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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추나무골 조원시장의 나눔 이야기

    대추나무골 조원시장의 나눔 이야기 지면기사

    수원의 북쪽에 조원시장이 있다. 조원동은 대추나무골로 불리는 동네로 조선시대부터 조상님들에게 지내는 제사의 제수중에서 대추는 수원의 조원동 대추가 최고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정조대왕이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아버지의 제사를 위한 대추를 마련하기 위해 풍수적으로 좋은 이 마을에 대추나무를 심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이 마을의 입구에 그리 크지 않지만 정감이 가는 시장이 몇 십년 전부터 자리잡게 되었다. 마을 이름이 조원동이니 당연히 마을 시장 역시 조원시장이라고 했다. 조원시장이 전통시장으로 지정을 받은 것은 몇 년 전이다. 시장으로 인가를 받아 장사를 한지는 꽤 되었지만 정식으로 전통시장 인가를 받은 이후부터 시장 상인들의 노력은 남달랐고 그래서 전국적으로도 안정된 시장으로 정평이 나있다.그런데 이 시장은 일반적인 시장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이 마을에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강의하러 갔다가 조원시장 사람들을 만나고 반해버렸다. 시장 사람들이 장사를 해서 얻은 이익을 지역 주민들을 위해 환원하는 나눔과 베품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가진 사람들은 거꾸로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이다. 그런데 조원시장 상인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조원시장 상인회 회원분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상인은 이익을 얻기 위해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얻기 위해 장사를 한다는 의주상인 임상옥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생을 하며 얻은 이익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의 주민들을 위해 사용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시장 상인회에서 지역의 불우 이웃을 돕기 위해 흔쾌히 기금을 내어 놓는다. 상인회를 이끌고 있는 상인회장은 연간 600여만원의 쌀을 주민자치센터에 기부하고 있다. 이뿐 만이 아니다. 이들은 상인회에서 김장을 하여 저소득 지역 주민을 위해 나누어주고,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참

  • 흑룡의 해와 여의주

    흑룡의 해와 여의주 지면기사

    '점을 하나 찍으세요'. 오랜만에 붓글씨로 '용(龍)'자를 써서 새해 연하장을 만들고 있는 자기 남편에게 선배가 한 말이다. '용(龍)'자 옆에 점을 콕 찍어 여의주를 만들어주라는 조언을 하는 바로 그때 필자가 우연히 새해 인사차 전화를 한 것이다. 휴대전화에 찍힌 '김구슬'을 보며, "이건 '금구슬' 아니야? 그럼 바로 이게 여의주잖아." 부부는 때마침 걸려온 필자의 이름을 보며 신기해하면서 '점'을 찍었다고 한다. 며칠 후 약 2년 만에 만난 선배는 자주 전화도 하지 않는 내가 바로 그 순간 전화를 준 그 사실을 여전히 신기해하며, '올해는 김선생의 해야'라며 덕담을 아끼지 않는다. 여의(如意)는 '뜻대로', 주(珠)는 '구슬'이므로 여의주는 뜻대로 할 수 있는 영묘한 구슬이라는 뜻이니 성취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는 따뜻한 마음을 전해준다. 무심히 지나갈 수 있는 작은 것에서도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소설가 특유의 섬세한 직관과 통찰에 나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또한 용이라고 하면 여의주가 핵심인데 요즘은 왠지 '화룡점정'에만 치우치고 있으니 핵심을 제대로 못 보고 있다는 불만 섞인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완결성을 강조하는 화룡점정의 실용주의에 밀려 여의주가 함의하는 상상력의 힘이 약화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스쳐갔다.내친 김에 설날 아침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용 전시회를 보러 갔다. 용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동물이다. 장자는 기(氣)를 우주와 생명을 주재하는 천지의 근원이자 도덕성과 관련된 것으로 본다. '장자'의 '천운'편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용은 천지의 정기가 모이면 용의 모습을 취하고, 천지의 정기가 흩어지면 아름다운 색채가 되어, 불가사의한 변화를 하며, 더욱이 구름을 타고 청담주야(晴曇晝夜)의 변화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용을 '천지의 정기'가 모인 조화와 융합의 원리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용을 물의 신으로 보아 농민들은 풍작을 기원하는 기우제를 지내고 어부들은 풍어를 위해 용왕제를 지낸다. 용을 물

  • 설날 아침, 고향을 나서면서

    설날 아침, 고향을 나서면서 지면기사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이문열씨가 쓴 중편 소설이다. 27, 28년 전 읽었는데도 기억이 또렷하다. 옛 고향이 지닌 수백 년 자취와 정취가 흐릿해지고, 사람들의 관계가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정밀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산골이 고향인 나로선 저절로 이입이 되는 대목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뒤로부터 이어진 고향나들이 때마다 알게, 모르게 소설이 남긴 흔적을 떠올리곤 했다. 나에게도 역시 고향집은 머무는 안식처가 아니라, 몸만 잠시 들르는 곳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올해도 엷어진 마음이 되돌아오진 않았다. "차가 많이 막힐 테니, 하룻밤 자고 내일 새벽에 떠나지." 뻔히 갈 줄 알면서도 아버지는 잊지 않고 이 말씀을 또 하셨다.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른다. 허겁지겁 떠나는 아들의 뒷모습에 대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지가…. 서둘러 출발해봐야, 고속도로 위에서 시간을 다 보내게 된다는 사실을 익히 안다. 도시 집에 가봐야 뾰족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어김없이 도로 위에서 하루의 절반을 보냈다. 정녕 고향 길은 이제 효도의 자기위안이며 어린시절을 잠시 되살려보는 인사치레에 머무는 것일까.이렇듯 우리는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 장례문화도 바뀌고 있는 터여서, 고향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명절 귀성길 정체가 기억으로만 남을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온다. 급속한 도시화가 불러올 변화된 풍속도이다. 느림의 여유를 찾기 어려운 도시생활과, '나아가지 않으면 그건 퇴보'라고 믿는 경쟁심리의 발로이다. 또 시댁의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음이리라. 자식들 키우느라, 겨우 논밭 몇 마지기로 남은 장수사회는 며느리의 입김을 크게 만들어 놓았다. 갈수록 딸 하나 뿐인 장모의 눈치도 살펴야할 세태이다.여기에 고향은 해마다 아쉬움이다. 옛 추억의 자리에는 지방자치단체의 산뜻한 개발계획과 편리한 시설들이 대신 메우고 있다. 지난해에는 마을회관 앞 느티나무가 여럿 사라지고 회관 건물이 새롭게 단장을 했다. 지지난해 새로 난 도로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놀았던 정자가 세워져 있던 터다. 지천(支

  • 역사와 이야기가 숨쉬는 옛길

    역사와 이야기가 숨쉬는 옛길 지면기사

    의왕에서 수원으로 넘어오는 지지대고개 옆에는 효행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이라고는 하지만 노변에 주차된 차량들 때문에 보행조건이 썩 좋지는 않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고 주말에 광교산을 찾는 등산객들이나 가끔 찾는 곳이다. 그런데 이곳이 춘향전에서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한달음에 달려가던 이야기 속 그 길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우리 주변의 길이, 사실 알고 보면 굉장한 역사적 스토리를 갖춘 길이었던 것이다.오늘날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갖춰져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전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있었다.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영조 대에 간행된 관찬 백과사전인 '증보문헌비고'를 기준으로 하자면 한양에서 전국 각지에 이르는 도로는 크게 9개로 구분되는데 이 모든 길은 반드시 경기도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길을 꼽자면 한양과 충청, 호남, 영남의 삼남지방을 모두 잇는 '삼남대로'를 들 수 있다. 삼남대로는 한양에서 지금의 과천, 수원, 화성, 오산, 평택과 천안, 삼례를 거쳐 통영으로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평택에서 갈라져 충청도로 가거나 삼례에서 갈라져 해남과 제주까지 닿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길은 한양에서 남부 지방을 가장 유기적으로 잇는 도로라고 할 수 있다.근대에 들어 철도와 차량을 위한 길이 생기기 전까지 이 길을 오고간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명멸했다. 여말선초의 정치가 정도전이 나주로 유배를 가면서 정치개혁의 의지를 다졌던 길이 바로 이 길이었고 정조대의 실학자 정약용이 개혁의 좌절을 곱씹으며 강진으로 유배를 갔던 길도 바로 이 길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이순신이 전라좌도에 부임하면서 달렸을 길도 이 길이었고 앞서 말한 춘향전의 주인공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가던 길도 이 길이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가던 길도 이 길이었고 전국의 장돌뱅이들이 장시를 찾아 걷던 길도 이 길이었다.이처럼 길이란 단지

  • 遺物 기증이 지역문화를 바꾼다

    遺物 기증이 지역문화를 바꾼다 지면기사

    한달도 채 되지않은 작년 12월에 안산시에 특별한 일이 있었다. 성호 이익 선생님의 후손이 집안에 소장된 유물을 안산의 성호기념관에 기증한 일이었다. 기증 유물의 내용을 보면 가히 깜짝 놀랄 일이다. 기증된 유물은 이익 선생의 부친인 매산 이하진의 친필 서첩인 천금물전(千金勿傳ㆍ보물 1673호) 10책과 청풍계첩(靑楓契帖), 옥동금 등 167종 366점이다. 유물 감정가로 15억원이 넘는다고 기념관측에서는 이야기하는데 실제 인사동 감정가로 보면 20억원이 넘는 금액이다. 금액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보물로 지정된 천금물전을 소장하고 있지 않고 사회에 기증했다는 것이다. 이는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큰 결단을 내린 이는 경희대학교 이효성 공과대학 학장이었다.이효성 학장의 부친은 안산의 문화계 어른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고 이돈형 박사이다. 성호 이익 선생님의 후손답게 안산을 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셨던 분이다. 경기도향토사연구협의회 모임에서 몇 번 뵈었던 적이 있었는데 서울대학교 치대 교수를 하셨던 이 분이 역사를 전공한 우리보다 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셔서 무척 놀라곤 했었다. 이는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이돈형 박사는 1993년 12월에 성호 이익 선생님의 필사본 '성호사설' 등 집안에서 6대에 걸쳐 집필하고 소장한 자료 800여점, 1천여권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였다. 이러한 자료들이 단순히 여주 이씨 가문의 소장자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그로 하여금 국가에 기증하게 한 것이다. 결국 이 기증으로 국립도서관에서는 성호 이익 특별전을 개최하고 성호 선생님 연구에 한층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후기 실학의 양대 줄기의 하나인 경세치용 학파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돈형 박사의 유지를 받든 이효성 교수 역시 천금물전을 비롯한 가문의 보물을 성호기념관에 기증함으로써 역사 인물 연구와 안산의 문화발전에 새로운 초석을 깔았다.이처럼 지방자치단체의 박물관에 유물을 기증하는 사례들은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필자가 예전 수

  • 꽃배달이요!

    꽃배달이요! 지면기사

    '꽃배달이요!' 좋아하는 분들에게 새해인사차 꽃배달 동영상을 보냈다.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제각기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못해 황홀하다. 동영상의 첫 배경에서 흰 장미가 함초롬히 우리를 꽃의 삶으로 안내한다. 제일 먼저 새빨간 장미가 정열의 꽃잎들을 생동감 넘치게 펼쳐 보인다. 뒤이어 꽃망울을 터뜨리는 노란 수선화, 보랏빛 패랭이, 하얀 백합, 빨간 카네이션, 흰 국화, 노란 해바라기, 진분홍 철쭉에 이르기까지 때론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꽃들의 향연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돌아 나와 생각해보니 그것은 꽃들의 자기실현이었던 것이다. 꽃을 피워내는 장미가 아름다운 것은 장미 스스로에 쏟은 값진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퍼뜩 작은 것이 주는 기쁨을 잊고 살아왔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밀란 쿤데라는 "오직 소설만이 사소한 것의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건만, 아무리 미세한 생명체라도 그 안에는 풀 길 없는 신비가 내재해 있는가보다.평소 존경하던 원로 선생님 한 분이 곧바로 전화를 주셨다. "김선생, 이거 어떻게 된거지? 잘 안열리는데?" "선생님, 비디오 플레이할 때처럼 삼각형 모양을 한번 눌러 보세요." "응, 그래, 그래." 선생님은 잠시 후 다시 전화를 주셨다. "김선생, 이거 너무 멋진데? 감동이야, 감동! 김선생, 이런 거 어떻게 알았어? 정말 좋은데?" 평소 근엄하게만 보였던 선생님이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는 걸 보니 정말 감동을 느끼셨나보다. '그래, 잘했어. 사실 감동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 나오는 거야. 사람들의 마음은 똑같은 거라니까' 혼자 흐뭇해할 새도 없이 연이어 답장 메시지가 쏟아져 들어온다. '향기로운 새해 맞이하시길' '향기가 아주 좋습니다' 등 뛰어난 후각을 자랑하는 감각적 답신에서부터 '보내주신 꽃 비디오 교수님처럼 넘 예쁘네요' 등 아부 내지 격려형 답장, 그리고 '선생님의 귀한 사랑을 받을 자격도 없는데…' 등 자책형 답신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다양한 문자 메시지를 받으며 나의 선택에 내심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 굿바이 김정일, 아듀 2011!

    굿바이 김정일, 아듀 2011! 지면기사

    빛바랜 사진이 있다. 11년 전인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찍은 사진이다. 방북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인민대회당 만찬 대표 취재기자로 갔다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우리 공식 수행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 우연히 끼어들어 찍은 것이다. 대한민국 기자로는 처음이었다. 수행 기자실이 발칵 뒤집혔다. 그때만 해도 단독 사진은 대특종이었다. 역전의 무용담처럼 지금도 아끼고 있는 이유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 사진을 다시 꺼내 보았다. 악수를 하면서 내 명찰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몸집이 아주 통통했다. 부기가 느껴질 정도이다. 배도 많이 나와 있었다.그는 아주 달변이었고, 의전에 거리낌이 없었다. 무엇이든 자기 식으로 했다. 수행원들과 소파에 앉아 '금강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지 않은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도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수행기자가 상대국 정상과 회담장에서 악수를 한다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이제 이 사진도 역사의 뒤 안으로 묻어둬야 한다. 낡은 빛깔만큼이나 흘러간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 김 위원장이 무대에서 영원히 사라졌으니, 지나온 시간의 작은 파편일 뿐이다. 시간의 엄혹함을 다시금 느낀다. 우리 사회가 차분하고, 의연하게 그의 장례를 지켜보는 것도 이런 기록의 힘이다. 싫든 좋든, 우리는 2000년 그가 평양 순안공항에 극적인 효과음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숱하게 보아왔다. 외신을 통해 그의 지치고 병든 모습을 지켜봤다. 국내 언론의 보도로 열차를 타고 움직이는 비밀스러운 그의 동선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의 돌연사는 뇌경색으로 쓰러질 때 이미 예고되어온 터다. 불안과 두려움의 정도가 과거와는 처음부터 달랐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때도 무던하게 견뎌온 우리다. 북한체제의 불가측성에 대한 내성을 스스로 쌓아온 것이다.이렇듯 2000년 이후 남북관계의 주역들을 역사의 저편으로 모두 떠나보냈다. 정상회담을 했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김 위원장까지 떠났다. 정상회담의 공과는 물론 있을 것이다. 미화한다고 치부가 감춰지진 않는다. 분명한 것은 김대중

  • 게르만 민족이동에 비견되는 조선족의 이동

    게르만 민족이동에 비견되는 조선족의 이동 지면기사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시점에, 주말에 열린 학회 참석차 일본 교토에 있었다. 일본과 중국의 조선족 연구학회, 한국의 재외한인학회,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대학이 공동으로 '한중일 협력시대의 코리안'을 주제로 개최한 학회였다. 학회에는 필자처럼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학자, 일본에서 활동 중인 조선족 학자, 재일동포학자, 브라질 이민 출신 학자 등 한국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성장 배경이 달라 각기 다른 정체성을 지닌 학자들이 모여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도 벌였다. 학회에 참석한 학자들은 한중일 협력을 위해 조선족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한국인 중 상당수가 아직도 조선족 하면 힘든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을 떠올리고, 다문화 정책을 담당하는 공직자들조차도 이러한 인식에서 머물러 있는 현실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지금 조선족 중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전문분야에 진출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고,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점차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 5월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을 차지한 중국 옌볜 출신 가수 백청강도 그 중 한 명이다. 지금 중국은 문화산업을 중요한 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과 중국 간의 경제 교류에서 문화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학회에서 경기도의 역사문화자원의 활용 현황 및 가치에 대한 글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유학을 리더십, 환경, 자본주의와 같은 현대적인 키워드로 재해석하는 경기문화재단의 작업을 소개하고, 유학을 우리 시대 새로운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같은 유교 문화권인 한중일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라는 논지로 글을 발표하니 여러 학자들이 반응을 보이며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날 학회에서 발표된 글 중 특히 관심을 끈 글은 옌볜과학기술대 이승율 부총장의 글이다. 이 부총장은 남북관계 전개과정에서 조선족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남북관계의 진전은 남북한과 주변 여러

  • 북녘 동포에게 보내는 밀가루는 평화의 시작

    북녘 동포에게 보내는 밀가루는 평화의 시작 지면기사

    최근 탈북 여성들에 대한 특집기사가 언론에 등장했다. 탈북여성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성매매 여성으로 상당수가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슬프기 그지없었다. 그녀들이 고향을 떠나 남한으로 온 것은 딱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것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북한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사라지고 1994년 이후부터 발생한 대규모 홍수로 인하여 북한의 농토는 거의 궤멸 수준에 이르렀다. 그 결과, 북한의 경제는 참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굶어서 뼈가 앙상한 어린 아이들이 속출하게 되었다. 남쪽의 국민들 중에 북한 어린이들의 참혹한 모습을 보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법륜 스님은 북한에 다녀와서 300만명이 굶어 죽은 것이 사실이라며 북한 주민들을 살리기 위하여 남쪽의 동포들이 적극적으로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변하기도 했다. 북한의 주민들이 300만명이 굶어 죽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이겠지만 실제 그 정도의 상황까지 갈 정도의 고통스런 세상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북한의 어린이와 노인들, 아니 북한 주민 전체를 돕기 위해 식량을 지원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그들과 함께 하여야 한다. 어린이들이 먹을 것이 없어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고 있고, 의료기기와 약품이 없어서 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분단이 되어 있지만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이다. 형제들이 굶주리고 아파서 신음을 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나누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죄악이기 때문이다.북한에 쌀과 밀가루를 보내는 것은 낭비가 아니다. 그것은 인도적 차원을 넘어 평화와 통일을 위한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서로간에 불신이 없어야 평화가 정착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지 않으면 신뢰는 쌓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북한에 식량을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지면기사

    겨울은 잔혹의 계절이기도 하고 축복의 계절이기도 하다. 2011년 겨울은 내게는 축복의 계절인 것 같다. 엘리엇은 "한겨울의 봄은 독자적인 계절이다/ 해거름에 축축하지만 영원하고,/ 극지와 열대 사이 시간 속에 정지된 계절이다"라고 했다. 한겨울의 봄은 실제의 계절이어서 해질 무렵이면 축축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로 인해 그 자체가 독자적인 계절이 되며, 마치 이 세상의 계절 같지 않은 영원한 계절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게 이 겨울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뻔했던 과거를 고스란히 되돌려 놓았기에 이를 통해 과거의 '나'를 확인하게 되고, 그 순간 시간은 '정지'되어 마치 영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 같다.거의 40년을 만나지 못했던 소중한 친구를 최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사실은 그냥 친구 정도가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연애하듯 늘 붙어 다니던 친구였다. 하얀 얼굴에 선한 눈을 가진 그 친구는 어느 날 홀연히 외국으로 가버렸고 그 이후로 우리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들은 망각의 강 속으로 서서히 흘러들어가 버렸던 것 같다. 예기치 않았던 해후의 충격은 필자로 하여금 기억의 의미를 찬찬히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후 두어 차례 더 만나는 동안 잊혀졌던 과거의 기억의 편린들이 서서히 의식의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자신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을 오히려 상대가 더 잘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대화는 마치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과도 같았다.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수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변화란 삶의 필연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변화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무엇인가가 우리 내면에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현재적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과거를 환기시켜주는 아주 작은 실마리만 주어져도 우리는 곧바로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고, 동시에 과거의 특정한 경험의 의미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내가 즐겨 불렀다던 맷먼로의 워커웨이(Walk Away)나 낫킹콜의 투영(Too Young) 등 주로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