2001년 현재 전체인구의 7.4%인 354만명이며 20년후인 2022년에는 14.3% 대로 진입할 것으로 추정되는 바 80~90년대의 고도성장과 생활의 윤택함이 환경을 크게 바꿔 놓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사회는 점차 노인사회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면 노인복지 부분은 당면한 현안이며 또한 이들의 각종질환은 소홀할수 없는 대목이 아닐수 없다. 최근 우리사회는 불행하게도 노인치매환자가 급증하고 있어 상황에 따라 가정을 흔들며 또다른 사회문제를 불러온다. 이미 전국 노인인구의 8.3%에 해당하는 30만명이 치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을 수용하거나 적절한 관리와 치료를 감당할 시설이 태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노인들 대부분은 열악한 여건속에 방치되어 있는 반면 그나마 시설원을 이용하는 치매환자는 여간 운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관계자들의 자조적 푸념이다. 본보는 지난달 27일자 현장르포를 통해 치매노인들의 미흡한 사회보장대책을 고발하고 있다. 인천의 경우 인천지역에는 현재 16만4천945명의 노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에는 8%인 1만3천196명이 치매를 앓는 환자이며 매년 0.3%씩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욱이 1천여명이 넘는 환자는 중증으로 전문적인 치료와 수용이 절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1만명이 넘는 환자수에 비해 보호시설과 전문 요양원은 수용인원이 고작 700명 선에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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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分道), 권력게임의 대상 아니다 지면기사
경기 분도론이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경기북부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당론화 하는 과정에서 분도론은 급격하게 정략적 의제로 변질되고 있다.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다짜고짜 결론 부터 말하려 한다. 경기 분도는, 만일 그것이 시대적 요구라면 국가발전 전략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이지 당론으로 관철할 정치 의제가 아니다. 국가경제에서 경기도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행정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이유 때문에 분도를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기도에 모여 사는 1천만 도민의 규모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인구 몇만의 선거구를 떼었다 붙였다 하는 일도 지역의 장래와 관련해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판이다. 하물며 1천만 인구 규모의 경기도이다. 이를 700만, 300만 짜리로 쪼개는 일은 700만, 300만 인구의 삶의 질을 새롭게 규정하는 일이다. 쪼개는 쪽과 유지하는 쪽, 어느 쪽이 도민 삶의 질을 향상하는데 더 유리할지 장고에 숙고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모두 생략하고 다음 지방선거에서 경기북도 지사를 선출한다는 로드맵이 나돌아 다니니, 아무리 급해도 우물앞에서 숭늉 달랄 순 없는 일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경기 분도론은 해묵은 지역 이슈다. 문제는 10여년이 넘은 이슈건만 그때 그때 정치권의 형편에 따라 부침을 거듭해온 선거이슈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점이다. 단 한번도 국가발전 전략 차원이나 주민 삶의질 향상 차원에서 과학적이고 심층적인 논의로 결론을 맺어 보질 못한 것이다. 그 결과 경기도민들에게 분도는 한번도 의미 있는 현안으로 수렴된 적이 없었다. 다만 남북으로 갈려 막연한 찬반의 입장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렇게 된데는 정치권의 잘못이 크다. 지방자치 실시 이후 본격화된 경기북부의 분도 요구는 그동안 번번이 이를 반대하는 세력의 위세에 의해 공론장으로 진입할 수 조차 없었다. 모두 정권과 경기도지사, 경기도 다수의석의 정당이 일치했던 과거의 일로, 분도를 요구하는 세력은 10여년간 소수의 설움을 삼켜왔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분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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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책찍이 필요한 북핵문제 지면기사
북한은 결국 핵을 포기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치 않다. 북한 핵문제는 우리 남북한의 문제인 동시에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 주변 강대국의 평화와 안정 그리고 국제질서에 큰 파장을 미칠 가장 강력한 요소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단시일내에 그 해법을 찾기란 거의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폐쇄적이고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일원체제의 북한 당국의 가변성은 거의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북핵문제는 가까운 시일내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결론을 돌출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인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북핵문제 해결에 가장 큰 걸림돌인 핵 당사자인 북한 당국의 막무가내와 미국의 강경책이다. 북한은 현재 진행중인 6자회담을 거부하고 미국과의 단독 협상을 원하면서 자신들의 체제보장과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협상 전술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미국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대가없는 협상과 선 핵포기를 주장하면서 북한을 압박하고 있는 상태이다. 온건파인 파월 국무장관이 퇴진하고 강경파인 라이스 보좌관이 국무장관에 임명되면서 체니, 럼스펠드, 라이스로 이어지는 북핵문제를 둘러싼 미국의 강경파들은 언제든지 남북한과 국제평화를 해칠 수있는 가장 큰 원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들의 정책이 북한의 의도대로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란 유추는 명약관화하다. 국내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와 전쟁을 벌여 후세인을 축출한 이들 매파는 언제든지 북한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일본의 입장은 명확한 것같다. 일본의 정·관계와 언론은 우리와 같은 평화해결의 대원칙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본은 북한의 핵개발과 특히 미사일 문제에 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북한에 대한 불신감은 극에 달해 있지만 그래도 평화원칙은 현재까지 고수하고 있다. 일본 열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이런 견해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한 저명한 언론인은 북핵문제를 동전의 양면으로 비유했다. 그는 북한의 핵개발이나 보유여부와는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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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씨 표기 헌법 소원 지면기사
“'柳'씨 성을 호적부에 한글로 표기할 때는 '류'가 아닌 '유'로 적어야 하고 '李'씨, '羅'씨도 '리' '라'가 아닌 '이' '나'로 써야 한다”고 엊그제 대법원이 확인하자 '柳씨 종친회'에서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대대로 물려받은 고유명사인 성씨 표기를 법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대법원의 논고 요지는 이럴 듯싶다. “한 나라의 언어란 그 누구도 아무렇게나 함부로 지어 말할 수 없고 임의대로, 되는대로 표기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한 나라의 언어 질서는 엉망이 될 것이다. 따라서 언어민족 공동체의 언어에 대한 공약과 규약은 필요한 것이며 표준말과 문법, 어법, 철자법도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성씨 표기라고 해서 국어에서 예외일 수 없고 마땅히 성문법 규정인 두음법칙을 준수해야 할 것이다.” 재치 있는 대법관이라면 이렇게 부연할지도 모른다. “만약에 두음법칙을 무시한다면 북한의 로동신문, 릉나도처럼 라체(나체) 락제(낙제) 란동(난동) 랍치(납치) 랑보(낭보) 래년(내년) 량심(양심)으로 표기해야 하고 '례의(예의)와 륜리(윤리)에 대한 론란(논란)'이니 '령혼(영혼)을 뒤흔든 련애(연애)'니 '녀자(여자) 로인(노인)이 렬차(열차)를 타고 력사(역사) 려행(여행)을 떠나 료리(요리)도 즐겼다'고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야구감독 '宣銅烈'은 '동열'이 아닌 '동렬'이고 '諸葛亮'은 성 따로 이름 따로 두음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에 '제갈량'이 아닌 '제갈양'인 것이다.” '劉, 兪, 庾'씨를 같은 '유'로 표기하는 것도 문제다. '劉'의 원음은 '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劉'씨와 '李, 羅 林'씨도 뒤따라 헌법 소원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한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다. '한글로 표기된 성씨가 과연 고유명사인가' 그것이다. 아니다. '柳, 劉, 兪, 庾'씨를 '유'로 통일한 한글 표기는 고유명사가 될 수 없다. 고유명사란 원래의 생김새 그대로 '柳, 劉, 兪, 庾'라는 글자다. '유'든 '류'든 그건 변칙명사, 변형명사지 원형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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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사학법은 위헌인가 지면기사
사립학교법 개정안은 합헌인가, 위헌인가? 모르겠다. 정확하게 말해 확신을 못하겠다. 나름대로는 분명한 견해가 있다. 법안 내용을 상식과 헌법에 비춰 따져보면 된다. 그런데 왜 그리 자신이 없는가? 저명한 교육학자와 헌법학자와 논객들이 나서서 나와는 다른 견해를 설파하기 때문에? 아니다. 사립학교 교장·교사 1만여명이 서울역에 모여 목이 터져라 반대의견을 외치기 때문에? 그것도 아니다. 그럼 왜? 헌법재판소가 어떤 판결을 내릴 지 모르기 때문이다. '관습헌법' 판결이 나왔을 때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아! 법의 세계는 정말 오묘하구나! 그동안 적어도 다른 법은 몰라도 헌법만큼은 안다고 생각했었다. 헌법을 몇차례 읽으면서 이 헌법만 제대로 지켜지면 우리나라는 썩 괜찮은 나라가 되겠구나 믿었다. 이런저런 헌법 관련 서적도 읽었더랬다. 하지만, 명문 헌법과 맞먹는 '관습헌법'이 존재하며, 그게 이렇게도 적용된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러니, 헌재가 이번엔 또 어떤 심오한 해석을 할 지 문외한이 어찌 땅띔이나 할 수 있으리오. 그래도 왈가왈부할 자유는 헌법에 보장된 터이니 한번 추측이나 해보자. 우선, 우리 헌법엔 아무리 뒤져봐도 '사유재산권'이라는 단어가 없다.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제23조 1항)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동 2항) 그냥 '재산권'이다. 그것도 '공공복리'를 위해서라면 법률로 제한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헌법은 사유재산권을 철저히 보호한다고 굳세게 믿는 국민이 많다. 사립학교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그 위헌 여부가 헌법재판소에서 가려지게 된다면 첫번째 쟁점은 이것이다. 사립학교는 사유재산인가? 물론, 학교부지와 건물, 비품과 집기는 등기부에 등재된 학교법인의 소유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시설을 떠나 학교라는 배움터는 법인 뿐만아니라 학생 교사 학부모 동문 등등이 공동으로 이어가는 공동체다. 이사장이 배짱 틀리면 문닫고, 많이만 쳐준다면 후딱 팔아치울 수 있는 사유재산은 아니라는 게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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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적 공세 멈춰라 지면기사
지금 미국 보스턴에서는 미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한 보스턴 레드삭스를 두고 열광의 도가니가 식지 않고 있다. 소위 말하는 '밤비노의 저주'가 풀렸다는 것이다. 86년만에 정상에 등극한 보스턴의 레드삭스는 이제 밤비노의 저주는 없다고 공언한다. 보스턴은 굿바이 밤비노를 목청 높여 외치고 있는데 알다시피 밤비노는 베이브 루스의 애칭이다. 그런가 하면 시카고 컵스는 아직도 '염소의 저주'에서 맴돌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45년 월드시리즈가 열리는 경기장에 애완용 염소를 데리고 입장하려는 시카고 컵스 열성팬이 저지당하자 분한 마음에 다시는 이곳에서 월드시리즈는 볼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데서 비롯됐다. 훗날 아직까지 시카고 컵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적이 없다. 물론 이들 양팀은 처음에는 저주얘기가 돌자 웃기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상황이 단순하지 않았다. 해가 가면 갈수록 경기는 꼬이고 계속되는 불운과 불행이 팀을 어렵게 만들며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했다. 보다못한 레드삭스의 열성팬들은 베이브 루스를 방출하며 시작된 저주를 풀기위해 2002년 당시의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보스턴 근교 연못에 루스가 빠뜨렸다는 피아노 인양 작전을 벌여 연주회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것이 효과를 봤는지도 모를 일이다. 답답한 시카고 컵스 역시 이후에 염소를 경기장에 데리고 와 보기도 하고 60년 전에 저지당했던 사람의 손자들을 경기에 무료로 관람하게 하는 등 별수를 다써봤으나 아직까지 답변없는 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지난달 28일부터 수일간 계속된 대한민국 국회는 그야말로 민생은 안중에도 없이 끝으로 치닫는 정쟁의 한판이었다. 가뜩이나 당·당·청이 빚어내는 각종 사회혼란에 골머리가 휘둘리는 국민들 앞에, 의연히 국정의 중심적 지렛대 역할이 요구되는 행정부까지 가세한 어이없는 리턴매치는 한마디로 경악을 주기에 충분했다. 답변과 질의를 하는 당사자들 품위는 간곳없고 악의에 찬 공세는 어떻게 하든 상대방 흠집부터 내고 보자는 식이다. 다행한 일은 이미 국민들이 이런 모습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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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은 짓되 적대하지는 말기 지면기사
사람들은 각자의 틀로 타인을 판단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구걸하는 걸인을 쳐다보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시선이 다르고, 지는 낙엽을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의 감흥이 다르고, 백인에 대해 느끼는 흑인과 황인종의 의식이 다르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개도국과 선진국의 입장이 다르다. 부자(父子)와 남녀와 인종과 국가를 가릴 것 없이 대상이나 현상을 인식하는 틀(Frame)이 다르기 때문이다. 언론의 세상보기는 더욱 심해서 언론이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는 '거울(반영) 이론'에 금이 간 건 꽤 오래전이다. 이제는 “뉴스는 사회적으로 생성된 산물이지 객관적 현실의 반영이 아니다”라는 비판주의적 관점이 거의 정설로 여겨지는 추세다. 이런 관점을 전제한다면 세상은 각자의 틀로 현실을 규정하는 무수한 개인과 집단이 어울려 사는 무대인 셈이다. 그래서 세상은 다양해지고 풍요로워지며 역동적으로 굴러간다. 물론 틀을 달리하는 개인과 집단이 서로 존중하거나 최소한 대화가 가능한 수준으로 자기 주장을 제한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판이한 이들이 모두 적대한다면 끔찍한 세상이 될테니 그렇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이런 개인과 집단으로 구성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당 자체가 그 사회의 유력한 틀을 대표하는 결사이다. 그러니 정당 마다 정책 틀이 다르거나, 대통령 마다 통치의 틀이 다른 건 너무 당연하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현실로 수용해야 한다.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진보의 틀로 통치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나, 야당인 한나라당이 보수적 틀로 정부·여당을 견제하는 행위, 민주노동당이 급진적 틀로 여야를 비판하는 활동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상대의 틀을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폐기 대상으로 보는데 있다. 지난주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이전특별법 위헌 결정은 우리 정치권의 적대의식을 적나라하게 까발려놓았다. 위헌 결정에 대해 대통령과 여당은 위헌의 근거인 관습헌법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드러냈다. 일단 국회 연설을 통해 위헌결정의 법적 효력까지는 인정하기에 이르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