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경인칼럼
칼럼니스트 전체 보기-
네 마리 코끼리와 춤을… 지면기사
미, 일, 중, 러 네 마리 코끼리의 파워게임에 한국은 결코 대등한 파트너나 레퍼리(심판)가 될 수 없는 한 마리 토끼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모른다. 2002년 5월 파스칼 라미(Lamy) EU 집행위원은 미국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병든 코끼리’에 비유했지만 대부분의 문명비평가는 견해를 달리한다. 21세기 역시 가장 힘센 코끼리의 ‘팍스 아메리카나’ 세기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단(豫斷)한다. 한반도 면적의 42배, 1개 텍사스주(69만2천여㎢)만 해도 한반도의 3배가 넘는 국토에다 인구 2억8천의 미국은 상원이 지난 7월 22일 승인한 2005회계연도 국방예산만도 4천175억달러(약 501조원)나 된다. 그런데 190개 유엔 회원국 중 가장 강한 나라의 위상은 군사력만으로 잡히는 게 아니다. UN 등 세계 정치질서와 에너지, 통화, 생산, 무역 등 세계 경제질서는 물론 과학기술력, 정보력, 교육과 문화, 언어의 힘, 무엇보다 두뇌, 인재의 힘 등이 오케스트라 화음처럼 작용해야 가능하다. 외계와 지구의 전쟁이 터져도 외계인이 알아듣는 유일한 지구 언어는 람보 국가 미국 영어일지 모른다. 노벨상만도 미국은 230여명이나 휩쓸었다. 그런 미국에 전세계 인재가 몰린다. 명문 중의 명문인 케네디 스쿨(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을 비롯해 MIT, 콜롬비아, 스탠퍼드, 예일 등 2002학년도 미국 대학과 대학원에 등록한 외국인만도 58만3천명이었다. 미국 명문대 대학원생의 3분의 1 이상이 외국인이고 통상 30개국의 통치자가 미국 유학파다. 일찌감치 ‘강대국의 흥망’을 쓴 폴 케네디가 ‘제국의 위험(The perils of Empire)’을 경고했지만 미국은 아니라는 견해도 그런 연유다. 인구 1억3천에 38만㎢의 경제대국 일본은 어떤가. 1995년 세계 500대 기업의 매출 순위 14위를 휩쓸었고 아시아 500대 기업의 17위까지를 석권한 나라가 일본이다. 수출 1천억달러도 한국이 95년에 달성했는데 비해 일본은 16년 전인 79년에 해냈고 2002년 예산만도 81조2천300억엔(한국은 112조원)이었다.
-
수원시 자살예방 센터 지면기사
'한 할머니가 친구의 집을 방문하여 커피를 대접받았다. 그 커피에는 설탕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집 주인은 이야기를 하는데 정신이 팔려 설탕 내놓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그날 밤 할머니는 자살했다. 할머니는 설탕이 들어 있지 않은 커피를 대접받은 일로 몹시 우울해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누가 이 할머니를 비웃을 수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미우라 아야코) 지난 주 수원시 자살예방 사업 정책토론회에 참석했다가 이런저런 자료를 한보따리 받았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청소년용 잡지도 거기 들어 있었다. 책을 펼치자 미우라 아야코의 짧은 인용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카르페 디엠'은 현재를 사랑하고 즐기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 하늘 높은 가을날 웬 자살타령이냐고?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자살'은 여전히 금기어에 가깝다. 웬지 입에 올리기 거북하다. 유명인사의 자살은 매스컴이 앞장서서 시시콜콜 입방아를 찧으면서도, 자살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론할 화제로는 부적절하다. 그러나 통계는 자살이 더이상 은밀한 골방의 언어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자살로 사망한 인구는 1만1천명으로 추정된다. 10만명당 24명 꼴이다. 2002년만 해도 헝가리(23.2명), 일본(19.1명), 핀란드(18.8명)에 이어 4위였으나 이제는 1위로 올라섰다. 10년전인 94년엔 10.5명이었으니, 그새 2배반이나 높아진 셈이다. 범위를 좁혀 수원 지역사회만 보자. 2001년 수원시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인구는 120명이었다. 지난해는 150명으로 추산된다. 거의 이틀에 한명꼴이다. 1명이 자살로 인해 숨질 경우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은 대체로 10~15배에 이른다. 실제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수원시내 각 병원의 응급실에 실려오는 사람이 연간 1천500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루에 2명 내지 3명 꼴이다. 게다가 자살을 생각하는 인구, 즉 '잠재적 자살
-
평택항, 협력만이 미래를 보장한다- 지면기사
평택시와 당진군이 7년간 끌어온 평택항 경계분쟁이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며 일단락됐다. 지난달 23일 헌법재판소는 공유수면과 매립지 관할권을 둘러싸고 벌여온 양 시·군의 분쟁과 관련 당진쪽의 주장을 받아들여 '지자체의 자치권은 육지에 이어 바다를 포함하고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수년간 끌어온 평택항계내의 서부두(공유수면 매립지) 소유권 분쟁에 대한 법적 판단은 이로써 종결된 셈이다. 하지만 앞으로 진전될 내용은 단순하지가 않아 당분간 더욱 첨예한 대립으로 후유증 마저 우려되는 상황이다. 평택시와 당진군은 종전 입장에 변화는 없으나 법적 판단에 대해 구체적인 반응을 삼간 채 향후대책을 검토하는 양상인 듯 하다. 이는 평택항을 명실공히 국제항으로 발전시키는 일이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데다 평택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길한 징후를 양 시군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즉 헌재 판결과는 별개로 지금 평택항은 과연 동남아 물류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을것인지 그 전도가 불투명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지방자치단체나 주민들의 뜻과는 달리 중앙정부의 평택항 지원정책과 행태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경기도와 환황해경제권 구축사업의 일환으로 평택항을 3대 국책항만으로 육성해 동남아 무역물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해온 것이 벌써 15년째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같은 구상을 포기하는 듯한 평택항 축소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물동량 증가 등 평택항의 외연 확대 추세와는 반대로 정부의 지원정책은 건건이 축소되고 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실제로 평택항은 지난 2002년(1~11월) 항만운송실적이 전년에 비해 107%, 컨테이너는 238%의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런데 정부의 3대 국책항만 재정투자는 2000년 부산진항 1천664억원, 광양항 462억원, 평택항 364억원, 2001년 부산 1천673억원, 광양 642억원, 평택항 416억원, 2002년 부산 2천889억원, 광양 1천158억원, 평택항 493억원 등이다. 평택항에 대한 정부의 이같은 재정
-
대동상생(大同相生)의 굿판을 열어라 지면기사
얼마전 큰 무당 김금화의 굿판을 제대로 즐겼다. 용인 이영미술관이 기획한 박생광 탄생 100주년 특별전 개막 행사로 열린 굿판이었는데, 이 나랏만신은 박 화백이 이승에서 즐겨 그렸던 무녀도의 전속모델이었던 인연으로 그의 천도제를 직접 주관한 것이다. 그런데 굿판을 즐겼다고 말한건 정말 굿판이 즐거워서였다. 70을 훨씬 넘긴 만신(김금화는 1931년 생이다)이 세상을 달관한 듯한 보살의 표정을 짓고 높고 낮게, 길고 짧게 주저리 주저리 무가(巫歌)와 사설을 이어가는 동안 굿판에 모인 사람들은 절로 심신의 고단함이 가신듯 때로는 환호하고 가끔은 탄식하며 어느새 한 무리가 되어갔다. 그때 문득 일전에 청와대의 한 인사가 특정 신문사들을 지목해 '저주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고 일갈했던 일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를 지금도 잘 모르겠다. '저주의 굿판'이라. 그날 큰무당 김금화의 굿판을 지켜보노라니 번지수를 잘못 찾은 비유요, 독설이다 싶었던 모양이다. 여하튼 우리의 상식에서 저주의 굿판은 없다. 굿의 목적이 그런게 아니라서다. 굿은 신의 사제인 무당이 인간사에 맺힌 이런저런 문제를 신력으로 해소하는 의식이다. 크게는 나라의 안녕에서 부터 촌락의 풍년이나 풍어를 기원하고 작게는 개인의 수복강녕을 비는 것인데 세상사, 인간사를 어지럽히는 귀신들의 행패를 막는게 굿의 기능이다. 이승 사람과 저승 귀신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니, 차안과 피안의 세계 사이에 맺인 원이 있으면 풀어주고 쌓인 한은 흩어주며 불길한 업보는 씻어주어야 하는데, 모두 무당이 하는 일이다. 그날 큰무당 김금화도 그랬다. 늙은 만신은 한편으론 박생광 생전의 한을 해원(解●)하는가 하면 또 한편으론 굿판의 청중들에게 무시로 복을 내렸다. 만신과 그의 제자들이 굿판의 마당 마당을 마무리할 때 마다 축원한 강복(降福)의 내용은 교통사고 나지말라, 건강하라는 개인 개인의 안위에서 부터, 어려운 경제가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나라 걱정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웠다.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천주교 신자는 성모마리아의 은혜를, 불교신자는 부처님의 가피를
-
엑서더스 지면기사
70년대 초 우리 가족은 브라질로 이민을 가려고 했었다. 그때 브라질 이민은 우리사회에 마치 열병처럼 번져서 상당수 사람들이 브라질로 이민길에 올랐었다. 미국이민은 여의치가 않았던 시절이라 그래서 택한 것이 남미행이었다. 브라질이라고 하면 축구천재 펠레가 사는 나라로만 알고 있었던 어린 소년에게 브라질 이민은 충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브라질행은 '설'로 끝났지만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리는 슬픈 기억의 한 편린이다. 70년대 한국사회에 불었던 이민열풍은 정말 폭발적이었다. 한국인들이 이민가기를 가장 원했던 나라는 단연 미국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상당수 중산층들이 미국으로 떠났다. 모진 일들을 하면서 그들은 '아메리칸드림'을 이뤘고 이제 미국 사회에서 무시할수 없는 소수민족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다. 그때처럼 2004년 대한민국 사회에 또다시 한국을 떠나려는 움직임이 열풍처럼 불고 있다. 이제는 사람이 아닌 자본이다.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지난 최근호에서 '한국자본의 엑서더스(대탈출)가 시작됐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기사내용은 대강 이렇다. '한국의 일부 부유층이 상류층에 대한 대중영합적(포퓰리즘)인 공격을 부추겨온 노무현 정부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돈을 싸갖고 한국을 떠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기업인들은 노 대통령의 친노동자 성향이 기업활동을 위협한다고 인식, 해외 이동에 앞장서고 있다' '해외로 떠날 수 없는 이들은 노후 대비 수단으로 미국 LA나 뉴욕, 중국 상하이 등지에 고가의 주택이나 상점을 매입하고 있다'. 비록 미국의 한 잡지에 보도된 내용이긴 하지만 현재 국부 유출은 심각한 정도를 이미 넘어서고 있다. 지난 7월까지 관세청이 적발한 불법외환거래액은 2조7천555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무려 155% 증가한 액수다. 자산을 빼돌리는데 주로 사용되는 환치기를 통한 거래는 1조1천241억원으로 지난해보다 10배 증가했다. 이같이 빼돌린 자금은 외국에서 부동산 매입에 주로 이용되는데 덕분에(?) 런던의 집값을 두배 올리고 LA 코리아타운 주변의 주택가격이
-
통일 환상곡과 둔주곡 지면기사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아니더라도 통일은 돼야 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소원인 통일은 언제쯤 올 것이며, 오기는 오되 '어떤 통일'로 올 것이며, 왔을 때 과연 괜찮고 온전할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시계(視界) 제로의 암담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있어 통일 독일은 “당신들 좀 잘 봐 두라”는 듯 우리에게 다정한 선배요 엄격한 사범이며 지독한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1989년 11월9일(현지시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포함한 국경을 전면 개방, 분단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활짝 열린 그 날 전 독일인은 길길이 날뛰듯 열광했고 전 유럽인이 들떴고 온 지구촌 인류가 가슴이 터질 듯 갈채를 보냈다. 유럽의 심장인 베를린이 두동강으로 잘린 채 막혔던 혈류가 터졌으니 왜 아니 그랬으랴. 1949년 동·서독 정부가 각각 수립된 이래 40년간 동·서독 간첩 교환 장소였던 글리니케르 다리, 그 통한의 다리를 넘어 서독 땅을 밟은 동독인들은 다시 한 번 흔희작약(欣喜雀躍)했고 발터 몸퍼 서베를린 시장과 크라크 동베를린 시장을 비롯한 베를리너들은 해머로, 곡괭이로 깨부순 장벽의 벽돌장에 수도 없이 키스를 해댔다. 그 부서져 내리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전세계 외신들은 '창조적 파괴'라고 타전했고 벽돌 한 장 한 장은 동·서독인 7천800만의 가보(家寶)로 모셔졌다. 배리 스터플러라는 미국의 부자는 5천만달러에 베를린 장벽 벽돌을 몽땅 사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자가용 제트기로 현장에 날아간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는 그 '창조적 파괴' 음을 미친 듯 축가로 연주했다. '베를리너 환상곡'이었다. 한국인도 현장에 섰다. 그녀들은 통일 독일이 한없이 부럽다는 뜻으로 '한국은 하나(Korea ist Eins)'라는 피켓을 치켜들었다. 감격의 서장(序章)은 이내 독일인의 벅찬 기대로 이어졌다. 서독의 '라인강의 기적'이 이제 동독의 '엘베(Elbe)강의 기적'으로 이어지리라는 장밋빛 기대였고 희망이었다. 그 장밋빛 환상의 실현을 위해 다음 해인 90년 7월 동독 경제는 서
-
불령선인의 꿈 지면기사
안재성이 쓴 소설 '경성 트로이카'를 읽다가 '이럴 수가…' 싶은 대목을 만났다. 2차 트로이카가 와해된 후 이재유(李載裕)가 이관술(李觀述)과 함께 양주 공덕리(현 서울 노원구 창동)에 은신하면서 조악한 등사기로 찍어낸 잡지의 내용이다. 동지들과의 연락선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에서 이재유는 자신의 현장경험과 상상력만으로 당대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다.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의 실시, 출판과 집회의 자유, 동일노동에 동일임금, 주5일제와 같은 의미가 되는 주당 40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놀랍다. 이재유가 잡지를 낸 시점이 1936년 10월 중순이니, 그는 무려 60~70년이나 시대를 앞서가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꿈은 비록 '당대'는 아니지만 먼 훗날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모두 합법화되어 있지 않은가.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면, 시대를 '선취'한 부분은 새삼스러운 게 아닐 수도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권리 가운데 피의 역사를 갖지 않은 게 있던가. 생각나는 대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지금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여성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1913년 영국의 운동가 에밀리 와일링 데이비슨은 경마장의 달리는 말 사이로 뛰어들어 목숨을 내던졌다. 1886년 시카고 헤이마켓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던 시위행렬에 폭탄이 날라들고, 이와 관련해 4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메이데이(5월1일)는 바로 이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이재유가 정말 빛나는 부분은 '선취'도 '선취'려니와, '꿈'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1936년이면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지난 중일전쟁으로 치닫던 절망의 시대였다. 국내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이미 명맥이 끊긴 상태였고, 사회주의자 일부만 간신히 지하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다운 삶의 조건을 구체적으로 꿈꾸는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희망적인가. 얘기가 좌파 '후테이센징' 쪽으로 흘렀지만, 그렇다고 우파 불령선인의
-
올림픽정신과 남작 쿠베르탱 지면기사
근대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 남작의 요즘 심경은 어떨까. 만일에 남작이 살아있어 최근 올림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업지상주의와 국가패권주의에 매몰된 각국의 메달 경쟁을 보고 있노라면 슬픔을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다. 정치색이나 상업성을 배제한 채 오로지 스포츠를 통한 인류의 공존과 평화증진만을 구상했던 남작이고 보면 최근의 올림픽 무대는 그를 낙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지난 30일 열전 17일간 지구촌을 밝히며 평화를 염원했던 올림픽 성화가 꺼졌다. 많은 아쉬움속에 제28회 아테네올림픽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은 신기록에 도전하는 각국의 스포츠 건각들에겐 의미가 남달랐다. 근대올림픽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고대올림픽 발상지에서 치러진 경기로 이들에겐 일생의 크나큰 영광이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들의 기록은 정당하고 공명정대하게 평가받았어야 했다. 하지만 아테네 올림픽은 그렇지 못했다. 전부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일부 종목의 판정은 추문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정결과는 끊임없는 시비를 남겼고, 오심에 채점조작 의혹이 불거지며 그에 대한 동기와 배경까지 의심하는 분위기가 가세됐다. 남자체조 개인종합에서 우리의 양태영이 그렇고 역도의 양미란이 그렇다. 그밖에도 우리와는 관련이 없으나 여자배영 200m와 펜싱 플뢰레 남자단체 결승전 등 종목을 바꿔가며 곳곳에서 심판의 과실이 이어지는 희대의 해프닝을 연출했다. 특히 체조에서 잇달은 오심은 결국 관중을 흥분시켰고 야유속에 잠시 경기를 중단하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불이익을 당한 선수가 관중을 진정시켰다면 올림픽의 심판진 작태는 더이상 열거할 필요가 없다. 체조의 요정 코마네치가 한탄했을 정도라면 말이다. 뻔한 규정을 두고 벌인 심판들의 석연치 않은 잦은 오심이 종내는 승부조작설까지 만들며 당치 않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이다'라는 올림픽 강령이 있다. 또한 올림픽은 국가대
-
평택, 잘못하면 부안 꼴 난다 지면기사
한·미 양국의 국책사업인 평택 주한미군 허브기지 조성 사업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국방부는 9월까지 주민설명회를 마치고 올 정기국회에서 미군기지 이전합의서에 대한 비준 절차를 거친 뒤 내년이 끝나기 전에 토지 매수를 완료한다는 방침이다. 국방부 시간표대로라면 내년말 쯤이면 823만평, 여의도 8개를 합친 평택 땅이 미군의 수중에 떨어진다. 이미 미군이 차지한 400여만평에 용산기지와 2사단 이전을 위해 423만평을 추가 제공하기로 합의한 결과다. 그러나 한미 양국의 구상대로 기지이전이 순조로울 것으로 낙관하기는 힘들다. 평택시의 여론이 이를 수용하기에는 복잡미묘하게 갈려있기 때문이다. 우선 일제시대부터 대대로 주둔군에게 고향 땅을 내주고 쫓겨나는 일에 이골난 기지이전 지역 주민들은 단 한평의 땅도 더 이상 줄 수 없다며 반대하고 있다. 1941년 팽성읍 안정리에 일본군이 기지를 만들면서 시작된 평택 '기지주변 사람들'의 고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일본군이 물러나자 마자 미군이 기지를 차고 앉더니 끊임없이 기지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때마다 그 땅의 붙박이들은 대책없이 쫓겨나야 했다. 제대로 된 보상 한번 없었던 건 물론이다. 안보라는 공공재만 확보할 수 있다면 소수가 죽어나가건 말건 상관하지 않았던 시절에 그저 그 곳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당해야 했던 야만적 희생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짓을 또 겪어야 한다니 차라리 목숨을 가져가라는 기지주변 주민들의 반발은 당연하다. 이들에게 보상금의 액수를 운운해봐야 감정의 문제가 말로 해결될 리 없다. 미군기지 이전에 호의적인 여론도 전제가 있어 만만치 않다. 평택시가 안보 공공재 실현을 위해 희생하는 만큼 상응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평택 발전을 법으로 보장하라는 요구다. 평택지원특별법 제정이 찬성의 핵심 전제이다. 법안에 평택시의 자주적 도시설계 인정, 수도권정비계획법 적용완화, 국제평화도시 건설, 이주대책 및 보상의 명문화, 재원조달 방안의 명문화가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평택시민들로서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문제는 평택의 턱
-
2,500만의 99.99%가 친일파였다 지면기사
1930년 2천43만, 40년 2천354만, 45년 2천500만. 일제 식민지의 우리 인구 중 과연 친일파는 몇%나 됐을까. 엄밀, 엄격히 말해 충정공 민영환(閔泳煥)이나 매천 황현(黃玹) 등처럼 자살을 했거나 면암 최익현(崔益鉉)처럼 굶어죽은 이들을 제외한 99.99%가 친일파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땅을 침탈, 유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죽도록’ 싫어 순도(純度) 100%의 애국심을 고이 간직하려 했다면 앞의 애국지사들처럼 자결하는 길밖에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망국의 분노와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을 못 이겨 땅을 치는 통곡 끝에 자결하지 못한 사람,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침탈 원수들과 도저히 하늘을 함께 이지 못한다며 하늘로 치솟거나 땅으로 꺼져들지 못한 사람, 그래서 침략 원수들과 함께 이 땅의 신성한 공기를 나눠 마시며 구명도생(苟命圖生), 구차한 목숨을 부지해야만 했던 모든 식민지 백성이 어쩔 수 없는 친일파가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반민족적인 색깔로 매국에 앞장섰던 이른바 ‘을사 오적(五賊)’을 비롯해 유달리 친일 행적을 드날린 이들도 없지는 않았고 일제의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적힌 353명도 간과할 수 없을지 모른다. ‘오오 폐하의 고굉(股肱→팔다리)이여!…’ 등 낯뜨거운 향(向) 천황 용비어천가와 일제 찬가를 읊은 친일 문필가도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유약한 선비들이 자살로 항거하지 못하는 한 일제의 강권(强勸)과 협박, 회유를 피할 수는 없었다. 거의 모두가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고 목구멍 보전을 위해 ‘와레와레와 고고쿠신민나리(우리는 皇國臣民이다)…’로 시작되는 일제 찬양 주문(呪文)을 낭랑하게 외울 수밖에 없었다. 그걸 외워야 배급을 타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식민지 ‘신민(천황의 백성)’은 참새 발바닥에 묻은 피가 더 진하냐 제비 발등에 묻힌 피가 더 오염됐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죽지 못해 친일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어를 쓰지 않으면 교육을 받을 수 없던 모든 ‘생도(학생)’가 친일파일 수밖에 없었고 징병 또는 징용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