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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대통령!

    아, 대통령! 지면기사

    우리는 멋지고 근사한 대통령을 가질 수 없을까. 대통령 선거철이 되면 이런 생각이 간절하게 다가오곤 했다.지금까지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들은 거의가 우리 가련한 백성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다가 끝내 모멸감을 안겨준 채 떠나가곤 했다. 왜 우리한테는 그런 대통령들만 있었을까? 우리한테 복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선택이 잘못되었던 것이었을까.생각건대 우리는 복도 없었고, 선택도 잘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복은 그렇다치고 선택이 잘못된 데 대해서는 여러가지 원인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그 첫째가 선택의 어리석음이다. 민심과 여론은 현명하지 못하고 큰 과오를 범할 때가 종종 있다. 독일 국민이 나치의 선동에 현혹되어 열화같이 히틀러의 등장을 환영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군국 일본은 일본 국민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졌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는 대재앙을 불러왔다.둘째는 선택의 비루함이다. 권력의 횡포와 그로 인한 공포 분위기에 주눅이 들면 백성들은 비루한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그 속성을 알고 있는 권력은 백성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그들을 분열시키고, 부패시키고, 결국은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비루한 선택의 결과로 나타난 대표적인 것이 군부 독재였고, 계속해서 이어진 어리석은 선택으로 군부 세력은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셋째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체육관에서 의식이라고는 없는 로봇 인간들을 앉혀놓고 대통령을 뽑았으니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이승만의 경우 선거운동 기간 중에 두 번씩이나 막강한 상대 후보가 갑자기 급사하는 바람에 단독 출마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고, 결국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백성들이 어떻게 선택했든 간에 그 결과는 현실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현대사의 불행한 한 페이지로 장식되었다. 그렇다 해도 권력을 움켜쥔 대통령이 정치를 잘했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기대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 대통령과 채마밭 늙은이

    대통령과 채마밭 늙은이 지면기사

    치열한 선거전 끝에 국민의 선택에 의해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되었다. 최근 한국의 모든 관심은 당선자의 인사에 모아져 있다. 당선하는 것도 지난한 일이지만 그 다음 적정한 인물을 발탁하여 국정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더욱 지난한 일이다.인수위원회나 일부 인선에 대해 의구심을 보내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분도 있다. 일각에서는 특정 인사에 대해 사퇴론을 제기하기도 한다. 지난 정부의 실수나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갖기도 한다.당선자는 전문가를 등용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실제 인사가 그렇게 진행될 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여기서 공자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공자의 제자 번지가 공자에게 농사일과 채소 기르는 일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답했다. "나는 농사일에는 늙은 농부만 못하고 채소 기르는 일에는 채마밭 늙은 농부만 못하다." 공자는 제례에 대해서도 일일이 다 물어서 법도를 찾아 처리했다. 공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농사일이나 채마밭을 가꾸는 일이 아니다.공자는 군자는 군자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한다고 했다. 공자가 농사일에 간섭하거나 이를 아는 체하고 처리했다면 공자가 아니다. 농사일은 농사하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요새 말로 하자면 전문가를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최근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수많은 전문가의 활동이 밑받침이 되었다. 그 동안 한국 사회 곳곳에 훌륭한 전문가가 많이 배출되었고 이 분들이 각 분야를 선도해 오늘의 눈부신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없어서 또는 전문가가 부족해서 눈에 보이는 국가적 계획을 추진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지금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대국이며 기술대국이다. 이제는 전문가를 등용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등용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탕평의 정치이다. 극단의 편가르기를 극복하고 대통합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화합과 탕평의 정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조선조를 망친 것은 사색당쟁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1724년 복잡한 정

  • 자살, 그 극단적인 선택은 피하자

    자살, 그 극단적인 선택은 피하자 지면기사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희망적인 소식보다는 절망적인 비명이 자주 들린다. 그제는 누가 자살하였고, 어제는 또 누가 자살하고, 오늘도 역시 누가 자살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세상이 슬퍼지고 있다.어찌하여 이런 극단적인 선택이 빈번해지면서 마음을 이렇게 무겁게 해주는지 모를 일이다. 나라가 망해서 비탄에 빠진 애국지사들이 자결하는 것도 아니고, 외국의 침략을 받아 망해가는 나라가 서러워서 애국심으로 죽어가는 지사들도 아닌 마당에, 삶이 팍팍하고, 앞길이 열리지 않는 것을 한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압제와 탄압에 시달리고, 최악의 불리한 조건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래도 정권이라도 바뀌면 일루의 희망이라도 보이지 않겠느냐면서, 참고 참아 왔지만, 정권 교체가 실패로 돌아가고 현 정권이 연장된다는 절망감에서 끝내 목숨을 끊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죽음, 우선 그분들의 자결에 삼가 명복을 빌고 빈다.마찬가지로 시민운동 지도자의 죽음에도 삼가 애도의 뜻을 밝히며 그분의 명복을 빌어 마지않는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가슴이 쓰리며 속이 탔으면, 하나밖에 없는 그 귀한 생명을 끊어서까지 자신의 한을 풀고자 했다는 것인가. 참으로 가슴이 아프고 마음이 쓰리다.MB정권의 노동정책에 환멸을 느끼고 실의에 빠졌던 그 많은 노동자, 더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야 정리해고라는 명분으로 파리 목숨보다도 더 가볍게 직장을 잃고 생계 걱정으로 신음하고 고생을 했는데, 정권의 연장으로 희망을 엿볼 기력마저 없어졌으니 그들이 무슨 힘으로 버틸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고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는 일도 결코 좌시할 일만은 아니다.하나뿐인 생명, 하늘이 주신 목숨인데 어떻게 감히 자살이라는 수단으로 죽음을 택한단 말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에 아무리 동정을 한다 해도, 죽음을 무릅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지, 죽는다고 해서 어떤 생산적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시작한 일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지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면 영원한 끝이 아닌가.잘못된 노동정책에 대한 원한, 대기업에

  • 죽음과 죽는다는 것

    죽음과 죽는다는 것 지면기사

    쉽게 얘기하기 어려운 테마인 죽음과 내가 겪은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해서 칼럼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난달이었다. 서울에서 있었던 장인어른의 장례식을 겪고서야 비로소 한국의 장례 의식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게 됐다.그동안 장례식에 가본 적이 꽤 있어서 동서양의 장례문화가 당연히 다르다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인어른이 돌아가신 지 2주만에 독일에 계신 내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고 보니 예전에 죽음과 장례 의식에 대해 막연하게 느꼈던 것과는 다른 많은 생각을 갖게 됐다.한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사찰에서의 수도생활(한국생활 초반)이나 10여 년전에 있었던 향교에서의 전통 혼례 경험 등 외국인으로서는 운좋게도 한국 고유한 의례들에 대한 특별한 경험을 해봤다.그런 내가 이제까지 경험한 장례식이란 그저 조문객으로서 부의금을 담은 봉투를 부의함에 넣고 쉽지 않은 인사말을 하고 오는 일이었다. 아내의 아버지의 죽음은 한국의 삶을 제대로 보는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의례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마음가짐에 대해 배우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 장인어른이 계획에 없었던 심혈관 수술을 받은 뒤 모든 가족의 생활은 바뀌었다. 회복될 가능성은 희박했고, 위급한 상황이 되자 우리 모두는 황급히 병원으로 불려갔다.중환자실 앞에는 환자들의 가족을 위해 마련한 자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마치 작은 캠프와도 같았다. 그저 환자의 호전만을 기다리며 개인의 삶을 포기한 것처럼 보이는 보호자 가족들의 모습을 처음 목격한 나로서는 참으로 놀라웠다.독일에서는 면회시간이 정해져 있고 면회시간 외에는 중환자실 근처에는 있을 수 조차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가족 중에 누군가를 중환자실에 두고 있다면 병실이 어디든 그 자리를 지키는 일이 당연했다. 어느 저녁 우리 모두는 중환자실에 불려 들어갔다. 심장 박동이 멈추면서 어떻게 한 사람의 생이 사라져 가는지를 보게 됐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의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한 뒤로는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진행됐다. 죽은 육신은 장례식장으로 곧바로 옮겨졌고 30분 후에는 우리 모두 장

  • 대선후보 TV토론 자격 기준 논란

    대선후보 TV토론 자격 기준 논란 지면기사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이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에게 어지간히 혼난 모양이다. 지난 4일 1차 TV토론회가 끝나자 새누리당은 국민적 지지도가 1%에 불과한 후보가 40% 이상의 지지도를 받는 메이저 후보들이 겨루는 법정 토론회에 출연하여 판을 어지럽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그리고선 대선후보 TV토론 참가자격을 지지율 15% 이상인 후보 등으로 제한한 공직선거법 개정안, 이른바 이정희 방지법을 발의하였다.지난 2007년 17대 대선 때는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 세 명의 메이저 후보 외에 3명의 군소후보가 법정토론회에 진출하여 모두 6명의 후보자가 토론회를 벌였음에도 당시 한나라당은 아무 말이 없다가 3명이 겨룬 이번 토론회를 두고서는 새누리당은 불만이 매우 많다.지난 5년 동안 새누리당은 마이너 후보들의 법정 토론회 진출문제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이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는 것은 정략적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우며 자업자득인 측면이 크다.1997년 15대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도입된 후보자간 TV합동토론은 그동안 후보들 간의 충분한 토론을 이끌어내지 못해 후보들을 제대로 검증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현행 선거법은 토론 참가자, 진행과정 등에 있어서 공정성과 기계적 형평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토론의 역동성과 흥미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사실 TV토론의 모든 문제는 토론회 참여 후보의 자격 기준에서 비롯된다. 자격기준을 낮추면 군소후보와 정치신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만 TV토론 자체가 난삽해지고, 경쟁력을 갖춘 메이저 후보들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다.반대로 자격기준을 높이면 다수당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인적· 물적 자원이 빈약하고 각종 법과 제도에 의해 외면당하고 있는 군소후보들이 희생될 뿐만 아니라 이는 헌법에 보장된 평등정신에 위배되고 만다. 이 문제는 참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가치판단의 문제이다.TV토론에 참여하는 후보들을 선정하는 기준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토론회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가장 중요한

  • 엇갈린 박자

    엇갈린 박자 지면기사

    필자는 바흐의 음악을 아주 사랑한다. 그 많은 곡 중에서도 '푸가' 기법으로 만든 작품을 특히 사랑한다. 푸가란 서양음악의 음악구조 중 하나로 두 개 이상의 성부로 구성됐다. 첫 주제(subject)는 다른 성부에서 다른 음조로 모방되면서 전개된다.3성부 푸가에서는 주제가 세번 모방되고, 4성부 푸가에서는 네번 모방된다. 곡은 대위법에 따라 발전되며 주제는 다양하게 변형된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사라진다. 주제의 반만 돌아올 수도 있고, 주제의 조각들만 계속해서 발전할 수도 있으며, 아예 주제가 도치(inversion)되어 다른 요소들과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푸가를 처음부터 유심히 들어보면 이 주제들이 반복되면서 일종의 사이클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사이클 안에서는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은 형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엇갈린 박자들을 만들어낸다.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겪는 수많은 일들. 그러나 우리에게 인상 깊게 남는 기억들은 삶에서의 엇갈린 박자들이 만들어준 선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여행 중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어 골목을 돌자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해변에서 파도를 피하려 뒷걸음질치다 누구와 부딪쳐 첫 눈에 반했을 때. 새벽에 집으로 걸어가는 도중 교회에서 감명 깊은 종소리가 침묵을 깨며 울려 퍼질 때. 우는 아기를 안았는데 조용해졌을 때.이런 순간들은 우리의 심장박동 소리를 더 뚜렷하게 들리게 해주며 우리가 아름다운 세상에서 숨 쉬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도시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침묵과 어둠의 기억마저 잊어버린 우리는 이 순간을 잘 잡아내지 못한다.기대와 욕망. 어쩌면 이것들이 우리의 감각을 둔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욕망을 품은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어떤 기대를 품게 되고, 높은 기대는 인간이 계획을 세우게 만들며, 계획은 인간을 희열 또는 절망의 양쪽 길 중 하나로 인도한다.여기서 희열을 얻게 됐다면 이것이 과연 진정으로 원했던 것인지 의문을 품게 만든다. 만약 절망에 빠졌다 하더라도 인간은 좌절이나 분노 속에서 엉뚱한 행동을 하

  •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

    그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 지면기사

    '불신 시대', '불신 사회', 참으로 어느 것 하나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오늘의 사회다. 그런 가운데서도 더더욱 불신의 수렁에 빠진 분야는 바로 '정치 불신'이다.지위가 높고 책임이 무거운 지도자일수록 입만 벌리면 거짓말이고, 하는 짓마다 국민을 속여 먹는 작전에 능숙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온통 정치 혐오증에 걸려 무조건 정치인은 싫고, 정치는 타기의 대상에 오른 지 오래되었다.정치 없이는 나라도 안 되고 세상도 돌아가지 않음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처럼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가 어디서 왔단 말인가.지겹도록 거짓말만 하던 자유당 독재의 12년, 억지로 헌법을 고쳐 정권 연장을 지속했던 위대한 거짓, 그것도 부족해 역사에 없는 3·15 부정선거를 저질러 국민의 분노로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 독재는 무너졌었다.정치 불신이 이제나 가실까 여길 때, 5·16쿠데타로 정치 불신과 사회 불신은 가속화의 길을 걷고 말았다. 군에 복귀한다는 약속을 뒤집고 정권을 잡은 쿠데타 주역의 식언(食言)이 계속되면서 정치는 바로 나락의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국민을 속이는 정권 연장이 계속되고, 신조어인 '번의(飜意)'라는 추악한 용어가 신문을 도배하면서 정치에 믿음을 갖는 사람은 세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3선 개헌의 그 엄청난 정치 속임수에 영구집권의 '유신'까지 선포되었는데 국민의 누가 정치에 신뢰를 할 수 있었겠는가.이런 역사가 뿌리를 내리고, 집권과 정권 연장을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아낄 필요가 없다는 몰상식이 통하면서 정치 불신은 최악의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2012년 중반부터 오늘까지 몇 개월, '안철수 현상'은 바로 이런 정치 풍토에서 탄생한 부산물이며, 메시아를 갈망하던 민중의 염원이 모인 바람이자 희망이었다. 진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거짓이 온 세상을 지배한다고 여길 때, 정당도 싫고 구정치인도 싫고, 낡은 것이나 거짓은 더욱 싫다는 국민의 마음을 뒤흔들어준 사람이 바로 안철수라는 우람한 정치 신인이었다.

  • 언론의 용비어천가 유감

    언론의 용비어천가 유감 지면기사

    대통령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언론이 지지하는 후보에 대한 치켜세우기와 노골적 지지, 반대로 상대 후보에 대한 깎아내리기와 흠집내기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그리 썩 유쾌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흔히 권력에 대한 언론의 역할을 개에 비유하곤 한다. 여기에는 모두 4마리 개의 유형이 있다. 먼저 권력의 남용을 감시하는 파수견(watch dog), 권력 감시를 넘어 사사건건 권력을 물어뜯어 권력보다 우위에 서려고 하는 공격견(attack dog), 이들 개와는 반대로 권력의 총애를 받기 위해 꼬리치는 애완견(lap dog), 권력에 꼬리치지는 않으나 그저 순종하고 잘 따르는 안내견(guide dog) 등이 있다.공격견은 자칫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으며, 안내견과 애완견은 언론의 역할을 포기하고 권력의 주구로 전락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권력을 건전하게 비판, 감시하는 언론의 파수견 역할이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바람직하다 하겠다. 대체로 지난 1960년대까지 우리 언론은 나름대로 파수견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1970년대 유신정권을 거쳐 5공 정권시대에는 애완견 역할로 전락하였으며, 6공화국과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때에는 안내견 역할이 강했던 게 우리 언론이다. 그러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에서 보수신문들은 파수견을 넘어 공격견으로 돌변해 정부를 끊임없이 물어댔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공격견부터 애완견까지 네 가지 유형의 모든 개들이 혼재하여 존재하고 있다.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자마자 우리 신문과 방송들은 새로운 대통령인 이명박 당선자에 대한 용비어천가를 힘차게 합창했다. 이명박 당선자가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불굴의 용기와 끈기로 이겨낸 일로 시작하여, 대학시절 학생운동으로 투옥됐을 정도로 투철한 민주의식과 애국심을 갖고 있으며, 현대건설 신화의 주역이라는 점을 장황하게 보도하였다. 또한 BBK사건, 자녀 교육을 위한 위장전입, 그리고 자녀위장취업 등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있지만 과거 10년 동

  • 선(line)과 원(circle)

    선(line)과 원(circle) 지면기사

    '매크로코즘(Macrocosm)'과 '마이크로코즘(Microcosm)'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원으로 '큰' 또는 '대규모의'를 뜻하는 'macros', '아주 작은' 또는 '극소의'를 뜻하는 'micros'와 '질서' 또는 '세계'를 뜻하는 'kosmos'의 합성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에 근원을 둔 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단계, 즉 가장 큰 단위인 우주부터 원자보다 작은 단위의 것들까지에는 동일한 양식이 반복된다는 원리를 바탕으로 한 사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다르게 표현해 공간과 시간안에 존재하는 것들에서 공통된 원칙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르게 표현하자면 큰 것에서 작은 것들을 터득할 수 있으며 또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기술을 익히고, 지식을 습득한다. 그리고 사회의 규칙을 만드는 자, 집행하는 자, 따르는 자들 사이에서 세력 갈등을 거듭하며 누가 더 우월한 지위를 점령하는가를 기준으로 성공을 가늠해왔다. 하나 이는 사회적 성공에 불과할 뿐 개인적 성공을 가늠하는 표준이 되지는 못한다. 개인적 성공은 사회적 성공과 평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평행하지 않을뿐더러 아예 그 모양이 다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성공을 '선(line)'으로 본다면 개인적 성공은 '원(circle)'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져그렇다면 개인적 성공은 어떻게 가늠해야 할까? 개인적인 성공은 물질적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삶의 흐름 안에서 무엇을 깨우치고 행동으로 옮긴 후 시간이 경과되면 그 깨우침에 갈등이나 의문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그 깨우침은 몸에 배게 된다. 깨우침의 직전을 시발점으로, 그리고 시간을 추진제로 가정한 전제하에 이때 이 개인은 '원'을 한 바퀴 돌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만 '원'을 한번 완주했다고 똑같은 시발점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한 깨우침이 몸에 배거나 아니거나 일단 시행착오를 거친 후 다시 얻는 깨우침은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시발점에 도달했다고는 보이나 실제로 각도를

  • 필주(筆誅) 처럼 무서운 벌은 없다

    필주(筆誅) 처럼 무서운 벌은 없다 지면기사

    지난달 10월 17일은 유신독재가 선포된 40주년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26일은 10·26이라는 전대미문의 비극적인 날이자 유신독재가 끝나던 33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40년과 33년이라는 짧지않은 세월, 안타까움과 처량한 탄식만 나올 뿐, 그 긴 세월에 우리의 삶이 보람된 생애였다는 아무런 징표도 없으니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후퇴만 되고 있는데….간추린 일기4·19를 고등학교때 겪었고, 대학에 들어와 6·3한일회담 반대 투쟁으로 날을 세웠으며, 그런 와중에 '신망잃은 박정희 정권 하야를 권고한다'라는 최초의 하야권고 시위로 확대되면서 첫 번째로 학생의 몸으로 구속되고 말았다. 오래지않아 풀려났으나, 65년에는 한일협정비준 반대로 싸우다가 마침내 월남파병 반대 시위에 앞장서다가 두 번째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았다. 몸이 풀려나오자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기다리기에 강원도 전방에서 3년 세월을 국토 방위로 젊음을 보내고 말았다. 68년에야 제대하여 그해 가을에야 재입학으로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69년에는 3선개헌 반대의 시국에 또 기웃거리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했다. 대학원을 마치고 대학 교수가 되려고 몸을 굽히고 이 눈치 저 눈치 보고 있을 때, 마침내 72년 영구독재가 완전무결하게 자리잡는 유신이 선포되고 말았다.정말로 암담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어 국회가 해산되고 모든 법과 헌법까지 확실하게 중단되어 한 사람의 말이 법이고 헌법인 절대 권력으로 장악되는 엄연한 역사의 현실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지켜보던 그때, 참으로 분개하고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니, 이런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야 된다는 것인가.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따위 통곡이 어떤 힘을 발휘했으랴.최초의 유신반대 투쟁계엄령으로 군이 온갖 권력을 장악한 그때, 맨주먹인 국민들이 무슨 용맹을 부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나의 모교 전남대학교에서는 마침내 그해 12월초 유신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함성'이라는 지하신문이 학교와 시내의 곳곳에 뿌려지는 쾌거가 일어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