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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야기가 숨쉬는 옛길 지면기사
의왕에서 수원으로 넘어오는 지지대고개 옆에는 효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이라고는 하지만 노변에 주차된 차량들 때문에 보행조건이 썩 좋지는 않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주말에 광교산을 찾는 등산객들이나 가끔 찾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이 춘향전에서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던 이야기 속 그 길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우리 주변의 길이, 사실 알고 보면 굉장한 역사적 스토리를 갖춘 길이었던 것이다.오늘날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갖춰져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있었다.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영조 대에 간행된 관찬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를 기준으로 하자면 한양에서 전국 각지에 이르는 도로는 크게 9개로 구분되는데 이 모든 길은 반드시 경기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길을 꼽자면 한양과 충청, 호남, 영남의 삼남지방을 모두 잇는 '삼남대로'를 들 수 있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지금의 과천, 수원, 화성, 오산, 평택과 천안, 삼례를 거쳐 통영으로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평택에서 갈라져 충청도로 가거나 삼례에서 갈라져 해남과 제주까지 닿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길은 한양에서 남부 지방을 가장 유기적으로 잇는 도로라고 할 수 있다.근대에 들어 철도와 차량을 위한 길이 생기기 전까지 이 길을 오고간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명멸했다. 여말선초의 정치가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를 가면서 정치개혁의 의지를 다졌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고 정조대의 실학자 정약용이 개혁의 좌절을 곱씹으며 강진으로 유배를 갔던 길도 바로 이 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순신이 전라좌도에 부임하면서 달렸을 길도 이 길이었고 앞서 말한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던 길도 이 길이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길도 이 길이었고 전국의 장돌뱅이들이 장시를 찾아 걷던 길도 이 길이었다.이처럼 길이란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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遺物 기증이 지역문화를 바꾼다 지면기사
한달도 채 되지않은 작년 12월에 안산시에 특별한 일이 있었다. 성호 이익 선생님의 후손이 집안에 소장된 유물을 안산의 성호기념관에 기증한 일이었다. 기증 유물의 내용을 보면 가히 깜짝 놀랄 일이다. 기증된 유물은 이익 선생의 부친인 매산 이하진의 친필 서첩인 천금물전(千金勿傳ㆍ보물 1673호) 10책과 청풍계첩(靑楓契帖), 옥동금 등 167종 366점이다. 유물 감정가로 15억원이 넘는다고 기념관측에서는 이야기하는데 실제 인사동 감정가로 보면 20억원이 넘는 금액이다. 금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물로 지정된 천금물전을 소장하고 있지 않고 사회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큰 결단을 내린 이는 경희대학교 이효성 공과대학 학장이었다.이효성 학장의 부친은 안산의 문화계 어른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고 이돈형 박사이다. 성호 이익 선생님의 후손답게 안산을 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셨던 분이다. 경기도향토사연구협의회 모임에서 몇 번 뵈었던 적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치대 교수를 하셨던 이 분이 역사를 전공한 우리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셔서 무척 놀라곤 했었다. 이는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이돈형 박사는 1993년 12월에 성호 이익 선생님의 필사본 '성호사설' 등 집안에서 6대에 걸쳐 집필하고 소장한 자료 800여점, 1천여권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이 단순히 여주 이씨 가문의 소장자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국가에 기증하게 한 것이다. 결국 이 기증으로 국립도서관에서는 성호 이익 특별전을 개최하고 성호 선생님 연구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후기 실학의 양대 줄기의 하나인 경세치용 학파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돈형 박사의 유지를 받든 이효성 교수 역시 천금물전을 비롯한 가문의 보물을 성호기념관에 기증함으로써 역사 인물 연구와 안산의 문화발전에 새로운 초석을 깔았다.이처럼 지방자치단체의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하는 사례들은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예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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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배달이요! 지면기사
'꽃배달이요!' 좋아하는 분들에게 새해인사차 꽃배달 동영상을 보냈다.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제각기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못해 황홀하다. 동영상의 첫 배경에서 흰 장미가 함초롬히 우리를 꽃의 삶으로 안내한다. 제일 먼저 새빨간 장미가 정열의 꽃잎들을 생동감 넘치게 펼쳐 보인다. 뒤이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노란 수선화, 보랏빛 패랭이, 하얀 백합, 빨간 카네이션, 흰 국화, 노란 해바라기, 진분홍 철쭉에 이르기까지 때론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꽃들의 향연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돌아 나와 생각해보니 그것은 꽃들의 자기실현이었던 것이다. 꽃을 피워내는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장미 스스로에 쏟은 값진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퍼뜩 작은 것이 주는 기쁨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란 쿤데라는 "오직 소설만이 사소한 것의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건만, 아무리 미세한 생명체라도 그 안에는 풀 길 없는 신비가 내재해 있는가보다.평소 존경하던 원로 선생님 한 분이 곧바로 전화를 주셨다. "김선생, 이거 어떻게 된거지? 잘 안열리는데?" "선생님, 비디오 플레이할 때처럼 삼각형 모양을 한번 눌러 보세요." "응, 그래, 그래." 선생님은 잠시 후 다시 전화를 주셨다. "김선생, 이거 너무 멋진데? 감동이야, 감동! 김선생, 이런 거 어떻게 알았어? 정말 좋은데?" 평소 근엄하게만 보였던 선생님이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는 걸 보니 정말 감동을 느끼셨나보다. '그래, 잘했어. 사실 감동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나오는 거야. 사람들의 마음은 똑같은 거라니까' 혼자 흐뭇해할 새도 없이 연이어 답장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온다. '향기로운 새해 맞이하시길' '향기가 아주 좋습니다' 등 뛰어난 후각을 자랑하는 감각적 답신에서부터 '보내주신 꽃 비디오 교수님처럼 넘 예쁘네요' 등 아부 내지 격려형 답장, 그리고 '선생님의 귀한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데…' 등 자책형 답신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다양한 문자 메시지를 받으며 나의 선택에 내심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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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김정일, 아듀 2011! 지면기사
빛바랜 사진이 있다. 11년 전인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찍은 사진이다. 방북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인민대회당 만찬 대표 취재기자로 갔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 공식 수행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 우연히 끼어들어 찍은 것이다. 대한민국 기자로는 처음이었다. 수행 기자실이 발칵 뒤집혔다. 그때만 해도 단독 사진은 대특종이었다. 역전의 무용담처럼 지금도 아끼고 있는 이유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보았다. 악수를 하면서 내 명찰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몸집이 아주 통통했다. 부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배도 많이 나와 있었다.그는 아주 달변이었고, 의전에 거리낌이 없었다. 무엇이든 자기 식으로 했다. 수행원들과 소파에 앉아 '금강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지 않은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수행기자가 상대국 정상과 회담장에서 악수를 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이제 이 사진도 역사의 뒤 안으로 묻어둬야 한다. 낡은 빛깔만큼이나 흘러간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김 위원장이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니, 지나온 시간의 작은 파편일 뿐이다. 시간의 엄혹함을 다시금 느낀다. 우리 사회가 차분하고, 의연하게 그의 장례를 지켜보는 것도 이런 기록의 힘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2000년 그가 평양 순안공항에 극적인 효과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숱하게 보아왔다. 외신을 통해 그의 지치고 병든 모습을 지켜봤다. 국내 언론의 보도로 열차를 타고 움직이는 비밀스러운 그의 동선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의 돌연사는 뇌경색으로 쓰러질 때 이미 예고되어온 터다. 불안과 두려움의 정도가 과거와는 처음부터 달랐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때도 무던하게 견뎌온 우리다. 북한체제의 불가측성에 대한 내성을 스스로 쌓아온 것이다.이렇듯 2000년 이후 남북관계의 주역들을 역사의 저편으로 모두 떠나보냈다. 정상회담을 했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김 위원장까지 떠났다. 정상회담의 공과는 물론 있을 것이다. 미화한다고 치부가 감춰지진 않는다. 분명한 것은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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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 민족이동에 비견되는 조선족의 이동 지면기사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시점에, 주말에 열린 학회 참석차 일본 교토에 있었다. 일본과 중국의 조선족 연구학회, 한국의 재외한인학회,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대학이 공동으로 '한중일 협력시대의 코리안'을 주제로 개최한 학회였다. 학회에는 필자처럼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학자, 일본에서 활동 중인 조선족 학자, 재일동포학자, 브라질 이민 출신 학자 등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성장 배경이 달라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 학자들이 모여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도 벌였다. 학회에 참석한 학자들은 한중일 협력을 위해 조선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한국인 중 상당수가 아직도 조선족 하면 힘든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을 떠올리고, 다문화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들조차도 이러한 인식에서 머물러 있는 현실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금 조선족 중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전문분야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5월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을 차지한 중국 옌볜 출신 가수 백청강도 그 중 한 명이다. 지금 중국은 문화산업을 중요한 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 교류에서 문화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학회에서 경기도의 역사문화자원의 활용 현황 및 가치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유학을 리더십, 환경, 자본주의와 같은 현대적인 키워드로 재해석하는 경기문화재단의 작업을 소개하고, 유학을 우리 시대 새로운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같은 유교 문화권인 한중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라는 논지로 글을 발표하니 여러 학자들이 반응을 보이며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날 학회에서 발표된 글 중 특히 관심을 끈 글은 옌볜과학기술대 이승율 부총장의 글이다. 이 부총장은 남북관계 전개과정에서 조선족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남북관계의 진전은 남북한과 주변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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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에게 보내는 밀가루는 평화의 시작 지면기사
최근 탈북 여성들에 대한 특집기사가 언론에 등장했다. 탈북여성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성매매 여성으로 상당수가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슬프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이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온 것은 딱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사라지고 1994년 이후부터 발생한 대규모 홍수로 인하여 북한의 농토는 거의 궤멸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북한의 경제는 참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굶어서 뼈가 앙상한 어린 아이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남쪽의 국민들 중에 북한 어린이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법륜 스님은 북한에 다녀와서 300만명이 굶어 죽은 것이 사실이라며 북한 주민들을 살리기 위하여 남쪽의 동포들이 적극적으로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북한의 주민들이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실제 그 정도의 상황까지 갈 정도의 고통스런 세상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북한의 어린이와 노인들, 아니 북한 주민 전체를 돕기 위해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그들과 함께 하여야 한다.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고, 의료기기와 약품이 없어서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분단이 되어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형제들이 굶주리고 아파서 신음을 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죄악이기 때문이다.북한에 쌀과 밀가루를 보내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인도적 차원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위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간에 불신이 없어야 평화가 정착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지 않으면 신뢰는 쌓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북한에 식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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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지면기사
겨울은 잔혹의 계절이기도 하고 축복의 계절이기도 하다. 2011년 겨울은 내게는 축복의 계절인 것 같다. 엘리엇은 "한겨울의 봄은 독자적인 계절이다/ 해거름에 축축하지만 영원하고,/ 극지와 열대 사이 시간 속에 정지된 계절이다"라고 했다. 한겨울의 봄은 실제의 계절이어서 해질 무렵이면 축축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로 인해 그 자체가 독자적인 계절이 되며, 마치 이 세상의 계절 같지 않은 영원한 계절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게 이 겨울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과거를 고스란히 되돌려 놓았기에 이를 통해 과거의 '나'를 확인하게 되고, 그 순간 시간은 '정지'되어 마치 영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거의 40년을 만나지 못했던 소중한 친구를 최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사실은 그냥 친구 정도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연애하듯 늘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하얀 얼굴에 선한 눈을 가진 그 친구는 어느 날 홀연히 외국으로 가버렸고 그 이후로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망각의 강 속으로 서서히 흘러들어가 버렸던 것 같다. 예기치 않았던 해후의 충격은 필자로 하여금 기억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후 두어 차례 더 만나는 동안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의 편린들이 서서히 의식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오히려 상대가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대화는 마치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았다.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수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변화란 삶의 필연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변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우리 내면에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과거를 환기시켜주는 아주 작은 실마리만 주어져도 우리는 곧바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고, 동시에 과거의 특정한 경험의 의미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즐겨 불렀다던 맷먼로의 워커웨이(Walk Away)나 낫킹콜의 투영(Too Young) 등 주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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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갈등, 그 끝은? 지면기사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할머니는 10여년을 혼자 지내셨다. 산골 외진 마을을 들를라 치면 반가워 하기에 앞서 입버릇처럼 되뇌이시던 말씀이 있었다. '아가, 너는 늙지 마라. 늙으면 서러운 게 참, 많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 며느리와 불편함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완고한 편이셨다. 신식교육을 받은 며느리들을 항상 못 미더워 하셨다. 한 30년 터울로 세대를 느끼던, 그 시대에도 갈등은 있었다. 단지 담장을 넘지 않고 안에서 삭였다. 주말에 만난 유명 제약회사 사장으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지난 여름, 수도권 책임자들 회식 자리에서 '6월이 되면 맨 처음 생각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단다. 당연히 6·25 전쟁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40대가 태반인 팀장들의 답은 '6·10 항쟁'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아쉬운 대로 공감이 되더라고 했다. 그런데 30대 후반 팀장들의 대답을 듣고서는 '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더라는 것이다. '붉은 악마의 월드컵 길거리 응원'. 세대간 감성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광장의 축제는 하늘과 땅이다. 우리사회가 준비에 게을렀을 뿐, 세대 갈등은 이미 예고되어온 터다. '20~30대의 반항'이니, '40대의 반란'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어찌 보면 붉은 악마 옷을 입고 광장으로 뛰쳐나왔을 때부터 갈등의 골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동네 골목에서 뛰놀던 그 당시 40·50대에게 광장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러나 애써 예쁘게만 보고, 기성의 가치를 거기에 이식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 '세상 물정' 모르는 것으로 치부했던, 열린 공간의 젊은이들이 10·26 서울시장 보선에서 목청을 높인 것이다. 동력을 잃은 기존 정치를 향해 자신들의 의지와 분노를 표로 분출한 것이다. 20~40대와 50·60대는 소통의 방식부터 극명하게 나뉜다. 50대는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다. 구시대의 막내쯤 된다. 40대는 '최초의 디지털 세대'로 신세대의 맏형 격이다.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스마트 폰에도 익숙하다. 종이 신문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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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마을 사람들의 귀향 지면기사
중국 지린성 류허현(柳河縣)에는 경기도의 마을 이름을 붙인 '경기툰(마을)'과 '가평툰'이 있다. 그곳에는 경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난 10월에 그곳에서 만난 서덕환 할아버지는 올해 84세로 수원 비행장 옆에 살다가 1940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지금까지 70년간 경기툰에서 살고 있는 분이다. 서 할아버지는 쩡쩡한 목소리로 젊었을 때 자신이 경기툰을 이끌어 왔다면서, 남자는 술을 잘 마셔야 한다며 대낮부터 술을 권하였다. 평택 출신의 최봉화 할아버지는 86세 나이인데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고향을 평택시 포승면 석정리 검은 돌 마을이라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1940년대 초 일제는 만주에 가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으며 땅과 집을 주겠다고 조선인들을 회유하여 약 5만여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경기툰은 1941년 수원사람 25호와 평택사람 25호가 집단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로 서로 다른 두 지역에서 왔으나 한 마을에 정착하였기에 굳이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경기툰이라 마을 이름을 정했다. 가평툰은 1943년 가평 사람들이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이외에 광주·용인 등지의 사람들도 집단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1945년 해방 후 다른 마을은 해체되었으나 경기툰과 가평툰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주 초기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경기툰 사람들은 강한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지역 사람이 경기툰으로 이주해 오려면 마을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행정당국에 등록된 60호 중 한족 3~4호를 제외하면 모두 조선족이다. 그런데 그 중 조선족이 살고 있는 집은 16호 정도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빈집이다. 남아있는 마을 사람도 노인과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며 청년과 아이들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떠난 이들은 대부분 한국에 돈을 벌러 갔다고 한다.지린성을 포함한 중국의 동북 3성에는 한때 조선족이 200여만 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50여만 명으로 줄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에 와서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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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자연·문화유산 세계복합유산으로 지면기사
지난 11월 2일 연천군의 명예군민이 되었다. 연천의 상징이 된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아슐리안형석기 모양의 기념패에 필자가 연천의 명예군민이 되었음을 알리는 글귀가 선명하게 있었다. 평생을 수원에서만 살아온 필자가 연천의 명예군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 인연이 연천과 끈을 주어서인지 군수님께서 직접 필자가 명예군민임을 선포하시고 연천 공직자들에게 박수를 부탁하셨다. 참 기쁘기 그지없었다.필자는 약20년전부터 우리 역사의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기 시작했었다. 그 과정에서 찾은 곳이 연천이었고, 연천의 자연환경과 다양한 문화유산에 감동과 슬픔이 교차했었다. 연천역의 급수탑과 끊어진 경원선 대광리역에서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보았고, 경순왕릉과 숭의전에서 힘없는 나라의 슬픔을, 미수 허목 선생의 묘소에서 조선후기 실학의 태동을 느꼈으며,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우리 민족의 문명이 세계 수준에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자부심을 느꼈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 한반도의 중심이자 향후 통일코리아의 중심이 될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연천 답사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천을 어떻게 하면 문화적으로 혹은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띠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았다. 그런 고민속에서 새롭게 보였던 것이 바로 '적벽(赤壁)'이었다. 적벽은 흔히 지리적 표현에 의하면 추가령구조곡에서 발생한 강변의 암벽이다. 용암줄기가 한반도 중심부를 지나가며 형성된 추가령구조곡에 한탄강과 임진강이 연결되었고 자연스럽게 적벽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정도의 표현으로 적벽을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적벽은 우리 자연유산 중에서도 그 수위를 정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필자는 저토록 아름다운 자연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은 바로 세계복합유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유산'은 유네스코 산하의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유산인데, 이 유산에는 '세계문화유산', '세계자연유산', '세계복합유산'이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