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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말에 샤르자 서예 전시회에 간다 지면기사
한국과 이슬람 세계와의 교류가 활발하고, 교류 역사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이슬람 세계와 문화에 대한 이해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다. 지난 일요일 만난 역사학자에게 지금 경기도 미술관에 이슬람 서예 작품과 회화가 전시 중이며, 이 전시를 축하하기 위해 샤르자 국왕이 경기도 박물관을 방문하였다고 하니, 샤르자가 어느 나라 왕 이름이냐고 되물었다. 샤르자는 아라비아 반도 동부에 있는 아랍 에미리트 연방 7개 토후국 중 하나인데, 명색이 역사학자가 샤르자가 왕 이름이 아니라 아랍의 토후국 이름이라는 사실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었다. 서예가 한자 문화권인 한국과 중국, 일본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이들이 많으나, 이슬람 문화에도 서예가 있다. 이슬람 예술에서 서예는 건축 다음으로 중요하다. 동아시아 예술에서 서예는 여러 예술 장르 중의 하나지만, 이슬람 예술에서는 두 번째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신인 알라를 형상화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긴다. 그래서 불교나 크리스트교처럼 신앙의 대상을 조형물로 만들어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슬람 문화권에서 조형 예술이 차지할 자리는 거의 없다. 이슬람 세계에서 서예는 코란을 옮겨 적는 수단이다. 필자가 이슬람 서예를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방문한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에서다. 아야 소피아는 동로마 제국 당시 성 소피아 성당이었으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 지배하에서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되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아야 소피아에 들어가면 중앙 홀 높은 벽 위에 코란 경구가 쓰여 있는 장중하고 우려한 서체의 이슬람 서예가 높이 걸려 있다. 이슬람 서예도 한국의 서예처럼 여러 서체가 있다. 모가 나고 장중한 느낌의 쿠파체, 둥그스름하고 유려한 나스히체가 있다. 나스히체는 작은 코란을 베끼는데 사용된다. 술루스체도 있는데 이는 건물의 비문에 사용되었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코란을 베끼는 종교적 행위의 하나로 서예를 한다. 그러나 명상을 즐기거나 취미 생활로 서예를 즐기는 이들도 많다. 이 점은 서예를 정신 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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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시대와 인간적 서정 지면기사
9월 4일 김달진 문학제 국제시낭송회가 창원시 진해, 시인의 생가 앞마당에서 열렸다. 마당을 들어서자 하얀 깃발들이 하객을 맞이하듯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돌담을 죽 돌아 올해 수상한 시인들을 포함해 그간 수상한 시인들의 대표작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소곤대고 있는 것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자연스럽게 탑돌이 하듯 돌담을 돌며 깃발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작년부터는 창원KC국제시문학상도 제정되어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최고의 시인들도 만날 수 있었다.축제가 시작되자 프랑스, 일본, 중국, 몽골 등지에서 온 각국의 시인들이 자국의 언어로 시를 낭송하기 시작한다. 마치 귀 기울이면, 언어는 잘 알 수 없지만, 무슨 말인지 좀 알아들을 수 있기나 한 것처럼 모두가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고 있어 분위기는 조용하다 못해 숙연하기까지 하다. 각국의 대표 시인들이 낭송을 끝내면 참으로 감동을 받은 듯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낸다. 프랑스어나 일본어, 중국어, 몽골어 등을 아는 사람들도 꽤 있을 수 있다.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잘 할 수 있는 원로 시인들도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 프랑스어는 학부 시절에 공부한 바 있어 한마디 한마디가 추억의 미로를 걷듯 과거의 기억을 불러오기까지 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언어로 시를 낭송하는데도 모두가 열광하고 일제히 감동과 환희의, 때로는 한숨 섞인 박수를 쏟아내는 것이다. 이 미스터리의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올해 창원KC국제시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시인 끌로드 무샤르는 유독 '소통'에 의미를 두어, 시란 "세상에 대한 열정"이고, 그런 까닭에 "나와 세상 간에는 '함께-사이에'라는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속삭인다. 무엇을 구태여 이해시키려 하지도 않았고, 의미를 전달하려 애쓰지 않았음에도 그날의 그 시들은 그대로 존재하면서 마당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공감을 절실히 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과 진정성이 전제되고 소통과 공감을 원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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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서 정치가 배워야 할 것 지면기사
내일이면 백로(白露)다. 늦더위가 맹위를 떨치더니, 아침 저녁으로 성깃성깃 차가움이 느껴진다. 여름 내내 쏟아진 비를 지켜보면서 '올 더위는 끝났다' 싶었던 게 얼마 전이다. 그 두 달 사이에, 장대비에서 늦더위를 거쳐 이제 서리가 목전이다. 올 고추 농사는 금값이라는데, 고추밭도 서리를 맞으면 흐물흐물 녹아내려 못쓰게 된다. 사람의 삶도 여기에서 한 발짝도 비켜설 수 없다. 정치라고 별것이겠는가.올 가을은 묘하게 정치와 함께 시작되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사퇴하면서 생긴 정치 공간이 말 그대로 난마다. 으르렁거리는 품새들도 예사롭지 않다. 곽노현 교육감 진퇴 문제까지 겹쳐 얽히고 설킨 방정식이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김문수 경기지사의 대권가도에는 일단 빨간 불이 켜졌다. 서울시장 보선에 380억원이 드는데, 김 지사마저 대권 도전을 위해 지사직을 내놓는 게 쉽지 않다. 여권에 비난이 쏟아질 게 뻔하다. 경기지사직을 유지한 채 경선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마나한 싸움이 될 것이다. 비장함과 결기가 뚝 떨어짐에랴.박근혜 전 대표의 선택도 여의치 않다. 사실 지난 주민투표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정치인이 박 전 대표다.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수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는 터다, 지지율 하락이 그 반증이다. 그러나 만약 지원에 나섰더라면, 아마 지금쯤 '박근혜 대세론'은 위기에 봉착해 있을 공산이 크다. 정치가 지닌 속성상, 가만히 놓아두었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10월 서울시장 보선의 짜임새도 심상치 않다. 자칫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가능성 마저 배제할 수 없다. 민심의 파고는 언제나 거칠고, 변화무쌍하지 않은가.손학규 대표라고 해서 여유로운 것은 아니다. 당내 경선을 치르고도 후보를 내지 못하는 기묘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야권 통합의 주체가 아니라, 여럿 중 하나로의 자리매김이다. 지난 김해을 보선의 재판이 된다면, 전통 지지층의 비판이 거세질 것이다. 박원순 변호사가 진보성향이긴 하나, 무소속 출마가 확실해 보인다. 손 대표로서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후보조차 내지 못하면 누가 야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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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바로알기, 연천의 미래를 바꾼다 지면기사
동두천역에서 출발하는 경원선을 타고 연천으로 들어서다보면 너른 들판과 개천들이 한 폭의 그림같다. 동두천 일대의 미군기지와 여타의 군부대들이 아직도 한반도의 냉전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긴 하지만 그래도 한강 북부지역의 아름다움은 감동이었다.경원선을 타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연천군청의 요청으로 연천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기 위해서였다. 연천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필자가 연천을 가게 된 것은 어찌보면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천과의 인연은 우리 산천과 문화유산 답사를 좋아해 연천 일대를 꽤나 많이 돌아다니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다보니 연천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 미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우연한 자리에서 지인들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하다가 연천군청의 강의 요청을 받게 됐다.연천군청이 필자를 포함해 '연천군 바로알기'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은 새로운 시대의 연천을 만들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한편으로는 경기도의 대부분 지자체들이 날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연천이 소외되고 있다는 안타까움 때문에 현지에서 근무하는 공직자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 공직자들의 의식과 변화는 지역의 발전과 절대 무관할 수 없다. 필자가 지금은 대학에 근무하지만 몇 달 전까지 수원시청에 소속된 공직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지역이 변하기 위해서 공직자가 변해야 하고 공직자가 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시작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듯이 자기가 사랑하는 지역의 발전을 위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그 이전과 달리 더욱 헌신하며 공직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주 단순한 논리인 것 같지만 실제 이는 대단한 역할을 하게 된다.연천의 역사와 문화 강의 내용에서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라 짧은 소견으로 연천의 미래 역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천은 엄청난 미래가 예고되고 있다. 연천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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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에서 뱀은 친숙한 존재였다 지면기사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그동안 미루어왔던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를 다녀왔다. 앙코르 와트는 19세기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밀림 속에서 발견한 유적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앙코르 와트로 떠나면서 궁금했던 것은 그 위대했던 문명이 어떻게 한 순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는가, 그리고 비록 폐허가 되었겠지만 꽤 큰 도시인데 외국인에게 발견될 때까지 사람이 전혀 살고 있지 않았을까 였다. 앙코르 와트 유적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15세기이다. 앙코르 와트 유적 주인공은 앙코르 왕국이다. 왕국은 9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번창하였으며, 앙코르 왕국의 대표적 유적인 앙코르 와트는 1113년부터 1150년까지 3만명의 기술자가 참여하여 만든 거대한 사원이다. 해자를 포함한 동서의 길이는 1천500m, 남북은 1천300m이며 넓이는 210㏊로 약 198만㎡에 달한다. 사원 주위에 해자가 있어 앙코르 와트 사원은 거대한 저수지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전성기 앙코르 왕국의 인구는 100여만명에 달하였다 한다. 1432년 앙코르 왕국은 이웃한 타이 시암족의 침략을 받았다. 시암 족은 앙코르 왕국의 무희 압사라와 왕국의 신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고, 사원을 포함하여 도시 시설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남아 있던 앙코르 왕국 사람들은 수리 시설이 파괴되어 더 이상 이곳에서 살 수가 없어 앙코르를 떠났고, 앙코르 유적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프랑스가 캄보디아를 침략하던 19세기에 프랑스 박물관학자가 이곳을 찾았다. 이 때 앙코르 유적 주변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프랑스 박물학자는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앙코르 와트를 조사한 후 앙코르 와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프랑스 박물학자가 앙코르 와트를 세상에 알린 것은 맞으나 그가 발견했다는 것은 잘못된 표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살고 있는 아메리카 대륙을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으로 서술한 세계사 교과서가 생각났다. 앙코르 와트에 대한 의문을 해결한 후 편안한 마음으로 앙코르 와트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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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표기와 작은 풀꽃 지면기사
국내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인체의 곡선에 대한 한국인 특유의 섬세한 이해와 해석을 주무기로 한 한국 디자이너들의 독창적인 행보는 한류열풍에 새로운 불을 지펴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한류열풍이 뜨거운 다른 한 편에는 반(反)한류의 차가운 물결도 거세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류열풍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일본 도쿄에서 극우파들이 주도하는, 한류 드라마 방영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트위터에서는 반한류를 외치면서 한류 드라마를 비판하는 논쟁이 뜨겁다.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미묘한 역학적 메커니즘이 작용하고 있기는 하겠지만 이는 우리에게 한류열풍에 대해 반성을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과 영국이 세계지도 제작의 표준이 되는 해도(海圖)를 만드는 곳인 국제수로기구(IHO)에 동해(East Sea)를 일본해(Sea of Japan)로 단독 표기하는 것을 지지하는 서한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어 미 국무부는 9일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일본해'를 사용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이 82년간 유지해 온 '일본해' 표기의 기득권을 바꾸기 위해 그간 우리 정부가 제대로 노력해 왔는지 의심하는 눈길이 따가운 화살처럼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는 18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서 발간된 세계지명사전에 동해를 '한국해'(Sea of Corea)로 표기한 중요한 역사적 문헌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기고 난 다음에야 야단스럽게 소동을 벌이는 한국식 대응을 반성적으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7월 15일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퇴계학회에 참석한 바 있다. 21세기에 무슨 16세기의 고전적 학자 퇴계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필자 역시 퇴계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는 퇴계가 지닌 현대적인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퇴계학 국제학술대회'가 열린 지 30년을 넘기면서 일본, 대만,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홍콩 등의 세계적 학자들이 대거 퇴계학에 관심을 가지자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 사상의 핵심은 일차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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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과 김문수 지면기사
정치적 라이벌 사이에는 묘한 감정이 얽혀 있다. 일반인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앙금 같은 것, 자기는 갖지 못한 특장에 대한 부러움과 시기, 끝없는 견제…. 이런 것들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기 마련이다. 범부들의 눈높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복합적 관계이다. 죽음의 시간 까지 경쟁했던 미 대통령 애덤스와 제퍼슨, 우리의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도 라이벌군에 속한다. 한국정치를 30년 넘게 재단했던 YS와 DJ 역시 대표적인 라이벌 관계였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을 역임했지만, 경쟁과 협력을 반복해온 두 사람의 정치역정을 긍정과 부정, 어느 한쪽으로만 평가하긴 어렵다.송영길 인천시장이 어느 인터뷰에서 라이벌로 '오세훈 서울시장과 원희룡 의원'을 꼽은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정치 여건상 그럴 가능성은 열려 있다. 그러나 라이벌은 말로, 희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라이벌, 그 자체가 역사적 맥락이고 궤적이다. 나이와 정치적 위상, 야망이 엇비슷하다고 해서 라이벌이 될 수는 없다. 그건 전당대회장에서 격돌하는 한 때의 경쟁관계일 뿐이다.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까지는 못된다. 라이벌은 오랜 시간 정치 현장에서 함께 하고, 오랜 기간 국민의 희망이어야 한다.오세훈 서울시장과 김문수 경기지사는 정치적 라이벌이 될 수 있을까. 긴 정치적 경쟁과 협력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조건은 좋다. 사법고시를 거쳐 잘나가는 변호사 출신으로 정치권의 영입 대상 1호였던 오 시장은 흔히 말하는 '꽃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젊은 날, 노동운동으로 옥고까지 치르고 민중당을 거친 김 지사는 말 그대로 '가시밭길' 인생에 가깝다. 96년 15대 총선 때 YS에 의해 나란히 국회에 입성했고, 같은 모임에서 활동도 했다. 여야가 사활을 걸고 싸우는 서울시장과 경기지사의 정치적 파괴력이 어디 여느 보통 자리와 같은가. 대중성과 단박에 주자로 도약할 정치적 위상을 어느 정도 갖췄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은 수도권을 대표하고, 또 한 사람은 대구·경북 출신으로 수도권에 둥지를 틀고 있는 점도 맞수로서 호조건이다. 50대 초반과 후반으로 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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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영혼의 눈물과 우리의 죽음 지면기사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100년 만의 폭우라고. 대통령도 그렇게 이야기하셨단다. 내가 서울에 53년을 살면서 이렇게 비가 내린 것은 처음이라고. 맞다. 100년 만에 가장 많이 내린 비이기도 하고, 근 반세기만에 서울에서 내린 가장 많은 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내렸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환경론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변동으로 한반도가 아열대지대로 변하고 있어 장마가 아닌 우기의 시대가 와서 비가 많이 온 것이라고 할 것이다. 아니 실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이 아닌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이렇게 엄청난 비가 내린 것은 우리들의 생명에 대한 무관심과 천대 때문이다. 이 끊임없이 흐르는 비의 정체는 눈물이었다. 속절없이 죽음에 이른 수많은 생명들의 저주의 눈물이었다. 그들의 영혼이 구천에서 떠돌다가 마침내 분노와 슬픔을 드러내며 미친 듯 울고만 눈물이 바로 이 비였다.2011년 한반도는 근 100년 만에 가장 끔찍한 일이 발생하였다. 올해 초에 발생한 구제역으로 인해 무려 600만 마리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되어 인간이 파놓은 거대한 구덩이에 매몰되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쳤다. 구제역에 걸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인간의 육식에 대한 욕망이 그들의 자유를 속박하고 우리에 가두어 비정상적인 음식을 먹게 했기에 구제역이 발생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에 이른 것이다.그들을 구덩이로 몰아넣을 때 최소한의 양심도 없었다. 마취제라도 맞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죽은 그들은 차라리 나은 죽음이었다. 그런데 가축 마취제가 떨어졌다고 그냥 구덩이에 묻혀진 생명체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생명체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우리가 이런 악독한 인간들이 아니었는데 그런 일을 하고 말았다.우리 민족은 정말 생명을 소중히 여겼다. 과거 백정들이 소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스님이 오셔서 독경을 하고 염불을 외었다. 마을 사람들은 소를 그저 농사일을 도와주는 가축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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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부활과 수원의 미래 지면기사
나혜석의 생가 터가 있는 수원 행궁동 동사무소 강당에서 지난 22일 오후 제1회 나혜석 학술상 시상식이 열렸다.그는 1896년 4월 수원에서 태어나 1913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한 조선 최초의 여성 화가였으며 1917년 단편소설 '경희'를 발표한 최초의 여성 작가이기도 했다.1919년 3월 조선독립운동 당시에는 여기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는 생의 전반부에는 조선 최고의 명망가였다. 그러나 1930년 남편과 이혼한 이후 그의 삶은 비극적이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비참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특히 그가 1934년 발표한 '이혼 고백장'은 당시 조선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반향을 불러일으킨 일대 사건이었으며 정조를 유린한 대가를 요구한 '위자료 청구사건'은 사회적 관습에 굴하지 않는 그의 불꽃 같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는 파격적인 일이었다.나혜석의 찬란한 예술적 성취는 그가 불러일으킨 파란과 비참한 몰락으로 인해 망각의 저 편으로 사라져갈 위기에 처해 있었다.망각의 어둠 속에서 나혜석의 삶과 예술을 최초로 부활시킨 것이 이번 학술상에서 특별상을 수상한 이구열 선생의 평전 '에미는 선각였느니라'였다. 1974년 간행된 이 책은 나혜석에 대한 본격적인 평전으로서 이후 나혜석 연구의 길잡이가 되었다.이후 나혜석은 불사조처럼 다시 태어나 그가 생전에 염원했던 것처럼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나혜석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혼재하던 시기에 이번 최우수 학술상 수상자인 서정자 교수는 작가로서 나혜석의 작품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선구적 업적을 축적했다.서 교수는 1988년 처음 나혜석의 단편 소설 '경희'를 발굴한 것은 물론 그의 문학사적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2000년 나혜석의 예술적 업적을 총망라한 '정월 나혜석전집'을 발간하여 최초의 여성 작가로서 나혜석 연구의 초석을 다졌다. 나혜석의 본격적인 부활은 기념사업회를 이끈 유동준 회장의 열성적인 노력에 힘입고 있지만 수원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도움이 없었더라면 결코 지금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수원시가 미래지향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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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합(融複合)장르로서의 문학 지면기사
과학기술의 발달이 문화의 흐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문화 분야 전문가들조차도 과학기술의 변화에 둔감하다. 불황과 호황을 동시에 겪고 있는 최근 한국 출판계를 바라보고 있으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종이책 출판계는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 그리고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같은 베스트셀러를 출판한 출판사들도 불황을 비껴가지 못하고 부도를 내고 있다. 출판계는 불황의 첫 번째 원인으로 아이패드, 스마트 폰 같은 IT 기기의 대중화를 꼽고 있다. 그런데 전자 출판은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교보문고의 경우 올해 상반기 전자책 매출은 전년 대비 64% 늘어났다. 지난달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시민을 대상으로 전자책 이용 현황을 조사해 보니 전자책 이용자가 작년에는 조사 대상의 23%였으나 올해에는 51%로 두 배 이상 늘었고, 전자책에 대한 만족도도 58%에서 79%로 크게 늘어났다. 시민들은 만족한 가장 큰 이유로 휴대하기 편리한 아이패드, 갤럭시 탭, 스마트 폰의 출현을 꼽고 있다. 같은 IT 기기의 대중화가 한 쪽에는 불황, 다른 쪽에는 호황을 가져다주었다. 독자들이 휴대하기 편리한 단말기가 보급되지 못한 점이 전자책이 보급되지 못한 요인이었는데, 스마트 기기의 대중화가 이 불편을 해소해 주었다종이책 출판의 불황과 전자책 출판의 호황은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2000년 전후 디지털 미디어가 등장하면서 많은 이들은 신문, 책과 같은 인쇄매체가 사라지고 인터넷 신문, 전자책과 같은 디지털 매체 시대가 올 것으로 예견하였다. 그러나 인쇄 매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주요 매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자 이러한 예견은 잘못된 예견으로 치부되었다. 2007년 아마존 닷컴이 킨들이라는 휴대용 전자책 단말기를 출시하면서 미국에서는 전자책이 빠른 속도로 공급되기 시작하고, 한국에서 스마트 폰이 출시되어 스마트 기기의 대중화가 시간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에도 출판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전자책 시대가 도래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