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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윷놀이 무형문화재 지정 유감

    중국의 윷놀이 무형문화재 지정 유감 지면기사

    윷놀이는 고유의 전통문화그럼에도중국이 먼저 그 가치를알아보았다는 점에서오히려 우리의 무감각을반면교사로 삼아야며칠전 한 인터넷 언론매체에서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조선족 윷놀이'를 성급(省級) 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고 하며, 중국 국가무형문화재로도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는 지난해 7월에 공고된 내용이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이런 중국의 움직임에 대해 파악도 못하고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아리랑이나 태권도처럼 중국이 또 우리의 문화유산을 가져간다고 비난하면서 그간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는 자성의 여론이 들끓고 있다.필자는 10여년전부터 우리의 윷문화에 대해 연구를 해왔고, 이를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한 활동도 해왔던 터라서 이번 발표를 보면서 여러 감회가 들었다. 작년 10월 본 칼럼란에도 이미 윷판 암각화의 중요성이 울진반구대 암각화보다 뒤지지않다는 사실과 함께, 방치되어 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윷판 바위그림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채 파괴되고 있다는 점을 고발하면서 당국의 관심과 대책을 촉구한 바 있다.중국에서 행해지는 조선족 윷놀이는 우리의 윷문화에 비교해 보면 너무나 단순하다. 우리 윷놀이에 대해 자세히 분석을 해보면, 콩윷 밤윷 쪽윷 손윷 장작윷 등의 재료가 다르고, 가락윷 종지윷으로 방식의 구별이 있으며, 자세윷 태극윷 등의 별종의 놀이가 있다. 또 건궁윷 맹인윷의 특수한 윷놀이도 있고, 이외에도 승경도 성불도 팔도유람도 등의 변형이 있다. 또 현재도 윷판을 바꾸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노는 변형들이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베링해를 건너간 우리의 고대 윷놀이는 알래스카에서 북미 남미까지 전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에 의해서 파치시나 파톨리 등으로 불리는 변형된 윷놀이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심지어 파라과이와 볼리비아는 우리 윷과 같을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윷'이라고 한다. 놀라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이번 보도에서도 "고대 부여의 관직명에서 유래한 윷놀이는 1천500년

  • 2014 조용한 아침의 나라

    2014 조용한 아침의 나라 지면기사

    외형으론 '동방의 등불' 이나…OECD 국가 중 행복지수 32위사회통합·자유 등 사실상 꼴찌이념 무장한 정치권 다툼 멈추고언론, 올바른 보도 고민할때국민도 '정의'로 무장해야'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 코리아. 그 등불 다시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될지니…'. 이 시는 인도의 시성으로 불리며 시집 기탄잘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이자 시인 그리고 교육자였던 타고르가 1929년 일본을 방문할 당시 한국의 한 언론인이 한국으로의 방문을 요청하였으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의 아쉬움을 담아 같은 식민지 국가의 국민으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써준 시이다.'마음에 두려움 없이 머리를 높이 치켜들 수 있는 곳, 지식이 자유로울 수 있는 곳, 작은 칸으로 세계가 나누어지지 않은 곳, 말씀이 진리의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곳, 피곤을 모르는 노력이 완성을 향하여 팔 뻗는 곳, 이상의 맑은 흐름이 무의미한 관습의 메마른 사막에 꺼져들지 않는 곳, 님의 인도로 마음과 생각과 행위가 더욱 발전하는 곳, 그런 자유의 천국으로 나의 조국이 눈뜨게 하소서, 나의 님이시어…'. 이상적인 국가의 보편적 가치를 강력하게 소망하는 이 시 역시 타고르의 시로 자국민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 쓴 시이지만 동방의 등불 뒤에 언젠가부터 따라붙어 하나의 시처럼 되어 버렸다.하필 이 시기에 이 시를 꺼내든 것은 그것도 일제강점기를 겪고 있는 조선의 국민들에게 독립을 염원하는 심정으로 선사한 시이기에 현재의 상황과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동방의 등불 따위의 소리를 들으며 자란 필자가 아득해진 그 기억들을 꺼내어 도무지 조용해지지 않을 것 같은 시끄러워도 너무 시끄러운 대한민국에 2014년에는 진정으로 조용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담아보려 함이다.분명 대한민국은 참담한 일제강점과 한국전쟁을 겪은 후에 불과 짧은 세월에 타고르의 말대로 아시아에서 등불이 되어도 될 만큼 밝아지긴 했다. 엄청난 경제적 성장과 눈부신 문

  • 노숙인을 위한 '이웃의 인문학'

    노숙인을 위한 '이웃의 인문학' 지면기사

    노숙인 자활에 도움될 수 있는맞춤식 강좌 마련하고중장기 인문교양교육 상설 운영대학 정규 교양과목 무료 청강인성교육이나 상담 프로그램지원하는것 반드시 필요지난해 9월에 시작하여 12월까지 노숙인을 위한 '경기도형 탈노숙 Total-Care 사업 인문교양교육' 사업을 진행했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에는 경기도지사도 참석하여 수료식까지 끝냈다. 이 사업은 경기도평생교육진흥원이 주관이 되어 경기대 인문과학연구소가 수원시다시서기센터의 도움을 받아 실시하였다. 교육에는 다섯 명의 교수들이 글쓰기, 철학, 예술, 체육, 명상 등을 각각 맡고 박물관 투어와 도서관 참관도 함께 진행했다. 인문학의 핵심 수업내용을 통해 노숙인들의 자활의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시간이 되고자 했다.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행복사회와 인문도시로서의 발전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킬 수 있게 하려면 '인문학의 대중화'가 관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 대중화는 대학과 지자체와의 긴밀한 연계에 의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노숙인 인문교양교육 사업은 시민인문학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 이 사업을 통해 경기도와 수원시 그리고 대학이 인문학 대중화에 관심을 갖고 서로 협력하면서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세워나갈 수 있게 된 것은 큰 성과라 하겠다.대학의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는 대학 본연의 교육과 연구와 더불어 중요한 역할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대학이 보유하고 있는 지적 자산인 인문학을 지역사회와 나눌 수 있는 학문적 분위기와 교육 정책은 대단히 중요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문학의 기본 정신은 행복한 시민사회를 만들어 가는 데 있다. 인문학 대중화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그것의 분명한 목적은 시민들로 하여금 인문정신이 지니고 있는 자율성과 주체성을 얻어내게 하는 데 있다. 인문학의 또 다른 목적 하나는 소외된 이웃의 얼굴을 따뜻한 마음으로 감쌀 수 있도록 배려 능력을 증진하는 데 있다. 인문학의 힘은 항상 개인의 자율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관심과 염려를 고양시키는 데 있어 왔기

  • 치유여정…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걷다

    치유여정…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걷다 지면기사

    내가 아는 사람 이름 부르며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지은죄와나에게 아픔 줬던 사람들도용서했습니다, 새해엔 그동안맺혔던 마음 내려놓고 감사하는마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얼마 전에 '연합뉴스TV Y'의 5부작 다큐멘터리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멘토로 초청돼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습니다. 멘티는 공모를 통해서 선발된 사람들입니다. 멘티, 방송촬영팀 등 11명이 배낭을 메고 30일 동안 800㎞를 걸으면서 대화와 강의를 통해 멘티를 힐링시키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국경이 끝나고 스페인 국경이 시작되는 지점인 론세스바예스에서부터 사람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던 스페인 땅끝, 야고보의 유해가 묻혀있는 산티아고 성당까지 이어지는 800㎞의 길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복음을 전파한 길로 야고보가 참수당한 뒤 그 유해를 실은 배가 도착해 묻힌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는 길입니다. 야고보를 에스파냐어로 산티아고라고 합니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거리입니다.1천년 전부터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왔습니다. 길의 풍경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알 수 없는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한 숲, 코발트 빛 하늘, 만들어 놓은 그림 같은 뭉게구름,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일출과 일몰,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과 밀밭, 아무리 다가가도 더 멀어지는 지평선을 쫓아 하루에 25~35㎞씩, 6~9시간을 산티아고를 향해 끝없이 걷는 길입니다. 중간에 이 길을 걷다가 죽은 사람들을 묻은 '순례자의 무덤'도 많이 있습니다.이 길을 걸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는 얻으려고, 누구는 버리려고, 누구는 찾으려고, 누구는 잊으려고, 누구는 보려고, 누구는 보지 않으려고 이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과연 이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걷게 됩니다. 마지막 목적지 산티아고 성당에 도착하면 순례자들은 광장에서 서로 부둥켜안거나 광장 바닥에 누워서 뜨거운 울음을 터뜨립니다. 자신이 순례길을 완주해냈다는 것을 느끼는 감동의

  • '동지'와 '크리스마스' 동서(東西)의 동거

    '동지'와 '크리스마스' 동서(東西)의 동거 지면기사

    동짓날은 모든 생명활동이극저점에 이르지만새로운 태양과 함께새생명의 도래를 의미함으로써동서를 막론하고 철학·종교적비중을 가질수 밖에 없다동짓날을 지내자마자 바로 크리스마스이다. 동지는 농경사회에서 중시되던 24절기의 하나이기 때문에 보통 음력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양력으로 태양의 주기를 계산해서 얻은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크리스마스도 예수의 탄생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로마제국의 동지축제의 변형으로서,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 무렵을 택해서 부활의 의미로서 이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고 한다.새해 첫날과는 열흘 차이가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동짓날이 한 해의 마지막이다. 그 이유는 한 해 중 낮의 길이가 가장 짧은 끝점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풍속으로 동지는 작은설(亞歲)이라고 부르면서 이날 팥죽을 쑤어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한 것이나, 조선시대 관상감에서 동짓날에 다음 해의 역서를 만들어 궁중에 바치고 관아에서 동지 선물로 책력을 선사하던 풍습이 있었던 것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날이 그날 같고 또 그날이 그날 같기만 했을 일상의 나날속에서 정확한 1년의 주기를 파악하고, 동지란 극점까지 알아낸 것은 대단한 발견이며 인류 지성의 쾌거라고 아니할 수 없다.아무튼 이 날까지로 모든 생명활동은 극저점(極低點)에 이르지만, 새로운 생명이 꿈틀거리며 부활하는 희망의 날로 전환된다. 그렇게 동지는 새로운 태양과 함께 새 생명의 도래를 의미함으로써, 동과 서를 막론하고 철학적 종교적 비중을 가질 수밖에 없다.그래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페루의 마추피추에도 영국의 스톤헨지에도 동짓날 새 태양이 떠올라 비친 각도와 그림자를 기준으로 배열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필자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동짓날 아침 피라미드나 마추피추에 가서 그 고대의 신비를 직접 확인해 보고 싶다.동지는 생명이 부활하는 성스러운 시간이자 우주질서의 중심축(axis mundi)이다. 그래서 전통시기 중국에서는 동짓날이 되면 천자가 남쪽의 교외에 둥그런 제단(圓丘

  • 연말연시 홀몸노인들 보살펴야 한다

    연말연시 홀몸노인들 보살펴야 한다 지면기사

    가족붕괴로 홀로 사는 노인 늘며고독하게 살다 안타깝게 生 마감노인들에 작은 일자리라도 제공지역사회 공헌 기회 주고더 중요한건 주위 구성원들이자주 돌보는등 많은 관심 가져야연말연시(年末年始)다. 등 따습고 배부른 사람들은 흥청(興淸) 좋아하다 망청(亡淸)되기 쉬운, 그러나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더욱 비참하고 서러워지는 희비(喜悲)가 갈리는 계절이다.필자는 연극연출가이다. 사정이 없는 한 연말에는 따듯한 사랑을 전하는 감동적인 작품을 주로 공연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필자가 아프게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봉사라 생각하기에 그럴 것이다. 청춘을 다 바친 직장에서 젊은 사장에게 내쳐지고 오냐오냐 키우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빌빌대는 자식을 위해 보험금을 타게 해주려고 자동차를 타고 나가 고의사고를 내는 이 시대 최고의 비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연말에 공연했고 우리나라 최고의 설화로 자리잡은 버려진 딸이 버린 아비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저승으로 목숨을 걸고 생명수를 구하러 가는 도저히 현실에서 특히 이 시대에 납득하기 힘든 효를 행하는 '바리공주' 이야기도 연말에 공연하였다. 비슷한 주제인 '효녀심청'을 각색하여 만든 '명랑소녀 심청'도 연말에 공연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연말에는 힘겨운 주변이 더욱 크게 보이는 탓일 것이다. 그러나 주위를 돌아보면 이것 따위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자괴감이 든다. 너무도 힘겹고 현실이 고통이며 지옥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 힘겨운 주변에 더욱 힘겨워 보이는 분들이 21세기 가족의 붕괴와 더불어 증가하고 있는 홀몸노인 분들이다. 기존에 독거노인으로 명칭하고 이제 순화된 용어로 쓰이는 홀몸노인은 배우자나 가족과 함께 하지 않는 노인을 의미하거나 부양해 줄 가족이 없어서 혼자서 생활을 하는 노인을 말한다. 이 홀로 사는 분들이 우울하고 고독하게 살다가 방에서 홀로 삶을 마감하는 그리고 몇 주 심지어 몇 개월 후에 발견이 되는 비극이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되고

  • 늙으신 어머니를 상담하다

    늙으신 어머니를 상담하다 지면기사

    노일을 위한 진정한 상담은가까이 지내면서 옛 기억도죽음이 뭔지도 잊고 살게끔바쁜 일상으로 채워 드리고좋든 실든 얼굴 맞대고옆에 같이 있는 최선이다타지에 사는 탓에 여든이 훨씬 넘은 어머니를 명절이나 제사 때 말고는 보기가 쉽지 않다. 전화로 자주 안부를 묻지만 늘 성에 차지 않는다. 다른 자식들이 같은 고향에 살고 있는데도 유독 혼자 사는 것을 고집한다.집안의 형은 그게 못내 안쓰러워 최근에는 아파트 가까이에 방을 하나 얻어 수시로 음식과 반찬을 해 나르면서 들여다본다. 그래도 남이 봤을 때는 영락없이 독거노인이다. 노인이 혼자 밥해 먹는 게, 말벗이 없어 종일 티브이를 보면서 지낸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여든 넘은 어머니의 삶은 거의 공황상태라 할 만하다. 혼자 밥 먹고, 주위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들이 더 많고, 미래 계획도 없고, 거동하기는 점점 힘들어진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눈물이 날 것이다. 전화로는 바쁘지 않느냐고 하면서도 한번 말문을 열어놓으면 끝이 없다. 며칠 전에는 집안에 일이 있어 내려갔었는데 시무룩하신 게 화가 난 듯하다. "너는 자식이 되어 오랜만에 어미를 봐도 손도 한번 잡아주지 않는구나." 속이 뜨끔하여 가까이 앉아 열심히 손등을 쓰다듬고 손가락도 만져드렸다. 늙은 자식이 하는 속내가 뻔해 보일 듯 한데도 이내 웃으신다. 시조 시인 이종문의 '효자가 될라카머-김선굉 시인의 말'이라는 시가 재미있다. "아우야, 니가 만약 효자가 될라 카머. 너거무이 보자마자 다짜고짜 안아뿌라. 그라고 젖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너거무이 기겁하며 화를 벌컥 내실끼다. 다 큰 기 와 이카노, 미쳤나, 카실끼다. 그래도 확 만져뿌라, 그라머 효자 된다." 언젠가 이 시를 읽고는 나도 한번 따라 해봐야지 했는데 확신이 서지 않아 그랬는지 젖은 둘째고 손도 한번 잡아드리지 못한 꼴이 되었다. 고향에 가면 어머니와 잠시지만 의도적으로 가까이 있으려고 한다. 처음엔 네 방에 건너가 일찍 자라고 하지만 내심은 같이 얘기를 하고 싶다는 것을 잘 아는지라 옆

  •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 지면기사

    가속도와 힘의 방향은 같아매사 긍정적인 사람은지속적인 성공을 이끌어 내고늘 부정적인 사람은한번 실패하면또다른 실패를 경험하게 된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도전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개척하고 도전하는 사람만이 더 큰 것을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 뉴턴이 확립한 역학의 기본이 되는 운동의 법칙입니다. 바로 관성의 법칙과 가속도의 법칙입니다. 운동의 제1 법칙인 '관성의 법칙'에 따르면 '외부로부터 물체에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정지하고 있던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해 있고, 운동하고 있던 물체는 언제까지나 같은 속도로 운동'을 합니다.지구는 공전운동과 자전운동을 합니다.그런데 만약 거대한 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면 지구의 공전운동과 자전운동은 깨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외부의 힘입니다. 그래서 외부의 힘이 작용하면 관성의 법칙은 깨지는 것입니다.이런 관성의 법칙은 물체뿐만 아니라,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실을 비관하며 미래를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기에서 벗어나오지 못합니다. 이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비난하고 주변을 험담합니다. 자기가 잘못된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 세상의 잘못이라고 단정짓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속 정지해 있고, 그 절망의 깊이는 더욱 깊어집니다. 그 절망의 늪을 깨고 나오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 사람들은 또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만나고 그들과만 대화합니다. 그들 역시 세상을 비난하고 헐뜯습니다. 패배의식은 늘 스스로를 패배자로 만들죠. 관성의 법칙에 따라 그들은 계속 절망 속에서 정지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나 자기 인생에서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늘 도전합니다. 현실을 긍정하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생각하며 희망을 갖습니다. 현실은 힘들고 어렵지만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에는 대부분 자신이 꿈꾸던 성취를 경험하게 됩니다.

  • 게임중독법 발의를 보며

    게임중독법 발의를 보며 지면기사

    판단력 부족한 어린 학생들에게게임 즐길지 말지 선택하라는건'공정한 게임이 아니다'게임 중독에서 벗어나고건강한 습관을 가지도록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해야최근 신문지상과 TV에 게임중독법 문제가 화두가 되었다. 천만명이 넘는 인구가 알코올 도박 마약 인터넷 중독 등에 빠진 중독 고위험군이라고 하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신문지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던 도박이나 마약 사건 정도는 이제 인터넷게임 중독 사건에 밀려서 아예 기사화되지도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돌이켜보면 40년 전에도 전자오락이란 게임이 있었다. 필자가 고등학생이던 1970년대 중반 지방 도회지의 번화가 귀퉁이에 오락실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기껏해야 17인치 흑백TV를 보던 시절, 대형 화면 위에서 푸른 창공을 날아다니는 비행기 공중전 '전자오락'은 시골 소년에겐 그야말로 놀라운 신천지였다. 다음날부터 들락날락하면서 한 달 용돈을 며칠 만에 다 탕진했지만, 적기의 꼬리를 물고 공중제비를 돌면서 기총사격을 가하면 굉음과 함께 적기가 폭파되던 순간의 짜릿한 느낌은 뭐라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마지막 코인까지 다 털어넣고 난 뒤에 오락실문을 나서는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기계문명의 쾌락은 맛보았지만 어린 나이에도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을 직감할 수 있었다.그런데 지금의 인터넷게임은 이보다 훨씬 강렬한 쾌감을 주는데다가, 누구나 어디서나 바로 접근할 수 있다는 데에 문제는 심각성을 띤다. 중독은 이성적 판단력을 잃고 황홀상태에 빠뜨린다.그러나 중독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단순하지만 한번 건강한 중독과 불건강한 중독으로 구분해보자. 요즘 문제가 되는 청소년들의 게임 중독은 불건강한 중독들이다. 기계가 주는 쾌락에 빠져서, 사이버공간과 현실세계를 혼동하며 돌이킬 수 없는 파탄에 빠지는 게임 중독은 불건강하고도 나쁜 중독이다. 얼마 전 TV토론장에서 어느 학부모가 그 잔혹하고도 절망스러운 실상을 통곡하면서 고발하는 것을 보았다. 어둔 골방에 처박혀 가상의 세계에 빠져버린 채 이

  • 청소년범죄와 학교폭력 중등교육 확 바꿔야

    청소년범죄와 학교폭력 중등교육 확 바꿔야 지면기사

    국·영·수 입시위주의 교육아이들 정서·인성·역사의식 실종예체능과 도덕·역사 과목중심으로 나라를 위하고인권 존중과 감성이 풍부한사람을 만드는 교육과정 필요참으로 많은 뉴스거리가 등장하는 현대사회이다. 한마디로 뉴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매체가 없던 시절 들을 수 없었고 듣지 말아야 할 듣고 싶지 않은 소식도 어쩔 수 없이 무조건 들어야 한다. 그 중에서 가장 듣기 싫지만 점점 늘어가는 뉴스가 청소년 범죄이고 학교폭력이다. 이 나라의 미래인 청소년들의 날로 흉폭 해지는 범죄소식을 들을 때면 미안함과 함께 참담함, 어른으로서 부끄러움, 결국엔 책임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얼마 전 19세 소년이 여자 친구를 유인해 성폭행하고 시신을 훼손한 후 SNS에 죄책감 대신 시신을 조롱하며 지옥에 가고 싶다고 글을 올린 최악의 엽기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여론은 들끓었지만 이내 시간이 흐르며 별다른 대책도 없이 잊혀져가고 있다.청소년들의 극악한 범죄는 학교 안에서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대구에서 중학교 2학년을 다니다 친구들의 악랄하고 지속적인 폭력으로 아파트 집 베란다에서 유서 한 장 남겨놓고 자살한 권모군의 유서 내용은 분노를 넘어 인간의 존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온갖 폭력에 돈 갈취, 개 줄을 하고 바닥의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게 하는가 하면 피아노 의자에 구금하고 장시간 때리기 등 도저히 성인들도 생각하기 힘든 폭력에 시달리다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어쩌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사소한 이유로 부모에게 폭력을 가하고 학교선생을 고발하며 집단으로 폭력과 강간을 저지르며 범죄 후에도 뉘우침이 없는 아이들, 이러한 무서운 현상이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무엇이 그토록 우리들의 청소년을 흉악하게 만들고 있나. 그 원인은 너무나 많아 보인다. 영화, TV, 인터넷 등 온갖 매체들의 무자비한 폭력 막장드라마에 갖은 선정성. 뿐인가. 현실에서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비상식적인 법치가 판을 치고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에 취해 추한 싸움질을 해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