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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바로알기, 연천의 미래를 바꾼다 지면기사
동두천역에서 출발하는 경원선을 타고 연천으로 들어서다보면 너른 들판과 개천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동두천 일대의 미군기지와 여타의 군부대들이 아직도 한반도의 냉전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긴 하지만 그래도 한강 북부지역의 아름다움은 감동이었다.경원선을 타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연천군청의 요청으로 연천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기 위해서였다. 연천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필자가 연천을 가게 된 것은 어찌보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천과의 인연은 우리 산천과 문화유산 답사를 좋아해 연천 일대를 꽤나 많이 돌아다니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보니 연천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우연한 자리에서 지인들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하다가 연천군청의 강의 요청을 받게 됐다.연천군청이 필자를 포함해 '연천군 바로알기'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연천을 만들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한편으로는 경기도의 대부분 지자체들이 날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연천이 소외되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현지에서 근무하는 공직자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공직자들의 의식과 변화는 지역의 발전과 절대 무관할 수 없다. 필자가 지금은 대학에 근무하지만 몇 달 전까지 수원시청에 소속된 공직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역이 변하기 위해서 공직자가 변해야 하고 공직자가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시작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듯이 자기가 사랑하는 지역의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그 이전과 달리 더욱 헌신하며 공직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주 단순한 논리인 것 같지만 실제 이는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된다.연천의 역사와 문화 강의 내용에서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라 짧은 소견으로 연천의 미래 역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천은 엄청난 미래가 예고되고 있다. 연천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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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에서 뱀은 친숙한 존재였다 지면기사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그동안 미루어왔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를 다녀왔다. 앙코르 와트는 19세기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밀림 속에서 발견한 유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앙코르 와트로 떠나면서 궁금했던 것은 그 위대했던 문명이 어떻게 한 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는가, 그리고 비록 폐허가 되었겠지만 꽤 큰 도시인데 외국인에게 발견될 때까지 사람이 전혀 살고 있지 않았을까 였다. 앙코르 와트 유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15세기이다. 앙코르 와트 유적 주인공은 앙코르 왕국이다. 왕국은 9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번창하였으며, 앙코르 왕국의 대표적 유적인 앙코르 와트는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만명의 기술자가 참여하여 만든 거대한 사원이다. 해자를 포함한 동서의 길이는 1천500m, 남북은 1천300m이며 넓이는 210㏊로 약 198만㎡에 달한다. 사원 주위에 해자가 있어 앙코르 와트 사원은 거대한 저수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전성기 앙코르 왕국의 인구는 100여만명에 달하였다 한다. 1432년 앙코르 왕국은 이웃한 타이 시암족의 침략을 받았다. 시암 족은 앙코르 왕국의 무희 압사라와 왕국의 신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사원을 포함하여 도시 시설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남아 있던 앙코르 왕국 사람들은 수리 시설이 파괴되어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가 없어 앙코르를 떠났고, 앙코르 유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침략하던 19세기에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이곳을 찾았다. 이 때 앙코르 유적 주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프랑스 박물학자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앙코르 와트를 조사한 후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프랑스 박물학자가 앙코르 와트를 세상에 알린 것은 맞으나 그가 발견했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으로 서술한 세계사 교과서가 생각났다. 앙코르 와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앙코르 와트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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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표기와 작은 풀꽃 지면기사
국내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인체의 곡선에 대한 한국인 특유의 섬세한 이해와 해석을 주무기로 한 한국 디자이너들의 독창적인 행보는 한류열풍에 새로운 불을 지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한류열풍이 뜨거운 다른 한 편에는 반(反)한류의 차가운 물결도 거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류열풍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일본 도쿄에서 극우파들이 주도하는, 한류 드라마 방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트위터에서는 반한류를 외치면서 한류 드라마를 비판하는 논쟁이 뜨겁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미묘한 역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한류열풍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이 세계지도 제작의 표준이 되는 해도(海圖)를 만드는 곳인 국제수로기구(IHO)에 동해(East Sea)를 일본해(Sea of Japan)로 단독 표기하는 것을 지지하는 서한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어 미 국무부는 9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일본해'를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이 82년간 유지해 온 '일본해' 표기의 기득권을 바꾸기 위해 그간 우리 정부가 제대로 노력해 왔는지 의심하는 눈길이 따가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는 18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서 발간된 세계지명사전에 동해를 '한국해'(Sea of Corea)로 표기한 중요한 역사적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고 난 다음에야 야단스럽게 소동을 벌이는 한국식 대응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7월 15일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퇴계학회에 참석한 바 있다. 21세기에 무슨 16세기의 고전적 학자 퇴계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필자 역시 퇴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퇴계가 지닌 현대적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퇴계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지 30년을 넘기면서 일본, 대만,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홍콩 등의 세계적 학자들이 대거 퇴계학에 관심을 가지자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 사상의 핵심은 일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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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과 김문수 지면기사
정치적 라이벌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얽혀 있다. 일반인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앙금 같은 것, 자기는 갖지 못한 특장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 끝없는 견제…. 이런 것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기 마련이다. 범부들의 눈높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 관계이다. 죽음의 시간 까지 경쟁했던 미 대통령 애덤스와 제퍼슨, 우리의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도 라이벌군에 속한다. 한국정치를 30년 넘게 재단했던 YS와 DJ 역시 대표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경쟁과 협력을 반복해온 두 사람의 정치역정을 긍정과 부정, 어느 한쪽으로만 평가하긴 어렵다.송영길 인천시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라이벌로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의원'을 꼽은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정치 여건상 그럴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라이벌은 말로, 희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라이벌, 그 자체가 역사적 맥락이고 궤적이다. 나이와 정치적 위상, 야망이 엇비슷하다고 해서 라이벌이 될 수는 없다. 그건 전당대회장에서 격돌하는 한 때의 경쟁관계일 뿐이다.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까지는 못된다. 라이벌은 오랜 시간 정치 현장에서 함께 하고, 오랜 기간 국민의 희망이어야 한다.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는 정치적 라이벌이 될 수 있을까. 긴 정치적 경쟁과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조건은 좋다. 사법고시를 거쳐 잘나가는 변호사 출신으로 정치권의 영입 대상 1호였던 오 시장은 흔히 말하는 '꽃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젊은 날, 노동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르고 민중당을 거친 김 지사는 말 그대로 '가시밭길' 인생에 가깝다. 96년 15대 총선 때 YS에 의해 나란히 국회에 입성했고, 같은 모임에서 활동도 했다. 여야가 사활을 걸고 싸우는 서울시장과 경기지사의 정치적 파괴력이 어디 여느 보통 자리와 같은가. 대중성과 단박에 주자로 도약할 정치적 위상을 어느 정도 갖췄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은 수도권을 대표하고, 또 한 사람은 대구·경북 출신으로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있는 점도 맞수로서 호조건이다. 50대 초반과 후반으로 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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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영혼의 눈물과 우리의 죽음 지면기사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100년 만의 폭우라고. 대통령도 그렇게 이야기하셨단다. 내가 서울에 53년을 살면서 이렇게 비가 내린 것은 처음이라고. 맞다. 100년 만에 가장 많이 내린 비이기도 하고, 근 반세기만에 서울에서 내린 가장 많은 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내렸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환경론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동으로 한반도가 아열대지대로 변하고 있어 장마가 아닌 우기의 시대가 와서 비가 많이 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 실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닌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렇게 엄청난 비가 내린 것은 우리들의 생명에 대한 무관심과 천대 때문이다. 이 끊임없이 흐르는 비의 정체는 눈물이었다. 속절없이 죽음에 이른 수많은 생명들의 저주의 눈물이었다. 그들의 영혼이 구천에서 떠돌다가 마침내 분노와 슬픔을 드러내며 미친 듯 울고만 눈물이 바로 이 비였다.2011년 한반도는 근 100년 만에 가장 끔찍한 일이 발생하였다. 올해 초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인해 무려 600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어 인간이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에 매몰되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구제역에 걸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인간의 육식에 대한 욕망이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고 우리에 가두어 비정상적인 음식을 먹게 했기에 구제역이 발생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이른 것이다.그들을 구덩이로 몰아넣을 때 최소한의 양심도 없었다. 마취제라도 맞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죽은 그들은 차라리 나은 죽음이었다. 그런데 가축 마취제가 떨어졌다고 그냥 구덩이에 묻혀진 생명체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생명체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우리가 이런 악독한 인간들이 아니었는데 그런 일을 하고 말았다.우리 민족은 정말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과거 백정들이 소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스님이 오셔서 독경을 하고 염불을 외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를 그저 농사일을 도와주는 가축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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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부활과 수원의 미래 지면기사
나혜석의 생가 터가 있는 수원 행궁동 동사무소 강당에서 지난 22일 오후 제1회 나혜석 학술상 시상식이 열렸다.그는 1896년 4월 수원에서 태어나 1913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조선 최초의 여성 화가였으며 1917년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한 최초의 여성 작가이기도 했다.1919년 3월 조선독립운동 당시에는 여기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생의 전반부에는 조선 최고의 명망가였다. 그러나 1930년 남편과 이혼한 이후 그의 삶은 비극적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비참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특히 그가 1934년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 당시 조선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일대 사건이었으며 정조를 유린한 대가를 요구한 '위자료 청구사건'은 사회적 관습에 굴하지 않는 그의 불꽃 같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파격적인 일이었다.나혜석의 찬란한 예술적 성취는 그가 불러일으킨 파란과 비참한 몰락으로 인해 망각의 저 편으로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망각의 어둠 속에서 나혜석의 삶과 예술을 최초로 부활시킨 것이 이번 학술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구열 선생의 평전 '에미는 선각였느니라'였다. 1974년 간행된 이 책은 나혜석에 대한 본격적인 평전으로서 이후 나혜석 연구의 길잡이가 되었다.이후 나혜석은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나 그가 생전에 염원했던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나혜석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던 시기에 이번 최우수 학술상 수상자인 서정자 교수는 작가로서 나혜석의 작품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선구적 업적을 축적했다.서 교수는 1988년 처음 나혜석의 단편 소설 '경희'를 발굴한 것은 물론 그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2000년 나혜석의 예술적 업적을 총망라한 '정월 나혜석전집'을 발간하여 최초의 여성 작가로서 나혜석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 나혜석의 본격적인 부활은 기념사업회를 이끈 유동준 회장의 열성적인 노력에 힘입고 있지만 수원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수원시가 미래지향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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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融複合)장르로서의 문학 지면기사
과학기술의 발달이 문화의 흐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문화 분야 전문가들조차도 과학기술의 변화에 둔감하다. 불황과 호황을 동시에 겪고 있는 최근 한국 출판계를 바라보고 있으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종이책 출판계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 그리고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같은 베스트셀러를 출판한 출판사들도 불황을 비껴가지 못하고 부도를 내고 있다. 출판계는 불황의 첫 번째 원인으로 아이패드, 스마트 폰 같은 IT 기기의 대중화를 꼽고 있다. 그런데 전자 출판은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교보문고의 경우 올해 상반기 전자책 매출은 전년 대비 64% 늘어났다. 지난달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전자책 이용 현황을 조사해 보니 전자책 이용자가 작년에는 조사 대상의 23%였으나 올해에는 51%로 두 배 이상 늘었고, 전자책에 대한 만족도도 58%에서 79%로 크게 늘어났다. 시민들은 만족한 가장 큰 이유로 휴대하기 편리한 아이패드, 갤럭시 탭, 스마트 폰의 출현을 꼽고 있다. 같은 IT 기기의 대중화가 한 쪽에는 불황, 다른 쪽에는 호황을 가져다주었다. 독자들이 휴대하기 편리한 단말기가 보급되지 못한 점이 전자책이 보급되지 못한 요인이었는데, 스마트 기기의 대중화가 이 불편을 해소해 주었다종이책 출판의 불황과 전자책 출판의 호황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2000년 전후 디지털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많은 이들은 신문, 책과 같은 인쇄매체가 사라지고 인터넷 신문, 전자책과 같은 디지털 매체 시대가 올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러나 인쇄 매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주요 매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자 이러한 예견은 잘못된 예견으로 치부되었다. 2007년 아마존 닷컴이 킨들이라는 휴대용 전자책 단말기를 출시하면서 미국에서는 전자책이 빠른 속도로 공급되기 시작하고, 한국에서 스마트 폰이 출시되어 스마트 기기의 대중화가 시간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도 출판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전자책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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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행보를 보는 핵심 관전포인트 지면기사
'중국인들이 오고 있다', Chinese are coming, 얼마 전 영국 BBC 방송을 보니 이런 주제를 놓고 대담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다. 중국이 이제 전 세계인들의 관심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앞날에 대해 음양오행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현재 미국과 여타 서방세계는 은근히 중국을 한 번 자빠뜨려볼 생각을 하고있다. 이 정도에서 한 번 견제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어렵겠다는 생각, 그거야 '현실 국제정치'에서 당연하다 하겠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다지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만일 날카로운 잽이 멋지게 성공한다 해도 뻗어가는 중국의 기세를 근본적으로 봉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은 이미 과거 일본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사례를 지켜보면서 미국의 공세, 특히 경제공세에 대해 많은 연구와 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우선 중국이 외환시장과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하지 않았다는 점만 봐도 중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더하여 중국은 최근 들어 금리인상을 통해 경기를 조절하고 있고 덩달아 증시도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시장만 고가권에 있을 뿐 종합적으로 과거에 비해 낮은 수준에서 유지해가고 있다. 줄여 말하면 상대의 주먹을 막아내기 위해 '가드'를 철저하게 올리고 있는 중국이다. 중국의 운세로 볼때 중국의 위상은 더욱 높아져서 2018~2023년중 무술(戊戌)년부터 2023년 계묘(癸卯)년까지의 5년 동안 그 기세는 가히 전 세계를 진동하게 될 것이라 본다. 따라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금년과 내년밖에 없다고 본다. 그러나 중국이 서구식 데모크라시를 시도하지 않는 한, 그리고 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하지 않는 한 중국에 대한 견제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우리로서는 중국에 대한 미국과 서구의 견제가 먹혀도 골치 아프고 그렇지 않아도 길게 보면 좋을 것이 없다. 만일 중국에 대한 견제가 성공하면, 다시 말해 중국 경제를 한 번 크게 흔들어 놓는데 성공한다면 그 악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처지인 셈이고, 그냥 중국이 이대로 순항한다면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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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 위로 강 바람은 불고 있는데… 지면기사
학문과 인생의 대선배 부부와 저녁을 한 뒤 늦은 귀갓길. 지하철 유리벽의 시 한 편이 가슴에 와 꽂혔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중략)…/ 연(蓮)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미당 서정주의 시 '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였다. 시의(詩意)의 깊이를 헤아리진 못했다. 그냥 좋아서 여러 대의 지하철을 지나친 채 한참을 서서 외웠다.미당의 시 '연꽃…'에 발길이 잡힌 것은 얼마 전, 남양주 예봉산과 운길산 하산 길에 들른 양평 세미원(洗美苑) 때문이었던 것 같다. 두물머리(양수리) 강가 정원은 연꽃의 화해(花海)였다. 아직 만개하기엔 이른 철이었지만, 빗속에 핀 연꽃은 멀리 물안개 자욱한 북한강과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미당의 말년은 일제 말엽의 친일 행적으로 고달팠다. 작고할 때까지 30년을 살았던 서울 관악구의 봉산산방(蓬蒜山房)이 헐릴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다. 지자체의 도움으로 원형을 유지했지만 미당의 삶 자체가 화해와 통합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날 선배 부부와 저녁 자리에서는 지난달 초 돌아가신 김준엽 선생과의 인연이 화제에 올랐었다. 중국 대학들을 함께 둘러본 기억이었다. '중국 지도층 인사들이 얼마나 열렬히 환영하고 극진히 모시던지, 항일 투쟁에 대한 존경심같은 것이 느껴졌다'고 했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가 중경 임시정부로 탈출한 6천리 길의 신산했던 김준엽 선생의 여정은 자전적 독립운동사인 '장정(長征)'에 오롯이 남아있다. 항일과 민주화, 권력에 대한 선생의 초연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뚝 서기에 족하다. 비교의 영역이 아니다.다만 우리는 여전히 산행과 저녁식사의 평범한 일상에서조차 항일·친일의 역사와 부딪치며 살고 있다. 광복이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시점에. 언제쯤 진솔한 반성과 사회적 재평가 작업이 마무리되어 '대화해의 시대'는 올 것인가.하기야 최근 KBS 수신료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백선엽 장군의 친일 전력이 도마에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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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의 소통 지면기사
[경인일보=]우리 시대의 최대의 문제가 소통 부재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해법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대책이 없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에 국회의원과 국민 사이에 국민과 국민 사이에 그리고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에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이 한국의 사회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대학 강단에서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가장 되돌아보게 되는 것은 학생들과의 소통이다. 이번 학기 담당 과목 중에 '시창작 기초'가 있었다. 이 시간의 대부분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쓰고 싶은 소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시를 한 편씩 써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학생들을 대학에 보내느라고 뒤에서 고생하는 부모님들을 생각해 보라는 뜻에서였다. 남학생은 어머니에게, 여학생은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로 써보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학생들이 제출한 작품을 읽으면서 학생들이 부모와도 제대로 대화하지 않고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런 경험이 그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갔으니 무사히 졸업하고 취직 잘 하여 인생을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슴 속에 지니고 가급적이면 자녀들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부모들의 태도이고 학생들 또한 간섭 받기를 싫어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런데 한 학생이 다음 시를 제출하였다. "-아빠랑한잔할래/무심한 일곱 글자/한참을 들여다본다//아빠는 매일 새벽 넥타이를 맨다/목숨을 바쳐 일하겠다고 말하는 듯/목넘김이 불편할 때까지 조여맨다/존재하는 그 어떤 짐승도/자기 목에 줄을 매진 않는다//아빠는 매일 새벽 집을 나선다/그 어떤 열기도 빼앗기지 않은 태양에/물소가 질주하듯 달려간다/목구덩이에는 더 이상의 여유가 없는데/아빠는 그것을 허겁지겁 삼킨다//아빠에게 차가운 보름달을 선물한다/이 달은 무거운 끈을 감싸고 /따가운 태양도 끌어안고/온통 다 녹아내린다//아빠와 나는 침묵 속에서/밤새 달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한 잔 두 잔 서로를 다독이는데/얼굴에서 뜨뜻하게 달빛이 묻어났다" (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