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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없다 지면기사
아베총리는 인기를 의식해'동양평화'를 파괴하는 100년전과오를 재현해선 안된다이웃국가들 목소리를 외면하고막무가내 우경화를 고집한다면한일관계에 미래는 없을 것이다17년 전 일본 유명 사립대학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 학생들의 한국 교류 모임에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일본에 관해서는 역사교과서를 통해 배우고 방송에서 보았던 이미지만 가지고 있을 때였다. 일본학생들과의 첫 대면은 어색하기도 했지만 충격의 연속이었다. 당시 교류 프로그램은 한일 관계의 민감한 부분까지도 숨김없이 토론하는 자리였다. 프로그램 일정에는 일본학생들과 함께 독립기념관을 방문하고 판문점을 동행하는 것도 포함되었다.대체로 한국학생들은 과거사와 관련된 예민한 토론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반대로 일본학생들의 반응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놀라운 표정들이었다. 이 모임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과거와 일본이 생각하는 과거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우리는 일본과의 과거관계에만 치중한 나머지 현재와 미래의 일본에 대해 놓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동안의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정확히 몰랐던 일본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선명하게 느껴졌고 '일본은 있다'였다.최근 일본 아베 총리의 우경화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10월 26일은 '한일 강제 병합'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안중근 의사가 처단한 지 10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이웃국가를 강점하고 '동양평화'를 파괴한 행위에 대해 단죄한 것이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반역사적 도발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도 없고 부끄러운 역사를 자국민들에게 교육하지 않는 것이다. 천황을 비롯해 많은 일본 지도층들이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는 스스로 이를 부정하고 있다. 다수의 역사교과서가 제국주의적 시각으로 왜곡을 일삼아도 수수방관한 것이다.둘째로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웃국가에 대한 진정한 우호의 정신이 털끝만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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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울린 수원 행궁동 주민들 지면기사
4300여주민 옹기종기 사는곳정조대왕 효행 흔적 곳곳에한달간의 생태교통 페스티벌걷고 경험하고 즐기고 맛보고주민 도움 소통으로…역사 조화 관광도심으로 재생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4천300여명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정조대왕의 효행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고, 그와 함께 하던 무사들의 '화성무예 24기'가 매일 공연되는 역사 마당이기도 하다. 한반도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생가터가 있고, 그를 기념하는 문화제가 매년 열리는 동네다. 예술가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조성한 공방거리가 소담하게 낮볕을 받는 정겨운 곳이다. 그렇게만 알려졌던 행궁동에 지난 9월 한 달 동안 수상하고도 괄목할 만한 움직임이 있었고 아직 그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다.지난 9월 한 달 내내 행궁동에서는 생태교통 페스티벌이 열렸다. 각종 지역 축제를 떠올리면 별것도 아니련만 행궁동 생태교통 페스티벌을 특정해 들여다보자 제안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에 통보한 지역축제는 모두 752개에 달한다. 그 숫자가 많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회는 그를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긴다. 판에 박힌 행사, 억지춘향식 볼거리, 미래가 실종된 관주도형 부실 기획 등의 이미지가 늘 겹친다. 안전행정부가 지역축제를 제대로 감리해야겠다고 매번 다짐하는 것도 그런 탓이다. 그런데 행궁동 축제를 챙겨보자며 소매를 끄니 그 이유가 궁금할 법하다.수원 행궁동의 생태교통 페스티벌은 화려하거나 웅장한 행사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범적이었고, 생산적이었으며 기록해둘 만했다. 무엇보다 소모성 행사가 아닌 생산성 축제가 되었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생태교통 행사는 행궁동의 낙후성을 일거에 제거해냈다. 행궁동을 역사, 생태가 함께 이뤄지는 관광 도심으로 재생시켜냈다. 파내고 뒤엎는 개발 패러다임의 도시 개발을 생태적으로, 생산적으로 전환해낸 것이다. 도시 재생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창조해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리라 확신한다.행궁동 축제이긴 했지만 수원을 넘어 전국구 축제로 갈 가능성도 보여줄 만큼 잘 기획된 행사였다. 역사라는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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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과 정부수립 지면기사
있는 것을 왜곡 하거나없는 것을 조작하는 역사는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다공자 말씀에 "하늘에 죄를 지면빌 데가 없다"고 했다우리나라 사립학교들은 가급적 자기 학교의 역사를 올려 잡으려 애쓴다. 나의 모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사립 고등학교로, 1885년 8월에 겨우 두 명의 학생을 구워삶아 '학교'를 시작했고, 1886년 6월에야 고종의 편액을 받아 '정식 학교'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내 모교의 개교일자는 설립자인 미국 선교사가 증기선에서 내려 제물포에 발을 내디딘 1885년 6월 8일이다. 내가 다닌 대학 역시 1915년에 개교한 전문학교를 모태로 하고 있지만, 개교일자는 설립자 중 한 사람인 미국인 의사가 진료를 시작한 1885년 5월이다. 견강부회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실낱같은 근거라도 찾아 조금이라도 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오늘에 이어보려는 나름의 노력이라 치부하면 그만이다.그러나 아무 근거 없이 자기 나라의 역사를 무작정 올려 잡으려는 짓거리는,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여진 판이 수 천 년 켜켜이 쌓여 이룩된 인류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범죄행위이다. 한반도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졌다고 조작하기 위해 가공의 천왕들을 만들어 자기 역사에 끼워넣은 일본, 황하문명보다 더 오래 된 흥산문명이 발견되자 고대부터 만주 일대가 자기들 통치 하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동북공정'이 그렇다. 말도 되지 않는 국수주의, 오도된 민족주의의 발로이지만, 동서고금을 통하여 자국 중심주의, 자국 이익의 관철이 국제관계의 실체임을 감안한다면, 그들 사회에서 그런 주장이 나올 수 있는 것도 현실이다.2008년, 이명박 정권은 그 해를 건국 60주년으로 삼고 각종 기념행사를 벌였다. 곧 미군정을 끝내고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는 식민사관에 바탕한 완전한 역사왜곡이다. 대한민국은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건국된 것이며, 1948년 8월 15일은 그 동안의 어쩔 수 없는 '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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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정치의 후안무치 지면기사
정당공천제 폐지 의제국회 정치쇄신특별위원회가아무런 성과없이 활동 종료여야 정치인들 공약 뒤엎은그야말로 국민을 업신여긴후진적 정치행태 보여줘정치는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하다. 인간이 이기적이지만도 이타적이지만도 않은 존재인 이상 정치는 인간사회의 갈등 조정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협력적인 관계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서로 다투고 투쟁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막는 조정력을 갖기 위해서 국가권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대통령도 뽑고, 국회의원도 뽑는다. 국가사회의 의사조정권을 주기 위해 우리는 선거를 하며, 이 권력을 가졌거나 갖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치인이라 부른다. 정치경쟁의 장에서 자신들이 어떤 일을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시민들은 이 약속으로 그들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돌에 새긴 금언과 같이 지켜져야 한다. 이것이 공약이며, 그들의 말로 우리는 미래를 짐작한다.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한국의 정치인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경우는 홍수 때의 빗줄기처럼 많다는 것이 문제다. 지키지 못할 공약남발, 일단 권력을 쥐고 나면 약속은 파기하고 마는 것이 우리 정치의 후진적 양상이다. 요즈음 대통령의 복지공약 실현을 두고 장관사퇴라는 초유의 사건이 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공약 작성에 참여했다는 핵심측근인 장관이 이제 와서 자기 신념이 아니었다는 것도 문제고, 그 공약이 지키지 못할 것이었지만 표를 얻기 위해 내놓았다는 것도 문제이다.정당공천제의 폐지 약속이 또 그렇다. 이 문제는 정치의 공약 깨기 중에서 모든 정당이 관련되고 모든 정치인이 관련된다는 점에서 가장 악질적인 약속위반 사례가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이 약속은 중앙정치도 지방정치도,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지방수장 및 지방의원들도, 국민도 시민도 모두가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지난 12월로 되돌아가 보자. 여야당의 대통령후보들이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 후보의 정당공천제 폐지를 약속하였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하향식 비민주적 정당공천제는 없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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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지면기사
'임금이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한다'맹자는 여민동락을 강조했다브레이크 없는 한국정치는왜 국민들에게 기쁨과 행복을못주는지 멈추고 되돌아 봐야한다왜냐하면 국민들이 있기 때문올해 초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한 선배를 면회 가게 되었다. 정치인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 공공기관의 꽤 높은 요직에 있던 선배였다. 재임 중 민간업체와의 계약에서 비리 혐의가 문제되어 재판을 받고 옥살이를 하게 된 것이다. 본인은 매우 억울한 심정이고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무엇보다 정치를 하게 된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고 석방되면 사업가의 길을 가겠노라며 울먹였다. 진정으로 위로의 말을 전달하고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란 책을 영치해 주었다. 구치소를 빠져나오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왜 우리는 '정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지난 추석 직전, 유명 성악가의 공연에 초대받아 가게 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성악가의 남편은 영향력있는 언론사의 논설위원이다. 오랜 기자생활의 인연과 인맥 때문인지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여야 유력 정치인들도 꽤 눈에 띄었다.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노래가 대부분 외국의 유명 가곡이었다. 우리말 가사와 선율이 아니라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음악이 주는 매력으로 마음이 꽤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공연이 끝날 무렵 앙코르송으로 우리 가곡인 '보리밭'이 열창되자 참석한 몇몇 여야 정치인들도 손수건을 연신 눈에 갖다 대며 감동에 겨운 모습이었다. 여의도 정치에서는 한 치의 양보 없이 싸우는 이들에게도 이날 공연은 큰 감동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왜 365일 여의도 정치는 1시간 30분여의 공연에 비해 감동을 주기는커녕 스트레스만 쌓이게 하는 것일까.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정치적 관심과 정치적 영향력은 지나칠 정도이다. 다른 국가에 비해 정치적 관심이 높은 것은 그만큼 정치적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방증한다. 정치력 영향력이 크다는 것은 이것을 통해 다양한 이익 추구가 가능해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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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가미카제와 역사 교과서 지면기사
日정부 침략 역사 유감 표하자반대 세력들은 전쟁미화에 활용국내선 친일과 저항 애매한 해석식민시기 조선인의 불편함을기회로 바꾸어 말하려는 의도도건강한 역사의식 위협받아 걱정서정주 시인은 1944년 12월 '마츠이 오장 송가'를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다. 조선인 최초의 가미카제였던 마츠이(본명 인재웅) 오장의 죽음에 대한 송가였다. 소년비행병 13기 출신인 그가 해방전 해 미국 군함을 향해 자살 특공을 감행한 이래 총 17명의 조선인이 특공 감행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죽음은 일제에 의해 총력전 선전에 활용되었다. 그러다 해방 이후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서성거렸고, 잊혀진 존재가 되어 버렸다.2000년 이후 한일 양국은 그 죽은 자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가미카제 훈련과 출격 기지였던 가고시마의 지란에는 조선인 가미카제만을 위한 전시 코너가 마련되었다. 일본인들이 죽은 이의 화신이라 믿는 '반딧불'이라는 제목 하에 조선인 가미카제가 영화화되기도 했다. 일본 방송들도 이야기 발굴에 열을 올렸다. 국내에서도 소설, 르포, 다큐멘터리, 신문기사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2008년에는 경남 사천에 조선인 가미카제 대원의 망향비 건립 시도가 있었다 사천 지역 주민, 광복회 등의 반대로 실패하고 경기도 여주의 한 사찰로 기념비가 옮겨가면서 대중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왜 그토록 긴 시간 침묵했던 양국은 그들의 이야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을까? 1995년 8월 15일의 일본 총리였던 무라야마가 침략 역사에 유감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한다.이 담화를 계기로 일본에서는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함께 반성에 반발하는 기운이 동시에 일었다. 반발하는 기운은 가미카제를 재조명했고, 그들 안에 있던 조선인 가미카제를 톺아내 전쟁 미화에 활용한다. 이시이 현의 가나자와 내 호국신사에 세워진 '대동아 성전 대비'에도 몇몇 조선인 가미카제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그들의 성전에 조선인도 참여했음을 드러내려는 의도였다.역사 왜곡을 다반사로 해오던 일본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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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만에 경기도에서 민란? 지면기사
경기도는 한양을 둘러싸고 있어중앙의 감시를 받을 수밖에 없다경기동부연합 내란음모사건은통진당 울산부산·광주전남연합중유독 경기의 수원·안양·성남지역당원들이 관련되었다고 한다북으로 개성, 동으로 여주, 남으로 안성, 그리고 서쪽의 강화 앞바다까지 포괄하여 선을 그어보면, 경기도는 원 비슷하게 생겼다. 그리고 이 원 안에 달걀노른자위처럼 서울이 자리하고 있으니, 곧 서울과 경기도가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셈이다. 지방을 경계 지을 때 대개는 산과 강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일부러 둥글게 할 수는 없는 일인데, 서울과 경기도는 동그랗게 생겼다. 왜일까?고대 중국의 국가·사회제도를 체계화한 '주례'에 의하면, 왕의 침소로부터 사방 3리를 성(城:내성)이라 하고, 그 성으로부터 사방 7리를 곽(郭:외성)이라 했다. 그리고 성과 곽을 포함한 사방 10리 구역이 경(京)이다. 또 곽으로부터 사방 100리까지를 교(郊)라 하고, 교로부터 사방 100리 안을 전(甸)이라 한다. 그리고 교와 전을 포함하여 경(京)으로부터 사방 500리 안을 기(畿)라 했다.곧 왕의 침소를 중심으로 성, 곽, 교, 전의 동심원이 그려지는데, 이는 왕궁을 지키는 방어선들이다. 그리고 왕의 침소로부터 10리되는 곽(郭)까지인 경(京)과 500리까지인 기(畿)는 행정구역 개념이다. 그래서 옥편에서는 기(畿)자를 '경기 기'라 훈하고 '왕국천리'라 보한다. 왕궁으로부터 사방팔방 500리까지 기(畿)이므로,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1천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땅덩어리가 넓은 중국의 예이고, 우리나라는 그보다 축소되어 왕궁으로부터 200리 정도를 기(畿) 구역으로 친다.'경기'라는 말은 고려 문종 23년(1069)에 처음 나왔다.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평안남도, 황해도, 경기도 50여 개 현을 합쳐 '경기'라 칭한 뒤 왕실 직할지로 삼은 것이 그 기원이다. 서울보다 위에 있는 개성을 중심으로 사방을 경계짓다보니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부 지역까지 기(畿)에 포함된 것은 당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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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삼의 시 '민간인'과 이석기 지면기사
묻고싶다, 은밀하게 자신들의보안체계를 갖춘비밀혁명 조직을 만들고총기를 사용해서라도대한민국의 현 체제를 뒤집어얻고싶은 세상이 뭐냐고…"1947년 봄/심야/황해도 해주의 바다/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울음을 터트린 한 영아를 삼킨 곳./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1921년에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월남한 김종삼(1921~1984) 시인의 '민간인'이란 시다.이 시에 나오는 1947년이라면 남북분단이 고착되는 해. 북은 토지 몰수와 공산체제를 완성하면서 자유를 억압하였고, 일단의 월남피난민은 그때부터 나왔다. 시인이 탄 조각배가 공산압제를 피해 해주바다를 숨죽여 건너던 중 아이가 울자, 제 어미가 입을 틀어막은 것이다. 압제를 피해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너는 '민간인'들은 죽음을 피하려고 하고, 공산체제를 수호하는 자들은 찾아 죽이려 한다. 김일성의 수하들은 눈이 벌겠다. 바다가 삼키다 실패한 숨소리라도 찾아내서 죽이려고 한다. 그런 죽음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아이는 울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어미는 어미대로 '살고' 싶었다. 아이는 살고 싶어 울고, 어미는 살고 싶어 아이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사히 인천항에 도착한 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아이는 싸늘하다. 차가워진 아이를 붙잡고 어미는 오열한다.잡히면 죽임을 당하는 슬픈 현실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야음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는 제 동포를 죽이는 오늘의 북한과 무엇이 다른가. 제 동포를 찾아 죽이는 버릇은 65년 이상이 지나도 여전하다. 아니지. 자기 체제가 옳다고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민간인'들을 죽인 버릇은 비뚤어진 권력을 쥔 못된 인간들의 속성이다. 피의 숙청을 통해 공산체제를 세상에 보인 스탈린이 그랬다. 파시스트 독재를 완성하려고 600만 이상의 유태인을 죽인 히틀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죽음을 선사하고 만들려는 세상은 정말 생산과 소비를 공평하게 나누자는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피로 채색한 권좌에 대한 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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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정치다 지면기사
먹고사는 문제가 중요한데대선전쟁 끝날 기미 안보여국민들 민생현안 승부 원해장외로 나간 민주 국회 복귀과거와의 숨바꼭질에더이상 시간 허비 말아야얼마 전 법조계의 존경을 받던 한 대법관이 퇴임했다. 대형 로펌으로 갈 것이란 예상을 깨고 부인이 운영하던 야채가게 도우미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국민들은 그의 결정에 박수를 보냈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마저 존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대형 로펌으로 가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가 노심초사 내놓은 결심의 배경은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었다.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마음이 안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존경했던 대법관의 변심에 몹시 서운했지만 맹자의 말씀을 되새기며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처럼 국민이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먹고 사는 문제가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지난 대선 과정에서 각 정당의 후보들은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사탕발림을 다했다. 만약에 국민이 원한다면 별도 달도 따줄 것처럼 아양을 떨었다. 치열했던 '대선 전쟁' 드라마는 지금쯤 당연히 끝났어야 하지만 '대선 진실 게임'이라는 지루한 드라마로 변질되어 있었다. 그리고 언제 끝날지 기약도 없다.대선 과정을 돌이켜보면 민감한 이슈들이 많았다. NLL대화록 논란,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의혹 등이 그렇다. 사실 어느 쪽 주장이 진실에 더 가까운지 알기 쉽지 않다. 각 정당은 내 주장이 진실이고 상대방은 '국기문란'이라고 하지만 국민들 입장에서는 둘 다 크게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라는 '파워 게임'의 결과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 매우 어렵다. 승자는 패자를 다독이고 패자는 재기를 노려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 선거가 대한민국의 전부가 될 수 없듯 국민들을 위한 민생공약 실천이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대통령 임기 6개월이 되는 시점에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앤리서치는 국민의 여론을 살펴보았다(전국 1천명 유무선 RDD 전화면접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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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6개월의 '정치'와 '민생' 지면기사
국정원 국정조사 끝났지만여야갈등 수그러들지 않아집권당은 야당에게 퇴로를열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인다대통령은 경제나 민생만 챙기는자리가 아니기에 직접 나서야정부 출범 후 6개월이 임기 전체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초반의 국정 드라이브는 중요하다. 취임 6개월을 맞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평가는 50% 후반에서 60%대의 안정된 지지세를 보인다. 노무현, 이명박 등 전임 대통령들이 취임 초기 높은 지지도를 보이다가 하락하는 경우와 대비된다. 방미 성과나 방중에서 나타난 외교적 결실, 대북 관계에서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 기반한 안정감 있고, 일관된 정책은 남북관계에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줬다. 이러한 대외적 성과와는 달리 내치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 의지와 원전 비리 수사 등을 제외하고 임기 초반 이렇다 할 성과를 발견하기 어렵다. 정부 출범 직후 정부조직법 통과의 지연과 인사파동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과 인식의 전환이 긴요하다. 일방적인 지시에 기반한 정책은 토론과 건의를 실종시킨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은 그래서 만기친람(萬機親覽)형 리더십이다.권한과 책임을 분담하는 참모의 부재는 효율적인 국정 운영에는 저해 요소다. 박근혜 대통령은 김용준 국무총리 후보자와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 김종훈 미래부 장관 후보자 등이 연이어 낙마한 인사파동 이후 야당 지도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야당과의 국정동반자 관계 설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소통을 약속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야당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당청 관계의 유기적 작동도 소원해 보인다. 대통령과 여당 대표와의 정례 회동도 제도화 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 방증이다. 정국수습을 위한 김한길 민주당 대표의 양자회담 제안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의 3자회담 방식도 거부했다. 대선 후보 시절의 공약 사항이었던 국가지도자 연석회의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청와대가 국회를 민생과는 무관한 소모적 정쟁의 장으로 폄하한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