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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자급목표를 정하자 지면기사
“구아바, 구아바, 망고를 유혹하네~~.” 가수 김C의 표정이 일품이다. 전편 이효리의 망가진 망고송보다 더 코믹한 김C의 CF를 아무 생각없이 들여다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구아바가 뭐지? 찾아보니 잉카 지역 식물이란다. 망고는 열대 과일이다. 남미와 열대과일이 배타고 태평양 건너와 만들어진 캔 음료가 국내에서도 히트를 쳤다. 농산물 개방시대가 실감난다. 하긴, 그런 게 구아바 망고 뿐이랴. 그런데, 도대체 배삯이 얼만데, 저 이국과일들을 실어와 그렇게 값싼 음료를 만들어 팔 수 있을까. 아마존 열대우림을 밀어낸 자리에 거대한 콩 농장을 만들고, 그 콩을 미국이나 호주에 싣고 가 소를 먹이고, 그 소고기를 다시 우리나라에 실어 와 파는 데도 국내산 소고기보다 훨씬 싸다. 아무리 교통이 발달하고, 농업 목축업이 효율화 되었다고 해도 참으로 헤아리기 힘든 요술같은 셈법이다. 이걸 신자유주의의 승리라고 해야 하나, 지구차원의 낭비요 착취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우리나라 과실류의 자급률은 높은 편이다. 2002년 현재 88.9%나 된다. 물론 100%를 넘던 10여년전에 비하면 낮아진 것이고, 자유무역협정(FTA) 시대를 맞아 칠레 등지에서 재배된 과일들을 비행기로 배로 실어와도 우리 과일보다 싸므로, 앞으로 더 하락할 게 분명하지만, 곡물자급률보다는 월등히 높다. 곡물자급률은 2002년 30.4%, 2003년엔 더 낮아져 26.9%에 불과하다. 사료로 쓰이는 곡물류를 제외할 경우에도 58.3%밖에 안된다. 한국사람이 먹는 곡물을 기준으로 보면 하루 세끼 가운데 한끼도 자기 땅에서 지은 작물로 짓지 못한다는 얘기다. 단지 쌀만은 자급률 107%다. 그저 밥만 우리 쌀로 차려먹는 셈이다. 국수나 빵은 거의 전부 남의 것이다. 밀의 자급률은 고작 0.7%고, 콩은 7.3%니까. 지난 70년만 해도 밀은 15.4%, 콩은 무려 86.1%였다. 자급률을 칼로리로 따져봐도 47%다. 한국인의 활동에너지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바다 건너 먹거리로부터 나온다는 뜻이다. 일본의 열량자급률이 40%이므로, 일본보다야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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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감보다 무서운 수혈 지면기사
'수혈이 필요한데 사용을 허락 하시죠' '의사선생님 수혈만큼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요'. 얼마전 한 대학병원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부인의 만성지병이 도져 결국 수술을 해야하는 딱한 입장에 처한 한 직장인이 수술과정에서 필요한 수혈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할 방안이 없느냐며 한사코 의사의 수혈권고를 거부하고 있으니 진풍경이다. 최근 간염이나 에이즈 등에 감염된 혈액이 수년간 유통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혈액 관리에 비상이 걸린 것은 물론이고 수혜자들 사이에 불신이 확산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자체 조사 이후 검찰 수사로 확인된 혈액 관리의 실태는 한마디로 '재앙' 그 자체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잠복한 혈액이 헌혈단계에서 걸러지지 않고, 수혈을 통해 무려 7명에게 에이즈를 감염시켰다. 이들중 3명은 이미 사망했다고 한다. 또한 검사 직원들의 실수로 B형·C형 간염 혈액도 버젓이 수혈돼 8명이 간염에 걸렸다. 엉터리 채혈, 부실한 혈액관리, 무책임한 혈액공급 등 적십자사의 3박자 무능행정이 제대로 맞아돌아가 엄청난 결과를 빚은 것이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나 보호자 입장에서는 오염혈액에 대한 의심으로 수혈 자체를 수용하기 힘들게 됐다. 불량 혈액 유통에 따른 패닉 현상은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더욱이 말라리아 감염 혈액에 의해 수혈 환자가 말라리아에 걸린 사례도 4건이나 확인됐고,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은 혈액이 140여 차례에 걸쳐 의약품 제조 등에 쓰이기도 했으며, 에이즈 혈액으로 판명돼 폐기하고서도 전산 등록을 늦게 하는 바람에 같은 에이즈 감염자가 또 헌혈을 한 사례도 100여건 넘게 적발됐다. 뒤늦게 나선 검찰은 헌혈할 때 병력 조회를 하지 않아 부적격 혈액이 유통되도록 한 혈액관리 부실의 책임을 물어 해당 혈액원장 등 27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및 혈액관리법 위반 등 혐의로 무더기로 사법처리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말만들어도 오싹할 노릇이다. 틀림없는 인재(人災)라는 사실에 더욱 몸서리치게 된다. 로또한장에 백년가약이 무너지고 매일 마주치던 이웃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어처구니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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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저주의 모자를 씌우는가 지면기사
196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중국대륙을 암흑천지로 만들었던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실용주의 노선의 정적을 숙청하기 위해 기획한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에 만취한 홍위병들이, 노선투쟁의 제물로 지목된 지식인과 지도층에게 가한 맹목적 학대극이었다. 중국의 석학 계선림은 자신이 겪은 문혁 체험기록 '우붕잡억(牛棚雜憶)'에서 당시의 광기를 '미혼탕을 마신 비인(非人)들이 우귀사신(牛鬼蛇神)을 학대한 10년 재앙'으로 정리했다. 문혁 시절 혁명파는 마음대로 자본주의파와 반동권위를 지목했다. 재판도 없었고 자기변호도 허용되지 않았다. 다만 타도대상을 인민 앞에 무릎 꿇리는 것으로 족했다. 중세를 암흑에 몰아넣은 종교재판도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일절 허용하지 않았지만 불리한 증언만은 귀담아 들었다. 재판의 모양새는 갖췄던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중국의 문혁이 자본주의파와 반동권위를 선별하는데는 '지목'과 '인민의 고함'만으로 족했다. 계선림은 '우붕잡억'에서 모자를 얘기한다. “당시에는 온갖 모자가 세상에 가득 찼으며 크기도 아주 다양했다. 나에게는 자본주의파, 반동학술권위 이렇게 두 모자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아주 적당할 것 같았다.” 중국 지식인과 지도층은 혁명파들이 학대자를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 준 '정치 모자'를 쓴채 소귀신 뱀귀신이 되어 외양간, 우붕에 갇혔던 것이다. 실용주의 노선으로 성장가도를 질주 중인 지금, 중국에선 '문화대혁명'이란 단어는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다. 그런데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진절머리 치는 사상·이념·정체성 투쟁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한창이다. 그것도 정권을 주고 받으며 국가를 이어가야 할 여야 정당이 서로에게 피아를 구분하는 정치 모자를 씌우는 적대적 이념논쟁과 정체성 논란을 벌이고 있으니 보통 큰 일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적대적 정치 모자를 씌우는 가해자로 규정하고, 자신들은 조작된 피해자들로 응전(應戰)할 뿐이라며, 싸움판을 키워가고 있으니 더욱 비극적이다. 한나라당은 집권세력이 자신들의 머리에 '극우' '친일' '반공' '유신' '반민주'의 모자를 씌우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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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내버리는 나라 지면기사
왜 한자 교육이 필요하고 ‘왜 한자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왜 국어 교육이 필요하고 ‘왜 국어를 알아야 하는가’라는 우문(愚問)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이 나라가 한자 교육을 외면, 한자 문맹 국가를 만들어 가는 까닭은 한자는 우리 문자가 아니라는 오해 때문이다. ‘漢字’는 물론 중국 산(産) 글자다. 그러나 우리가 쓰고 있는 한자는 장장 2천년 전 이 땅에 영주권을 갖고 귀화(歸化)한 글자로 이미 ‘漢字’가 아닌 ‘韓字’가 돼버렸고 오직 우리만이 쓰고 있는 글자라는 것을 왜들 모른다는 것인가. 일본으로 건너간 한자도 마찬가지다. 중국 글자가 아닌 일본 글자 ‘日字’가 된 것이다. 예컨대 ‘國語’라는 말만 해도 중국에선 ‘꿔위’ 일본은 ‘고쿠고’라 읽고 ‘學校’도 중국에선 ‘수에샤오’ 일본은 '갓코'로 읽는 소리가 각각 다르다. '국어'와 '학교'로 읽는 민족은 우리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國語'와 '學校'를 중국 글자라 하여 외면할 수 있는가. 이는 일본에 귀화한 일본 한자가 중국 것이니까 모두 내다버리고 일본 고유문자인 가나(假名)만 쓰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되면 일본어는 존재할 수도 없다. 한자가 중국서 온 글자니까 버리자는 것은 마치 영어가 로마자니까 영어를 버리자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영어가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 왔으니까 영어를 몽땅 내다버리자는 논리나 다를 바 없다. 영어뿐이 아니라 같은 로마자를 쓰는 독어, 불어,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한자를 버리는 식이라면 영·독·불·이·스페인어도 버려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각각 엄존하는 까닭은 한·중·일의 한자처럼 알파벳 글자는 같지만 각각 발음이 다르고 뜻이 다른 독특하고 고유한 언어로 귀착, 굳어졌기 때문이다. 중국어의 ‘愛人’은 부인, ‘丈夫(장부)’는 남편을 뜻하고 ‘老婆(노파)’는 마누라, ‘約束(약속)’은 단속을 의미한다. 일본어 역시 ‘文句’는 불평, ‘師走’는 뜀박질하는 스승이 아닌 ‘섣달’이고 ‘靑大將’은 푸른 옷의 장수가 아니라 구렁이다. 중국 한자는 글자 모양도 달라졌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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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강요하지 말라' 지면기사
지난 주 한 고교생이 학교에서 잘렸다. 좋은 말 놔두고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까닭은 그가 원치않는 퇴학을 당했기 때문이다. 미션 스쿨의 학생회장이던 그는 학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교내방송을 통해 학생회장 퇴임의 변을 남겼다. '예배를 강요하지 말라'는 게 그 요지였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생님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가 1인시위를 벌였다. 학교측은 전학으로 수습하려고 했으나, 그는 고민끝에 이를 거부했다. 학교측은 결국 학칙에 따라 그를 제적키로 결정했다. 저간의 사정은 매스컴을 통해 대략적으로 알려졌다. 인터넷에서 '강의석'이라고 치면 그가 기록한 자세한 일지와 숱한 네티즌들의 의견까지 덤으로 읽을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명이 이런저런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 하는 판에 고교생 하나 잘린 사건을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사건에는 고교생이 '감히' 1인시위에 나섰다는 흥밋거리를 넘어서, 현재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교육, 종교, 청소년인권, 표현의 자유 등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표면적인 얘기부터 해 보자. 그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열에 아홉은 학교측을 비난하는 글이며, 그 중에 대여섯은 밑도 끝도 없는 욕이다. '종교의 자유가 뭔지도 모르는 미친학교' 쯤은 약과고, 학교폭파론에서 기독교박멸론까지 논리도 설득력도 없는 언어폭력이 난무한다. 이런 단세포적인 공격으로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이 바로잡힐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면 이런 인터넷 쓰레기들은 점차 걸러질까, 아니면 오히려 더 극성스러워질까. 물론 종교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학교측의 처사가 잘못된 것은 분명하다. 학교측은 강군 제적이 종교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교칙에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예배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애초부터 생기지도 않았을 문제이고, 학교측이 예배에 반기를 든 그를 어떻게든 '추방'하려고 한 흔적도 역력하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특정종교행사 참여를 강제하는 교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것은 '뺑뺑이배정'이 아니라 지원입학을 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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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소신 지면기사
김선일씨의 불행한 참사가 1라운드를 끝내고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1라운드는 머나먼 이국땅에 학비를 벌어보겠다고 떠났던 우리의 너무도 평범하고 가난한 이웃이 참혹한 주검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김씨에겐 이라크라는 곳이 약간의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지 결코 명분도 없이 목숨을 걸고 죽어갈 곳은 아니었을 게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대한민국 공동체의 대표자가 되어 무장테러범의 목표가 됐고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김씨는 정치적으로 아무런 영향이나 힘이 없는 소시민으로서 우리 사회의 일원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라크 무장단체의 빗나간 행위는 당초부터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막연한 테러에 불과했다. 더욱이 항거 불능한 개인을 참수한 테러집단의 반인류적 행동에 강한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세계도처에서 발생하고 있는, 특히 무고한 일반인을 향한 무차별적 모든 테러를 그 이유와 명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격분하며 증오한다. 최근 이라크 전쟁의 도화선이 된 국제무역센터의 공격과 처참한 붕괴는 왜 테러와의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지 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지만 이선상에서 빚어진 이라크 전쟁은 대의명분을 상실한채 정당성이 표류, 또다른 테러에 얼룩져 갈수록 참담한 결과를 만들고 있다. 세계 각국의 여론은 이라크 전쟁의 당위성을 의심하는 추세로 돌아섰으며 각국 정부는 첨예한 정보망에 촉각을 세우며 자국민 보호를 위한 예방책에 골몰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일어난 이번 이라크에서의 민간인 김씨 피살은 우리에겐 가장 우려했던 최악의 한사례가 되고 말았다. 이사건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순간 온국민은 무기력에 빠져들어 경악과 함께 정부의 대처능력을 의심하며 끓어오르는 분노로 떨어야 했다. 수도없이 지적돼 온 위기대처 능력이 또다시 도마에 오른 것이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무엇이 부족했는지 국제적 망신까지 초래했다. 사건 초동 단계에서 특정 개인의 말만을 믿고 시시각각 우왕좌왕하더니 급기야 장관까지 나선 AP와의 공방이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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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진 사람 모두가 떠드는 사회 지면기사
많은 국민들이 지금 나라를 걱정한다. 걱정의 요체는 방향감의 상실이다. 우리 사회가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그리고 리더는 누구인지 모르는데서 오는 혼란이다. 나침반을 상실한 집단의 위기감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입 가진 사람 모두가 손가락을 들어 가야 할 방향을 놓고 격론을 벌이는 형국이다. 나아갈 방향을 찾기 위한 잠시의 정적이 절실한 순간에 입 가진 사람 모두가 떠들어 대는 엄청난 소음. 바로 이 소음이 발등에 떨어진 우리의 위기다. 지금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김선일의 비극'도 그렇다. 우리는 진상규명의 여유도 없이, 그의 죽음에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 부터 국립묘지 안장문제에 이르기 까지 너무 많은 것을 결부시키고 있다. 이라크 추가파병을 놓고 정부·여당과 시민단체·민주노총이 제각각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대통령과 여당내 소장파의 의견이 엇갈린다. 국립묘지 안장문제도 그렇다. 국방부는 난색을 표하지만 여당의 당의장은 긍정적인 검토 의사를 밝혔고, 이에 질세라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도 동의를 표시했다. 이들에겐 김선일의 비극이 그저 정치일 뿐이고, 비극이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집단과 두고두고 지속시키려는 집단사이의 이해충돌이 있을 뿐이다. 웃기는 건 그들 중 '김선일 비극'의 진실을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저 정치적 프로파간다만 양산할 뿐이다. 진실은 알지 못한 채 주장만 난무하는 우리 내부의 모습은 정말 비극적이다. 김씨 피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말을 많이 한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다. 대통령은 국익 실현을 위해 이라크 추가파병의 당위성을 강조하지만, 국민은 미국에 대해 유난히 주체성을 강조했던 후보 시절의 대통령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반미면 어떠냐'는 발언에 열광해 표를 던진 사람들이 현 정부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당·정의 완벽한 분리를 기회있을 때 마다 강조한 대통령이지만 여당 관리용 개각에 골몰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취임 이후 검찰과의 한판, 재신임 파문, 탄핵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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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찬 정치, 만찬 政治 지면기사
'아침에 이를 닦고 밥을 먹었다. 학교에 갔다. 애들과 점심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이렇게 일기를 썼다간 아무리 초등학교 1학년 짜리라고 해도 담임 선생님의 꿀밤을 맞기 십상이다. 밥 먹고 배설하고 잠자는 일, 자고 나면 으레 하는 일을 일기라고 쓴다면 마당가의 멍첨지(개)가 다 웃을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고도 희한한 일이 이 나라에선 거의 매일같이 벌어져온 지 오래다. 청와대 오찬과 만찬이 그것이다. 오늘 오찬엔 아무개와 아무개, 만찬엔 무슨 단체, 어느 집단을 초대했다는 게 매일처럼 일기로 적히는 청와대 일지(日誌), 청와대 일기가 아닌가. 물론 점심, 저녁도 제목과 내용이 중요하다. 더구나 고급 와인으로 축배까지 치켜들며 격식 갖춰 잘 차려 먹는 청와대 오찬, 만찬인데다가 뭐 좀 알맹이 있는 테마의 토론을 끄집어 내가며 가타부타 구색 갖춰 우국충정이라도 토로(吐露)한다면야 값어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거의가 그렇지 못하다. YS가 1995년 8월 23일 각계 원로를 초대했다. 그러나 “칼국수 참 맛있습니다” “문민정부가 아니면 중앙박물관 철거는 어렵습니다” 따위 얘기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그날 '점심'이 신문 1면 머리와 TV 뉴스 헤드라인으로 올랐다. 1단 감도 안되는 내용을 그렇게 보도한 뉴스 매체의 자질 또한 가히 미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그 날 DJ는 “별 대화는 없었지만 표정은 밝았다”고 했다. 그럼 그 자리에 누가 감히 벌레 씹는 얼굴을 하고 앉아 있겠는가. 또 후루룩 후루룩 집단적인 화음을 맞춰가며 “칼국수가 맛있다”고 찬탄하는 그런 모임이라면 설혹 주머니에 송곳 같은 의견이 있어도 용기있게 꺼내기는 어렵고 언중유골(言中有骨)도 퉁겨지기 어렵다. 상식적이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한 대화에 걸맞게 그저 적당한 표정 관리로 웃어주고 장적(場的) 동작에 신경 좀 써 주면 그만인 것이다. '무엇을 먹고 있는가보다는 누구와 식사를 하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아니더라도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가 그리도 중요한 것인가. YS의 칼국수와 DJ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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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모자(母子)의 대화 지면기사
애비야,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시위를 하는 거냐? 글쎄요, 세계경제포럼이라고 세계경제를 주무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계화에 대해 의논을 하는 자리가 서울에서 열렸대요.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세계화 반대 시위를 벌이는 거래요. 세계 거물들이 다 모였어? 그건 아닌가봐요. 요번 회의는 동아시아 사람들 위주라지요, 아마. 그런데, 도대체 세계화라는 게 뭐냐? 세계화, 세계화 듣기는 많이 들었다만, 난 도통 무슨 소린지 못알아 먹겠더라. 많이 배운 니가 설명 좀 해봐라. 에이, 제가 뭘 많이 배워요. 더구나 경제분야는 깜깜인 걸요. 그래도….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요, 전 세계가 마치 하나의 체제처럼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으로 경제를 운영할 때 모두가 잘 살 수 있으니까, 그 방향으로 가자는 게 세계화라고 알고 있어요. 그거 좋은 얘기잖니. 게다가 세계의 지도자들이 만나서 의논한다니 좀 좋으냐. 그런데 왜들 저렇게 격렬하게 반대한대니. 외국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헌데, 세계화가 꼭 옳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특히나, 못사는 나라 사람들 중에는 세계화라면 몸서리를 치는 사람들도 있지요. 저 멕시코의 어느 지역에서는 그것 때문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어요. 그 부사령관이 마르코스라는 사람인데, 마르크스? 아니요, 마르코스요. 마르크스는 19세기 사람이잖아요. 하여튼, 마르코스라는 사람이 전 세계 인터넷에다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글을 퍼트리기도 했어요. 신자유주의는 또 뭔데? 세계화의 바탕이 되는 이념이에요. 정확한 개념은 간단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정부의 간섭 없이 기업이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하도록 하고, 전세계적으로 자유무역을 하도록 하자, 뭐 이런 주장이지요. 그게 왜 나빠? 세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게 세계적으로 큰 기업, 큰 부자들이 제 배 불리려고 꾸며낸 얘기라고 믿어요. 세계화 아무리 해봤자, 모두 잘 살게 되지는 않는다, 봐라, 지금까지의 과정이 증명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게 사실이야? 그야 저도 모르지요. 하지만, 1970, 80년대부터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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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행동을 의심한다 지면기사
6·5 재·보선에서 열린 우리당이 참패를 면치 못했다. 4·15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맛본 우리당이 불과 두달이 채 안된 상황에서 직면한 결과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이런저런 분석이 분분하다. 의외의 사태이니 당연하다.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히고 일각에서는 전대를 통한 당쇄신론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차떼기 원죄에서 홀가분해진 듯 만면에 미소다. 민주당은 회생을 반기는 입장이다. 한순간 엇갈린 명암에 정치권의 희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형국이다. 하지만 여당이 침통하든 야당이 기뻐 흥분하든, 국민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한마디로 선거는 정치권 그들만의 리그일 뿐 이미 국민들 생활에서는 멀어진 특히 서민들에게는 남의 일처럼 무관심한 일상이 된지 오래기 때문이다. 광역 단체장 4곳과 19곳의 기초단체장을 포함해 기초의원 등 전국 114개 지역에서 실시된 이번 재보궐 선거의 투표율은 28.5%에 그쳤다. 중앙선관위가 예전보다 투표율이 떨어질 것을 우려해 투표 마감 시간을 2시간 연장해 오후 8시로 조정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재보선의 의미가 주는 교훈은 결코 간단치가 않다. 전대미문의 정치자금 차떼기와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맞물려 열린우리당에 1당의 힘을 몰아준 전국의 유권자가 총선 열기가 채 식지도 않은 시기에 이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릴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탄핵판결 이후 직무에 복귀하며 국민 대통합의 상생정치를 약속했다. 또한 한동안 본의 아니게 은둔에 들어갔다가 새롭게 등장한 조심스러움으로 통치 스타일이 크게 변화됐을 것이란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일부에서의 발언이 또다시 사회의 파장을 일으켰고 조기 개각에 집착하는 바람에 통치스타일을 구기기도 했다. 야당이 반발하고 여당 일각이 문제삼은 김혁규 총리지명 고집은 대통령이 달라진 게 없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당정은 파열음을 내며 정책혼선으로 국민을 당혹스럽게 만들었고 일부정책은 정책 조율 과정이 걸러지기도 전에 마구 발표되는 바람에 일관성을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