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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대 갈등, 그 끝은?

    세대 갈등, 그 끝은? 지면기사

    돌아가시기 전까지, 외할머니는 10여년을 혼자 지내셨다. 산골 외진 마을을 들를라 치면 반가워 하기에 앞서 입버릇처럼 되뇌이시던 말씀이 있었다. '아가, 너는 늙지 마라. 늙으면 서러운 게 참, 많다'. 이러저러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 며느리와 불편함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완고한 편이셨다. 신식교육을 받은 며느리들을 항상 못 미더워 하셨다. 한 30년 터울로 세대를 느끼던, 그 시대에도 갈등은 있었다. 단지 담장을 넘지 않고 안에서 삭였다. 주말에 만난 유명 제약회사 사장으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지난 여름, 수도권 책임자들 회식 자리에서 '6월이 되면 맨 처음 생각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단다. 당연히 6·25 전쟁을 기대하면서. 그런데 40대가 태반인 팀장들의 답은 '6·10 항쟁'이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아쉬운 대로 공감이 되더라고 했다. 그런데 30대 후반 팀장들의 대답을 듣고서는 '어!'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더라는 것이다. '붉은 악마의 월드컵 길거리 응원'. 세대간 감성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 동족상잔의 비극과 광장의 축제는 하늘과 땅이다. 우리사회가 준비에 게을렀을 뿐, 세대 갈등은 이미 예고되어온 터다. '20~30대의 반항'이니, '40대의 반란'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하다. 어찌 보면 붉은 악마 옷을 입고 광장으로 뛰쳐나왔을 때부터 갈등의 골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동네 골목에서 뛰놀던 그 당시 40·50대에게 광장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러나 애써 예쁘게만 보고, 기성의 가치를 거기에 이식시키려 했을 뿐이다. 그 '세상 물정' 모르는 것으로 치부했던, 열린 공간의 젊은이들이 10·26 서울시장 보선에서 목청을 높인 것이다. 동력을 잃은 기존 정치를 향해 자신들의 의지와 분노를 표로 분출한 것이다. 20~40대와 50·60대는 소통의 방식부터 극명하게 나뉜다. 50대는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다. 구시대의 막내쯤 된다. 40대는 '최초의 디지털 세대'로 신세대의 맏형 격이다.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스마트 폰에도 익숙하다. 종이 신문보다

  • 경기마을 사람들의 귀향

    경기마을 사람들의 귀향 지면기사

    중국 지린성 류허현(柳河縣)에는 경기도의 마을 이름을 붙인 '경기툰(마을)'과 '가평툰'이 있다. 그곳에는 경기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난 10월에 그곳에서 만난 서덕환 할아버지는 올해 84세로 수원 비행장 옆에 살다가 1940년 13살의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이주하여 지금까지 70년간 경기툰에서 살고 있는 분이다. 서 할아버지는 쩡쩡한 목소리로 젊었을 때 자신이 경기툰을 이끌어 왔다면서, 남자는 술을 잘 마셔야 한다며 대낮부터 술을 권하였다. 평택 출신의 최봉화 할아버지는 86세 나이인데도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의 고향을 평택시 포승면 석정리 검은 돌 마을이라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1940년대 초 일제는 만주에 가면 배불리 먹고 살 수 있으며 땅과 집을 주겠다고 조선인들을 회유하여 약 5만여명을 집단 이주시켰다. 경기툰은 1941년 수원사람 25호와 평택사람 25호가 집단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로 서로 다른 두 지역에서 왔으나 한 마을에 정착하였기에 굳이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경기툰이라 마을 이름을 정했다. 가평툰은 1943년 가평 사람들이 집단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이외에 광주·용인 등지의 사람들도 집단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1945년 해방 후 다른 마을은 해체되었으나 경기툰과 가평툰만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주 초기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경기툰 사람들은 강한 민족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지역 사람이 경기툰으로 이주해 오려면 마을 회의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현재 행정당국에 등록된 60호 중 한족 3~4호를 제외하면 모두 조선족이다. 그런데 그 중 조선족이 살고 있는 집은 16호 정도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빈집이다. 남아있는 마을 사람도 노인과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며 청년과 아이들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는다. 떠난 이들은 대부분 한국에 돈을 벌러 갔다고 한다.지린성을 포함한 중국의 동북 3성에는 한때 조선족이 200여만 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50여만 명으로 줄었고 이들 중 상당수는 한국에 와서 돈을 벌고 있다고 한다

  • 연천 자연·문화유산 세계복합유산으로

    연천 자연·문화유산 세계복합유산으로 지면기사

    지난 11월 2일 연천군의 명예군민이 되었다. 연천의 상징이 된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출토된 아슐리안형석기 모양의 기념패에 필자가 연천의 명예군민이 되었음을 알리는 글귀가 선명하게 있었다. 평생을 수원에서만 살아온 필자가 연천의 명예군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 인연이 연천과 끈을 주어서인지 군수님께서 직접 필자가 명예군민임을 선포하시고 연천 공직자들에게 박수를 부탁하셨다. 참 기쁘기 그지없었다.필자는 약20년전부터 우리 역사의 숨어있는 이야기를 찾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기 시작했었다. 그 과정에서 찾은 곳이 연천이었고, 연천의 자연환경과 다양한 문화유산에 감동과 슬픔이 교차했었다. 연천역의 급수탑과 끊어진 경원선 대광리역에서 한반도 분단의 비극을 보았고, 경순왕릉과 숭의전에서 힘없는 나라의 슬픔을, 미수 허목 선생의 묘소에서 조선후기 실학의 태동을 느꼈으며,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우리 민족의 문명이 세계 수준에서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자부심을 느꼈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 한반도의 중심이자 향후 통일코리아의 중심이 될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연천 답사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천을 어떻게 하면 문화적으로 혹은 도시 전체가 활기를 띠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보았다. 그런 고민속에서 새롭게 보였던 것이 바로 '적벽(赤壁)'이었다. 적벽은 흔히 지리적 표현에 의하면 추가령구조곡에서 발생한 강변의 암벽이다. 용암줄기가 한반도 중심부를 지나가며 형성된 추가령구조곡에 한탄강과 임진강이 연결되었고 자연스럽게 적벽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정도의 표현으로 적벽을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적벽은 우리 자연유산 중에서도 그 수위를 정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필자는 저토록 아름다운 자연유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결론은 바로 세계복합유산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세계유산'은 유네스코 산하의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유산인데, 이 유산에는 '세계문화유산', '세계자연유산', '세계복합유산'이 있다. 우리나라의 세계문

  • 아이러니의 삶, 잡스

    아이러니의 삶, 잡스 지면기사

    가을 어스름이 내릴 때면 양재시민의 숲으로 나간다. 어제는 석양을 배경으로 노란 은행잎들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니 잠시 축복의 순간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느 길로 걸을까 생각하자니 불현듯 시 한편이 떠올랐다."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지요./ 한 사람이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오래도록 서서/ 덤불 속으로 접어든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지요.// 그러다가 다른 길을 택했지요/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덜 다닌 듯했기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언뜻 보기에 낙엽 덮인 숲길을 걷다가 두 갈래 난 지점에 이르러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에 대한 평범한 경험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선택이 어려운 것은 선택되지 않은 것이 감당해야 하는 숙명적 배제 때문이다.필자는 스탠퍼드 대학 인근 팔로 알토에 산 적이 있다. 최근 잡스의 집이 지척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공연히 친한 이웃이나 되는 듯 더욱 그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2005년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한 그의 연설을 들으면서 필자는 그가 인생이 무엇인가에 대해 독보적인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은 아이러니라는 것이다. 이 연설에서 잡스는 '아이러니'라는 용어를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잡스의 삶은 처음부터 아이러니의 삶이었다. 리드대학을 자퇴하고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어 우연히 서체강의를 듣게 되고, 강의를 들으면서 다양한 글씨들의 조합이 이루는 여백의 미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혀 실제적인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던 이 경험은 10년이 흐른 후 첫 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창조적 빛을 발하게 된다.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가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애플의 역사는 또 어떤가. 20세가 되던 해 부모님의 차고에서 시작된 애플의 역사는 10년 후 잡스 자신이 해고를 당하는 극적 아이러니를 가져왔으나 그는

  • L 형에게

    L 형에게 지면기사

    얼마 전 중국 옌지를 방문하는 길에 백두산 중턱, 해발 1천600m 지점의 숙소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습니다. 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운이 좋아야 천지를 본다는 데, 옌지 국제공항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눈을 만났습니다. 첫 눈을 중국에서 맞은 셈이죠. 흩날리는 눈발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안내자가 "내일 아침이 되어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천지를 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자리했습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산책 겸 나섰더니, 그 사이 거센 바람에 눈발까지 굵어져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새벽, 혹여 하고 밖을 내다보니 온통 눈 천지였습니다. 해발 2천750m 천지로 가는 등산로가 완전 폐쇄되었다는 전갈도 함께 왔습니다. '기왕에 왔으니, 그래도 가보자'는 심사로 숙소를 나섰습니다. 칼바람에 날리는 눈보라 속의 백두산은 처음 대하는 저에겐 경외 그 자체였습니다. 내내 깊은 침묵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고 두꺼운 외투로 중무장한 티베트 승려들 틈에 끼어 1시간 남짓 걸어 장백폭포 부근까지 올랐습니다. 고개를 들기조차 어려운 눈보라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뚫고 좀 더 가까이 마주한 백두산은 장엄하다는 표현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작은 글 솜씨로는 다가서기조차 어려운 어떤 성역이었습니다. 한없는 왜소함에 더없이 낮춰야만 했습니다. L형, 백두가 이럴진대,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는 어떨까요. 제가 히말라야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 초반 수습기자 때입니다. 외신을 통해 들어오는 히말라야 등반 산악인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 하나, 둘 모아 두었다가 한데 묶어 기사로 쓰곤 했습니다. 히말라야 14좌를 처음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를 이 시절에 알았고, 그의 책 '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은 것도 이 즈음이었습니다.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생을 잃고 그 뒤 혼자서 낭가파르바트에 오른 매스너는 '(히말라야에서는) 더 이상 철학이 필요 없다' '고독은 두려움이 아닌 힘이다'고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새롭게 알고, 느끼고 싶어 했

  • 근대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이 사라지고 있다 지면기사

    우리는 전통시대 문화유산에 비해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전통시대 문화유산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 및 광역자치단체가 지정하여 관리하는 지정문화재가 1만1천여개인데 반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관리하는 문화재는 476개에 불과하다. 물론 지정문화재에 천연기념물처럼 자연유산도 있고, 일부 근대문화유산도 포함되어 있으나, 대부분 조선시대 이전의 전통시대 문화유산이다.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관리하는 문화재 수가 적은 것은 문화재 전문가 중 일부의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이해 부족도 이유지만, 한국인들이 한국 근대사를 불행하고도 고통스러운 시기로만 기억하고 있는데 주요한 이유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19세기 후반 한국 근대사가 일제 식민지로 귀결되었기에 이 시기 한국 역사는 명백히 실패한 역사이다. 그러나 19세기는 제국주의시대였다. 아시아 국가 중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는 일본과 터키, 태국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식민지를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의 식민지화가 한국만이 특별히 부족하거나 못나서 겪은 일은 아니었다. 물론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기에 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의 역사 대응은 분명 잘못되었다. 그래서 이를 탓할 수는 있으나, 마치 우리 국가의 대응만이 특별히 잘못되어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자조에 빠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19세기 후반 역사에 대한 평가를 치욕스러운 역사로만 평가해서인지 이 시기가 우리에 남겨준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관리되는 문화재는 극소수이다.20세기 전반기 식민지시대에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많은 독립운동 사적지가 산재해 있다. 필자는 2007년부터 2년간 독립기념관의 의뢰로 경기도와 인천의 독립운동 및 6·25전쟁 사적지 실태를 조사한 바 있다. 경기도 화성시만 하더라도 3·1운동 사적지가 100여개 되나, 이미 상당수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3·1운동의 경우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우리가 사는 마을 안의 특정한 집에서

  • 正祖 탄신일에 월가 시위를 생각하다

    正祖 탄신일에 월가 시위를 생각하다 지면기사

    어제(음력 9월 22일)가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의 탄신일이었다. 오전에 수업을 마치고 수원 화성행궁과 함께 자리잡은 화령전에 가서 정조 어진에 참배했다. 백성을 위한 개혁군주 정조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한 이후부터 항상 탄신일에 참배를 했는데 이번 참배과정에서 느끼는 소회는 예전과 조금 달랐다. 왜냐하면 오늘날 세상이 과연 정조가 생각하고 있던 백성의 나라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그 이유는 최근에 전 세계에 빅 이슈가 된 미국 월스트리트가(街)의 시위 때문이었다.자본주의 대표 국가인 미국에서 그것도 자본주의의 상징인 월가에서 벌어진 시위는 가히 허리케인의 전주곡이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월가 중심부를 장악하며 시위를 하고 있지만 이는 아직도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아마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태풍의 핵을 드러내며 세계 경제사 및 문명사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고 본다.이들은 처음엔 구조조정에 의한 강제 퇴직으로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에 분노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본질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본질이란 결국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본가들의 이익만을 위한 정책이었음을 월가에 모이는 국민들이 금방 알게 됐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흡사 자본가 혹은 중산층이었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고, 자본가들에게 속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결국 1% 자본가들을 위하여 99% 국민들이 희생하고 있다는 현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그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살아났음에도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못된 행동을 하고 있는 금융자본가들을 비롯 1% 자본가들에게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시장만능주의가 그것이다. 시장은 스스로 성장하고 운영되니 정부는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시장에 대한 정보의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들 금융자본은 과도한 이익을 얻고 싶은 욕심에 파생상품을 남발하다 결국 붕괴직전까지 갔다. 이런 위기에서 그들이 꺼낸 것은 바로 정부가 금융자본을 도와주어야만이 나라 경제가 흔

  • 아름다운 노년과 참교육

    아름다운 노년과 참교육 지면기사

    1960년대, 건조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었던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김승옥의 '무진기행'은 안개 낀 무진(霧津)으로 상징되는 몽환적 이미지로 마음 깊이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애초에 무진시의 모든 사물들은 안개의 품속에서 용해되어 실체를 상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해무(海霧)가 밀려드는 무진시, "거대한 흰 짐승이 바다로 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발을 성큼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 왔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선 사층짜리 석조건물 자애(慈愛)학원도 그렇게 안개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무진을 배경으로 한 소설 '도가니'의 첫 장면이다. 의미심장하게도 '거대한 흰 짐승'으로 상징되는 안개는 더이상 몽환적이거나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며 야수적인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서 안개는 그로 부터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운명의 그물같은 것일게다. "철길가에는 때이르게 피어난 코스모스 무리가 창백하고 불안하게 그 안개의 그물에 덮인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심히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주일예배에서 "어둠이 한번도 빛을 이긴 적이 없다"는 성경 말씀이 들리지만 말씀이 봉독되는 중에도 안개가 무섭게 주변 세계를 빨아들이고 있으니 그것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공포의 어둠이다. '빛이 어둠을 한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선과 악의 전도된 역학 구조가 전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도가니'는 기본적으로 장애아에 대한 성폭력, 더 근본적으로는 인권 유린의 문제, 강자와 약자의 힘의 논리, 사회적·윤리적 무감각, 정부의 안이한 대처 등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복지재단 운영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안인, 일명 '도가니법'이 발의될 예정이라고도 한다. 헤어날 길 없는 운명의 그물속에 갇혀버린 장애아들에게 인간 본연의 정체성을 되찾아주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철저한 법제화와 우리 모두의 각성된 의식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참 교육이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립학교잖아. 이사장 집안하고 연줄만 있으면

  • 올 가을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올 가을 낮은 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 지면기사

    가을은 정녕 모순의 계절인가. 단풍 숲의 찬란한 장관은 바람에 맥없이 날리는 낙엽과 공존한다. 인생의 깊이를 아려 사색의 저편에는, 삶의 덧없음을 깨우치는 우수(憂愁)도 함께 깃든다. 단풍 빛에 취한 산행의 잰 걸음도 숲이 앙상한 가지로 변할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느린 걸음으로 한껏 원숙해지고 넉넉해진다. 수확의 기쁨과 쇠락의 쓸쓸함이 불변의 진리처럼 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가을, 참 모순덩어리다.올 가을, 모순의 현주소가 우리 사회를 마구 뒤흔들고 있다. 영화와 소설 '도가니'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설움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성폭력 피해자인 청각 장애우들은 오늘도 지워지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는데, 가해자들은 온전하다. 수화로 세상에 소리쳤으나, 사회는 애써 외면해 버렸다. '멀쩡한 사람들도 당하고 사는 데…'라는 집단 심리의 작동이었다. 그 사이, 고소 취하와 합의의 이름으로 가해 교사들은 법망의 그물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분노와 절망은 그들만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됐다. 힘 있는 사람들의 선의가 얼마나 큰 부조리와 타락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를 우리는 목도하게 된다. 부정은 아름아름으로 베푼 작은 선의들이 쌓인 자리에서 웃자라나는 것임을 다시금 보여준다.그 와중에 우리는 '짜장면 천사' 김우수씨를 떠나보내야만 했다. 미혼모의 아이로 태어나 5년 동안 고아원에서 살다가 겨우 12살 때 거친 세상으로 나왔다. 몸 한 번 뒤척이기 힘든 1.5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살면서 다섯 아이를 후원해왔다고 한다. '철가방'으로 불리는 짜장면 배달 일로 한 달에 70만원을 벌면서도, 더 어려운 아이들을 잊지 않은 것이다. 아마 자신의 불우했던 유년을 나눔으로 위로받고 치유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는지. 하얀 헬멧을 쓰고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영정 사진은 우리 스스로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한 여학생이 쓴 '다시 만나면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라는 마지막 편지는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꿈의 상실이었다.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제 3지대의 '안철수 바람'은 또 어떤가. 견

  • 인문학 도시 수원의 당위와 미래

    인문학 도시 수원의 당위와 미래 지면기사

    벌써 2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홍경래 난'이라 불리는 백성들의 투쟁이 1811년에 일어났으니 올해가 꼭 200년이 되는 해이다. 홍경래의 거사에 대해 여러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을 백성답게 대하지 않은 것이 그 결정적 원인이었다.아무리 전근대 사회라 하더라도 인간에 대한 폭압과 착취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요,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고 그도 모자라 인간이 누려야할 권리를 빼앗았기에 끝내 백성들은 봉기의 깃발을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홍경래의 거사 200주년을 생각하면서 수원을 돌아보았다. 수원은 과연 어떠한가? 과연 수원은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는가? 또한 수원은 시민을 보다 평화롭게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사회로 만들 것인가?민선시대가 시작되면서 시정을 이끌어가는 분들은 대부분 시민과 함께 하겠다는 구호를 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구호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당시 시대의 요구로 인해 시민의 삶을 중심으로 구호를 내세우지만 그러나 그것은 단지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결국 "부자되세요~"라는 텔레비전 광고에 따라 온 나라가 돈벌기 열풍에 휩쓸리기도 했다. '돈'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보다 중요한 시대였고, '인간'을 이야기하는 인간은 단군신화의 시대에 사는 고루한 인간으로 매도됐다. '인간'이 가장 중요한데 '인간'은 사라지고 오로지 '물질'만이 권능의 자리에서 호령하는 시대가 오늘의 시대였고, 지난 시절 수원만이 아닌 한반도 남쪽 땅 모든 곳에서 "돈, 돈!"하는 소리가 메아리로 퍼져 나갔다. 그런데 수원에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사람이 반갑습니다'라는 시정 구호를 보는 순간부터 감지했던 일이지만 새로운 시장이 수원을 '인문학의 도시'로 만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천박한 사회에서 다시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겠다는 발상은 너무도 올바른 것이지만 한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구호인가 싶기도 했다.우리 사회가 인간과 인간중심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린지 너무 오래됐다. 개혁군주 정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