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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주간에 한국여성의 위치를 생각한다 지면기사
7월 첫째 주는 여성발전기본법이 정한 여성 주간이다. 1995년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국가와 지방정부가 여성 발전과 양성평등 촉진 등에 관한 의식을 높이고자 시작된 여성주간 행사는 올해로 17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1995년 즈음과 오늘 한국사회의 여성 지위를 비교하면 일면 나아진 점도 있지만 국제 비교를 통해 보면 여전히 여성의 지위와 삶은 차별적이고, 버거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법 제정 당시로 보면 양성평등 이슈는 법과 제도 속에서의 여성참여 저해의 제도적 개선, 공적 영역의 여성참여를 저해하는 군경력 가산점제 폐지 등을 포함한 소수자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실시 요구, 여성의 삶을 송두리째 통제하던 호주제 폐지를 포함해 가정폭력 및 성폭력 등 여성 인권 침해 방지를 위한 법적·제도적 개선 요구, 정부 정책 과정의 여성 참여 확대 등이었다. 1995년 법을 제정하면서 세계화에 걸맞은 여성정책을 약속했던 문민정부를 넘어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정부에 이르기까지 법이 정한 가치와 목표가 한국사회 전역에 반영되어 여성의 실질적 지위와 삶의 변화로 나타났을까?물론 이제 성이 직업 선택의 기회와 활동을 제한하지는 못한다. 즉, 기회는 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과 여전한 문화적 배경은 차별적 결과를 낳고 있다.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한 여성단체의 끊임없는 노력과 선거 때마다 공약으로 약속을 해 왔지만 '2012년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9.7%로 OECD 평균 61.5%에 훨씬 못 미치는 숫자이고, 이마저도 여성 노동자의 43%는 저임금과 안정성이 위협을 받는 비정규직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임신, 출산 후 재취업을 하는 40대 이상 여성 취업자의 대부분은 경력과는 상관없이 비정규직에 취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오늘 한국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62% 수준으로 20~30대에 비슷했던 남녀 간 임금 수준은 40대 이상에서 크게 벌어지면서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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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내려놓기 지면기사
지난 주에 스승님과 대전에 갔다왔다. 대전에 가기 며칠 전에 용주사에 들러 포교국장 스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에 스님의 방에 걸려있는 위엄있는 부처님 사진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부처님 사진을 보아도 되냐고 여쭤보니 스님께서 선뜻 액자를 내려주셨다. 참으로 멋진 부처님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5대째 이어져오는 가톨릭의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사제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해왔음에도 절집에 가기가 예사로웠다. 아마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불교사상사를 연구하시는 지도교수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랬던 것 같다. 전국의 사찰을 답사하면서 귀하고 멋진 부처님을 많이 만나 보았는데 사진에 있는 부처님은 예사 부처님이 아니었다. 스님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하니 스님은 껄껄 웃으며 아예 액자를 열어 사진을 직접 찍으라고 한수 더 뜨셨다. 필자 역시 환하게 웃으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액자를 열어 사진을 꺼내는 순간, 또 다른 사진이 나왔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스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아니! 스님 이 분은 누구세요?"하고 여쭸더니 "이 분이 제 스승님이신 송담스님입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이었다.송담 스님이라면 '남진제 북송담'이라 불리는 그 유명한 분이셨던 것이다. 일찍이 송담 스님의 위명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검은 선글라스를 쓴 모습은 처음이었다. 사연인즉슨 스님께서 젊은 시절에 수행을 하실 때 눈빛이 너무 세서 일반인들이 쳐다볼 수 없어서 일부러 검은 선글라스를 쓰셨다는 것이었다. 완전히 소설속의 이야기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얼핏 전설적인 이야기를 예전에 들었던 적이 있어 맞장구를 치면서 송담 스님을 어떻게 하면 뵐 수 있을까 하고 조심스레 질문을 드렸다.사실 필자는 여러 해 동안 선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알려진 스님이나 아니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사회를 위해 희생하시는 신부님이나 목사님을 만나러 다녔다. 그 이유는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필자의 인생도 그런 분들처럼 세상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보다 나은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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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 한국의 엘리스 지면기사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상의 상금이 재정 악화로 인해 63년 만에 약 13억원으로 삭감된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한국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각종 상들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그 중 상금 규모가 가장 큰 상은 총 15억원에 달하는 '호암상'이다. 삼성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 선생의 사회공익정신을 기려 제정된 '호암상'은 "국내 최고 권위의 상을 지향하기 때문에 2년 전 상금을 3억원으로 올렸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청암(靑巖)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창업정신을 계승, 확산하기 위해 제정된 청암상 역시 상금이 현재 2억원이라고 한다.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가 실물경제에서 문화 예술의 영역으로까지 파급되는 현 상황에서 우리나라의 각종 상들이 오히려 상금을 인상하거나 적어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반갑고도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단기적인 경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장기적인 문화 예술의 논리로 풀어나가려는 것에 우리 해법의 독창성이 있다. 필자는 2012년 6월 2일 '호암예술상' 수상자인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이 준비한 렉처 콘서트에 참석한 바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 사이먼 래틀로부터 "세계 작곡계를 이끌 차세대 5인 중 한 명"으로 지목받은 당사자는 정작 수상에 대해, 아마 이번 콘서트를 먼저 듣고 수상자 결정을 했으면 수상을 못했을 것이라는 유머 섞인 소감도 잊지 않는다. 아마도 윤이상을 잇는 급진적 모더니즘을 개척한 작곡가라는 평가를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필자 역시 그날의 현대음악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연주된 콘서트 곡 중 루이스 캐럴 원작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발췌곡에 주목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젊은 세대라면 어린 시절에 한두 번쯤은 읽었을 법한 책이다. 이 책을 즐겨 읽는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진은숙 작곡가 역시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쓰면서 내 개인적 경험으로 오페라를 쓰는 듯한 기이한 경험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을 많이 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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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삼강오륜인가-법고창신(法古創新) 지혜로 수용 지면기사
천지개벽이라 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라는 느낌이다. "낡은 질서가 소멸하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지 않으면 혁명이 일어난다"고 기 소르망은 주장했지만 우리 사회의 변혁은 감내하기 힘들 정도이다. 주자학을 신봉하던 조선조 봉건사회에서 근대국가, 또 현대국가로 숨가쁘게 변신한 한국은 가족관계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문화 인류학적 관점에서 보면 새로운 모계사회 등장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과거 상식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분명한 윤리관이나 가족관이 자리잡지 못해 숱한 갈등이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최근 늘어나는 여성의 사회 진출, 자녀 양육이 외가 중심으로 이뤄지면서 '신 모계사회'라는 말이 유행하고 전통적 개념의 가정이 해체되고 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지난 2010년 전국 중고교생 7천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어머니 형제인 이모와 외삼촌을 아버지 형제인 고모와 백부·숙부보다 친밀하게 느끼고, 이모부가 고모부보다, 외숙모도 백모·숙모보다 더 가깝게 느낀다고 답해 친가보다 외가가 친밀하며, 심지어 '애완견도 가족'이라는 답변이 많았다고 전한다. 특히 저임금과 실직, 이혼 등으로 가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남성이 늘어나면서 여성은 육아와 가사 외에 경제적 의무도 짊어지는 시대가 됐다. 그래서 '신 모계사회'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남편이 천덕꾸러기가 된 자조적 농담도 유행한다. '집에서 한끼도 안 먹는 남편은 영식씨, 한끼 먹는 남편은 일식씨, 두끼 먹는 남편은 두식이지만 세끼 먹는 남편은 삼시쉐끼, 세끼 먹고 간식까지 달라는 남편은 간나쉐끼, 세끼 먹고 간식 먹고 마누라는 쳐다보지도 않는 남편은 쌍노무쉐끼' 란다. 늙어 힘없고 수입이 줄어든 남편은 '구두 밑창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칙칙한 낙엽' 신세로 가장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는 속담도 옛말이어서 1990년 1만8천명이던 처가살이 남성이 20년 지난 2010년 5만3천명으로 늘어난 반면, 시집살이를 하는 여성은 44만명에서 19만명으로 절반 넘게 준 통계청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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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서거 250주년과 자주의식 지면기사
벌써 사도세자가 돌아가신 지 250년이 되었다. 비운의 왕세자라고 우리들에게 인식되어지고 있는 사도세자! 그가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한 채 250년 동안 우리의 기억속에서 잊혀지고 있었다.수원, 화성, 오산 사람들에게 사도세자는 매우 귀한 존재이다. 정조가 1789년 7월 15일에 그의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면서 옛 수원지역이 대대적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옛 수원 지역만이 아니라 현재의 경기남부 지역 전체가 사도세자의 현륭원 이전으로 발전했다고 보아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경기남부 지역의 도시발전 역사에서 사도세자의 기여가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바라보아야 할 때가 왔다.사실 사도세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정신병에 의한 죽음을 당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그의 문집에서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남을 해쳤다"는 설이 있다고 하였고 자신은 그 말을 신뢰한다고 하였다.그렇다.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처럼 사도세자는 당쟁에 의한 희생물이었다. 2007년에 필자가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재직하던 시절 사도세자의 서거 245주년을 맞아 화성행궁 앞에서 진혼제를 지낸 일이 있었다. 당시 이 진혼제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1만여명 이상이 모여들었다. 당시 진혼제는 인간문화재인 김금화 만신이 주도하였는데 3시간이 흐른 뒤 사도세자와 접신이 되었는지 김금화 만신이 절규에 찬 목소리로 '목말라, 목말라!'를 외쳤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사도세자는 1762년 7월 4일에 뒤주에 들어가 물 한 모금, 밥 한 톨도 먹지 못했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겠는가! 그런데 '목말라, 배고파'라는 절규를 뒤로 하고 만신의 목소리는 어느덧 평온을 찾았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과 같은 비극적 죽음을 만들지 말아 달라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쓰러지면서 진혼제가 막을 내렸다.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나와 같은 죽음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바로 당쟁으로 인한 죽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쟁이란 것이 결국 서로의 이익을 위해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워 상대방을 죽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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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짓는 고흐 지면기사
최근 몇 주간 복잡한 일들이 많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지내고 있던 차였다. 그날도 학생들 행사에 참석하느라 꽤 늦은 시간에 귀가하면서 생각해보니 외국 출장이 이틀 앞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평소처럼 메일을 확인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음악을 보낸다. 옛날 생각 좀 해 보렴." 친한 친구로부터 온 메일이었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배경으로 음악이 흐른다. 1888년 고흐는 약 9개월동안 함께 작업했던 고갱과 다툰 후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게 되고, 정신 이상을 자각하고는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을 찾게 된다. '별이 빛나는 밤'은 생 레미 병원에 있던 1889년 6월에 그린 그림이다. 돈 맥린이 부른 이 팝송은 예전부터 좋아해 친구와 즐겨 부르던 노래였건만, 이 아침 고흐의 그림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는 곡조와 가사는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별이 빛나는 밤/ 그대 팔레트를 푸른 잿빛으로 칠하고/ 여름 날 내 영혼의 어둠을 알아보는 눈으로/ 밖을 내다봐요/… /난 이제 알아요 그대가 내게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그대가 온전한 정신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 사람들은 들으려하지 않았고/ 들을 줄도 몰랐지요/ 아마도 지금은 귀 기울일 거예요…." 정신없이 살아가는 내 삶의 방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보라고 질책하는 것 같기도 해서 가사를 음미해가며 들어본다. 여기서도 중요한 건 소통이다. 그러고 보니 친구와 한 동안 대화를 별로 못한 것 같다.마침 뉴욕 출장길이어서 내친 김에 '별이 빛나는 밤'이 소장되어 있는 MOMA(뉴욕 현대미술관)로 향했다.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의미를 발견하려는 듯 고흐 앞에 몰려 있었다. "오늘 아침 나는 해가 뜨기 훨씬 전 창 밖 시골 정경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새벽별만이 있었다." 이 작품과 관련해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글이다. 고흐에게 상상력의 끝은 항시 자연을 향하고 있었다. 별들로 상징된 상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역동성과 기억의 세계를 재현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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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 혁명' 한류 방어는 바람을 멈춰 세우려는 것… 지면기사
폴란드 출신 유태인으로 소련 붕괴를 일찍이 예언했던 '전략의 달인' Z. 브레진스키는 카터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담당 특별 보좌관을 지냈다. 국제전략가였던 그는 세계를 '거대한 체스판'으로 파악하고 통찰력을 갖춘 혜안으로 소련 붕괴를 미국의 승리가 아닌 부전승으로 평가했다. 당시 러시아에 근무했던 미국의 한 외교관은 소련 붕괴 과정에서 맥도널드 햄버거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했다.자본주의의 첨병으로 모스크바에 상륙했던 맥도널드는 공산체제의 모순을 첨예하게 드러내 브레진스키가 말한 대로 인류역사의 '장대한 실험'이라던 공산주의 멸망의 촉매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패스드 푸드에 불과한 문화상품이 냉전시대 철의 장막이 둘러쳐진 소련을 붕괴시킨 비밀병기였던 셈이다. 유사 이래 제국이나 대기업의 멸망도 거의 대부분 내부 분열이나 부패로 시작되었다는 사실(史實)은 역사가 증명해 준다. 유토피아를 파는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혁명을 수출하며 평등사회가 되어 천년 만년 지속될 것만 같았던 소련이 해체된 것은 서방의 핵 공격이 아닌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키는 '문화적 충격'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당시 소련정부의 개혁 개방 정책의 상징으로 미국 문화가 유입되면서 세계공산주의 심장부 모스크바 시내에 개설된 맥도널드 가게 앞에 1천여명씩 장사진을 친 모스크바 시민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첫째, 누구나 줄을 서서 돈을 내면 햄버거를 사먹을 수 있고, 둘째, 카운터에서 주문받은 여자종업원이 큰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해 '소비자는 왕'임을 실감했다. 셋째, 맥도널드는 집단농장에서 현지 재배한 감자 튀김을 제공했다. 맥도널드가 인간의 가장 원초적 본능인 식욕을 만족시키며 역설적으로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이상을 당당하게 시현한 것이다.모든 악의 근원이 사유재산제도에 있다고 본 카를 마르크스는 사유제 철폐를 통해 계급없는 진정한 평등과 인간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단정했다. 브레진스키의 지적대로 공산주의는 이처럼 '과도한 단순논리'를 시의적절하게 내놓아 한때 수십억 인구의 열정과 희망을 사로잡고 20세기 냉전체제의 역사를 지배했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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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5월, 가족과 말이 아닌 대화를 하자 지면기사
가족은 가장 오래된 인간 조직이며, 이 사회의 기초 단위이면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아득하게 꿈꾸는 유토피아이다. 또 개인적으로 휴식과 보호, 안정과 위로의 안식처이면서 자기 내면의 세계를 추구할 수있는 공간이다. 가족은 관계를 기초로 맺어진다. 가족관계는 혼자가 아니고 2인 이상이 서로 노력해서 일구어가는 정원에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정원에 대화가 없어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소통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통한 단순한 연결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대화가 소외되고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5월의 초록 잔치가 절정에 이르렀다. 눈을 어디로 돌려도 초록 물결이 일렁인다. 그 잔치 행렬에 알록달록 손에 손을 잡은 가족 나들이 행렬이 이어진다. 가족이라야 달랑 두 식구인 우리 가족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지나는 사람 구경과 모여앉은 가족 무리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가끔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봄나들이는 김밥과 맛난 음식을 싸들고 나와 봄꽃 향기를 가득 실은 간지러운 봄바람을 쏘이면서 지천인 꽃과 새로 갈아입은 초록잎 구경도 하고, 가족간 바빠서 나누지 못했던 일상생활의 나눔과 공유, 그리고 이해에 더해 앞으로 살아가면서 함께 나눌 추억을 만드는 자리이다. 물론 나서는 순간 나들이길 기대는 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공통 욕구는 소통하고 상호 사랑하는 가족 관계를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들이 나온 가족들이 경치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이후는 오가는 길의 그 다정했던 모습들과는 달리 모여앉은 가족들의 시선이 제각각임을 발견하게 된다. 엄마와 아빠는 스마트폰에 집중하고 아이들은 게임 삼매경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너무 많은 가족들이 이 가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선 고정을 넘어 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전혀 다른 사람들처럼 각자 시간을 보내는 모습들이다.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식사시간에는 어떤지 유심히 살펴보니 준비한 음식을 펴 놓고 식사를 진행하는 동안도 모든 가족의 시선은 스마트폰과 게임에 머물고 거의 대화없이 점심이 진행되고 있다. 내가 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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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자들을 위한 사회의 불편한 진실 지면기사
지난 주 휴일에 제주도를 다녀왔다. 10여년 전에 만나 흉금을 터놓고 인생을 이야기하는 선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한라산을 오르기로 한 것이다. 형이 여러 사람들의 오해로 진실이 가려지게 되어 직장에서의 처지가 곤란해져서 위로겸 사색겸 해서 다녀오고자 했다. 요즘 방송에서 나오는 '힐링캠프' 뭐 그런 것과 유사했다. 제주 해안을 걷고 오름을 오르고 그리고 한라산을 8시간 등반하며 삶이 그리 슬픈 것만은 아니며 그래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가지고 제주공항을 떠났다.그런데 김포공항에 도착하면서 또 다른 화가 솟구쳤다. 사실 화낼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는데…. 제주공항에서 김포행 비행기표를 일찍 받고 배낭도 일찌감치 부쳤다. 한라산에서의 비상식량과 혹시 있을 악천후에 대비한 준비물들로 큰 배낭을 가지고 갔었다. 그래서 비행기 안에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일행 모두가 화물로 부쳤다.그런데 우리 일행의 배낭은 김포공항의 하역장에서 가장 마지막 순간에 나왔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골프채였다. 제주에 골프 여행을 많이 가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큰 비행기여서 그런지 골프 여행객이 많아서 그런지 그들의 골프채 역시 꽤 나왔다. 골프채가 나오고 과일 상자와 여러 짐들이 나오다가 마지막에 배낭이 나와 들고 나오는데 왠지 화가 났다.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부유층들을 위한 배려의 정책이 여기서도 진행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마도 김포공항 하역장 관리자들은 하역 매뉴얼에 의해 고가품인 골프채를 가장 먼저 내보냈을 것이다. 노동을 하는 그들은 매뉴얼대로 움직였기 때문에 그들을 탓할 생각은 전혀 없다. 또 골프채가 다른 짐에 비해서 크기가 큰 것이니 먼저 내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진자들에 대하여 우선하는 정책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을 수도 있었다.그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화물을 부친 순서대로 하역을 하면 서로간에 오해 없이 오히려 좋지 않을까! 이것이 공평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서민들이 빨리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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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건축가' 정기용 지면기사
지난 일요일 광화문 씨네큐브로 '말하는 건축가'를 보러갔다. 평소 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도 했거니와 TV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소개하는 것을 얼핏 본 기억이 있어서이다. 정기용 건축가에 주목하게 된 더 큰 이유는 그의 건축철학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공건축을 통해 나눔을 실천했던 그의 '기적의 도서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해 줄 사람을 찾을 때 고려했다던 세 가지 사항이 무척 흥미롭다. 첫째, 돈을 최우선하지 않는 사람, 둘째, 공공의 가치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 셋째, 미적 감성이 탁월한 사람 등이었는데 이는 곧 '바보 건축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생전에 집 한 채 없이 살았던 '바보 건축가'를 다룬 다큐를 보면서 내내 마음이 훈훈했고 바보였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기대했던 대로 그는 '지금' '여기', 현실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문주의자였다. 현재가 없는 미래란 있을 수 없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프로젝트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은 '유토피아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이다. 또한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은 그의 말마따나 '대가병'이 있어 대가의 건축만이 건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건축은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작은 세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건축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개별적 발화(파롤 parole)'에 불과할 뿐 '전체가 공유할 소통의 언어(랑그 langue)가 부재'하다는 그의 판단은 소통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철학에 따스한 인간적 시각을 제공한다.구태여 말하자면 정기용은 인간과 자연과 건축물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공간을 그리는 지독한 휴머니스트이다. 그에게 건축은 기술이나 기예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 속에서 타자와 더불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인문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건축이 조형예술이 아니라 오히려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이다. 그의 건축은 인간을 압도하지도 않거니와 인간이 그 공간 속에서 경외감이나 소외를 느끼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